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2.02.2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8) - 강점제2시기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다 - 중앙마산의 형성>

 2) 중앙마산이 철도용지로 강점되는 과정

철도용지를 둘러싼 일제의 공공연한 토지약탈은 마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경계 측량을 할 때 경계를 속인다든지, 원래 정해진 경계보다 턱없이 많게 토지를 점령한다든지, 군용지라고 속여 민간의 토지를 침범한다든지, 일본군의 군용도로를 만든다면서 민가를 헐어버린다든지, 개인 사유지를 일본정부에서 내려준 것이라면서 팻말을 박아 자기 땅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하는 등 일본인들의 횡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마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산의 철도용지도 지난 주 포스팅에서 언급한 한일의정서 제4조를 적용시켰던 겁니다.            
2012/0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번천사 (97) - 강점제2시기
 
철도용지 확보과정에서 마산의 일본 세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고, 그 과정에서 도시도 중대한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조약체결 직후부터 마산에는 일본군인과 군량 및 마량(馬糧)을 실은 일본군함이 무시(無時)로 드나들면서 유린했는데 이 시기에 철도용지 명목으로 토지를 압수했던 겁니다.

압수 면적은 일본인 대지주 박간(迫間)의 개인사유지를 제외하고도 12만평(1,210斗落)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마산합포구청이 된 옛 마산시청 일대의 중앙마산지역이었습니다.

토지강탈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 하나를 소개합니다.

1904년 7월 일제는 점찍어둔 철도부지에 입표(立標)하고, 마산포 내 한국인 소유의 토지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강제 점용하는 폭거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사정에 대하여 마산포 주민의 안녕을 책임진 감리가 도면을 그려가면서까지 그 부당성을 외부대신에게 보고하기도 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마산포 주민들의 생활근거지를 박탈한 일제는 그 보상은 외면한 채 오히려 철도규칙을 만들어 한국인과 한국의 관리들을 우롱하였습니다.

창원보첩 四, 광무 9년(1905년) 2월 5일자 감리보고 제8호에 나와있는 철도규칙의 내영은 다음과 같습니다.

㉮ 철도 위를 보행하는 자 및 전선을 손대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하여 엄벌에 처하고
㉯ 군용철도와 전선을 파괴하는 자 또는 그 모의를 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며
㉰ 범행자가 속한 군수와 촌리도 엄벌에 처한다

이런 악랄한 규정 때문에 억울하게 재산 뺏기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사례도 많았습니다.
다음 사진은  당시 철도용지 수용 방해자 학살장면입니다. 1906년 찍은 사진인데 마산에서 촬영한 것은 아닙니다.


토지주였지만 토지의 매매와 경작은 물론 심지어 출입까지 통제 당했던 마산포 주민들은 이 악랄한 일제의 탈취에 격분하여 창원감리에게 사정을 호소하였고, 창원감리 현학표는 이런 사실을 외부대신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 보고에 대해 외부대신은 지령을 통해 간섭 의사를 밝혔으며 이때부터 이 문제가 확대되었습니다.

정부의 지령에 따라 감리는 뒤늦게 철도부지에 대해 조사를 착수하였습니다.

조사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일인(日人)들이 토지를 강탈하면서 당시 일본영사와 철도감부반장이 일본인 박간(迫間)의 하수인 홍청장(弘淸藏,)
과 공모하여 한국인 손덕우를 앞 세워 한국인 토지주들을 회유했던 겁니다.  철도부지와 관련된 기록에는 모두 홍청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弘淸藏은 후에 남성동 매립 때 박간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당시 마산의 유지 일본인 홍청삼입니다
)

한국인 손덕우는 구한말 창원 감영의 감찰사 역임한 지역 유지로, 마산민의소 의장, 마산구락부 초대부장, 마산정미소 중역, 창신학교 부교장, 기독교 장로, 한말 박영효의 지인으로 창신학교 설립자 중 한 사람입니다.
1910년대에는 마산부 참사와 학무위원을 지낸 사람입니다. 마산포 사건 때도 박간(迫間)의 요구에 응해 박간이 원하는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지주를 찾아 통영까지 가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지역에서 덕망은 높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손덕우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손덕우를 통해 토지 가격은 얼마든지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여 토지주의 서명날인을 받아 표목까지 박았지만, 뒤에 가서 이 약속을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손덕우만 구금되는 수모를 겪고 일본영사와 철도감부반장은 그 책임을 서로 전가시키며 발뺌을 했다 합니다.

여기까지가 일본군(日本軍)의 마산철도용지 강점 과정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입니다.
김용욱과 김준의 연구에서 밝혀진 내용을 옮겼습니다.

이 이후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록을 발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을사조약 체결로 통감정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철도용지 강점 계획이 일본의 의도대로 쉽게 시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1911년 간행된『馬山と鎭海灣(마산과 진해만)』에서 나오는 통계와 다른 여러 자료에서도 중앙마산지역의 철도용지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아도 을사조약 직전에 일본군부의 의도대로 마산의 철도용지가 결정된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만, 그후 제작된 사정지적도와 사정토지대장을 확인해본 결과, 사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단, 원래 그들이 계획했던 규모와 형태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탈취한 토지 중 일부는 나중에 마산 거주 일본인들의 자녀 교육비 충당을 위한다는 명복으로 일본거류민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1908년 일본거류민단은 예산의 상당부분을 점하는 교육비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철도용지를 싸게 대부 받아 원하는 사람에게 전대(轉貸)함으로써 연간 10,000원의 이익을 얻었습니다. 당시 백미가 1石當 19원이었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강제로 빼았은 땅을 임대하여 후세교육비로 사용했던 셈이죠.

강압적으로 무상 탈취한 토지를 철도용지란 이름으로 20여 년간 소유한 일본 군부는 1920년대에 들어서 입장이 바뀝니다.

1920년대 들어서자 마산부민들이 마산포와 신마산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는 철도용지가 마산의 도시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마산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상 불편했던 관아건물의 위치에 대하여 불만 때문에 관아건물을 중앙지역으로 옮기자는 요구가 일었습니다.

이런 여론에 따라 일제는 철도용지를 마산부에 불하하게 되었고 마산부는 이 토지 중 상당 부분을 기업과 개인에게 불하하는 한편 마산의 중요한 광공서를 이곳으로 이전시켰습니다.<<<

 


Trackback 0 Comment 0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2

5백 갈래로 나누어진 민강(岷江) 도강언의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가 그것이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1

천부지국(天府之國) 언젠가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그 동안 십 수차례 중국을 드나들었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

노회찬의 추억
노회찬의 추억 2018.07.30

노회찬 의원과 저의 인연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매체를 통해 저만 그를 알았을 뿐 그는 저를 몰랐습니다. 노회찬 의원을 직접 만난 것은 2016년 2월쯤이었습니다. 그해 4월 선거를 앞두고 창원에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처음 만..

북한건축 - 건축은 건축의 눈으로 보아야

(지난 5월 29일 「건축사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글 중 '우리'는 건축사를 말합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은 그 날, 이 나라 모든 국민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찬장에서 제주도 소년 오연준의 목소리..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4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4 아파트의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아파트 사용자들은 첨단시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3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3 2002년 말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었다. 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보급률 역시 2008년에 100%를 상회(100.7%)함에 따라 주택의 양적 공급이 부족한 상태는 아니라고 볼 ..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2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2 오늘날 우리나라 도시들을 뒤덮고 있는 아파트 홍수의 시작은 1988년에 시작한 ‘주택 2백만 호 건설’이다. 이 사업은 전년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내놓은 공약이었다. 2백만 호..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1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1 1960년대 이후 계속된 인구의 도시집중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에 비해 택지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을 낳았다. 이런 현실은 필연적으로 주거의 집단화와 고층화를 요구하였고 그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0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2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 시작 다음 해인 1972년부터 전개되었으며 담장이나 지붕 등의 부분적 보수와 개량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초가지붕이 비위생적이고 아름답지 못..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9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1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농촌은 전쟁으로 입은 농토의 피해와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아직 근대화의 영향을 받지 못한 채 재래식 농경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거환경 또한 전쟁피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8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3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택 시장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단독주택은 대부분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