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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5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3

13. 정전 후의 체험들 - ‘이용범 다리

 

용베미 다리란 말을 언제 쯤 부터 들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용범(아래 사진 / 1905~1968)이란 인물의 이름이 널리 퍼진 계기로 미루어보면, 1954년 총선 이후였다고 생각된다.

참고 ; 자유당 전성기 건설업계는 이용범의 대동공업, 황의성의 조흥토건, 김용산의 극동건설, 이재준의 대림산업, 정주영의 현대건설, 조정구의 삼부토건 다섯 회사가 지배했다.

 

고장이 나면 불편이 컸던 양덕교(현 마산자유무역지역 정문 앞의 다리, 지금은 복개되어 다리로 인식되지 않는다)를 두고 불평과 비난의 말들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에도 공사자나 회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보거나 들었던 기억은 없다. 지금처럼 시공사의 이름을 써놓은 입간판 같은 건 그땐 구경한 일도 없다.

거기서 이백 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도 길을 가로지르는 어린내(어린천, 현 삼호천, 마산종합운동장 옆을끼고 내려오는 하천)’가 있어 다리가 놓였으나, 그건 양덕교보다 훨씬 뒤였고, 규모도 적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 합포초등학교 1학년 때 간 팔룡산 소풍 길에서 어린천 징검다리를 선생님 도움 받아가며 건너던 영상이 어렴풋이 남아있기도 하다.

후에 놓인 다리의 모습도 내의 양쪽을 간단하게 이어놓은 형태라 할까. 그래서 다리가 파손 되었을 때에도 차도 사람도 별 어려움 없이 길옆을 무너뜨려 만든 길로 냇바닥으로 다녔다.

큰 물 흐르는 날도 별로 없었던 것 같고, 그래서 위 아래쪽의 제방들이 큰 공사한 흔적 없이 야트막한 언덕처럼 되어있었다.

<70년대 어린교(위 사진 ; 70년대 초, 아래 사진 ; 70년대 말) / 사진 왼편에서 어린교로 뻗어나오는 도로는 현 마산고속버스터미널(75년 건립) 앞 도로>

 

그런 여건 때문에 어린교 이삼십 미터 아래쪽부터 바다 초입에 걸쳐(지금 삼각지 남단일대) ‘갈치막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갈치막이란 당시 산호동 봉암동 일대 사람들이 만든 조어로서, 갈치 배를 갈라 내장과 아가미는 젓갈로 만들고, 갈라진 몸통은 말려 건어물로 상품화시키는 작업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몇 집이 모여 했으니 전후의 난민들이 많이 모여들어 오십 년대 후반에는 조그만 마을을 이룰 정도가 되어, 장마철에는 덜마른 생선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주위로 풍기곤 했었다.

<부산 감천마을에 있는 갈치건조장(갈치막)>

 

양덕교는 어린교 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다리였다.

지금의 양덕 오거리까지 매축지라고 앞에서 얘기했거니와,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만든 물길이 바다에 닿도록 돌로 쌓은 방죽이 있었는데, 동쪽 것은 청수들 둑으로 연결되고, 서쪽 것은 갈치막까지 나있었다.

그리고 다리는 지금과 같은 위치에 놓였다. 그래서 밀물 때는 바닷물과 냇물이 합수되는지라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하천 폭을 넓혔기에 다리 길이가 긴 것은 이해되거니와, 높이가 왜 그렇게 높았던지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제방보다 사오 미터 높아 보였으니 지금 다리보다 이삼 미터 혹은 삼사 미터 높게 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거기 고개도 당시엔 꽤 높게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다리에 파손이 생긴 일이 거의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 바닥에 구멍이 생겨 거기로 아래 냇물을 신기한 느낌으로 본 것도 여러 번이요, 여기저기 금간 자국 때문에 아예 다리 아래로 가교를 놓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시공사를 욕했지만, 막연한 투덜거림일 뿐 회사명과 대표 이름 따위는 몰랐던 것 같았는데, 이용범이 창원에서 국회의원이 된 후부터 그에 대한 소문이 급격히 퍼졌던 것 같다.

대동공업사가 전쟁으로 떼돈을 벌었으며, 자유당의 제2인자 이기붕의 자금줄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지면서는 다리 고장 때 마다용벰이 다리가 그렇지 뭐’ ‘시멘트는 다 빼돌리고 밀가루로 발랐으니등의 비아냥이 사람마다의 입에서 예사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심지어오늘 인부들 시켜 다리 들고 있게 하고는 공사비 타내고, 내일 놓아버려도 또 공사비 다 타내니하는 등등의 우스갯말도 많이 오갔었다.

그런 야유의 절반 이상은 진실을 담고 있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자유당 몰락 후 몇 년에 걸쳐 나왔던 기록물들을 통하여 확인했던 것이다.

창원 동면 출신으로 일본에서 돈 벌어 와서 대동공업사를 세워 미국 막사 지어주고 잘 보여 전시 토건공사로 떼돈을 모아 집권 자유당 실권자 이기붕의 돈줄을 자임함으로써, 창원에서 돈 봉투와 고무신, 막걸리로 2선을 하고 자유당 경남도당 위원장까지 하다가 결국 혁혁한 코미디를 남겼다.

일자무식이었던 그는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삼선개헌 투표에서 의 구분을 못해 반대로 찍음으로써 2/3 득표를 못한 자유당이 사사오입이라는 불법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한국 정치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치부를 남겨 놓은 것이다.

양덕교나 어린교 공사를 대동공업사가 한 것인지 확인된 바는 없었겠지만, 저간의 이런 저질적 정치행위로 하여, 부실공사에는 의례 용벰이다리딱지가 따라 다녔으리라.<<<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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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11

11. 정전 후의 체험들 - 수학여행

 

전쟁이 막바지로 갈 때쯤 해선 민간자동차도 많이 다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주로 화물차가 많이 보였는데, 마산 부산 간에만 다니던 버스 숫자도 상당히 불어난 걸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군에서 불하된 차들을 개조한 것이었다고 했다. 화물차는 약간만 고쳐서 다니는 것으로 보였고, 버스는 엔진만 쓰고 껍데기는 드럼통 등을 두드려 맞춘 것이었다고 들었다.

<전쟁 직후 미군이 버린 드럼통을 펴서 만든 한국 최초의 버스>

 

어떤 차든 그때 우리들 사이에선 차타본 경험이 큰 자랑거리가 될 정도로 자동차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봉암동에서 양덕동으로 조금 나오면 양덕교(수출자유지역후문앞)로 오르는 고개가 지금보다 높게 있었는데, 당시 화물차의 엔진 힘으로는 그 정도의 고개에서도 힘들어 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거기에서 차에 기어 올라타고 가다가 오동동다리 고개에서 뛰어내려 학교로 가는 행태에 재미를 붙였었다.

차타는 재미에 허기졌던 아이들처럼, 때로는 차위에서 조수에게 꿀밤을 맞아 가면서도 그 행위에 재미가 들어 있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삼 일내내 차를 타고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호기였다할 만큼 뜻밖이기도 했다.

행선지는 경주, 차는 트럭이었다. 과정은 전술한 졸저 상식의 서식처를 활용하겠다.

 

행비는 아주 쌌지만 그것도 부담할 수 있는 상당수는 못 갔다. 차는 한반에 한대씩 배정되었다.

60명 중에 40명 안팎이 참가한 것으로 기억되었는데, 체격이 작은 애들이었지만 3톤 트럭에 40명이 앉으니 너무 비좁아서 앞사람의 엉덩이에 뒷사람의 다리를 꽉 붙이고도 제일 뒤의 두어 줄은 앉지 못하여 선생님들이 더 붙어 앉으라고 고함을 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 다음의 과정들은 더 뚜렷한 영상으로 남아 있다.

차가 출발한지 10분도 안되어 뒤에 앉은 우리들이 신기함에 놀라 웃어댔던 일이다. 그렇게 좁던 자리가 등 뒤에 4~50cm 남을 정도로 넓어진 것이었다.

굵은 자갈들이 어지럽게 깔린 길을 털털거리며 달리니 짐칸이 키질을 하여 짐들(우리들)을 모두 앞쪽으로 쓸어버린 것이었다.

당시는 마산시내도 중심 간선도로 한두 곳만 엉성하게 포장이 되어있을 정도였으니 경주까지는 물론 이런 험한 도로의 연속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시속 30~40km를 넘지 못했을 속도였으련만 그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큰 돌에 바퀴가 튀어 뒤에 앉은 우리들은 한참동안 공중에 떴다가(기분에) 쿵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일이 거의 연속되다시피 했지만, 그것을 괴로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엉덩이에 멍도 들고 멀미난 친구들도 있었으련만 그런 것을 보았거나 느낀 기억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대부분 처음 경험하는 쾌감에 웬만한 고통은 묻힐 만 했으리라는 생각을 나이 들어서도 한번 씩 해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열차로 진영 정도만 갔다 와도 다음날 친구들로부터 큰 부러움의 눈길을 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칙칙푹푹 내달렸던 옛날 기차>

 

창밖으로 팔을 내미니 팔꿈치가 부러지는 것 같더라 느니, 전봇대가 뚝 부러지는 것 같더라 느니, 말도 안되는 뻥을 쳐도 신기함과 부러움으로 넋을 놓던 친구들의 모습에 더욱 신이 나서 점점 더 부풀려 떠들어 대던 시절이었다.

저기 가는 저 아가씨 유우에엔 사아모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어디서 배웠는지 시속을 풍자하는 노래나 유행가 등을 한 사람이 선창하면 대부분이 따라 불렀다.

레코드나 라디오를 구경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는데도 어떻게들 익혔던지 목이 터져라 잘들도 불렀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흙먼지를 퍼부어도 노래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주먹밥을 먹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입엔 흙먼지가 덮여 간혹 모래가 씹혀도 뱉어내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밥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차가 튀어 오르면 밥 뭉치가 뺨이나 턱을 쳐 발리기도 해 서로 보며 웃기도 했는데, 그럴 때도 먼지 묻은 밥 알갱이지만 말끔히 뜯어 먹었다. ……

 

고적 관람시의 느낌은 기억나는 게 없고, 첨성대와 다보탑 앞에서 찍은 명함크기의 학급 단체사진이 있었는데 그것도 보관 못 한 내 처신이 아쉽다.

그리고 올 때의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은 피로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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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10

10. 정권 후의 체험들 - 깡통문화, 총탄

 

정전 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행진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마산에서도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나 형들로부터 엿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였던 기억은 없다.

아마 선생님의 설명을 통하여 상황인식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정부에선 백두산까지 밀고 올라가 통일하자고 했는데 유엔이 정전을 강행했다는 것만 알았다.

혼자서 수류탄을 들고 적 탱크 밑으로 들어가 산화한 전쟁영웅 열 명의 사진에 간단한 설명을 붙인 소의 육탄 십 용사포스터가 교실 벽마다 붙었고, 그들은 한동안 반공웅변대회의 중심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에 있는 '육탄 십용사' 충용탑>

 

그리고 이때부터 각 학교에서 반공강연회가 수시로 열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에 비해 훨씬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소위 양키시장이라 불리던 곳에 쏟아져 나왔던 깡통식품들에 대한 기억과 쉽게 만질 수 있을 정도로 흘러 다녔던 총탄과 그걸 이용한 총 놀이, 그리고 군에서 불하된 트럭들로 인한 차타기 경험들이었다.

부림시장을 국제시장이라 부르기도 했고, 거기에 있었던 극장을 국제극장이라 명명했던 이유이기도 했는데, 마산에서 미군물자를 가장 많이 취급하던 곳이 그 시장이었다. 지금 부림지하도 근처에 철로가 있었는데 그 양쪽 시장이 중심지였다.

깡통식품뿐 아니고 옷, 구두, 야전침대, 공구 등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물품들이 나왔었다고 기억되는데 거의 모두가 군수품들이었다.

전쟁 중에는 몰래 빼돌려진 물건들이 조금씩 나왔었지만 정전이 되어 미군이 대다수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전쟁잉여물자가 되어 시중으로 범람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정전 두어 달 후가 되겠는데, 집집마다 깡통 배급이 나왔다. 한 되 남짓들이 깡통이었다. 전쟁용 비축식품들이었는데 잉여 물품들이 되어 전 국민들에게 배급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식구가 많아 3개였다. 따보니 콩과 쇠고기로 만든 통조림이었는데 처음 먹어볼 때의 그 고소하고 진한 맛에 대한 끌림은 그 후에 국제시장을 더 찾게 했다.

그러나 그 기름진 음식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설사에 시달리기도 했었다고 후에 들었다.

 

<미국에서 온 구호품을 보며 내심 기대하는 아이들>

 

이렇게 깡통제품들이 흔해지니 우리들 생활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주로 나무로 만들어졌던 두레박이 양철제품으로 바뀌었고, 나무함지도 가볍고 튼튼한 양철다라이(다라이는 대야의 일본 말)로 대부분 바뀌었다.

웅덩이 물 두레도 그랬고, 각종 그릇들도 강통이 대신했다. 가을 논의 참새 떼 쫓는데도 수많은 깡통이 동원되었다. 또 깡통차기라는 놀이도 생겼다.

전에는 자치기나 비석놀이, 일제잔재인 다스께또놀이(술래잡기와 비슷) 등을 주로 했는데 이 놀이가 나온 뒤로는 역동성과 소리의 효과로 해서 이걸 많이 했던 것 같다.

술래보다 먼저 달려가 깡통을 차서 소리와 함께 깡통이 날아가고, 잡힌 동료들이 해방될 때의 쾌감은 큰 즐거움이었다.

정전 후 군대 내의 무기 관리체계가 좀 엉성했던지 이상할 정도로 총알들이 많이 굴러다녔었다.

주로 칼빈 탄환이 많았었는데, 탄알을 뽑아내고 뇌관 부분에 구멍을 뚫어 장난감 총 만드는 데에 많이 활용했다.

꼭 우산대만한 쇠파이프가 당시 시중에서 유통되었는데, 그걸 10센티 남짓 끊어 칼빈 탄피에 끼우면 맞춘 듯이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그걸 당시 가게에서 많이 팔았던 나무권총의 총신에 홈을 파 묶었다. 파이프 안에 딱지화약을 까서 넣거나 총탄에서 빼낸 화약을 재어 넣는다.

그 뒤에 잔돌이나 철사 조각 따위를 넣고 그 뒤를 진흙이나 물에 적신 솜 같은 것으로 단단히 봉하고, 탄피 구명에 딱지화약을 붙인 뒤 고무줄에 걸린 공이를 튕겨주면, 공이가 피스톤처럼 나아가 화약을 쳐서 폭발이 일어나고 그 불이 파이프 안에 전달되어 폭발이 일어나서 잔돌이나 철사조각이 탄환처럼 날아갔는데 그 위력이 제법 컸다.

총신을 좀 길게 해서 잘 만든 것으로는 둑에 가깝게 온 오리 잡는데도 사용했었다.

이 파이프를 우리는 댓(철판의 일본어 てっぱん을 말한 것으로 추정)이라 불렀기에 이 총을 댓방총이라 했었다.

그리고 총탄과 관련된 참으로 무지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기억도 있다.

당시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회충검사를 하고 구충약을 나눠줄 정도로 회충구제가 골칫거리였는데, 구충에 좋다는 말이 돌아 상당수의 아이들이 총탄 화약을 뽑아 씹어 먹고 다녔던 것이다.

나도 먹어본 기억이 있는데 무미 무취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배탈 났단 말도 못 들었던 것 같다.

차타기 이야기는 수학여행과 더불어 해야 좋을 것 같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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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9

9.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 용의검사, 학력경쟁

 

가교사생활 직후부터 실시된 용의검사는 생활환경이 좋은 도회지 넉넉한 집 아이들에겐 별 부담이 안 되었겠지만, 누추한 환경에서 생활하거나 항상 흙을 묻히고 살아야하는 농촌 아이들에겐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1~2주에 한번 씩 하는 검사는 대체로 손발의 때 검사만 했기에 부담이 덜했지만 매 달하는 총검사는 팬티만 입혀놓고 했기에 그 전날부터 대비하느라 많은 고생들을 했다.

 

<'대추나무골님의 블로그'에서 빌려왔습니다>

 

한 학년 차이의 내 여동생에게 들어서 알고 있거니와, 여학생들에게만 실시한 머릿니 검사도 역시 생활환경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많은 상처를 준 것 같다.

영양상태가 좋은 아이들은 피부에 윤기가 돌고 때도 잘 끼지 않을뿐더러 씻어내기도 쉬운데, 당시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 반대였다. 이삼일만 돌보지 않아도 손발에 누룽지 같은 때가 끼기 마련이었다.

합포초등학교 구역 동네가 오동동, 산호동, 상남동, 양덕동, 봉암동이었는데 오동동의 상당수 학생들과 산호동 상남동의 일부 학생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대체로 여기에 해당되었다. 거기다 공중목욕탕도 거의 없어 용의검사 대비에 더 애를 먹었다.

당시 구마산에는 남성탕(남성동, 현재 신한은행에서 남성동지구대 쪽 2~30미터 거리 위치)이 유일했고, 내가 육학년일 때 오동동에 은하탕(오동동 다리 안쪽 4~50미터 거리 오른쪽 골목 안)이 생겼는데, 용의검사 전날엔 자리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복잡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나마 목욕료가 부담스러워 못 가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봉암동의 친구들 중엔 가본 사람이 삼분의 일에도 못 미쳤을 성싶다.

목욕탕 내의 풍경도 지금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나무로 된 개인용 물대야가 모자라 친구끼리 함께 사용했으니까 탕 안에 들어갈 때도 대야를 가지고 들어가다 시비가 생기곤 했다.

물엔 때가 둥둥 떠다녀 종업원이 수시로 들어와 족대로 때를 떠서 밖에다 털어내곤 했다. 더운물 달라는 손뼉소리와 고함소리가 수시로 나왔고, 남녀 탕 중간에 있는 맑은 물 칸에서 물 다툼 시비가 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때를 벗겨낼 수 있는 친구들은 이튿날까지도 마음들이 참 홀가분했었다.

목욕탕에 못 가는 친구들은 쇠죽이나 돌맹이 등으로 때를 벗겼다. 쇠죽은 소를 먹이는 집에만 있기에 많은 친구들은 평소 냇가에서 구해둔 곰보돌맹이를 주로 썼다.

따끈한 쇠죽에 수십 분간 손발을 담가 불어난 때를 겨와 짚여물의 마찰력을 이용해 문질러 벗겨내면 상당히 효율적이긴 했으나 등배의 때는 그것으로 안 돼 목욕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찰력이 있는 돌멩이로 문지르는 것도 효율은 짚여물보다 더 떨어지기에, 손발에 피가 삐짓삐짓 내비칠 때까지 문지르고도 말끔히 벗겨 내지를 못 해 땟발이 트실트실 일어나면 검사직전 침을 발라 눌러두기도 했었다.

그러니 등배의 때는 아예 포기하고 이튿날 친구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늦가을부터, 그러니까 내의를 입기 시작할 때부터 무명 올 사이에 끼어서 피를 빨며 겨울을 나고, 봄에 내의를 벗을 때 사라지니 추위가 오면 이는 사람과 공생했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겨울 저녁에 화롯가에 둘러앉아 내복을 화로 위에 펼쳐들고 이를 잡는 광경은 1960년대까지도 한국 가정의 일반적 풍경의 하나였다.

빈대나 벼룩은 가려운데다 부르트기까지 해서 고통을 더 주었지만, 그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귀찮기로는 이가 더했다.

빡빡 깎은 남자아이들 머리엔 없었는데 여자아이들 머리엔 이가 참 골치였다. 가려운 것도 괴롭거니와 이가 슬어놓은 서캐가 하얀 점을 보이니 남 보기에 창피한 것도 큰 문제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한 짓이었는데,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DDT(흰 분말 살충제)를 구해서 내복에도 뿌리고 여아들 머리에도 뿌렸었다.

 

<아예 서울역에서 줄을 세워 DDT를 뿌리던 시절이었죠>

 

그래도 모자라서 용의검사 전날엔 머리카락에 붙은 서캐에 식초를 발라 붇게 하고는 빗살을 실로 죄어 빗살들 사이를 더 촘촘하게 만든 참빗으로 긁어내기도 했었다.

그런 노력들을 하고도 검사 날 모욕감에 울상을 지은 여학생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난리 통인데도 학력경쟁을 심하게 부추겼던 당시의 학교풍토는 지금 생각해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대학교들이 모두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때였는데도, 우리들은 중학교 입시 성적 경쟁에 동원되어 성적 순 줄서기를 했던 것이다.

매월 종합 모의고사를 쳤고 성적우수자라며 1등부터 50등까지의 명단을 학교게시판에 붙였고, 전교생에게 박수까지 치게 했었다.

봉암동 양덕동 친구들의 상당수는 중학교 진학조차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런 학교현실은 이듬해 본 중학교 입시 합격자 발표에서도 나타났다. 판자가교사 벽에 길게 붙었던 합격자 명단이 성적순이었다.

그 통에 합격하고도 끝머리 즈음에 간신히 붙은 경우엔 부모로부터 구박을 받거나 온 동네 창피를 당해야 했다.

그런 합격자 발표 방식은 당시엔 전국적 현상이었다고 들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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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으로 갔던 곳은 오동동파출소 서쪽 옆길 건너편의 한의원 2층이었다.

꽤 넓었다고 기억되는 것이, 그 다다미 방에서 집단으로 고상받기’(레슬링 식으로 상대방을 항복시키는 놀이. ‘고상(こうさん)’은 항복의 일본 말)를 하다 선생님으로부터 단체 기합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얼마 후엔 파출소 2층으로 갔는데 거기선 담임선생님의 심한 매질을 여러 급우들이 당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시국 때문에 파출소가 비좁을 정도로 경범들이 많았던 상황에서도 아랑곳할 리 없는 우리들의 난동(?)에 경찰들의 신경질이 있었겠고, 지금도 매질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던 담임선생님의 성격도 작용했던 것 같다.

여름이 가까웠을 때는 오동동 선창 끝머리에 있었던 어물창고로 갔다. 여기서의 두세 달은 지금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좋은 추억을 남긴 시간이었다.

이때 또 바뀌어 오신 선생님의 어진 품성도 그런 기억을 더 도왔다. 매일을 넘어 보통 하루 두세 번씩 교실 앞 바다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즐겼기 때문이다.

4학년 때는 한두 명에 그쳤던 피난민 편입생이 그 해 갑자기 불어 이때엔 십여 명이 되었었는데 물놀이에서 우리들과는 좀 다른 이들의 양태를 보고 어린 마음에 좀 놀랐던 기억이 있다.

토박이들은 모두 벌거벗은 채 물로 뛰어 들었는데 그들 중 몇몇은 수영복이란 걸 보여주었다. 우리는 장난으로 그 팬티를 벗기곤 했었지만 솔직하게는 좀 부러운 눈치들을 보였다고 기억된다.

 

<그때는 다들 이러고 놀았죠,, ㅎㅎ>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친구는 평소 바다에 한사코 들어가지 않았었는데 그 날은 친구들의 강권을 감당할 수 없었던지 수영팬티 윗줄을 꼭 잡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그러나 장난 끼 많은 친구들이 그냥 둘리 없었다. 팬티를 잡아 내려버렸는데 다른 친구들과 달리 그는 매우 낭패스런 표정으로 주저앉더니 얼굴을 감싸고 울어버리는 것이었다.

팬티를 내리는 순간에 나도 얼핏 본 것도 같았으나 자세히는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나중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 순둥이 친구의 낭패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의사라던 그 친구는 그때 이미 포경수술을 한 후였는데 포경이란 말조차도 모르던 우리들 눈엔 그 남근 모양이 우습고 충격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 친구는 그것으로 하여 꽤 오랫동안 친구들 놀림에 시달렸던 것 같다. 으레 이런 말도 곁들였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괴기”.

출신지역에 따라 억양 차이가 뚜렷했을 텐데, 그때 우리들 귀엔 다 비슷하게 들렸던 것 같다.

늦여름쯤, 전에 있었던 산호동으로 갔다가 늦가을에 우리는 본교로 돌아왔다. 본 교사는 징발된 그대로였으나 운동장 가운데를 철조망으로 막고 이쪽에 빙 둘러 판자 가교사를 교육당국이 지어주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운동장에서 뛰 수도 있었고, 철봉대에 매달릴 수도 있었으며 모래밭에서 뒹굴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학내 행사도 활성화됐다.

기름 먹인 판자로 엉성하게 지은 교사에 반쪽짜리 운동장이었지만 그래도 야외나 창고에는 비할 바가 아니어서 그때부터 학교생활의 면모가 조금씩 갖추어져갔던 것 같다.

겨울엔 난로도 피울 수 있었다. 난로는 군부대에서 폐기한 드럼통을 잘라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땔감은 간혹 학년 전체가 팔룡산으로 가서 솔방울이나 삭정이를 주워 와서 교실 구석에 쌓아두고 사용했다. 또 등교 시에 두세 토막씩의 나무를 의무적으로 가지고 오게 하기도 했었다.

전쟁 중임에도 입시경쟁이 상당히 의식되었었는데 여건상 준비를 못하다가 이때부터는 오후까지 수업을 했다.

도시락을 싸다녔는데, 식은 도시락을 데우기 위해 난로 밑자리잡기를 가위 바위 보로 정하던 기억도 선명하다.

 

<밑자리 도시락만 데워지지만 밥시간 기다리며 모두 즐거웠죠,,  ㅎㅎ>

 

이때부터 정식 체육시간이 생겨 달리기 시합도 했고 철봉의 기본동작을 배우기도 했다. 높이뛰기나 넓이뛰기 요령도 설명 들었다.

그리고 비록 운동장은 좁고 학생은 많아 좀처럼 공에 발을 대 보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공 따라 다니다가 운 좋으면 한 번 차보는 재미도 맛보았다. 우리가 차고 놀았던 고무공은 군에서 나온 폐타이어를 녹여 재생한 고무로 만든다고 들었다.

소위 반공웅변대회란 행사도 이때부터 활성화되었던 것 같다.

반에서 뽑아 학교대회에서 입상하면 시 대회, 나아가 도 대회까지 진출시켰었는데, 피를 토하듯 한 열변이 아니면 등위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

이런 대회의 성격상 봉암동, 양덕동 등의 촌아이들은 한 사람도 못 나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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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7 00:00

기억을 찾아가다 -7

7.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 떠돌이 수업

 

피난 갔다 와서 학교에 나가보니, 들은 대로 학교는 이미 군용병원이 되어 있었다. 이웃 마산상업중학교(용마고의 전신인 마산상고와 마산동중이 분리되기 전의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우리들의 떠돌이 학교생활은 2년 남짓 계속되었다. 처음엔 용마산 남쪽 비탈 중하단 정도 되는 곳으로 등교했다.

거기엔 전쟁에 대비하여 파놓은 자형의 참호가 많이 있었고, 거기서 우리 반뿐만 아니라 여러 반이 이웃하여 학습생활을 했다.

 

<교실이 없어 마당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1953년 6월 서울에서 촬영>

 

가운데에 작대기를 세워 칠판을 걸고 우리들은 호 안에 기대거나 서고, 바깥 풀 위에도 앉고 하여 진행하는 수업형태였다.

그때 우리들 각자가 선생님 지시에 따라 마련한 책상 대용 필수품이 화판이라 불린 물건이었다. 판자들을 덧대어 만든 넓적한 판 양쪽에 끈을 달아 목에 걸고, 판 위에 책과 노트를 올려 책상 대용으로 썼던 것이다.

노천에서 여러 반이 얼마 거리 없이 그렇게 수업하니, 두세 분 선생님의 목소리가 섞여 들리기도 했고 어떤 목소리 큰 선생님의 말씀은 다른 반 학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던 기억도 남아 있다.

가을이 되자 우리가 옮겨간 곳은 용마산 동편 자락에 있던 서당과 그 옆의 어떤 창고였다.

당은 낡아 바람 막기도 어려워 판자나 비료포대 같은 것으로 얼기설기 벽을 만들어 사용했고, 창고는 판자벽이 그래도 양호하여 서당을 배정받은 우리 반 친구들은 창고 반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바깥생활 내내 그랬지만 여기서도 학습생활이 옳게 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곳에서 취한 놀이 행태는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있을 만큼 재미를 만끽시킬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창고 뒤쪽, 그러니까 용마산의 동쪽 끝자락이며 산호동의 뒷동산이 되는 곳에 열 그루도 넘었음직한 푸조나무가 있어, 나무에도 오르고 나무 뒤에도 숨고 동산 여기저기로 뛰어 다니며 쏘고 잡고 하는 푸조나무 열매 총놀이가 너무나 재미있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용마산 동쪽자락에 푸조나무가 있다. 전문가들은 수령 2~300년으로 추정한다>

 

댓가지를 10티미터 남짓 길이로 잘라, 가운데 홈에 푸조나무 열매을 넣어 앞 구멍을 막고, 다음 알을 뒤에 넣고는 구멍에 알맞은 크기의 나무공이로 힘껏 밀면, 압축된 가운데 공기의 힘으로 앞의 알이 튀어나가는데, 그 힘이 꽤 되어 맞으면 따끔한 정도라 우리가 편을 갈라 쏘고 잡으면서 용마산 자락 일원을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4학년이 되자 우리 반만 따로 회원동으로 갔기 때문에 다른 반은 어땠는지 잘 모른다.

봉화산 자락에 위치한 회원초등학교(당시 회원국민학교) 바로 아래에 있는 판자 창고에 우리 반이 들어갔다. 물론 책걸상은 없으니 화판은 필수품이었다.

일제 때 마구간이었기에 퀴퀴한 냄새가 났고, 낡고 파손된 판자벽은 매섭기로 이름났던 봉오재바람을 그대로 통과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별 불평들 없이 생활했던 것 같은데 정작 견디기 어려워했던 것은 회원초등학교 학생들의 집단 괴롭힘이었다.

반별로 전 시내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기에 선생님들이 여러 가지 업무 차 교실을 비울 때가 잦았었는데 그때를 틈타 수십 명(어떤 때는 백 명도 넘어 보였다)씩 몰려와 이유 없이 때리고 물건을 뺏곤 했고, 하교 시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또 그렇게 괴롭히곤 했다.

선생님(실력이 뛰어 나기로 소문났던 배종호 선생님이셨다)께 일러 학교에 항의하고 나서 좀 덜한 듯했으나 하교 길에 해코지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걸 피하기 위해 우리는 인연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웃인 마산상업중학교가 회원초등학교 운동장에 군용텐트를 치고 학습생활을 했었는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방과 후 좀 시간을 보내다가 그 형들이 하교할 때 같이 하는 것이었다.

형들은 우리들의 사정을 듣고서 잘 보호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봉암동, 양덕동에서 다니던 우리들은 바냇들 가운데 길로 오면 가깝고 편했는데도 근처에서 지키는 아이들한테 한두 번 당한 뒤로는 그 형들을 따라 구마산 역으로 둘러오곤 했다.

런데 이런 유형의 패거리 행패문화는 그때 거기서만 체험한 게 아니었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여러 곳에서 여러 유형으로 아주 아프고 부끄러운 체험으로 남아 있어 뒤에서 한 번 더 거론하고자 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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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0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6

6.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 징병, 피난 귀향

 

전쟁 나고 열흘 쯤 되었다. 낯선 얼굴을 보기 어려운 시골마을에 낯선 복장에 낯선 체형의 사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린 아직 어려 잘 인지하지 못했으나, 어른들이나 형들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의 눈에도 그들의 양태가 박히게 되었다.

허름한 바지저고리에 짚신이나 낡은 검정고무신 차림과는 완연히 대조되는, 색깔 있는 셔츠에 빳빳한 바지, 그리고 단단하고 날렵해 보이는 운동화 차림이었다.

가을이 되어서는 당시로선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 점퍼들도 입고 있었다. 체격도 구부정한 농민들과는 달리 몸이 곧고 날렵해 보였다. 형사들이었다.

그들이 나타나면 우리들도 알아보게 되었고, 형들이나 아저씨들에게 전해주기도 했었다.

그들은 징집대상자들을 차출하러 그렇게 다니면서 나이 웬만한 남자들을 보면 꼬치꼬치 추달했었다.

골목 어귀에서 맞닥뜨린 동네 형이 산 쪽으로 도망치다 잡혀오는 것도 보았고, 미리 귀띔을 받고 산골로 들어가는 동네 형이나 아저씨들도 더러 보았다.

내 큰형은 고1(당시 학제로는 중4)이라 징집 적령이 멀었는데도 키가 컸던 탓으로 그들의 추달에 곤욕을 치른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랬는데도 우리 동네에선 간 사람보다 안 간 사람이 더 많다고들 했다.

한편, 보국대(전시근로동원법에 의한 차출)라는 명칭으로 차출되었다오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주로 삼십대 후반이나 사십대 초반의 남자들이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훨씬 나이든 아저씨들도 끌려갔다 왔다는 이야기도 몇 번 들었다. 할당 받은 사람 수를 채우지 못할 땐 그렇게 된다고들 했다.

 

<산악전 지원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보국대>

 

피난 직전, 그러니까 7월 중순쯤에는 사태의 심각성도 모른 채 내 큰형도 나갔다가 온 식구가 조바심을 쳤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진동에 가서 길 고르는 일 두어 시간만 하고 점심 전으로 데려다 준다고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오라고 해서 큰형이 자원했고, 그래도 행여나 해서 아버지는 같이 가는 이웃집 아저씨들한테 신신당부해두었는데 그날 자정이 넘어서야 사색이 되어 걸어서 돌아왔던 것이다.

가니까 참호를 파라고 했고, 거기에 모래자루 쌓는 일까지 다 마치니 멀리서 대포소리 같은 것이 들려 더 공포스러웠다고 했다.

거기다 감독하는 사람이 형의 나이를 묻고,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는 통에 이웃집 아저씨까지 합세해서 회피하느라 더 힘들었다고 했다. 형사들 들락거림은 아마 전쟁기 내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산이 인민군들이 들어오지 못한 얼마 안 되는 지역이었던 터라 피난 갔다 온 얼마 후부터 다른 피난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외지에 나가 있던 동민 가족들이나 친척들도 상당수 보였다.

어느 날, 이웃에 살던 물집(염색업하는 집) 어머니와 딸들이 울면서 아리랑고개(1차 매립 때 동네 서쪽 들머리에 생긴 조그만 고개) 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부모님들과 우리 형제들도 한길로 나가 그쪽으로 보고 있는데 얼마 안 있어 고갯마루로 그 집 가족들이 나타났다. 우리 부모님들도 울먹거리며 마중을 나가다가 통곡하며 오는 그 가족들과 마주 했다.

부모님들끼리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었는데, 어린 내 눈에도 그 아저씨와 두 딸의 모습은 너무나 남루했다. 딸 일곱으로 해서 딸부자 소리를 들었던 그 아저씨는 전쟁 일 년 전 쯤 딸 둘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고무신 공장을 했었다.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지만, 전쟁나자 바로 딸들 데리고 귀중품만 챙겨 군인들을 피해서 걸어왔다고 했다.

인민군도 피하고, 미군도 피하고, 국군이나 경찰도 되도록 피하며, 길도 묻고 물으며 빈집이나 산야에서 숙식하며 사십 일 이상이나 걸어왔다고 했다. 준비한 고무신 다섯 켤레씩이 모두 걸레처럼 됐다고 했다.

 

 

그로부터 여러 달 후에 서울 살던 넷째 고모 네가 우리 집에 왔다. 고모부는 서울에서 무슨 장사를 했었다고 들었다.

그들은 산호동에 큰댁이 있어 거기에 거처를 마련했는데 그날 우리 집에 다니러 왔던 것 같다. 나보다 대여섯 살 아래인 딸과 아직 업혀 다니는 딸을 데리고 왔었는데, 그날 큰딸이 보인 행태가 아직도 내 눈에 삼삼하다.

마당에서 나와 내 여동생과 무슨 놀이를 하고 있을 때 공중에서 제트기 소리가 났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신기한 소리였으나, 전쟁 후부터는 하루에도 십여 차례씩 들었던 소리라 예사로 느꼈는데, 갑자기 그 동생이 내 바짓가랭이를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것이었다.

의아해하는 우리 가족들은 고모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서울 수복 때 제트기의 공습이 수없이 있었고, 그때마다 군데군데 불바다가 일어 질겁했는데, 그때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얼굴도 예쁘고 눈매도 초롱초롱했던 그 여동생은 그 후 오랜 세월 동안에도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정신 이상 상태로 고생하다 갔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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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3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5

 

5.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 미군들

 

우리들은 예사로 할로를 외치곤 했지만, 어른들이 인식은 많이 달랐었다. 특히 처녀들과 젊은 아녀자들에게 미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느 새댁은 야산에 끌려가 윤간당한 후 소나무에 목을 맸다느니, 어떤 처자는 사후에 아예 양색시(미군 상대 매음부)로 변신했다느니, 회원동 난민촌에선 미군의 횡포에 대들던 청년이 총 맞아 죽었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참 한참 동안 끊임없이 들려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제로 내 큰누님과 육촌형수가 집 앞 우물가에서 나물을 씻다가 둘 앞에 세우는 방구쟁이 차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집안으로 뛰어 들어온 일도 있었고, 언젠가는 그런 두 사람의 뒤로 두 미군병사가 따라 들어와 권총을 빼들고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을 질리게 했던 일도 있었다.

 

<6.25전쟁 때 미군부대로 위문공연 온 마럴린 몬로>

 

그들로 인한 폐해는 산과 바다의 사냥질에서도 많이 보였다.

봉암동 양덕동 등의 산전(山田) 두락들은 고라니, 노루, 산돼지 등으로 인한 피해를 많이 입어왔고,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짐승들 쫓고 울타리 강화하는데 많은 신경을 써 왔기에, 산짐승은 귀찮기는 해도 항상 같이하는 존재였었다.

그런데 미군들의 사냥질이 있고나서 어느 때인가부터 짐승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돼버렸다.

오륙 명씩 무리를 지어 와서 등성이마다 점거하고는 총소리에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짐승들을 여러 마리 잡아 방구쟁이 차에 싣고 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아직 핏기가 가시지 않은 노루 배를 목덜미에 걸치고 휘파람을 불며 가는 미군을 보면서는 아직 어린 나이에도 착잡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청수 들 둑에선 아주 특이한 사냥 행태도 경이의 눈으로 보았었다.

청수 들 둑에선 적현리나 귀산마을이 가깝게 건너다 보였다. 겨울이 되면 그 앞바다엔 오리 떼가 까맣게 보일만큼 많이 노는 풍경이 으레 연출되었었는데, 그 오리들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잡는 광경이었다. 전술한 졸저 상식의 서식처일단이다.

 

그들은 모터보트 두어 척에 두세 명씩 타고서 귀산 쪽 모퉁이를 소리 없이 돌아 나와서는 적현리 쪽으로 방향을 잡는 순간 굉음을 발하며 최고 속도로 오리 떼를 향하여 돌진했다.

놀란 오리들이 비명을 지르며 새까맣게 떠오르는데 그때 미군들의 총구에선 콩 볶듯이 총성이 일었다. 느리게 물을 차고 떠오르는 오리 떼를 향하여 조준 없이 산탄총을 난사하는 것이다.

멀리서도 점점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바로 맞은 놈은 수직으로 빗맞은 놈은 날갯짓을 하며 비스듬히 떨어졌다.

보통 서너 명이 육칠 초 동안 그렇게 쏘아서 잡는 오리가 많을 때 십여 마리도, 적어도 대여섯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어둑살이 짙어갈 무렵엔 바다 둑에 앉아, 팔룡산으로 자러 가는 오리들을 조준하여 떨어뜨렸다. 좀 멀리 떨어지는 놈은 그들이 데리고 온 개들이 물고 오는 광경도 보았다.

그들의 총의 위력은 어린 내 눈에도 참 놀라워 보였다.

전쟁 전에는 국방경비대 대원들이 간혹 들고 다니던 구구식 장총을 본 것이 고작이었는데, 전쟁 나고부터는 엠원이니 카빈이니 하는 현대식 총들을 무시로 보았다.

 

<카빈소총(위)과 엠원소총(아래)>

심지어 휴가 나온 동네 형도 총을 지니고 온 걸 보았고, 유엔군 따라 다니다 잠시 쉬러 온 당숙도 엠원 소총과 탄알 수십 발을 들고 와 집안에 우스꽝스러운 사고를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께 인사차 들렀을 때 가지고 온 총을 아랫방 구석에 세워두었는데 점심 먹던 머슴이 멋모르고 방아쇠를 건드려 격발시켜 버렸던 것이다.

우레 같은 소리에 큰방에 있던 아버지와 당숙과 우리들이 아랫방 문을 열어젖히니 방안은 먼지로 컴컴한 상태인데, 놀라서 뒤로 눕듯이 허리를 젖히고 있는 머슴 발끝에 놓여있는 총구 앞에 큰 구덩이가 보였다.

그리고 깨어진 구들장 조각도 늘려 있었다. 나는 그 후 종종 친구들한테 그 장면을 들려주며 엠원 총의 위력에 대하여 떠들었었다.

이러한 총 문화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가게에도 화약과 나무총이 많이 있었고,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총탄의 알을 분리해 추출한 화약과 탄피를 이용하여 목제 장난감 총을 만드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리고 그것을 좀 더 발전시켜 철파이프로 방총(철판의 일본어 てっぱん을 말한 것으로 추정)이란 것도 만들어 오리사냥을 시험해본 기억도 있다. 그런 놀이는 전후에는 더 빈번해졌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들 대화의 중심엔 미군과 총 이야기가 항상 자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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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

오늘부터 연재하는 포스팅은 마산 봉암동(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서 태어나 청년기까지 살았던 박호철 선생님의 기억 속에 있는 도시 이야깁니다.

한 개인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가치 판단은 후대의 몫이고 기록은 당대의 몫이라 생각하며 소박하게 쓴 글입니다. 어르신 한 분이 떠나시면 도서관 한 개가 사라진다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1941년생이라 일제강점기의 기억은 없을 테지만 60년대 중반까지의 마산 도시를 직접 보았던 분입니다.

갇혀져 있던 기억들을 얼마만큼 끄집어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이신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연재의 횟수와 게재 일자는 유동적입니다. 글이 준비되는 대로 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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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봉암지역의 1947년과 현재의 항공사진입니다. 함께 보시면 글 이해가 쉬울 것 같아 소개합니다.

 

 

1. 봉암동 형성

 

지금 봉암동은 대부분이 매축지다.

최초의 매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임의로 했고 해방 후에는 1970년 전후에 걸쳐 재일교포가 하다가 자금난으로 포기하자 정부가 받아 완공했다

원래 봉암은 팔룡산(본명은 반룡산) 최남단 자락에 있었던 작은 어촌마을 이름이었다. 지금 서광아파트와 봉암교까지의 도로 대부분이 경사진 마을 터였다. 그 아래쪽은 모두 1차 매축 때 형성된 매립지다.

창신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은 일제 땐 봉정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에 봉덕이라 불렀다. 그 후 봉암교 쪽 마을과 같은 동이 되었을 때 함께 봉암동이 되었는데, 두 동네는 여러 번 붙였다 뗐다 했다.

나는 봉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론 바다물결이 지금의 교육청 뒷산자락까지 철썩댔다고 한다. 지금도 오륙십 세 이상의 사람들은 교육청 옆 초등학교 뒤 계곡을 조개골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밀물 수위가 높아질 땐 교육청 앞 동네 집들이 수몰 위기를 느끼는 것도 다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두 마을에 찻길이 난 건 1차 매립 후였다. 넓은 매립지로 하여 동네 복판으로 한길이 나고, 아랫각단이 조성되고 상당한 넓이의 농토도 생겼다. 이 길이 나면서 나룻배 대신 봉암다리도 놓여 졌고 신촌, 월림, 남면(웅남, 상남) 등지와 교류도 잦아졌다.

이 길로 하여 팔룡산 자락을 정지하여 지은 요정 봉선각(鳳仙閣)하이야(택시의 일본식 영어 발음)’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닦였다. 이 요정의 주인 이름이 다나카였는데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1937년 마산부가 발행한 '관광의 마산'에 게재된 봉선각>

 

우리 집도 본래 웃각단에 있었는데 30년대 말에 한길 옆에 새집을 지어 이사했다고 들었다. 봉선각과 직선거리로는 백 미터도 채 안 되었다.

그래서 내 다섯 살 때의 기억으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봉선각에서 어떤 사내가 종이나팔을 입에 대고 아래를 향해 구슈게이호~(くうしゅうけいほう, 공습경보空襲警報)’하고 외친 것을 본 기억도 있다.(당시 전국적으로 전시 대피훈련을 했었고 통상 통, 반장이 이 역할을 했으나 봉선각이 마을 위쪽에 있는 관계로 봉선각 주인이나 직원에게 이 역할을 맡기지 않았나 짐작됨)

반장이었던 장씨 아저씨의 인도에 따라 뒷산 중턱에 있는 천연동굴로 올랐던 일, 굴 안이 어두워 나 같은 조무래기들이 굴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던 기억들이 남아 있다.

봉선각은 해방 후 국유화되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또래들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어느 날 들어가 본 뒤꼍의 굴은 굉장히 깊었고 서늘했다. 아마 방공호와 식품창고의 구실을 했던 것 같았다.

봉선각 뒤쪽 팔용산 남쪽 끝 마루턱에 일본의 신사가 지어진 것도 삼십년 대였다고 들었다. 내가 신사를 본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데, 그 땐 거의 파괴된 모습이었다.

해방 후 좌익들의 야간집회가 이 산에서 열렸을 때 부쉈다는 말을 그 후에 몇 번 들었다.

신사가 있는 산먼뎅이를 야시당먼뎅이라고 불렀는데 야시는 여우의 방언이고 당은 집이란 뜻이니, 왜인들이 모이는 곳을 야유하여 이 동네 사람들이 만든 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한길과 봉암다리가 생긴 후부터 마산부창원과의 교류가 잦아졌다.

마산사람들로부터는 촌놈취급을 받았지만, 창원사람들로부터는 약간 우월적 대접을 받는 반촌이미지가 형성되었던 듯하다.

우리 어릴 때 정겹게 대해주셨던 대방때기·두대때기(대방댁·두대댁, 지금의 창원시 대방동과 두대동) 아지매들이 있었는데,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창원이 친정이던 그 분들이 시집올 때 고향친구들로부터 시집 잘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는 사실이 그걸 보여준다.

1차 매립으로 이 동네 서쪽 들머리에 조그만 고개가 생겼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그것에다 아리랑 고개라는 속칭을 붙여줬다.

이 마을은 팔용산이 삼면으로 싸고 있어 비가 오면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꽤 많았는데 매립으로 물길이 막히자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지금도 교육청 동쪽 담을 따라 흔적이 있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수로는 아래로 오면서 평지보다 사오 미터 높게 나 있었다. 그래서 한길도 그곳에 와선 그 높이의 고개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그 고개에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줬고, 옆 동네나 마산부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었다.

봉정과 서쪽으로 맞 닿아있는 팔용산 자락 따라 길쭉하게 나있는, 100호가 채 안됨직한 동네를 우리는 사기점(사기그릇을 굽는 곳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불렀는데, 지금 양덕오거리에서 봉암 쪽으로 나있는 도로의 일부는 옛날 사기점 동네 앞을 흐르던 개천부지였다.

그 길과 마진도로, 양덕천 사이는 꽤 넓은 농토였었는데, 그 벌도 1차 매립 때 형성된 것이라 했다.

그 근처에 우리 논이 있어 종종 보았는데, 율림동 쪽에서 흘러오는 내와 양덕 쪽에서 흘러오는 내가 합해지는 양덕오거리 근처까지 바닷물이 밀려왔었다.

옛날로 거슬러갈수록 그곳은 더 깊었을 테니, 고려 말 합포첨사 배극렴이 왜구침탈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한 합포성지가 그곳에서 직선거리 1.5내외 지역에 있다는 사실도 성지를 본 후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질 낮은 정부들이 그 성터를 방치함으로써 지금은 거의 소실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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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9 00:01

일제 강점기 신마산 혼마치(本町)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소개한다.

아래 것은 같은 장소에서 찍은 현재 사진이다. 위 사진을 현재와 비교하기 위한 사진이다.

 

 

191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산 월남동 1가(현 3.15대로) 사진이다. 당시에는 혼마치(本町)라 불렀던 중심거리였다.

현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앞 쯤에서 월영광장 쪽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지난 100년간 얼마나 도시가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사진의 길 왼편이 바다인데, 지금의 해바라기 아파트가 앉아있는 블럭이다. 나중에는 일본인들이 저 해안가에 버드나무를 심기도 했다. 저 바다는 1926년 매립되어 사라진다.

오른쪽 도로변의 일본식 건물들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 대부분 목조였고 3층건물도 있다. 도로는 비포장이었다. 길 양쪽을 줄지어 선 나무 전봇대가 인상적이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뒷산은 무학산과 이어진 대곡산 줄기이다.

옛 사진에서 오른쪽 도로변으로 저 멀리 건물 한채를 자세히 보면 단층인데 층고가 높은 건물이 있다.(왼편 해안이 끝나는 지점 쯤. 벽체가 검게 보임) 지금 월남동 성당이 앉아 있는, 당시 일본제일은행 마산출장소 건물이다. 잘 생긴 건물이었다.

사진의 곳은 '신마산'이다.

조계지로 개항된 땅 신마산은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었다. 자신들이 새로 건설한 마산이라는 의미였다. 

반면 전통도시 마산포는 구마산이라 불렀다. 낡고 오래되었다는 의미였다.

마산포 주민들은 이를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일이었다. 강점기 내내 그렇게 불리었고 그 관습이 지금에 왔다.

·(·) 속에 담긴 뜻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생명력 강한 지명은 아직 살아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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