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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만4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 국토의 약탈과 국민생활 제재(制裁) 일본은 노일전쟁 전에 거제도 일대(송진포松津浦 / 원문에는 송포진)를 근거로 어업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중 일본 대노국(對露國)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적 근거지로 획정하여 우리 국민들의 가옥을 철거하게 하고 전답을 점령하였다. 광무 8년 9월에 그들은 소위 해군 방위대 본부를 거제군 송진포에 두고 우리 정부와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대일본 가근거지(假根據地) 방비대 군령을 공포(광무 8년 9월 27일 감시 보고 제58호에 의거)하고 우리 국민의 생활에 제재를 가하였다. 방비대 군령 대일본 해군 방비대 사령관이 군대를 안전케 보지(保持)함을 위하여 각하(刻下)에 긴급한 좌개군령(左開軍令)을 제정하여 지실(知悉)게 하니 이등(爾等).. 2017. 1. 30.
김형윤의 <마산야화> - 23. 203고지의 거포, 24. 돝섬의 위장 적기 23. 203고지의 거포(巨砲) 마산 신사(현 제일여중·고) 정문 앞 공지에 녹슨 대포 일문(一門)이 거치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해방된 몇해 안가서 포대와 동시에 흔적이 없다. 이 대포는 1904년에 발발한 일로(日露)전쟁시 일본 최고의 군벌인 대산(大山), 내목(乃木) 등 원수급에 의하여 일본 조병창에서 건조, 군함으로 여순항에 인양하여 격전장이던 203고지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마산만 입구이며 중포병 대대 입구 까치나루(鵲津) 산정에 두었다가 1935년 대대장이던 굴구중좌(掘口中佐)가 마산부에 기증하였던 바, 부 당국은 이것을 전기 장소에 이전 거치함으로써 마산만을 일모(一眸)에 보고 일본의 군국주의 사상을 환기했던 것인데, 그대로 보존해 두어서 하등 해될 것도.. 2015. 6.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당시 마산전경사진입니다. 현 대우백화점과 삼익아파트 일대에 매립을 하기 전이라 해안선이 환주산 밑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고, 신마산과 마산포 사이의 옛 마산시청부터 몽고정까지는 전부 논밭입니다. 왼쪽에 문신미술관이 있는 환주산을 시작으로 멀리 용마산과 팔용산 자락이 차례로 보입니다. 환주산과 용마산 사이에 있는 마을이 마산포이고, 산 능선 중 잘룩 들어간 곳이 현재 봉암다리가 있는 곳입니다. 매립 전이라 마산만이 꽤 넓습니다. 1911년 새해벽두부터 개항지였던 마산항이 폐쇄되긴 했지만, 식민지의 통치와 수탈에 필요한 선박에 대해서는 세관장의 특별허가라는 명목으로 선박의 출입항을 허용했습니다. 따라서 식민지 수탈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 선박은 개항기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통계상으로는 오히려 .. 2011. 6.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 - 개항기 오늘부터 개항기 때 제작된 마산지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지도의 기본정보 표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는 지도의 제목이며 제목 아래에 표기한 것이 지도의 기본 정보입니다. 표기 순서는「제작연도 / 제작자 / 발행처 / 축척 / 수록처 / 소장처」순입니다. 기록이 불가능한 부분은 해당 칸을 비워「/ /」로 표기하는데 지도제목이 동일한 경우에는 지도명칭 뒤에「*, **, ***」를 붙여 구분하겠습니다. 1899년 / 上野亮 外 / 일본해군 / 1 : 49,054 / / 일본국회도서관 일제는 일찍부터 마산을 자신의 식민지 주요 거점으로 눈독 들여왔었습니다. 그러므로 원산․부산 등과 마찬가지로 마산지역의 측량과 지도제작도 진작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도는 일제가 침략을 목적으로 한반도를 측량하기 시작한 직후 제작된 것입.. 2010. 8.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