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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5) - 강점제3시기

오늘도 두 기사 소개합니다.

4. 1935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마산의 교육현안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내 地方當面問題(지방당면문제)’로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기사는 ‘高普設置問題(고보설치문제)’라는 제목으로 마산에 중등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며, 두 번째 기사는 ‘商校昇格問題(상교승격문제)’라는 제목으로 당시 3년제 을종학교로 1922년 개교한 마산상업학교(옛 마산상고, 현 용마고)를 5년제 10학급 갑종학교로 승격시키자는 겁니다.

첫 번째 주장인 고등보통학교 설립 문제는 이듬해인 1936년 4월 11일 마산공립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 / 개교 당시 5년제 10학급)가 개교됨으로 이루어졌고, 두 번째 주장인 마산상업학교 승격문제는 1939년 5년제 10학급 갑종학교가 됨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

신문기사 아래 사진은 마산고등학교 옛 교사이고 그 아래 사진은 상남동에 있었던 마산상업학교 옛 교사입니다.

5. 다음은 1935년 8월 9일자 매일신보 기사로 마산교도소 이전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舊馬山市街住民 刑務所移轉渴望(구마산시가주민 형무소이전갈망)’ 이고 기사 내용은 ‘마산형무소는 구마산 시가의 중심지대에 있기 때문에 시가지의 발전상, 도시미관상, 자녀교육상 여러 가지 방면으로 그 영향됨이 많아 일반 부민은 이의 이전을 갈망하여 마지않던 중 최근에 와서 오동동주민 및 완월동 주민 등은 대표로 음재식 명도석씨 등을 선정하고 연서진정서를 제출한 후 당국에 이에 대한 대책을 심심히 주목하고 있다’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무소는 지금의 삼성생명빌딩과 가톨릭 마산교구청 및 옛 한국은행 경남본부 터에 있었습니다.

일제가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가 1909년이었는데 당시에는 여기가 마산포 시가지 밖이었습니다. 1920년대에 이미 ‘도시 내 형무소’라는 문제로 여론이 들끓었는데 1935년 8월 9일에 이런 기사가 또 났습니다. 사실 이 때는 마산포의 도시범역이 많이 확대되어 이 위치는 이미 시내 한 복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론과 달리 이 형무소는 1970년경 지금 회성동 자리로 옮겨갔습니다.

기사 아래 사진은 부산감옥 마산분감으로 시작했을 당시의 마산형무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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