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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덕6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4. 매축권과 대일 투쟁 134. 매축권(埋築權)과 대일(對日) 투쟁 구마산포는 옛날부터 농수산물의 집산지로서 중부 경남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기능을 가진 요지로 발달해 온 곳이었다. 망국의 낌새가 스며들던 한말, 마산의 토지소유권을 비롯한 모든 이권이 노·일 양국의 각축과정에서 외인(外人)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가운데서도 구마산 항민(港民)들은 꾸준히 그들의 상권을 투쟁으로 수호 유지해 왔다. 이러한 투쟁의 현실적인 뒷받침은 물론 축적된 상업자본의 힘에서 온 것이지만, 이러한 것이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어 더욱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갔고 그 결과 일본 상인들에 대해서도 투쟁의 현실적인 실력을 갖추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외인(外人)이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시작한 개항 이후 그들이 노리는 중요한 이권 가운데 하나가 창탄(漲.. 2017. 1. 23.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3-마지막 회) - 매립의 도시, 마산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8 매립의 도시, 마산 19세기 말, 동성리(현 동성동)에 김경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개항된 해인 1899년 10월, 마산포 조창에 들어있던 창원감리서에 ‘서성리에서 오산리(현 오동동)에 걸친 간석지 50파(把, 1파는 양팔을 벌린 길이)를 매립하여 선창의 혼잡을 덜고 지역을 발전시키겠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여 정부로부터 매립허가를 받은 사람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항만건설과 매립사업을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상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에게 15,000량의 공사비를 차용하여 매립공사에 착공했으나 안타깝게도 사망하여 그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1906년 히로시는 김경덕의 매립인허장을 저당 잡을 때 작성한 전집표에 ‘차용금을 갚지 못하면 매립권은 .. 2015. 3.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1) - 개항이후 지금부터 소개할 마산포 복원도는 1905년-1910년 시기의 마산포 도시상황입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보아 이때 상황이 19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어서 이 복원을 ‘조선후기의 마산포 복원도’라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복원도 작성 범위- 복원작업의 범위는 토지의 지목과 형상을 분석하여 주거용지로 사용되었을법한 토지들이 일정한 형태로 집합되어있는 영역으로 결정하였으며, 외곽경계는 가급적 도로로 하였습니다. 설정된 범위는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당시 원마산의 주거용지 경계와 비교하면서 조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적도에서 복원한 당시 주거지 영역과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주거지 영역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복원도 작성 방법- 복원방법은 제가 임의로 착안하였습니다. .. 2011. 3.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지난 주 포스팅한 내용처럼 마산포 6개리의 명칭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 6개리의 경계가 새롭게 획정되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적한 결과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인들에 의해 변경되기 전 6개리의 경계를 복원해보겠습니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마산이라는 근대 도시를 탄생시킨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 추적」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쓰는 글입니다. 마산포라는 지명은 고려후기 혹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산포를 도시로 만든 맹아는 1760년 마산창 설치 후 발생한 6개리(里)였습니다. 동성리․서성리․중성리․성호리․오산리․성산리의 마산포 여섯 리(里)가 최초로 나타나는 지도는 마산포가 개항된 1899년에 간행된 창원읍지에 수록된 지도입니다. 관찬과 사찬을 통틀어 지금까지 행해진 마산연구.. 2011. 3.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1) 김경덕의 매립 계획 개항이 되면서 외국상선들이 마산포에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외국군함들도 가끔 들어왔습니다. 외국 선박들이 들어오는 날이면 공물상인들과 잡화상들이 서부경남 각지에서 마산포로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선창가에는 화물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당시 마산항의 규모와 시설은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오산선창․어선창․백일세선창․서성선창의 네 개 선창과 동․서 두 개의 굴강이 있었지만 모두 수심이 얕아 선박접근이 쉽지 않았고 하역장소도 좁았습니다. 선착장도 자연적 지형을 이용한 초보적인 시설뿐이었습니다. 늘어가는 항만 물량을 도저히 수용할 조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때 동성리에 거주하던 김경덕이라는 사람이 마산포 앞에 매립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마산포 개항 5개월 후인.. 2011. 1.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 110년 전 마산포 해안 1900년 / 김경덕 / / / 매축청원서 첨부, 창원항안Ⅰ / 규장각 1900년에 마산포 해안을 매립하기 위해 김경덕이 정부에 제출한 매축청원서에 첨부되어 있는 지도입니다. (1907년 창원감리 이기(李琦)가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의 매립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지형만 알아 볼 수 있도록 붓으로 대략 그려놓은 지도이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매립 전 마산포 선창과 굴강의 위치, 그리고 해안 주변의 길을 알 수 있습니다. 붉은 글씨는 당시 마산포 사람들이 사용했던 선창과 굴강의 명칭과 위치를 제가 표시한 것입니다. 이 지도에는 오산리․동성리․중성리․서성리로 기록된 당시의 리(里)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서, 일제에 의한 행정구획 이전의 마산포 6개.. 2010.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