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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안내』(1915)-2, 제1장 위치 및 지세, 제2장 연혁

운무허정도 2026. 8. 10. 00:00

『마산안내』(1915)-2,  제1장 위치 및 지세, 제2장 연혁

오카 요이치(岡庸一) 저(著) / 마산상업회의소(馬山商業會議所) 대정 4년(1915) 10월 10일 발행

1. 본서(本書)는 시정 5년을 기념해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가 최근 조사한 마산부(馬山府)의 현황을 편집한 것이다.

2. 본서는 마산을 시찰할 외래 손님이나 마산 및 그 부근의 농상공업과 교육, 교통 종교 기타 일반적인 현황을 알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로 편찬된 것이다.

3. 본서는 마산상공회의소 및 시정 5년 기념을 위한 조선물산공진회 마산부협찬회(馬山府協贊會)의 공동사업이다.

4. 본서는 아주 짧은 기간으로 조사 편찬된 것이라 당연히 모자람이 있을 것임을 널리 양해 주시기 바란다.

 

마산부안내(馬山府案內)

 

1. 위치(位置) 및 지세(地勢)

마산부는 조선 경상남도 남부의 중앙에 위치해 동경 128도 30분에서 128도 40분에 이르며 북위 35도 8분부터 35도 7분까지이다.

동쪽에는 우뚝 솟은 천자봉(天子峰), 증봉(甑峯), 장벽산(張壁山)이란 연봉이 있어서 창원, 김해 두 군에 접한다.

서북쪽은 무학(舞鶴), 반룡(盤龍), 고운대(孤雲臺) 등 기봉영악(奇峰靈岳)이 꼬불꼬불 이어져 솟아 함안, 고성, 창원 등의 여러 군에 걸치면서 드넓고 푸른 진해만을 안으며 거제도로 통한다.

면적은 약 1방리(方里)이다.

지세는 동북서(東北西) 삼방(三方)이 거의 산악에 의해 둘러싸여 특히 태백산맥에 속하는 낙동(洛東), 대곡(大谷), 석남(石南)이란 지맥(支脈)들이 중첩되어 기복을 이루며 마산부의 배면[脊面]까지 이어져 바다에서 그 모습을 감춘다.

남쪽은 마산만이며 산속의 호수와 같다. 앞에 저도(猪島)란 작은 섬이 있다. 만수(灣水)에는 두 줄기가 있으며 하나는 신마산 쪽으로 달리며 하나는 구마산 쪽으로 달려 저도를 지나서 한 줄기가 된다.

마산만을 1해리쯤 나가면 진해만이 나온다. 그 유명한 진해군항(鎭海軍港)이 있는 곳이다.

마산만은 수심이 깊어 항상 4심(尋) 내지 8심을 유지하고 간만 차이는 7자[尺] 내외를 벗어나지 않는다. 폭풍이나 강우(强雨)로 외해가 아무리 사나워도 만내는 아주 잔잔해 물새가 자고 낚시꾼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정도다.

그 위치와 그 지세를 잘 살펴 지어진 것이 마산시가지라 하겠다.

마산시는 지세가 약간 비스듬해 소위 바둑판처럼 정연한 시가지를 조성할 수는 없음에도 몇 줄의 띠를 깔았듯이 동남 약 1리 사이에 벽산녹수(碧山綠水)를 안으면서 집들이 많고 길도 다 연결되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야 이 땅의 자랑이기도 하다.

동시에 부산을 제외하고 남선연안(南鮮沿岸) 유일의 번화한 도시이기도 하다.

 

2. 연혁(沿革)

마산부는 원래 창원부(昌原府) 내에 있던 지역이며 옛적에는 진국(辰國)에 속하고 있었다는데 당시의 사적(事跡)을 알아볼 만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수로왕이 가라국을 현재의 김해로 옮겨 그 중신(重臣) 다섯 명을 분봉해 오가락(五駕洛)이라 칭하자 마산은 현재 함안군인 안라가락(安羅駕洛)에 속한 한 바닷가 지역이었으며 당시는 사람도 많지 않은 한 어촌에 불과했던 것 같다.

그후 마산은 좋은 경치와 풍부한 어획이 사방에 퍼져 이주하는 자가 점점 많아져 신라(新羅) 판도에 들어갔을 초기에 골포현(骨浦縣)이 두어져 그 성터는 지금도 마산포 들머리 원지봉[元旨峯, 일명 공신당산(公神堂山)]에 남아 있다.

신라 34대 경덕왕 때 소리가 비슷하다고 해서 합포현(合浦縣)으로 부르게 되어 현재의 진해면 현동(縣洞)인 완포(莞浦에 분현(分縣)을 두면서 현재의 창원읍인 의안군(義安郡)에 귀속케 했다.

고려 8대 현종왕 때 의안군을 폐지시켜 금주(金州)에 귀속하게 하며 합포현은 이때 의안군과 함께 금주군에 들어갔으며 완포분현(莞浦分縣)은 아주 폐지되었다.

그 후 의안과 합포를 금주에서 떼어내 각기 현무(縣務)를 보게 한 것이다. 원나라 세조가 만주에서 일어나 일본을 치려 했을 때 만몽(滿蒙) 4만의 대군을 출정시킨 곳이 바로 합포이며 현재 산호동[일명 구관(舊館)] 연안을 가리킨다.

당시 이 지방은 동정(東征)을 위한 노고가 치하되어 의안을 의창(義昌)으로 합포를 회원(會原)으로 고치고 각각 현으로 인정받았다. 이조 2대 태종 때 의창과 회원 두 현을 합쳐 창원부(昌原府)로 하고 의안 땅에 두게 되었다.

26대 희왕(熙王) 광무(光武) 2년, 즉 명치 32년(1899) 5월 1일 이곳을 개항장으로 만들고 개항사무를 겸해 전반을 처리하기 위해 현재 구마산에 감리서(監理署)를 두게 되었다.

그리고 동년 6월 2일 한국정부와 열강국 사이의 조약에 따라 각국거류지(各國居留地) 제도가 실시되었다.

시 이곳에 재류하는 일본인은 고작 100명 안팎이었는데 그 후 이곳에 관심을 가진 러시아는 속속 이주를 해와서 가옥을 지어 상점, 여관, 요리점 등 연와(煉瓦)로 만들어진 건물이 점차 많아져 지금 혼마치 4~5정목 부근은 러시아인들이 꽉 차게 된 것이다.

진해호텔의 흔적은 아직도 러시아영사관 아래에 초연하게 남아 있으며 사람들이 감회에 빠지기도 한다.

일본 정부가 일본전관거류지를 러시아전관거류지 부근에 선정하자, 명치 33년(1900) 5월 주한 러시아 공사인 파블로프는 자국의 동양함대(東洋艦隊) 사령관과 마산에서 회담하고 마산주재 러시아 영사인 소코프와 함께 멋대로 이곳을 답사해 6만여 평 주위에 목표(目標)를 박으며 점령하고자 했다.

당시 러시아 동양함대는 이미 가사령부(假司令部)와 병사(兵舍)를 건축하고 있었다. 당시 마산에 주재하던 일본영사인 사카타 주지로(坂田重次郞)는 그 불법행위에 항의했으나 소코프 영사는 파블로프 공사가 이미 선정해 경성 정부에 매수 작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해 점령 행위를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사카타 영사는 단호히 이것을 거절해 다음 해에 이르러 마침내 소코프 영사를 굴복시켜 전관거류지를 율구미(栗仇味) 일대로 옮길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세간에서 얘기하는 마산포 사건이며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광무 10년 감리서를 폐지하여 창원부로 고치고, 융희 2년에 웅천(熊川) 진해(鎭海) 두 군(群)을 창원부에 합병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재류민에 대한 행정은 영사관에서 이사청(理事廳)으로 옮겨져 이사청 아래 거류민단이 재류민을 관할하게 되었고, 합병과 동시에 이사청을 폐지해 부청(府廳)으로 하고 이사관(理事官)은 부윤(府尹)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사청 시대의 관할은 축소되어 함안, 창원, 진동 및 김해 일부를 관할하기도 했다가 대정(大正) 3년(1914) 3월 거류민단과 각국거류지 제도가 폐지되어 부(府) 제도와 학교조합(學校組合)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로 인해 부의 관할구는 또한 축소되었던 바 신구마산(新舊馬山)이란 작은 지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재류 내지인의 행정과 선인의 행정이 병합되어 부윤이 통괄하게 되어 자문기관으로서 일선인(日鮮人)으로부터 이루어진 부협의회(府協議會)가 설치되었다,

내지인 측에서는 교육행정을 독립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 학교조합을 설치, 조합에 평의원회(平議員會)를 두며 교육비를 심의 결정하기로 했다.<<<

이 글은 2024년 창원시정연구원이 근대초기 마산에 대한 세 권의 책과 한 개의 자료를 번역하여 하나로 묶어 낸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5권 『개항 및 일제강점기 마산 기록』 중 <마산안내(馬山案內)> 부분이다. 1915년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오카 요이치(岡庸一)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