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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산22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7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10) "진짜 본토박이" ------------------------- 배○○ 1941년생 마산회원구 회원동 604-2 날짜 : 2015년 1월 16일 장소 : 자택 - 반갑습니다.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 얘기부터 기억나시는대로 좀 해 주시지요. = 바로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자랐지요. 6.25전쟁이 났을 때 내가 아홉 살 먹었는데 진해 웅천으로 피난을 갔거든요. 회원국민학교 입학 하고는 바로 피난을 갔어요. 거기로 피난 갔다가 석달만에 돌아왔어요. 그때는 여기가 전부 초가집이고 완전히 농촌이었지요. 농사 짓고 닭 키우고 소 키우고 완전히 농촌이었지요. 그래 기억나는 게... 군인들이 논에 엎드려 숨어 있고... 우리가 수류탄도 .. 2021. 3. 22.
마산YMCA회관 설계 오랜만에 해본 일입니다. 2005년 경남도민일보 입사 후에도 간혹 이일 저일 만졌지만, 기획 단계부터 개입해 마무리한 일은 아주 오랜만이었습니다. '마산YMCA회관 건축설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1980년 건축사 시험에 붙어 다음 해 6월 마산 창동에서 건축사 사무소를 열었습니다. 개업 후 적지 않은 건축물을 설계하였습니다. 볼만한 건물도 간혹 있었지만 부끄러운 건물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직업으로서의 건축설계는 천직처럼 제 몸에 착 붙었습니다. 재미있게 만족하며 일했습니다. 2005년 봄 뜻하지 않게 언론사 대표가 된 후 손을 놓았다가 '마산YMCA회관 건축설계' 때문에 다시 펜과 종이를 들었습니다. 작년 늦여름이었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었지만 워낙 몸에 배였던 터라 낯설지는 않았습.. 2017. 6. 1.
김형윤의 <마산야화> - 52. 돝섬의 전설 52. 돝섬의 전설 돝섬은 마산 앞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 일명 월영도(月影島)라 부르기도 한다.(행정구역 상 월영동에 속해 있기 때문) 1910년경에는 인가가 불과 7,8호였으나 지금은 20여 호. 아동 10여 명의 초등학교 분교장이 있고, 주민은 대개 영세 어민으로 섬의 동남 비탈에 보리와 채소를 가꾸기도 한다. 멸치 어장막이 있어 신·구마산 어판장과의 사이에 배의 왕래가 잦고 여름 한 때는 낚시꾼들과 피서객들이 득실댄다. 섬의 형상은 서쪽에서 바라보면 오리(鴨)가 먹이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인도산 코브라가 염소(羊)를 삼킨 것과 흡사하다. 일본인들은 이 섬이 일본의 비파(琵琶)와 같다 하여 그 어음(語音)에 비겨 미화(美和)라 했으며 마산만의 공원지로 지정하고 매번 벚꽃 묘목을 심었으나 바.. 2015. 10. 19.
한국100명산. 3. 최치원의 수양지 무학산 ♬ 예상치 않았던 무학산 100명산 탐방 : 둘레길만 걷던 초보등산꾼들이라 원거리 원정일정을 잡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예정대로라면 포항 내연산은 8월말에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8월의 100명산 원정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빼먹기를 쉽게하면 앞으로 애로사항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심 기회가 닿으면 무학산이라도 오를 기회가 있다면 그 달의 건수는 채워야지 하는 생각에 원정기념 현수막을 넣어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지지난주에 회원 모두가 참석하는 흔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잘되었다 싶어서 "오늘은 모처럼 모두 참석했는데 정상한번 가입시더"라고 의견을 내어서 100산중의 하나인 무학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 무학산 지명의 유래 무학산은 마산 중심가를 둘러싸고 있.. 2013. 9.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3) - 강점제3시기 1937년 / 馬山府 / 馬山府 / / 觀光の馬山 / 우무석 所藏 1937년 마산부에서 제작한 관광안내용 책자에 첨부된 지도입니다. 이와 똑 같은 형태의 지도가 다른 도시에서도 발간되었습니다. 이 자료의 소장자는 시인이자 불휘기획 대표인 우무석 선생입니다. 마산역장을 역임한 우 시인의 외조부 문판개 선생의 유품이라고 합니다. 지도의 영역은 당시 마산부 경계를 기준으로 제작한 것으로서 남쪽으로 자복포의 육군중포병대대(옛 한국철강 터)에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현 상남동 일대까지입니다. 포켓 형식으로 된 안내서의 표지에는「觀光の馬山」이라는 제목과 함께 산을 배경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 벚꽃이 만개한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명주(銘酒)’라고 적힌 일본 청주 통을 그려 놓아 당시 마산의 관.. 2013. 1. 7.
지금와서 시간 없다는 마산해양신도시 10년 넘게 끌어온 마산해양신도시 문제가 최종안 결정을 앞두고 진통이 큽니다. 해양신도시가 들어서는 신마산 일대의 주민들은 최근 ‘주민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반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회의도 하고, 집회도 하고, 유인물도 뿌리고, 급기야 창원시청 정문에서 합의집회를 가진 후 시장실에 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이 사업에 반대의견을 낸 ‘해양신도시 반대 시민대책위원회’도 연일 바쁩니다. 최근에만 해도, 창원시 해양개발사업소와 네 차례의 간담회를 가졌고, 갯벌조성 가능성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전문가 토론회도 가졌습니다. 수시로 회의도 열고, 시민들을 상대로 해양신도시의 부당성을 알리고, 언론에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20일(월) 오후에 가진 네 번째 간담회에서도 창원시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섬형.. 2012. 2.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 2011. 9.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마산시의 첫 지도- 1913년 / 조선총독부官房總務局 / 조선총독부 / / 조선총독부 관보호외 / 서울대 중앙도서관 이 지도는 1914년 조선총독부가 단행한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목적으로 1913년 12월 29일자로 발행한 것입니다. 총독부령 제111호로 도의 위치와 관할구역 그리고 부(府)와 (郡)의 명칭 및 관할구역 등에 관한 조정명령이었습니다. 이 때 개편된 마산부가 사실상 마산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지도는 마산시의 첫 지도가 되는 셈입니다. 이 행정구역개편에서 마산부에는 관할구역으로 마산포각국거류지일원, 외서면의 완월리, 신월리, 월영리, 자산리, 서성리, 성호리, 중성리, 성산리, 동성리 및 오산리, 상남리, 교방리의 일부가 포함되었습니다. 지명을 이렇게 소개하였지만 사실은 앞서 포스팅.. 2011. 8. 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사라져버린 ‘마산시’,,,, 오늘은 그 ‘마산시’의 시작을 알아보겠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였습니다만 이 글은 행정구역명칭으로서의 ‘마산’에 대한 내용입니다. 1895년 을미개혁으로 태종13년(1413년) 이후 480여 년간 지속되어온 8도제가 폐지되고 부제(府制)가 시행되었습니다. 전국에 23부를 두고 336군을 부의 관할로 두어 종래의 부, 목, 군, 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던 하급행정구역들을 군으로 통칭하였습니다. 이때 마산은 진주부 관할의 21개 군 중 창원군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부제(府制)의 인위적인 행정구역획정이 마찰을 빚어 실시 1년 3개월 만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1896년 병신개혁(丙申改革)으로 13도제가 채택되었습니다. 이때의 13도는 종래의.. 2011. 7.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1910년대에는 마산에 도시변화가 많이 없었던만큼 건축공사도 많이 없었습니다. 종교시설과 일부 교육시설만 약간 들어섰습니다. 개항기에는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한 관아시설들이 주로 건설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개항기에 지어 놓은 건물들의 증․개축이 많았으며 관아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업용 건물이 많았습니다. 또한 목조건축물이 많았던 이전과 달리 이 시기부터는 벽돌을 이용한 조적조 건축물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신마산에 집중되었던 건물들이 서서히 원마산 쪽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 장군천 이북에 지방법원지청이 들어섰고 현 마산시청 자리에 전기회사가 들어오는 등 공공건물들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일대(옛 마산시청부근)가 신마산의 마산포 진출이라는 의미 외에 마산포와 신마산.. 2011. 7.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7) - 개항이후 개항 직후 시작된 이 도시의 생성과 변화를 31회에 걸친 포스팅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처음 던졌어야할 질문을 뒤늦게 던져봅니다. 그들은 왜 '창원군 외서면 월영리와 신월리 해안'을 개항지로 삼았을까요? 근대 마산의 시작은 개항이었고 개항지는 마산포 남쪽 2㎞지점의 월영리와 신월리 일대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조계지였던 이곳은 ‘신마산’이라 불렀고 그들이 부른 ‘신마산’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항지로 선택되었던 월영리와 신월리,,,,, 그곳은 마산도시의 최남단으로 지형상 말단부였습니다. 동쪽은 합포만, 서쪽은 무학산이 막아 북쪽 마산포 쪽으로만 시역의 확장이 가능했던 좁은 공간이었습니다. 자연조건이 이러했슴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조계지로 선정되었던 이유는 ① 외부와의 연결은 물론 당시에 문물교류 루.. 2011. 5.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6) - 개항이후 도시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도시내부의 변화도 많았지만 도시외부의 변화도 있었습니다. 당시 마산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길은 크게 세 갈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동쪽으로 창원․덕산․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약 120리 길이 있었는데 바로 지금 진영을 거쳐 부산으로 연결되는 국도입니다. 이 길이 1909년 우마차가 쉽게 통행할 수 있는 신작로로 개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넓은 길은 없었습니다. 많은 물량을 실어 나를 수레도 없었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넓은 도로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청일과 러일 양 전쟁이 벌어지면서 일본군이 개통시킨 군사도로 경의․경인․경원선이 최초였으며 전국적으로 일반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이 도로의 확장공사는 매우 이른 .. 2011. 5. 2.
만날고개의 옛길을 걷다 3월 5일, 오후 2시.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습니다. 유장근 교수의 마산도시탐방대 열 다섯번째 길, 모두 스무사람 쯤 만났습니다. 오늘 탐방지는 만날고개. 만날재의 전설과 옛 주막, 아기무덤터와 계비, 일제기 군용지 표지석과 일본인 유지들의 사유지 경계석, 그리고 월영마을 옛 신당,,,, 무심코 지나쳤던 만날재에 끝도 없이 펼쳐진 역사의 향연에 일행은 몸을 맡겼습니다. 이 글은 그 중 옛날 월영리에서 만날재로 넘어갔던 오래된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만날재공원을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 올라가지만, 이 길이 뚫리기 전까지 만날재로 가는 유일한 길은 당산마을 한복판의 좁은 길이었습니다. 당산마을은 산복도로 윗쪽 마을 이름인데 마을에 당산나무가 있어서 지으진 이름.. 2011. 3.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3) - 개항기 흰 천 위에 그려진 세 개의 광산 1900년 직후(규장각추정)/ 외국인(규장각추정)/ / / / 규장각 110년 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지도 한 장 소개합니다. 마산포 주변의 마산만 일대 지도인데, 흰 천 위에 그려져 있으며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규장각의 설명에 의하면, 제작자는 알 수 없지만 지도에 러시아 로마노프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도장이 찍혀 있고 설명이 영어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영어권 국가에서 작성한 것 같으며, 제작시기는 마산포 사건과 마산개항시기 등으로 미루어볼 때 1900년 직후라고 했습니다. 로마노프왕실 문장 옆에 적힌 정대유(丁大有)는 이 지도가 제작될 당시에 활동했던 서화가(1852~1927)입니다. 매화를 많이 그렸고 예서(隸書)와 행서(行書)에 능했던 분입니다. 그.. 2010. 9. 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 - 개항기 오늘부터 개항기 때 제작된 마산지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지도의 기본정보 표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는 지도의 제목이며 제목 아래에 표기한 것이 지도의 기본 정보입니다. 표기 순서는「제작연도 / 제작자 / 발행처 / 축척 / 수록처 / 소장처」순입니다. 기록이 불가능한 부분은 해당 칸을 비워「/ /」로 표기하는데 지도제목이 동일한 경우에는 지도명칭 뒤에「*, **, ***」를 붙여 구분하겠습니다. 1899년 / 上野亮 外 / 일본해군 / 1 : 49,054 / / 일본국회도서관 일제는 일찍부터 마산을 자신의 식민지 주요 거점으로 눈독 들여왔었습니다. 그러므로 원산․부산 등과 마찬가지로 마산지역의 측량과 지도제작도 진작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도는 일제가 침략을 목적으로 한반도를 측량하기 시작한 직후 제작된 것입.. 2010. 8. 23.
마산에 눈 내렸던 날 기억하십니까? 그제가 초복이었습니다. 많이 더우시죠? 추워 떤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여름 한복판입니다. 지난 겨울 마산에 눈 내렸던 날 기억하십니까? 눈 땜에 집에 갇혔다가 사진을 몇 장 찍어두었습니다. 더위 식히는데 도움될까 싶어 올려봅니다. 매화 꽃봉오리 맺혔던 자리에 굵은 매실이 달려 한 달 전에 따냈습니다. 그새 눈내린지 반 년이 지났습니다. 세월 참 빠르네요,,, 저만치 크리스마스가 또 다가옵니다. 어떻습니까, 더위가 조금 가셨습니까? 한 더위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유난히 덥고 비도 많을 거라는데 올 여름 건강하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2010. 7. 21.
'내 고향 마산'이 없어집니다 '2010년 6월 30일 밤 11시 10분입니다' 내 고향 마산.... 까마득한 시절에 내면화되어 떼놓을 수 없는 ‘내 고향 마산....’ 인간의지로 불가능한 일이 ‘탄생’이라면 ‘내 고향 마산’ 역시 ‘탄생’처럼 숙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밤이 지나면 나의 숙명 ‘내 고향 마산’이 없어집니다. 내일부터 누가 날더러 어디 사느냐고 물으면 무어라 대답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고속도로 이정표에서도, 지도 속에서도, 주소를 적을 때도 내 고향 ‘마산시’는 내일부터 없어집니다. 수몰로 송두리째 고향을 잃은 사람들보다는 낫겠지만, 텅 빈 가을들녘처럼 가슴 깊은 곳이 허허롭습니다. 말로는 마산 마산하면서도 ‘내 고향 마산’이 갖는 의미와 ‘내 고향 마산’이 내게 주었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던지.. 2010. 6. 30.
어디, 이런 사람 한 번 찾아 봅시다 6.2 지방선거가 절정입니다. 통합 창원시의 미래는 이번 선거에서 선택받는 공직자들에 의해 크게 좌우됩니다. 그만큼 중요한 선거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60년대 이후 급격히 진행된 인구 도시집중현상은 도시의 양적 팽창이라는 물리적 변화와 함께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도시시설 사이에 해결하기 어려운 수많은 문제를 유발시켰습니다. 도시의 규모가 비대해진 대도시일수록 문제의 정도는 더 많고 더 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도시를 이끌어갈 공직자의 도시인식과 도시에 대한 철학은 다른 어떤 덕목보다 우선 검증되어야할 조건일 수 있습니다. 공직자의 도시철학은 그 도시의 경제 발전과 문화 품격을 상승시킬 뿐만 아니라 당장에 시민생활의 질과도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브라질 쿠리티바의 자이메 레르네르 시장을 통.. 2010. 5.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고운(孤雲) 최치원은 857년(헌안왕 1년) 6두품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18살에 당나라 조정이 외국인을 등용하기 위해 설치한 빈공과에 급제하여 당나라에서 여러 관직을 지냈습니다. 「당서예문지(唐書藝文志)」에 이름과 저서가 실릴 만큼 학문이 출중했습니다. 28살에 신라로 돌아 온 고운은 한림학사에 임명되는 등 공직을 맡기도 했으나 국내 사정이 복잡해 자신의 경륜을 펼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부패한 진골귀족과 지방세력 간의 혼란에 나라의 근간이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대한 좌절감과 정치에 대한 실망으로 벼슬을 내던진 고운은 은거를 결심합니다. 경주, 영주, 지리산 쌍계사, 부산 해운대, 울산 등 전국 곳곳을 주유하다가 경치 좋고 학문하기도 좋다싶어 이곳 합.. 2010. 4. 26.
마산시 회원동 500번지 11월 28일(토) 오후,「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네 번 째 길을 걸었다. 마산시립박물관 앞마당에서부터 길을 열었다. 벌써 네번째라 낯이 익었고, 처음보는 얼굴도 있었다. 성덕암→회원현성→환주산 정상망루→성문→일제기 화장장터를 거쳐 한강 정구를 기려 세운 관해정을 둘러본 뒤 산복도로를 길게 걸어 회원동으로 왔다. 회원동 코스는 화란주택→회원천→정자나무와 비석들→회원동 500번지 골목길→철도시장→구 창신학교 터까지 였고, 이어서 북마산역 터와 노비산을 끝으로 네 번째 일정을 마쳤다. 오후 1시 반에 시작된 도시탐방은 5시 15분, 모두 3시간 45분 걸려 끝났다. 걸은 길은 대략 5-6킬로미터 정도. 스스로 원해 걸은 탓인지, 어느 한 사람 다리 아프다 투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학생, 공무원, 주부,.. 2009. 11. 30.
술과 꽃의 도시 《유장근교수의「도시탐방대」에 참여해, 한 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마산의 술 공장과 벚꽃 휘날렸던 창원천을 둘러보니 일제기 ‘술과 꽃의 도시’로 명성이 높았던 ‘그 옛날 마산’이 생각나 이 글을 포스팅한다》 특정한 도시를 한두 가지 단어로 정확히 규정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도시건 그 도시 특유의 자연조건과 문화조건을 이용해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한다. 부산하면 항구, 진해하면 벚꽃, 춘천하면 호수 등과 같은 의미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경의 마산은 ‘술과 꽃의 도시’였다. - 술의 도시 마산 - 개항 직후인 1904년 최초로 아즈마(東)양조장이 설립된 이후 꾸준히 성장했던 마산의 양조산업은 1928년에 부산을 제치고 이윽고 국내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2009. 11. 2.
'마산 해양신도시' 지금 중단해야한다 오는 11월 착공예정인 마산 앞바다 해양신도시는 재고되어야 한다. 이곳에는 마산도시를 바다와 단절시킬 고층 아파트 1만 가구가 계획되어 있다. 아파트 외에 다른 구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계획은 이로움보다 해로움이 많을 것 같다. 바로 잡아야 한다. 석 달 남았으니 아직 기회는 있다. 선진해안도시를 보라, 생산적이면서도 바다를 즐길 수 있는 고품격 수변공간이 얼마나 많은지. 가포에 항만공사를 하면서 발생할 준설토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도시정책이니 지금이라도 계획을 바꾸어야 한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첫째, 현 마산 도시상황에서 1만 가구의 대규모 아파트 건설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마산 곳곳에서 추진되는 재개발 사업은 총 48개 지역, 3만7000 가구이다. 이들.. 2009.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