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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1) - 강점제1시기

-일본인의 마산포 토지 소유-

남성동의 매립으로 1912년 당시 전체면적의 31.4%이던 일본인 소유 토지가 1920년에는 35.0%로 변했습니다.

매립 직후에는 매립시행자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이 전량 소유함에 따라 41.1%로 급증하였다가 35.0%가 된 것입니다.

이 시기 한국인들이 소유한 토지는 1912년 당시 63.2% 이었으나 1920년에는 62.5%로 줄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토지소유변화를 단순 비교하면 일본인 소유의 토지는 3.6% 증가하고 한국인 토지는 0.7% 줄어든 셈입니다.

아래 표는 1912년과 1920년의 마산포 토지소유 변화를 나타낸 것입니다.

 구분 정부. 마산부  기업. 단체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게
 필지수  5  10 853   271 18   1,157
 비(%)  0.4 0.9   73.7 23.4   1.6 100.0 
 면적 5,783.54  1,299.18  107,051.13  53,228.14  2,105.79  169,467.77 
 비(%) 3.4  0.8  63.2  31.4  1.2  100.0 
 필지평균  1,156.71 129.92  125.50  196.41  169.99  146.47 

 필지수 10  981 274 12  1,286
 비(%)  0.7 0.8  76.3  21.3   0.9  100.0
 면적 760.99  2,714.05  116,320.88  65,000.11  1,323.64  186,119.67 
 비(%) 0.4  1.5  62.5  35.0  0.7  100.0 
 필지평균 84.55  271.41  118.57   237.23 110.30  144.73 
             


그렇지만 원마산(마산포)에 새로 조성된 박간(迫間) 소유의 토지가 8,078평이었던 것을 감안해보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오히려 이 시기에 박간 외에 다른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에게 1912년 이전에 사들였던 토지를 상당히 넘겼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1912년과 1920년 토지소유를 비교한 아래의 두 그림을 보면 쉽게 이해 가능합니다.

이렇게 일인 소유의 부지가 1910년 대 후기 동안 작아진 이유는, 매립지 때문에 중심상권이 바뀌면서 발생한 소유권 이동 및 사업장 이동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신마산과 원마산이라는 두 핵에만 집중해 있던 여러 시설들이 시내 전역으로 흩어지는 시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원마산 중심상권에 변화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이미 전국에 알려질 정도의 시장으로 발전해 있던 마산포장(馬山浦場)이 매립이라고 하는 새로운 변화에 의해 크게 바뀌었습니다.
굴강과 선창은 없어지고 박간의 토지가 원마산 해안의 중심이 되는 구역을 차지하게 되어 마산포는 바다와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일찍이 창원부윤 이기(李琦)는 마산포가 매립되면 도시구조가 크게 바뀔 것이라고 예측하여 1907년(隆熙元年) 11월1일,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이 세우고 있던 원마산 해안매립계획을 무산시키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올렸던 보고에서 「․․․만약에 (원마산 해안을) 타인이 매립해 버리면 (원마산은)입이 틀어 막힌 목구멍이나 문이 잠겨버린 집과 같이 되어 (원마산 내의) 수천 호 주민은 결국 생업을 잃고 흩어져 비참하게 될 것이라․․․ (
昌原港案1, 議政府 外事局, 隆熙元年11月1日字 報告 第3號 / ․․․萬若讓與於他人埋築오면 便同塞口之咽喉요 閉戶之門扉라 本港幾千戶居民은 勢將失業渙散乃己기․․․)고 했는데 이 예측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② 일본인의 소유변화가 수성동 일대에서는 적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성동은 새로 조성된 매립지와 가깝고 상업용보다 주거용의 건물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적 상권변화의 영향이 적은 지역이었습니다.
위의 두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인들의 토지매매는 수성동을 제외한 동성동․오동동․중성동 등에 산재해 있던 토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중심권으로 부상한 매립지 부근의 땅은 매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 동안 지속해 왔던 서성선창과 백일세 선창, 그리고 서굴강이 없어지고 외부에서 마산의 선창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새로 개통되는 도시구조의 변화는 당시의 원마산 상권이동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두 사실을 근거로 볼 때, 일본인들의 토지매도 이유는 원마산의 상권이동과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이동 장소는 박간의 매립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중심상권으로 부각된 매립지로 옮겨가기 위해 그 때까지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를 처분하거나 아니면 사업장을 그곳으로 이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간파한 박간이 매립지의 차지료(借地料)를 고가로 받았던 것입니다.

매립으로 일인소유의 토지 필지 수는 271필지에서 274필지로 3필지 늘었습니다. 필지 당 평균면적도 196.4㎡에서 237.2㎡로 40.8㎡가 커졌습니다.

일본인 소유의 토지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소규모 형태에서 매립으로 조성된 큰 규모의 형태로 변하는 과정에서 그 단위면적이 커진 것입니다.

이는 1910년대 초기에 비해 일본인들의 소규모 토지 중 일부가 한국인에게 다시 넘어갔지만 대신 중심상권지역에 대한 지배는 강화된 결과입니다.

이런 변화는 개항 때부터 시작된 일인들의 원마산 토지지배가 점점 구체화․집중화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통계도 일본기업을 제하고 개인 소유의 토지만 계산한 것이므로 실제로 기업소유의 토지까지 합한다면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율은 이 보다 더 높았습니다. 기업소유 부지 중 거의 전부가 일본기업이었기 때문에 이런 계산이 가능합니다.

이에 비해 중국인 소유의 토지는 1912년 당시 1.2%, 18필지였던 것이 1920년에는 0.7%, 12필지로 변하였습니다.

중국인 소유의 토지가 이렇게 작아진 이유는 일본의 지배체제가 합방 이후 점점 강화되면서 중국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림동 일대 중국인 집단주거 현상도 강점기가 지나는 동안 많이 퇴색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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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9) - 강점제1시기


<1910년대 마산포 도로>

1912년부터 1915년까지의 시기에 일어난 마산포의 대대적인 도로개설공사 결과, 그 때까지 자연발생 취락에서 생긴 꾸불꾸불하고 좁은 길을 자르면서 폭 8-10m의 직선형 도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때맞춰 시행한 매립지에서도 같은 크기의 도로가 개설되면서 두 지역의 도로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도로의 규모와 형태변화는 마산포(원마산) 도시구조에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마산포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모인 시기를 마산창이 개설된 1760년으로 볼 때 이것은 실로 150년 만의 대변화였습니다.

지난 주에 보았지만 다시 한 번 더 매립 후 달라진 마산포 도면을 보겠습니다.
매립과 도로개설 이전의 도면과 이후 도면입니다.


이 도면
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에 동서방향으로 동성동에서 부림동을 지나 신마산과 이어지는 도로(현 남성동 파출소 앞도로)와 신마산에서 시작하여 북마산 지역을 지나 창원으로 연결되던 외곽도로(좌상단)가 뚫였습니다.

그리고 교방동과 회원동 지역, 성호동과 추산동지역이 원마산과 원활히 연결되게하는 두 도로(현 부림시장과 창동 네거리를 지나는 도로)도 뚫렸습니다.
성호동의 현 성호초등학교 진입도로의 폭도 넓어졌습니다.

좌측, 즉 신마산에서 들어와 동서로 길게 뻗은 도로의 동쪽 끝 부분 공지는 개인 소유지였습니다.
지도의 형태를 보면 이 땅은 정차장이나 회차장(回車場)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동성동 101, 105, 124번지로 추정되는데 현 본초당한의원과 한마빌딩 사이의 부지로 추정됩니다.

마산포 도로개설공사는 1915년 이전까지 시행되었으며 1915년 이후부터 1920년까지는 별로 없었습니다. 1918년 수성동의 남쪽부분에 있던 폭3-4m 도로가 6-7m의 폭으로 넓혀졌을 뿐입니다.
새롭게 개설된 직선형 도로는 매립지에는 6m와 10m, 조창 부근에 개설한 도로는 8m와 10m의 폭이었습니다.

1910년 당시 원마산 복원도에 의하면 전체면적은 198,369.27㎡였는데 그 중 대지 면적이 169.467.77㎡이었으며 도로 면적은 28,901.50㎡로 도로율이 14.57%였습니다.

그러나 박간(迫間)의 남성동매립으로 원마산의 면적은 원래 면적의 19.4%인 38,479.34㎡가 늘어나 236,848.61㎡로 변했으며 도로면적은 매립과 신설도로 등으로 인해 원래 면적의 무려 75.5%나 되는 21,826.44㎡가 늘어난 50,727.94㎡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원마산의 도로율은 1910년 당시 14.57%였던 것이 1920년에는 21.42%로 급증하였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도로율이 높아진 시점은 매립과 도로개설사업이 종결된 1915년경으로서, 약 3-4년에 걸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마산포 도시의 근대화는 이렇게 식민지배를 위한 일본의 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2011/07/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2011/07/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2011/07/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2011/07/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8) - 강점제1시기
2011/08/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2011/08/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0) - 강점제1시기
2011/08/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1) - 강점제1시기
2011/08/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2) - 강점제1시기
2011/08/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3) - 강점제1시기
2011/09/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2011/09/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2011/09/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2011/09/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7) - 강점제1시기
2011/10/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8)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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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8) - 강점제1시기

<마산포에 뚫린 최초의 신작로>

통감부 시절인 1907년경에 이미 마산포의 도로 폭을 조금 넓히거나 형태를 곧게 하는 가로개수 공사가 마산경찰서 주관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근대식 도로가 건설된 것은 1912년부터 1915년까지였습니다.

이 때 개설된 도로들을 사정토지대장에서 확인해 보면 1912년부터 1915년까지이지만 시기는 다양합니다. 도로의 개설 시기가 토지대장에 기록된 시기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3-4년 사이에 공사가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업으로 자연발생적인 좁은 골목길뿐이었던 마산포에 폭8m, 10m의 쭉 뻗은 새 도로가 신설되었습니다.

다음 도면은 도로가 개설되기 전의 마산포와 개설 후 모습, 그리고 도로개설 후인 1916년 지도에 나타나는 마산포 모습입니다.
두 번째 도면에서 직선으로 뻗은 넓은 길이 신설된 계획도로입니다.

 

박간(迫間, 하사마)에 의한 매립공사가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시행된 것을 감안하면 이 도로개설공사는 매립공사와 동시에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시에 진행되었을뿐만 아니라 마산포 전체의 도로망 구성을 볼 때 매립지의 도로망과 신설된 도로망은 마산포 전체도로계획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원마산의 계획도로 개설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1912년 10월 7일에 조선총독부관보 제56호로 각도 장관에게 보낸 훈령 제9호로부터 시작된 전국적 규모의 「시구개정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구개정사업」이란 도시의 도로․교량․하천 등을 근대적으로 정비하고, 구획별로 건축물의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도시계획의 성격입니다.

총독부 훈령 내용은「지방에 있어서 추요(樞要)한 시가지의 시구개정 또는 확장을 하려고 할 때에는 그 계획설명서 및 도면을 첨부하여 미리 인가를 받을 것. 다만 일부의 경이(輕易)한 변경은 그러하지 아니하다」입니다.

이 시구개정사업에 관한 훈령에는 그 구체적인 목적과 비용부담 등에 관한 설명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한 장의 훈령이 그로부터 20년 이상이나 한국 땅 안의 시가지를 개조하고 규제하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마산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은『마산항지』에서 이 도로개설사업에 대하여「마산포의 시구개정문제(馬山浦ノ市區改正問題)」와 「제4회 민회의원선거」라는 항목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마산의 민회의원 16명 중 마산포에 거주한 의원이 7명이었다. 그런데 마산포와 신마산에 거주하는 의원들끼리 서로 마산포에 개설될 도로의 노선(路線)에 관한 이해관계 때문에 다툼이 많아 회의가 계속 공전되면서 결론을 얻지 못했다. 결국 당국에 일임하게 되었지만 시행하지 못하다가 1912년 제4회 민회의원들에 의해 마산포의 도로개설사업이 비로소 최종 확정되었다. 모두 13호선까지 계획했으나 높은 지가(地價) 때문에 1호에서 5호까지만 공사를 하고 6호부터 13호까지는 시행하지 못했다」

계획도로의 노선 때문에 민회가 공전되고, 민회의원끼리 패거리를 만들어 싸웠으며, 높은 지가 때문에 계획한 것만큼 공사를 시행하지 못했다는 등의 사실은 당시 마산포가 얼마나 상업중심지로서 가치가 높았던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기야 당시 나온 자료를 보면 마산포가 신마산에 비해 훨씬 거래량이 많았으며 이 때문에 신마산의 일본인들도 마산포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니 세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아마 앞의 두번째 그림에 표기된 신설도로가 위 기록에 나오는 1호에서 5호까지의 도로일 것입니다. 그러나 6호부터 13호는 시행하지 못했다니, 그곳이 어딘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때 신설된 도로의 위치는 가능한 한 기존의 골목길을 확장하여 도로를 개설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① 기존 도로의 체계를 유지하고
② 복잡한 이해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보편적인 방법을 선택했으며
③ 토지 보상비용의 절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1912년 토지이용도와 1920년 토지이용도를 비교해 보면 대부분의 도로가 기존의 골목길을 넓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산항지』에「도시계획에 저촉되는 대지의 보상비가 너무 고가였다」라는 내용을 보아도 기존 골목길을 도로로 활용하여 비용절감효과를 노렸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때 뜷린 도로는 마산포 최초의 근대식 도로로서 신마산에서 시작된 장군로와 이어졌으며 매립지의 도로와도 연결되었습니다.
비록 미미하지만 원마산에 최초로 격자형의 근대적 도로망을 갖추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최초로 나타난 정형의 부지와 근대적 도로는 이미 원마산 상권의 중심지였던 이 일대를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번에 걸쳐 살펴 본 바와 같이 ‘남성동 매립’ ‘마산창 철거’ ‘근대식도로개설’ 등 1910년대에 나타난 마산포의 세 가지 변화는 1760년 조창 설립 이래 지속되어온 원마산 도시공간형태를 대폭 바꾸어놓았습니다.

이 변화가 1910년대 전반기 동시에 일어났다는 점에서(매립 1911-1914, 마산창 철거 1913, 도로개설 1912-1915) 이미 통감부 시대부터 시작된 식민지배 기반구축사업의 일환으로 파악됩니다.

즉 신마산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이 이동에 불편함을 겪으면서도 그들의 '최고의 시장'이라고 여겼던 마산포를 적극적으로 개발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효율적이고 근대적인 도시시설을 준비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식민도시정책의 적극적인 준비’였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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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640여 평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였습니다. (도로면적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각종 자료에 나오는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마산지방해운항만청이 발간한 『마산항백서』에 의하면 이 매립공사는 1911년 착공되어 1914년 7월 준공되었다고 합니다.
『마산항지』에서는 1910년 착공하여 1913년 준공되었다고 기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매립공사는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은 일본 화가산현(和歌山縣) 출신으로 대판 오백정장평(五百井長平)상점에 들어갔다가 21세가 되던 해 한국으로 왔습니다.
무역업으로 일을 시작한 박간은 1905년부터는 독립하여 수산업․창고업․목물무역업․토지매매중개업 등에 종사했습니다.

유명한 동래별장의 주인이며 당시 부산 제일의 땅 부자였습니다.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경상남도회부의장․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였고 부산토지주식회사사장․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쥐락펴락한 인물입니다.

1923년 부산을 현지 르뽀한 잡지 개벽(開闢)의 기자는
「․․․․迫間方太郞 같은 사람은 그 한사람의 부력(富力)이 10,031호 조선인의 전 부력을 당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도시사학자 손정목은
‘그가 개인적으로 한반도 전체 일본인 중 최고의 자산가였다’
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나온 일본인 중 최고부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지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경남 도내 소작지의 3.5%를 소유하였고 소작농이 2,000여 호가 될 정도의 대지주였으며 김해 진영면과 창원 대산면 동면 등 3개면에 걸친 진영농장의 주인이기도 했으니 옛 창원시의 땅도 많이 가졌던 셈입니다.

그런가하면 1896년 11월에는 부산에서 자본금 2만 5천원으로 부산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 세운 일본인 회사의 효시입니다.

유명한 '마산포 사건' 때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하도록 하였고, 그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도 했으니 마산과도 인연이 깊은 셈입니다.

유장근 교수와 함께 걸었던 도시탐방대 답사 때 무학산 어느 능선에서 그의 땅이었다는 표지석이 서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7-80년은 되었을 돌이었습니다.
후에 생길지도 모를 ‘마산근대사 박물관’에 전시하기 딱 좋은 유물이라, 보관해 놓을 생각도 했는데 무거워서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박간소유지(迫間所有地)’라고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간의 ‘마산과의 인연’은 바로 남성동 매립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개항 초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매립 때문에 생긴 충돌, 즉 앞서 포스팅한 김경덕 매축권에 대한 홍청삼(弘淸三)의 권한 계승 시비 사건(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이 있었던 이곳을 그가 매립한 것입니다.

매립의 실제 전주(錢主)는 박간방태랑이었지만 이 사업을 마산에서 직접 시행한 이는 바로 홍청삼(弘淸三)이었습니다.
홍청삼은 당시 마산거주 일본인의 거물로 현 제일여고에 있었던 신사건립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다음 그림은 제가 복원한 당시 지도인데 이 그림을 보면 쉽게 매립전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것은 매립 전인 1910년 경 도면이고 뒤것은 매립이 끝난 1920년 도면입니다.
 

 

이 때 매립된 토지의 지번과 소유자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토지는 총 52필지로 수성동115, 116, 117번지와 남성동 172번지부터 221번지까지였습니다. 수성동에 3필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 지역의 명칭을 ‘남성동 매립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매립된 52필지 중 수성동 116번지 374평과 117번지 34평, 합408평은 일본인 송원조장(松原早藏)의 소유(■부분)로, 남성동 200번지는 국유지(●부분)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매립주 박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항만의 요지(要地), 즉 초록색으로 표시한 ●부분의 남성동 200번지, 102평의 대지가 국유지로 된 사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박간이 너무 넓은 대지를 매립을 통해 일거에 소유하게 되자 그 답례로 부두용지 혹은 공공건물 부지로 총독부에 헌납했던지, 아니면 공공의 목적으로 그 땅을 정부가 매입했는지, 그저 추정만 해볼 뿐입니다.

박간 소유의 대지 49필지 7,568평은 아무런 변화 없이 전부 1936년 2월 22일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박간수웅(迫間秀雄)에게 이전되었고, 그런 상태로 해방까지 갑니다.

박간수웅(迫間秀雄)이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성이 같다는 점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미루어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승계 시켰다면 아들아닌가 라고 추정했을 뿐입니다.

다른 기록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경남지역 일본인 지주의 형성과정과 투자 사례, 1999, p.68, 한국민족문화 제14집」에 의하면 박간의 아들로 박간일남(迫間一男)이 등장하고, 그의 가계 중 박간무웅(迫間武雄)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간수웅은 혹 박간의 집안 조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이 많은 토지를 한 필지도 매매하지 않고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대지 혹은 건물을 전부 임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지역에서 발간된 자료에서는 ‘
새로 매립된 토지의 가격이 최저 7원 50전에서 최고 22원까지 토지의 위치에 따라 상당한 격차가 있었는데 이를 박간이 분양하였다’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 매립지가 해방 때까지 소유자 변경이 없었다는 것을 토지대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馬山港誌』의「馬山浦 埋立地」편에서도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매립지에 대해「․․․유감스러운 것은․․․․․․차지료(借地料)가 비교적 고율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박간이라는 일본인 단 한 사람에게 마산포에서 생업을 이어 가던 모든 사람들이 대지와 혹은 건물을 임대하여 영업을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튼 매립 후부터 이곳은 원마산 상권의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것처럼 마산만에는 박간 매립 전부터 여러 차례 매립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군부 혹은 공공기관에서 시행했거나 임의의 매립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박간의 매립은 민간인이 이윤을 목적으로 법적허가를 득하여 매립한 사례로 최초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미 포스팅한 1910년경 마산포 토지소유상태를 통해 이미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은 확인했습니만 본 매립사업 이후 일제의 원마산 상권 장악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매립은 일제가 항만도시 마산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식민정책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수탈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때 매립된 남성동 해안에는 석축안벽(石築岸壁)과 석축돌제(石築突堤) 등의 항만시설이 조성되었고 소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과 물량장을 갖추었습니다.
이 부두는 어선과 소형 화물선들의 정박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통영․거제 등 남해안 일대를 운항하는 연안 여객선 부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립지에 신설된 도로 사이에는 원정우편소(元町郵便所, 현 남성동우체국)를 시작으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매립하고 10년 쯤 지난 1924년, 이곳에 다음과 같은 길이 63.6m의 사석방파제가 설치되었습니다.

제 나이 열 두세살 쯤,
이 방파제 위에서 낚시를 했는데 팔뚝만한 뽀드라치를 한마리 낚아 올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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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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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한가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강점 제1시기에 시행된 매립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에는 봉암동과 남성동 두 번의 매립 밖에 없었습니다.


<마산자유무역지역의 최초 매립>

매립이 시작되기 전, 마산의 해안에는 70m에서 200m에 이르는 간석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봉암동, 현 마산자유무역지역에는 최고 1㎞에 달할 정도의 대규모 간석지가 있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지도 중 마산만의 수심이 나타나 있는 것들을 보면 봉암 지역의 넓은 간석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보시죠.
연두색으로 표시된 지역으로 현재 마산자유무역지역입니다.


이런 간석지는 당시 마산포 주변의 주민들에게는 해산물을 제공하는 보고(寶庫)였지만 일제의 눈에는 얕은 수심이 경제적으로 매력 있는 매립 대상지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합방 직 후 곧장 매립공사가 있었습니다.
합방 후 최초의 마산 앞바다 매립인 셈입니다.

사실 이 봉암동 간석지 매립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1916년 일본육지측량부에서 측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1 / 50,000 지도에 최초로 매립되어 있는 것이 나타날 뿐인데 매립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아낼 방법도 없었습니다.
바로 다음 지도입니다.

 
이 지도 만으로는
매립 시기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것, 1916년 지도에 나타나니 1910년대 초반이었지 않나? 정도 밖에 추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추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 1916년 발행된 1 / 50,000 도면에 나타나는데 지도제작 기간을 고려해보면 1910년대 초반에 매립했을 것이다.
㉯ 도면상 일부는 논으로 이미 표기가 되어 있고 일부는 호안표시는 있지만 아직 논표시가 없는 것으로보아 매립이 진행 중이다. 인력으로 공사를 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공사를 시작한지는 꽤 오래되었을 것이다.
바다 매립은 완공 직후부터 곧 바로 논으로 사용하기가 곤란하다.
㉱ 동척마산출장소가 1909년10월 6일 개설되었다.
㉲ 간석지 매립은 그 주변일대에 사는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을 것이어서 일사천리로 공사를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추론을 근거로 한일합방 직후에 바로 매립을 시작하여 1913년-1915년 사이에 이 정도로 공사가 진척되었던 것 아닌가 하는 겁니다.

면적은 지도 비교에서 확인한 결과 약 9만여 평이었으며 위치는 양덕천․산호천․삼호천 하구(河口)입니다.

이 매립지의 영역을 가장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1947년 미군이 촬영한 항공사진입니다.
진작 매립이 끝나 농토로 변했습니다.

이 지역의 현 위성사진입니다.


오래동안 봉암동에서 거주했던 분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이후 봉암동 지역에서는 이 매립지를 '청수둑안'이라고 불렀다고 하면서 이 매립지는 일본인 '청수'의 소유였다고 했습니다.

이 시기에
신마산 지역에서는 매립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1910년대에도 마산의 해안매립에 눈독을 들이는 일본 자본가들은 있었습니다.
『매일신문』 1919년 6월 11일자 기사에서 '마산만 매립을 구상하고 있다'는 기사 때문입니다.
현대문으로 약간 바꾸었습니다.

馬山 本町 1丁目에서 同 3丁目에 이르는 海面을 埋築하기로 計劃을 세우고 東京 某 實業家가 不日 技師를 派遣하여 實測을 하고 當局에 出願할 것인데 該 海面埋築의 目的은 五州輕鐵 開通 後 馬山을 豫想한 것인데 同 埋立地에 家屋 及 倉庫를 建築하야 一般의 要求에 應하고자 한다더라

 본정 1정목에서 3정목은 현재의 월남동1가에서 3가 까지를 말하는 것인데 이 지역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인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과 국종웅일(國宗雄一) 두 사람이 매립한 위치와 꼭 같습니다.
기사에 나오는 동경의 모 실업가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으며, 이 기사의 매립추진계획이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의 매립과 이어진 것인지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시기(1910년대)에 이미 마산만의 상업용 매립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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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마산포 최초의 수익용 매립-

馬山(1919年修正測圖)

1919년 / 육지측량부 / 조선총독부 / 1:10,000 / 柏書房 影印本 / 울산대 도서관

지난 주에 포스팅한 「馬山」을 보완한 지도입니다.

1916년 측도하여 1917년 발행했던 지도「馬山」을 1919년 제1회 수정측도하고 1924년 6월 25일 인쇄하여 6월 30일 발행한 것이 이 지도입니다.
따라서 이 지도의 도시상황은 1919년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저작권과 인쇄 및 발행자는 앞의 지도와 같습니다만 지도 가격은 인상되어 18전하던 것이 40전으로 많이 올랐습니다.
영인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삭제했는지 모르지만 이 지도에는 범례가 없다는 것이 앞 지도와 다릅니다.


지도에 나타나는 도시공간의 상황은 1916년 당시의 지도인 「馬山」과 거의 동일합니다. 1916년 이후부터 1919년까지의 시기에는 마산 도시공간의 변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밀하게 검토해보면 약간 달라진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예를 보아 이 지도의 제작이 매우 정밀하게 수정측도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다음 두 그림을 보면 매립 이후의 남성동 상황변화가 뚜렷이 나타납니다.
1916년에는 우편소와 몇몇 건물만 있었을 뿐이었던 이곳에 도로와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전과 많이 달라져있습니다.

두 지도의
남성동 매립지와 현재 위성사진을 비교한 그림입니다. 빨간색으로 표시해 놓은 곳이 남성동파출소 자리입니다.
불과 100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도시가 얼마나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들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길 중에서 어느 길이 옛부터 있었던 길인지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두 지도에 나타나는 남성동 매립지의 도로망도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16년에는 큰길만 있었지만 1919년에는 좁은 길까지 뚫렸습니다. 건물도 그 사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매립지 시작 부분에 '우편소'라고 적혀있는 건물이 지금의 남성동 성당 앞에 있는 남성동우체국입니다. 물론 지금 건물은 다시 지은 것이고요.

이 남성동 매립은 일제가 시행한 최초의 수익목적 매립입니다.
이 매립 이후 해방 때까지 마산 해안에는 땅으로 돈을 벌기 위한 일본상인들의 매립이 줄을 잇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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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2) - 강점제1시기

-한일병합 직 후 제작된 마산인근 군사극비 지도-

<마산 (군사극비)>

1916년 / 육지측량부 / 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 / 1 : 50,000 / 1/50,000지형도 / 국립중앙도서관

확대해 보았습니다.


이 지도는 1906년에 측도하고 1921년에 축도제판(縮圖製版)하여 같은 해 11월 25일 발행된 지도입니다.

제작자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육지측량부․참모본부가 동시에 표기되어있으며, 제목은 「軍事極秘 (戰地ニ限リ極秘)」로 되어 있고 그 아래 진해만요새근방9호(共三十一面), 오만분일지형도 마산5호(共十五面)라고 기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용 지도인 것 같습니다

이 지도와 관련된 기록을 소개합니다.
1986년 일본인
청수정부(淸水靖夫)가 쓴 『日本統治機關作製にかかる朝鮮半島地形圖の槪要』라는 책에 나옵니다.

 

조선반도 1/50,000지형도는 한일합방 이전 일본 육군에 의해 제작되어 병합 후 약도(제1차 지형도)로서의 형태로 햇빛을 보게 된다.

합병 후, 약도에 손을 가하여 지형도(제2차 지형도)가 작성되고 삼각측량 ․ 지형 측량 후, 기본도측도(제3차 지형도)가 완성되어 이것이 제2차대전종료까지 사용되었다. 이 지형도는 또 미국육군지도국(Army Map Survice)이 전략 용으로 전쟁 전후에 걸쳐서 복제한 지도이기도 했다.

1/50,000 기본도 측도(지형도)와 동시에 1/25,000와 1/10,000지형도도 주요지역에 제작이 진행되었다 ․․․․․․․

조선의 기본도는 1/50,000지형도(일본도 같음)였었는데 약간씩 내용이 다른 3종류의 1/50,000지도가 제작되어 있었다. 제1차의 지형도는 통칭 약도라고 말하는 한일합방이전에 제작된 지형도이고, 제2차 지형도는 합방 후 약도의 수정 형으로 제작된 지형도로서 내용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제3차는 삼각측량의 위치의 기준을 둔 기본도이다 ․․․․․․․

기본도(제3차의 지형도)정식 명칭은 「오만분일지형도」라고 한다. 한반도에 삼각점 망이 완성되어 그 결과에 기초를 두고 작성된 지형도이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사이에 전역이 완성되었다. 각 년차의 측량 도면 수는 지형도. 간행목록. 기타에서 조사한즉 전체가 727면이지만 측량․지도백년사에 있는 기재는 722면으로서 5면의 차이가 있다․․․․․․․

1926년 이래 비밀지도 구역 중 특수한 기밀지구에 무관한 지역은 등고선, 표고숫자를 삭제하고 해안 등의 변지형(變地形)의 상세를 생략한 교통도를 간행했다.

 

위의 기록을 읽어보면 이 지도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완성된 제3차 지형도인 기본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사극비’라고 기재된 것은 그 후 일본군에서도 이 지도를 사용한 결과로 보입니다.

1:50,000 지도이기 때문에 세밀한 도시 공간 변화를 알 수는 없지만 1916년 동시에 제작된 1:10,000 지도「馬山」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1:10,000 지도「馬山」에서는 표기할 수 없었던 마산부 범역 밖의 상황을 알 수 있어서 요긴한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마산부의 북쪽으로 칠원을 거쳐 대구로 가는 길, 함안을 거쳐 진주로 가는 길, 그리고 창원을 지나 부산으로 가는 길이 1905년 개통된 마산선 철도와 함께 표시되어 있으며 중리․칠원․창원․진영지역까지 연결되는 대소 도로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도로 사이사이로 형성되어 있는 취락도 표기가 잘 되어 있어서 당시 마산 근방의 사정까지 잘 알 수 있는 지도입니다.

도시를 지나는 간선도로, 특히 석전동에서 창원읍 쪽과 줄이 방향으로 나누어지는 삼거리가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고, 공사를 막 끝낸 남성동 지역의 매립지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명으로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명칭들이 죄다 눈에 보입니다.
교방리, 회원리, 산호리, 상남리, 자산리, 완월리, 신월리, 봉정리(현 봉암동)까지 말입니다.

특이한 것은 봉정리 앞 간석지, 즉 현재의 마산자유무역 지역이 일부가 매립된 표기입니다.
합방 전후에 발간된 다른 자료들과 비교해 보면 이 지역 매립은 합방 직후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래 동안 봉암동에서 거주했던 분을 만나 확인했더니 “해방 이후 봉암동 지역에서는 이 매립지를 ‘청수둑안’이라고 불렀다”고 하면서 이 매립지의 소유자는 일본인 ‘청수’였다고 했습니다.

위 지도에 나오는 범위를 현 위성사진으로 한번 볼까요?<<<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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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3 00:00

해양신도시, 지금이라도 다른 길 찾아야

여러 정황을 보아 머지않아 마산해양신도시의 토지이용계획이 확정될 것 같습니다.
가포신항만 준공일자가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통합창원시가 ‘옛 마산시에서 계획하던 34만 평을 19만 평으로 축소하여 섬 형으로 신도시를 조성할 계획이며 이제는 매립지의 토지이용 문제만 남았다’고 밝힌 지 몇 달이 지났습니다.

마산만 내만에, 그것도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섬 형으로 매립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고 다양한 해결책도 있었습니다만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통합창원시에서는 ‘고민과 노력을 다해보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라는 입장이지만 제 눈에는 중앙정부와 그 주변에서 정해주는 안을 그대로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원안이 최악이라면 지금 안은 차악입니다.

지난 3월 17일 해양신도시문제를 함께 고민했던 몇 분들과 국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마산출신 두 국회의원과 국토해양부 담당국장을 비롯한 담당책임자들이 저희들과 신도시 문제를 놓고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그 날의 결론은 ‘국토해양부가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 다시 논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국회의원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마산시민들이 뽑은 국회의원과 함께 한 약속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이주영 의원은 집권여당의 예산결산위원장이었고 안홍준 의원은 국토해양부가 소속된 상임위원회 위원이었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머지않아 나올 ‘새로운 방안’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창원시가 ‘19만 평, 섬형으로 개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사실은 그 날 간담회에서 안홍준 의원이 도면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가 관심을 보이자 도로 넣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도면에 섬 형으로 된 신도시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일의 전후를 연결시켜 보니 '섬형 19만 평'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새로운 방안’을 놓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국회의원들은 창원시의 발표 후에도 아무 해명도 없었고, 그 날 이후 ‘신마산 해안일대 6만 여 평에 정부가 워터프런트를 조성해 준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신도시는 개발하고 싶은데 시민단체의 반대 때문에 인센티브를 제시한 것 같고, 그 안을 국회의원과 창원시가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후부터 오늘까지 창원시는 해양신도시의 토지이용계획을 어떻게 할 건지 고민하고 있다 합니다.
사실 오래 고민해야할 만큼 복잡한 일도 아닙니다만 매립비용과 공공용지의 반비례관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처럼 만들어지는 해양신도시에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환경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도시구조적으로도 마산도시에 도움 되는 일이 아닙니다. 
특히 염려스러운 것은 도시학자 테오도르 폴 김이 '가장 나쁜 도시'라고 말한 ‘도시공간의 분리현상’입니다.

얼마 전에 마산YMCA시민사업위원들과 배를 타고 마산 앞바다로 나갔는데, 그 때 경남대 교수 한 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런 바다를 메우다니, 제 정신인가?"

이 도시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제와서 바꿀 수 없다, 시간도 없고, 조건도 맞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그만한 사유를 이 도시의 미래와 수십만 삶의 무게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도시의 영원한 시간  앞에 1년이니 2년이니 해서야 되겠습니까.

사실은 해양신도시를 걱정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떠 올라 글을 올렸습니다.

저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분들,,,
이 사업이 끝나는 2020년 쯤,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국토해양부 사람들이야 ‘마산해양신도시’ 기억도 하지 못할 테고,

기업 측 사람들은 진작 마산 떠났을 테고,

시장과 관련공무원도 마산 올 일 별로 없을 테고,,,,

저야 뭐 여전히 마산에서 살면서 70을 바라보고 있겠죠, 별 탈이 없으면.

결국 해양신도시가 들어서면 저 섬과 함께 살아갈 사람은 저 같은 마산사람들 뿐,,,,

그 때 이런 후회를 하겠죠,,,,

‘아, 끝까지 매립하지 못하게 막았어야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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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종만 2011/08/05 11:57 address edit & del reply

    대표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저 또한 대표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만
    자칫 반대를 위한 반대로 여겨질 수 도 있겠습니다.
    저가 알기로는 항로개설에 따른 잉여 준설토가 발단이 되어
    해양신도시가 표면화 된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로 인해 미칠 영향들에 대하여 여러차례
    토론도 있었고 공청회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최선의 방법이 모색되었다면 이런 아쉬움은 없었겠지만
    한다고 한것이 지금의 축소방향인걸로 알고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면
    이러한 정책이 결정되지 않도록 논의 단계에서 힘썼어야 했습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에서 집행은 해야겠고
    해서 누구도 반기지 못할 19만평 신도시가 가시화 되는듯 합니다.
    최소한 이 문제에 지금까지 많은 관심과 노력이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누구나 공감가는 이보다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해야 될걸로
    봅니다. 대안없는 문제제기는 논란만 부추키면서 돈은 퍼붓되 일은
    제데로 되지 않습니다.
    왜 그때 하지말란짓을 해가지고 이모양이냐며 갈등은 증폭되겠죠.

    또 일을 해놔봐야 욕만 먹고 책일질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시민사회 일원 중 누군가 책임감을 가지고 확고한 대안으로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밥솥에 밥은 뜸이 돌고 있는데 소도방을 열어버리고 새로 밥을 할것인가?
    아니면 뜸돈 밥을 입맛에 맞지 않지만 먹을것인가?
    선택해야 되겠지요 ㅎㅎ

    • 허정도 2011/08/05 18:13 address edit & del

      임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금 구상되고 있는 방법은 좋은 대안이 아니다, 이런 이런 방법을 택하자, 수도 없이 많이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왔습니다.
      지금에 와서 뒤늦게 이러는 게 아니고, 말씀 하신대로 논의 과정에서 이미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의사결정권을 저희들이 가지고 있지 않으니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항로개설에 따른 준설토 처리방법에 대해서도 저와 시민단체, 이찬원 교수가 함께 여러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결정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 반대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해양신도시문제가 제 직업이 아닌 만큼 날이면 날마다 이 문제에 매달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건 양해를 좀 해주십시오. 많이 도와주십시오. ^ ^

2011/02/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각국공동조계지 조성 때의 매립>

각국공동조계지를 건설할 때, 해안선의 경계는 해수의 간조선과 만조선을 고려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계지의 북단과 남단은 만조선이 깊어서 매립을 한 후 호안공사를 했으며, 중앙부 세관지역을 비롯한 호안선은 전부 매립이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매립여부가 잘 나타납니다.
노란선은 현재 시내버스가 다니는 간선도로인데 그림의 비교를 위해 그었습니다.

이 지도는 1899년 마산개항 때 각국조계장정에 첨부되었던 것입니다.
전체 조계지 중에서 1차로 조성할 부분이 표기되어 있는데, 마침 간조선(Low Water Line)과 만조선(High Water Line)이 표기되어 있어서 매립여부를 판단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 그림은 1916년 일본 육지측량부가 제작해서 발행한 같은 지역의 지도로 조계지 조성공사가 거의 완료된 후 간행된 것입니다.


두 지도를 비교해보면 붉은 원으로 표기한 세 지역이 매립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큰 면적은 아니지만 남북단의 만조선이 도로의 위치보다 안쪽으로 나타나 있으며, 도로공사 후에는 호안선이 만조선보다 아래로 내려온 것이 매립사실을 증명해줍니다.

순전히 추정이지만 면적은  5-6천 평 정도인 것 같으며, 매립시기는 직전에 포스팅한 마산역 매립공사와 비슷한 시기인 1904-5년 정도로 추정합니다.

이 매립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글이 있습니다.
일본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이『마산항지』에서, 개항초기에는 조계지의 북쪽 신월천 하구(오른쪽 붉은 원 지역)가 바다를 매립한 곳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
습니다.

「․․․․․昌原橋より斜に新月洞に向つて上る道路は埋築したもので予は路傍の潮溜に三四回沙魚釣を試みたこともある, 居留地より來る路線は茲に劃塞せられ其の東方一帶は一面の蘆山である

․․․․․․창원교에서 비스듬히 신월동으로 향하여 오르는 도로는 매축한 것으로서 나는 도로 옆의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이 고이는 여울에서 서너 차례 망둥어 낚시를 해본 적도 있다. 거류지에서 오는 노선은 여기서 끊어지고 그 동쪽 일대는 하나의 갈대밭이다․․․․․」

글 머리의 창원교는 지금은 땅속으로 들어가버린 현 통술거리의 깡통골목 지하 하천을 건너던 다리입니다. 지하하천의 명칭은 신월천이었으며, 지도의 초록색 점이 창원교가 있었던 위치입니다.
신월천에는 창원교 외에 완월교(깡통골목 입구), 웅천교(완월교 윗편) 등 세 개의 다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육지 한복판인 이곳에서 갈대밭에 노는 망둥어를 낚시질 했다니,,,, 세월의 무상함에 옷깃을 여밉니다.

아래 그림은 위 지도의 현재 위성사진입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2011/01/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2011/01/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2011/02/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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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 앞에서 포스팅한 '계획만으로 끝난 다섯 번의 매립시도' 와 달리 지금부터는 실제로 시행된 매립공사를 소개합니다 -


<마산만 최초의 매립 - 1905년 철도공사 때 마산역 일대 매립>


지금도 마산만의 매립 때문에 지역사회가 갈등하고 있습니다.
마산해양신도시 건설용 34만 평 매립 계획의 원안추진과 백지화를 두고 시민들의 찬반이 팽팽하고, 매립으로 조성된 가포신항부지의 용도변경문제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100년 넘게 지속된 마산만 매립, 그 최초의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불행하게도 마산만은 첫 매립부터 마산포 주민들의 의사와 아무 상관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마산만 첫 매립은 한반도 지배를 꿈꾸며 승승장구하던 일제의 군부가 저질렀습니다.
1904년-1905년 마산과 삼랑진을 잇는 철도 마산선의 출발점인 마산역 부지를 조성하기 위한 매립이었습니다.

원래 이 철도는 한국인이 설립한 영남지선철도회사의 사업이었지만 러일전쟁 때 강제로 맺은 의정서에 준해 약탈해간 사업입니다.
명분이 군용철도였기 때문에 아마 우리 정부도 이 매립의 허가과정이나 공사에 관여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1904년 체결한 한일의정서 제4조의 규정을 이유로 일제는 마산조계지 북쪽 끝에서 원마산(마산포) 쪽으로 약 12만 평의 한국인 토지를 무상으로 일본철도감부의 군용철도 용지로 점유했습니다.

이때 일본 철도건설대는 마산역에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현 마산중부경찰서 앞의 벽산아파트(전 월포 삼익아파트) 인근해안을 매립하였습니다.

부근의 야산을 허물어 매립했다고 전해지고 있을뿐 매립의 규모나 방법 등 상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군용지 매립이어서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매립이 마산만 최초의 매립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매립전후시기의 지도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립 규모는 대략 3만6천여 평 정도로 추정합니다.

아래 그림은 이 매립공사가 완공된 10여년 후인 1916년에 일본육지측량부가 간행한 지도입니다. 이 지도에서 매립부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산역 건설을 위해
‘철로아래 직선해안 부분’을 매립한 것입니다. 해안선의 직선만 보아도 이 지역이 인공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파란 선이 원래의 해안선입니다.

  

매립 전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자료는 오른쪽 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1899년에 일본해군에서 제작한 마산포지도입니다.

위 그림의 자연해안선은 이 지도의 해안선을 옮긴 것입니다.

두 지도를 비교하면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앞 지도에서는 장군천이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뒷 지도에서는 장군천(파란색)이 마산만가까이에서 왼쪽으로 휘어져있습니다.
두 지도의 차이를 통해 마산역 일대를 매립하면서 장군천이 지금처럼 직강하천으로 변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위 그림을 현재 도시의 위성사진에 옮겨보았습니다.
그림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만
두 그림에 그려진 노란 선(현재 사용되는 간선도로)을 비교하면 위치를 가늠해보기가 쉽습니다.
매립경계선 바깥에 있는 부지(쌍용양회, 마산지방해양항만청,마산여객터미널)는 마산역 매립 후 한참 뒤에 매립된 부분입니다.


한반도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러일전쟁(1904년-1905년) 때 있었던 마산만 최초의 매립,,,
도시의 공공적 이익은 물론, 제대로 된 주민 의사가 한 번도 반영된 적이 없는 마산만 매립의 나쁜 전통이 첫 매립부터 시작되었던 겁니다.

지금은 도시 한 복판이 되었습니다만,
100여년 전, 이곳에 철도를 건설하며 바다를 매립했던 그 시절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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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는날 갑자기! 사는 곳이 해안도로 근처라 아침마다매 창문을 열면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시설물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시멘트를 담아두는 창고와도 같은 곳으로 '싸이로(Silo)'라는 놈이다. 그런데 몇일 전부터 이 싸..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건축물과 각종공사> 마산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근대식 건축물을 많이 세웠습니다. 한일병합 이전까지는 주로 목조로 지은 공공기관이 주류였습니다만 1910년경부터는 벽돌조도 많이 지었습니다...

Co2배출 줄이는 그린빌딩(Green Building)설계(11)조명: 측창채광

측창채광은 천창채광과는 달리, 말그대로 벽면에 위치한 개구부(창문 등)를 통해 자연채광을 실내로 들여오는 방법입니다. 창문외에도 유리블럭, 낮은 고창, 채광뜰(Sunken)이나 안뜰로난 수직 개구부 등을 통해 측창채광으로 얻는..

진해
진해 2012/01/25

‘진해’ 지명에 대한 글입니다.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한제국시대에는 ‘통합 이전 창원시(옛 의창군)와 옛 마산시 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일원’을 ‘진해군’이라..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마산사람들의 배일감정> 일본인에 의해 사회 모든 분야가 달라지면서 한국인의 생활 방식도 많이 변했습니다. 1918년경만 하더라도 마산포 장날에 머리카락을 짧게 단발한 한국인이 보이면 신기하게 쳐다보았지만 1년이 지난 1919..

Co2배출 줄이는 그린빌딩(Green Building)설계(10)조명: 천창채광

자연채광 부분에서 잠시 거론되었지만, 파사드(전면) 개구부(측면 창문)를 통해 유입되는 자연채광이 닿지 않는 공간에 보조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으로 천창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측면에 창을 두는 것이 아니라 머리위 천정에 창을..

신년되면 많이 받게되는 달력, 디자인 확 바꾸면

1년동안 벽에 걸어두고, 또는 책상위에 놓게 되는 달력들은 1월에는 넘쳐납니다. 여기 저기서 받아둔 달력중에서 어떤 달력을 놓을까 잠시 고민하게 됩니다. 절에서 나온 달력이며, 근사한 미술작품을 곁들인 은행달력, 자사의 실적홍..

동영상 - 마산
동영상 - 마산 2012/01/16

지난 연말, 재경마산향우회 송년회용으로 마산도시사에 대한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서툰 작품이지만 나쁜 평은 하지 않아 공개합니다. 곧 설입니다. 마산사람들, 가족들과 함께 보면서 마산에 얽힌 추억이라도 나누어보시죠. 분량은 1..

Co2배출 줄이는 그린빌딩(Green Building)설계(9)조명: 자연채광 조닝

자연채광은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건물내 다양한 공간들에 햇볕이 잘 들도록 하는 통합적 설계방법입니다. 자연채광을 위한 설계에 있어서는 방(실)별로 유사한 목적과 유사한 빛 환경을 필요로 하는 방들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

보도 조차 맘 편하게 걸을 수 없다니

최근 창원호텔 맞은편에 현장이 생겼습니다. 두 달 남짓 사무실이 있는 정우상가쯤에서 중앙동 민원센터까지 하루에 두세번씩 걸어갔다 옵니다. 분명 보도가 설치되어 있는 길임에도 주차된 차량으로 인해 차도로 내려갔다 올라오길 몇차..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마산상공회> 1914년에 조선인 상업회의소가 와해되고 1908년에 설립된 일본인 상업회의소도 그 뒤 흐지부지된 후 1920년대까지 지역의 상공인들 단체는 없었습니다. 이 공백기에 「마산간담회」「마산경제회」「마산번영회」라는 상..

Co2배출 줄이는 그린빌딩(Green Building)설계(8)조명: 주광율

앞서까지는 외피에 대한 내용을 다뤄왔으면, 이제 더욱 시스템적이면서도 메카니즘적인 조명분야에 대한 내용을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주광율(DF)는 실내와 실외 밝기간의 관계를 수치로 나타낸것입니다. 자연채광을 통한 건물의 그린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