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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30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6) - 강점제2시기 오늘은 1920년대 마산의 거리 사진들을 소개합니다. 모두 신마산 쪽 거리입니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 주로 사용되던 상업용 엽서 사진들이 때문에 그들의 도시였던 신마산만 있습니다. 사진을 찍은 시기는 편차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넉 장은 소인 일이 1922년(대정11년) 7월 11일이니 1920년-1922년쯤으로 보이고 소인이 없는 한 장도 건물 들어선 상태로 보아 비슷한 시기인 듯합니다. 모두 창원천 인근에서 찍은 것들입니다. 아래 두 사진은 京橋(?)ノ櫻과 馬山川(橋?)ノ櫻이라고 적힌 걸로 보아 두월동 통술거리 입구와 인근에 있었던 다리 부근에서 찍은 사진이며, 시기는 벗나무가 만발했던 4월인 것 같습니다. (푸른 색 화살표) 아래 두 사진은 京町이라 했으니 통술거리 남쪽 입구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2012. 7.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5)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초 신마산 일대 경관을 알 수 있는 사진을 소개합니다. 일본국립민족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엽서입니다. ‘잔교에서 보이는 마산’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는 이 사진은 두 장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결해 놓은 사진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한 장 씩 따로 된 사진도 올렸습니다. 일제기 마산 시가지 사진은 대부분 육지에서 찍은 것들인데 이 사진은 드물게 바다에서 시가지를 바라보고 찍었습니다. 일본해군이었던 송미삼헌(松尾三憲)이 훈련항해 도중에 들러 수집한 엽서로, 그 아들이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스탬프에 12. 6. 15라고 찍힌 것으로 보아 대정 12년, 즉 1923년 6월 15일이라는 뜻인데, 그렇게 볼 때 이 엽서에 보이는 마산 모습은 대략 1920년대 초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진에 .. 2012. 6. 25.
도시에 대한 생각도 바꿀 때가 됐는데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고용노동부 장관 시절 “청년 실업률이 높은 것은 대학에서의 문(文)·사(史)·철(哲)이 과잉 공급되어 그렇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장관이라는 분이 내뱉은 이 말은 가뜩이나 관심 밖으로 밀려나있던 인문학의 추락에 가속도를 붙인다 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당사자인 박 장관은 이런 비난에 대해 납득할만한 해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것이 문(文)·사(史)·철(哲)에 대한 그의 평소 소신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학문을 취업의 수단으로만 보는 박 장관의 퇴행된 눈과 달리 인문학은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에서도 경남대학교 교수들이 나서서 24강좌 2년 계획으로 마산의 합포도서관에서 개최하는 인문학 강좌가 .. 2012. 6. 2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4) - 강점제2시기 마산에 최초로 철도가 개통된 것은 개항 6년 후인 1905년이었습니다. 러일전쟁 종전으로 일본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집어 삼키기 시작할 즈음이었습니다. 경부선 개통과 같은 해였으며 마산이 종착지라 ‘마산선’이라고도 불렀고 삼랑진에서 마산과 연결된다 해서 ‘삼마선’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마산선은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철도회사를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을 빌미로 그 사업권을 강제 접수한 다음, 자국의 중요 인력을 동원하여 개통시킨 철도였습니다. 비록 국력이 약해서 강제로 탈취 당한 철도였지만, 이 철도의 개통은 마산의 도시화를 촉진시켰으며 마산을 일본열도와 한반도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요충지로 만들었습니다. 마산선이 개통된 20여년 뒤, 진주 방면으로 연결되는 또 하나의 철도가 놓였습니다. ‘경남선’이라 불린 이 철.. 2012. 6.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3) - 강점제2시기 통합 창원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팔룡산의 명칭은 원래 반룡산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이 산의 명칭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 지역의 지명을 연구한 민긍기 교수는 대략 1980년대 전후, 그러니까 30여년 전이라고 했습니다. 지명도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니 이 글에서도 팔룡산이라 부르겠습니다. 조선시대 이 산은 무학산과 함께 선재봉산(船材封山), 즉 선박 건조에 필요한 목재를 충당하기 위해 국가가 관리하는 산이었습니다. 마산포 해안가에 있던 전선소(戰船所)에서 무학산과 팔룡산의 재목으로 선박을 건조했던 겁니다. 두 산에 곧고 굵은 질 좋은 소나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일제는 마산부에 상수도를 공급하기 위해 1927년 5월 이 산의 정상부에 수원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1930년 3월에 준공하였습니다.. 2012. 6.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2) - 강점제2시기 1920년에 비해 10년 후인 1930년에는 가용지가 186,119㎡에서 182,406㎡로 약 3,700㎡가 줄었습니다. 이 차이는 1920년대에 새로 개통된 다수의 도로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는 1920년 기준으로 필지수로는 274필지에 21.3%, 면적으로는 65,000.11㎡에 35.0%였으며 필지 당 평균면적은 237.23㎡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에는 필지수가 365필지에 26.5%, 면적은 70,812.08㎡에 38.8%이었고 필지 당 평균면적은 194.01㎡이었습니다. 필지수와 면적은 늘어난 반면 필지 당 평균면적은 오히려 줄어든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한국인들의 토지소유 상태는 1920년 981필지에 76.3%, 면적 116,320.88㎡에 62.5%, 필지 당 평균면적 118... 2012. 6.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0) - 강점제2시기 먼저 1930년 원마산 상황과 1920년 상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두 도면을 통해 이 시기 마산포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식 도로가 여기 저기서 뻥뻥 뚤렸습니다. 지금의 코아양과 앞 도로, 오동동 문화의 거리가 그 때 생겼습니다. 두 도면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발생한 도시 구조의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⑧까지의 번호는 1930년 토지이용도에 표기된 도로번호와 일치합니다. ① 먼저 현재의 창동 네거리를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도로, 즉 부림시장에서 코아양과점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남북방향의 삼성생명 앞에서 현 대신증권까지의 도로가 1923년 개설되었다. ② 이어 1924년에는 코아양과점에서 오동동으로 내려가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③ 1926년, .. 2012. 5.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8) - 강점제2시기 1929년 5월 24일 구 고려모직 뒤편으로 회원천 하류에 이르는 오동동 2-1번지와 15-1에 새롭게 총 면적 2,117평이 조성되었는데 그 중 대지가 1,615평이었습니다. 다른 자료에서는 1,692평이라고도 하는데 1,615평은 정부기록보존소의 자료에 의한 것입니다. 매립 신청 초기에는 이보다 면적이 약간 작았으나 설계변경을 거치면서 이 규모로 확정된 것입니다. 이 매립에 대해서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은「공유수면관계서류」의 「문서번호87-352, 필름번호87-625」를 참고하였으며 서류에는 아래와 같은 도면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이 매립은 당시 자산동 119번지 소재 야마다(山田)장유양조장(현 몽고간장)의 사주 산전신조(山田信助)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서류에 나타난 매립의 목적은 ‘택지조성’이었으.. 2012. 5.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7) - 강점제2시기 신마산에 오래 동안 살아온 일본인 목재상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과 국종웅일(國宗雄一) 두 명이 시행한 매립입니다. 공사는 우리나라 경부선 철도부설공사에 참여한 후 재계에 두각을 나타낸 서울의 토건업자 황정초태랑(荒井初太郞)에게 의뢰하였고, 1926년 해면 매축 사업에 착수하여 1928년 12월 21일에 준공하였습니다. 이 매립에 대해서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은「공유수면관계서류」의 「문서번호87-193, 필름번호87-560」을 참고하였으며 서류에는 아래와 같은 도면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위치는 현재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남쪽 건너편 일대입니다. 세분해보면 옛 마산도기 및 진일공업사 등이 있던 월남동 1가 5번지에서 46번지의 1에 이르는 4,663평을 비롯해서 전 유원연탄 및 그 주변일대와 전 항등여관.. 2012. 4.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06) - 강점제2시기 -강점 제2시기의 매립- 마산포에는 1910년대에 이미 일본인 박간의 매립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마산만의 매립은 192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해방 때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매립이 빈번했던 까닭은 마산 해안의 창탄지역이 일본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저비용 고수익, 즉 손쉽게 큰돈을 쥘 수 있었던 투자의 방편이었기 때문입니다. 회사령 폐지로 1920년대 벽두에 시작된 국내 공업시설 확충 붐과 연결시켜 생각하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1920년대(강점 제2시기) 매립착공은 많았지만 준공된 곳은 마산포 두 군데, 신마산 한 군데 모두 세 곳이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920년대 첫번째 매립입니다. 전 동성동 사무소와 그 주변인 남성동 30-1번지의.. 2012. 4. 23.
마산만 매립해서 땅 장사하려는 기업들 성동산업 마산조선소가 취득한 마산 앞바다 공유수면 16,000평 매립권을 두고 장사꾼들의 농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작은 수년 전부터였습니다. 마산만 내만에 자리를 잡은 성동조선이 "사업을 일으키려면 바다에 접한 땅이 더 필요하다"고 요구하면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오염총량제 실시 이후 마산만의 매립은 더 이상 없을 것이었지만 성동조선의 요구에 대해서는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당시 마산에는 내놓을만한 기업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동조선이 사업을 일으키면 고용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매립을 해서라도 지역경제를 살려보라고 여기저기서 지원했습니다. 마산지역의 상공계를 대표하는 마산상공회의소가 직접나서서 “공유수면매립이 완료되면 연 매출액 1조원에 2천명의 고용이 발생할 것”이라면서 “기업이 .. 2012. 4.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5) - 강점제2시기 마산** 1930년 / 山本三生 / 개조사 / 1:40,000 / 일본지리대계12, 조선편 / 개인 비교적 상세하게 당시의 마산도시공간을 알아 볼 수 있는 지도입니다. 직선형의 도로 외에도 예전부터 조성되어 있던 도로까지 잘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도로 외에도 개천 및 철도까지 정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신마산은 이때도 고운로 상부는 개발되지 않고 있었으며 중앙마산은 구도로 변에 조그마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연결되어 있는 형태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원마산은 북쪽으로 영역이 넓어져서 동척사무소와 교도소 위쪽으로 건물이 들어서고, 전 북마산파출소 부근에 일단의 건물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미 동굴강 일부가 매립되었지만 워낙 축척이 세밀하지 못해서인지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지도.. 2012. 4.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4) - 강점제2시기 마산부약도** 1930년 / 조선총독부 / 조선총독부 / / 朝鮮の 都邑(조선의 도읍) / 경남대 도서관 2주 전에 소개한 「마산부약도*」를 약간 조정하여 옮긴 것으로 보이는 지도입니다. 특별히 따로 설명할 것이 없는 지도이지만 당시에 간행된 지도를 선보이는 차례라 소개합니다. 도시의 공간 변화가 1923년부터 1930년까지는 상당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산부약도*」에 나타난 경남선 철도에 대한 표기오류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표기 방법만 약간 다를 뿐입니다. 최근 3.15의거 때 목숨을 잃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인양된 곳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만, 바로 그곳이 당시에 해수욕장이었다는 기록이 뚜렷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지도 역시 그다지 신뢰할만한 자료로 .. 2012. 4.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3) - 강점제2시기 마산(조선교통도 마산5호) 1926년 / 일본 육지측량부 / 조선총독부 / 1:50,000 / 조선교통도 / 국립지리원 이 지도는 1916년에 측도하여 1926년 6월 25일에 인쇄, 6월 30일에 발행한 것으로 저작권 소유자는 조선총독부이며 인쇄 겸 발행자는 육지측량부입니다. 1916년 측도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1925년 6월에 개통한 경남선 철도가 뚜렷이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발행 연도인 1926년 당시의 지도인 것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도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교통도’이기 때문에 등고선 등의 표기는 없고 그 대신 도로 사정을 잘 알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다는 것이 이 지도의 특징입니다. 이 지도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소개하겠습니다. 글의 출처는 1986년 栢書房(株)에서.. 2012. 4.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2) - 강점제2시기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1921년부터 1930년까지 제작된 마산관련 지도를 해제하고 그 외 관련 자료를 토대로 마산 도시구조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지도는 이미 1916년에 측도 제작한 1:10,000지도와 1:50,000지도에 기초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10,000지도처럼 세밀한 지도는 이 시기에 다시 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1910년대만큼 지도를 통해 정밀하게 도시구조의 변화를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 馬山府略圖* 1923년 / 조선총독부 / 조선총독부 / / 조선철도여행편람 /.. 2012. 3.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1) - 강점제2시기 5) 중앙마산의 형성과 의미 시작부터 거리를 두고 자리 잡은 신마산과 원마산은 일제의 강점이 진전되면서 확산되었지만 두 도시의 도시 공간 확산 방향은 완연히 달랐습니다. 원마산이 교방동과 상남동 방향, 즉 신마산의 반대방향으로 확산된 반면 신마산은 그와 반대로 원마산 방향으로 도시공간이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도시공간은 확산되었지만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마산부의 행정기관들은 대부분 조계지, 즉 마산도시의 남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건물들은 개항기 혹은 강점 초기에 건설되어진 것들로서 미래의 도시변화를 고려하지 않았던 결과입니다. 행정기구를 담당하고 있었던 일본인들만의 편의를 위해 그들이 집중해 있던 조계지에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920년대 들어서는 부민들 사이에서 도시의.. 2012. 3.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0) - 강점제2시기 2010년 4월 8일에 시작한 연재가 오늘로 100회를 맞았습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글을 올린 것이 그럭저럭 2년이 다되었군요. 보잘것 없는 글을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4) 문헌을 통해 본 당시 상황과 중앙마산의 도시계획 직전 포스팅에서 올린 중앙마산에 대한 문헌의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당시 중앙마산의 상황이 다음과 같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중앙마산의 범역은 신월천에서 장군천을 거쳐 척산교에 이르는 철도용지 내 시가를 뜻했다. ② 마산은 마산포․신마산․중앙마산이라는 세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마산포 방면은 한인을 상대하는 상점이 많고, 신마산은 정비된 가로에 군인 및 관리를 상대로 하는 상점이 많으며 중앙부는 관아․학교․사원․철도소재지가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사택이 많이 있다. ③ 1931년에는.. 2012. 3.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9) - 강점제2시기 3) 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중앙마산'의 철도용지 ‘중앙마산’이라는 용어는 이 글에서 처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일제기에 간행된 마산관련 몇몇 자료에서「중앙마산(中央馬山)」혹은「중앙방면(中央方面)」「중앙부」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지역이 신마산과 원마산의 두 영역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두 지역 사이에 있는 다른 성격의 도시공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1920년대 일본인이 발간한 문헌에 나오는 '중앙마산' 관련 기록들을 모아 소개하겠습니다. 내용을 간추려 번역한 것이며 명칭은 현재 사용하는 용어로 고쳐 적습니다. ①『馬山港誌(마산항지, 1926)』- 諏方史郞(추방사랑) a. 위치와 지세(p.3) 마산부의 대체적인 지세는 본래 마산포 즉 마산포 방면과 이전의 각국거류지 및 군영,.. 2012. 3.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8) - 강점제2시기 2) 중앙마산이 철도용지로 강점되는 과정 철도용지를 둘러싼 일제의 공공연한 토지약탈은 마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경계 측량을 할 때 경계를 속인다든지, 원래 정해진 경계보다 턱없이 많게 토지를 점령한다든지, 군용지라고 속여 민간의 토지를 침범한다든지, 일본군의 군용도로를 만든다면서 민가를 헐어버린다든지, 개인 사유지를 일본정부에서 내려준 것이라면서 팻말을 박아 자기 땅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하는 등 일본인들의 횡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마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산의 철도용지도 지난 주 포스팅에서 언급한 한일의정서 제4조를 적용시켰던 겁니다. 2012/0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번천사 (97) - 강점제2시기 철도용지 확보과정에서 마산의 일본.. 2012. 2. 27.
지금와서 시간 없다는 마산해양신도시 10년 넘게 끌어온 마산해양신도시 문제가 최종안 결정을 앞두고 진통이 큽니다. 해양신도시가 들어서는 신마산 일대의 주민들은 최근 ‘주민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반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회의도 하고, 집회도 하고, 유인물도 뿌리고, 급기야 창원시청 정문에서 합의집회를 가진 후 시장실에 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이 사업에 반대의견을 낸 ‘해양신도시 반대 시민대책위원회’도 연일 바쁩니다. 최근에만 해도, 창원시 해양개발사업소와 네 차례의 간담회를 가졌고, 갯벌조성 가능성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전문가 토론회도 가졌습니다. 수시로 회의도 열고, 시민들을 상대로 해양신도시의 부당성을 알리고, 언론에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20일(월) 오후에 가진 네 번째 간담회에서도 창원시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섬형.. 2012. 2.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7) - 강점제2시기 1) 중앙마산이 철도용지로 된 원인 마산포와 신마산의 중앙부가 1920년대까지 도시형태를 띠지 못하게 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일대가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일본의 군용철도용지로 수용당한 뒤 1920년대까지 변하지 않고 그 상태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1904년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서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선전포고를 하여 러일전쟁을 시작합니다. 이 전쟁에 앞서 일본은 마산에 있는 우체국과 전보사 및 율구미에 있던 러시아 해군육상사령부의 시설을 압수했습니다. 그리고 1904년 9월 1일, 군용철도 마산선의 건설공작대가 마산에 입항했습니다. 러일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 조정을 강압하여 의정서를 체결했기 때문입니다. 삼랑진 - 마산 사이의 철도공사는 의정서 제.. 2012. 2. 20.
마산 풀치를 들어보셨나요? 오늘 우연히 본 네이버에서 '팔도식후경'으로 소개된 "마산 풀치"입니다. 지금은 통합으로 인해 "창원풀치"라 명명되었지만, 어쩐지 "마산 풀치"가 더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언젠가 마산쪽 식당에 가면 먹어본 그 맛입니다. 주메뉴보다도 더 인기를 독차지하며, 꼭 추가로 주문하게되는 '갈치 조림'입니다. '갈치'가 어린 것을 '풀치'라 부른답니다. (저도 이제야 알았습니다만) 이를 꾸덕하게 말려 조림을 해 먹는데 그 맛이 일품입니다. 아래 전체 사진과 글은 아래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495&category_type=series 갈치는 본래 서민의 생선입니다. 하지만 연근해 갈치 어획량이 줄고 중국인들이.. 2012. 2.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마산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근대식 건축물을 많이 세웠습니다. 한일병합 이전까지는 주로 목조로 지은 공공기관이 주류였습니다만 1910년경부터는 벽돌조도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20년 후반 경에는 철근콘크리트조의 근대식 건물도 선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 지은 건물들은 용도도 다양했습니다. 회사령 폐지와 3․1운동에 의한 문화정책 때문이겠지만 주조공장과 장유공장을 비롯한 산업시설은 물론,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시설도 이때 많이 지었습니다. 아래 그림의 원동무역주식회사는 1927년 8월에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로 사옥을 착공하여 1928년 4월 준공식을 가진 한국인 최초의 오피스전용건물입니다. 세련된 근대미가 물씬 풍깁니다. 밑은 현재 모습입니다. 다음 표는 .. 2012. 1.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일본인에 의해 사회 모든 분야가 달라지면서 한국인의 생활 방식도 많이 변했습니다. 1918년경만 하더라도 마산포 장날에 머리카락을 짧게 단발한 한국인이 보이면 신기하게 쳐다보았지만 1년이 지난 1919년경에는 단발에 양장(洋裝)차림을 한 사람들이 부쩍 많아져서 1920년대 중반에는 전체 한국인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상투머리를 한 사람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막일하는 사람과 농민이었으며 그 외는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짚신도 이 시기에는 많이 사라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무신을 신었는데 마산에는 주로 오사카와 고베의 고무신이 공급되었습니다. 개중에는 구두를 착용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고무신 사용자가 많아지니 상대적으로 짚신은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이 때.. 2012. 1. 23.
동영상 - 마산 지난 연말, 재경마산향우회 송년회용으로 마산도시사에 대한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서툰 작품이지만 나쁜 평은 하지 않아 공개합니다. 곧 설입니다. 마산사람들, 가족들과 함께 보면서 마산에 얽힌 추억이라도 나누어보시죠. 분량은 13분 쯤 됩니다. 2012. 1.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항의 물동량은 일본 국내의 불황과는 달리 오히려 더 늘어만 갔습니다. 주요 수출품은 여전히 미곡이었으며 전체 수․이출액의 80%를 차지했습니다. 1925년 마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된 미곡은 약 15만석이었는데 1928년에는 65%가 증가한 25만석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미곡 수․이출의 증가는 수치상으로는 무역의 증대였지만 사실은 일제에 의한 미곡의 약탈적 반출이 점점 증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미업은 1911년 하목철삼(夏目哲三)에 의해 전기모터를 설치한 것이 기계화된 정미소의 시작인데 그 후 많이 늘어나 1924년 현재 25개소였습니다. 그 중 한국인의 것이 12개소, 일본인의 것은 13개소였습니다. 섬유공업은 회사령 폐지 이후부터 마산에 유치되기 시작한 업종입니다. 특히 1.. 2011. 12.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한 1920년대 마산의 인구변화입니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의 통계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연도 한국인 일본인 외국인 합계 일본인비율(%) 1920 11,923 4,172 70 16,165 25.8 1921 1922 1923 1924 13,616 5,168 98 18,882 27.4 1925 17,148 4,824 109 22,081 21.8 1926 17,802 4,975 124 22,901 21.7 1927 18,019 5,095 129 23,243 21.9 1928 18,300 5,339 95 23,734 22.5 1929 19,309 5,592 87 24,988 22.4 1930 20,149 5,559 102 25,810 21.5 1930/1920 169.0% 13.. 2011. 12.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도시 변화는 회사령 폐지로 시작된 산업 변화와 중앙마산의 형성 및 매립, 그리고 시구개정 사업으로 인한 원마산의 도로망 확산과 경남선 철도 개설 등이 큰 흐름입니다. 1923년 9월 1일 동경과 요코하마를 비롯한 관동지방에 대규모 지진, 즉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이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에 돌연히 동경과 요코하마 및 관동지방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가옥을 비롯한 지상시설물을 도괴(倒壞)시켰을 뿐 아니라 해일(海溢)과 3일간 계속된 대 화재로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사망91,344명 행방불명13,275명 부상51,074명 가옥전소38,090채 가옥반소517채 전궤(全潰)83,819채 반궤(半潰)91,233채 유실1,390채였습니다. 그중에서도.. 2011. 11.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오늘부터는 1920년대 10년간을 올리겠습니다. '일제강점 제2시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1920년대는 한국이 일제의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 특히 식량공급지로 산업구조가 재편되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으로 수출되기 시작했던 시기로 「산업수탈기」라 부릅니다. 정치적으로는 3․1운동을 전환점으로 무단정치가 철폐, 소위 「문화정치」가 표방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산미증식계획이 강행되었습니다. 「문화정치」라는 말은 1919년 8월 12일 제3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재등(齋藤)이 서울에 부임해 온 다음 날, 즉 9월 3일 아침에 내린 훈시 중에서 8월 19일에 있었던 관제개혁과 헌병경찰 폐지, 복제(服制) 폐지 등을 언급하면서 「이는 요컨대 문화적 제도의 혁신에 의하여.. 2011. 11.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4) - 강점제1시기 58회부터 시작된 1910년대 마산도시변화에 대한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일제 강점 제1시기인 1910년대는 식민지 한국에 대한 정책의 효율성과 보다 경제적인 잉여 창출을 위해 각종 정책을 시행한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비롯하여 교통․통신․운수 등의 사회기반시설 및 식민정책에 적절한 재정․금융체계를 정비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한국 민족자본의 성장을 막기 위해 공업을 억제하고 식량 및 원료공급을 위하여 원시산업을 육성하는 등 식민지 지배를 하기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마산의 도시변화는 신마산과 원마산이 많이 달랐습니다. 개항기 동안 급속히 형성되었던 신마산은 이 시기 동안 별 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신마산은 도시의 정체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로.. 2011. 1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