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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52. 돝섬의 전설

52. 돝섬의 전설

 

돝섬은 마산 앞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 일명 월영도(月影島)라 부르기도 한다.(행정구역 상 월영동에 속해 있기 때문)

1910년경에는 인가가 불과 7,8호였으나 지금은 20여 호. 아동 10여 명의 초등학교 분교장이 있고, 주민은 대개 영세 어민으로 섬의 동남 비탈에 보리와 채소를 가꾸기도 한다.

멸치 어장막이 있어 신·구마산 어판장과의 사이에 배의 왕래가 잦고 여름 한 때는 낚시꾼들과 피서객들이 득실댄다.

섬의 형상은 서쪽에서 바라보면 오리()가 먹이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인도산 코브라가 염소()를 삼킨 것과 흡사하다.

 

일본인들은 이 섬이 일본의 비파(琵琶)와 같다 하여 그 어음(語音)에 비겨 미화(美和)라 했으며 마산만의 공원지로 지정하고 매번 벚꽃 묘목을 심었으나 바다의 염풍(鹽風)관계(?)로 자라지 않아 실패한 적이 있다.

이 섬을 어찌하여 돝섬(猪島)이라 하였는지 이 섬에 얽힌 오랜 전설을 소개한다.

옛날 김해 가락왕의 총애를 받던 미희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홀연 그 흔적이 없어졌다.

왕은 낙담 번민한 끝에 사람을 사방에 파송하여 상금을 걸고 수색을 벌였는데, 우연히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던 어부가 골포(骨浦, 마산의 古名) 앞바다의 조그마한 한 섬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절색 미녀를 봤노라 하기로 왕에게 상주했다.

왕은 급히 특사를 파견하였더니 과연 이 섬의 등()에 미희가 배회하고 있음을 보고 환궁하기를 재촉하였으나, 미희는 눈을 부릅뜨고 홀연 금빛의 늙은 도야지로 화하더니 일성(一聲) 포효와 동시에 먹구름이 충천하는 가운데 두척산(무학산) 상봉의 큰 바위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특사는 기급하여 왕에게 자초지종을 상주했다. 왕은 의심이 덜컥 났다. 당시 백성 가운데 온데간데 없어지는 예가 자주 생겼는데 밤마다 금도야지가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가되, 특히 어린 계집아이나 젊은 부녀자를 좋아한다는 풍설이 퍼져서 왕의 귀에까지 들린 터였다.

왕은 느낀바 있어 군병을 동원하여 두척산의 바위를 포위했다.

활과 창을 비껴들고 일제히 산이 진동하는 고함을 지르며 포위망을 압축, 바위에 육박해 가자 홀연 암상(岩上)에 염연(艶姸)한 자태의 미희가 나타났다.

군병들은 엎드려 환궁할 것을 청하자 순간 늙은 도야지로 화하여 영악한 형상에 날카로운 이빨로 군병에게 달려들 기세라 군병들은 활, , , 돌로써 쏘고 찌르고 내리쳤다.

드디어 도야지는 바위 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한줄기 요운(妖雲)이 아지랑이 같이 그 섬으로 뻗어 사라지고 말았다. 바위 틈 굴 안에는 인골이 수북히 쌓여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케 했다.

그 후 그 섬 근방에는 밤마다 도야지 우는 소리와 함께 괴이한 광채가 일기 시작했다.

신라 거유(巨儒)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골포의 산수를 즐기려고 월영대에 향학(鄕學)을 설치하고 기거하던 무렵 어느 초승달 밤에 이 괴이쩍은 현상을 보고 그 섬을 향해 활을 쏘았더니 괴이한 광채는 별안간 두 갈래로 갈라져 사라지고 말았다.

이튿날 고운 선생이 그 섬에 건너가 화살이 꽂힌 곳에 제를 올린 뒤로는 그러한 현상은 없어졌다 한다.

이 섬이 바로 돝섬(猪島)인 것이며 고운 선생이 제를 올린 곳(위치 미상)에 기우제를 올리면 영험이 있다 하여 후세에 오랫동안 그 풍습이 이어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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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5 00:00

한국100명산. 3. 최치원의 수양지 무학산

예상치 않았던 무학산 100명산 탐방 : 둘레길만 걷던 초보등산꾼들이라 원거리 원정일정을 잡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예정대로라면 포항 내연산은 8월말에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8월의 100명산 원정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빼먹기를 쉽게하면 앞으로 애로사항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심 기회가 닿으면 무학산이라도 오를 기회가 있다면 그 달의 건수는 채워야지 하는 생각에 원정기념 현수막을 넣어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지지난주에 회원 모두가 참석하는 흔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잘되었다 싶어서 "오늘은 모처럼 모두 참석했는데 정상한번 가입시더"라고 의견을 내어서 100산중의 하나인 무학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무학산 지명의 유래

무학산은 마산 중심가를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본래 이름은 [경상도지리지]에 두척산(斗尺山)이라는 이름으도 등장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척산이 회원현에 있은데 봉우리에 위에 고운대가 있으며, 월영대에서 북쪽 5리에 있다고 하였다. 아시다시피 월영대는 신라시대 문창후(文昌候) 최치원이 대(臺)를 쌓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며. 두척산의 고운대는 최치원선생이 수양지로 보고 있습니다.

'고운대'는 조선시대의 지도나 전통 시대의 문인들이 남긴 시에 종종 출현한 지명이다물론 이 명승처를 최치원이 직접 고운대라고 지칭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조선 초기 문인들이 전국에 산재한 고운대를 이야기하였고, 무학산의 고운대에 관해서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그 지명의 연원 또한 월영대와 마찬가지로 유구하다 할 것이다, [무학산의 '학봉', 이제 '고운대'로 불러야 , 유장근교수]

즉, 무학산에서 현재 학봉이라 불리우는 고운대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그러나 두척산이 언제부터 무학산으로 불러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제시대부터로 산의 형세가 학이 춤추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1.팔각정에서 근심바위까지(9시 45 - 10시 30분) : 출발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습도가 높은게 마치 비가 못와서 짜증을 부리는 듯한 그런 날씨였습니다.  항상 오던 무학산이라 별 감동도 없이 오직 정상에서 사진하나 박겠다는 마음으로 올랐습니다. 계곡을 사이로 요리조리 걸어 오르다가, 약간 급한 경사를 앞두고 하천근처에 잠시 쉬기로 하였습니다. 나무데크 위에 마련된 의자는 한숨돌리기 좋은 휴게쉼터인 것 같았습니다. 습기에 몸이 땀과 더불어 촉촉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때 누가 이야기 했습니다. "정상까지 45분만에 올라갈 수 있다 하더라"라는 말도 않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산을 잘타는 누구누구 얘기고 우리는 1시간 반은 걸려야 된다"는 오고가는 얘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죽자고 1시간 이상은 올라야 정상에 도착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코스가 정상을 향한 가장 근거리 코스인 관계로 경사도 가장 심한 코스라 난코스임에는 틀림이 없는 ㄱ것 같았습니다.  두번째 쉰곳은 팔각정자가 있는 근심바위였습니다. 도심을 내려보니 안개비와 운무에 의해 말그대로 자욱한 안개속에였습니다.은 뿌연 상태였습니다. 숨고르기와 물 한모금을 마신후 다시 출발했습니다.(걱정바위 정자) : 시내를 잘 볼 수 있는 단골쉼터(시내전경) : 운무에 쌓인 마산시내

2.근심바위에서 정상까지(10시 40분 - 11시 20분) : 몸이 어느정도 풀려서인지 걷기는 한결 수월해 졌습니다. 10여분이 지나자 '1년계단'에 도착했습니다. 그냥 걷기 지루할까봐 1월 1일부터 12월 말일까지 적혀진 나무계단입니다. 계단을 오르기 한결 가뿐한 것 같았읍니다. 암튼 서마지기에 도착해서 다시 물 한모금하고 정상을 향하였다. 날씨가 꾸무리 한것이 비가 못와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한 읍습한 기후였습니다. 그럼에도 서마지기에서 무학산 정상으로 향하는 1년계단을 다시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꺼이! 꺼이! 정상에 다다르자, 이게 왠일입니까! 갑자기 시껀먼 하늘에서 짜증을 부리던 구름끼리 한바탕 나타전이 벌어진 것 같았습니다. 쏴아 하고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도 정상에서 기념촬영할려고 하던 차에 순식간에 쏟아 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도 기념촬영은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비옷도 대충 걸친채 사진부터 한방 박았습니다. 쉴틈도 없이 하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100명산 세번째 산행은 우중에 짧게 마무리 하였습니다.

(서마지기에서 시내전경) 완전히 구름에 체포되어 있음(서마지기에서 봉화산방향) : 오히려 산중의 시야가 더 좋음(서마지기에서 정상방향) ; 이렇게 인적인 없었던 적은 없었다.(정상에서 비상훈련): 소나기공습에 우산과 비옷을 급히'')(정상기념촬영) : 비는 왔지만 표정은 엄청 좋읍니다.(다시 한컷) 무학산은 한국100명산에 해당됩니다.

3. 정상에서 서원곡입구까지(11시 30분 - 12시 20분) : 당초 계획은 우회하는 코스로 학봉을 통해 하산을 하려했으나 가장 단거리 코스를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던 길로 다시 하산을 하였습니다. 서마지기에 도착하자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의 충격이 워낙 큰지라 모든 사람이 정자안으로 숨게 만들었습니다. 정자 안에서 비옷을 다시 정비하고 하산을 하였습니다. 모처럼 맞는 비로인해 기분이 몹시 상쾌했습니다. 비닐 우의는 걸쳤지만 바지와 신발은 빗물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산에 오를때 피부를 끈적이게 했던 습한 기운을 소낙비가 앗아가는 듯 합니다. 갑자기 내린비로 주변의 나무와 바위도 한결 깨끗해 보입니다. 신록이 더욱 푸르러 보이고, 바위가 더욱 파란빛을 띠는 것 같습니다. 암튼 소나기로 인해 무학산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모든 사물을 그대로인데 괜히 보는 사람의 기분땜에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근심바위정자에서 만난 고교생) : 고3 청소년들인데 도시락까지 싸서''', 기특했습니다. 용마고학생이랍니다.(비에 젖은 등산로) : 물만난 대지와 나무들(물 만난 돌탑) : 바위의 열기가 식혀지는 것 같습니다.(자작히 젖은 낙엽들) : 낙엽을 보니 가을이 온 것 같기도 하고

- 내려 오는 길에 오를때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 건졌습니다. 죽은 나무에 새겨진 웃는 장승입니다. 아시는 분들오 있겠지만 창원에 사시는 분인데 주로 죽은나무에 나무 조각을 한다고 하는데, 창원 인근의 산에 주로 산행하면서 죽은 나무를 보아 두었다가 때를 봐서 조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무학산에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니 엄청 반가웠습니다. (웃는 장승모습) : 한그루 나무로 2개의 장승을 만드는게 보통 실력이 아닌것 같습니다. 특히 오른쪽 두상의 일부를 삐쭉하게 남겨둔 이유는? 심오한 뜻이 있는지도 모를''''

- 일행 중에 한명은 그런 사람을 추천해서 상을 줘야 된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원곡 입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의 정체는 신들린 조각님이랍니다.(네이버에서 블로그명입니다.

암튼 별탈없이 100명산 3번째 등정은 성공리에 마무리 하였습니다. 이 참에 기념비 하나를 소개할 까 합니다. 서원곡 팔각정 주차장에서 팔각정으로 가는 초입 우측에 큰 바위위에 비석하나가 있답니다. 신경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답니다. 언젠가 신경이 쓰여서 올라가 보니 최치원 선생의 후손들이 최치원선생을 기리는 기념비인데 시멘트로 제작되었으며, 건립시기는 1965년도로 되어있습니다. 의미있는 기념비인것 같았습니다. 무학산 오를때 시간이 되시면 한번 보시기 권합니다.

(큰바위 위에 외로이 선 비석)(비문) 건립시기가 정묘년이면 1987년 아님 1927년이고, 경주 후인 김무영씨가 적은 것 같으며, 내용은 고운 최치원 관련 내용인 것 같읍니다.

* 무학산 주변산들 : 무학산 (716미터)자락에 연해 있는 봉우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읍니다. 정상에서 북측으로 봉화산(262.9미터)이 있으며, 남측으로 대곡산(516.4미터), 만날고개에서 더 남측으로 내려가면 밤밭고개 아래쪽으로 청량산(323미터)까지 연결됩니다. 앞서 언급된 고운대(397미터)에서 동측으로 내려가면 환주산(추산공원)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밤밭고개로 향하는 도로로 인해서 청량산과 단절되어 있으며, 고운대에서 환주산과 연결되는 곳은 산복도로(합포고등학교 앞으로 산복도로가 개설되면서 산맥이 단절되어서 일주순환을 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언젠가 이 두곳이 산행을 위한 종주코스를 위해 어떠한 형태로라도 연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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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kdaudrb 2013.09.25 21:1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반갑습니다 우선 무학산이 100명산 탐방대 축하 드립니다 저의는 님들께서 소개한 죽은나무에 조각한 네이버에 신들린 조각입니다 감사합니다

    • 삼식 2013.09.26 16:51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군요, 사이트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2. rkdaudrb 2013.10.14 20:2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렇게 다시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비오는날 산행 멋져요
    비오날에는 운치도 있고 낭만도 있고 비를 맞는 기분이 좋아요
    창원에 정병산에 있는 장승도 올려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건 kbs 생생 투데이에 나온 장승 이네요 ㅋㅋ

2013.01.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3) - 강점제3시기

<馬山***>

1937년 / 馬山府 / 馬山府 / / 觀光の馬山 / 우무석 所藏

 

 

1937년 마산부에서 제작한 관광안내용 책자에 첨부된 지도입니다. 이와 똑 같은 형태의 지도가 다른 도시에서도 발간되었습니다.

이 자료의 소장자는 시인이자 불휘기획 대표인 우무석 선생입니다. 마산역장을 역임한 우 시인의 외조부 문판개 선생의 유품이라고 합니다.

지도의 영역은 당시 마산부 경계를 기준으로 제작한 것으로서 남쪽으로 자복포의 육군중포병대대(옛 한국철강 터)에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현 상남동 일대까지입니다.

포켓 형식으로 된 안내서의 표지에는「觀光の馬山」이라는 제목과 함께 산을 배경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 벚꽃이 만개한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명주(銘酒)’라고 적힌 일본 청주 통을 그려 놓아 당시 마산의 관광 상품이 무학산과 마산 앞바다 그리고 벚꽃과 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래 그림입니다.

 

이 지도는 조감도 형식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부내의 관공서․기업․종교시설․학교 등의 건물과 시설 다수의 위치와 명칭을 표시해 놓았기 때문에 당시의 도시윤곽과 중요시설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요긴한 자료입니다.

또한 간선도로와 철도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건축물을 이용한 도시영역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이 시기까지 완공한 매립지가 모두 표시되어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신포동 중앙마산의 해안에 마산매축주식회사에서 시행한 66,000여 평은 매립공사 후 건물도 모두 들어선 것으로 과장해서 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 시기에 매립은 완료되었지만 건물은 다 들어서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1950년대에 찍은 아래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 항공사진을 보면 매립지에 건축물들이 많이 들어서지 않아 대부분 빈 공지 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50년은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들 때문에 마산의 인구가 급증하고 난 뒤인데도 아직 이 지역에 공지가 많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관광안내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당연히 이곳에 건물이 없었을 것이라 보는 겁니다.

추정컨데 아마도 이 지도가 관광안내용이기 때문에 조금 과장해서 그렸거나 장래의 계획까지 포함해 그렸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오류 외에도 실제로는 그 당시 도로가 없었던 자산동 지역까지 격자형의 반듯한 도로를 그려놓고 있습니다. 역시 같은 이유로 이렇게 제작했던 것 같습니다.

이 지도에 의하면 이 당시 이미 마산의 해안은 인공으로 조성된 직선호안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삼택조(三宅組)가 1936년 10월 착공하여 1939년 5월 준공한 신포동과 월영동 일대, 즉 마산역 아래 부분 해안의 중앙부두 축성을 위한 매립공사는 ‘매립공사 중’이라는 표시가 뚜렷이 되어 있습니다.

하천은 남쪽으로부터 창원천․신월천․장군천․척산천․교방천․회원천이 나타나 있으나 회원천의 위치가 잘못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와 동일한 지면에 마산의 건축물과 유원지․명승지 등 각종시설 사진이 55매 수록되어 있으며 별지로「馬山案內」라는 문서가 첨부되어 있는데 당시의 마산을 설명해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지도는 1930년대 마산을 가장 상세하게 잘 보여주는 자료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2012/09/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2012/09/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2012/10/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2012/10/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2012/10/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2012/10/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2) - 강점제3시기

2012/10/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3) - 강점제3시기

2012/11/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4) - 강점제3시기

2012/11/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5) - 강점제3시기

2012/11/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6) - 강점제3시기

2012/11/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7) - 강점제3시기

2012/12/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8) - 강점제3시기

2012/12/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9) - 강점제3시기

2012/12/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0) - 강점제3시기

2012/12/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1) - 강점제3시기

2013/01/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2)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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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2 00:00

지금와서 시간 없다는 마산해양신도시


10년 넘게 끌어온 마산해양신도시 문제가 최종안 결정을 앞두고 진통이 큽니다.

해양신도시가 들어서는 신마산 일대의 주민들은 최근 ‘주민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반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회의도 하고, 집회도 하고, 유인물도 뿌리고, 급기야 창원시청 정문에서 합의집회를 가진 후 시장실에 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이 사업에 반대의견을 낸 ‘해양신도시 반대 시민대책위원회’도 연일 바쁩니다.
최근에만 해도, 창원시 해양개발사업소와 네 차례의 간담회를 가졌고, 갯벌조성 가능성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전문가 토론회도 가졌습니다.
수시로 회의도 열고, 시민들을 상대로 해양신도시의 부당성을 알리고, 언론에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20일(월) 오후에 가진 네 번째 간담회에서도 창원시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섬형으로 19만 평 매립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간담회는 상대방의 의견을 수렴하여 차이를 좁히기 위한 자리일 텐데 “원안을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 위해 진해까지 사람을 불렀는지 이해가 안되더군요.



간담회 중, 이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설령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은 시간이 없다. 변경하는데 행정적으로 2년 6개월 정도 걸린다”


화가 치민 이유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마산해양신도시사업가포신항만 때문에 생긴 사생아입니다.
가포신항만은 3만톤급 선박을 입항시키기 위해 준설을 해야 했고, 그 준설토 버릴 곳으로 마산 앞바다가 선택되었는데, 그게 이름 좋은 ‘마산해양신도시’입니다.

가포신항만 사업이 시작된 것은 10년도 훨씬 지났습니다.
그 때부터 이미 많은 전문가들과 시민단체에서는 가포신항만의 경제성에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적자 볼 항만을 왜 건설하려느냐?”
“경제성에 대해 정확한 답을 해 달라”

거칠게 항의 하며 반대했습니다.
토론회다, 간담회다, 성명서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참 많이도 했습니다.

그 때마다 마산시와 국토해양부는
“지금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절대 적자는 나지 않는다”
“국책사업을 그렇게 허술하게 하지 않는다” 라고 사업의 적합성을 강변했습니다.
2조 이상의 경제효과가 있다고 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산발전은 원하지 않느냐고도 했습니다.

반대는 실패했고 항만은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업에는 공직자 세 사람이 앞장섰습니다. 마산시장, 담당국장, 국토해양부 담당관입니다.
지금 마산시장은 교도소에 가있고, 담당 국장은 건설회사의 임원이 되어 서울로 올라갔고, 국토해양부 담당 사무관은 승진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세 분이 10년 전에 우리에게 제시했던 자료, 즉 국토해양부가 예측한 가포신항의 물동량은 2012년 기준 연 156,000TEU였습니다. 이 정도의 물동량이면 항만 수익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항만을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작년도 마산항의 컨테이너 실적은 10,000 TEU에 불과했습니다.

쉬쉬하는 내용이라 정확한지 모르지만 제가 알고 있는대로 더 적어보겠습니다.

민간사업자의 유치목표 물동량은 24,000 TEU이며 운영수입보장(MRG) 최소실적은 50%, 즉 12,000 TEU 입니다.
따라서 156,000 TEU 계획했던 사업을 7.7% 밖에 안되는 12,000 TEU만 수주해도 적자는 국민세금이 보전해 주게되어 있습니다.
사업자 입장에서 보면 땅 짚고 헤엄치는 사업이 가포신항만 입니다.

위에서 제시한 각종 자료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국토해양부 2012년 계획 물동량 156,000TEU은 부도수도 준설 및 서항지구 준설토 투기장 조성 타당성 검토와 대안 마련 토론회(10.9.29) 때 나온 아이포트 자료입니다. 아이포트는 가포신항만을 운영할 회사입니다.

2. 민간사업자의 유치목표 물동량 24,000TEU은 해앙신도시조정위원회 2차 회의(10.9.15)때 아이포트가 제출한 자료입니다.

3. 작년도 마산항 컨테이너 실적 10,000TEU은 국토해양부 해운항만물류정보 시스템 홈페이지(https://www.spidc.go.kr/)에서 추출한 것입니다.

4. 운영수입보장(MRG) 최소실적 50%는 월간 '해양한국' 2010년 3월호 "잠재적 시한폭탄 전국항만 '민자부두' 운영실태" 기사에 실린 내용입니다.

만약 제가 알고 있는 위 내용이 사실과 다르면 댓글로 적어주기 바랍니다.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내용이라 제 주장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가포신항만 필요성에 대한 예측은 엉터리임이 드러났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측을 했던 전문가도, 심의를 했던 교수들도,
사업을 추진했던 공직자도, 사정이 어러함에도 아무 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면 변경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기왕 시작한 사업이니 중지할 수 없다"는 사람 뿐 입니다.

책임지지 않는 사회, 이거 희망 없는 사회 아닙니까?

가포신항은 이처럼 엉터리로 시작된, 태어나지 말았어야 될 관경유착의 토목사업입니다. 이제는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최근에도 시민단체임원들이 국토해양부와 창원시 관계자가 있는 자리에서,
“항만의 경제성에 대해 지금이라도 책임 있는 답변이 듣고 싶다, 말해 달라”고 했더니 아무 답을 못했습니다.
자꾸 추궁하니 나중에는 “국가가 하는 일을 공개할 수 없다” 고 하더군요.
항만의 경제성 예측이 국가기밀이라니요? 어이가 없었습니다.

통합창원시는 국내 최대의 부산진해신항 70%를 갖고 있습니다.
통합직후 창원시가 이 사실을 들어 가포신항만의 용도폐기를 제안한 적도 있습니다만, 국토해양부는 국책사업 운운하며 안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창원시도 이 사업이 빨리 마무리되기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해양신도시는 이런 엉터리 가포신항만의 사생아입니다.
이를 두고,
“매립을 하더라도 도시발전에 도움 되는 방법으로 매립하자”는 주장 앞에서
“지금은 시간이 없다”라니요?

10년 전에 항만 건설할 때는 그렇게 반대해도 “수익성 있다”고 밀어 붙이더니, 적자가 예측되는 지금에 와서는 “바꿀 시간이 없다”니요?

이렇게 밀어붙이는 게 옳은가요?
공직자들이 이런 식으로 국민혈세를 낭비하고, 지역을 난도질할 수 있는 겁니까?
한심하고 기가 막혀 해보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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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삼식 2012.02.22 10:3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런식으로 일을 진행하는게 어디 한두번이어야죠!
    사업이 진행된지 십수년이 지났어도,
    사업의 본질을 제대로 아는사람은 정말 없는것 같읍니다.
    그저 시키니까, 그대로 밀어부치는 이런행정
    정말 구태의 반복인것 같읍니다.
    귀찮타고, 번거롭다고 해서
    시간만 끌다가, 무시하고 그냥 진행시키려는
    이러한 작태들을
    콱, 우째야 되겠읍니ㄲㅏ ?

  2. 빙관 2012.02.23 10:4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지금에 와서 혹은 선거철만 되면 다시 일어서는 반대대책위...
    원론적인 이야기만 몇년째 하는것입니까?.. 축소하라고 해서 축소햇고,아파트 짓지말라고 해서 안짓는다고 시의견 제시햇고,지금 와서는 사업 포기하라는 그런 앞뒤가 안맞는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전 근본적으로 건설에는 반대를 하지만 이왕 이정도 까지 왓으면 창원시 믿어보고 하는수 밖에 없는듯 하네여..반대를 한다 해도 가포신항 실시인가 피해보상비는 어찌 하란말입니까? 반대를 한다해도 설령 사업이 안된다 해도 창원시 예산에서 피해보상을 건설비 못지 않게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 아실라나요. 이왕 이렇게 진행된거 마산해양신도시에 뭐가 들어왓으면 시민한테도 도움이 될까 한번 생각해보고 거기에 힘을 쏫아야 앞으로 마산발전에 도움이 될듯 합니다. 전 야구장이 들어왓으면 좋겟어여.. 그러면 마산 해양신도시 찬성입니다.

  3. 허정도 2012.02.23 13: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해양신도시를 하더라도 보다 경제적으로 보다 효율적으로 해야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4. 수원에서 마산으로 이사온 사람 2012.02.23 22:3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몸으로 막겠습니다.

  5. 미소 2012.02.24 03:4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우선. 지금에 와서 혹은 선거철만 되면 일어서는 반대..라고 이해 하시니 가슴이 아픕니다.
    축소 했지요? 그러나 바다를 점유하는 면적은 동일 하니 허울만 축소입니다. 아파트는 안짓는다고 하셨으나 복합비지니스센터를 고민한다고 하니 이것은 이름만 다른 아파트 입니다. 그리고 해양신도시가 갈등이 빚어 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정책의 집행 과정에 투명성이 보장 되지 못해서 그런가 싶습니다. 신항이 들어 서면 얼마나 배가 들어 오고 얼만큼의 이익이 날건지? 혹시 들어 보셨거나 공개된 자료를 보셨습니까? 매립 이전에 매립지를 어떻게 이용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혹시 보셨습니까. 다만 두리 뭉실하게 아파트는 안짓겠다. 일단 매립 한 후 토지 이용계획을 수립하겠다 하니. 해양신도시를 원하는 쪽에선 떼쟁이가 되어 버리네요.

  6. 정영숙 2012.02.24 22:0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자꾸만 바다를 육지로 만들면 노래는 좋아도 태풍 매미 올때처럼 파도가 제 집 찾아 옵니다. 잘 연구해서 진행하여야 될 줄압니다.

  7. SD Choe 2012.02.25 09:4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참, 답답한 상황이군요. 제가 그곳을 고향으로 두고 60년 살아왔기에 늘 그곳 소식에 애착이 가고 관심을 기울입니다. 현재, 그곳에 살지않아 상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제 기억으로는 2010년 하반기에 창원시장께서 시민단체 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서 서항의 매립형태와 토지이용계획은 경제적 비용으로 마산 시민들에게 친환경적으로 유용한 쪽으로 하며 향후 시민단체와 의논해서 추진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압니다만, 행정당국이 아직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을 보니 안타깝습니다. 3개시 통합전이나 통합 후나 행정당국의 태도가 변함이 없는 것을 보면 참 우리나라의 관 주도 문화를 혁신시키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겠습니다.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몇 다른 지자체의 훌륭한 사례를 여기에 들지않겠습니다만 목민관은 자신이 함께 더불어 사는 곳의 민심을 읽어야 합니다. 정약용 선생의 말씀 모두가 아는 내용이죠.

    가포 신항개발과 연계된 해양신도시 계획은 엄청난 금액이 투자되기 때문에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그러나, 부산, 광양항에 비해 마산항이 규모면에서 중급 항만이기에 항만 운용 경쟁력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굳이 다른 대형 무역항과 비교하여 키울 생각만 한다면 판단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가포해수욕장 폐쇄시 그 곳을 매립한후 친수 자연공간으로 시민들에게 휴식의 장소로 제공해야 한다는 의견을 시의회에 말한적이 있었는데, 시 당국이나 시의회나 꽉 막힌 것은 마찬가지더군요. 많은 시민단체가 그런 주장을 한것으로 압니다. 왜, 매번 매립을 해서 신도시로 만들어 인구만 늘릴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도심지 공동화만 부추기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살고싶어 되돌아 오도록 환경을 바꿔볼 생각은 않고 토목 공사 일변도의 팽창 정책만 추구하니 미래 비전과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3개시 행정통합 이후 지역 균형발전과 마산항 수질개선은 물론 시민을 위한 친수공간 (워트 프런트) 로 만들어 시민에게 되돌려 주자는 무수한 외침이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동안 시 당국이나 시의회는 뭘했을까요? 더불어 함께 사는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해 정책당국자들이 겸손해져야 합니다.

  8. 허정도 2012.02.25 21:2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SD Choe 님, 넓고 깊은 탁견에 놀랄 따름입니다.
    고향 많이 도와주십시오. 너무 힘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9. 빙관 2012.02.27 09:1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런 원초적인 예기는 이제 창원시에서 들어주질 않으니 유용하게 사용할 목적으로 외치심이 더 나은 더 발전된 민원 같아 보일겁니다. 창원시청과 야구장 창원에서 뺏어 오자구여~~~

2011.09.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640여 평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였습니다. (도로면적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각종 자료에 나오는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마산지방해운항만청이 발간한 『마산항백서』에 의하면 이 매립공사는 1911년 착공되어 1914년 7월 준공되었다고 합니다.
『마산항지』에서는 1910년 착공하여 1913년 준공되었다고 기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매립공사는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은 일본 화가산현(和歌山縣) 출신으로 대판 오백정장평(五百井長平)상점에 들어갔다가 21세가 되던 해 한국으로 왔습니다.
무역업으로 일을 시작한 박간은 1905년부터는 독립하여 수산업․창고업․목물무역업․토지매매중개업 등에 종사했습니다.

유명한 동래별장의 주인이며 당시 부산 제일의 땅 부자였습니다.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경상남도회부의장․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였고 부산토지주식회사사장․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쥐락펴락한 인물입니다.

1923년 부산을 현지 르뽀한 잡지 개벽(開闢)의 기자는
「․․․․迫間方太郞 같은 사람은 그 한사람의 부력(富力)이 10,031호 조선인의 전 부력을 당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도시사학자 손정목은
‘그가 개인적으로 한반도 전체 일본인 중 최고의 자산가였다’
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나온 일본인 중 최고부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지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경남 도내 소작지의 3.5%를 소유하였고 소작농이 2,000여 호가 될 정도의 대지주였으며 김해 진영면과 창원 대산면 동면 등 3개면에 걸친 진영농장의 주인이기도 했으니 옛 창원시의 땅도 많이 가졌던 셈입니다.

그런가하면 1896년 11월에는 부산에서 자본금 2만 5천원으로 부산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 세운 일본인 회사의 효시입니다.

유명한 '마산포 사건' 때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하도록 하였고, 그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도 했으니 마산과도 인연이 깊은 셈입니다.

유장근 교수와 함께 걸었던 도시탐방대 답사 때 무학산 어느 능선에서 그의 땅이었다는 표지석이 서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7-80년은 되었을 돌이었습니다.
후에 생길지도 모를 ‘마산근대사 박물관’에 전시하기 딱 좋은 유물이라, 보관해 놓을 생각도 했는데 무거워서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박간소유지(迫間所有地)’라고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간의 ‘마산과의 인연’은 바로 남성동 매립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개항 초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매립 때문에 생긴 충돌, 즉 앞서 포스팅한 김경덕 매축권에 대한 홍청삼(弘淸三)의 권한 계승 시비 사건(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이 있었던 이곳을 그가 매립한 것입니다.

매립의 실제 전주(錢主)는 박간방태랑이었지만 이 사업을 마산에서 직접 시행한 이는 바로 홍청삼(弘淸三)이었습니다.
홍청삼은 당시 마산거주 일본인의 거물로 현 제일여고에 있었던 신사건립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다음 그림은 제가 복원한 당시 지도인데 이 그림을 보면 쉽게 매립전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것은 매립 전인 1910년 경 도면이고 뒤것은 매립이 끝난 1920년 도면입니다.
 

 

이 때 매립된 토지의 지번과 소유자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토지는 총 52필지로 수성동115, 116, 117번지와 남성동 172번지부터 221번지까지였습니다. 수성동에 3필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 지역의 명칭을 ‘남성동 매립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매립된 52필지 중 수성동 116번지 374평과 117번지 34평, 합408평은 일본인 송원조장(松原早藏)의 소유(■부분)로, 남성동 200번지는 국유지(●부분)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매립주 박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항만의 요지(要地), 즉 초록색으로 표시한 ●부분의 남성동 200번지, 102평의 대지가 국유지로 된 사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박간이 너무 넓은 대지를 매립을 통해 일거에 소유하게 되자 그 답례로 부두용지 혹은 공공건물 부지로 총독부에 헌납했던지, 아니면 공공의 목적으로 그 땅을 정부가 매입했는지, 그저 추정만 해볼 뿐입니다.

박간 소유의 대지 49필지 7,568평은 아무런 변화 없이 전부 1936년 2월 22일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박간수웅(迫間秀雄)에게 이전되었고, 그런 상태로 해방까지 갑니다.

박간수웅(迫間秀雄)이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성이 같다는 점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미루어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승계 시켰다면 아들아닌가 라고 추정했을 뿐입니다.

다른 기록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경남지역 일본인 지주의 형성과정과 투자 사례, 1999, p.68, 한국민족문화 제14집」에 의하면 박간의 아들로 박간일남(迫間一男)이 등장하고, 그의 가계 중 박간무웅(迫間武雄)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간수웅은 혹 박간의 집안 조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이 많은 토지를 한 필지도 매매하지 않고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대지 혹은 건물을 전부 임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지역에서 발간된 자료에서는 ‘
새로 매립된 토지의 가격이 최저 7원 50전에서 최고 22원까지 토지의 위치에 따라 상당한 격차가 있었는데 이를 박간이 분양하였다’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 매립지가 해방 때까지 소유자 변경이 없었다는 것을 토지대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馬山港誌』의「馬山浦 埋立地」편에서도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매립지에 대해「․․․유감스러운 것은․․․․․․차지료(借地料)가 비교적 고율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박간이라는 일본인 단 한 사람에게 마산포에서 생업을 이어 가던 모든 사람들이 대지와 혹은 건물을 임대하여 영업을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튼 매립 후부터 이곳은 원마산 상권의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것처럼 마산만에는 박간 매립 전부터 여러 차례 매립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군부 혹은 공공기관에서 시행했거나 임의의 매립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박간의 매립은 민간인이 이윤을 목적으로 법적허가를 득하여 매립한 사례로 최초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미 포스팅한 1910년경 마산포 토지소유상태를 통해 이미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은 확인했습니만 본 매립사업 이후 일제의 원마산 상권 장악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매립은 일제가 항만도시 마산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식민정책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수탈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때 매립된 남성동 해안에는 석축안벽(石築岸壁)과 석축돌제(石築突堤) 등의 항만시설이 조성되었고 소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과 물량장을 갖추었습니다.
이 부두는 어선과 소형 화물선들의 정박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통영․거제 등 남해안 일대를 운항하는 연안 여객선 부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립지에 신설된 도로 사이에는 원정우편소(元町郵便所, 현 남성동우체국)를 시작으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매립하고 10년 쯤 지난 1924년, 이곳에 다음과 같은 길이 63.6m의 사석방파제가 설치되었습니다.

제 나이 열 두세살 쯤,
이 방파제 위에서 낚시를 했는데 팔뚝만한 뽀드라치를 한마리 낚아 올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2011/07/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2011/07/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2011/07/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2011/07/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8) - 강점제1시기
2011/08/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2011/08/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0) - 강점제1시기
2011/08/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1) - 강점제1시기
2011/08/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2) - 강점제1시기
2011/08/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3) - 강점제1시기
2011/09/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2011/09/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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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마산시의 첫 지도-

<마산부 관할구역도 / 馬山府管轄區域圖>

1913년 / 조선총독부官房總務局 / 조선총독부 / / 조선총독부 관보호외 / 서울대 중앙도서관

 

이 지도는 1914년 조선총독부가 단행한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목적으로 1913년 12월 29일자로 발행한 것입니다. 총독부령 제111호로 도의 위치와 관할구역 그리고 부(府)와 (郡)의 명칭 및 관할구역 등에 관한 조정명령이었습니다.

이 때 개편된 마산부가 사실상 마산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지도는 마산시의 첫 지도가 되는 셈입니다.

이 행정구역개편에서 마산부에는 관할구역으로 마산포각국거류지일원, 외서면의 완월리, 신월리, 월영리, 자산리, 서성리, 성호리, 중성리, 성산리, 동성리 및 오산리, 상남리, 교방리의 일부가 포함되었습니다.
지명을 이렇게 소개하였지만 사실은 앞서 포스팅했듯이 1910년부터 이미 원마산에도 한국식 지역지명 대신 일본식 정명(町名)으로 변경되어 있었습니다.
2011/02/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같이 단행된 관할구역 획정에서 창원군 부분에는 마산부 부내면, 상남면, 하남면, 동면, 북면, 내서면, 구산면, 대산면, 진동면, 진북면, 진서면, 양전면, 웅읍면, 웅동면, 천가면, 진해면, 웅서면, 외서면 중 마산부에 속하지 않은 지역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관할구역에 관한 지도이기 때문에 마산부의 경계가 뚜렷이 나타나있습니다.
이 지도에 의한 마산부 경계는 동쪽으로 마산만 해안선을, 서쪽으로 대곡산과 무학산 정상을, 남쪽으로 율구미, 북쪽으로 오동교부터 노비산까지를 포함하고 있으나 서원곡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범례에서는 마산부의 경계선 및 도로․철도와 정차장․논․밭․산악․하천․바다․건물 등을 표시하고 있는데 도로와 건물 표시 때문에 당시 신마산의 원마산 쪽 진출 정도를 약간 가늠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현재의 마산경찰서 부근까지만 개설되어있던 중앙간선도로를 보면, 1910년에 원마산까지 3m폭으로만 개설되었다가 1912년에 15m 폭으로 완전 개통되었는데 그것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마산 역 앞에서 장군교 방향으로 사선형의 직선도로 서편 안쪽은 건물이 대부분 들어선 것으로 나타나 있고 조계지의 고지대는 고운로(孤雲路) 아래까지만 개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지도의 마산부 경계를 현재 위성사진에 옮겨보았습니다.


지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일제에 의한 정명변경이 있기 전 원마산 6개리를 비롯하여 교방리․상남리 등과 완월리․신월리․월영리의 위치와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된 남성동 매립공사는 완성되지 않은 형태이나 공사중 임이 뚜렷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 이미 육군중포병대대 입구(현 남부터미날부근)에서 시작해 신월계라 불렀던 전 마산극장 앞까지는 해안에 직선의 호안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마산상황을 알 수 있는 참 좋은 자료인데, 흠이 있다면 동쪽을 북쪽이라고 나타낸 방위표시의 오류입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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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ood pellet mills 2011.08.02 19:2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음.. 공감합니다. 어서 우리도 독도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할 텐데요. 그런데.. 우리 정부는 크게 손을 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런 극악무도한 일에 세계인이 알도록 홍보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일을 해야합니다. 언론사, 정부, 국민....

2011.07.1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마산시의 시작>

사라져버린 ‘마산시’,,,,
오늘은 그 ‘마산시’의 시작을 알아보겠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였습니다만 이 글은 행정구역명칭으로서의 ‘마산’에 대한 내용입니다.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1895년 을미개혁으로 태종13년(1413년) 이후 480여 년간 지속되어온 8도제가 폐지되고 부제(府制)가 시행되었습니다.
전국에 23부를 두고 336군을 부의 관할로 두어 종래의 부, 목, 군, 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던 하급행정구역들을 군으로 통칭하였습니다.
이때 마산은 진주부 관할의 21개 군 중 창원군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부제(府制)의 인위적인 행정구역획정이 마찰을 빚어 실시 1년 3개월 만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1896년 병신개혁(丙申改革)으로 13도제가 채택되었습니다.
이때의 13도는 종래의 8도를 바탕으로 경기․강원․황해의 3개도를 제외한 나머지를 남북 양도로 분할한 것이었는데 오늘날의 도(道) 구역은 이때 결정된 것입니다.
13도 밑에는 7부(광주․개성․강화․인천․동래․덕원․경흥), 1목(제주), 331군을 두었는데 마산은 경상남도 창원군에 속했고 경상남도의 수부도시는 진주였습니다.

3년 뒤인 1899년(광무3년), 창원군은 개항에 따른 조치로서 창원부로 승격되어 창원감리서를 두었고 개항장의 관리업무를 감리가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3년(광무7년)에 창원부는 다시 창원군으로 바뀌었는데 이 때 전국은 3부, 1목, 339군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는 통감부와 이사관 관제를 발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00년에 설치된 일본영사관을 1906년 9월 1일자로 이사청으로 바꾸고 일본 거류민에 대해서는 치외법권적 행정권을 행사하는 거류민단제(居留民團制)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조치에 따라 우리 정부는 같은 해 9월 24일 개항장의 감리서를 폐지하고 창원군을 다시 창원부로 개칭하여 감리의 소관 업무를 부윤에게 인계하였습니다.

여기까지의 복잡한 변화가 한일병합 이전까지 일입니다.

한일병합으로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통치기구에 관한 일련의 관제(官制)를 발포하면서 강점 직후의 과도기적 체계를 발포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 개청 하루 전날인 1910년 9월 30일이었습니다.

이 때 종전 13도 1수부 11부 317군에서 수부였던 경성부(京城府)를 격하하여 13도 12부 317군으로 개편하였습니다.
이 개편에서 마산은 이전의 창원부에서 마산부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됩니다. 마산이 최초로 행정구역명칭으로 되었습니다. 경남에는 부산과 마산이 부(府)가되었습니다.

이전의 11개 부(府)는 모두 개항장 혹은 개시장이었던 곳이었지만 다시 개편된 부(府) 12개는 모두 통감치하의 일본이사청과 일본거류민단이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부(府)의 명칭, 예컨데「마산부」는 ‘마산’이사청과 ‘마산’일본거류민단의 ‘마산’을 그대로 딴 것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1908년 마산이사청으로 건축하여 1914년 마산부청이 된 건물 사진과 당시 이 건물이 있었던 자리(노란 점)입니다. 지금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터는 옛 창원군청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정문 기둥의 현판을 자세히 보면 '馬山府廳(마산부청)'이라는 한자가 보입니다.


부청은 1910년 10월 1일 개청하였습니다.
이사청은 이 날로 폐지되고 전국의 이사청 청사가 각각의 부청 청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마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창원부가 마산부로 바뀌었지만 호칭이 달라진 것 외 지방행정단위로서의 성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1899년 시행되었던 마산의 개항도 1911년 1월 1일 진해 일본군항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폐지되고 개항과 함께 시작된 각국공동조계지도 1914년 3월 31일자로 폐지되었습니다.
한국 땅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조계지 폐지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합방 후 3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식민통치의 틀이 잡히자 총독부는 본격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대대적으로 지방행정을 개편합니다.
1913년 10월과 1914년 4월에 걸쳐 단행된 이 개편은 1914년 3월 1일과 4월 1일을 기해 일제히 실행에 옮깁니다.

마산은 이 지방제도 개혁 때 경성․인천․군산․목포․대구․부산․평양․신의주․원산․청진․진남포 등과 함께 관하에 면(面)을 가지지 않는 지방행정의 기초단위로서의 부(府, 지금의 시)가 되었습니다.
이 때 결정된 마산부의 관할구역은 마산부의 각국거류지와 창원군 외서면의 완월리․신월리․월영리․자산리․서성리․성호리․중성리․성산리․동성리 및 오산리․상남리․교방리.회원리의 일부였습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동쪽으로 마산만 해안선을 경계로 서쪽으로 대곡산과 무학산 정상, 남쪽으로 밤밭고개, 북쪽으로 오동동다리를 경계로 노비산까지의 범위였습니다.

그러다가 1942년 9월 30일자로 마산부의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됩니다.
창원군 내서면의 교방리·회원리·산호리·석전리·양덕리와 창원면의 봉암리, 구산면의 가포리 등 7개리가 마산부에 편입됨으로써 마산부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이때의 마산부가 해방 4년 뒤인 1949년 지방자치법제정 때 부(府)에서 시(市)로 바뀌면서 마산시가 되었습니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마산의 행정구역 개편은 이처럼 창원군(1895년)-창원군(1896년)-창원부(1899년)-창원군(1903년)-창원부(1906년)-마산부(1910년)-마산부(1914년)-마산시(1949년)로 바뀌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와 같은 곡절을 겪었던 마산시는 2010년 7월 1일 진해 창원과 합쳐 창원시가 되었습니다.
마산부로 시작된 독립 시(市)의 백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죠.

‘마산시’가 없어진지 그새 1년이 되었습니다.
평생 ‘마산시 회원동...’으로 시작되는 주소를 사용했던 저로서는 제 의지와 상관 없이 갑자기 ‘창원시.....’로 시작되는 주소를 사용하자니 아직 뭔가 어색합니다.
별로 내키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마산 창원 진해가 아닌 다른 이름, 예를 들어 ‘경남시’였다면 ‘마산’이 없어져버렸다는 느낌보다 세 도시가 통합되었다는 느낌이 더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통합시의 명칭을 세 도시 중 하나였던 창원시로 결정해버린 것은 사회통합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름을 잃은 진해와 마산시민들의 상실감 때문에 말입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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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1910년대 건축물>

1910년대에는 마산에 도시변화가 많이 없었던만큼 건축공사도 많이 없었습니다. 종교시설과 일부 교육시설만 약간 들어섰습니다.
개항기에는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한 관아시설들이 주로 건설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개항기에 지어 놓은 건물들의 증․개축이 많았으며 관아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업용 건물이 많았습니다.

또한 목조건축물이 많았던 이전과 달리 이 시기부터는 벽돌을 이용한 조적조 건축물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신마산에 집중되었던 건물들이 서서히 원마산 쪽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 장군천 이북에 지방법원지청이 들어섰고 현 마산시청 자리에 전기회사가 들어오는 등 공공건물들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일대(옛 마산시청부근)가 신마산의 마산포 진출이라는 의미 외에 마산포와 신마산 양도시를 관장하는 공공업무지구 성격의 새로운 영역(중앙마산)으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910년 건축된 부산지방법원의 마산지청입니다.

1919년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해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10,000지도「마산」을 보면 마산포에 근대식 시설들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
현 삼성생명 부지에 부산감옥 마산분관과 인근에 동척(東拓)출장소, 그리고 전 북마산 파출소 앞의 삼성라디에타 부지에 조면공장(繰綿工場)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또 옛 중앙극장 건너편에 금융조합이, 그리고 보통학교(성호초등학교)와 통도사 포교당, 보통학교의 서쪽 약 250m 지점에 피병원(避病院)이 있습니다.
피병원은 전염병환자 전용병원으로 이 외에 신마산 완월리 아래(현, 마산여고 뒷편)에도 있습니다.
위치를 보아 신마산의 것은 일본인 전용, 원마산의 것은 한국인 전용 아니었나 싶습니다.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이 현 제일은행 부지에 들어섰는데 이 부지는 원래 마산창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이 때 지은 조선식산은행 건물은 해방을 거쳐 현재의 건물을 지은 1970년대까지 이용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았던 근대건축물 중 변변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도시라, 아무리 생각해도 참 아까운 건물입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이 시기에 건축된 교육시설은 의신여학교와 마산실과고등여학교가 있었습니다.
창신학교 여학생들로서 시작했던 의신여학교 건물은 성지학교에 이어 벽돌조 건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규모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추산동에 있는 포교당 정법사는 1912년 건축되어 최근까지 남았다가 얼마 전 새 건물 짓는다고 철거했습니다. (2011/07/0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불교시설인 포교당을 지은 7년 후(1919년) 마산 최초의 개신교회인 마산포교회가 문창교회로 개명하면서 석조 1층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예배당을 신축하였습니다.
1만 6천원의 건축비를 모아 무학산 기슭의 석재를 사용하여 지었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한국교회 석조건물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시기입니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 지은 건물 중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No

건물명

현위치

건축연대

有無

구조 및 규모

양식

면적

비고

1

도립마산병원

 

1911

 

 

 

 

 

2

마산포교당

추산동65

1912

목조1층

한식

30평

통도사正法寺

3

의신여학교

상남동

1913

벽돌조1층

양식

 

창신학교여학생

4

구마산우편소

남성동

1913

 

 

 

매립지(남성동우체국)

5

노동야학교

창동

1914

 

 

140평

1,300엔․교실 6개

6

실과고등여학교

장군동3가

1915

목조1층

의양풍

 

마산여고 전신

7

조선식산은행

남성동3가

1918

벽돌조1층

양식

 

농공은행합병․현제일은행자리

8

문창교회

추산동

1919

석조1층

로마네스크

84평

최초의 석조예배당

9

마산창고(주)

남성동198

1920

 

 

 

한국인 신설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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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산신세대 2011.08.30 13:1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런 블로그를 발견해서 뛸듯이 기쁩니다. 그런데 사진을 어떻게 구하시는지요?

    • 허정도 2011.08.30 16:57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사진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구합니다.
      문헌에 나와있는 것들입니다.

2011.05.0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7) - 개항이후

<다시 생각하는 개항 후 10년>

개항 직후 시작된 이 도시의 생성과 변화를 31회에 걸친 포스팅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처음 던졌어야할 질문을 뒤늦게 던져봅니다.

그들은 왜 '창원군 외서면 월영리와 신월리 해안'을 개항지로 삼았을까요?



근대 마산의 시작은 개항이었고 개항지는 마산포 남쪽 2㎞지점의 월영리와 신월리 일대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조계지였던 이곳은 ‘신마산’이라 불렀고 그들이 부른 ‘신마산’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항지로 선택되었던 월영리와 신월리,,,,, 그곳은 마산도시의 최남단으로 지형상 말단부였습니다.
동쪽은 합포만, 서쪽은 무학산이 막아 북쪽 마산포 쪽으로만 시역의 확장이 가능했던 좁은 공간이었습니다.

자연조건이 이러했슴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조계지로 선정되었던 이유는

① 외부와의 연결은 물론 당시에 문물교류 루트로 이용되었던 해로(海路)와의 입지적 조건이 유리하였으며

② 비록 면적은 넓지 않았지만 경사지와 해안평지를 동시에 끼고 있어서, 산업용지는 평지에 두어 해안을 이용하였고 주거용지는 경사지에 배치해 마산만의 경관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었으며

③ 마산포와는 2㎞ 거리였지만 지형적으로는 해안 평지로 이어지기 때문에 향후 도시 확장과정에서 연결이 용이한 지세였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개항지를 결정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월영리와 신월리를 택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신마산의 입지조건은 시역(市域)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무리한 토목공사가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다를 메우고 산을 깎아 가용부지를 넓혀나간 이 도시의 역사는 이와 같은 태생적 조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매끄럽지 못한 가로망 연결과 지금도 계속되는 매립 등 마산도시의 비효율적인 도시구조도 개항지의 위치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에 와서 개항지 결정에 대해 백번 말해봐야 자신의 탄생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부질 없는 줄은 알지만 '만약에,,,' 라는 마음이 없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마산의 개항지가 지금의 어시장과 남성동 일대인 '마산포' 였다면, 아니면 오산리였던 산호동이나 내륙이었던 양덕동 쪽이었다면 이 도시는 어찌되었을까요?
오늘처럼 이런 모습일까요?
상상할 수 없는 다른 모습이었을까요?

개항 후 10년,,,,
이 시기는 마산이 근대도시로 기틀을 잡기 시작했던 때였으며 서구의 온갖 근대적 문물들이 마산에 선을 보이기 시작했던 대변화의 시기였습니다. <<<


----------------------------------------------------------------------------

이 글로써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2차 게재' 중 '개항(1899년) 이후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의 시기'가 끝났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음처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포스팅할 계획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1차 ; 고대부터 개항(1899년)까지
2차 ; 개항이후부터 해방(1945년)까지
3차 ;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미 완료한 '1차 게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려시대 이전 ------  9회
조선시대-----------  4회
개항기------------- 12회
합계--------------- 25회 완료

'2차 게재'는 다음처럼 구성하기로 했으며 그 첫번째 순서를 마쳤습니다.

개항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총 32회 (26회부터 57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1시기(1911년부터 1920년까지)
일제강점 제2시기(1921년부터 1930년까지)
일제강점 제3시기(1931년부터 1945년까지)

'3차 게재' 계획입니다.
산업화 이전시기(1945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도약 및 전성기(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체 및 쇠락기(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 본 연재는 마산도시를 연구하면서 확보한 자료를 공유하자는 목적도 있습니다.
   혹시 좋은 자료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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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2011/01/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2011/01/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2011/02/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2011/02/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2011/02/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6) - 개항이후
2011/02/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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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0)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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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1.05.09 09: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벌써 이렇게 진전이 되었나 하면서 놀랍니다.
    가랑비에 둑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계속 기다립니다.

2011.05.0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6) - 개항이후

<한일병합된 1910년 마산 모습>

도시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도시내부의 변화도 많았지만 도시외부의 변화도 있었습니다.

당시 마산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길은 크게 세 갈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동쪽으로 창원․덕산․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약 120리 길이 있었는데 바로 지금 진영을 거쳐 부산으로 연결되는 국도입니다. 이 길이 1909년 우마차가 쉽게 통행할 수 있는 신작로로 개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넓은 길은 없었습니다. 많은 물량을 실어 나를 수레도 없었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넓은 도로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청일과 러일 양 전쟁이 벌어지면서 일본군이 개통시킨 군사도로 경의․경인․경원선이 최초였으며 전국적으로 일반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이 도로의 확장공사는 매우 이른 편이었습니다.

또 다른 길은 서쪽으로 진동을 지나 진주로 가는 140리 길이었습니다.
좁은 오솔길로 여러 개의 험준한 산마루를 넘어야 했던 길이었습니다만 1908년 6월 폭 5m로 확장공사가 시행되어 1911년 3월 완성되었습니다(
朝鮮總督府 官報 第211號, 1911. 5. 16)

세 번째는 북쪽으로 칠원․창녕․현풍․성주를 지나 서울로 연결되는 길이었는데 확장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음 그림은 병합 당시(1910년) 마산일대 도시상황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1899년 직전의 마산일대 지도(2010/08/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 - 개항기)를 기초로, 개항기 동안 간행된 각종 문헌을 자료로 활용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지도의 아래 쪽 노란 색 칠한 부분이 신마산인데 노란색 중간 쯤 보이는 신월천(현 깡통거리)까지가 조계지였습니다.
하지만 개항 10년 후인 1910년 경, 이미 일본인들은 북쪽 원마산 방향으로 많이 뻗어나왔습니다. 근대식 도로도 현재의 장군천까지 건설되었습니다.

도시 중심에 길게 나있는 검은 선이 1905년에 개통한 철도 마산선입니다.
신마산 쪽에 마산역이, 원마산 인근(현 육호광장)에 구마산역이 있었으며, 이때 난 철로가 현 경남은행 본점 앞 중앙간선도로입니다.

지도처럼 마산포(원마산)와 신마산에만 도시가 형성되었을 뿐, 완월, 자산, 회원, 양덕, 석전, 합성지역 등은 그때까지 자그마한 자연취락이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일제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같은 달 29일 이 사실을 정식으로 공포함으로써 한반도가 자신들의 땅임을 공식화하였습니다.

이후 일본은 한국사회를 식민지 구조로 재편하였고, 그 과정에서 1911년 1월 1일 진해군항보호를 구실로 마산의 개항장을 폐쇄했습니다.

그러나 개항 당시에도 일본과의 교역 외에 타 국가와의 교역이 미미했던 마산항은 폐항이 된 이후에도 한국산 쌀의 대일 수출과 일제 소비성 물자 및 군수품 수입항으로 계속 활용됨으로써 크게 위축되지는 않았습니다.

개항과 함께 찾아온 인구의 증가와 근대적 도시시설 출현, 일제에 의한 정명변경(町名變更) 등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으면서 마산포의 도시구조는 급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듯이 성장 일변도의 길을 걸어온 마산도 1911년 진해에 군항이 설치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진해>

당시 진해 사정과 관련지어 마산도시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자료를 소개합니다.

먼저 평정빈부(平井斌夫)가 쓴『마산과 진해만』의 기록입니다.

‘1911년 1월 마산의 개항이 폐쇄되면서 산업이 위축될 것 같았지만 원마산의 왕성한 교역과 상거래, 진해만 군사시설의 건축, 진해 신시가지의 건설 등에 의해 오히려 폐쇄 전보다 시장이 활발해졌다’ 고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최근 친일 문제로 시끄러운 장지연의 『마산기행』기록입니다.

‘한 때 번성의 극치를 이룬 마산은 진해에 군항을 설치한 이래 마산의 상인들이 진해 쪽으로 넘어가는 이가 많아 요사이는 오히려 1911년 이후 인구가 줄어들고 점포들도 활기를 과거에 비해 잃었다’
고 한 것입니다.

두 주장은 각각 나름의 근거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개항기 이후 발간된 자료들과 1911년에 시작되는 남성동 해안 매립공사 등을 보면 장지연의 글처럼 마산이 비록 ‘과거에 비해 활기를 잃었다’ 하더라도 마산도시 전체가 크게 위축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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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비 2011.05.02 10:3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옛날 진해의 모습이 훨씬 정도되고 좋은 것 같네요.

    • 허정도 2011.05.02 20:57 신고 address edit & del

      일제의 진해 건설 초기사진입니다.
      잘 계시죠?

    • blokken 2011.05.13 08:39 신고 address edit & del

      잘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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