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성동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0) - 강점제2시기 먼저 1930년 원마산 상황과 1920년 상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두 도면을 통해 이 시기 마산포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식 도로가 여기 저기서 뻥뻥 뚤렸습니다. 지금의 코아양과 앞 도로, 오동동 문화의 거리가 그 때 생겼습니다. 두 도면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발생한 도시 구조의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⑧까지의 번호는 1930년 토지이용도에 표기된 도로번호와 일치합니다. ① 먼저 현재의 창동 네거리를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도로, 즉 부림시장에서 코아양과점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남북방향의 삼성생명 앞에서 현 대신증권까지의 도로가 1923년 개설되었다. ② 이어 1924년에는 코아양과점에서 오동동으로 내려가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③ 1926년, .. 2012. 5.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9) - 강점제2시기 오늘부터는 1920년대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는 근대식 도로망이 확산되는 시기였으나 도시시설의 수준은 낮았습니다. 일제하 마산의 유통시장은 원마산과 신마산 상가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원마산(마산포) 지역의 상가는 남성동 제일은행 자리에 1910년대 새로 개설된 도로 주변이 중심상권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마산포 지역의 상권은 중심번화가인 남성동과 창동을 비롯해서 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형성되어있었고 부림시장과 그 주변 및 남성동 어시장 근처의 해안매축지에도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인들이 즐비했습니다. 그 때까지 제조업 분야에 손을 뻗지 못한 한국 상인들은 주로 이곳 마산포 지역 상가에서 도소매업을 경.. 2012. 5.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1) - 강점제1시기 -일본인의 마산포 토지 소유- 남성동의 매립으로 1912년 당시 전체면적의 31.4%이던 일본인 소유 토지가 1920년에는 35.0%로 변했습니다. 매립 직후에는 매립시행자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이 전량 소유함에 따라 41.1%로 급증하였다가 35.0%가 된 것입니다. 이 시기 한국인들이 소유한 토지는 1912년 당시 63.2% 이었으나 1920년에는 62.5%로 줄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토지소유변화를 단순 비교하면 일본인 소유의 토지는 3.6% 증가하고 한국인 토지는 0.7% 줄어든 셈입니다. 아래 표는 1912년과 1920년의 마산포 토지소유 변화를 나타낸 것입니다. 구분 정부. 마산부 기업. 단체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게 필지수 5 10 853 271 18 1,157 비(%) 0... 2011. 10.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0) - 강점제1시기 1910년대 마산포에는 해안선 변화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최초의 대규모 매립공사가 이루어져 석축돌제 등만 조금 있었던 자연형의 해안에 凹형의 폭 약 300m에 이르는 석축 호안과 정박장이 생긴 것입니다. 또한 해안선이 당시 수심 약 2m 정도(당시 수심 기록된 지도로 확인)까지 바다 쪽으로 진출하면서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발전된 형태의 부두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공사가 완성되기 전에는 간석지역의 굴강에 선박을 정박하였을 경우, 간조(干潮) 때에는 수심이 낮아 선박의 이동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남성동 매립으로 오랜 세월 동안 원마산 해안을 지켜온 네 개의 선창과 두 개의 굴강 중 서굴강을 포함하여 서성선창과 백일세선창은 완전히 그 모습이 사라졌으며, 매립지에서 벗어나 있던 동굴강과 어선창․오산선창.. 2011. 10.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8) - 강점제1시기 통감부 시절인 1907년경에 이미 마산포의 도로 폭을 조금 넓히거나 형태를 곧게 하는 가로개수 공사가 마산경찰서 주관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근대식 도로가 건설된 것은 1912년부터 1915년까지였습니다. 이 때 개설된 도로들을 사정토지대장에서 확인해 보면 1912년부터 1915년까지이지만 시기는 다양합니다. 도로의 개설 시기가 토지대장에 기록된 시기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3-4년 사이에 공사가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업으로 자연발생적인 좁은 골목길뿐이었던 마산포에 폭8m, 10m의 쭉 뻗은 새 도로가 신설되었습니다. 다음 도면은 도로가 개설되기 전의 마산포와 개설 후 모습, 그리고 도로개설 후인 1916년 지도에 나타나는 마산포 모습입니다. 두 번째 도면에서 직선으.. 2011. 10.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마산포 최초의 수익용 매립- 馬山(1919年修正測圖) 1919년 / 육지측량부 / 조선총독부 / 1:10,000 / 柏書房 影印本 / 울산대 도서관 지난 주에 포스팅한 「馬山」을 보완한 지도입니다. 1916년 측도하여 1917년 발행했던 지도「馬山」을 1919년 제1회 수정측도하고 1924년 6월 25일 인쇄하여 6월 30일 발행한 것이 이 지도입니다. 따라서 이 지도의 도시상황은 1919년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저작권과 인쇄 및 발행자는 앞의 지도와 같습니다만 지도 가격은 인상되어 18전하던 것이 40전으로 많이 올랐습니다. 영인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삭제했는지 모르지만 이 지도에는 범례가 없다는 것이 앞 지도와 다릅니다. 지도에 나타나는 도시공간의 상황은 1916년 당시의 지도인 「馬山」과 거.. 2011. 9.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2) - 개항이후 -마산포의 길- 포구를 끼고 발생한 마을의 경우, 마을 규모가 작을 때는 한 개의 선창을 중심으로 단순하지만 마을 규모가 클 때는 몇 개의 선창을 연결하는 주도로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길들이 형성됩니다. 마산포의 경우는 후자처럼 창원가도(昌原街道)를 중심으로 수계(水系)와 능선 그리고 등고선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얼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난 회에 올렸지만 다시 한 번 마산포 복원도를 보겠습니다. 남성동 파출소 일대, 즉 조창지 부근지역은 조창과 관련한 관리들 거주지 혹은 조창관련 건물들 탓에 계획된 도로로 보이는 직교격자형이 많았습니다. 이 지역은 한일병합 이후 근대식도로가 개설되면서 금융 등을 비롯한 새로운 산업시설을 담당하는 마산포의 중심공간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와 달리 인구 증가와 함.. 2011. 4.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지난 주 포스팅한 내용처럼 마산포 6개리의 명칭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 6개리의 경계가 새롭게 획정되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적한 결과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인들에 의해 변경되기 전 6개리의 경계를 복원해보겠습니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마산이라는 근대 도시를 탄생시킨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 추적」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쓰는 글입니다. 마산포라는 지명은 고려후기 혹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산포를 도시로 만든 맹아는 1760년 마산창 설치 후 발생한 6개리(里)였습니다. 동성리․서성리․중성리․성호리․오산리․성산리의 마산포 여섯 리(里)가 최초로 나타나는 지도는 마산포가 개항된 1899년에 간행된 창원읍지에 수록된 지도입니다. 관찬과 사찬을 통틀어 지금까지 행해진 마산연구.. 2011. 3.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조선시대 조창인 마산창은 위치와 규모 등 관련 내용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석두창(石頭倉)의 중요성도 결코 조선시대 마산창 못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두창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그 위치도 밝히지 못한 채 몇 가지 가설만 나와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주장된 석두창 위치에 대한 가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석두창 위치 비정은 모두 세 가지인데 모두 그 근거와 논리가 좀 복잡합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 일이니 그도 그럴 것입니다. 세 주장의 결론만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볼 수 있도록 자세한 내용은 이 글 뒤에 별도로 붙여 놓았습니다) 첫 번째는, 몇몇 문헌(마산시사, 창원군지, 박희윤, 이.. 2010.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