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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0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한반도 최초의 도시계획>

마산은 192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구조 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30년대에 이르러 전쟁으로 인한 군수물품 공급창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원인이 되어 해안 전역에 걸쳐 대규모 매립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192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중앙마산이 완성됨으로써 이전까지 공간적으로 나누어져 있던 두 도시가 하나의 도시로 연담화되었으며, 원마산은 철도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범역이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계획법은 1934년 6월 20일자로 만들어진「조선시가지계획령」입니다. 이보다 앞서 1920년에 시가지계획령을 입안한 일이 있으나 시기상조란 이유로 폐기되어 버렸습니다.

도시계획과 관련한 법제 중 가장 이른 것은 한일병합(1910) 이전에 개별 건축물을 규제하는 장치로 만든「건축규칙」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 규칙이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와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도시 관련정책으로는 1912년에 조선총독부가 시달한「시구개정훈령」으로, 시가지 내의 도로․교량․하천 등의 관리를 위한 내용으로 시행된 바 있습니다.

1913년에는「시가지건축취체규칙」이 제정되어 개별 건축물의 방화․위생․건축선 등 건축 경찰적 의미의 규제가 도입되기도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제도가 근대화 여명기에 있었던 우리나라 도시 관련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정책은 최소한의 도시 관리에 그친 정책이었으며, 대규모의 도시개조와 개발은 주로 군사적․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초법적인 식민지 통치행위의 일환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1930년대 초까지 지속되다가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제정되었던 것입니다.

이 법은 크게 다섯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① 도시계획의 수립 ② 도시계획사업의 집행 ③ 지역․지구의 지정 ④ 건축제한 ⑤ 구획정리사업에 관한 사항이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계획령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도시계획․건축․도시개발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도시 관련 법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는「동경시구개정조례(1887)」보다 47년, 일본의 도시계획법(1919)보다는 15년 늦게 제정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선 1921년에 서울․부산․대구․평양 등 중요 도시에 대하여는 도시계획실시를 전제로 한 도시계획조사가 진행된 바 있지만 구체적으로 시행되기는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최초로 적용된 도시는 나진이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도청소재지는 이보다 2년 뒤인 1936년부터 적용하였으며 해방되기까지 전국의 총 42개 지역의 도시계획을 이 계획령으로 수립하였습니다.

「조선시가지계획령」 제정의 직접적인 동기는 나진 개발의 긴급성과 당시 전국 도시인구의 급격한 증가 현상이었습니다.

나진 개발의 긴급성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만주사변(1931)의 결과로 일본에게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가 생긴 것은 1932년 3월 1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경제수송로로 일본본토-해로-나진항-만주국내 도문-길림-신경(현재의 장춘) 노선이 결정되었습니다. 1931년 말 현재의 인구 4,520명이었던 빈한한 어촌 나진을 갑자기 이렇게 결정하자 1931년 경, 평당 12-13전 하던 땅값이 1932년경에는 40원 이상 급등하였습니다. 이런 토지투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총독부 당무자들이 땅을 사지 않고 계획적으로 조성하는 방법, 즉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시가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두고 나진 개발의 긴급성이라 합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나진의 땅값이 얼마나 요동을 쳤던지, 1932년 11월 13일 동아일보 나진 르포기사에 나진 일대 부동산에 투자하여 수백배의 차익을 남긴 동일상회 두취 김기덕에 대한 기사도 실려 있을 정도입니다.

「조선시가지계획령」은 기존 시가지의 개량보다는 신시가지의 창설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한반도 내 많은 신시가지가 이 계획령에 의해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긴급히 시행한 까닭에 여러 가지 문제도 야기되었습니다.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의 미 분리, 그리고 경험의 미숙 등으로 인해 오히려 무질서한 시가화를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시가지계획령」의 집행으로 형성된 전국 신시가지의 형태는 기존 시가지와의 관계에 따라 ① 구 시가지의 정비확장형(서울․평양 등) ② 신․구 시가지의 분리입지형(부산․목포 등) ③ 신도시형(신의주․진해 등)의 세 유형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서 ①의 유형은 조선시대에 이미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던 도시들로서 기존도로망의 확장․포장․직선화가 도시계획의 중요한 실적이었으며, 기타의 도시에서는 일본사람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신시가지의 형성이 중요한 도시공간의 변화였습니다.

이 도시 마산의 경우는 ②의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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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9) - 강점제2시기

85회부터 시작된 1920년대 마산도시변화에 대한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일제강점 제2시기인 1920년대는 한국이 일제의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 특히 식량공급지로 산업구조가 재편되었던 산업수탈기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기만적인 소위 문화정치가 표방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산미증식계획이 강행되었고 회사령이 철폐되었습니다.

1920년대의 마산인구는 1920년에 16,165명이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구성장의 폭이 조금씩 많아져 1930년에는 25,810명이 되었습니다.

일본인은 1920년 당시 4,172명이던 것이 1930년에는 5,559명이 되어 1920년에 비해 133.2%로 늘어났지만 한국인들은 같은 시기에 169.0%로서 일본인의 증가율에 비해 약간 높았습니다. 

조선회사령 폐지로 마산의 민족자본가들도 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일본인 역시 기업을 앞세워 원마산으로 많이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요인이 되어 1920년대 중반 이후 마산은 원마산의 도로건설과 마산만 해안 전역에 매립공사가 시작되는 등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원마산 지역의 매립은 박간(迫間)의 매립 때 매립되지 않고 남아있던 동굴강의 일부가 1927년 매립되었고, 1929년에는 오동동일대 해변 1,700여 평이 매립되어 대규모 매립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신마산에도 현재의 경남은행 신마산 지점 건너편 일대 총 10,500여 평이 매립되었고 중앙마산의 해면(현 신포동)도 대규모 매립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20년대 중반부터 마산은 매립이라는 도시의 대변화가 시작되었으며 이 변화는 해방 때까지 지속됨으로써 도시구조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합방기 이전에 이미 장군천까지 도로가 개설되었지만 건물은 많이 들어서지 않았지만 1920년대 후반에는 철근콘크리트조의 모더니즘 영향을 받은 건물도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건물의 용도는 산업시설과 교육시설 등이 많았습니다. 상수도는 1930년에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1920년대의 특이한 변화는 20년대 중반 이후 신마산과 원마산의 중간 지점인 장군천과 몽고정 사이의 중앙마산에 공공지역을 위주의 새로운 영역이 조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철도용지였던 이곳을 불하하여 가용지로 만들었던 중앙마산의 형성은 마산을 두 지역으로 분절하고 있었던 기현상을 해소해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두 도시가 연담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마산 서쪽 모퉁이에 집중해있던 관공서들이 도시의 중심부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중앙마산의 형성과정은 중앙동2가와 3가에 대규모 도로계획을 입안하여 1927년 총독부의 허가를 얻음으로서 착수되었는데, 허가를 득한 후 이곳을 마산부가 불하를 받아 도로를 개설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원마산은 현재의 추산동과 상남동․교방동 즉 현재의 북마산 쪽으로 범역이 확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원마산 범역 확산의 중요한 이유는 마산과 진주를 연결하는 철도 경남선이 개통된 것과 구마산 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 일대가 교통과 유통의 중심기능을 담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마산의 상황은 시구개정사업이란 명분까지 갖추어 보다 많은 도로가 개설되었는데 이 과정에 중앙정부의 재정지원까지 있었습니다.

1910년에 이미 개설되어 있던 창동과 남성동 지역의 도로망이 이 때 중성동․오동동․동성동으로 많이 확산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도로망 확산기’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1920년 기준으로 원마산에서의 일본인 소유 토지는 전체의 35.0%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1930년에는 38.8%로 늘어났습니다. 이에 반해 한국인들의 토지소유는 1920년 62.5%이던 것이 1930년에는 55.2%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변화는 개인소유의 대지만으로 산정한 결과입니다.

기업과 단체가 사실상 일본인들의 소유였기 때문에 이를 합하면 실제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율은 이보다 훨씬 높아집니다.

이런 토지소유율의 변화를 통해 일본인의 원마산 토지 지배는 강점기가 진행될수록 심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일병합 10년이 지난 1920년대,,,,  해안 매립과 중앙마산 개발로 마산의 지도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다음은 1930년 마산지도입니다.

1920년, 1910년, 1899년 개항 당시의  지도와 함께 올리니 비교해보기 바랍니니다. <<<

 

<1930년>

<1920년>

<1910년>

<1899년 개항 당시>

 

-----------------------------------------------------------------------------

이것으로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2차 게재' 중 '강점 제2시기(1920년부터 1930년까지)'가 끝났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음처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포스팅할 계획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1차 ; 고대부터 개항(1899년)까지

2차 ; 개항이후부터 해방(1945년)까지

3차 ;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미 완료한 '1차 게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려시대 이전 ------ 9회

조선시대----------- 4회

개항기------------- 12회

합계--------------- 25회 완료

 

'2차 게재'는 다음처럼 구성하기로 했으며 세 번째 순서를 마쳤습니다.

개항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총 32회 (26회부터 57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1시기(1911년-1920년)----------총 27회 (58회부터 84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2시기(1921년부터 1930년까지)----총 35회 (85회부터 119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3시기(1931년부터 1945년까지)

 

'3차 게재' 계획입니다.

산업화 이전시기(1945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도약 및 전성기(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체 및 쇠락기(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 본 연재는 마산도시를 연구하면서 확보한 자료를 공유하자는 목적도 있습니다.

혹시 좋은 자료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2011/12/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2011/12/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0) - 강점제2시기

2012/01/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1) - 강점제2시기

2012/01/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2012/01/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2012/01/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2012/0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5) - 강점제2시기

2012/0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6) - 강점제2시기

2012/0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7) - 강점제2시기

2012/0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8) - 강점제2시기

2012/03/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9) - 강점제2시기

2012/03/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0) - 강점제2시기

2012/03/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1) - 강점제2시기

2012/03/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2) - 강점제2시기

2012/04/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3) - 강점제2시기

2012/04/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5) - 강점제2시기

2012/04/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06) - 강점제2시기

2012/04/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7) - 강점제2시기

2012/05/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8) - 강점제2시기

2012/05/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9) - 강점제2시기

2012/05/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0) - 강점제2시기

2012/05/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1) - 강점제2시기

2012/06/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2) - 강점제2시기

2012/06/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3) - 강점제2시기

2012/06/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4) - 강점제2시기

2012/06/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5) - 강점제2시기

2012/07/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6) - 강점제2시기

2012/07/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7) - 강점제2시기

2012/07/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8)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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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건축물과 각종공사>

마산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근대식 건축물을 많이 세웠습니다.
한일병합 이전까지는 주로 목조로 지은 공공기관이 주류였습니다만 1910년경부터는 벽돌조도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20년 후반 경에는 철근콘크리트조의 근대식 건물도 선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 지은 건물들은 용도도 다양했습니다.
회사령 폐지와 3․1운동에 의한 문화정책 때문이겠지만 주조공장과 장유공장을 비롯한 산업시설은 물론,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시설도 이때 많이 지었습니다.

아래 그림의 원동무역주식회사는 1927년 8월에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로 사옥을 착공하여 1928년 4월 준공식을 가진 한국인 최초의 오피스전용건물입니다.
세련된 근대미가 물씬 풍깁니다. 밑은 현재 모습입니다.

다음 표는 1920년대에 건축된 마산의 건물들인데 이 중 마산헌병분견대 건물은 지금까지 원형이 보존되어있는 유일한 건물입니다. 몇년 전에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건물명  현위치  건축연대  유무  구조 및 양식  비고
 마산경찰서  중앙동2가  1921  무  목조1층 일식  조계지에서 이전
 마산상업학교  산호동432  1923  무  벽돌조2층 양식  마산상고
 호신학교  회원동  1924  무  벽돌조2층 양식  창신학교
 마산조면공장    1924  무    
 북마산역사  상남동  1924  무  목조1층 양식  1924년 철도개통
 마산헌병분견대  월남동4가  1926  유  벽돌조1층 양식  
 도립마산병원  중앙동  1927  무  벽돌조1층 양식  
 공립보통학교  성호동  1927  무  벽돌조2층 양식  한국인학교
 太田麻糸공장    1927  무    
 대자유치원  추산동65  1928  무  목조1층 일식  마산포교당
 원동무역(주)  남성동  1928  무  Conc2층모더니즘  
 마산우편국  중앙동  1930  무    


 

당시 원마산의 가옥은 좁은 골목 변에 지은 초가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화재가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1910년대에 개설되었던 신설도로변에는 함석지붕(亞鉛葺) 또는 기와지붕(瓦葺)으로 초가(稿葺)를 금하는 건축 제한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원마산의 점포는 대부분 잡화점․양품모자재봉판매점․미술장신구점․귀금속안경점․재봉틀점․제화점․양말제조판매업․납품업․미곡점․운송점․여관․인쇄조각사․활판인쇄소․사진업․요리업․우육점․주막․전당포․공장 등이었습니다.


1920년대 마산지역에서 일어난 각종건설공사를 알 수 있는 자료를 소개합니다.
조선건축회
(朝鮮建築會)에서 간행한『朝鮮と建築(조선과건축)』에 게재된 1920년대 마산지역에서 시행되었던 각종공사를 종합 정리해보았습니다.
「조선건축회」는 현재의「대한건축학회」와 비슷한 성격의 단체입니다.
『朝鮮と建築(조선과건축)』은 조선건축회가 1922년부터 1942년까지 간행한 월간 학회지 성격의 간행물로, 당시 한국의 건축과 관련한 내용을 다양하게 싣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용하는 마산관련 기사는『朝鮮と建築』중 ‘최근조선건축계’ 혹은 ‘조선건축잡보’ 등 전국 각지에서 시행되고 있는 건축 관련 소식을 다루는 부분에 실려 있는 것으로서 일종의 기사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표에 게재된 내용들은 준공된 건물이거나 시설이 아니고 계획 중이거나 진행 중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사를 통해서 1920년대 마산지역의 대표적인 건축공사들이 어떠했는가는 대략 가늠할 수 있습니다.

개항기 때 이미 건축해 놓은 각종 공공시설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발생한 사회적 수준의 상승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변화는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건축적 요구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에 따라 각 공공건물들은 시설확충과 건물수준 상승의 일환으로 증개축공사가 많이 전개되었는데 그 실상을 이 표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강점 제2시기 말에 추진된 마산부청과 마산우편국 이전 기사를 통해 과거 조계지에 지었던 관공서 건물의 위치적 편향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과 그에 대한 해소책으로서 중앙 마산으로 이전하게 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산상업학교와 경남선철도 및 북마산 역사(驛舍) 등의 공공시설과 원동무역과 같은 민간시설 등 이 시기에 축조된 많은 시설들이 게재되어 있지 않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마산고녀(高女)는 현 마산여고의 전신입니다.<<<

 연도 기사제목  발주처  비고 
1923  마산고녀(高女)공사계약  학교조합   橫山太十郞계약
 1923 마산고녀증축   학교조합 교정확장, 교사증축 
 1926 마산병원개축결정  경상남도   
 1926 마산고녀증축결정  학교조합  부윤이 경성가서 기채 
 1926 도립마산의원개축  경상남도  현 의료원위치로 이전계획 
 1926  마산만매립공사기공

目加田平三郞 

현 경은신마산지점앞 
 1926 마산도립의원개축  경상남도   
 1927 공립보통학교증축착수    취학아동증가 협소 
 1928 마산공회당 기념건축  상업회의소  모금 
1928  마산상수도공사 준성  마산부  연장1800m 
 1929 마산공회당, 기타 계획 마산부  공회당, 도서관, 청년회관 
 1929 마산부청 신축  마산부  주민들의 요구, 국고보조 
 1929 마산우편국개축 착수  체신국  주민불편해소, 철도용지 
 1930 마산우편국상량식  체신국  시공 ;  江波俎(강파조)
 1930 마산우편국신축공사  체신국  본관 마무리 
 1930 마산고녀기숙사신축  학교조합  러시아영사관사용
 1930 마산에 방직공장신축 

木浦南北綿業 

산호리 매축지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2011/12/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2011/12/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0) - 강점제2시기
2012/01/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1) - 강점제2시기
2012/01/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2012/01/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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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허정도 2012.02.01 11:5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찾아보면 어디 있겠지,,,

2011.12.28 00:00

강탈당한 진해와 두 지도자


지난 11월 23일 올린 글에서처럼,      <2011/11/23 -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100여년 전 진해의 중평벌판 그 평화로웠던 마을에
일본의 군대가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쳤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부랑자 신세가 된 당시 진해사람들의 정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을 것입니다.

이 참담한 상황을 전후해 민족의 최고지도층이 보여준 극단적인 두 사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주민들의 아픔에 동참한 사례로 매천 황현에 대한 이야깁니다.

당시 진해지역에서 일어난 아비규환을 두고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倭人勒奪慶南之鎭海灣………定期軍港………熊川距鎭海數百里而亦捲入港域吏民漁散如逢亂離  ; 웅천에서 수백리의 항역이 군항으로 포함되어 이속도 농민도 고기잡이도 모두 흩어져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웅천에서 수백리’라고 표현한 것은 웅천에서 거제도 끝까지에 이르는 진해만 군항지역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을사조약 1년 후인 1906년에 쓴 글입니다.
이등박문의 강압적인 통감정치가 횡횡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매천의 애국심과 기개가 더욱 잘 드러납니다.



둘째는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일본군부가 진해 11개 마을주민들을 내쫓기 직전의 일로, 왕족이자 내부대신이었던 향운 이지용이 저지른 일입니다.

그는 진해지역 토지강제수용에 대한 안건이 고종황제에게 상주(上奏)되기 이틀 전에 경상남도관찰사서리 진주군수 민병성에게 훈령을 내렸습니다.
 
「진해만을 우리나라 군항으로 예정하는 사항은 이미 정부의 협의를 거쳤으니 조속히 해당지역의 각 군수로 하여금 該 지방민에게 주지케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고종황제가 최종 결정도 하기 전에 훈령을 내린 것은 힘없는 황제를 능멸하고 일본을 향한 자신의 적극적인 충성심을 과시한 사악한 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황제의 재가가 내린 다음날인 8월 22일에는 경상남도관찰사서리에게,
「………본 훈령이 도달되면 조속히 당해 만(灣) 부근 각 군수에게 별칙(別飭)하여 적선 내 토지의 매매·교환·양여·전당·대차를 일절 엄금하라. 만약에 사호(絲毫)라도 소우(疏虞)함이 있을 때는 해당 각 군수는 중경(重警)에 처해질 것이고 귀관 또한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충분한 주의를 가하라」는 훈령을 내렸습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싶었는지, 이틀 후인 8월 24일에는 진해군수·거제군수·웅천군수에게도 같은 취지의 훈령까지 내렸습니다.

일제에 대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충성으로, 일본군부가 추진하는 진해군항 건설에 진력을 다했습니다.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러일전쟁 와중에서 굴욕적으로 체결한 한일의정서를 작성 서명하였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매천 황현은 한일병합 사실을 전해 듣고 1910년 9월 10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로써 망국의 한을 풀었고,
이지용은 훈1등 백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매천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민족의 사표가 되었고,
이지용은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표적인 친일파로 규정하였고 그가 남긴 재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습니다.<<<



2011/08/31 - [감춰진 도시이야기] - 욱일승천기를 모방했다는 진해 중원광장
2011/09/28 - [감춰진 도시이야기] - 누가 이 나무를 모르시나요?
2011/10/26 - [감춰진 도시이야기] - 아! 경화동,,,
2011/11/23 - [감춰진 도시이야기] -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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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4) - 강점제1시기

58회부터 시작된 1910년대 마산도시변화에 대한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일제 강점 제1시기인 1910년대는 식민지 한국에 대한 정책의 효율성과 보다 경제적인 잉여 창출을 위해 각종 정책을 시행한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비롯하여 교통․통신․운수 등의 사회기반시설 및 식민정책에 적절한 재정․금융체계를 정비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한국 민족자본의 성장을 막기 위해 공업을 억제하고 식량 및 원료공급을 위하여 원시산업을 육성하는 등 식민지 지배를 하기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마산의 도시변화는 신마산과 원마산이 많이 달랐습니다.

개항기 동안 급속히 형성되었던 신마산은 이 시기 동안 별 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신마산은 도시의 정체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로도 개설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건물도 많이 짓지 않았습니다.

마산에 거주했던 일본인도 1911년에 6천여 명이었는데 점차 감소하여 1910년대 중반 이후에는 내내 3,800-4600여명 사이에 머물렀습니다.
이 시기 전국 각 개항지의 인구증가율은 다른 도시에 비해 월등히 더 높았지만 마산은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개항 이후 지속되었던 투자와 고도의 인구증가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마산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남성동 해안에 대규모 매립이 있었고, 150여 년간 존속해 오던 마산창이 헐렸습니다.
뿐만아니라 마산창 부지를 중심으로 원마산의 중앙부 일대에 근대식 도로도 개설되었으며 구마산 철도역(현 육호광장 자리)의 역세권으로 도시영역이 넓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원마산의 대대적인 도시구조 변화는 이미 통감부 시대부터 시작된 식민지배 기반구축사업의 결과였습니다.

한일병합 후 10년 간,,,,
마산이 본격적인 식민도시로 진입한 시기였으며, 이 때부터 전통도시 마산포는 일제의 마수에 마구 짓밟히기 시작하였습니다.

1920년 마산지도입니다.
1910년 지도와 함께 올리니 비교해보기 바랍니니다. <<<

<1910년 마산지도>


<1920년 마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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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것으로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2차 게재' 중 '강점 제1시기(1910년부터 1920년까지)'가 끝났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음처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포스팅할 계획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1차 ; 고대부터 개항(1899년)까지
2차 ; 개항이후부터 해방(1945년)까지
3차 ;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미 완료한 '1차 게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려시대 이전 ------ 9회
조선시대----------- 4회
개항기------------- 12회
합계--------------- 25회 완료

'2차 게재'는 다음처럼 구성하기로 했으며 그 두 번째 순서를 마쳤습니다.

개항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총 32회 (26회부터 57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1시기(1911년-1920년)----------총 27회 (58회부터 84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2시기(1921년부터 1930년까지)
일제강점 제3시기(1931년부터 1945년까지)

'3차 게재' 계획입니다.

산업화 이전시기(1945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도약 및 전성기(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체 및 쇠락기(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 본 연재는 마산도시를 연구하면서 확보한 자료를 공유하자는 목적도 있습니다.
혹시 좋은 자료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2011/07/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2011/07/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2011/07/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2011/07/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8) - 강점제1시기
2011/08/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2011/08/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0) - 강점제1시기
2011/08/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1) - 강점제1시기
2011/08/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2) - 강점제1시기
2011/08/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3) - 강점제1시기
2011/09/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2011/09/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2011/09/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2011/09/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7) - 강점제1시기
2011/10/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8) - 강점제1시기
2011/10/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9) - 강점제1시기
2011/10/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0) - 강점제1시기
2011/10/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1) - 강점제1시기
2011/10/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2) - 강점제1시기
2011/11/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3)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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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3) - 강점제1시기

<1910년 말 신마산 벚나무>

일본인들이 신마산에 벚나무를 심은 것이 한일병합 직전이니 여기 나오는 벚나무는 심은지 약 10년 쯤 지난 사진입니다.

이것들이 아직 남아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창원천변 벚나무입니다.



지금은 월영동 아파트 단지로 변한 육군중포병대대 벚나무입니다.




신마산의 창원천변 야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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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640여 평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였습니다. (도로면적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각종 자료에 나오는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마산지방해운항만청이 발간한 『마산항백서』에 의하면 이 매립공사는 1911년 착공되어 1914년 7월 준공되었다고 합니다.
『마산항지』에서는 1910년 착공하여 1913년 준공되었다고 기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매립공사는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은 일본 화가산현(和歌山縣) 출신으로 대판 오백정장평(五百井長平)상점에 들어갔다가 21세가 되던 해 한국으로 왔습니다.
무역업으로 일을 시작한 박간은 1905년부터는 독립하여 수산업․창고업․목물무역업․토지매매중개업 등에 종사했습니다.

유명한 동래별장의 주인이며 당시 부산 제일의 땅 부자였습니다.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경상남도회부의장․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였고 부산토지주식회사사장․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쥐락펴락한 인물입니다.

1923년 부산을 현지 르뽀한 잡지 개벽(開闢)의 기자는
「․․․․迫間方太郞 같은 사람은 그 한사람의 부력(富力)이 10,031호 조선인의 전 부력을 당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도시사학자 손정목은
‘그가 개인적으로 한반도 전체 일본인 중 최고의 자산가였다’
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나온 일본인 중 최고부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지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경남 도내 소작지의 3.5%를 소유하였고 소작농이 2,000여 호가 될 정도의 대지주였으며 김해 진영면과 창원 대산면 동면 등 3개면에 걸친 진영농장의 주인이기도 했으니 옛 창원시의 땅도 많이 가졌던 셈입니다.

그런가하면 1896년 11월에는 부산에서 자본금 2만 5천원으로 부산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 세운 일본인 회사의 효시입니다.

유명한 '마산포 사건' 때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하도록 하였고, 그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도 했으니 마산과도 인연이 깊은 셈입니다.

유장근 교수와 함께 걸었던 도시탐방대 답사 때 무학산 어느 능선에서 그의 땅이었다는 표지석이 서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7-80년은 되었을 돌이었습니다.
후에 생길지도 모를 ‘마산근대사 박물관’에 전시하기 딱 좋은 유물이라, 보관해 놓을 생각도 했는데 무거워서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박간소유지(迫間所有地)’라고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간의 ‘마산과의 인연’은 바로 남성동 매립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개항 초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매립 때문에 생긴 충돌, 즉 앞서 포스팅한 김경덕 매축권에 대한 홍청삼(弘淸三)의 권한 계승 시비 사건(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이 있었던 이곳을 그가 매립한 것입니다.

매립의 실제 전주(錢主)는 박간방태랑이었지만 이 사업을 마산에서 직접 시행한 이는 바로 홍청삼(弘淸三)이었습니다.
홍청삼은 당시 마산거주 일본인의 거물로 현 제일여고에 있었던 신사건립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다음 그림은 제가 복원한 당시 지도인데 이 그림을 보면 쉽게 매립전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것은 매립 전인 1910년 경 도면이고 뒤것은 매립이 끝난 1920년 도면입니다.
 

 

이 때 매립된 토지의 지번과 소유자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토지는 총 52필지로 수성동115, 116, 117번지와 남성동 172번지부터 221번지까지였습니다. 수성동에 3필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 지역의 명칭을 ‘남성동 매립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매립된 52필지 중 수성동 116번지 374평과 117번지 34평, 합408평은 일본인 송원조장(松原早藏)의 소유(■부분)로, 남성동 200번지는 국유지(●부분)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매립주 박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항만의 요지(要地), 즉 초록색으로 표시한 ●부분의 남성동 200번지, 102평의 대지가 국유지로 된 사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박간이 너무 넓은 대지를 매립을 통해 일거에 소유하게 되자 그 답례로 부두용지 혹은 공공건물 부지로 총독부에 헌납했던지, 아니면 공공의 목적으로 그 땅을 정부가 매입했는지, 그저 추정만 해볼 뿐입니다.

박간 소유의 대지 49필지 7,568평은 아무런 변화 없이 전부 1936년 2월 22일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박간수웅(迫間秀雄)에게 이전되었고, 그런 상태로 해방까지 갑니다.

박간수웅(迫間秀雄)이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성이 같다는 점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미루어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승계 시켰다면 아들아닌가 라고 추정했을 뿐입니다.

다른 기록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경남지역 일본인 지주의 형성과정과 투자 사례, 1999, p.68, 한국민족문화 제14집」에 의하면 박간의 아들로 박간일남(迫間一男)이 등장하고, 그의 가계 중 박간무웅(迫間武雄)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간수웅은 혹 박간의 집안 조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이 많은 토지를 한 필지도 매매하지 않고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대지 혹은 건물을 전부 임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지역에서 발간된 자료에서는 ‘
새로 매립된 토지의 가격이 최저 7원 50전에서 최고 22원까지 토지의 위치에 따라 상당한 격차가 있었는데 이를 박간이 분양하였다’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 매립지가 해방 때까지 소유자 변경이 없었다는 것을 토지대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馬山港誌』의「馬山浦 埋立地」편에서도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매립지에 대해「․․․유감스러운 것은․․․․․․차지료(借地料)가 비교적 고율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박간이라는 일본인 단 한 사람에게 마산포에서 생업을 이어 가던 모든 사람들이 대지와 혹은 건물을 임대하여 영업을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튼 매립 후부터 이곳은 원마산 상권의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것처럼 마산만에는 박간 매립 전부터 여러 차례 매립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군부 혹은 공공기관에서 시행했거나 임의의 매립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박간의 매립은 민간인이 이윤을 목적으로 법적허가를 득하여 매립한 사례로 최초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미 포스팅한 1910년경 마산포 토지소유상태를 통해 이미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은 확인했습니만 본 매립사업 이후 일제의 원마산 상권 장악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매립은 일제가 항만도시 마산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식민정책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수탈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때 매립된 남성동 해안에는 석축안벽(石築岸壁)과 석축돌제(石築突堤) 등의 항만시설이 조성되었고 소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과 물량장을 갖추었습니다.
이 부두는 어선과 소형 화물선들의 정박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통영․거제 등 남해안 일대를 운항하는 연안 여객선 부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립지에 신설된 도로 사이에는 원정우편소(元町郵便所, 현 남성동우체국)를 시작으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매립하고 10년 쯤 지난 1924년, 이곳에 다음과 같은 길이 63.6m의 사석방파제가 설치되었습니다.

제 나이 열 두세살 쯤,
이 방파제 위에서 낚시를 했는데 팔뚝만한 뽀드라치를 한마리 낚아 올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2011/07/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2011/07/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2011/07/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2011/07/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8) - 강점제1시기
2011/08/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2011/08/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0) - 강점제1시기
2011/08/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1) - 강점제1시기
2011/08/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2) - 강점제1시기
2011/08/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3) - 강점제1시기
2011/09/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2011/09/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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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2) - 강점제1시기

-한일병합 직 후 제작된 마산인근 군사극비 지도-

<마산 (군사극비)>

1916년 / 육지측량부 / 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 / 1 : 50,000 / 1/50,000지형도 / 국립중앙도서관

확대해 보았습니다.


이 지도는 1906년에 측도하고 1921년에 축도제판(縮圖製版)하여 같은 해 11월 25일 발행된 지도입니다.

제작자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육지측량부․참모본부가 동시에 표기되어있으며, 제목은 「軍事極秘 (戰地ニ限リ極秘)」로 되어 있고 그 아래 진해만요새근방9호(共三十一面), 오만분일지형도 마산5호(共十五面)라고 기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용 지도인 것 같습니다

이 지도와 관련된 기록을 소개합니다.
1986년 일본인
청수정부(淸水靖夫)가 쓴 『日本統治機關作製にかかる朝鮮半島地形圖の槪要』라는 책에 나옵니다.

 

조선반도 1/50,000지형도는 한일합방 이전 일본 육군에 의해 제작되어 병합 후 약도(제1차 지형도)로서의 형태로 햇빛을 보게 된다.

합병 후, 약도에 손을 가하여 지형도(제2차 지형도)가 작성되고 삼각측량 ․ 지형 측량 후, 기본도측도(제3차 지형도)가 완성되어 이것이 제2차대전종료까지 사용되었다. 이 지형도는 또 미국육군지도국(Army Map Survice)이 전략 용으로 전쟁 전후에 걸쳐서 복제한 지도이기도 했다.

1/50,000 기본도 측도(지형도)와 동시에 1/25,000와 1/10,000지형도도 주요지역에 제작이 진행되었다 ․․․․․․․

조선의 기본도는 1/50,000지형도(일본도 같음)였었는데 약간씩 내용이 다른 3종류의 1/50,000지도가 제작되어 있었다. 제1차의 지형도는 통칭 약도라고 말하는 한일합방이전에 제작된 지형도이고, 제2차 지형도는 합방 후 약도의 수정 형으로 제작된 지형도로서 내용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제3차는 삼각측량의 위치의 기준을 둔 기본도이다 ․․․․․․․

기본도(제3차의 지형도)정식 명칭은 「오만분일지형도」라고 한다. 한반도에 삼각점 망이 완성되어 그 결과에 기초를 두고 작성된 지형도이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사이에 전역이 완성되었다. 각 년차의 측량 도면 수는 지형도. 간행목록. 기타에서 조사한즉 전체가 727면이지만 측량․지도백년사에 있는 기재는 722면으로서 5면의 차이가 있다․․․․․․․

1926년 이래 비밀지도 구역 중 특수한 기밀지구에 무관한 지역은 등고선, 표고숫자를 삭제하고 해안 등의 변지형(變地形)의 상세를 생략한 교통도를 간행했다.

 

위의 기록을 읽어보면 이 지도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완성된 제3차 지형도인 기본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사극비’라고 기재된 것은 그 후 일본군에서도 이 지도를 사용한 결과로 보입니다.

1:50,000 지도이기 때문에 세밀한 도시 공간 변화를 알 수는 없지만 1916년 동시에 제작된 1:10,000 지도「馬山」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1:10,000 지도「馬山」에서는 표기할 수 없었던 마산부 범역 밖의 상황을 알 수 있어서 요긴한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마산부의 북쪽으로 칠원을 거쳐 대구로 가는 길, 함안을 거쳐 진주로 가는 길, 그리고 창원을 지나 부산으로 가는 길이 1905년 개통된 마산선 철도와 함께 표시되어 있으며 중리․칠원․창원․진영지역까지 연결되는 대소 도로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도로 사이사이로 형성되어 있는 취락도 표기가 잘 되어 있어서 당시 마산 근방의 사정까지 잘 알 수 있는 지도입니다.

도시를 지나는 간선도로, 특히 석전동에서 창원읍 쪽과 줄이 방향으로 나누어지는 삼거리가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고, 공사를 막 끝낸 남성동 지역의 매립지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명으로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명칭들이 죄다 눈에 보입니다.
교방리, 회원리, 산호리, 상남리, 자산리, 완월리, 신월리, 봉정리(현 봉암동)까지 말입니다.

특이한 것은 봉정리 앞 간석지, 즉 현재의 마산자유무역 지역이 일부가 매립된 표기입니다.
합방 전후에 발간된 다른 자료들과 비교해 보면 이 지역 매립은 합방 직후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래 동안 봉암동에서 거주했던 분을 만나 확인했더니 “해방 이후 봉암동 지역에서는 이 매립지를 ‘청수둑안’이라고 불렀다”고 하면서 이 매립지의 소유자는 일본인 ‘청수’였다고 했습니다.

위 지도에 나오는 범위를 현 위성사진으로 한번 볼까요?<<<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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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8) - 강점제1시기


<희미한 지도 석장>

한일병합 직후에 제작된 희미한 지도 석 장을 소개합니다.
스캔 작업을 하면서 원품을 자세히 보았기 때문에 저는 지도의 내용을 알지만 모니터로는 잘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소개하지 않고 넘길까하다가 ‘그래도’ 싶어서 포스팅합니다.


<馬山各國居留地平面圖(甲)>

1911년 / / / 1 : 4,000 / 朝鮮各國居留地平面圖 / 부산대학교 도서관

 
마산뿐만 아니라 인천을 비롯한 전국의 각국 거류지 평면도를 집성해 놓은 도면집에 수록되어 있는 지도입니다.
이 지도에는 각국 별 토지 소유 구분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데 당시의 소유는 각 국가의 이니셜을 따 오스트리아․헝가리(A), 영국(B), 독일(G), 러시아(R)의 표시가 되어 있으며 표시가 안 되어 있는 것은 모두 일본인의 토지입니다.
제작 연도는 1911년이지만 도면의 내용을 보면 개항 직후의 상황인 듯 합니다.
일본인의 토지는 범례에서 미경매지․각국거류지회 차지(借地)․일본관청 차지(借地)․일본거류민단 차지(借地)․일본사인 차지․외국관청 차지․외국사인 차지 등이 구분 표기되어있습니다.
지도 발간 당시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고지대까지 계획도로가 표기되어 있으며 범례에서 계획도로는 색채로 구분한다고 적혀있습니다.

<馬山各國居留地平面圖(乙)>
1911년 / / / 1 : 4,000 / 朝鮮各國居留地平面圖 / 부산대학교 도서관


위「馬山各國居留地平面圖(甲)
」와 동시에 수록되어있는 지도입니다.
앞의 지도가 국가별 토지 소유를 구분한 지도인데 반해 이 지도는 각 필지의 지번이 ‘갑’지구와 ‘을’지구 별로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창원천의 최상부 고지대와 세관부지는 지호무(地號無, Without Number)라고 기록되어 지번이 없습니다.
다른 표기는「
馬山各國居留地平面圖(甲)」와 동일합니다.

 

<馬山府全圖*>
1912년 / / 馬山府 / 1 : 250,000 / 마산부세일람 / 고려대중앙도서관


이 지도는 당시 마산이 외부와 연결되는 도로망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부군청(府郡廳)소재지를 비롯하여 지역명․철도․도로․하천․부군(府郡) 및 면 경계․항구(錨地)가 범례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지도에는 남쪽 방면으로 진동을 거쳐 진주와 고성으로 가는 길과 구산면으로 가는 길이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칠원을 거쳐 대구로 가는 길과 함안을 거쳐 진주로 가는 길, 그리고 창원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길이 1905년 개통된 마산선 철도와 함께 표시되어 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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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복산 2011.07.25 20:0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런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었군요. 우리같은 사람들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매우 흥미있는 자료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당시에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했고 어떤 속샘이 있었나 하는 정도는 짐작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인 것 갔습니다. 박사님의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 허정도 2011.07.26 23:42 신고 address edit & del

      별 내용도 없는 이야긴데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2011.07.1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마산시의 시작>

사라져버린 ‘마산시’,,,,
오늘은 그 ‘마산시’의 시작을 알아보겠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였습니다만 이 글은 행정구역명칭으로서의 ‘마산’에 대한 내용입니다.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1895년 을미개혁으로 태종13년(1413년) 이후 480여 년간 지속되어온 8도제가 폐지되고 부제(府制)가 시행되었습니다.
전국에 23부를 두고 336군을 부의 관할로 두어 종래의 부, 목, 군, 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던 하급행정구역들을 군으로 통칭하였습니다.
이때 마산은 진주부 관할의 21개 군 중 창원군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부제(府制)의 인위적인 행정구역획정이 마찰을 빚어 실시 1년 3개월 만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1896년 병신개혁(丙申改革)으로 13도제가 채택되었습니다.
이때의 13도는 종래의 8도를 바탕으로 경기․강원․황해의 3개도를 제외한 나머지를 남북 양도로 분할한 것이었는데 오늘날의 도(道) 구역은 이때 결정된 것입니다.
13도 밑에는 7부(광주․개성․강화․인천․동래․덕원․경흥), 1목(제주), 331군을 두었는데 마산은 경상남도 창원군에 속했고 경상남도의 수부도시는 진주였습니다.

3년 뒤인 1899년(광무3년), 창원군은 개항에 따른 조치로서 창원부로 승격되어 창원감리서를 두었고 개항장의 관리업무를 감리가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3년(광무7년)에 창원부는 다시 창원군으로 바뀌었는데 이 때 전국은 3부, 1목, 339군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는 통감부와 이사관 관제를 발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00년에 설치된 일본영사관을 1906년 9월 1일자로 이사청으로 바꾸고 일본 거류민에 대해서는 치외법권적 행정권을 행사하는 거류민단제(居留民團制)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조치에 따라 우리 정부는 같은 해 9월 24일 개항장의 감리서를 폐지하고 창원군을 다시 창원부로 개칭하여 감리의 소관 업무를 부윤에게 인계하였습니다.

여기까지의 복잡한 변화가 한일병합 이전까지 일입니다.

한일병합으로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통치기구에 관한 일련의 관제(官制)를 발포하면서 강점 직후의 과도기적 체계를 발포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 개청 하루 전날인 1910년 9월 30일이었습니다.

이 때 종전 13도 1수부 11부 317군에서 수부였던 경성부(京城府)를 격하하여 13도 12부 317군으로 개편하였습니다.
이 개편에서 마산은 이전의 창원부에서 마산부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됩니다. 마산이 최초로 행정구역명칭으로 되었습니다. 경남에는 부산과 마산이 부(府)가되었습니다.

이전의 11개 부(府)는 모두 개항장 혹은 개시장이었던 곳이었지만 다시 개편된 부(府) 12개는 모두 통감치하의 일본이사청과 일본거류민단이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부(府)의 명칭, 예컨데「마산부」는 ‘마산’이사청과 ‘마산’일본거류민단의 ‘마산’을 그대로 딴 것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1908년 마산이사청으로 건축하여 1914년 마산부청이 된 건물 사진과 당시 이 건물이 있었던 자리(노란 점)입니다. 지금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터는 옛 창원군청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정문 기둥의 현판을 자세히 보면 '馬山府廳(마산부청)'이라는 한자가 보입니다.


부청은 1910년 10월 1일 개청하였습니다.
이사청은 이 날로 폐지되고 전국의 이사청 청사가 각각의 부청 청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마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창원부가 마산부로 바뀌었지만 호칭이 달라진 것 외 지방행정단위로서의 성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1899년 시행되었던 마산의 개항도 1911년 1월 1일 진해 일본군항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폐지되고 개항과 함께 시작된 각국공동조계지도 1914년 3월 31일자로 폐지되었습니다.
한국 땅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조계지 폐지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합방 후 3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식민통치의 틀이 잡히자 총독부는 본격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대대적으로 지방행정을 개편합니다.
1913년 10월과 1914년 4월에 걸쳐 단행된 이 개편은 1914년 3월 1일과 4월 1일을 기해 일제히 실행에 옮깁니다.

마산은 이 지방제도 개혁 때 경성․인천․군산․목포․대구․부산․평양․신의주․원산․청진․진남포 등과 함께 관하에 면(面)을 가지지 않는 지방행정의 기초단위로서의 부(府, 지금의 시)가 되었습니다.
이 때 결정된 마산부의 관할구역은 마산부의 각국거류지와 창원군 외서면의 완월리․신월리․월영리․자산리․서성리․성호리․중성리․성산리․동성리 및 오산리․상남리․교방리.회원리의 일부였습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동쪽으로 마산만 해안선을 경계로 서쪽으로 대곡산과 무학산 정상, 남쪽으로 밤밭고개, 북쪽으로 오동동다리를 경계로 노비산까지의 범위였습니다.

그러다가 1942년 9월 30일자로 마산부의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됩니다.
창원군 내서면의 교방리·회원리·산호리·석전리·양덕리와 창원면의 봉암리, 구산면의 가포리 등 7개리가 마산부에 편입됨으로써 마산부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이때의 마산부가 해방 4년 뒤인 1949년 지방자치법제정 때 부(府)에서 시(市)로 바뀌면서 마산시가 되었습니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마산의 행정구역 개편은 이처럼 창원군(1895년)-창원군(1896년)-창원부(1899년)-창원군(1903년)-창원부(1906년)-마산부(1910년)-마산부(1914년)-마산시(1949년)로 바뀌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와 같은 곡절을 겪었던 마산시는 2010년 7월 1일 진해 창원과 합쳐 창원시가 되었습니다.
마산부로 시작된 독립 시(市)의 백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죠.

‘마산시’가 없어진지 그새 1년이 되었습니다.
평생 ‘마산시 회원동...’으로 시작되는 주소를 사용했던 저로서는 제 의지와 상관 없이 갑자기 ‘창원시.....’로 시작되는 주소를 사용하자니 아직 뭔가 어색합니다.
별로 내키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마산 창원 진해가 아닌 다른 이름, 예를 들어 ‘경남시’였다면 ‘마산’이 없어져버렸다는 느낌보다 세 도시가 통합되었다는 느낌이 더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통합시의 명칭을 세 도시 중 하나였던 창원시로 결정해버린 것은 사회통합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름을 잃은 진해와 마산시민들의 상실감 때문에 말입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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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해본 일입니다. 2005년 경남도민일보 입사 후에도 간혹 이일 저일 만졌지만, 기획 단계부터 개입해 마무리한 일은 아주 오랜만이었습니다. '마산YMCA회관 건축설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1980년 건축사 시험..

고지도로 보는 창원9. - 창원부 輿地圖

▮ 고지도로 보는 창원9. - 창원부 여지도(輿地圖) ● 昌原府 輿地圖(古14709-68)輿地圖》(古4709-68)/ 필사본(회화식) 여지도는 총 6책으로 구성된 전국 군현지도책으로 제1책에 遼薊關防地圖와 盛京輿地全圖, 제6책..

고지도로 보는 창원8. - 칠원현 비변사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8. - 칠원현 비변사지도 ● 漆原縣 備邊司印方案地圖(奎12154)/ 필사본(방안식) - 지도개요 : (제작시기: 1745~60년 (영조 36), 비변사 보관 지도 읍성의 위치인 읍치를 중심으로 주요지점간..

핵발전소 이대로 좋은가? - 4. 낮은 지진, 원전은 안전한가?

잦은 지진, 원전은 안전한가? 최근 국정감사에서 지난달 경북 경주 강진에 따른 원자력발전소 안전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이에 따라,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에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경주지진이후 원전 안전성 점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