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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3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3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주거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구분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나 형태를 규제하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있었다. 신라의 가사규제인 옥사조(屋舍條)와 가장 큰 차이는 택지 규모에 제한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주택은 산악과 구릉이 많은 자연환경과 최대한 조화를 이루는 특징을 갖는데, 상류층의 주택은 기후가 구조에 영향을 적게 미쳤으나 서민주택의 경우 북쪽지방은 보온을 위한 겹집구조와 온돌이, 남쪽지방은 바람이 잘 통하는 홑집구조와 마루가 발달하였다. 반가(班家)라 부르는 양반의 주택은 지역적 특성보다 지배계층으로서의 권위와 유학자로서의 성리학적 규범에 따른 생활방식 등이 중요 요소로 고려되었.. 2018. 4. 3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지표로 해석된다. 구들은 추운 북쪽 지방에서 먼저 발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경남에서도 초기철기시대 의 구들유적이 출토되었다. 사천시의 늑도에서 발굴된 주거지에 보이는 구들유적이 그것이다. 이 구들유적은 온난한 한반도 남단의 경남 해안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삼한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늑도의 구들유적은 타원형의 주거지 내부에 아궁이 시설을 만들고 외벽을 따라 외줄의 구들 고래를 시설한 것으로, 구들 고래의 끝에서 집 밖으로 연기가 배출되도록 .. 2018. 4. 23.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경남은 서북쪽은 소백산맥, 동남쪽은 바다에 면합니다. 기후는 전반적으로 대륙성기후라고 볼 수 있지만 바다와 가까운 지역은 해양의 영향도 많이 받습니다. 기온은 동남 해안에서 서북 내륙으로 가면서 낮아지며 연 평균 강수량도 이와 비슷합니다. 경남 주거문화의 형성과 발전은 이와 같은 자연적 특성의 산물이며 그 궤적은 경남지역의 역사 및 문화 발전과 같이 해왔습니다. 글은 시기에 따라 다섯 항목으로 나누었습니다. 1)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3) 해방이후부터 제4공화국(197.. 2018. 4. 16.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리가 극장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상영을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장내마이크에서 ‘지금 밖이 시끄러우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들려왔다. 관객들이 욕설 섞어 돈(입장료)내놔라’고 고함친 것은 당연한데, 그것도 잠시, 갑자기 극장 전체에 불이 나가버렸다. 그때서야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관객들이 아우성을 치고 밟고 밟히며 밖으로 나왔는데, 손을 꼭 잡고 나온 우리 둘이, 극장 문 앞에서 주로 아래쪽으로 밀려가는 사람들 따라 가다가, 남성동파출소 쪽의 상황을 보고는 대강이.. 2018. 4. 9.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길었고, 나머지 대부분도 자유당 각료들과 국회의원들 이야기였으며, 조병옥, 장면 등 야당정치인 몇명의 이름도 본 것 같다. 거기에 이용범도 올라있는 걸 기억하는 건 당시 그의 이름이 마산 창원을 통털어 가장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뭐,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데 많이 쓰는 신사정치인’ 정도 내용이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여당에 오히려 누가 될 ‘희작’이 되었겠지만, 그때 나의 머리엔 그런 인식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거기엔 여당성향의 우리집.. 2018. 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