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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리가 극장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상영을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장내마이크에서 지금 밖이 시끄러우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들려왔다.

관객들이 욕설 섞어 돈(입장료)내놔라고 고함친 것은 당연한데, 그것도 잠시, 갑자기 극장 전체에 불이 나가버렸다.

그때서야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관객들이 아우성을 치고 밟고 밟히며 밖으로 나왔는데, 손을 꼭 잡고 나온 우리 둘이, 극장 문 앞에서 주로 아래쪽으로 밀려가는 사람들 따라 가다가, 남성동파출소 쪽의 상황을 보고는 대강이나마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파출소를 에워싸고 투석을 하고 있던 군중들이 극장에서 나온 무리들과 합세하자 힘을 받은 듯 더 격한 고함들을 쏟아 뱉으며 돌질을 하기 시작했다.

<3.15의거 시위 중인 마산 시민들>

 

남성동은 중심지라 당시에도 그 도로들엔 포장이 되어있어 많은 돌 구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우리가 서서 구경했던 이학골목(그 골목 한 곳에 이학이란, 당시로선 고급 일식집이 있었다.)과 맞은편 세신양복점 골목의 상황을 보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골목을 다니면서 주운 돌을 치마에 싸서 날라다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다투어 앙칼지게 부르짖었던 소리도 지금까지 귀에 쟁쟁한데, 그때 제일 많이 들었던 소리가 야 이 도둑늠들아 내 포 내나라였다. 그날은 그들의 실체를 잘 몰랐는데,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주로 민주당 여성당원이었다.

‘내 표 내어 놓으라는 말은, 당시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자유당원들과 공무원들의 주도 아래 3인조 또는 5인조로 조직되어, 조장의 인솔아래 투표소로 들어가서 종장의 감시 아래 공개투표를 하게 했는데, 이들은 거기에 편입시킬 수 없으니까, 투표통지표를 이들에겐 아예 보내지 않은 데 대한 항의라는 것도 알았다.

돌팔매질은 점점 잦아가고 정문 접근자도 많아져 가던 상황이 한참 진행될 즈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놀라 골목 안쪽으로 몸을 피하면서도 소리 나는 쪽을 보니 파출소 옥상에서 화약 불빛이 보였다.

그러자 군중들은 이리 뛰고 저리 흩어지며 일부는 더 흥분되어 날뛰는 모습이 보였는데, 총소리가 난 지 채 일분이나 되었을까? 갑자기 세신양복점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띄엄띄엄 나는 총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쪽으로 왈칵 밀려들었고 이어 파출소 문 쪽으로 사람들이 더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총소리는 곧 그쳤다. 친구와 나는 어떤 적극적 행동도 없이 우물거리며 사람들 쪽으로 쓸려 다녔으니 사람이 죽었는 지 어쨌는지는 보지도 못했다. ......

가서 보니 그곳에도 이미 투석전이 벌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쪽엔 남성동에서와는 좀 다른 양상이 있었다. 구마산역 쪽에서 보니 파출소가 높은 곳에 있어, 그리고 주위에 집들이 적어 접근이 쉽지 않아 돌 던지기가 어려웠던지, 좀 색다른 방법을 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구마산역 입구에서 파출소쪽으로 꺾어져 십여 미터 가는 곳에 돌공장이 있었는데(목재소도 있었는지?) 거기서는 그런 와중에서도 밤일을 하고 있었고, 아직도 추워 불을 피우고 있었는데, 몇 명 청년들이 어디서 깡통을 주워와 밤일 현장에 땔감으로 쌓아둔 톱밥과 대패밥 등을 담아서 불을 붙인 뒤, 그 깡통을 새끼줄에 매어 원을 그리며 휘둘러서는 파출소로 향하여 던지는 장면들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몇몇개는 파출소 벽 밑에 떨어지거나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그것을 안에서 되던지는 장면도 보였다. ......

이튿날 어머님의 만류로 시내에 나가보진 못했으나 대강의 소식은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열 명 이상 죽었고, 특히 북마산파출소가 불타면서 안에 있던 경찰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총을 난사하며 나오는 통에 그 앞에서 제일 많이 죽었다고 했다.

<3월15일 밤 경찰이 쏜 총에 생명을 잃은 김주열. 사진은 4월11일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오른 열사의 시신>

 

나는 파출소 화재가 어제보았던 그 깡통불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이상 『상식의 서식처』>

추기 : 민주주의가 국민의 뜻을 따르는 신념이고, 그 신념을 정치로 구현하기 위해 국민의 뜻을 직접 물어보는 제도가 선거다. 그런데, 이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의 뜻에 반해 나라를 침략자 일제에게 갖다바친 친일파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소위 사이비 보수집단이 민의를 따를 리 없고, 따라서 정상적 선거로선 집권할 수 없으니, 그들은 대를 이어 부정선거를 관습으로 삼아왔었다. 3,5인조선거는 박정희에 의해 릴레이선거로 발전해 왔는데, 그건, 앞사람의 기표지를 투표함에 넣고 자기가 기표한 건 가지고 나와 검표자에게 보이고, 다음 사람은 그것을 투표함에 넣고 자기가 기표한 건 또 그렇게 가지고 나오고...... 하는 방법이었다. 그것도 소문이 나 시끄러워지니 박정희 전두환은 아예 체육관에 꼭두각시들 모아놓고 하는 소위 체육관선거로 권력을 찬탈했다. 노태우는 전국 유세장을 투석장으로 만들어 민의를 왜곡하고, 이명박 박근혜는 댓글부대를 만들어 민의를 조작하고......

그래서 역대 소위 보수당 집권자 7명 중 2명은 쫓겨났고, 한명은 심복한테 살해되었고, 한명은 사형 또 한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두 명은 감옥에 갇혀 있다.

이런 보수가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참보수(김구, 장준하 등)를 살해하고 보수를 참칭해온 결과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작년 10월 16일부터 매주 게재해온 창원미래연구소 박호철 이사장님의 글 「기억을 찾아가다」 25편은 오늘로 끝냅니다.

마산 봉암동에서 보낸 어린시절에서 부터 자유당의 암울했던 혼란기에 보낸 중,고 시절 이야기까지 1950년대 마산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었습.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는 진보적 지식인입니다.

한 회도 날짜를 어기지 않고 송고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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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한평 없어 어차피 얻은 구장집 머슴자리 지켜 새경 모은 것으로 동네 가난한 처자와 눈맞추어 토백이처럼 산 김씨 같은 사람도 있었다.

, 부두노동으로 돈 모아 논밭 사둔 것이 나중에 개발되어 알부자 소리를 들은 천씨 같은 사람도 있고, 개울가 움막 같은 초가에 살았던 박씨처럼 어설픈 재인 노릇하다 결국 좀도둑으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마감했던 사람도 있었다.

<허기를 때우고 있는 피난민들>

 

그런데 이런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가며 난민생활을 하는 일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집과 백여 미터 떨어진 싸구려 객사엔 여러가지 색깔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머물러 우리들 이야기감에서 떠날 날이 없었고, 동네 구장집에 있었던 머슴방엔 거의 매일 밤 머슴자리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들었다.

그리고 바냇들 북동쪽에 있은 벽돌공장 북동쪽엔 난민촌이 형성되기도 했었다.

해방 후 귀국한 귀환동포들이 주로 거주한 신포동과 해운동, 회원동 등 난민들 거주지는 변두리 동네들 거의 모두에 형성되었었다.

그리고 여러곳에서 불거졌던 소소한 절도사건들이 화제에 오를 땐 그 지역들이 도마에 오르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복어 내장을 끓여 먹고 중독사한 비극적 얘기도 그 마을들 얘기로 종종 들려왔다.

우리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한 농부들이었음에도 뜨네기 좀도둑들에 많이 시달렸었다.

광을 따로 두지 않은 대부분의 집들에선 방이나 마루 한녘에 곡식자루를 두기 일쑤였는데, 들에 일하러 간 녘에 이것을 털리고나면 부잣집에서 거금 털린 것보다 더 큰 타격을 입는 것이, 그들은 당장 굶주림에 직면하기 때문이었다.

고된 농사일로 곯아떨어졌다가 새벽에 일어나보니 툇마루에 둔 곡식자루가 없어졌더라는 이야기나 일 나간 대낮에 감쪽같이 없어졌더라는 이야기, 심지어 낼모래 벨 벼나 보리를 세워둔 채 낱알을 훑어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엿판 실은 리어카 아래쪽에 곡식자루가 있더라는 말도 들었고, 방물장수 함지도 의심하는 소리를 들었다. 솥을 떼어갔다는 말도 들렸고, 낡은 옷도 없어졌다 했다.

어쨋든 지금 들으면 귀를 의심할 만도 한, 실소를 머금을 정도의 소소한 사건, 그러나 당자들에겐 상당한 타격이 되는 이런 사건들이 10년여에 걸쳐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런 사고들을 막기 위해 동네 청년들이 모여 자율방범대를 만든 일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좀 효과를 보는 듯했으나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구장집, 술도가, 방앗간에서 얼마씩 내고 여러집에서 곡식되씩 내어 교대로 번을 서는 청년들 야식비나 난방비를 감당했지만, 그것도 한두번 넘어가면 꺼려했고, 청년들은 그들대로 고된 농사일에 시달리고 밤에도 잠을 설치게 되니 지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변두리 어려운 사람들의 삶은 고달픈 수밖에 없었다. 부패한 공권력은 제 살찌우기에 바쁘니 도회지 부자들 돌보기에도 바빴던 셈이다.

한편, 마산부두엔 며칠에 한번씩 구호곡을 실은 배가 들어왔는데, 우리동네 몇몇 형들은 그 하역작업에 적극적으로 자원했었다.

품삯도 당시로선 쏠쏠했거니와 그에 못잖은 부수입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그만 대꼬챙이를 다듬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작업때 곡식부대에 찔러 흘러나오는 곡식을 위 내복 안에 담고 있다가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 말이 새어 몸 수색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형들로부터 아구찜 먹는 걸 배웠을 것이다. 그 전엔 못 먹는 생선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부두 근처에 있는 아구찜집에서 막걸리안주로 먹어보고서 집에서 해 먹기 시작했고, 그걸 보고 여러 사람들이 따라 먹었던 것 같다.

뒤에 들으니 그때 오동동 바닷가 아구찜집 중에 내 초등학교 동기 집도 있었는데 그가 지금 오동동 할매아구찜이다.

그 외, 양덕 미군부대 군용식품 절취해내는 속칭 도꾸다이이야기도 들었고, 청수들 저수지 으슥한 바닷가에 일본에서 오는 밀수배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도 여러번 들었으나 직접 본 일은 없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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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기합이라하여 상급생이 하급생들에게 거의 합법적으로 가하는 폭력, 그래서 항상 긴장해야하는 학내외 생활, 동급생끼리나 동네친구 나아가 또래급끼리의 쟁투를 위한 몸과 주먹 단련, 학교끼리의 패싸움으로 인한 모표, 교복 살피기 등등이 일상생활의 상당부분을 지배했던 것이다.

군사교육 강화로 인한 계급의식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한 정적 인간관계의 매마름이나 자유당정권의 깡패문화 등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며, 반자립적인 사대문화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어쨋든, 딱히 잡히는 원인은 모르는 채 이런 인습들의 소용돌이에서 온전한 정신을 못 차린 채 3년을 생활해 온 게 사실인 것 같다.

입학 두어 달 뒤에 받은 소위 단체기합이란 것은 큰 충격이었다.

1년생 전부를 운동장에 불러내어 엎드려뻗혀시켜놓고, 몽둥이로 치고 발로 밟고, 무릎 구부린 흔적(바지 무릎 부분에 묻은 흙)이 있다고 때리고, 선배 존경하는 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트집 내세워 그렇게 체형을 가하는 일을 처음 당해보니, 정말 상급생에 대한 공포감이 실감으로 왔다.

며칠 후엔 2년생들이 그렇게 당하는 걸 보았고, 얼마후엔 2년생들에게 우리가 당했다.

3년 될 때까지 5,6차례 그런 곤욕을 치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런 만행들이 선생님들의 묵인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에도 인습의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2017년 11월 1일 충남의 한 고등학교에서도 단체기합이 있었다 - 오마이뉴스 보도 사진>

 

점심시간에 선배가 교실에 들어와 누구를 끌고가서는 집단폭행하여 보내고, 길거리에서 경례 잘 안 부쳤다고 오소리 개뺨치듯 하고...... 심지어 난 거수경례를 하고도 얻어맞았다. ‘상급생을 왜 노려보았느냐는 것이었다.

모르는 선배를 노려볼 이유가 전혀 없었으나, 그런 변명은 매만 더 벌 것이기에 그냥 맞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저만치 같은 모표가 보이면, 목 칼라에 붙인 학년뱃지부터 살피고는, 상급생이면 경례붙이는 엄숙한 자세부터 짓는, 긴장은 항시 갖추고 다녀야했다. 시력이 나쁘다든지, 딴데를 보고 있었다든지 등의 말은 아예 안 하는 것이 나았다.

동급생끼리의 싸움질도 이틀이 멀다하고 일어났었다.

교실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주먹 자존을 위해 친구들 입회하에 용마산에서 붙는 일도 흔했다.

마산고의 누구누구, 마산상고의 아무아무개, 창신농고의 대표주먹, 마산공고의 펀치왕 들의 이름은 시내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익히 알려져있었다.

학교간의 집단패싸움도 참 잦았다.

개인적 충돌이 친구들까지 동원된 집단 자존심까움으로 번지기도 했고, 어디 야외에서 있은 충돌로 하여 수십명이 동원된 집단난투극으로 번지기도했다. 운동경기 응원중에 튀어나온 말에 흥분하여 으르릉거리기도 했고, 축구경기땐 종종 나오는 거친 플레이로하여 집단난투극으로 간 사례도 많았다.

특히, 마산고, 마산상고와 진주고, 진주농고간의 정기 축구경기는 거의 빠짐없이 후유증을 낳았다.

진주고 진주농고 응원단들이 마산에 오면 갈 땐 북마산역에서 터지고 가고, 두 학교가 진주에 가서 지면 덜하지만, 이기기라도 할라치면 응원꾼들은 진주역에서 기차를 못 타고 근처에 숨어있다가 밤기차를 타고 오기도 했었다.

낯선 동네에 가서 왈짜들에게 시달리는 일도 많았고, 외지로 갈 땐 아예 교모를 쓰지 않았다.

이런 풍토 때문에 내 고등학교시절 두 가지는 보통학생들에게 거의 필수가 되어있었다. 클럽 가입과 주먹단련이었다.

폭력써클까진 아니더라도 위세를 위한 모음이 태평양, ‘파도’, ‘다이야등등의 이름으로 많이 조직되어있어, 농촌학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가입했을 정도였다. 조직내 선후배간의 유대는 잘 되어 보호받기도 좋았을 것이다.

몸 과시엔 가슴 근육과 주먹 굳은살이 주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걸 위해 평행봉과 샌드백이 유행했다.

그래서 우리집에도 소나무를 베어 와서 땅에 박아 평행봉대를 세웠고, 집 뒤곁엔 군용백에 모래를 채운 샌드백을 달았다.

평행봉틀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가슴을 마져보았고, 샌드백을 친 후 주먹 굳은살(속칭 다마’) 만져보는 일이 습관적이 되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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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마치는 행사였으며, 선수 수는 30, 경기 시간은 30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술한 바처럼, 청수(淸水)들판 오른쪽 동네(봉덕동, 봉암2)와 봉암다리쪽 동네(봉암동, 봉암1)를 시에서 떼었다 붙였다 하는 통에, 한 팀이 되었다 분리되었다 했지만, 성적은 분리되었을 때의 성적이 훨씬 좋았다.

여러 번 우승한 것도 그때였다. 그때 우리 동네는 비록 떨어졌어도 한동네라는 의식이 강했기에 함께 모여 응원도 하고 밥과 술도 같이했다.

아침 일찍부터 운동장 군데군데에 각 동의 선수와 응원꾼들이 자리들을 잡았었는데, 중심지 동네 사람들과 변두리 동네 사람들의 입성과 모습, 준비물들엔 차이가 많았다.

특히 우리 동네보다 더 가난하고 외진 봉암1동 사람들은 첫눈에 드러날 정도로 그랬다.

선수들의 덩치도 별로 없는데다가 얼굴들은 대체로 새까맣고 깡마르고, 밥함지와 반찬통 이고 들고 온 부녀자들도 깡마른 몸에 검누른 얼굴, 입고 있는 저고리와 몸빼(もんぺ , 일본여성들이 일할 때 입는 헐렁한 바지), 몽당치마들에선 땟국이 묻어날 것 같았다.

그런 잔칫날인데도 함지 밥은 거무스럼했고, 반찬은 풋고추와 생된장, 열무김치가 주를 이루었다. 사이다 한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쪽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엔 활력이 넘쳤었다.

백여호 남짓밖에 안 되는 동네에서 칠팔십명도 넘어 뵈는 사람들이 왔다는 것부터가 그랬고, 평소엔 시내 중심가에 들어설 때부터 쭈뼛거리던 사람들(특히 아낙네들)의 모습과는 대조될 정도로 그 장소에서만은 생기들이 있었다.

비쩍 마른 아지매들도 이쪽 남정네들이 건네는 막걸리잔 스스럼없이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는 우승을 확신하는 큰소리를 주위에서 들으란 듯이 외쳤다.

그도 그럴 만했다. 마산시에서 가장 작고 가난하고 외진 그 동네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의외라고 화제로 삼을 정도로 우승을 독식하다시피 해왔던 것이다.

아마 선수들의 몸무게 평균을 내어봤다면 80:60 정도거나 그 이상의 차이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하여 그 동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때 눈여겨 본 장면들을 떠올려보면서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줄다리기는 고대부터 있었던 인간이 만든 게임이었다>

 

그들은 모두 어부들이었다. 작은 어촌에 큰 배는 없었기에 모두 노젓고 그물 끌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특히 대다수가 꼬시락잡이를 주업으로 했기 때문에 꼬시락 몰이용 줄(‘방줄이라 불렀다.) 끄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줄을 몸에 붙일 줄도 알았고, 줄에 힘을 싣는 요령도 몸에 배어있었다.

준비 신호를 듣자 모두 줄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나중에 보니 모두 적삼 겨드랑이에 두꺼운 천을 대었다.

새 짚신 신은 두 발은 오륙십센티 정도의 폭으로 좌우 수평을 잡았다. 몸은 약간 뒤로 기대듯이 하는 듯하더니 땅!하는 신호와 동시에 전신을 45도 정도로 뒤로 일제히 눕히면서 버텼다. 다리에서 어깨까지 거의 일직선에 가까왔다.

상대방처럼 영차! 소리도 내지 않았다. 모두 그런 자세로 버티니, 상대가 영차!할 땐 이쪽 선수들의 등줄기만 약간 구부러졌다가 다음 순간 재빨리 한치나 두치 정도 발바닥을 뒤로 옮겨 자세를 잡고, 그 다음 순간 또 그렇게 하고...... 한 치도 끌려가는 일 없이, 한 명도 옆으로 쓰러지는 일 없이, 특별나게 끌어들이려는 모습도 없이, 전신이 하나되어 끌었다.

흙투성이 선수들의 손에 우승기와 상금이 들려지는 순간 우리동네 사람들도 모두 하나로 어울렸다.

그때쯤이면 응원꾼들 대부분이 얼큰한지라, 자연스레 춤들이 나왔다. 곧 폐회가 되면 장구와 꽹과리가 나오고 막걸리통을 실은 수레가 나오면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주눅이 들어 지나다니기를 꺼려하는 남성동 오동동 대로를 거쳐 동네까지 이십리길을 그렇게 마시고 춤추며 가는 것이었다. 상당수의 아이들도 막걸리나 떡을 얻어먹으며 따라가고......

어느해인가 나도 그 광경을 보며 따르다가, 그러나 삼백 미터도 못 가 슬그머니 빠져버리고 말았다. 후줄근한 차림의 촌사람들 따라가기가 챙피하게 느껴졌으리라.

그랬다. 나는 남성동이 가까워지면서 중학교나 초등학교 친구들이 볼 것 같은 느낌에 따를 수가 없었던 것이 확실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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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16

16. 광복절 행사와 우리들의 영웅

 

초등학교 때도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가 있었지만 참여 정도가 미미해서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 응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운동경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선수들의 면면이 우리들의 선망대상으로 화제가 되었다.

특히 뛰어난 기량을 보였거나 남다른 재능이나 인기 끌 요소까지 겸비한 선수는 우리들의 영웅으로 부각되어 우리들 의식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기도 했다.

매년 815일이 되면 방학 중인데도 모든 학생들은 등교하여 기념식에 참석해야 했다. 식이 끝나면 바로 시가행진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마산 인구는 전쟁 피난민이 보태져 10만 명이 조금 넘었을 정도였는데도 도로가의 시민들 참여도도 높고 하여 지금 세태로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장관을 연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산시내만 사오천 명 되던 중고생들이 학교 위치에 따라 두 시간 정도 행진을 벌였는데, 맨 앞엔 당시 거의 모든 남자고교에 두고 있었던 밴드부가 서고 그 뒤를 학생들이 중대·소대별로 행진했다.

초등학생들은 행진 대열의 앞과 옆을 오가며 잔치 분위기를 돋우었고 구경거리가 별로 없었던 시절이어서 그랬겠지만 시민들도 연도에 몰려나와 성황을 이루었다. 변두리 지역을 제외하곤 시내 전체가 축제분위기에 젖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맨 앞줄에 선 악장들의 지휘봉을 이용한 재주피우기와 멋 내기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또 여고로선 유일하게 있었던 제일여고 고적대의 인기도 상당했다. 날씬한 몸매의 고적대가 드럼을 치면서 행진해 갈 때 수많은 조무래기들이 주위를 따르면서 발을 맞추던 장면이 지금도 떠오른다.

<여고 고적대 퍼레이드는 당시 큰 인기였다>

 

행진이 끝나면 오후부터 이틀 반 동안의 체육대회로 들어갔다.

마산시내 모든 중고교들이 그 학교에 두고 있는 체육종목에 참여함은 물론 통제부 팀, 81항공창 팀(공군) 등의 군부대 팀과 초등교사 팀, 신흥방직 팀 같은 직장 팀 등도 종목에 따라 참여해 그야말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진 체육축제였다.

그러니 경기 장소도 모든 학교운동장들이 동원되었다. 그 중 인기 있는 종목 경기가 많이 열렸던 마산상업고등학교(용마고 전신), 무학초등학교의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국수, 국밥, 비빔밥 등과 막걸리를 파는 천막식당들이 들어차 축제 분위기를 더욱 돋우었다.

마라톤 경기(1962) / 마산시내 수성동 거리를 지나고 있다.

 

그때도 우리 동네 친구들은 대부분 농사일에 동원되었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몇몇 친구들은 국수와 아이스케키 값 정도를 어떻게든 마련하여 아침 먹고 만나 경기장으로 갔다.

이 학교 저 학교 관심 가는 데를 골라 다니며 하루 종일 배고픔도 잊고 돌아다니다 해거름 쯤 집으로 돌아오면서 게임이야기와 선수들 잘잘못 이야기로 신났던 기억은 지금도 즐거운 상념을 불러온다.

그때 우리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대스타가 잊혀 지지 않는다.

정재문이라는 2년 선배였는데 그는 내가 중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동네 형들로부터 이름을 여러 번 들었을 정도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입학식 날 대대장으로서 구령을 붙이던 때였는데, 그때 본 모습은 소문대로 참 훤칠했다. 키 크고 체격도 좋고 얼굴도 준수했다. 대대장으로서의 통솔력도 뛰어나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런 그가 당시 마산시내 중학교 최고의 투수에다 공부도 상대가 없을 정도로 우수했으니 명성이 자자했던 건 당연했다.

특히 8·15경축기념체육대회에 대비하느라 합숙훈련을 하면서도 휴식시간엔 가교사로 된 합숙소 앞 그늘에 책걸상을 내어놓고 공부하던 모습과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마산동중과의 야구경기에서 강속구를 뿌려 열 몇 개의 삼진을 잡아 우리를 열광시키던 모습은 워낙 인상이 깊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그는 그 후 선생님들의 권유로 전국의 수재들이 다 모인다는 경기고등학교에 응시하여 3등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선생님들이 자랑삼아 얘기하여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도 투수로 활약하면서도 2학년 올라갈 때는 수석 했다는 소식도 같은 경로로 들었다.

그 후 40년도 더 지난 뒤 듣게 된 후일담.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갔고 장성 계급장을 달지 못했다고 했다.<<<

(편집자 주 ; 196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정재문 씨는 월남전에 참전(1969~1970)하였고 1985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그후 쌍용그룹에 입사하여 쌍용건설 전무이사를 지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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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5

15. 정전 후의 체험들 - 공군 요양소

 

우리 동네 대여섯 채의 적산가옥(일본인들이 살던 집)들은 다 불하되어, 동네 사람들이 들어갔지만, '봉선각'은 그 얼안이 커서(500평은 되었을 듯) 동네 사람들은 엄두를 못 내었던 듯 한동안 비어 있었다.

<봉선각 / 1930년대 촬영>

 

그러다 시내의 누군가가 임대하여 영업을 했던지 한때 장구소리를 듣기도 했었는데, 시국이 시끄러워지고 팔룡산 꼭대기에 봉홧불이 오르고, 곧이어 전쟁이 나고 하면서 봉선각은 폐가로 되어갔고, 우리들도 거기 가길 꺼려했었다.

그래선지 내 어렸을 때 거기에 얼킨 이상한 얘기들 밤 되면 말 달리는 소리도 들리고, 여자 울음소리도 들린다는 투의 괴담들 을 많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곳이 부활한 건 공군 병원이 들어오면서다. 정전 직후부터 오륙년 동안 주둔했었는데, 주로 결핵환자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공군 요양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의무병을 비롯해 사병들이 이삼십 명 있었던 것 같고, 장교는 군의관 외엔 준위 한 사람만 보았다.

부대 규모는 그래도 농촌 작은마을이라 그런지 이들의 존재감은 꽤있었다.

장기 복무자 대여섯 명은 동네 집들에 세 들어 살면서 병원 약들과 간단한 주사 등을 동네 아픈 사람들에게 주었고, 여러 친분을 통하여 다른 군용품들도 흘러 나왔다.

당시로선 참 귀했던 소화제나 다이아진, 소독용 알콜 등도 얻을 수 있었고, 디디티나 쥐약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기침을 많이 했는데(백일해 후유증이라고 들었다) 우리 집이 공군 병원 바로 아래 있었기에 기침이 심할 때는 병원에 올라가 마이신 주사를 엉덩이에 맞고 오는 혜택도 입었었다.

맞을 때의 아픔과 주무르면서 내려올 때 엉덩이가 뻐근했던 기억이 난다.

의무병 박 하사는 동네 할머니에게 갈 때도 별 필요도 없는 낡은 가방을 들고 다녀 똥가방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고, 수송부 김석규 하사는 아무나 요청하면 잘 챙겨주어 나이도 좀 들었는데도 우리들까지도 안 듣게는 석규’ ‘석규하기도 했었다.

수송부에는 매일 아침 신마산으로 가는 중형차 한 대가 있었다. 차종 이름을 스리쿼터라 불렀는데, 거의 매일 같이 신마산으로 가서 부대 부식을 실어 온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차가 얼마나 고물이었던지 발동이 제대로 걸리는 날이 거의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여러 군인들이 밀어서 발동을 걸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부터는 우리가 밀게 되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후로는 거의 우리가 자임했다.

부대 앞에 예닐곱 명이 서 있다가 석규 씨가 차에 오르면 우리는 익숙한 협력으로 땀을 흘리며 스리쿼터를 밀어 아리랑 고개 위에 올려놓고는 모두 탄다.

차가 내려가 가속도가 붙으면 내리막이 다하는 지점쯤에서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발동이 걸리는데, 그때부턴 전혀 고물 티가 없이 힘차게 달렸다.

석규 아저씨는 예의 그 청춘고백을 신나게 불러가며 자갈길을 널뛰듯이 달렸고, 떨어질세라 찻전을 꽉 붙잡으면서도 우리도 신이 나서 흥얼거렸다.

합포초등학교는 너무 가까워 아쉬웠고 마산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승차 재미에 더 빠졌었다. 그래서 하교 시에도 석규 스리쿼터가 지나가지 않는지를 살피러 종종 뒤를 돌아봐가면서 걷는 습관들도 생겼다.

어쩌다 타이밍이 맞아 몇 번 탄 일도 있긴 했었다. 언젠가는 수송부 텐트에서 석규 아저씨와 두세 명의 군인들을 모셔 놓고 연말 파티를 연 기억도 있다.

공군 부대에 대한 또 하나의 뚜렷한 기억이 있다. 천 상사 이야기다.

2 미터 가까이 됨직한 키에 쫙 벌어진 어깨와 가슴, 반쯤 걷어 올린 소매 밑으로 드러난 절굿대 같은 팔에 돌판 같은 손, 거기에 약간 거무스레한 빛이 도는 얼굴에(잘 생긴 편이었다) 반 곱슬머리였으니 그 모습만으로도 보는 사람들 누구나 위압감을 느낄 만 했다. 거기다 당시론 드문 태권도 고단자라 했으니 더 그럴 만 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간혹 나가는 외출 때는 여러 사병들이 그를 앞세우고 창동 남성동 거리를 활보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럴 땐 주차장 깡패들도 슬슬 피했고, 진해 뿐 아니라 마산 시내까지 휘젓고 다니던 막사 해병들도 감히 시비 걸 엄두도 못 내었다는 이야기들이 우리들 사이에서 신나게 회자되었다.

그러나 그 천 상사(천규덕)가 몇 년 후 한국 최고의 프로 레슬러까지 될 줄은 차마 몰랐다. 레슬링이라는 용어도 몰랐으니까.

그는 배우 천호진의 아버지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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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2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4

14. 정전 후의 체험들 - 마부 버스, 화물차

 

군용차 아닌 것들을 그때 우리들은 개인차라 불렀는데, 개인 승용차는 당시로선 하루에 한두 대 보기도 어려웠고, 거의 모두가 화물차와 버스였다.

거의 모두 일제가 두고 간 것이나 군에서 불하한 것들이었는데, 차종에 관계없이 크기가 좀 작고 연하게 생긴 것은 일제(일본제품), 크고 견고해 보이는 것은 미제(미국제품), 개조한 차들은 선제(조선제=국산)라 불렀다.

차에 호기심들이 많았던지라 지나가는 차들을 그렇게 분류하기를 즐겼고, 종종 분류를 다투기도 했다. 이 용어들은 한참동안 옷, 화장품, 학용품 등에서도 쓰였다.

60년대 서성동 버스 종합터미널이 생기기 전까지 회사 별로 여기저기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주로 오동동, 창동, 남성동에 있었는데, 회사가 마산에 있은 것은 별로 없었고, 부산 회사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한금속, 신한여객 등이 생각나는데, 후에 천일, 신흥 등이 나타난 것 같다.

버스 엔진은 군에서 수명이 다한 것을 재생시킨 것이라, 소리도 요란하고 정지 후 출발 때는 으레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아 쇠창 같은 기구로 돌려서 발동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몸통과 내부 시설들도 철판 등을 붙인 듯 달릴 땐 삐그적거리고 너덜거렸다. 그래도 자갈 튀기며 달릴 땐 아주 빨랐다.

<미군용 폐차 재생 버스>

 

마산 오동동에서 부산 대신동까지 세 시간 반 남짓 걸렸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마부 국도의 거리가 지금보다 길었고, 시내 진입 전의 전 도로가 비포장이었으며 군데군데 패이거나 가장자리가 허물어진 곳도 있었는데다가, 장시간 정차하는 곳도 여러 곳이고, 아무데서나 손만 들면 태워주는 운행방식이라 그렇게 걸렸던 것 같다.

창원(동정동 사거리 위치), 진영(진영역 정문 근처), 김해(위치도 모르겠다), 구포다리 부산 쪽 입구, 범일동 등에서 10여 분씩 지체했었다.

그동안에 장사치들이 올라와 여러 가지 물품을 팔았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구포 배와 진영 단감이다. 장사 중엔 강매꾼들도 제법 있었는데, 대부분 상이군인들과 그 지역에 상주하는 건달들이었다.

버스들끼리 경쟁도 심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차체가 요란하게 흔들릴 정도로 달렸는데, 언젠가 부산 누나 집에 갈 땐 머리가 천정에 부딪쳤던 기억도 있다.

양덕 삼거리(수출자유지역 후문 앞 파출소 근처)에서 탔기 때문에 맨 뒷자리에 앉게 되어서 더 심했던 것 같다.

속도감도 지금 사람들과는 달라 빠르게 느꼈겠지만, 그런 덜컹거림 때문에 더 빨리 달리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쯤 해서 야남면(상남면, 웅남면) 다니는 버스도 나오고, 마진(마산 진해) 버스도 나와 봉암 사람들도 더러 버스 승차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시장에 채소함지 이고 나가는 아낙네들이나, 많은 품팔이들은 승차 엄두도 못 내었다. 일마치고 돌아오는 말 구루마(말 수레), 소 구루마 운 좋게 만나 타면 호강으로 여겼다.

당시엔 트럭도 사람들 운송수단으로 많이 쓰였다. 관광버스가 생긴 시기는 6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되는데, 그 이전까지는 사람들 동원이나 야유회 등에는 트럭이 주로 사용되었다. 국가 행사나 시 행사 땐 시에서 트럭을 내주었고, 근처 유원지로 놀러갈 때도 트럭을 불렀다.

봄이나 가을엔 트럭들이 짐칸에 시멘트 부대 같은 걸 깔아놓고 요금 받고 태워주기도 했다.

전쟁 직후 아버님 친구 십여 명이 가족들 데리고 북면 온천장으로 놀러갈 때 고개를 삘삘거리며 겨우 넘었던 기억이나, 중학교 때 바로 위 형과 외사촌 형과 더불어 진해 벚꽃장 갈 때 양덕 삼거리에서 세워놓고 호객하는 화물차 타고 갔던 추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 전후 얼마 후부터 소위 하이어(택시)라고 불리던, 8인승 정도의 차도 나왔는데 그것도 군용 지프를 불하 받아 개조한 것이라고 들었다.

그건 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술집이나 유원지로 대절하여 다녔는데, 봉암 다리 근처에 번창했던 꼬시락 횟집 때문에 많이 보았다.

그 동네 대부분의 집들이 인근 바다에서 꼬시락을 잡거나 그걸 재료로 횟집들을 운영했었는데, 50년대 후반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진해 별장가는 길에 거기에 들렀다는 소문까지 퍼져 꽤 번창하기도 했었다.

그 작은 어촌 마을에 해상 캬바레까지 있었으니까.<<<

<봉암교와 인근 해상 꼬시락 횟집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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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12

12. 정전 후의 체험들 - 귀환, 상이군인들

 

정전 얼마 후에 전장에 갔던 아저씨들이 속속 돌아왔다.

함께 끌려가서(그땐 그렇게들 표현했다) 내내 한 부대에 있다가 함께 돌아온 우용 아저씨와 내 당숙은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왔고, 다른 두 분은 정전 한참 후 제대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우용 아저씨는 볼에 큰 흉터를 가지고 왔는데, 내 당숙은 손끝 하나 다친데 없었다.

부대가 후퇴할 때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다 열차탈선으로 부대원 전체가 부상 혹은 사망을 당하여 모두 상이용사로 제대되었는데, 집결지에 늦게 가 열차를 못 탄 당숙도 함께 상이제대 되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동네사람들의 화제 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한참동안 소식이 없어 죽은 줄만 알았던 남규 아저씨의 귀환은 우리들에게 상당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정전 후 우리 집에도 두어 명 다녀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허름한 복장에 단봇짐을 지고 나타난 청년들에게 음식을 주고 여비도 쥐어주는 걸 보았는데, 아버님 말씀으로 그들은 거제도에서 나온반공포로라고 했다.

그들에게 협조하라는 공문까지 시와 동에 왔더라고 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 집결한 반공포로>

 

그걸 본 얼마 후에 그 청년들 보다 훨씬 남루한 누비옷차림의 남규 아저씨가 아리랑고개를 넘어왔고, 가족들의 울음과 동네사람들의 놀라움과 감탄을 받던 광경을 나도 본 기억이 난다.

북한수용소에 이 년 넘게 있다가포로교환으로 왔다고 했다.

다른 부대와의 교신이 끊긴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계곡 따라 올라가라고 몰아치던 소대장, 결국 반 이상의 병사와 소대장도 전사하여 저항도 못하고 엎드려 있는데 총성이 그치고 누구에게 엉덩이를 거칠게 채여, 그 길로 수 일 동안 타고 걷고 하며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간 이야기,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다투던 이야기, 친공포로들의 협박과 회유에 얼버무리곤 하다가 결국 심사관 앞에서고향가고 싶다는 한마디로써 풀려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등은 그때 우리들 사이에서도 꽤 오랫동안 인기화제 감이었다.

그런데, 그즈음 하여 여러 번 보았던 상이군인들의 횡포는 매우 충격적이어서 지금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으로 남아있다.

의족이나 의수를 한 상이용사들이 몇 명씩 몰려다니면서 민폐를 일삼았던 일이다.

 

상이군인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상가나 민가에 들어가 곡식이나 돈을 요구하다 여의치 않으면 시비를 붙고 행패를 부리는 일이었는데, 그런 광경을 등하교 길에서도 여러 번 목격했다.

쌀이나 보리쌀 반 되 혹은 돈 몇 푼이면 순순히 받아가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더 많은 경우 이걸 누구 코에 붙이느냐며 떼를 쓰기 일쑤였다. 심지어 구멍가게 과자 통을 비우는 일도 있고 주막집 막걸리 독을 비워 버리는 일도 있었다.

항의하는 주모의 저고리 소매를 쇠갈고리로 된 의수로 꽉 집어 질려버리게 했고, 저만치 서있는 남정네의 복장을 향해 창 던지듯 목발을 날리기도 했다.

자꾸 던지면 그것도 단련이 되나 보았다. 목발이 일직선을 그으며 날아가서 상대의 가슴이나 배, 옆구리 등을 정확하게 맞혀 그를 헉하고 엎드리게 하는 장면도 두어 번 목격했다.

이렇게 행패를 부리고는, “누구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는데” “너그들이 이렇게라도 살아있는 게 누구 덕인데”, 저주 섞인 목소리로 고함치기 일쑤였다. <전술한 졸저에서>

 

같은 상이용사였던 9촌 아저씨의 말이 기억난다.

집도 가족도 잃고 몸 때문에 취업도 못하는 저들이 저 짓 말고는 뭘 하고 살아 가겠냐

<전쟁 후의 상이군인>

 

이승만 정부는 자신들 배불리기에 바빠 그들을 방기하고 있었는데도 그들의 분노는 엉뚱하게도 애먼 양민들, 아니, 비슷한 희생자들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역리는 형태를 달리하면서 그 후에도,, 아니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니, 분단의 부작용이 언제까지 이 사회 역리의 원천으로 작용할 지, 종종 암담한 생각이 들기도 해왔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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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10

10. 정권 후의 체험들 - 깡통문화, 총탄

 

정전 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행진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마산에서도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나 형들로부터 엿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였던 기억은 없다.

아마 선생님의 설명을 통하여 상황인식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정부에선 백두산까지 밀고 올라가 통일하자고 했는데 유엔이 정전을 강행했다는 것만 알았다.

혼자서 수류탄을 들고 적 탱크 밑으로 들어가 산화한 전쟁영웅 열 명의 사진에 간단한 설명을 붙인 소의 육탄 십 용사포스터가 교실 벽마다 붙었고, 그들은 한동안 반공웅변대회의 중심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에 있는 '육탄 십용사' 충용탑>

 

그리고 이때부터 각 학교에서 반공강연회가 수시로 열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에 비해 훨씬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소위 양키시장이라 불리던 곳에 쏟아져 나왔던 깡통식품들에 대한 기억과 쉽게 만질 수 있을 정도로 흘러 다녔던 총탄과 그걸 이용한 총 놀이, 그리고 군에서 불하된 트럭들로 인한 차타기 경험들이었다.

부림시장을 국제시장이라 부르기도 했고, 거기에 있었던 극장을 국제극장이라 명명했던 이유이기도 했는데, 마산에서 미군물자를 가장 많이 취급하던 곳이 그 시장이었다. 지금 부림지하도 근처에 철로가 있었는데 그 양쪽 시장이 중심지였다.

깡통식품뿐 아니고 옷, 구두, 야전침대, 공구 등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물품들이 나왔었다고 기억되는데 거의 모두가 군수품들이었다.

전쟁 중에는 몰래 빼돌려진 물건들이 조금씩 나왔었지만 정전이 되어 미군이 대다수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전쟁잉여물자가 되어 시중으로 범람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정전 두어 달 후가 되겠는데, 집집마다 깡통 배급이 나왔다. 한 되 남짓들이 깡통이었다. 전쟁용 비축식품들이었는데 잉여 물품들이 되어 전 국민들에게 배급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식구가 많아 3개였다. 따보니 콩과 쇠고기로 만든 통조림이었는데 처음 먹어볼 때의 그 고소하고 진한 맛에 대한 끌림은 그 후에 국제시장을 더 찾게 했다.

그러나 그 기름진 음식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설사에 시달리기도 했었다고 후에 들었다.

 

<미국에서 온 구호품을 보며 내심 기대하는 아이들>

 

이렇게 깡통제품들이 흔해지니 우리들 생활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주로 나무로 만들어졌던 두레박이 양철제품으로 바뀌었고, 나무함지도 가볍고 튼튼한 양철다라이(다라이는 대야의 일본 말)로 대부분 바뀌었다.

웅덩이 물 두레도 그랬고, 각종 그릇들도 강통이 대신했다. 가을 논의 참새 떼 쫓는데도 수많은 깡통이 동원되었다. 또 깡통차기라는 놀이도 생겼다.

전에는 자치기나 비석놀이, 일제잔재인 다스께또놀이(술래잡기와 비슷) 등을 주로 했는데 이 놀이가 나온 뒤로는 역동성과 소리의 효과로 해서 이걸 많이 했던 것 같다.

술래보다 먼저 달려가 깡통을 차서 소리와 함께 깡통이 날아가고, 잡힌 동료들이 해방될 때의 쾌감은 큰 즐거움이었다.

정전 후 군대 내의 무기 관리체계가 좀 엉성했던지 이상할 정도로 총알들이 많이 굴러다녔었다.

주로 칼빈 탄환이 많았었는데, 탄알을 뽑아내고 뇌관 부분에 구멍을 뚫어 장난감 총 만드는 데에 많이 활용했다.

꼭 우산대만한 쇠파이프가 당시 시중에서 유통되었는데, 그걸 10센티 남짓 끊어 칼빈 탄피에 끼우면 맞춘 듯이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그걸 당시 가게에서 많이 팔았던 나무권총의 총신에 홈을 파 묶었다. 파이프 안에 딱지화약을 까서 넣거나 총탄에서 빼낸 화약을 재어 넣는다.

그 뒤에 잔돌이나 철사 조각 따위를 넣고 그 뒤를 진흙이나 물에 적신 솜 같은 것으로 단단히 봉하고, 탄피 구명에 딱지화약을 붙인 뒤 고무줄에 걸린 공이를 튕겨주면, 공이가 피스톤처럼 나아가 화약을 쳐서 폭발이 일어나고 그 불이 파이프 안에 전달되어 폭발이 일어나서 잔돌이나 철사조각이 탄환처럼 날아갔는데 그 위력이 제법 컸다.

총신을 좀 길게 해서 잘 만든 것으로는 둑에 가깝게 온 오리 잡는데도 사용했었다.

이 파이프를 우리는 댓(철판의 일본어 てっぱん을 말한 것으로 추정)이라 불렀기에 이 총을 댓방총이라 했었다.

그리고 총탄과 관련된 참으로 무지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기억도 있다.

당시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회충검사를 하고 구충약을 나눠줄 정도로 회충구제가 골칫거리였는데, 구충에 좋다는 말이 돌아 상당수의 아이들이 총탄 화약을 뽑아 씹어 먹고 다녔던 것이다.

나도 먹어본 기억이 있는데 무미 무취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배탈 났단 말도 못 들었던 것 같다.

차타기 이야기는 수학여행과 더불어 해야 좋을 것 같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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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9

9.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 용의검사, 학력경쟁

 

가교사생활 직후부터 실시된 용의검사는 생활환경이 좋은 도회지 넉넉한 집 아이들에겐 별 부담이 안 되었겠지만, 누추한 환경에서 생활하거나 항상 흙을 묻히고 살아야하는 농촌 아이들에겐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1~2주에 한번 씩 하는 검사는 대체로 손발의 때 검사만 했기에 부담이 덜했지만 매 달하는 총검사는 팬티만 입혀놓고 했기에 그 전날부터 대비하느라 많은 고생들을 했다.

 

<'대추나무골님의 블로그'에서 빌려왔습니다>

 

한 학년 차이의 내 여동생에게 들어서 알고 있거니와, 여학생들에게만 실시한 머릿니 검사도 역시 생활환경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많은 상처를 준 것 같다.

영양상태가 좋은 아이들은 피부에 윤기가 돌고 때도 잘 끼지 않을뿐더러 씻어내기도 쉬운데, 당시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 반대였다. 이삼일만 돌보지 않아도 손발에 누룽지 같은 때가 끼기 마련이었다.

합포초등학교 구역 동네가 오동동, 산호동, 상남동, 양덕동, 봉암동이었는데 오동동의 상당수 학생들과 산호동 상남동의 일부 학생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대체로 여기에 해당되었다. 거기다 공중목욕탕도 거의 없어 용의검사 대비에 더 애를 먹었다.

당시 구마산에는 남성탕(남성동, 현재 신한은행에서 남성동지구대 쪽 2~30미터 거리 위치)이 유일했고, 내가 육학년일 때 오동동에 은하탕(오동동 다리 안쪽 4~50미터 거리 오른쪽 골목 안)이 생겼는데, 용의검사 전날엔 자리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복잡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나마 목욕료가 부담스러워 못 가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봉암동의 친구들 중엔 가본 사람이 삼분의 일에도 못 미쳤을 성싶다.

목욕탕 내의 풍경도 지금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나무로 된 개인용 물대야가 모자라 친구끼리 함께 사용했으니까 탕 안에 들어갈 때도 대야를 가지고 들어가다 시비가 생기곤 했다.

물엔 때가 둥둥 떠다녀 종업원이 수시로 들어와 족대로 때를 떠서 밖에다 털어내곤 했다. 더운물 달라는 손뼉소리와 고함소리가 수시로 나왔고, 남녀 탕 중간에 있는 맑은 물 칸에서 물 다툼 시비가 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때를 벗겨낼 수 있는 친구들은 이튿날까지도 마음들이 참 홀가분했었다.

목욕탕에 못 가는 친구들은 쇠죽이나 돌맹이 등으로 때를 벗겼다. 쇠죽은 소를 먹이는 집에만 있기에 많은 친구들은 평소 냇가에서 구해둔 곰보돌맹이를 주로 썼다.

따끈한 쇠죽에 수십 분간 손발을 담가 불어난 때를 겨와 짚여물의 마찰력을 이용해 문질러 벗겨내면 상당히 효율적이긴 했으나 등배의 때는 그것으로 안 돼 목욕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찰력이 있는 돌멩이로 문지르는 것도 효율은 짚여물보다 더 떨어지기에, 손발에 피가 삐짓삐짓 내비칠 때까지 문지르고도 말끔히 벗겨 내지를 못 해 땟발이 트실트실 일어나면 검사직전 침을 발라 눌러두기도 했었다.

그러니 등배의 때는 아예 포기하고 이튿날 친구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늦가을부터, 그러니까 내의를 입기 시작할 때부터 무명 올 사이에 끼어서 피를 빨며 겨울을 나고, 봄에 내의를 벗을 때 사라지니 추위가 오면 이는 사람과 공생했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겨울 저녁에 화롯가에 둘러앉아 내복을 화로 위에 펼쳐들고 이를 잡는 광경은 1960년대까지도 한국 가정의 일반적 풍경의 하나였다.

빈대나 벼룩은 가려운데다 부르트기까지 해서 고통을 더 주었지만, 그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귀찮기로는 이가 더했다.

빡빡 깎은 남자아이들 머리엔 없었는데 여자아이들 머리엔 이가 참 골치였다. 가려운 것도 괴롭거니와 이가 슬어놓은 서캐가 하얀 점을 보이니 남 보기에 창피한 것도 큰 문제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한 짓이었는데,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DDT(흰 분말 살충제)를 구해서 내복에도 뿌리고 여아들 머리에도 뿌렸었다.

 

<아예 서울역에서 줄을 세워 DDT를 뿌리던 시절이었죠>

 

그래도 모자라서 용의검사 전날엔 머리카락에 붙은 서캐에 식초를 발라 붇게 하고는 빗살을 실로 죄어 빗살들 사이를 더 촘촘하게 만든 참빗으로 긁어내기도 했었다.

그런 노력들을 하고도 검사 날 모욕감에 울상을 지은 여학생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난리 통인데도 학력경쟁을 심하게 부추겼던 당시의 학교풍토는 지금 생각해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대학교들이 모두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때였는데도, 우리들은 중학교 입시 성적 경쟁에 동원되어 성적 순 줄서기를 했던 것이다.

매월 종합 모의고사를 쳤고 성적우수자라며 1등부터 50등까지의 명단을 학교게시판에 붙였고, 전교생에게 박수까지 치게 했었다.

봉암동 양덕동 친구들의 상당수는 중학교 진학조차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런 학교현실은 이듬해 본 중학교 입시 합격자 발표에서도 나타났다. 판자가교사 벽에 길게 붙었던 합격자 명단이 성적순이었다.

그 통에 합격하고도 끝머리 즈음에 간신히 붙은 경우엔 부모로부터 구박을 받거나 온 동네 창피를 당해야 했다.

그런 합격자 발표 방식은 당시엔 전국적 현상이었다고 들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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