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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4)

<근대기 마산도시변화 총정리>

개항부터 해방 때까지 47년 동안 진행된 마산의 도시변화과정 속에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철저히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제가 자본 축적을 위해 마산을 투자의 대상으로 삼아 도시를 물리적으로 확대하거나 변형시켜 나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원래 조계지로 설정되었던 신마산 지역은 식민 지배 이후 부분적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근대적 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던 원마산 지역의 사정은 전혀 달랐습니다.

도시정책을 좌우했던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도시는 단지 투자의 대상이었기 때문에「근대도시로의 변화」와「전통 공간의 보존」이라는 도시의 기본적인 발전방향은 철저히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도시변화과정의 바탕이 이러했기 때문에 근대기 마산 도시는 경제적 잉여를 창출하기 위한 양적 팽창에 치우쳤을 뿐, 도시 공간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조계지 일대를 기반으로 한 신마산이 지형 상 시역화(市域化)되기에 적절한 자연평지 중 최남단에 자리를 잡았던 것도 마산의 도시구조를 결정하는 규정적 요소로 작용하였습니다.

이 지역의 공간적 한계는 북쪽에 위치한 원마산 방향만 제외하고 나머지 세 방향이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평지의 최말단부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도시의 공간적 입지조건이 시역(市域)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폐해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즉 원마산의 북쪽에 가용지로 활용할 수 있었던 광활한 평지가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전 해안을 매립하여 천혜의 자연해안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서쪽의 산사면(山斜面)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결과는 산과 바다 사이에 놓인 동서방향의 단축(短軸)이 경사면이라는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도시 각 공간의 유기적 연결은 어려워졌고, 결국 도시 내 각 지역이 균등하게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금까지 제가 올렸던 근대기 마산도시변화에 대한 글들은 문헌과 지도 등 서지(書誌)를 이용한 역사학적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료 수집과 이에 따른 분석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특히 정부기록보존소 자료, 사정(査定) 당시의 토지관련 자료, 행정관련 기록들을 완전하게 검토하지 못한 아쉬움이 큽니다.

또한 개항이라는 특수한 경험을 가진 도시로서의 도시사적 의미 고찰과, 유사한 변화과정을 거친 타 도시와의 비교연구를 시도하지도 못했습다. 그리고 도시변화의 사실 확인이라는 관점에 치중함으로써 도시공간에 대한 분석을 심도 있게 진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면, 본 글에서 이용한 자료가 기존의 마산사 연구에 자주 인용되었던 관찬자료의 수준은 약간 넘어선 것들이었으며, 이 덕택에 기왕의 통설도 일부 극복할 수 있었던 점입니다.

또한 선행 연구가 없는 상태에서 시도되었다는 점과 도시연구에서 선행되어야할 물리적 형태변화의 연구라는 점에서 「근대기 마산 도시의 기초 자료」 정도의 가치는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한편, 이 글의 대상이었던 시기와 현재와의 사이에는 약 70여년의 시간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시간 동안 마산의 도시구조는 전쟁과 공업화 등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당시의 도시구조와 현재의 도시구조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예단할 수 있는 것은 당시에 만들어진 마산의 도시구조가 현 도시 내부에 잔존하고 있으면서 지금과 같은 도시구조로 변하기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끝>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연재는 만4년 전인 지난 2010년 4월 8일 시작해 한 주도 쉬지 않고 올렸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써나갈 글의 순서를 아래와 같이 3단계로 구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1차 게재>

고려시대 이전

조선시대

개항(1899년)

<2차 게재>

개항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

일제강점 제1시기(1911년부터 1920년까지)

일제강점 제2시기(1921년부터 1930년까지)

일제강점 제3시기(1931년부터 1945년까지) 

<3차 게재>

산업화 이전시기(1945년부터 1960년까지)

도약 및 전성기(1961년부터 1990년까지)

정체 및 쇠락기(1991년부터 2010년까지)

 

오늘 214회까지 <1, 2차 게재>는 모두 마쳤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았고 놓친 부분도 많았을 것입니다. 차후에라도 좋은 자료가 있으면 보완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3차 게재>를 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어려움이 좀 있습니다. <1,2차 게재> 부분은 내용 정리가 되어 있었지만 <3차 게재>는 그렇지 못합니다.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3차 게재>를 준비하는 동안, <마산·창원 지역사연구회>에서 펴낸 책 「마산·창원 역사읽기」를 매주 월요일에 올리겠습니다. 필자가 다양하고 내용도 좋아 제가 지금까지 올린 연재보다 훨씬 유익한 글들입니다.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45년 이후의 글은 준비 되는대로 올리겠습니다.

해방 당시의 자료 한 개 소개드립니다.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촬영한 마산의 항공사진입니다. 우측 상단의 하얀 여백이 현 용마고 운동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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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2)

지금까지 올렸던 글에 대한 요점과 관점 그리고 성과를 정리한 글입니다.

 

마산은 오래 전부터 존속해왔던 조선인 집촌의 원마산(마산포) 지역과 개항 이후 인위적으로 조성된 신마산 지역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각각의 영역을 확산시키면서 마침내 하나의 도시로 연담화되어 가는 변화과정을 겪었습니다.

마산의 도시구조가 지금과 같은 틀을 갖춘 것은 이 시기였으며, 이 때 형성된 도시구조는 이후에 규모만 확장되었을 뿐 큰 변화 없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용 중 과거에 존재했던 도시공간의 복원은 그 자체로서 해당 시기에 지니고 있던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익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구조의 물적 형태를 시계열적으로 설명하였기 때문에 도시사학(都市史學)의 관점에서도 약간의 성과가 있다고 봅니다. 이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이후 계속적으로 전개된 도시의 변화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올린 제 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근대기에 진행된 도시 전체의 변화과정을 지도와 서지 등 각종 자료를 통해 분석하여 그 변화과정을 시기별로 밝혔고

둘째, 마산의 중심부인 원마산 지역에 대해서는 지적도를 이용하여 4시기에 걸친 토지이용도를 복원한 후, 각 시기에 이 지역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았으며

셋째, 위의 두 결과를 이용하여 마산 도시변화의 특성을 밝힌 것입니다.

내용 중 마산관련 지도와 자료를 이용하여 각 시기별 도시구조의 변화과정을 밝힌 작업은 마산이 지금과 같은 도시구조의 틀을 갖추게 되는 과정을 가시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는 개항부터 해방 때까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관심을 가진 시간의 범위를 이 시기로 택하였습니다.

이 작업을 통하여 자연취락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통 도시로서의 원마산과 개항 직후 각국공동조계지에서 시작되어 인위적으로 조성된 신마산이라는 두 도시가 하나의 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일본인들의 마산 이주 단계와 신마산의 형성과정 및 일본인들에 의해 경영되었던 마산 도시의 사회와 산업 및 도시 시설의 변화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원마산과 신마산의 사이에 중앙마산이라고 하는 제3의 도시공간을 의도적으로 형성하였다는 사실과 마산의 해안을 무차별적으로 매립한 사실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상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해방 이전까지 24회에 걸쳐 실시된 해안의 매립 시기와 규모 그리고 그 위치까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습다. 이를 통해 마산의 지형 변화뿐만 아니라 지질구조의 단편까지 파악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제에 의해 도시내부공간구조가 변화되기 전의 원마산(마산포) 원형을 복원한 작업은 제가 크게 공을 들인 부분입니다.

이 복원도를 통해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해온 마산포의 천연 해안선과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을 전국에 널리 알린 마산포 선창과 굴강, 그리고 수백 년 전에 형성된 좁은 길들을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재의 도시 공간 속의 어느 곳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마산의 도시 공간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이는 차후에 다른 영역의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복원한 결과를 통하여, 전통적 도시와 근대적 도시의 대비뿐만 아니라 두 공간의 절충 및 구조적 변화를 가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시기별 복원도를 비교․분석한 시계열적 연구를 통해 원마산이라는 전통공간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면서 도시의 중심성을 강화해 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이 식민도시에서 행한 경제적 침투, 즉 토지 소유권 침투에 대하여 그 소유량과 시기별 변화, 소유토지의 규모 및 소유 주체, 그리고 상권 변화에 따른 소유토지의 이동 등을 계량적으로 증명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개항 이전까지 한국인만의 공간이었던 원마산은 개항 이후부터 한․일 양 민족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바뀌었으며, 일본인의 지배력은 강점 후기로 갈수록 점점 대형화․집중화되어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배력은 도시지역의 범역이 확산되면서 전역화(全域化)되어 갔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흘렀던 마산의 도시변화가 일제의 강점이 끝난 시점에 이르자 전통 공간이었던 원마산의 도시구조는 새로 건설된 도로와 항만․매립 등으로 인하여 크게 변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변형된 데에는 식민지 행정 체계와 일본인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마산이 근대도시로 변하기 전의 지도와 1945년 해방되었을 때의 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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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1)

지금까지 210회에 걸쳐 1945년까지의 마산 도시의 변천과정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살펴본 마산 도시의 변화과정을 각 시기별로 요약․정리합니다.

 

<개항 이전의 시기>

고려의 정종(靖宗, 1035-1046년 재위)대에 이르러 정부는 마산 해안에 조창인 석두창(石頭倉)을 설치하였습니다. 창(倉)의 위치는 오늘날의 남성동 부근에 있던 해안 지역으로서, 근대기까지 존속했던 동굴강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의 이런 추정과 달리 산호동 쪽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충렬왕 원년(1274년)에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마산에 정동행성을 두면서 이 도시는 군사 항구 도시로 변했으며,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의 국제도시로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조선의 영조 36년(1760년)에 조선 정부는 대동미를 운송할 목적으로 남성동 해안에 조창인 마산창을 설치하였습니다. 마산창 설치 이후 마산포는 지형적인 조건과 사회경제적 배경을 발판 삼아 번성하기 시작하여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시대에 항구도시로 발전하던 마산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됩니다. 곧 조선 정부가 1899년 5월 1일로 이 도시를 개항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조창이 있던 마산포로부터 남쪽으로 2㎞ 정도 떨어진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에 각국공동조계지를 설치하였던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창의 중심건물이었던 유정당입니다.

 

<개항기(1899-1910년, 식민지화 준비기)>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취락의 마산포(이하 원마산)는 6개의 마을과 2천여 채의 가옥이 있었으며 장시(場市)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한국인 도시였습니다.

개항 이후에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민족구성이 다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의 이주는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이후 급증하였습니다.

이주한 일본인들은 그들만을 위한 신도시를 각국공동조계지 일대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소위 신마산이라고 하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신마산의 도시 범역은 애초의 각국공동조계지를 훨씬 넘어섰습니다.

도시형성과 함께 식민통치에 필요한 관아 중심의 근대식 목조 건물들이 신마산 지역을 위주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은 조선시대부터 상권이 집중되어 경제적 가치가 높았던 원마산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획득하면서 이곳에도 진출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1910년 한일병합 직전의 원마산 일본인 수요 부지 현황입니다. 붉은 색의 토지가 일본인 수요입니다.

 

<강점 제1시기(1911-1920년, 식민지배 기반 구축기)>

1914년, 일제는 식민지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마산을 부(府)로 승격시켰습니다. 이 때 개편된 행정구역으로 오늘날 마산 도시의 기틀이 확립되었습니다.

하지만 개항기에 이루어졌던 급속한 투자와 인구성장이 일단락되어 성장일변도였던 신마산은 정체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건축공사도 신축보다는 개항기에 지은 건축물을 증축하는 경우가 많았고, 벽돌조 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산의 경제 중심지였던 원마산 지역에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해안이 매립되고 도로가 개설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760년에 건축된 후 150여 년 동안 존속해 온 조창(漕倉)건물이 철거되었고 그 한복판으로 도로가 뚫리면서 조창부지는 몇 개의 조각으로 분할되었습니다.

원마산 지역에서 진행된 해안의 매립․도로 개설․조창 철거 등은 일제가 식민도시의 지배기반을 완벽하게 구축하기 위한 도시정책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원마산의 도시구조는 크게 달라졌으며 이를 계기로 일본인은 원마산의 상권을 더욱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조선총독부가 확정한 최초의 마산부가 경계지도입니다.

 

<강점 제2시기(1921-1930년, 산업수탈기)>

일제가 조선회사령을 폐지하자 산업 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산업용지 확보와 경제적 잉여 창출을 위해 마산부의 일본인들은 해안 여러 곳을 매립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인의 토지 지배는 이전보다 더 대형화․집중화되었습니다.

철도 교통의 발전과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원마산 일대의 시역(市域)이 확장되었고 이에 따라 도로망도 많이 확산되었습니다.

러일전쟁의 산물로서 원마산과 신마산 사이에 철도용지로 수용되어 있던 중앙마산지역이 시구개정 계획에 의해 시가지로 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에는 산업과 교육 관련 시설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건축물은 콘크리트조가 나타나는 등 구조와 형태 면에서 과거보다 발전된 형식의 건축물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에 건축된 원동무역 사옥입니다.

 

<강점 제3시기(1931-1945년, 병참기지화기)>

경제적 잉여를 위한 매립공사와 병참기지를 목적으로 한 항만시설공사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동교 이남의 전 해안이 직선호안으로 변화하는 등 마산의 도시구조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원마산의 도로망은 1920년대만큼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시가지는 크게 넓어져서 인근 자연취락에까지 연결되었습니다.

건축물은 개항 후에 지었던 각종 시설을 보다 진일보한 수준으로 개수하거나 혹은 변화된 사회에 필요한 시설을 신설하였습니다. 한때 마산은 건설 호경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중앙마산지역이 도시로서의 모습을 드러낸 시점인 1935년에 신포동지역의 매립도 완공되었습니다. 이로써 원마산과 신마산은 지형적으로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도시가 연담화되어 하나가 되었고 시역(市域)도 그만큼 넓어졌습니다.

이 중앙 지역에는 도시 전체를 관장하는 공공업무시설이 집중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인의 지배력도 도시 전체에 확대되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 중앙마산지역의 매립설계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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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208) - 강점제3시기

<일제강점기 마산의 토지이용에 대한 정리>

지난 주 까지 일곱 가지 분석 틀을 통하여 마산의 토지이용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중에는 각 필지의 토지가격을 이용한 구체적인 접근방법도 있었지만 추상적이거나 포괄적인 방법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일곱 가지 분석의 결과를 보면 대체적으로 일관된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 이들을 종합한다면 당시의 토지이용상태에 대한 개괄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원마산(마산포)

개항기 원마산은 마산창에서 남쪽해안일대에 강력한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상당히 넓은 지역까지 토지가 상업용으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일부 도로 안쪽의 대지와 동성동의 동쪽 일대만 주거용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개항 이후 마산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원마산으로 진출한 후 마산창 주변과 수성동 일대에 상가가 들어서면서 남성동일대의 상업기능의 밀도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러다가 1910년대 중반에 완료된 매립으로 인해 중심상권이 매립지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개설된 마산창 주변의 도로가 매립지와 연결되는 도로망을 가지게 됨으로써 이 일대의 주심권이 더욱 부각되는 계기가 되어 서서히 상권이 매립지로 확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1931년 간행된『경상남도 통계연보』의 토지등급구분에 의하면 마산의 대지 중 中等地 중급으로 남성동187번지를 게시하고 있는데 이 위치가 매립지 내의 속칭 돼지골목에 접한 대지였다. 가격이 백 평에 1,000엔이었는데 이는 당시 마산에서 가장 고가였던 남성동141번지의 1,250원에 비해 80%로서 매우 높은 가격이기 때문에 이렇게 추정한 것이다. 신마산 두월동에서 가장 비싼 대지가 700엔이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구마산 역과 북마산 역 주변에 역세권이 형성되어 도로망이 확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상업용 토지가 북쪽으로 넓어졌고 1930년대 이후에도 역세권 현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시기에 원마산의 해안이 대규모로 매립되어 공장․제빙업․창고 등 공업시설 등의 용도로 토지가 이용되기 시작했습니다. 

2. 신마산

신마산은 개항이후부터 조계지는 물론 조계지 북쪽인 마산 역까지 시가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중 상업기능의 지역은 두월동 1-3가와 월남동 1-3가, 그리고 홍문동과 대외동 일대, 그리고 중앙동 1가와 그 북쪽인 마산역까지 상업지역이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선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히 개항 직후인 1905년경에는 홍문동과 대외동 일대가 아주 번화하여 마산의 긴자(銀座)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이에 반해 공업기능의 지역은 시가지 전역에 고루 흩어져 있었습니다. 

『경상남도 통계보고』와 관련문헌에서 발췌한 자료에 의하면 합방 이전에 세운 마산의 일본인 공장은 장군동․상남동․남성동에 각각 두 곳이 있었으며 그 외에 청계동․홍문동․신창동․추산동․월포동․서성동에 각각 한 곳이 있었다.

그런데 1920년대 들어 상황은 두 가지 면에서 크게 바뀝니다.

첫째는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의 매립으로 철도회사․기선회사․조선소 등의 공업기능의 지역이 모이기 시작했으며, 둘째는 중앙마산지역의 건설이 시작되어 선상의 상업기능 지역이 북 방향으로 서서히 확장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매립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중앙마산이 형성되었습니다. 부두를 포함한 공업지역은 전 해안에 걸쳐 띠를 이루면서 형성되었고 상업기능의 지역은 중앙중심가로를 따라 길게 확산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서쪽 산사면(山斜面)도 주거지로 변했습니다.

토지가격을 통해서 파악한 신마산 토지의 상업적 가치는 두월동과 월남동의 순이며 중앙마산지역인 중앙동도 월남동 수준과 비슷했습니다.

1945년 해방 당시 마산 도시의 토지이용 구조를 보면, 해안의 매립지에는 해수면을 접한 대부분의 토지가 공업용지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상업용지로는 원마산이 남성동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와 구마산 및 북마산 역 주변 그리고 신마산은 두월동 3가를 중심으로 도시의 장축(長軸)인 중앙중심가로를 따라 노변상권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두월동이 신마산에서 가장 지가가 높다는 사실은 여러 자료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신마산의 핵심 상권이 두월동 가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월동의 토지 최고가가 원마산 남성동의 27.5%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원마산과 신마산의 도시기능의 밀도, 즉 상권의 형성 정도를 충분히 알게 해줍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원마산의 남성동 일대는 개항 이후부터 강점 말기까지 가장 강력한 마산의 주심부였다는 사실이며 그 기능은 최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각 시기별 토지이용상태의 변화를 간략히 그림으로 나타내 보았습니다.

첫 그림은 범례이며, 두 번째 그림부터 1899년, 1910년, 1920년, 1930년, 1945년 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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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3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7) - 강점제3시기

지난 글의 ‘사정(査定) 당시 원마산의 토지등급’에 이은 글입니다.

2) 1933년 당시 마산의 각 동(洞)의 토지가격

(원본에는 동(洞)이 아니고 정(町)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편의를 위해 동(洞)으로 고쳤습니다)

당시 마산 시가지 내 토지가격을 기록해 놓은 자료로는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에서 1932년 간행한 『鄕土の硏究』와 마산교육회가 1933년 간행한 『鄕土の調査』라는 두 문헌입니다.

이 책에서 1932년 기준으로 한 마산 각 정(町)과 동(洞)의 토지가격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이 두 문헌은 모두 당시 마산공립보통학교의 교장이던 일본인 上原 榮에 의해 편집된 것입니다.

발행 시기와 비슷하다는 점과 편집자가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보통학교와 마산교육회에서 간행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전자의 문헌인『鄕土の硏究』를 재편집하여 발간한 것이『鄕土の調査』인 것으로 보입니다. 전자의 것은 수 작업한 후 등사하여 제본하였으며 후자는 인쇄한 것으로 편집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책에 1933년 당시 마산 각 지역 토지의 최고가와 최저가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각 지역의 토지 이용 밀도와 기능을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표입니다.

표에서 ○ 안의 숫자는 최고가 15위까지의 순위입니다. 최고가가 동일할 경우에는 최저가가 높은 것을 기준하였습니다.

이 자료에 따라 토지이용의 상업적 가치라고도 볼 수 있는 가격 순으로 나열해 보면 원마산은 남성동-수성동-부림동-창동-동성동-중성동의 순이며 신마산과 중앙마산은 두월동-월남동․중앙동-창포동-장군동 순으로 나타납니다.

이 중 원마산 지역은 지난 글에서 소개한 아래 그림의 1912년 사정 당시 토지분류도의 결과와 일본인 소유 대지를 통한 분석, 그리고 앞서 밝힌바 처럼 마산의 토지 중 가장 지가가 높은 대지가 남성동 파출소 앞 지점이라는 정황과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상당한 번화가로 추정되는 부분, 즉 51등급 이상(주황색과 보라색) 이상인 부분을 현 위성사진에 표시해 보았습니다. 가장 지가가 높은 보라색 거리는 지금의 북경성(중국집) 앞 길 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상황과 비교해 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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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5) - 강점제3시기

지난 회까지는 ‘토지이용’에 대한 추정을 각종 문헌과 사진(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을 이용하여 살펴보았습니다만 이번에는 도시의 공간구조와 소유상태를 통해 추정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 도시공간·소유상태를 통한 추정

1) 도시공간구조를 통한 추정

도시공간구조를 통한 추정이란 도로의 상태, 즉 도로의 폭․형태․위치 등과 해안 선 상태 및 철도역과 인접지역과의 관계 등을 통한 접근입니다.

문자나 그림 등 구체적인 근거를 이용하지 않고 도시공간구조의 다양한 상황을 통해 토지이용상태를 추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분석 방법은 매우 자의적일 수 있지만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이나 도시 각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증명되는 각 필지의 토지 기능과 종합하여 사용한다면 자료로서 일정한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 내용은

첫째, 도로의 폭과 형태에 의한 판단

둘째, 해안의 굴강과 선창 및 부두 등 해안선과 관련한 판단

셋째, 역세권과 자동차 주차장에 의한 판단

넷째, 주요 건물의 주변상황이나 토지형태에 의한 판단 등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지역과 대지가 다른 지역이나 대지보다 상대적으로 번성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가령 가로변은 상가로 보고 안쪽은 주택지로 보거나, 해안도로가 번성했다는 기록(『한국안내』참고)을 근거로 하거나, 역세권의 영향을 감안하여 판단하거나 혹은 토지의 형태와 위치 및 입지조건 등으로 그 기능을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추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이미 본 연재에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방법론에 대해서만 설명하겠습니다.

 

2) 소유상태(원마산의 일본인소유 대지)를 통한 추정

일본인들이 원마산에서 소유한 토지의 위치는 토지이용상태를 추정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신마산에 주거지를 두고서, 상업 활동만 원마산에서 행하고 있었으며 혹 거주지를 가진 일본인이라면 반드시 원마산에 사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비교적 광폭(廣幅)의 도로에 접한 일본인 소유의 토지는 영업장이었다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여러 문헌에서 증명되고 있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이 소유한 토지의 성격을 결정하는 기준은 각 대지가 접해있는 도로와 해안의 상태 및 주변 여건 등을 근거로 하겠지만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추정하는데 필요한 자료는 이미 소개한 아래의 강점기 각 시기별 원마산 토지이용도입니다. 연대는 위로 부터 1912년, 1920년, 1930년, 1945년 순입니다.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합방기에 일본인들은 남성동과 부림동․수성동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의 지역에도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는 원마산 토지 중 가장 상업적 가치가 높았던 토지였습니다.

1910년대 중반에 완공된 매립으로 일본인의 토지는 남성동 일대의 집중이 심화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1930년경까지 지속되었고, 1930년 이후에는 해안에 매립이 시행되면서 전 해안의 토지가 일본인 개인과 기업의 소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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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주임 2014.03.22 13: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감탄하고갑니다!!

2014.03.0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3) - 강점제3시기

<토지 이용>

지난 주 포스팅한 ‘각종 문헌에 나타난 토지 이용’에 이어 오늘은 ‘사진 및 관련 자료를 통한 추정’을 해보겠습니다.

2) 사진 및 관련 자료를 통한 추정

각 시기의 도로구조와 중요건축물의 위치는 지금까지 제시한 지도 38점과 각 시기의 시설물 설명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이 외에 당시의 도시현황을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소개한 그림자료 중 토지이용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6점의 사진과 지도 2매를 통하여 당시의 현황을 추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진 「1910년 경 원마산 건염어점(乾鹽魚店)」전경 1

2. 사진 「1910년 경 원마산 건염어점(乾鹽魚店)」전경 2

두 사진은 합방 직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좁은 길을 따라 초가지붕의 상점들이 조밀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 당시 상당히 붐볐던 가로로 보입니다.

3. 「②조계지 현황도*」

조계지 범역 내의 원래 월영리 가옥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4. 「⑧조계지 현황도**」

개항 직후의 조계지 내 러시아인과 일본인의 가옥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5. 사진 「두월동 거리」

개항기 월영초등학교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도로를 따라 길게 늘 어선 가로가 있으며 아직 월영초등학교 부근에는 건물이 없습니다.

 

6. 사진 「1910년대 두월동 거리 전경」

당시의 두월동 거리를 매우 생생하게 알 수 있는 사진. 2층 규모의 상업용 건 물이 거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7. 사진 「1920년대말 두월동 전경」

당시 두월동 거리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진. 거리에는 상업용 건물로 가득 차 있으며 도로의 안쪽에도 건물이 모두 들어서 있습니다.

 

8. 사진 「1920년대 신마산 전경」

원경 사진이라 세부적인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신마산이 북쪽 원마산 방향으 로 길게 뻗어 나와 있어서 토지이용 구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위에 소개한 8점 중 6점이 신마산지역의 자료들이고 내용도 단편적이어서 구체적인 토지이용 의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만 도시 분위기는 대략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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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용만 2014.03.05 16:4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보력과 내용이 절로 감탄을 자아내네요. 자주 들리겠습니다. 이사짐^^

  2. 허정도 2014.03.07 11:0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방문 갑사합니다. ^^

  3. 박진섭 2014.03.12 12:1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타임머신을 타고 고향의 과거로 돌아간 듯 합니다. 두고두고 보아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2.2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2) - 강점제3시기

<토지 이용>

토지 이용이란 도시 내 각 지역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실상의 용도지역 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지나간 시기의 토지이용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가지 범역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토지이용과 건물에 관한 자료가 없으면 입증이 곤란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자료를 찾아 도시 전체의 토지이용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비록 정확도가 떨어지더라도 각종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의 일편들을 총 망라하는 등 현 상황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나. 공간구조․소유상태를 통한 추정

다. 토지가격에 의한 추정

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접근해보도록 하는데 이 글에서는 ①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중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마산 도시 현황’ 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 이용

1) 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마산 도시 현황

각종 문헌에서 마산의 도시 현황을 소개하는 글귀의 일편을 종합하는 방법으로서 추상적인 분석이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용은 토지이용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에 한하여 인용하도록 합니다.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市街(p.311)

각국거류지에 거주하는 사람은 거의가 일본인이고 가끔 중국인, 러시아인, 독일인 등이 체류하고 있으며 이들은 거류지 남쪽 모퉁이 쪽의 러시아 영사관 부근에 살고 있다. 거류지의 총 호수는 50호에 불과하고 가옥도 조밀하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로서 간신히 처마를 이어서 시가의 모양을 갖춘 것이 10여 호 뿐이다. 참으로 느리긴 하지만 발전하는 모습은 보인다.

도로는 근래 새롭게 개설하기 시작했다. 도로의 폭은 3間(1間은 1.8m)에서 8間이고 남북이 길어 거의 20여丁(町, 109.1m)에 이르고 동서는 좁아 7-8丁에 불과하며 舊 馬山浦와의 교통이 빈번하여 상거래가 점점 발달할 기미를 보인다.

舊 馬山浦(p.322)

각국 거류지를 지나 약 10리 거리의 昌原街道에 있고 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한 곳이다. 戶數는 2,000여戶이며 監理署(감리는 창원군수가 겸임), 경찰서 등이 있고 시가는 해변에 면하여 선박화물의 폭주가 매우 빈번하다.

옛날에는 이곳이 일본상인(행상)의 근거지였지만 마산개항에 즈음하여 신마산으로 이전하였다. 지금도 20여 호가 있고 대부분 조선가옥에 기거하고 있다. 

『韓國新地理』 田淵友彦, 1908년, p.254, 博文館

韓人家는 마산만 안쪽의 북쪽에 각국거류지로부터 20여정(町)에 있으며 구마산이라고도 칭한다.

수 천 여호에 인구가 약 4,500에 이르는데․․․․․․ 

『韓國總覽』 德永勳美, 1908년, pp.58-59, 아세아문화사

․․․․마산만에 위치한 구 월영대 부근에 면적 15여 만평에 도로가 종횡으로 관통하고 있고 시가가 정연하고․․․․

한인가는 각국거류지에서 20정 거리의 구마산포에 있고 시가는 창원가도에 면하여 마산만의 북쪽 중앙에 있으며 인가는 2,000여 호이다. 

『馬山と鎭海灣』 平井斌夫․九貫政二, 1911년, p.3, 濱田新聞店

․․․․․신마산과 구마산 사이는 20町(1정은 109.1m, 60간)이며 구마산은 창원가도에 위치, 인가가 즐비하게 남북으로 연하여 조밀하고 해안을 따라 조선인 상가들이 늘어서 있음, 일인도 혼재, 선박화물의 집결과 흥성함이 극을 이룸, 신마산과 구마산의 사이에는 광대한 철도와 군용지가 놓여있음, 두 시가 곧 연결될 것으로 보임, 

『朝鮮誌』 吉田英三郞, 1911년, p587, 町田文林堂

․․․․․경부철도 마산선은 군의 서부를 관통하고 정차장 세 개가 있는 것 외에 마산을 중심으로 하여 도로로 각지에 통하고 특히 마산 진주간 및 창원간은 길이 좋아 교통이 편리하다.

․․․․․시가는 신마산과 구마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가로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고 모든 관아 및 일본인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 구마산도 지금은 거의 신마산과 인가가 연접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이 잡거하면서 거리의 외관은 신마산에 필적하면서 항구의 주변은 번성하여 매월 5일되는 날을 기해 시장을 열고 상업이 매우 활발하다.  

『最新朝鮮地誌』 日韓書房編輯部, 1912년, p.444, 日韓書房

․․․․․도로는 근래 현저하게 개량되었다. 부근 내륙과의 교통은 도착하는 곳에 차와 말이 연결된다. 또 가까운 마산 진주간 중심가로가 개수되고 있고 교통은 새로운 면을 열어가고 있다. 

『新朝鮮全誌』 南宮濬, 1913년, p.146, 唯一書館

․․․․․市街는 신구 두 도시로 나누어져 신마산은 일본인이, 구마산은 주로 조선인의 부락이며 또 그 북쪽에 昌原舊邑이 있으니 모두 상업의 요충지이다. 

『最新朝鮮地誌(中)』 朝鮮 및 滿洲社, 1918년, p.19, 朝鮮 및 滿洲社出版部

․․․․․신마산과 구마산의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산록이 수려하고 가로의 구획이 정연하여 시가지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며․․․․․ 개항 후 거류지를 설치하였으며 신시가지는 대부분 전부 일본인의 상가로서 이루어져있다.

구마산은 옛날부터 군읍으로서 알려진 소위 조선 마을로서 市區의 체제는 협소하고 불결하다. 

『朝鮮鐵道旅行便覽』 朝鮮總督府, 1923년, p.10, 조선인쇄주식회사(경성)

․․․․․구마산은 상업이 발달해 있으며 신마산 쪽은 많은 일본인들이 활동하는 곳으로서 특히 서쪽의 구 외국인 거류지였던 곳은 순 주택지로 사용되고 있다. 무학산을 배경으로 하여 진해만을 앞에 두고 경사가 완만한 시내에 시가가 형성되어 있다.

․․․․․상업이 매우 번성했던 적도 있었지만 1911년에 군사요충지로서 개항을 폐쇄한 이후부터 약간 침체된 상태다. 그리하여 근래에는 인구도 늘지 않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진주로 가는 경남선이 군북까지 만 개통되어 있는데 장래에는 한 번 더 성황을 이룰 것으로 본다. 

『馬山港誌』 諏方史郞, 1926년, pp.74-81, 朝鮮史談會

천엽촌(千葉村)이라는 것은․․․․․1905년 봄 40여 호의 어가단(漁家團)이 오고 하나의 어촌을 구성하여 이 속칭을 불렀다.(p.81)

1905년 11월 마산선 철도를 개방하고 일반 공중의 편리를 자유롭게 하면서부터 이주자는 갑자기 격증하고 특히 1906년 봄이 오면서 거류지, 마산포 및 그 중앙부에 모두 건축공사가 크게 일어나서 일본인의 여관은 한 집도 빈 곳이 없다. 한인 객사에도 4-5인의 일본인이 섞여 숙박하는 등․․․․․(p.74)

1906년 대곡하(大谷河)에 걸쳐 놓은 반룡교 서남 모퉁이에는 복옥(福屋)이라 이르는 음식점만 있었지만 북측으로는 요정․양복점 등 가게가 여러 채있었으며 망월루 서쪽 즉, 홍문동․청계동․월남동3가와 4가, 이사청에서 세관에 이르는 도로에는 상가가 즐비하여 마산의 긴자(銀座)거리라 불렀다(p.75)

․․․․․ 마산포 방면은 韓人을 상대하는 상점이 많으며․․․․․ 신마산은 정비된 가로와 좋은 가옥이 많고 군인 관리를 상대로 하는 상점이 대부분이며 중앙부는 관아․학교․사원․철도소재지가 있기 때문에 그 곳 관계자의 주택이 많이 있는데 중앙부 중 일부 신마산에 접한 곳은 商況이 오히려 신마산을 능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앙부 대부분은 철도용지를 빌린 전답들이다(p.3)

․․․․․장군교 부근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중앙동에 이르는 가로는 1906년 초겨울에 개통되어 당시 거류지인 마산포의 유일한 연락도로가 되었고 1910년에 마산, 진주 간 일등도로가 마산 역전까지 개통을 보게 되면서 두 개의 길을 얻어 척산교에서 서로 만나 한 도로가 되어 마산포로 들어가게 되었다(pp.202-203)

마산부청이 서북 모퉁이에 위치한 것은 반드시 府治를 건전히 발달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수의 공무원이 이전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안 된다는 것은 治者의 생각인데 府民의 입장에서는 과연 어떠한지․․․․․․․․

․․․․․․형무지소 소재는 옛날 논밭이었던 한가로운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큰 가로에 접하여 상점이 즐비하고 크게 발한 지역이 되었다(pp.222-223) 

 

『朝鮮と建築』 朝鮮建築會, 1929년 3월호, p.39

현 마산의 시가는 바다에 면한 무학산록 일대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남북으로 길어 마치 띠의 모양을 하고 있다.

마산부청의 위치는 남방 신마산의 구석에 치우쳐 있음과 동시에 약간 높은 언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특히 구마산 방면은 매우 불편을 느끼고 있다. ․․․․․ 부청이전문제가 대두하여 그 위치를 중앙부에 선정한다는 것은 부민의 편리에는 이 이상 좋은 일은 없고 나아가 시가의 발전에도 커다란 이익이 있을 것이라․․․․․․․․ 

『馬山現勢錄』 長田 純․高須瑪公, 1929년, p.156, 馬山現勢錄刊行部

마산의 市街區 구성은 종래 新舊 兩 마산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자연스런 市街區의 연결이 좋지 않았다. 마산 발전의 암과 같았던 중앙 마산의 耕地(철도용지)가 府에 불하되어․․․․․․

이 中央馬山市街區 構成과 관련해서는 뭐니뭐니해도 中央馬山地先의 공유수면 매축사업을 간과할 수 없다․․․․본 사업의 완성은 더욱 마산항 발전의 기폭제를 이루는 것으로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표기한 연도는 당 내용이 실린 문헌의 발간연도이므로 시기를 너무 제한적으로 받아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신마산과 중앙마산 지역〉

1902년. 조계지 건설 초기, 건축물은 조계지의 최남단인 현재의 월남동 5가와 월남동 4가의 최남단, 즉 현재의 경남대학교 정문 앞 광장 부근에서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1902년. 초기 조계지 건설규모는 남북으로 2㎞, 동서로 약 0.8㎞ 정도의 규모였다.

1906년. 율구미에 일본인 어촌이 형성되었다.

1906년. 전 창원군청(현 경남대학교 대학원) 아래의 홍문동, 청계동, 월남동3․4가 일대가 「마산의 긴자(銀座)」로 까지 불릴 정도로 번화하였다.

1906년. 중앙중심가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진주가도(현 크리스탈호텔 앞 도로)를 이용해 원마산과 신마산이 연결되었다.

1908년. 합방 직전, 조계지에는 격자형의 도로가 정연하게 개설되어 있었다.

1911년. 시가(두월동 가로로 추정됨)는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상점이 즐비했다.

1923년. 조계지의 서쪽 경사지는 대부분 주택지로 활용되고 있었고 상가는 평지인 중심가로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폐항 이후부터는 도시가 정체되었다.

1926년. 신마산의 남쪽(조계지방향)에는 고급주택이 많았으며 북쪽(중앙마산방면)에는 관아․종교시설․교육시설이 많았다.

1926년. 철도용지 때문에 도시발전에 지장이 많았고 관공서 건물이 부(府)의 최남단에 위치한 것에 대한 부민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중앙마산 개발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1929년. 중앙마산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원마산 지역〉

1902년. 원마산의 인가(人家)는 조밀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상점도 많았는데 특히 창원가도 주변이 번화했고 해변도로변에는 어업과 관련한 상권이 발달하였다.

1911년. 일본인들의 상점이 진출하면서 거리의 외관이 더 번화해졌다.

1918년. 도로는 협소했으나 상업은 발달하였다.

1926년. 교도소 부근(현․삼성생명 빌딩 일대)지역도 상점이 많이 들어선 거리로 변했다. 

이와 같은 문헌의 일편으로 도시의 토지이용 현황을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많고 또한 소개한 문헌의 저자가 대부분 일본인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용이 신마산에 지우쳐 있어서 시기와 내용면에서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당시의 현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는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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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1) - 강점제3시기

<도로망패턴 정리 및 분석>

원마산의 도로는 1910년까지 자연발생적 세도 밖에 없었으나 1910년대 들어서 근대식 도로가 격자형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해안에 매립도 시행되어 짧은 기간 동안 급격한 도시구조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도로망의 패턴은 매립을 하면서 조성된 도로와 자연취락 내에 신설된 도로의 축(軸)이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서로 상이하였습니다. 도로망의 패턴이 일정한 체계를 갖추어 발달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도로를 확장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또한 초기의 도로망에 비해 후기에 갈수록 도로망 개설 영역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으며 강점 말기에는 기존 원마산 시가지 전체가 격자형 도로망 구역 내의 영역으로 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해안의 매립지는 직사각형 격자형 도로망이 뚜렷이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음은 도시 전체의 중심가로망 변화를 나타낸 그림이다.

개항 직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신마산의 격자형도로가 마산에 나타난 최초의 근대식 도로였으며 부정형의 세도(細道)밖에 없었던 원마산에는 1910년대 중반에 격자형도로가 개설되었습니다.

그러나 강점기 동안 지속적으로 시행된 도로 개설 사업으로 1945년 당시에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도로망과 유사한 패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마산의 도시구조는 남북으로 긴 세장형의 해안지역이라는 자연조건, 즉 단축 경사면과 장축 해안평지의 조건과 공간적으로 남북 단부에 두 도시가 자리 잡은 탓에 위 그림처럼 두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가 중심가로를 이루는 선상구조로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10년 직후 원마산과 신마산을 연결하던 도시의 중심가로인「장군로」가 개설된 것과 1930년대 들어서 해안을 따라 남북축을 잇는 제2의 중심가로인「해안로」, 그리고 산지의 허리를 지나는「고운로」가 모두 이 영향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위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1945년 기준으로 마산의 도로망 패턴은 두 도시중심부를 연결하는 두 개의 강력한 중심가로와 동일 축의 보조가로까지 조성되어 모두 세 개의 남북축 가로로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 중「해안로」는 원마산과의 접점에서 도로의 축성(軸性)을 상실하였으나 내륙의「장군로」는 도로의 방향성은 변경되지만 노선(路線)의 흐름은 북쪽 방향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마산의 중심가로망은 마타(Soria Y. Mata)가 주장한 선상(線狀)도시(Linear City)로 적용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예 중 ‘두 도시를 연결하는 형’의 구조와 유사한 형태입니다. 따라서 도시의 교통체계, 즉 중심가로의 패턴으로 그 유형을 구분해 본다면 마산은 선상(線狀)도시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 ; 1882년 스페인의 실업가이자 기술자였던 마타(Soria Y. Mata, 1844-1920)는 도시의 교통문제에 관심을 두고 독자적인 ‘선상도시(Linear City)’를 제안하였는데, 그의 계획목적은 교통시간을 단축하여 도시의 교통문제를 해결하고 다이내믹한 개발과 기능적인 성장을 도모하며, 공정한 토지분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형태의 적용 예로서 ①기성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환상형 ②두 도시를 연결하는 형 ③미개발지역에 건설하는 신도시형 등 3가지로 구분하였는데 1892년에는 마타가 설립한 마드리드 도시개발회사에 의해 마드리드 교외에 궤도와 주택지의 경영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선상도시가 실제로 건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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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0) - 강점제3시기

지난 글에 이어 도로망패턴에 대한 내용입니다.

2) 강점 제1시기(1911년-1920년)

강점 제1시기인 1910년대 초기에는 신마산과 원마산을 연결하는 중심가로가 약 15m 폭으로 준공되었으며 이 무렵 진주가도의 확장공사도 완료되어 두 도로가 연결되었습니다.

신마산과 원마산을 연결하는 중심가로는 원마산의 시가지 한복판까지 이어졌고 때를 맞춰 원마산에 다수의 근대식 격자형도로가 개설되었고, 이 도로는 남성동 매립지의 격자형 도로와 연결되었습니다.

이로써 최초로 신마산과 원마산을 연결하는 근대식 중심가로와 두 시가지에 격자형의 도로망이 개설되어 도시의 도로망 패턴이 근대적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계획된 신마산과 달리 원마산의 도로망은 격자 체계가 명쾌하게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다음 그림 ‘1920년 원마산 토지이용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존 시가지의 도로는 신마산과 연결되는 중심가로와 축을 같이하고 있었지만 매립지의 도로는 해안선과 축을 맞추었기 때문에 그 접점이 사형(斜形)으로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3) 강점 제2시기(1921년-1930년)

강점 제2시기인 1920년대에는 중앙마산이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도로망의 남북축이 강화되어 선상(線狀)의 도로망이 보다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중앙마산을 지나는 이 중심가로변에 격자형 소도로가 형성된 것입니다.

한편 원마산은 도로망의 확산기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격자형 도로망이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신마산에서부터 매립이 시작되었기 때문에「해안로」의 조성도 이 때부터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강점 제3시기(1931년-1945년)

원마산과 신마산을 연결하던 남북축의 중심가로인「장군로」외에 1935년 신포동의 매립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1939년 중앙부두 건설까지 완공됨으로써 해안을 따라 남북축을 잇는 제2의 중심가로인「해안로」가 추가 조성되었습니다.

또한 강점 말기에는 산복도로인 현「고운로」가 완성되어 자산동에서 조계지 중심부까지 남북축의 제3의 가로가 조성되었습니다.

이로써 원마산과 신마산을 연결하는 중심가로 두 개와 서쪽 산사지(山斜地)에 보조 가로로서 도로망의 패턴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중앙마산지역, 즉「장군로」와「고운로」사이의 장군동․완월동․자산동 일대에 도로망이 조성되었는데 1930년대 이후 조성된 이 지역의 도로망은 일정한 형식보다는 각 주요시설과 기존의 도로를 연결하는 양상을 띠었습니다.

같은 시기 원마산의 도로망은 1920년대 보다는 미미했지만 북쪽 방향으로 보다 더 확산되었으며 구마산 역과 북마산 역을 잇는 도로도 개설되어 두 지역의 시가지화를 촉진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은 도로망 변화 패턴 중 원마산의 도로망을 시기 별로 나누어 간략히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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