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1912) - 25. 사적(史蹟)
25. 사적(史蹟)
여기 진해만에 군항을 설치하기로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천연의 형승(지세나 풍경이 뛰어나거나 지세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을 점하고 있을뿐더러 옛 적부터 해군 근거지로 가장 합당하다는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천연의 형승을 점해 사적이 풍부한 그러한 땅은 세계 어느 곳과도 비길만한 데가 없는 것이다.
지금 만내 마산포를 서쪽이나 동쪽 방향으로 나가면 거제, 가덕, 한산이란 여러 섬들이 그 앞에 누워져 있음으로써 자연적인 항문(港門, 항구의 입구)을 이루며, 서북쪽은 바로 통영반도에 이어져 동남쪽은 저 멀리 부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 번 거슬러 가서 진해만의 역사를 찾아보자.
진구황후(神功皇后, 이름은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미코노, 오시타라노미코토로 전하며, 201년부터 269년까지 섭정했다고 함)의 삼한정벌(三韓征伐, 고대 일본의 진구황후가 신라에 군대를 보내 정복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삼한정벌설), 원나라 전쟁(두 번에 걸쳐 중국 원나라 군대가 규슈(九州)를 침공했으나 실패로 끝남. 1274년~1281년), 삼포왜란(三浦倭亂, 조선 중종 5년 1510년 4월 삼포에서 일어난 일본 거류민들의 폭동 사건), 임진정유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 6대 전역(戰役, 국가 간에 또는 규모가 큰 단체 간에 서로 무력을 사용하여 싸우는 일)은 우리나라 역사 이래 대전역일 뿐더러, 러일 전쟁은 실제로 세계 15대 전사의 첫 쪽을 장식할 우리 제국의 자랑으로 삼아야 할 대성공을 이룩해 낸 것이다.
독자 여러분이 소생이 각 전역에 관해 좀 더 말하기를 막지 말았으면 한다.
진구황후가 정한전쟁의 용병지리를 곰곰이 생각을 하여, 다케우치 수쿠네(竹內宿稱) 및 주신(中臣)인 도리소쿠쓰(鳥賊津の連)의 후지하라조(藤原の祖), 오오미와노 오오토모노누시(大三輪の大友主 이즈모의 오오쿠니노미코토의 후손), 모노베의 이쿠히노무라지(物部の膽日連), 오오토모노타케모치노무라지(大件の武以連)는 진구황후 직속 본대로서 쓰시마의 와니우라(鰐浦)에서 똑바로 영일만에 진군하고, 오오하타 누시노미코토(大幡主命)는 별동부대를 이끌고 와니우라에서 항로로 웅포(熊浦)에 상륙해, 굴자군(지금의 창원), 구사우라(久斯宇羅, 지금의 마산), 진해고자군(鎭海古自郡) 즉 임나의 소지금의 가량국(小加良國)인 지금의 고성을 거쳐, 안라국(지금의 함안으로 아라일본부소재지)을 평정하여 더 북진해서 남가라(지금의 창녕)를 항복시켜 그 후에 다라국(지금의 합천), 대가라국(지금의 영산), 성산가라국(지금의 성주) 각지를 석권하여 나아가 탁순국(지금의 대구)에 들어가 동쪽으로 가서 상나무국(지금의 영천)에 진입해 신라 왕성인 월성(지금의 경주) 후면에 임박해 신라를 위압했다.
그 때문에 신라 병졸이 방어를 위해 출군해서 왕도의 수비가 허전해졌다.
그 때에 진구황후 본대는 영일만에서 깊이 진입해 그 바람에 신라왕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항복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 임나왕국 즉 6가야 여러 나라 군대가 다른 방면에서 작전을 짜 전투를 벌인 결과, 신라는 오랫동안 임나에 종속하게 된 것이다.
당시 임나일본부는 지금의 김해에 그 자리를 두고 있었으며, 진구왕후 정한군 별동부대 상륙지점은 진해만 웅천이었던 것이다.
만내의 마산포는 고려왕조 때는 합포(合浦)라 칭해져 일본과의 교통 상 유일한 기점이 되었으며, 원나라가 우리에게 졌을 때의 함대는 실제 이곳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지금 구마산에 있는 몽고정(아래 사진)은 고안(弘安, 1278-1287) 연간에 몽고군이 파고 쓰던 우물로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고장에서 유일한 좋은 우물로 불리고 있다.
왜구세력이 팔도 연안에서 마음대로 행패를 부렸을 때도 역시 진해만을 근거로 삼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임진정유왜란 당시에 만내의 영등포, 장목포 등은 양국 수군의 쟁점이 되며 당시 우리 육군 제4진의 대장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및 그 자식인 가츠시게(勝茂)는 구마산 북쪽 몇 백미터도 안 되는 곳에 창원성을 세웠는데 지금도 여전히 성지(城址)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명장 이순신은 수군통제영을 현재의 통영에 두고 거북선을 창조해 진해만에 띄워 제해권을 쥐었기에 우리 해군이 고성군 견내량수도 해전에서 적의 술책에 빠져 무참한 패배를 당하게 되었음은 전쟁 전체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청일, 러일이란 두 전쟁에서 우리 해군의 근거지로 했음은 누구나 다 잘 아는 바이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글은 2022년 창원시정연구원이 1910년대와 20년대 진해의 모습을 담은 세 권의 책을 번역하여 하나로 묶어 낸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3권 『근대 문헌 속 진해』 중 『진해』 부분이다. 1912년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스기야마 만타(杉山萬太)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