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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6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6) - 중성리에서 쿄마찌(京町)까지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1 중성리에서 쿄마찌(京町)까지

 

조선 중기, 대동법이 시행되자 해로가 연결되는 전국 각지에 조창(漕倉)이 설치 되었다.

경남에는 영조 36년(1760년)에 창원 마산창과 진주 가산창(駕山倉)이, 1765년에는 밀양 삼랑창(三浪倉)이 설치되었는데 마산창 관할구역은 인근 8개 읍이었다.

고려시대에도 마산포구에 석두창이란 조창이 설치된 적이 있었으나 이미 없어지고 이때 다시 신설되었다.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파출소 주변 1,700여 평의 부지에 총 8동, 53칸(間) 규모에 ㄷ자 형태로 바다 쪽을 향하고 있었다.

조창이 설치되자 먼저 관원과 상인들이 찾아들었고, 이들을 상대로 생업을 하기 위해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점차 동리를 이루었다.

동성, 중성, 오산, 서성, 성산, 성호 6개 리(里)가 그것인데 그때의 지명 대부분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현재 사용하는 창동(倉洞)이란 지명도 조창에서 따온 것이다.

<마산창의 유정당 / 1760년>

 

조운(漕運)제도는 그 때까지 미미했던 전국적 유통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조창을 둔 지역은 교통요충지나 화물집산지로 부각되었으며 정기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마산포도 도시적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윽고 19세기말  경에는 중서부 경남의 대표적 곡물집산지로, 화폐경제와 함께 발달한 굴지의 시장으로, 동해와 서해를 연결하는 원격지 상업의 중심지 역할까지 하는 유수한 항구로 성장했다.

20세기 초, 마산포에는 약 2천여 호의 가옥이 조밀하게 이어져 있었는데 상점들도 많았으며 해변에 면한 가로에는 선박화물이 가득했다.

조창 일대, 즉 남성동지역이 상업중심지였으며 현재의 동성동 일대는 배후주거지였다.

당시에 사용하던 길은 손수레나 지게 정도가 겨우 다녔을 정도로 좁고 꾸불꾸불했는데 이 골목은 지금도 동성동 일대(코아 양과점에서 아구찜 골목까지)에 존속하고 있다.

해변에는 오산선창, 어선창, 백일세선창, 서성선창 등 4개의 선창과 동·서 두 굴강이 있었다.

그러나 항만시설은 천연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었고 인위적 시설이라고는 석축돌제로 된 원시적 접안시설을 갖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외부로 연결되는 도로는 창원·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길과 칠원·창녕·현풍을 지나 서울로 가는 길, 그리고 삼진지역(당시는 진해라고 불렀다)을 거쳐 진주로 가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이처럼 마산포에는 사람들이 밀집해 있었지만 약간 벗어난 곳들, 즉 자산동에서 서남으로 이어진 현재의 신마산 방면과 북동쪽 일대는 민가가 산재한 경작지였다.

 

-일본인의 마산 진출-

189951일, 마산은 개항이라는 대전환을 겪는다.

마산포 남쪽 2km거리에 있는 창원군 외서면 해안의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에 각국공동조계지란 이름으로, 후에 신마산이라 부르게 되는 계획도시가 들어섰던 것이다.

<마산포 약도 / 1899년>

 

같은 해 111일, 부산해관 마산출장소로 사용되던 남성동 조창건물에서 시행된 제1차 경매를 시작으로 총 네 차례의 경매를 통해 조계지는 외국인들의 소유가 되었다.

1차 경매에서는 무려 토지정가의 100배까지 응찰할 정도로 외국인의 마산 선점욕은 극에 달했다.

1·2차 경매까지만 해도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 영국, 오스트리아 등이 참여하여 공동조계 성격이 있었지만 뒤에는 일본이 독차지해 버렸다.

1900년, 조계지에는 도로폭이 8m 이상이어야 된다는 조계장정에 따라 마산 최초로 신마산지역에 남북을 가로지르는 폭 14m의 신작로가 뚫렸고 이 도로를 중심으로 동서방향의 몇 갈래 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마산의 일본인은 15여 호 30여 명에 지나지 않았고 조계지의 비싼 지가와 그들의 생업 때문에 대부분 마산포에서 살았다.

1901년이 되어서야 부산 등지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80여 호 26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들 중 조계지에서 상점을 차린 사람도 있었다.

일본인들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러일전쟁으로 모여든 군인들과 그들을 대상으로 생업을 가지게 된 일인들이 생기면서이다.

1904년 이후 일인 소학교(현 월포초등학교)와 병원이 생겼고 이사청과 일본제일은행출장소 등 공공시설들이 줄줄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본인 어업이민촌 지바무라(千葉村)가 가포에 들어선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일본인의 마산진출은 1905년 러일전쟁 승리와 을사조약 체결, 그리고 마산과 삼랑진 사이에 건설되었던 철도 마산선의 개통으로 본격화되었으며 이 변화의 물결은 마산포에도 밀어 닥쳤다.

원래 마산선은 한국 민간인이 설립한 영남지선철도회사가 착공한 마산과 삼랑진간의 철도였다.

이를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을 빌미로 사업권을 강제 접수하고 일본에서 기술자를 동원, 19055월 개통하고 11월부터는 민간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산선 철도는 경부선과 경인선에 이어 설치된 것으로서 마산의 도시화를 촉진시킨 것은 물론, 해로와 육로를 통해 마산을 일본과 한반도 내륙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때 들어온 철도노동자들과 함께 일본의 유곽도 들어왔다.

이때까지도 마산포와 조계지 두 지역 사이에 위치한 중앙부는 대부분 논밭으로 인가가 거의 없었고 진주가도라 불렸던 꾸부렁한 외길만이 두 지역을 연결하고 있었는데 바로 크리스탈 호텔 앞 길이다.

1910년경, 신마산에 정착했던 일본인들의 영역은 조계지 북측경계를 훨씬 넘어 마산포 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1912년에는 조계지의 중심도로와 폭이 같은 도로가 마산포와 신마산을 연결하였다.

현재 마산시청 앞을 지나는 장군로인데 두 도시의 왕래 수단은 주로 인력거였다. 같은 시기에 지방법원지청을 비롯하여 현 마산시청 자리의 전기회사 등 공공건물이 일부 건축되기 시작했다.

이는 신마산의 마산포 진출이라는 의미 외에 두 지역을 관장하기 위한 공공업무지역을 도시 중앙부에 형성하기 시작한 것으로서 거시적인 도시계획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고-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대 전반기, 마산포에도 두 가지의 큰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1911년 남성동 해안 11,640여 평이 일본인 하사마 후사다로(迫間房太郞)에 의해 매립되기 시작해 1914년 준공된 것이다.

이 매립으로 마산상권의 중심이었던 선창의 위치와 소유가 일본인으로 바뀌는 일대변화를 겪는다.

둘째는 오랫동안 존속해 왔던 조창 건물이 헐리고 1,500여 평의 직사각형 조창 부지와 그 부근 일대에 격자형으로 폭8m, 10m의 근대적 도로가 뚫린 것이다. 하사마의 매립과 때를 맞춰 시행, 매립지와 연결되었는데 현 남성동 파출소 앞 도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도시 변화는 자연발생취락의 마산포가 근대적 도시구조로 개편되는 변화와 격동의 시발점이었다.

1920년대가 시작되면서 마산의 도시변화는 그 벽두에 실시된 조선회사령 폐지로부터 시작된다.

회사령 폐지로 시작된 일본 자본의 한국진출은 마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법에 묶여 뜻을 이루지 못했던 마산의 자본가들도 회사를 설립하는 등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하였다.

옥기환의 원동무역주식회사도 이 때 설립되었다. 크고 작은 공장들과 부정(富町, 부림동)공설시장 등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한편 가용부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매립공사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20년대 중반, 조계지에는 서쪽 고지를 제외하고 일본식 건물이 가득해 일본의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었으며 장군천 주변까지 일본 가옥이 상당할 정도로 들어서 있었다.

그렇지만 장군천 이북에는 예로부터 있었던 완월동과 자산동의 자연취락과 현 시청부근의 공공시설을 중심으로 약간의 건물만 있었을뿐 민가는 많이 없었다.

1910년대가 창동과 남성동 일대의 중심부 도로망이 건설된 시기였다면 1920년대는 중성동, 오동동, 동성동으로 도로망이 늘어나는 시기였다.

회사령 철폐 이후 급증한 도시인구에 부응하고 자동차라는 유통기구에 적절하도록 도시구조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대의 마산도시의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철도 경남선의 신설이다.

철도 경남선은 1923년 마산과 군북 간을 우선 개통했다가 2년 뒤인 1925년 진주까지 개통했다.

비록 군사적 목적이긴 했지만 진해와 창원을 연결한 진창선(鎭昌線)도 274월에 개통되어 이미 설치되어 있던 마산선 철도와 함께 마산의 유통영역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27년에 시작된 상수도공사도 1930년에 완공되었다.

1920년대 말에는마산선의 구마산역(현6호광장)과 경남선의 북마산역(현 회산다리 남쪽)이 지역유통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마산포는 북쪽 교방천 부근까지 그 영역이 많이확장되었다.

도시의 기원과 사회적 배경을 달리하는 마산포, 신마산 양 도시가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확산·통합되었던 것이 일제강점기 마산의 도시변천과정이다.

그러나 자산동 입구, 즉 몽고정 부근이 움푹 들어간 해안선과 툭 튀어나온 환주산 때문에 가용대지가 잘록해서 두 도시의 지형적 연결이 쉽지 않았다. 거기다가 두 가닥의 철로와 신마산과 마산포를 잇는 간선도로(현 장군로)까지 지나고 있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이미 신마산은 마산포 쪽으로 그 영역이 넓어져 자산동까지 확장되었으며 마산포에도 변화가 많아 사방으로 민가가 확장되어 있었지만 이런 지형적 조건이 두 도시의 공간적 연결을 방해하고 있었다.

<마산의 교통도 / 1932년>

 

 

바로 이곳(현 신포동 일대)에 20년대 말부터 시행된 대규모 매립공사가 1935년 완공되어 그때까지 노선(路線)만으로 연결되던 두도시는 지형적으로도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1930년대 말, 국내의 사회 경제적 상황은 최악의 상태가 되었고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인한 도시 인구 급증으로 대부분의 도시는 질적 수준이 점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마산은 위치가 전선과 멀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접점이면서 군수물자 공급창이라는 기능 때문에 새로운 매립도 시도 되는 등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일본인들이 물러간 1945년, 마산선과 경남선 두 철도와 현 장군로를 중심으로 마산포와 신마산이 선형(線形)을 이루고 있었다.

<구마산 역사 / 1936년>

 

경관은 마산포에 한옥, 신마산에 일본식 가옥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었으며 그 외 시가지의 주변부와 농촌은 대부분 초가였다.

해방 당시 마산 인구는 일본인 6천여 명을 포함해 6만여 명이었으나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인구가 급증해 전쟁 직후에는 13만여 명이 되었다.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 버린 인구는 도시를 기형적으로 성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허정도 / 건축사, 창원대 건축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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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3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5) -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5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창원이란 지명이 만들어진 것이 조선시대이다.

조선 태종대에 의창과 회원을 합쳐 창원이라 이름지었다. 부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도호부가 되었다. 선조 34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했다.

대도호부로의 승격은 임진왜란때 병사 겸 부사인 김응서와 그를 따르는 군인, 관인, 백성들이 한 사람도 일본에 항복하지 않았다는 체찰사의 장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과 벌였던 대표적인 전투는 노현 및 창원성 전투, 안민고개전투, 합포해전이 대표적이다.

칠원군과 합쳤다가 광해군 9년(1617)에 나누었다. 인조 5년(1627)에 진해와 합쳤다가 7년에 나누고, 현종2년에 전패를 잃었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1년에 다시 승격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이 지역은 경제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마산지역은 조선후기에 물산의 집산지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대동법이 시행으로 해로가 연결되는 전국 각지에 조창이 설치되었는데. 영조 36년(1760년)에 창원 마산창이 설치되었는데 마산창 관할구역은 인근 8개 읍이었다.

고려시대의 석두창이 없어진 후 이 때 다시 신설된 것이다.

마산창은 남해안의 수산 물집산지이자 교환의 중심지역활을 담당했다.

조선시대에 남해의 마산은 동해의 원산, 서해의 강경과 더불어 전국 3대 수산물집산지의 하나였다.

이렇게 번성한 마산장은 함경도 덕원의 원산장, 충청도 은진의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후기 15대 자아시 중의 하나로 발전하면서 마산이 남해안 최대의 상업도시가 되었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아래 그림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각선도본(各船圖本)에 실린 조운선 그림과 조선시대 이용했던 조운선의 모형이다. 그림에서는 배의 골격만 나타내었지만 모형은 섬세하게 복원된 것이다. 배의 기본구조 위에 삼판(杉板)을 얹어 용적량을 늘린 것이 특징이며 배 안에다 세곡을 적재했다.

초 봄에 이런 조운선 16척이 각 읍에서 보내온 대동미 9,215석(石) 5두(斗)를 싣고 마산포를 출발하여 거제 견내량→고성 사량도→남해 노량→전라도 영암 갈두포→진도 벽파정→무안 탑성도→영광 법성포→만경 군산포→충청도 태안 서근포→보령 난지포→경기도 강화 이고지포를 지나 6월 하순경 한강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에 도착한다. 1886년 일본과 미국의 차관으로 구입한 기선 해룡호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세곡이 이 배로 수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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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1)

지금까지 210회에 걸쳐 1945년까지의 마산 도시의 변천과정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살펴본 마산 도시의 변화과정을 각 시기별로 요약․정리합니다.

 

<개항 이전의 시기>

고려의 정종(靖宗, 1035-1046년 재위)대에 이르러 정부는 마산 해안에 조창인 석두창(石頭倉)을 설치하였습니다. 창(倉)의 위치는 오늘날의 남성동 부근에 있던 해안 지역으로서, 근대기까지 존속했던 동굴강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의 이런 추정과 달리 산호동 쪽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충렬왕 원년(1274년)에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마산에 정동행성을 두면서 이 도시는 군사 항구 도시로 변했으며,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의 국제도시로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조선의 영조 36년(1760년)에 조선 정부는 대동미를 운송할 목적으로 남성동 해안에 조창인 마산창을 설치하였습니다. 마산창 설치 이후 마산포는 지형적인 조건과 사회경제적 배경을 발판 삼아 번성하기 시작하여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시대에 항구도시로 발전하던 마산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됩니다. 곧 조선 정부가 1899년 5월 1일로 이 도시를 개항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조창이 있던 마산포로부터 남쪽으로 2㎞ 정도 떨어진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에 각국공동조계지를 설치하였던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창의 중심건물이었던 유정당입니다.

 

<개항기(1899-1910년, 식민지화 준비기)>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취락의 마산포(이하 원마산)는 6개의 마을과 2천여 채의 가옥이 있었으며 장시(場市)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한국인 도시였습니다.

개항 이후에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민족구성이 다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의 이주는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이후 급증하였습니다.

이주한 일본인들은 그들만을 위한 신도시를 각국공동조계지 일대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소위 신마산이라고 하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신마산의 도시 범역은 애초의 각국공동조계지를 훨씬 넘어섰습니다.

도시형성과 함께 식민통치에 필요한 관아 중심의 근대식 목조 건물들이 신마산 지역을 위주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은 조선시대부터 상권이 집중되어 경제적 가치가 높았던 원마산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획득하면서 이곳에도 진출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1910년 한일병합 직전의 원마산 일본인 수요 부지 현황입니다. 붉은 색의 토지가 일본인 수요입니다.

 

<강점 제1시기(1911-1920년, 식민지배 기반 구축기)>

1914년, 일제는 식민지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마산을 부(府)로 승격시켰습니다. 이 때 개편된 행정구역으로 오늘날 마산 도시의 기틀이 확립되었습니다.

하지만 개항기에 이루어졌던 급속한 투자와 인구성장이 일단락되어 성장일변도였던 신마산은 정체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건축공사도 신축보다는 개항기에 지은 건축물을 증축하는 경우가 많았고, 벽돌조 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산의 경제 중심지였던 원마산 지역에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해안이 매립되고 도로가 개설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760년에 건축된 후 150여 년 동안 존속해 온 조창(漕倉)건물이 철거되었고 그 한복판으로 도로가 뚫리면서 조창부지는 몇 개의 조각으로 분할되었습니다.

원마산 지역에서 진행된 해안의 매립․도로 개설․조창 철거 등은 일제가 식민도시의 지배기반을 완벽하게 구축하기 위한 도시정책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원마산의 도시구조는 크게 달라졌으며 이를 계기로 일본인은 원마산의 상권을 더욱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조선총독부가 확정한 최초의 마산부가 경계지도입니다.

 

<강점 제2시기(1921-1930년, 산업수탈기)>

일제가 조선회사령을 폐지하자 산업 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산업용지 확보와 경제적 잉여 창출을 위해 마산부의 일본인들은 해안 여러 곳을 매립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인의 토지 지배는 이전보다 더 대형화․집중화되었습니다.

철도 교통의 발전과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원마산 일대의 시역(市域)이 확장되었고 이에 따라 도로망도 많이 확산되었습니다.

러일전쟁의 산물로서 원마산과 신마산 사이에 철도용지로 수용되어 있던 중앙마산지역이 시구개정 계획에 의해 시가지로 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에는 산업과 교육 관련 시설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건축물은 콘크리트조가 나타나는 등 구조와 형태 면에서 과거보다 발전된 형식의 건축물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에 건축된 원동무역 사옥입니다.

 

<강점 제3시기(1931-1945년, 병참기지화기)>

경제적 잉여를 위한 매립공사와 병참기지를 목적으로 한 항만시설공사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동교 이남의 전 해안이 직선호안으로 변화하는 등 마산의 도시구조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원마산의 도로망은 1920년대만큼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시가지는 크게 넓어져서 인근 자연취락에까지 연결되었습니다.

건축물은 개항 후에 지었던 각종 시설을 보다 진일보한 수준으로 개수하거나 혹은 변화된 사회에 필요한 시설을 신설하였습니다. 한때 마산은 건설 호경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중앙마산지역이 도시로서의 모습을 드러낸 시점인 1935년에 신포동지역의 매립도 완공되었습니다. 이로써 원마산과 신마산은 지형적으로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도시가 연담화되어 하나가 되었고 시역(市域)도 그만큼 넓어졌습니다.

이 중앙 지역에는 도시 전체를 관장하는 공공업무시설이 집중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인의 지배력도 도시 전체에 확대되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 중앙마산지역의 매립설계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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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8) - 강점제1시기

<마산포에 뚫린 최초의 신작로>

통감부 시절인 1907년경에 이미 마산포의 도로 폭을 조금 넓히거나 형태를 곧게 하는 가로개수 공사가 마산경찰서 주관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근대식 도로가 건설된 것은 1912년부터 1915년까지였습니다.

이 때 개설된 도로들을 사정토지대장에서 확인해 보면 1912년부터 1915년까지이지만 시기는 다양합니다. 도로의 개설 시기가 토지대장에 기록된 시기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3-4년 사이에 공사가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업으로 자연발생적인 좁은 골목길뿐이었던 마산포에 폭8m, 10m의 쭉 뻗은 새 도로가 신설되었습니다.

다음 도면은 도로가 개설되기 전의 마산포와 개설 후 모습, 그리고 도로개설 후인 1916년 지도에 나타나는 마산포 모습입니다.
두 번째 도면에서 직선으로 뻗은 넓은 길이 신설된 계획도로입니다.

 

박간(迫間, 하사마)에 의한 매립공사가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시행된 것을 감안하면 이 도로개설공사는 매립공사와 동시에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시에 진행되었을뿐만 아니라 마산포 전체의 도로망 구성을 볼 때 매립지의 도로망과 신설된 도로망은 마산포 전체도로계획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원마산의 계획도로 개설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1912년 10월 7일에 조선총독부관보 제56호로 각도 장관에게 보낸 훈령 제9호로부터 시작된 전국적 규모의 「시구개정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구개정사업」이란 도시의 도로․교량․하천 등을 근대적으로 정비하고, 구획별로 건축물의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도시계획의 성격입니다.

총독부 훈령 내용은「지방에 있어서 추요(樞要)한 시가지의 시구개정 또는 확장을 하려고 할 때에는 그 계획설명서 및 도면을 첨부하여 미리 인가를 받을 것. 다만 일부의 경이(輕易)한 변경은 그러하지 아니하다」입니다.

이 시구개정사업에 관한 훈령에는 그 구체적인 목적과 비용부담 등에 관한 설명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한 장의 훈령이 그로부터 20년 이상이나 한국 땅 안의 시가지를 개조하고 규제하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마산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은『마산항지』에서 이 도로개설사업에 대하여「마산포의 시구개정문제(馬山浦ノ市區改正問題)」와 「제4회 민회의원선거」라는 항목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마산의 민회의원 16명 중 마산포에 거주한 의원이 7명이었다. 그런데 마산포와 신마산에 거주하는 의원들끼리 서로 마산포에 개설될 도로의 노선(路線)에 관한 이해관계 때문에 다툼이 많아 회의가 계속 공전되면서 결론을 얻지 못했다. 결국 당국에 일임하게 되었지만 시행하지 못하다가 1912년 제4회 민회의원들에 의해 마산포의 도로개설사업이 비로소 최종 확정되었다. 모두 13호선까지 계획했으나 높은 지가(地價) 때문에 1호에서 5호까지만 공사를 하고 6호부터 13호까지는 시행하지 못했다」

계획도로의 노선 때문에 민회가 공전되고, 민회의원끼리 패거리를 만들어 싸웠으며, 높은 지가 때문에 계획한 것만큼 공사를 시행하지 못했다는 등의 사실은 당시 마산포가 얼마나 상업중심지로서 가치가 높았던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기야 당시 나온 자료를 보면 마산포가 신마산에 비해 훨씬 거래량이 많았으며 이 때문에 신마산의 일본인들도 마산포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니 세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아마 앞의 두번째 그림에 표기된 신설도로가 위 기록에 나오는 1호에서 5호까지의 도로일 것입니다. 그러나 6호부터 13호는 시행하지 못했다니, 그곳이 어딘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때 신설된 도로의 위치는 가능한 한 기존의 골목길을 확장하여 도로를 개설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① 기존 도로의 체계를 유지하고
② 복잡한 이해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보편적인 방법을 선택했으며
③ 토지 보상비용의 절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1912년 토지이용도와 1920년 토지이용도를 비교해 보면 대부분의 도로가 기존의 골목길을 넓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산항지』에「도시계획에 저촉되는 대지의 보상비가 너무 고가였다」라는 내용을 보아도 기존 골목길을 도로로 활용하여 비용절감효과를 노렸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때 뜷린 도로는 마산포 최초의 근대식 도로로서 신마산에서 시작된 장군로와 이어졌으며 매립지의 도로와도 연결되었습니다.
비록 미미하지만 원마산에 최초로 격자형의 근대적 도로망을 갖추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최초로 나타난 정형의 부지와 근대적 도로는 이미 원마산 상권의 중심지였던 이 일대를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번에 걸쳐 살펴 본 바와 같이 ‘남성동 매립’ ‘마산창 철거’ ‘근대식도로개설’ 등 1910년대에 나타난 마산포의 세 가지 변화는 1760년 조창 설립 이래 지속되어온 원마산 도시공간형태를 대폭 바꾸어놓았습니다.

이 변화가 1910년대 전반기 동시에 일어났다는 점에서(매립 1911-1914, 마산창 철거 1913, 도로개설 1912-1915) 이미 통감부 시대부터 시작된 식민지배 기반구축사업의 일환으로 파악됩니다.

즉 신마산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이 이동에 불편함을 겪으면서도 그들의 '최고의 시장'이라고 여겼던 마산포를 적극적으로 개발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효율적이고 근대적인 도시시설을 준비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식민도시정책의 적극적인 준비’였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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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7) - 강점제1시기


오늘부터는 1910년대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에는 세 가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남성동 매립. 마산창의 철거. 그리고 근대식 도로개설입니다.
남성동 매립에 대해서는 이미 직전 '매립'부분 (2011/09/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에서 포스팅했기 때문에 생략하고 오늘은 마산창 철거, 다음 주는 근대식 도로개설에 대해서 올리겠습니다.


<마산창 유정당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1913년, 마산창이 자리 잡고 있던 1,500여 평의 정사각형 땅에 격자형의 8m, 10m 도로가 뚫려 세 토막으로 잘리고 잘린 땅들은 수십 평 규모로 낱낱이 분할되었습니다.

그리고 1760년 개창한 이래 150여 년 동안 우리 지역에서 위계상 가장 높은 지위로 위풍당당했던 마산창 본당 유정당(惟正堂)과 8동 53칸의 부속건물들이 모두 헐렸습니다. 식민지가 되어버린 이 나라의 운명처럼 마산창 터와 유정당이 갈갈이 찢긴 겁니다.

당시 마산에 들어온 가톨릭에서 완월리에 성당을 짓기 전에 이 유정당을 매입해 성당으로 사용할 것을 고려했다가 도심지라 너무 비싸 포기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때 가톨릭에서 구입했다면 지금 창동은 어떻게 변해있을까요?
무의미하지만 재미있는 상상입니다.

전통의 유정당이 헐릴 때,,,
긴 세월 떵떵거렸던 건물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1,500평 땅까지 참담하게 잘려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마산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당시 마산창의 위치입니다.


당시 관례로는 좋은 건물을 헐때는 기둥이나 들보 등 중요 자재는 버리지 않고 이축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건물을 짓는데 재사용하였습니다.

가까운 예로, 창원시 대방동에 있는 불곡사 일주문을 들 수 있습니다.
보통 일주문은 기둥이 두 개인데 불곡사 일주문 기둥은 4개입니다만 아래 사진처럼 기둥이 한 줄로 배치되었으니 일주문이 맞긴 맞습니다.

불곡사 일주문은 원래 창원객사의 삼문이었는데 1882년(고종 19) 웅천향교로 옮겼다고 합니다.
삼문은 대궐이나 관청 앞 남향 정문인데 문 세 개가 붙어 있는 것으로 가운데를 정문, 오른쪽을 동협문, 왼쪽을 서협문이라 부릅니다.
1914년 웅천향교가 창원향교와 통합되면서 향교의 다른 건물은 철거되고 삼문만 남은 것을 1943년 불곡사로 옮긴 것입니다.

이곳 저곳 옮겨다닌 저 기둥들을 한번 보시죠.
 


따라서「유정당」 정도의 건물이라면 당연히 어딘가에 남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때가 때인 만큼(한일병합기) 이와 관련한 어떤 기록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 모르죠, 우리 가까이 있는 어떤 목조건물의 기둥과 들보가 유정당의 그것인지,,,

마산창의 건물에 대해서는 (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규모가 컸을뿐 아니라 시공수준도 높고 입지도 좋아 품격이 높은 건축물이었습니다.

유정당 사진입니다.


유정당이 헐리면서 분할된 마산창 부지는 대구소재 주식회사 경상(慶尙)농공은행를 비롯하여 일본과 한국의 개인소유가 되어 중심상업지 기능을 하면서 일제강점기를 지났고, 지금도 남성동 파출소, 제일은행마산지점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번 올린 적이 있지만 다시 소개합니다.

그림에 조예가 깊었던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승지, 교리, 수찬을 역임하고 1766년 대사간을 지낸 창암(蒼巖) 박사해(朴師海, 1711년-?)가 유정당 준공 후 지은 시(詩)입니다.

 

-漕倉 惟正堂-              朴師海

坐 來 新 棟 宇              새로 지은 당(堂)에 와 앉으니

蕭 灑 客 心 淸              나그네 마음 상쾌하게 맑아지네.

海 色 楹 間 入              바다 빛은 난간 사이로 스며들고

島 霞 席 底 生              섬 노을은 자리 밑에서 일어나네.

倘 非 經 緯 密              경위(經緯)가 치밀하지 않았더라면

那 得 設 施 宏              어찌 규모가 넓었으리오.

南 路 知 高 枕              남쪽 지방이 태평함을 알겠거니

蠻 氓 可 樂 成              변방 백성들이 즐겨 지었다오.<<<




2011/05/1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2011/07/0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2011/07/1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2011/07/1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2011/07/25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8) - 강점제1시기
2011/08/0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2011/08/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0)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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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1910년대 건축물>

1910년대에는 마산에 도시변화가 많이 없었던만큼 건축공사도 많이 없었습니다. 종교시설과 일부 교육시설만 약간 들어섰습니다.
개항기에는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한 관아시설들이 주로 건설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개항기에 지어 놓은 건물들의 증․개축이 많았으며 관아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업용 건물이 많았습니다.

또한 목조건축물이 많았던 이전과 달리 이 시기부터는 벽돌을 이용한 조적조 건축물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신마산에 집중되었던 건물들이 서서히 원마산 쪽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 장군천 이북에 지방법원지청이 들어섰고 현 마산시청 자리에 전기회사가 들어오는 등 공공건물들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일대(옛 마산시청부근)가 신마산의 마산포 진출이라는 의미 외에 마산포와 신마산 양도시를 관장하는 공공업무지구 성격의 새로운 영역(중앙마산)으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910년 건축된 부산지방법원의 마산지청입니다.

1919년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해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10,000지도「마산」을 보면 마산포에 근대식 시설들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
현 삼성생명 부지에 부산감옥 마산분관과 인근에 동척(東拓)출장소, 그리고 전 북마산 파출소 앞의 삼성라디에타 부지에 조면공장(繰綿工場)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또 옛 중앙극장 건너편에 금융조합이, 그리고 보통학교(성호초등학교)와 통도사 포교당, 보통학교의 서쪽 약 250m 지점에 피병원(避病院)이 있습니다.
피병원은 전염병환자 전용병원으로 이 외에 신마산 완월리 아래(현, 마산여고 뒷편)에도 있습니다.
위치를 보아 신마산의 것은 일본인 전용, 원마산의 것은 한국인 전용 아니었나 싶습니다.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이 현 제일은행 부지에 들어섰는데 이 부지는 원래 마산창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이 때 지은 조선식산은행 건물은 해방을 거쳐 현재의 건물을 지은 1970년대까지 이용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았던 근대건축물 중 변변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도시라, 아무리 생각해도 참 아까운 건물입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이 시기에 건축된 교육시설은 의신여학교와 마산실과고등여학교가 있었습니다.
창신학교 여학생들로서 시작했던 의신여학교 건물은 성지학교에 이어 벽돌조 건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규모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추산동에 있는 포교당 정법사는 1912년 건축되어 최근까지 남았다가 얼마 전 새 건물 짓는다고 철거했습니다. (2011/07/0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불교시설인 포교당을 지은 7년 후(1919년) 마산 최초의 개신교회인 마산포교회가 문창교회로 개명하면서 석조 1층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예배당을 신축하였습니다.
1만 6천원의 건축비를 모아 무학산 기슭의 석재를 사용하여 지었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한국교회 석조건물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시기입니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 지은 건물 중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No

건물명

현위치

건축연대

有無

구조 및 규모

양식

면적

비고

1

도립마산병원

 

1911

 

 

 

 

 

2

마산포교당

추산동65

1912

목조1층

한식

30평

통도사正法寺

3

의신여학교

상남동

1913

벽돌조1층

양식

 

창신학교여학생

4

구마산우편소

남성동

1913

 

 

 

매립지(남성동우체국)

5

노동야학교

창동

1914

 

 

140평

1,300엔․교실 6개

6

실과고등여학교

장군동3가

1915

목조1층

의양풍

 

마산여고 전신

7

조선식산은행

남성동3가

1918

벽돌조1층

양식

 

농공은행합병․현제일은행자리

8

문창교회

추산동

1919

석조1층

로마네스크

84평

최초의 석조예배당

9

마산창고(주)

남성동198

1920

 

 

 

한국인 신설회사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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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산신세대 2011.08.30 13:1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런 블로그를 발견해서 뛸듯이 기쁩니다. 그런데 사진을 어떻게 구하시는지요?

    • 허정도 2011.08.30 16:57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사진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구합니다.
      문헌에 나와있는 것들입니다.

2011.04.0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2) - 개항이후

<마산포의 길과 땅>

-마산포의 길-

포구를 끼고 발생한 마을의 경우, 마을 규모가 작을 때는 한 개의 선창을 중심으로 단순하지만 마을 규모가 클 때는 몇 개의 선창을 연결하는 주도로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길들이 형성됩니다.

마산포의 경우는 후자처럼 창원가도(昌原街道)를 중심으로 수계(水系)와 능선 그리고 등고선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얼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난 회에 올렸지만 다시 한 번 마산포 복원도를 보겠습니다.



남성동 파출소 일대, 즉 조창지 부근지역은 조창과 관련한 관리들 거주지 혹은 조창관련 건물들 탓에 계획된 도로로 보이는 직교격자형이 많았습니다.
이 지역은 한일병합 이후 근대식도로가 개설되면서 금융 등을 비롯한 새로운 산업시설을 담당하는 마산포의 중심공간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와 달리 인구 증가와 함께 동쪽(그림에서 오른쪽, 지금의 아구찜 거리와 코아양과점 뒷편)으로 취락이 확산되면서 소규모 토지에 불규칙한 미로(迷路)형 세도(細道)가 많았습니다.

1908년에 제작된 마산지도 중 마산포(원마산)의 도로를 표기한 것과 복원도에서 골목길 부분을 확대한 것이 다음의 두 그림입니다.
비교해 보면 당시 마산포 골목길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마산포를 통과하는 창원가도의 위치를 비정해 보았습니다.

아래 그림(1902년 제작된 지도)을 통해 산호동 해안을 끼고 창원읍과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복원도의 ●지점과 ●지점을 잇는 도로가 이른바 창원가도(昌原街道)로 보입니다.
 

진주와 창원을 연결하면서 마산포를 관통하는 창원가도(昌原街道)의 형태는 마산포 생성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결과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 마산포가 외부와 연결되는 도로체계를 도로의 형상과 인근지역의 위치를 감안하여 정리해본 도면입니다. 회원․성호․교방․석전지역이 마산포 와 연결되는 주도로라고 보면 됩니다.
그림에서 굵은 점선으로 그려진 길이 당시에 가장 번화했던 길입니다.

 

-마산포의 땅-

복원도에서 확인된 1910년 경 마산포의 면적은 약 170,000㎡(51,000평)이었습니다.

각 필지별 대지의 규모는 작았습니다.
총 1,157필지 중 50(15평)미만이 20%, 50-100(15-30평)이 33%, 100-200(30-60평)이 28%로 60평 이하의 땅이 81%를 차지했습니다.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길에 조그만 집들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산포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대지는 그림에서 녹색으로 표시된 마산창(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 파출소 일대) 부지였는데 면적은 5,097.52㎡(1,530평)였습니다. 사정(査定) 당시의 지번은 '원정(元町, 남성동) 142번지'였습니다. 

아래 그림의 점선 내 토지 형태를 유심히 보면 동굴강을 감싸고 있는 대지 중 어선창 쪽으로 나가는 길가에 일정한 폭의 전면부를 가진 소규모 필지들이 군집해 있습니다.


이 토지형태에서 착안, 이곳에서 마산포 시장이 발원한 후 시간이 흐르면서 조창주변의 상권과 연결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추정 이유는 유독 이곳의 대지 형태가 이질적이라는 점과 이 지역이 민간인 전용굴강으로 추정되는 동굴강과 연근해 어선들이 모여들었던 어선창, 그리고 창원가도 변에 있으면서 오산진(현재의 산호동 용마산아래 마을)과 연결되는 오산선창이 이어지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초기에는 길을 따라 장이 열렸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장터로 사용되었던 길가에 점포가 상설화된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한편, 마산창을 기준으로 선창에 이르는 일대의 도로는 반듯한 직교격자형이고 토지도 정형이며 규모도 큽니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마산창을 중심으로 의도적으로 계획된 도시구조체계라고 볼 수 있으며 부지의 용도는 마산창과 관련된 관리들의 가옥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된다.

박희윤은 이 지역을 큰 곡물(穀物) 객주와 선어물(鮮魚物) 객주들의 건물이 들어서있던 상업 및 업무지역이라고 추정했습니다만 부지의 위치나 형태, 그리고 인근의 다른 토지 중 관리가 거주했을만한 부지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관리들의 가옥으로 추정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 지역은 개항기부터 금융기관이 들어서는 등 도시의 중심지로서 기능했지만 한일병합 후에 근대식도로가 개설되면서 마산포의 중심기능을 점점 강화하게 되었고 이런 현상은 최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손수레나 지게만 통행이 가능했던 마산포 골목길,,,, 그리고 다닥다닥 붙어 앉은 작은 집들,,,,
길을 넓히고 건물을 지으면서 변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존속해 오고 있습니다.

없는 것도 만들어서 ‘이것입네’하는 세상인데,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이 골목길과 오래된 동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을까요?<<<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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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usiness logo design 2011.08.06 18:0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한 번 해보고 싶어지네요ㅎㅎ
    초보블로거라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2011.03.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한일병합 전, 마산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늘부터 마산포(원마산)의 옛 모습에 대해 7회로 나누어 포스팅하겠습니다.

근대적인 계획도시였던 신마산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전통도시 원마산의 사정은 사뭇 달랐습니다.

당시 마산포(원마산)의 규모입니다.


1900년-1910년 경 마산포는 인가(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했으며 2,000여 호의 재래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상점가는 주로 해변에 면해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중심부인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에는 정사각형의 1,500여 평의 부지에 150여 년 동안 존속해 온 마산창이 개항과 함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변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마산창은 100여년 전까지 존재했던 건물로서 규모․위상․역사성이란 측면에서 가장 상위의 관아였습니다.
마산창에 대해서는   <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에서 이미 소개하였습니다.

마산창 주변은 좁은 길가에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상점으로 가득 차있었으며 주위 안팎에 마산창과 관련된 공덕비를 비롯한 석탑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기에 창동을 석정(石町)이라고 불렀는데 이 석탑들 때문에 지어진 지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록으로 당시 마산포 상황을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01년 창동 구 시민극장 뒷골목에 있었던 황영택 장로의 집에서 마산의 기독교가 시작되는 최초의 모임이 있었다는 『문창교회백년사』 기록과
같은 해 마산 최초의 천주교 신자 김달시시오의 집이 오동동에 있었다는 『
天主敎馬山敎區設定10주년기념집』이 그것입니다. 
이 두
기록을 보면 도로변을 제외한 골목 안쪽은 대부분 주거용 건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밖에 창동의 옛 시민극장 자리에 마산민의소가 1908년 건립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며 1898년 마산창 내에 마산포우편물취급소가 설치된 후 1909년에 구마산우편소로 개칭되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 외에 남성동 일대에 마산금융조합과 진주농공은행마산지점 등의 금융시설이 있었으며 1909년에는 수성동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출장소가 생겨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1906년 조창부지 서쪽에 일본인 등기공수(藤崎供秀)가 한인가옥 사이에 일본식의 점포를 2-3채 지어 세를 내주고 그 지역이 마치 제 지역인양 등기정(藤崎町)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1908년에 마산포 영역인 서성동에 길천(吉川)이란 일본인이 사는 목조2층의 요정 '명월루'에 화재가 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등기공수(藤崎供秀)와 길천(吉川)에 대한 두 기록은 을사조약 후 일본인들의 마산이주가 본격화되고부터 원마산에도 일본인들이 건축물도 짓는 등 상당한 진출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데 더 이상 자세한 정황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산포의 시장은 번화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의 마산포(원마산)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사진 두 장을 소개합니다.

조선통감부농상공부수산국에서 1910년 펴낸 『韓國水産誌』에 수록된 사진입니다. 책의 간행연도가 1910년(隆熙4년)이니 사진촬영 시기는 1908-1909년 혹은 그 이전일 수도 있습니다.




「구마산예시의 건염어점(舊馬山例市の乾鹽魚店)」이라는 설명과 함께 소개된 두 사진을 보면 좁은 시장통에 초가의 상점이 늘어서 있는 정경과 사람 수를 보아 상당히 성황을 이룬 거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조 흙벽에 초가를 얹었지만 늘어선 품새로 보아 시장이 번성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마산포 시장의 이런 모습이 조선 후기 내내 이어져 왔을 것입니다.

다음 글은 1908년 일본인 전연우언(田淵友彦)이 쓰고 박문관(博文館)에서 펴낸『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254쪽에 수록된 마산관련 글입니다. 

**************************************************************************************한인가(韓人街, 마산포)는 마산만 안쪽의 북쪽에 각국거류지로부터 20여 정(丁, 1丁은 109.1m, 町이라고도 함)에 있으며 구마산이라고도 칭한다.

수 천 여 호에 인구가 약 4,500에 이르는데 옛날 조공미를 모은 집산지로서 함경도의 원산, 충청도의 강경과 더불어 팔도 3대 항구 중 하나로 일컬어 온 곳으로서 경상남도에서는 시가(市街)로서 제3위를 점한다.

마산 개항 당시에는 일본 상인들이 모두 여기에서 조선인들과 혼거하여 살았다. 또한 본 항 무역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미곡은 가을과 겨울, 출하의 계절에 오직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므로 일본인들도 여기서 거주하는 사람이 많은데 1904년 6월 현재 호수는 42호이고 남자89명․여자 56명이다.

구마산의 개시일(開市日)은 매월 3회로 5일․15일․25일에 열리는데 장날에는 부근 10 리 내지 20 리 떨어진 지역으로부터 주민들이 모인다. 특히 쌀이 출하되는 계절에는 조선화폐 취급고가 50,000관(貫, 관은 ‘괘’의 뜻으로 엽전 열 꾸러미, 곧 열 냥을 하나치로 계산하는데 쓰는 말이므로 1관은 10냥(兩)을 말한다) 이상 달하기도 한다.

구마산은 또한 어류집산지로서 염장어(鹽藏漁)를 위시하여 해삼․명태 등의 건어물을 취급하는 상점이 20여 호이며 매년 취급고가 수 십 만원까지 오른다. 어류는 일본어선 및 한국어선으로 공급하고 판로는 경상도․전라도로부터 충청도 방면까지 이른다.

일본인 중에서 구마산에서 일본어 학교를 열어 한국인 자제의 교육에 착수한 사람이 있다. 현재 학생이 수 십 명에 달하며 점차 발전하고 있다.




다음 글은『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보다 6년 먼저 나온『韓國 案內』의 마산기록 중 마산포의 도시상황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책은 일본인이 쓴 근대기 마산관련 최초의 문헌으로, 일본인
香月源太郞이 쓰고 東京 靑木嵩山堂에서 1902년 출간했습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는
『韓國 案內』를 '대한제국기에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여행객들을 위하여 한국의 개항장 등의 경제발전상황을 통계자료를 이용하여 소개하고 관광할 만한 명승고적과 은행 등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는 책자이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 마산포(舊 馬山浦) p.322

각국 거류지를 지나 약 10리 거리의 창원가도(昌原街道)에 있고 인가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한 곳이다. 호수는 2,000여호이며 감리서(감리는 창원군수가 겸임), 경찰서 등이 있고 시가는 해변에 면하여 선박화물의 폭주가 매우 빈번하다.

옛날에는 이곳이 일본상인(행상)의 근거지였지만 마산개항에 즈음하여 신마산으로 이전하였다. 지금도 20여 호가 있고 대부분 조선가옥에 기거하고 있다.
 
**************************************************************************************

에 나오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숫자는 다른 자료와 차이가 많아서 정확도에 의문이 생기지만 당시 마산포가 얼마나 활발했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산포의 세밀한 상황은 복원도를 포스팅할 때 소개하겠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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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다 - 정명변경(町名變更)>


일제는 그들의 편의에 따라 도시지역의 행정구역 최소단위를 ‘정(町, 마찌)’이라는 일본식 명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산창(馬山倉) 설치 후 생겼던 마산포의 6개리도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 글은 마산의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총독부를 개청한 1910년 10월 1일 하루 전날인 9월 30일,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과도기적 지방통치기구를 확립하였는데 거기에 동리명의 변경에 관한 지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변경방법은 그 때까지 사용되던 행정구역의 최소단위인 ‘동’과 ‘리’의 명칭을 일본식이나 한국식 중 어느 것이나 택하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본인이 행정책임자가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통 일본 세상이었던 때라 종래의 한식(韓式) 동리명이 채택되는 일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치가 있기 전부터 일본식 지명이 사용되고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개항기에 설치된 일본전관거류지와 각국조계가 설치되었던 곳, 그리고 통감부 치하에서 일본거류민단이 설치된 지역을 두고하는 말입니다.
그곳에는 종래의 한국식 동리명과 병행하여 본정(本町, 혼마찌)이니 경정(京町, 쿄마찌)이니 하는 일본식 동리명이 이미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마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1월 3일자 포스팅에서 소개한 1907년 간행된 「馬山全圖*」를 보면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신마산(조계지)에서는 이미 일본식 지명이 사용되었던 겁니다.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그러나 그 때 사용했던 신마산 지명은 공식적인 명칭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일제기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의『마산항지』에 의하면,
1908년 4월 23일 거류지회 회두인 삼증(三增) 이사관(지금의 시장 역할)이 궁천(宮川)경찰서장, 동조원태랑(東條源太郞)우편국장, 전전(前田)민장을 비롯한 거류지회 유지들과 신마산 조계지 내의 행정구역 명칭에 대해 협의했다고 합니다.

그 협의에서 본정(本町, 월남동)․경정(京町, 두월동)․빈정(濱町, 창포동)․서정(曙町, 청계동)․대정(臺町, 대내동)․파정(巴町, 대외동)․녹정(綠町, 유록동)․영정(榮町, 홍문동)․유정(柳町, 신창동)․욱정(旭町, 평화동)․앵정(櫻町, 문화동)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정리 확정하였습니다.

그 중 간선도로를 끼고 있던 본정과 경정과 빈정은 각각 정목(丁目, 죠메)을 두었습니다. 본정은 1-5정목, 경정과 빈정은 1-3정목까지였습니다.

정목(丁目)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가(街)를 뜻하는 말로 ‘본정1정목’은 지금의 ‘월남동1가’입니다.

다음 그림은 정명 결정 후 몇년이 지난 1916년 신마산지도에 표기된 지명들입니다.
원형 내의 마산신사는 지금의 제일여고 자리입니다.


마산포(원마산) 쪽의 지명도 아래처럼 바뀌었습니다.
남성동파출소 위 쪽의 정() 지금의 창동입니다.



이사관(지금의 시장 역할)이 나서서 한 일이라 이 때 결정한 정명(町名)은 결정 후 곧바로 실행되었습니다.
거류민단에서 각 정 및 정목의 경계에 나무패를 박아 표시하고, 어린 벚나무 5천 그루를 구입하여 각 가로에 4칸(7.2m) 간격으로 심었습니다.

이처럼 마산의 조계지(신마산)에는 1910년 조선총독부가 전국행정구역명칭을 변경하기 훨씬 전부터 자기들 임의로 지명을 지어 부르다가, 1908년 이사관의 주도로 확정하여 뒷날 총독부가 시행한 정명변경(町名變更) 때는 바꿀 필요도 없이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마산항지』에 의하면 이러한 신마산 조계지의 정명변경에 뒤이어 1909년 원마산(마산포)의 6개리 명칭도 바뀌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조계지 인근 지역도 선정(扇町, 반월동)․고정(高町, 대창동)․영정(英町, 화영동) 및 금정(錦町, 해운동)이라는 명칭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정(町)의 경계를 결정하는 구획방법은 신마산과 원마산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신마산은 길을 중심에 두고 지역을 구획한 반면, 원마산은 길을 경계로 해서 지역을 나누었습니다.

특별한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길을 중심으로 지역을 구획할 때는 반드시 가로가 일정한 규격과 형태로 정돈되어 있어야하는데 꾸불꾸불하고 좁은 골목길뿐이었던 원마산은 도로를 중심으로 구획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린 부득이한 조치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시행된 조선 전국의 행정구역명칭변경 결과를 1917년 일본인  ‘월지유칠(越智唯七)’이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이라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다음 표는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에서 발췌한 마산의 정명변경 이전과 이후 명칭비교입니다.<<<


변경 전 명칭

변경 후 명칭, ( )내는 현재 동명

月影里 一部

錦町(해운동), 英町(화영동), 高町(대창동), 월영리

新月里 一部

신월리,
扇町(반월동), 弓町1․2丁目(대성동1․2가)
通町1․2丁目(장군동1․2가),湊町(월포동)
都町1․2丁目(중앙동1․2가), 仲町(신흥동)

玩月里 一部

通町3․4․5丁目(장군동3․4․5가),都町3丁目(중앙동3가)

玆山里

玆山里

西城里, 城湖里, 城山里 各 一部

新町(추산동), 幸町(서성동)

西城里 一部

富町(부림동), 壽町(수성동)

東城里, 西城里, 中城里 各 一部

元町(남성동)

城湖里, 中城里 各 一部

石町(창동)

東城里, 城山里 各 一部

俵町(중성동)

東城里, 中城里, 午山里 各 一部

萬町(동성동)

東城里, 午山里, 上南里 各 一部

午東里

上南里 一部

上南里

城湖里 一部

城湖里

校坊洞, 檜原洞 各 一部

校原里

新月里, 玩月里 各 一部

玩月里


‘通町’은 원래 구마산 역(지금의 육호광장)까지 지역을 길게 할애하여 ‘長町’이라 부르고 11町目으로 나누었다가 나중에 尺山橋(자산동 경남데파트 앞)까지 단축하여 ‘通町’으로 고쳤습니다.


현재 우리
가 사용하는 동(洞)의 명칭은 해방 후 우리 식으로 바꾼 것이지만 토지의 지번과 동(洞)의 경계는 100여 전 일본인이 만든 지번과 정(町) 경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라 도처에 남아있는 식민지 시대 흔적 중 하나입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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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천혜의 바다에 매립이 시작되다>

마산도시변천사는 매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립은 마산의 도시규모를 키웠고 교통과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때로는 도시중심권을 이동시키기도 했습니다. 매립이 지도만 바꾼 것이 아니라 마산시민의 생활까지 바꾸었습니다.

특히 근대도시 형성기였던 일제강점기의 매립은 마산도시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키쳤습니다. 그러므로 마산만 매립에 대한 이해 없이는 마산도시변천과정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아래 두 그림 중, 왼쪽은 매립 전 자연상태의 마산만이고, 오른쪽은 현재 계획하고 있는 마산해양신도시(푸른 점 부분)와 가포신항만 일대에 계획된 매립까지 완공되었을 때의 마산만입니다>


일찍부터 마산이 항만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는 마산만 주변을 둘러싼 자연조건, 즉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마산만의 위치와 피항에 적합한 지형 때문입니다.

멀리 고려시대 조창인 석두창(石頭倉)과 일본정벌을 꿈꾸었던 정동행성, 그리고 조선시대 마산창(馬山倉)에 이르기까지 왕조시대 조정에서 마산항을 중시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일제도 이 땅을 지배하면서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일찍부터 마산을 점찍었습니다.
일본과 한반도와 대륙을 연결할 수있는 중요 항구로, 자국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탈의 대상으로, 전쟁 때는 후방의 병참기지항으로 마산을 이용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자본가들에게 마산해안의 간석지는 손 쉽게 삼킬 수 있는 고급먹잇감처럼, 저비용으로 고수익을 올려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원시적 축적수단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마산의 매립지 중 어느 한곳도 공공용지로 사용되었거나 도시발전을 위한 기반시설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눈앞의 이익을 챙겨주는 돈벌이의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중일전쟁 시기에 일제의 군수용품 수송부두을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매립도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은 일본 사기업과 개인의 돈벌이 수단이었습니다.

일제만 비난할 일도 아닙니다.
이런 사정은 해방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우리 손으로 매립한 땅에서도 이 도시의 미래를 위한 공공용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 매립지는 공장을 짓거나 분양해 돈만 챙겼습니다. 가장 최근에 매립한 구항과 서항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인들이 보았던 마산만과 해방 후 이 나라 지배층들이 보았던 마산만은 여전히 탐욕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마산만 매립은 완공기준으로 개항기 4회, 1910년대 2회, 1920년대 3회, 1930년대 이후 15회로 총 24회 325,000평 규모였습니다.
그 결과, 갈대밭과 갯벌로 아름다웠던 이 도시의 해안선은 해방 때 전부 석축으로된 직선 호안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모든 매립의 주체는 조선총독부․마산부․기업․민간인 등이었습니다.
1회 매립 면적도 최소 100여 평에서 최대 10만 평 가까운 면적까지 다양했으며 한 사람이 세 번에 걸쳐 매립한 사례도 있습니다.

매립의 목적도 다양했습니다.
항만건설, 농지, 공장용지, 군용지, 철도용지를 목적으로 매립하기도 했고 기업과 개인에게 분양과 임대를 목적한 매립도 있었고 자신의 사업장을 확대하기 위한 매립도 있었습니다.

한 밑천 잡기위해 매립에 뛰어들었다가 막차를 타는 바람에 신세를 망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마산만 매립은 내용과 형식이 다양했습니다.

단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었다면 그 주체가 모두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개항 직후 한국인이 매립을 시도한 적은 있었지만 약해져 버린 국력 탓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회 부터 포스팅할 글에서는 매립에 대한 이야깁니다.
매립과정과 공법․비용 등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도시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매립의 시기와 위치․규모․시행자 정도로 한정해 소개하겠습니다.
매립시기의 기준은 공사가 완공된 일자로 하며 완공일자는 토지대장의 기록을 기준하겠습니다.

일제기 마산매립에 관한 자료는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공법, 비용, 회의록, 설계도서 등 매우 구체적인 자료들이 남아있습니다.

개항 직후의 시기에 매립계획은 세웠지만 실제로 시행되지 못한 사례가 5건 있습니다.
그것들까지 포스팅하겠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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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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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1.01.17 06: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날씨가 너무 춥네요.
    누가 그러더군요.
    빙하기가 시작돈 게 아닌가 하고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 허정도 2011.01.19 08:52 신고 address edit & del

      날씨 때문에 참 걱정입니다.
      인간들 욕심이 만든 자연재앙이 앞으로 점점 더 커질 텐데,

  2. 임종만 2011.01.17 11:0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매립의 진실, 새롭고 흥미로운데요 ㅎㅎ
    다음 포스팅 기대됩니다.

    • 허정도 2011.01.19 08:54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1910년 이전까지의 매립부터 실어보겠습니다.
      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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