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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7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한평 없어 어차피 얻은 구장집 머슴자리 지켜 새경 모은 것으로 동네 가난한 처자와 눈맞추어 토백이처럼 산 김씨 같은 사람도 있었다. 또, 부두노동으로 돈 모아 논밭 사둔 것이 나중에 개발되어 알부자 소리를 들은 천씨 같은 사람도 있고, 개울가 움막 같은 초가에 살았던 박씨처럼 어설픈 재인 노릇하다 결국 좀도둑으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마감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가며 난민생활을 하는 일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 2018. 3. 26.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기합이라하여 상급생이 하급생들에게 거의 합법적으로 가하는 폭력, 그래서 항상 긴장해야하는 학내외 생활, 동급생끼리나 동네친구 나아가 또래급끼리의 쟁투를 위한 몸과 주먹 단련, 학교끼리의 패싸움으로 인한 모표, 교복 살피기 등등이 일상생활의 상당부분을 지배했던 것이다. 군사교육 강화로 인한 계급의식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한 정적 인간관계의 매마름이나 자유당정권의 깡패문화 등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며, 반자립적인 사대문화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어쨋든, 딱히 잡히는.. 2018. 3. 19.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사색의 공간’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처음에 지어질 때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출처 - 건축도시연구정보센터 (http://www.auric.or.kr/) 현재의 이 곳은 사람을 피해 사진을 찍는 것이 상당히 까다로운, 또다른 의미의 멋진 정원이 되어 있습니다. '휴식과 사색’ 을 포용하는 좀 더 넓은 기능의 공간이 되어간다는느낌이며, 이러한 느낌은 녹색 지붕의 정원 과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자연스레 생겨납니다. - 수생 식물원 녹색 기둥의 정원을 돌아나와 도달하는 곳, .. 2018. 3. 15.
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마치는 행사였으며, 선수 수는 30명, 경기 시간은 30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술한 바처럼, 청수(淸水)들판 오른쪽 동네(봉덕동, 봉암2동)와 봉암다리쪽 동네(봉암동, 봉암1동)를 시에서 떼었다 붙였다 하는 통에, 한 팀이 되었다 분리되었다 했지만, 성적은 분리되었을 때의 성적이 훨씬 좋았다. 여러 번 우승한 것도 그때였다. 그때 우리 동네는 비록 떨어졌어도 한동네라는 의식이 강했기에 함께 모여 응원도 하고 밥과 술도 같이했다. 아침 일찍부터 운동장 군데군데에 각 동의 선수와 응.. 2018. 3. 12.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1 서울 한강변의 대표적 공원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 중에 선유도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유도 공원이 생태공원으로 개관한 것은 2002년 4월 26일, 햇수로 16년째 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엔 어땠을까요? 겸재 정선, 선유봉, 1742, 비단에 채색. 출처 - blog.naver.com/pfloyd56/90008180704 선유도는 원래 '선유봉' 이라는, 40m 높이의 아담한 바위산 이었습니다. 신선이 노닐던 봉우리 라고 이름이 붙여질 만큼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한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는 명소 중의 하나였던 선유봉은 1925년 큰 홍수 이후 한강의 제.. 2018. 3. 8.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같은 데에 담아 팔았고 대팻날 같은 데에 얼음덩이를 올려 즉석에서 갈아 팥, 향료, 설탕 등을 얹어 주던 빙수는 접시나 사발에 담아 팔았었다. 거기에 비해 아이스케키는 공장을 두어 제조했고, 보온 질통에 넣어 거리에 다니면서 파는 아이들이 마산에만도 이백 명이 넘을 정도로 판매규모가 방대했었다. 한편으론 어려운 집들의 청소년들이 학업도 포기해가면서 다투어 나섰기 때문에 더 붐이 일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당시 도심 거리에 나가면 여기서 아이스케키! 저기서 께에끼! 그러다 한.. 2018. 3. 5.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바닥을 보았다.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민얼굴이기도 했다. 내내 참담했고 암울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도시개발로 버림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한과 눈물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성남시가 된 광주대단지 철거민의 실상(1971)이 가장 먼저 터진 사건이었다. 압권은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6)’이었다. 영희의 다섯 가족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개발독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이었다. ‘난쏘공’이라 부르며 숨어서 읽었던 불온서적(?)이기도 .. 2018.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