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5.01.05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33) - 지방교육의 중심, 향교와 서원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8   지방교육의 중심, 향교와 서원

 

전근대사회의 교육은 모든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평등사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예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양인 농민 이상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림의 떡이었다. 온종일 책을 끼고 살았던 양반들과 생업에 전력할 수밖에 없는 농민들이 형설지공(螢雪之功),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그들과 경쟁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반의 자제들은 서원에서 향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과거시험을 치르고 그들은 관료로 나아갔고 이로 인하여 경제적 기반도 확보할 수 있었다.

<창원향교의 전경 / 향교의 건물배치는 항상 성현의 배향공간인 대성전(사진 제일 뒤쪽 큰 건물)이 교육공간인 명륜당(가운데 큰 건물)보다 우위에 두도록 하였다. 구릉지에 위치하여 고저차이를 이용하였다. 사진 앞쪽에서부터 문루의 역할을 겸한 풍화루, 기숙공간인 동재·서재, 성현위패를 모신 동무·서무가 있다.>

 

-지방교육의 중심-향교에서-

교동, 교촌, 교촌동, 교리, 명륜동……. 이러한 마을 이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향교가 있었거나 지금도 남아있는 마을을 의미한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 나라 유현(儒賢)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들며 유학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고 지방민을 교화하는, 곧 제향과 교육의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이다.

성균관이 대학에 해당하는 중앙의 최고 교육기관이라면 향교는 초등교육기관인 서당을마친 유생들이 중등교육을 받는 지방 최고 교육기관이다.

지방의 또 다른 교육기관인 서원과는 기능과 목적은 같으나 서원이 사학기관임에 반하여 향교는 지방관청에 속한 관학기관 임에 차이가 있다.

향교의 발생은 고려중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지방교육제도로 정착한 것은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건국한 조선이 들어선 다음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유교이념을 전파하여 지방통치를 잘 해내기 위해 전국 각지의 주, 부, 군, 현에 각각 하나씩 향교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향교의 운영에 드는 비용이 막대했다. 국가는 이른바 토지와 노비를 지급하여 지원하였으나 실제 수요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지방관청도 부족 분을 메우려 노력하였으나 향교 운영은 적자를 면할 수 없었고, 이러한 문제의 누적은 조선후기 향교가 쇠퇴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향교에 입학한 16세 이상의 학생을 교생(校生)이라 하였다. 교육기한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40세까지 향교에 머무를 수 있었다.

또 원칙적으로 평민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나 교생이 될 수 있었다. 생도들은 향교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하면 생원, 진사의 호칭을 받고 다시 성균관에서 수학하여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교생의 정원은 고을의 크기에 따라 달랐는데『경국대전』에 의하면 부(府)와 목(牧)은 90명, 도호부는 70명, 군(郡)은 50명, 그리고 현(縣)은 30명이다.

교생은 신분에 따라 양반은 액내 교생(額內校生:정원내 학생), 서얼과 평민을 액외 교생(額外校生: 정원외 학생)이라 하여 차별을 두었으나, 조선후기 신분제의 변동으로 서얼, 평민이 정원내 교생으로 편입됨에 따라 기숙공간에 따라 동재 유생(東齋儒生: 양반), 서재 유생(西齋儒生:평민, 서얼)으로 구별하였다.

향교에서 교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관으로 큰 고을은 교수(종6품), 작은 고을에는 생원· 진사 출신의 훈도(종9품)를 두었다.

그러나 약 330개에 달하는 모든 군현에 이들을 파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식 관원은 아니지만 교수직을 수행하는 교도직, 학장(學長)이라는 이름으로 그 지방의 생원이나 진사 중에서 선발하여 충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초기부터 교수관의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 이유는 문과에 합격한 자가 지방의 교수관으로 부임하기를 꺼렸고, 생원이나 진사들도 과거를 통한 중앙 관료 진출을 선호하여 교도직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차 교수관의 수준이 떨어지게 되고 이에 따라 유능한 학도들은 서원 등의 사학기관을 찾게 되었다.

조선 후기 향교는 이로 인해 교육능력을 상실하고 문묘의 향사를 받드는 일로 관학의 면모를 유지하는데 급급하게 되었다.

이처럼 16세기경부터 향교는 수용인원, 교수진이나 교생의 질적인 면에서 점차 부진한 상태를 드러내다가 임진·병자의 양란을 겪은 뒤로는 건물과 인재의 손실, 재정의 궁핍 등으로 유명무실한 형편이 되었다.

게다가 서원의 성행은 향교의 쇠퇴를 부채질해 마침내 고종 31년(1894)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현재 남한에는 231소의 향교가 남아있다.

 

-창원 향교의 모습-

창원 향교는 원래 고려 충렬왕 때 세워졌다고 하나 확실치 않으며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창원 향교의 명륜당>

 

향교를 처음에 소답동에 세웠다가 성종때(1482) 합성동 내상리의 청룡산 아래로 옮겼다.

그러나 그 곳이 숭무(崇武)의 땅(地)이지, 숭문(崇文)의 땅이 못된다고하여 영조 25년(1749)에 부사 이윤덕에 의해 태을산(구룡산) 아래의 현 위치로 옮겼으며, 1761년 당시 부사 임익창에 의해 풍화루(風化樓)가 창건되었던 것이다.

향교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250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만나게 된다.

향교나 서원의 뜰에 해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는 행단(杏亶)이라 하여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친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입구에 ‘부사 이윤덕 이교불망비(異敎不忘碑)’와 ‘부사 임익창 풍화창건비(風化創建碑)’가 있어 향교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창원향교의 정문은 이층누각 풍화루(風化樓)이다.

보통 향교의 정문은 두가지 양식으로 지어진다. 하나가 문 세 개가 나란한 삼문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누각식이다.

누각식은 아래로 출입구를 내고 누마루는 유생들이 시부를 읊조리고 경치를 조망하며 학문을 연찬하기도 하는 장소로 쓰인다.

편액의 내용은 유교의 덕이 바람처럼 아래의 백성에게 퍼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풍화루의 오른쪽 문을 통해 들어서면 정면에 명륜당이 듬직하고 양쪽으로 동재와 서재가 나란하다.

향교건축은 고상한 선비의 기품처럼 단순 소박하고잘 균제되어 있다. 이곳의 건물들은 기능에 충실할 뿐 다른 장식이 배제되어있고 이 공간의 남북으로 중심선을 그어보면 양쪽이 정확한 대칭을 이루고 있어 단정한 선비를 대하는 기분이 된다.

명륜당은 오늘날의 교실이자 교수의 숙식처이다. 동재·서재는 이름 그대로 학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이다.

창원이 도호부임을 미루어 창원향교의 정원은 7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금 좁은 느낌이 든다.

동재에는 양반의 자제들이, 서재에는 평민 자제들이 생활하였다.

명륜당을 돌아들어 좌우로 담장이 이어진 내삼문을 통과하면, 대성전이 정면에 있고 그 앞의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있다.

이곳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곳이다. 이 세 건물도 대칭이 철저한 차분한 통일성과 조용한 엄숙함으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의 향교처럼 우리지역도 평소에는 비어 있고 석전(釋奠)이나 제례 때 정도에만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밖진동면 교동리에 위치한 마산 향교가 있다.

원래 조선초 태종13(1413)에 이곳이 현으로 승격되어 설치된 ‘진해향교’가 그 원초였으나 순종3년(1909)에 현을 폐함에 따라 진해향교는 폐교되었다.

그후 ‘창원군 향교’로 개칭되어 현 위치에 복원되었다가 1996년 진동면이 마산시에 편입됨에 따라 ‘마산향교’로 개칭된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진해에도 웅천향교가 있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폐교된 것이다. 철거된 건물 중 일주문이 현재 창원 불곡사의 출입문으로 사용되고 있어 향교의 존재를 증명해 주고 있다.

 

-지방교육의 중심-서원으로-

서원은 향교와 달리 우리나라 선현만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 교육기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조선 중종 38(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처음으로 성리학을 소개한 고려 안향의 옛 집터에 사당을 지어 안향을 기리고 선비 자제들을 교육하면서 비롯되었다.

서원이 더욱 성행하게 된 것은 퇴계 이황의 서원 설립운동에서 비롯된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와서 서원에 대한 지원을 조정에 건의하는데, 이에 명종은 1550년 이를 권장한다는 뜻에서 백운동 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액(額: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과 노비, 면세·면역의 특권을 내려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제 서원은 관학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많은 사림양반들이 이전보다 더욱 더 서원 건립에 열성을 기울일 수 있게된 것이다.

또 다른 서원의 확대이유로 사화(士禍)가 큰 계기가 되었다.

향촌에서 나름대로 학문을 연구하던 사림양반들이 중앙정계 진출을 시도하나, 당시 훈구파 실권자들과 충돌하여 큰 피해를 보는데 이를 사화라고 한다.

이후 사림들은 산간이나 고향으로 낙향하여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

이후 서원은 향촌의 선비와 명망 있는 석학들이 연결되면서 체계적인 교육시설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서원은 동문, 사제관계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서 중앙 정계에서 쫓겨난 선비들의 재기 장소로 활용되었고, 붕당의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위치적으로 서원은 향교와는 달리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교육적 효과를 높이고 절터에 많이 세워 불교를 억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서원의 건물 배치는 향교와 비슷한데, 일반적으로 전교당·홍교당 등으로 불리는 공부장소인 강당을 중심에 두고, 그 양옆에 기숙공간인 동재·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강당 뒤에 제사공간인 사우(祠宇)가 배치되어 있다.

입학자격은 서원에 따라 달랐으나 대개는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이면 들어올 수 있었다.

한편 교육과 제사 외에 서원(書院)이란 명칭이 당나라 때 궁중에 설치되어 서적을 편찬하고 보관하던 집현전 서원(集賢殿書院)에서 유래된 것에서 보듯이 여러 서적을 수집, 보관하고 나아가 연구 성과와 선현의 사상을 서적으로 출판하는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역의 도서관’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조선후기로 오면서 서원이 크게 늘어나면서 서원의 본래 기능이 변질하기 시작하였다.  특정 가문의 결속을 위한 문중서원이 많이 난립하게 되고, 그들의 조상 가운데 한 인물이 제향되면서 교육의 기능보다 사묘(조상숭배)의 기능이 더 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서원은 혈연·지연·학벌·사제·당파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 경향으로 변질되었다.

한 면세·면역의 특권이 남용되어 국가재정의 부족을 초래하고, 백성에 대한 심한 횡포, 관학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국, 1864년 흥선대원군은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정리하게된 것이다.

 

-우리 지역의 서원들-

무학산 계곡 일대의 서원곡을 찾아가면 서원을 만날 수 있다.

곳은 조선 중기의 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15431620)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마산에 칩거하면서 두척산(무학산)의 경치에 매혹되어 서원골(書院谷)에 취백당(聚白堂)이란 정자를 지어 시·서를 강론한 곳이다.

1634년 그의 문하생들에 의해 청와를 덮은 정자를 세워 회원서원이라 했으나 뒤에 대원군에 의해 폐쇄되고 정자만 남았다.

이것이 바로 합포바다를 굽어 본다고하여 이름 붙여진 오늘의 관해정이다.

<마산 교방동에 있는 회원서원, 관해정>

 

지금도 이곳에서 해마다 음력3월과 9월에 한강과 그의 문하인 미수 허목을 제사지낸다. 

관해정 입구에는 정구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수령 440년의 은행나무(높이 13M)가 있는데 은행나무가 교육기관의 상징임은 앞서도 말한바 있다.

허목선생은 예송논쟁 후 관직을 물러나 마산에서 저술편찬과 후진양성에 힘쓴 분이다.

또한 글씨(전서)에 능하여 동방의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그의 친필이 북면 달천계곡의 바위에 ‘달천동’이라고 음각이 되어 전해지고 있을 정도이다.

한편 서원의 정문인 외삼문 만이 있어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창원시 사화동에 가면 좀 색다른 느낌의 운암(雲岩)서원을 볼 수가 있다.

1702년 운암사라는 사우였으나 1843년 서원으로 되었다가,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손된 곳이다.

100년이 넘는 회나무가 십여 그루 장관을 이룬 곳이다. 회나무를 심는 이유도 은행나무와 비슷한 맥락에서 심어졌다고 한다.

중국 주나라 때 삼괴(三槐)라 하여 조정에 회나무 세 그루를 심고 삼공(三公)의 자리를 나타냈으며, 당나라 때는 회나무 꽃이 노랗게 변하는 음력 7월 무렵에 과거를 보였다.

특히 낙양 동쪽의 회나무숲에서는 선비들이 손수 쓴 책을 사고팔고 강론을 하기도 하여 흔히 괴시라 불렀는데 이 일을 들어 대학을 괴시라고 일컬었으니 마당에 회나무가 선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마산시 해운동 월영대에 가면 월영서원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름만 남아 있다.

이 서원은 조선 헌종 1846년에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학덕을 기려 세운 것이다.

월영대는 고운 선생이 자주 들려 소요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월영서원의 원래 건물은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손되었을 것이라 여겨지며, 현재의 월영대는 1932년에 ‘월영대 비각’과 그 대문인 ‘척융문’, 그리고 두어 개의 기념비 등을 지은 것으로 본래의 건물과는 무관하다.

이 밖에도 문중가문의 성격을 띤 서원은 마산에 7곳 , 창원에 3곳이 더 있다.<<<

  이제욱 / 당시 창원여고교사

 

 

 

 

 

 

신고
Trackback 0 Comment 0
2014.12.22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31) - 9산 선문의 남쪽 끝, 봉림사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6  9산 선문의 남쪽 끝, 봉림사

 

봉림산 중턱까지 올라가노라면, 산들바람을 벗삼아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봉림사 옛터에 이르게 된다.

흔적만 쓸쓸하게 남아있는 건물지, 탑지, 연못지 등은 우리의 기억을 천년 전의 아득한 세월 속으로 이끌어 당긴다.

나말여초! 이 땅에는 사회변동의 기운과 전쟁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믿음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무너져가던 신라왕실이나 왕실·중앙귀족과 밀착된 화엄종 등의 교종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이 기댈 곳이 아니었다.

여러 곳에서 자라나던 지역의 세력가들이나, 미륵신앙·선종 등이 희망으로 떠올랐다.

천년 전 우리 지역인 김해와 진례에서도 경주의 중앙정부와 독립된 세력가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이 선종의 뛰어난 고승을 불러들여 이곳에 머물게 하였다.

이 땅의 남쪽자락인 창원 봉림산 기슭에 들어선 9산선문의 하나인 봉림산문이 그것이다.

<봉림사 터>

<창원시 상북초등학교에 있는 봉림사지 삼층 석탑>

 

-만들어진 천년 전의 인연-

19193월 경복궁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봉림사의 옛 터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던「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에는 봉림사가 만들어진 천년 전의 인연을 다음과 같은 흔적으로 남겨두고 있다.

 

(진경 대사 심희는) 얼마 후 김해의 서쪽에 복림이 있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갑자기 이 산을 떠나 남쪽으로 가겠노라 하였다. 진례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리니, 이에 … 진례성 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熙)가 도를 사모하는 정이 깊었으며 (대사의) 소문을 듣고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성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절을 고쳐주며 법의 수레를 머물도록 청하였는데,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난 듯하였고, 병든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의원을 만난듯하였다. …

이 절은 비록 터는 산맥에 이어져 있었으나 문은 담장 밑까지 기울어져 있었다. 대사는 경치가 기이하고 빼어난 곳을 찾고 가렸으나, 날쌘 말이 서쪽 산봉우리에서 놀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우는 곳만을 어찌 대사의 생각에 과연 마땅하고 신인의 …에 깊이 흡족하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작은 절을 고쳐지어 발길을 멈추었으며, 봉림(鳳林)이라 이름을 고치고 다시 선우(禪宇)를 열었다.

이보다 앞서 지 김해부 진례성 제군사 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이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임금에게는 충성을 다하였으며 선문에 귀의하여 절을 고치는 것을 도우니, 대사는 마음 속으로 …을 기꺼이 여겨 그 곳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고자 생각하고, 그윽한 가르침을 크게 베풀었고 불도를 널리 떨쳤다.

 

연구자들은 이 내용을 두고 달리 해석하기도 하나, 본 주제와 관련하여 두 사실에 주목하였다.

선, 김해지역에서 세력가들의 등장 순서와 그들 상호간의 관계이며, 다음으로 봉림사 개창의 후원 인물이다.

전에는 김(소)충자·율희 형제가 김인광 세력을 몰아내고 김해의 세력가로 자리 잡았으며, 봉림사의 개창도 김율희가 도와주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진례성의 김율희 형제가 김해의 금관성을 빼앗아 그들의 근거지를 그곳으로 옮기면서 진례성의 직책을 김인광에게 맡겼으며, 김인광이 봉림사의 개창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이제 이같은 견해를 우리의 머리 속에 담고서 천년 전의 인연을 찾아보기로 하자.

진경대사 심희가 897년 무렵 김해지역에 머물게 되면서 봉림산문이 열릴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진례성의 세력가인 김율희는 심희를 극진하게 맞아들이고, 고친 절에 머물게 하였다.

그는 사굴산문의 행적, 수미산파의 이엄, 가지산파의 국운, 원주 흥법사의 충담 등과 같이 뛰어난 선종 승려들도 김해지역으로 불러들여 이 지역사회를 ‘선종의 요람’으로 만들어 갔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김해지역 세력이 중앙정부와 독립할 수 있고, 지역사회 내부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지원 받고자 이들 고승들을 불러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 심희는 금관가야 왕족인 김유신계의 후손이면서 이미 그의 아버지 때에 몰락하여 중앙정계의 진출이 막혀 있었다.

이러한 출신성분은 심희가 김해지역과 연고권을 가질 수 있고, 반신라적인 성향을 띨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당대 불교계나 왕실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현욱에게 출가하여, 불교계 내부에서 명망과 위상을 크게 얻었다.

그가 강진의 송계서원과 설악산에 머물 때, “배우는 사람들이 비오듯 모였고, … 선객이 바람처럼 달려 왔다”라는 내용에서, 그는 김해지역으로 옮겨오기 전부터 이미 명망과 위상을 크게 얻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희의 이러한 성향과 조건은 당시 금관가야의 전통을 회복하면서 중앙정부로 부터 독립하려는 김해지역 사람들의 정치적 바램에 부응하는 것이며, 지역사회를 한 곳으로 묶을 수 있는 영향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율희 세력이 심희를 적극 불러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심희도 김해지역에 대한 자신의 연고권과 함께, 김해세력을 통해 자신의 이상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김율희의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심희가 김해에 머물게 되니,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난 듯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의원을 만난 듯하였다” 라는 내용은 그가 김율희를 비롯한 김해지역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그가 김해에 머물 때, “국왕(효공왕)이귀의하고 당시 사람들이 공경하며 우러른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라고 한 내용에서도 그의 명망과 위상이 왕실에까지 떨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만, 그는 효공왕의 일방적인 귀의에도 불구하고 경주로 가지 않았으며, 이러한 행동은 당시 그와 김해 사람들의 반신라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명망과 위상은 봉림산문을 열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심희는 효공왕(897912) 무렵 창원의 봉림산에 있던 작은 절을 수리하여 봉림사라 고치고 봉림산문을 열었다.

이 불사는 김해지역의 최고 세력가인 김율희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진례성의 김인광이 실질적으로 도와주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김인광은 상당한 유교적 소양을 가진 6두품 가문출신으로 관직에 있다가 김해지역과 연고를 맺었으며, 김율희를 이어 진례성의 장군으로 성장한 인물이라 한다.

그는 유학적 성향을 가졌으면서도 심희가 “그곳(봉림사)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고자 생각”할 만큼 봉림사를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가 이 불사를 도운 연유는 위의 내용처럼 자신이 선문(선종)에 귀의한 종교적 인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출신성분이 같은 옛 가야계 후손이라는 연대의식도 작용하였으며, 김인광이 진례지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사상적 근거를 심희에게서 지원받고자하는 측면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여주 혜목산의 고달사에 있던 원감국사 현욱에게 배웠던 진경대사 심희는 김해지역의 세력가인 김율희 형제의 초청을 받아 머물면서 봉림산문을 열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김율희의 지원과 진례성 김인광의 실질적인 도움으로 효공왕 무렵 창원 봉림산의 옛 절을 고치어 ‘봉림사’라하고 ‘봉림산문’이라는 독립된 9산 선문을 열었던 것이다.

<창원 용지공원에 있는 봉림사지 탑비 모조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이념을제공했다-

봉림산문을 연 뒤, 심희는 경명왕의 초청으로 경주를 다녀왔으나, 입적할때까지 김해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불법을 가르치고 불도를 널리 떨쳤다.

과정에서 찬유, 경질, 융체 등을 비롯하여 500여명의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현욱을 개조로 하고 자신을 제 2조로 하는 봉림산문의 터전을 닦았다.

또한 그는 김해지역을 독립시키고 지역사회를 묶을 수 있는 사상적 근거도 제공하였으며, 봉림산문의 위상을 신라 전역까지 넓히기도 하였다.

경문왕이 “대사가 당시에 천하의 존경을 받아 신라에서 따를 사람이 없다”라고 표현할 만큼 심희와 봉림산문의 지명도는 전국에서 드높아지고 있었다.

그 결과 경명왕은 재위2년(918) 심희를 초청하였던 것이다.

신라는 효공왕 11년(907) 무렵부터 경명왕이 즉위할 때까지 자립적인 군사 능력을 상실하여 후백제 등의 침략 위협에 직면해 있었고, 중국과의 해상 교통로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신라 왕실은 경주의 변방에 위치하면서 강력한 정치·군사력을 가진 김해 해상세력과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었으며, 봉림산문 심희의 초청을 성사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래서 효공왕은 정법대사 여환을 보내면서까지 심희에게 일방적으로 귀의하였으며, 경명왕은 심희를 당대 최고의 선승이라 칭송하면서 흥륜사 상좌인 승려 언림과 중서성 내량인 김문식을 보내어 극진하게 예우하면서 초청하였던 것이다.

심희는 결국 경명왕의 초청을 받아들였으며, 그 이유는 신라왕실이 김씨에서 박씨로 바뀌면서 김유신과 그의 후손의 지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라 한다.

초청 뒤에도 경명왕은 백관들에게 심희가 머물던 곳에 가서 칭송하게 할만큼 그를 극진하게 예우하였다.

심희는 경주에 머물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을 제시하여 그의 이상정치를 설파하였으며, 신라 왕실의 대고려·후백제 외교정책, 정치적 안정과 권위를 높일 수 있는 방안도 제시하였다.

한편 봉림산문 개창은 김해 및 창원을 비롯한 우리 지역사회의 문화적 성장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불교문화는 9산선문의 개창으로 지역사회까지 확산되면서 우리 지역의 문화적 창조능력을 높이게 되었다.

선종의 절을 만들거나 수리하면서도 건축물·공양구와 같은 불교 조형물, 승려 개인의 생활집기 등을 같이 만들게 되었으며, 그 결과 지역사회의 문화적 창조와 수공업적 기술 능력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절은 세속인에게 신앙의 안식 및 제례와 같은 생활신앙이나 일상의례, 의료·구휼과 같은 사회사업, 도적의 방지나 여행자의 편의 제공과 같은 사회적 혜택도 제공하였다.

나말여초 봉림사도 그러한 기능을 담당하여, 우리 지역사회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이나 삶의 질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렸을 것이다.

더구나 이 당시는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으며, 봉림사가 이 지역 사람들의 중심적인 안식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 기능과 의미는 더욱 크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이처럼 봉림산문의 개창은 경주 중심의 중앙집권적 현상을 탈피하고, 지역사회의 자생적 능력이 그 지역사회의 생존과 발전을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사상적 근거와 실천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경복궁에 있는 봉림사지 보월능공탑>

 

-그날의 뜻이 오늘에도-

심희는 경주에서 돌아온 이후 그가 입적할 때까지도 신라왕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명왕 7년(923) 4월 심희가 봉림사에서 입적하자 국왕은 소현 승 영회를 먼저 보내어 조문하게 하였으며, 이어 사신을 특별히 파견하여 부의하는 물자를 보내는 한편 ‘진경대사’라 추증하여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보월능공지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비문을 찬술하여 다음 해인 경애왕 1년(924) 4월에 봉림사에 그의 탑비를 세워주었다.

봉림사가 경애왕 초기까지도 왕실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 때는 아직 김율희의 세력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봉림산문이 창원 지역에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심희의 사법제자이자 봉림산문의 제3조인 찬유가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견훤이 경주를 침략한 경애왕 말년(927) 무렵에는 김율희 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게 되며, 그에 따라 창원 봉림산의 봉림산문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찬유는 봉림산문의 개조인 원감대사 현욱이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던 혜목산의 고달사로 봉림산문의 근거지를 옮겨가게 되었다.

삼국 전쟁의 막바지 기운에 휘말렸던 김해에서 봉림산문은 떠나게 되었다.

제 남쪽 끝자락에 있었던 봉림산문은 전쟁의 기운이라는 세상의 크나큰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그 근거지가 경기도 여주 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봉림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까지 그 명맥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찬유는 고달사를 크게 중창하여 고려 광종 때에 와서 전국 3대 선찰의 하나로 발전시켰으며, 선종교단의 통합과 법안종의 수입 등 불교개혁의 근거지가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초기사회에서도 봉림산문의 위상과 역할이 더욱 넓혀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반은 창원의 봉림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봉림사 옛 터를 내려오면서 천년 전 이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들에게 남긴 흔적을 생각해 본다.

천년 전 그들은 신라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저항하면서 우리 지역의 자생적 능력을 한데 묶어서 그들의 믿음과 삶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를 봉림산 기슭에 마련하였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들은 지방자치제의 확대 시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심화되어 가는 중앙집권화 현상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천년 전 그들의 바램이나 실천이 실현되고 있지는 못하지만, 196080년대의 민주화 투쟁이 우리 지역에서 움텄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따름이다.<<<

 

호 / 당시 동아대학교 석당전통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신고
Trackback 0 Comment 0
2014.12.08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9)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4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푸른 및 드리운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 날 저문데 그 누가 구름 속 길을 찾느뇨.남암(南庵)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가시지, / 내 앞의 푸른 이끼 밟아 더럽히지 마오.

산골에 해 저무니 어디로 가리, / 남창(南窓) 빈자리에 머물고 가오. / 깊은 밤 백팔염주 세고 있으니, / 길손이 시끄러워 잠 못 들까 두려워라.

 

『삼국유사』권 탑상(塔像)편에는 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수도와 성불 과정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위의 찬문(贊文) 가운데 앞의 것은 백월산 북암(北庵)에서 수도했던 달달박박을, 뒤의 것은 남암(南庵)의 노힐부득을 찬한 것이다.

어두운 밤 백월산 깊은 골짜기를 찾아온 낭자-여인으로 현신한 관음보살-를 맞이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사뭇 대조적이다.

달달박박은 자신의 청정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기 위해 낭자를 한 발자국도 용납하지 않는다.

면 노힐부득은 오갈 곳 없는 낭자를 위해 잠자리를 내주면서 오히려 잠 못들까 걱정까지 하고 있다.

누가 더 진솔한 모습일까?

이 설화는 이러한 대비를 통해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백월산 정상부 전경>

 

-백월산의 전설-

창원시 북면과 동읍 사이에 백월산(白月山)이라 부르는 명산이 자리잡고 있다.

이 산 동쪽으로는 대산평야, 서쪽으로는 북면평야가 펼쳐져 있고, 동쪽 기슭에는 겨울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다.

해발 400여 미터에 지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산세가 사방 1백여리에 뻗치며, 특히 봉우리가 빼어나 옛부터 명산으로 꼽혀왔다.

『삼국유사』에서도 백월산에 대해 ‘산봉우리가 기이하고 빼어나며 자리잡은 넓이가 수백 리에 뻗쳐서 참으로 큰 진산이라할 만하다’고 하여 찬탄해 마지 않는다.

백월산의 유래는 매우 전설적이다.

옛날 당나라 황제가 일찍이 못을 하나팠는데, 매월 보름 전에 달빛이 밝으면 못 가운데 사자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산 그림자가 은은히 화초 사이로 비치면서 나타났다고 한다.

황제가 화공을 시켜 그 모양을 그린 다음 사신을 보내어 온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이 바위를 찾게 하였다.

그 사신은 우리 나라에 와서 백월산에 큰 사자바위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산 서남쪽 2보쯤 되는 곳에 화산(花山)이라 부르는 삼산(三山)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산이라 한 것은 몸체는 하나이고 봉우리가 셋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사신은 이 산이 그림과 비슷하다 여겼으나,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 신발 한 짝을 사자바위 꼭대기에 걸어두고 돌아와서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 때 신발의 그림자 역시 못에 비쳐 나타나자, 황제가 이를 이상히 여겨 산 이름을 백월산이라 지어주었더니 그 후 못에 그 산의 그림자가 없어졌다고 한다.

백월산이라 한 것은 보름 전인데도 달빛이 환하게 밝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백월산 북사 삼층석탑>

 

-수도의 길에 나선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백월산 동남쪽 3천 보쯤에 자리잡고 있는 선천촌(仙川村)에서 태어나 함께 살았다. 두 사람의 이름은 모두 우리말로 지은 것이다.

노힐부득의 아버지는 월장(月藏), 어머니는 미승(味勝)이었으며, 달달박박의 아버지는수범(修梵), 어머니는범마(梵摩)라 하였다.

두 사람은 20세 때 마을 동북쪽의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서 함께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얼마 후 이들은 다시 서남쪽의 치산촌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으로 옮겨, 노힐부득은 대불전(大佛田)의 회진암(懷眞庵)에, 달달박박은 소불전(小佛田)의 유리광사(琉璃光寺)에 각각 자리잡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두 처자를 데리고 농사지으면서 수도하였고, 아직 속세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어느 날 신세의 무상함을 느껴 다음과 같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땅과 풍년 든 해가 참으로 좋지만, 의식이 생각하는 대로 생기고 절로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고, 부녀와 가옥이 참으로 좋지만, 연화장(蓮花藏)에서 여러 부처님들과 함께 놀고 앵무새, 공작새와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네.

더군다나 불도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돼야 하고 진심을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얻어야 함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인 것을 벗어버리고 더할 나위 없는 도를 이루어야지, 어찌 풍진(風塵)에 골몰하여 세속의 속된 무리들과 다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렇게 다짐한 두 사람은 마침내 세속을 등지고 백월산 깊은 산골 무등곡(無等谷)으로 들어갔다.

노힐부득은 남쪽 암자에서 미륵불을 염원하였고, 달달박박은 북쪽 암자에 자리잡아 아미타불을 경건히 염송(念誦)하였다.

 

-부처가 된 두 사람-

두 사람의 행로는 수도한지 3년쯤 되었을 때 갈리기 시작하였다. 신라 성덕왕 8년(709) 48일 밤 그들이 수도하고 있던 깊은 산골에 아리따운 낭자가 찾아오면서부터였다.

낭자는 먼저 달달박박이 수도하고 있던 북암(北庵)을 찾아, 다음과 같은 글을 주면서 하룻밤 재워 주기를 청했다.

 

날저문산속에서갈길이아득하고          行逢日落千山暮

길없고인가머니어찌하리요                路隔城遙絶四隣

오늘밤은이곳에서자려하오니             今日欲投庵下宿

자비하신스님은노하지마오                慈悲和尙莫生嗔

 

달달박박은 낭자의 말을 듣고 단호히 거절하면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암자는 깨끗해야 하니, 여자가 가까이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낭자는 어쩔 수 없이 노힐부득이 수도하고 있는 남암으로 가서 잠재워 주기를 청했다.

낭자는 야밤에 깊은 산골에 온 것을 미심쩍어 하는 노힐부득에게 “어진 선비의 지원(志願)이 깊고 덕행이 높단 말을 듣고 보리(菩提)를 도와 이루어 드리려 할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넌지시 자신이 이곳에 온 까닭을 암시하고게송(偈頌) 한수를 지어 바쳤다.

 

첩첩산중에날은저문데                                     日暮千山路

가도가도인가는보이지않소                               行行絶四隣

송죽(松竹)의그늘은한층그윽하고                       竹松陰轉邃

냇물소리는한결더욱새롭소                               溪洞響猶新

길을잃어찾아왔다마오                                     乞宿非迷路

요체(要諦)를지시하려하오                                尊師欲指津

부디이내청만들어주시고                                  願惟從我請

길손이누구인지는묻지마오                               且莫問何人

 

노힐부득은 이 말을 듣고, “이곳은 부녀와 함께 있을 데가 아니지만, 중생의 뜻에 따르는 것도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입니다”라고 하면서 낭자를 암자 안으로 맞아들였다.

밤이 깊어가자 노힐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가다듬으면서 쉬지않고 염불하였다.

그런데 밤이 이슥해지자 해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멀쩡했던 낭자가 산기(産氣)가 있다고 하면서 노힐부득에게 출산 준비를 부탁하고, 아이를 낳자 목욕시켜 달라는가 하면, 그에게 들어와서 목욕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승려인 노힐부득으로서는 어느 것 하나도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다.

러나 그는 낭자의 처지가 가엾고 불쌍하여 출산을 돕고, 물을 끓여 정성껏 목욕까지 시켜 주었다.

낭자가 목욕통 속에 들어가자 물에서 향기가 강렬하게 풍기더니 그 물이 금빛 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낭자의 권유에 따라 함께 목욕한 노힐부득의 살결도 금빛으로 변했다. 어디서 온 것인지 옆에는 연화대(蓮花臺)도 놓여 있었다.

낭자는 그에게 거기 앉기를 권하면서, “나는 관음보살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어준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노힐부득은 낭자의 도움으로 성불하게된 것이다.

이튿날 아침 달달박박은 남쪽 암자를 찾았다. 노힐부득이 지난 밤에 계(戒)를 더렵혔을 것으로 생각하고 비웃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노힐부득은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광채를 내뿜고 있었으며, 몸은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달달박박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마음에 장애가 너무 겹쳐서 부처님을 만나고서도 알지 못했음을 탄식하면서 노힐부득에게 자신도 성불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미 성불한 노힐부득은 목욕통에 아직 남아 있는 금물로 목욕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달달박박도 무량수불(無量壽佛 아미타불)이 될 수 있었다.

목욕물이 모자랐던지 아미타불은 얼룩진 반점이 남아 있었다.

 

-백월산 남사의 창건-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각각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성불했다는 소식은 곧 가까운 곳에서부터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백월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마침내는 서울에까지 알려져 왕실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경덕왕은 왕 14년(755)에 이 이야기를 듣고, 2년 뒤인 16년(757) 이곳에 사신을 보내어 대가람(大伽藍)을 조성케 하였다.

이 절은 이로부터 7년 뒤 경덕왕 23년(764) 715일에 완성되어 ‘백월산 남사(白月山南寺)’라 이름지었다.

사찰의 완공과 함께 다시 미륵존상(彌勒尊像)을 만들어 금당에 모시고, 액호(額號)를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강당에는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모시고, 그 액호는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

이렇게 조성된 이 대가람의 전각과 불상은 현재 자취를 찾을 수 없고 절터만 남아 있다.

창원시 북면 백월산 계곡에 들어서면 대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절터로 보이는 흔적이 드러난다. 이곳에는 옛 기와와 토기조각이 이곳저곳 널려 있어 절터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부근에 ‘반야동(般若洞)’, ‘사리터’, ‘중산골’등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다수 있는 것으로 보아도 유명한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백운암(白雲庵)이 있는데, 이 암자에 있는 석등은 본래 남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 전하고 있다.

또한 이 절터에서‘남사(南寺)’라는 명문이 박힌 기와 조각을 발견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그 절터였음이 분명하다.

<백월산 남백사지에서 출토된 '南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  >

 

『삼국유사』가 전하고 있는 백월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남사의 창건 설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백월산을 당나라 황제와 연관시킨 것은 이 지역이 갖는 국제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농사짓고 살아가는 평범한 지역 주민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신앙층이 매우 넓게 확산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초기에는 처자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출가와 승려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관음보살이 지닌 여성성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녀의 안내에 따라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성불하고 있다는 점, 미륵불은 전신이 금빛으로 남사의 금당에 봉안되었고 아미타불은 얼룩진 반점이 있는 데다 강당에 봉안 되었다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다.

이는 당시 신앙형태가 관음·미륵·미타신앙 등 여러 신앙이 혼재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시기나 지역에 따라서 조금씩 차별화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창원을 비롯한 신라 남부지역의 불교신앙은 관음신앙과 미륵신앙이 우세한 가운데 미타신앙은 그보다는 부차적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김광철 /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고
Trackback 0 Comment 0
2014.12.01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8) - 가야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3  가야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

 

우리는 신문, 방송 등의 언론 매체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에 대한 기사를 접하곤 한다.

예를 든다면 함안 마갑총에서 국내 처음으로 국보급의 가치를 가진 철제 말갑옷이 출토되어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고대 가야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든가, 또는 창원 다호리무덤에서 통나무 형태의 목관 실물과 더불어 각종 토기, 칠기, 철기류 그리고 필기용 붓이 발견되어 2,000년전에 이미 문자를 이용한 기록이 가능했고, 가야 초기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출토되었다 등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마산·창원 지역은 지형상으로 마을 배후에 솟아있는 높은 산은 바람을 막아 주어 추위를 피할 수 있으며 주변에 하천을 끼고 있고, 남동·남서향으로 쭉 뻗어있는 구릉 경사면에는 가야시대에 형성된 무덤이 수십에서 수백기 정도로 공동묘지화 되어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가야시대에 대한 역사 기록은 단편적이고 소략하다.

하지만 창원·마산을 비롯한 경남지역은 그 자체가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수 많은 문화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어 이 지역 사회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마산 현동 가야시대 무덤 배치모습>

 

-가야시기 인간들의 흔적-

마산·창원지역에서 가야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흔적들은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흔적이란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물질자료를 의미하는데 흔히 유적, 유물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가야시대와 관련된 흔적들은 당시의 마을과 생활쓰레기장인 패총, 무덤인 고분이 대표적이다.

먼저 가야시대 사람들의 마을, 쓰레기장(패총), 공동묘지(고분) 등의 공간 배치는 마산 현동유적 조사 예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마산 현동유적은 1989년 마산-충무간 국도 확장공사때 창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4기에서 6세기까지 형성된 고분, 주거지, 패총으로 구성된 복합유적이었다.

닷가인 덕동과 약 2㎞ 떨어진 마산시 현동 옥동마을 서편 구릉 사면을 배경으로 타원형의 주거지로 이루어진 가야시대 마을이다.

패총은 마을의 서쪽 계곡에 실생활에서 사용하다 버려진 생활도구와 식용으로 채취되었던 조개 껍데기가 층을 이루며 형성되어 있었다.

고분군은 시신을 안치한 공동묘지인데 당시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패총과는 반대 방향인 동쪽 사면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현동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구릉 사면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생활 쓰레기장은 가옥 주변에, 무덤은 가옥과 약간 떨어지고 패총과 반대방향인 구릉의 말단부 경사면에 조성하였다.

이러한 유적 내 공간 배치모양은 가야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바닷가와 인접한 마산·창원의 가야시대 사람들은 해발 100m 이내의 구릉 사면과 평지로 이어지는 곳에 마을을 형성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마을 주변의 높지 않는 구릉의 밭, 구릉 아래의 논에서 곡물을 생산하면서 주변 야산에서 산짐승을 사냥하기도 하였다.

또한 풍부한 해산물을 얻기 위해 마을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바닷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류를 채취하여 마을로 운반, 주요 식량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그들의 공동묘지에다 땅을 파서 시신을 안치하고 흙을 덮어 무덤축조를 완료하였다.

이러한 가야인의 삶의 모습은 우리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가야시대 유적 발굴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마산·창원에 형성되어 있는 가야시대의 수많은 유적은 진동만에서부터 마산만에 인접한 구릉과 창원분지내 구릉 및 사면, 그리고 낙동강변에 이르는 곳곳에 위치하여 있다.

바닷가와 인접한 관계로 주거지, 패총의 생활유적과 고분군은 동일지역에 분포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가야시대 유적은 10여개소에 달한다.

마산의 경우고성과 인접한 진동쪽의 대평리유적을 비롯하여 현동유적, 자산동고분군이있고 창원에는 주남저수지와 인접한 야산과 저지대까지 넓게 형성된 다호리 유적, 39사단과 인접한 도계동고분군, 가음정동유적, 삼동동 옹관묘유적, 반계동유적, 천선동고분군, 창곡동유적 등 10개소에 달한다.

이 중에서 가야초기의 고분은 다호리유적, 도계동유적 등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토광묘이다.

토광묘는 시기적으로 목관묘 축조기, 목곽묘 축조기로 나눌 수 있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는 무덤내 목관을 사용한 목관묘 축조기이고 그후 4세기 후반까지는 무덤의 규모가 커지면서 새로 목곽을 추가하여 축조하는 목곽묘가 유행하였다.

목관·목곽묘는 땅을 장방형으로 파고 나무로 만든 관, 곽을 짜서 시신을 넣고 주위에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흙으로 만든 그릇(토기), 도구와 무기로 사용하였던 철제유물 등을 부장한 구조이다.

무덤의 세부적인 구조와 형태는 오늘날의 장례시 행해지는 무덤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무덤을 축조하는 전통이 상당히 보수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창원여고 부지에 있었던 삼동동고분은 옹관묘(2개의 항아리를 붙여 만든 무덤)유적으로 유명하다.

우리 지역의 4세기대 대부분 가야시대 고분들은 토광묘 중심이었지만 삼동동유적에는 조사 무덤의 70%가 옹관으로 무덤을 만든 형식이다.

옹관묘가 주종을 이루는 고분은 낙동강 주변의 가야시대 고분에서 삼동동유적 외 알려진 바는 없고 전라남도의 영산강유역과 일본에서 다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바다를 통해 이들 지역간에 무역이나 사람의 왕래 등 대외교류가 있지 않았는가 짐작된다.

5세기에 접어 들면 마산 진동 대평리고분군, 현동고분군, 창원 도계동고분군에서 밝혀진 것과 같이 무덤 구조가 일대 변화하는데 기존의 목곽묘에서 4벽을 돌로써 만든 석곽묘가 등장한다.

특히창원도계동 고분군, 마산현동 고분군에서는 먼저 축조된 목곽묘를 5세기대의 석곽묘가 축조되면서 선행목곽묘를 파괴시킨 흔적이 조사되어 양 무덤간 상호 관계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무덤의 구조 중 내부 곽이 흙에서 돌로 바뀌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이전의 목관·목곽묘의 토광묘가 구조상 견고하지 못한 것을 보완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가야사회 전반에 석곽묘가 유행할 수 밖에 없는 사회 문화적 배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5세기 전반경이 되면 함안, 고성, 창녕 등 여러 가야지역에는 직경 20m가 넘는 지배계층의 무덤인 대형봉토분이 구릉 정선부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축조되고 있다.

우리 지역의 경우, 초대형 봉토분은 없지만 마산삼성병원과 마주하는 합성동 구릉 말단 정선부에 형성된 합성동고분1호분이 있는 정도이다.

그외 창원 가음정동고분군에는 직경 10m 내외의 중형분이 있고 창원분지 외곽의 봉림동고분군, 불모산동고분군에도 봉토분이 확인되고 있다.

6세기 중엽이 되면 우리 지역에는 석실분이라는 새로운 무덤이 축조된다.

<창원 가음정동 석실분>

 

이전까지의 무덤11인용이던 것이 1묘 다인장으로 바뀌게 되는데 석실분은 돌을 이용하여 견고한 무덤으로 여기에는 혈연적으로 친숙한 사람들, 즉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 무덤에 모시는 형태인 것이다.

다음으로 가야시대 고분에는 수많은 유물이 출토된다.

가야시대 사람들의 의식에는 죽은 자 역시 저승에서도 똑같이 생활한다는 믿음에서 무덤 속에 당시 주인공이 사용하였던 그릇이나 도구들을 묻어 주었다.

후대 고고학자들이 발굴할 때 출토되는 유물은 그 자체로만으로도 예술적 조형미가 있는 것이지만 당시 실생활에서 사용한 실용품이라는 점이 고고학적으로 중요성이 있다.

목관·목곽묘가 축조된 가야전기의 무덤에는 흙으로 빚어 구운 토기류와 쇠로 만든 철기류가 다량 부장되어 있어 사료가 부족한 마산, 창원지역의 가야시대 생활상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세기경에 해당하는 다호리 1호분에서는 철기, 칠기, 토기 뿐아니라 기록용 붓이 출토되어 2,000년 전에 이미 문자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적극적인 자료가 된다.

고분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물은 토기이다. 그 종류는 오늘날 제기처럼 생긴 굽다리접시를 비롯하여 대·소형 항아리, 그릇받침, 잔 등이 있다.

초기 형태는 목기와 흡사한데 아마 목제로 만든 그릇을 본 따서 흙으로 빚어 구운 것으로 생각된다.

기류는 화살촉, 작은 손칼, 큰 칼, 쇠도끼, 쇠창, 말에 달았던 발걸이, 장식구, 재갈 등과 규모가 큰 대형분에서는 갑옷, 투구 등도 출토 되기도 한다.

특히 4세기대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굽다리접시는 다리 부분에 삼각, 사각, 마름모 형태의 굽구멍을 뚫어 조형미를 부각시킨 것도 있다.

마산 현동 50호분에서는 가야시대 고분에서 출토 예가 많지 않은 특이한 뿔 모양으로 만든 각배, 예술적 미가 돋보이는 잔과 잔 받침이 부장되기도 하였다.

5세기에 접어들면 석곽묘가 축조되고 무덤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히 토기의 부장이 늘어나고 또한 영토 확장에 따른 철제 무기류, 마구류 등이 부장되는 시기이다.

도계동19호분에서는 쇠로 만든 화살통 속에 20여점의 화살촉이 함께 발견되기도 하였다.

다호리고분에서는 가야시대 가옥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는 집모양 토기가 출토되어 주목된다.

형태는 오늘날의 과수원 원두막 형태인데 구릉지에 보이는 일반적인 타원형 가옥은 아니고 구릉 아래 평지상에 위치한 창고 또는 망루의 형태인 것으로 파악된다.

<마산 현동 50호분 출토 유물들>

 

-유적과 유물은 당시의 사회를 말해 준다-

가야시대 사람들은 삶의 최후 과정인 죽음을 무덤으로 만들어 1,500여년 후 우리들에게 당시 모습을 보여 준다.

어느 노래가사처럼 인생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듯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뛰어 가는 것이다.

남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언젠가는 죽게 되는 것이고, 죽음은 인간에 있어서 생과 사를 구분해 주는 통과의례 중 마지막의 단계이다.

현대의 장례도 사람이 죽으면 양지바른 곳을 정하여 땅을 파고 오동나무로 만든 관 속에 시신을 정성스레 포장한 후 고운 흙을 깔고, 지표면에는 표시가 가능하도록 둥그스런 봉토를 덮어 마무리한다.

현대의 무덤은 부장품 없이 시신만을 모신다. 그러나 가야시대인들은 저승에서도 살아 생전과 같이 생활한다는 믿음에서 평상시 사용하였던 그릇이나 칼, 낫, 귀금속 등을 종류별로 무덤 속에 넣어 두는 것이다.

그리고 무덤을 만들 때는 반드시 그 집단의 고유한 풍습, 관념에 따라 절차가 이루어지는 관계로 후대 고고학자들은 무덤의 형태, 부장유물만으로도 언제 것인지 어느 지역인지 등에 대해 알 수 있기도 하다.

실제 가야 고분을 발굴하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식되지 않고 남아있는 토기, 석기, 철기, 돌로 된 시설물 정도이고 무덤의 주체인 사람의 인골이나 나무곽, 목제유물 등은 부식되어 그 흔적이 없다.

비록 한정된 자료만 발굴조사되는 것이지만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예술적 가치 뿐 아니라 기록이 별로 없는 가야사회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역사기록과 같은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유물을 단지 돈의 가치로 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비록 하찮게 생각되는 토기 조각 하나하나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김형곤 / 당시 창원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신고
Trackback 0 Comment 0
2014.11.24 00:00

마산 창원 역사읽기 (27) - 옛사람들의 쓰레기장, 성산패총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1  옛사람들의 쓰래기장, 성산패총

 

직선길이 12.5km로 전국 시가지 도로 중 가장 긴 창원대로를 따라 자동차로 20여분 달리다 보면 광활한 창원공단 한 복판에 야트막한 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거기에 성산패총이 있다.

성산패총은 공단도시 창원시민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창원공단은 기계생산이 주류이다. 지금의 창원모습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듯 성산패총에는 조개껍질과 토기류 외에 철을 생산했던 흔적이 발견돼 야철지(冶鐵地)로도 명성이 높다.

오늘날 창원공단을 이룬 요람인 셈이다. 지금 성산패총은 사적 24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지금도 유적지가 발굴되어 보존되는 경우는 드물다. 개발이 항상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성산패총이 발굴된 1970년대 초는‘산업근대화’를 부르짖던 시기였으므로 두 말할 필요 조차 없었다.

청와대 비서관들은 성산패총을 보존할 경80여억원의 추가 예산이 필요한데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특명사업인 자주국방을 위한 공단조성의 공정이 1년 이상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보존을 반대했다.

즉, 발굴조사에는 지장이 없도록 예산 등 모든 지원을 하겠지만 보존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하지만 당시의 관련학자들은 차라리 발굴조사를 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유적만큼은 보존돼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성산패총의 보존 문제는 대통령에게로 넘어갔다.

현장에서 브리핑 받고 발굴현장을 보고 나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만찬장에서 “공단을조성하게 되면 조망할 수 있는 위치로는 그 곳 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 한 마디로 보존은 결정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성산패총은 살아 남게된 것이다.

<성산패총 유물전시관과 전시관 내 야철지 유>

 

-성산에서 보이는 것들-

성산패총은 창원분지의 남측에 형성된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마을유적이다.

유적이 분포하는 구릉을 성산(城山)이라 부르는데, 이 곳에 돌로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성산은 벌판 가운데 홀로 솟은 구릉이다. 원래는 그 북동쪽의 가음정동 당산(堂山)과 이어져 있었으나 창원공단의 중심도로인 산업대로의 개설로 그 줄기가 잘리고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된 것이다.

옛 사람들이 먹거리를 구해 먹고 그 찌꺼기를 내다 버린 쓰레기터로서 조개껍질이 집중적으로 쌓여 있어 그 모양이 얕은 언덕이나 무덤과 비슷하여 조개무지[貝塚]라 불리기도 한다.

이 곳에는 조개껍질에 함유된 알칼로이드화 성분으로 인해 많은 유기질 유물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므로 당시의 물질문화와 식량자원,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또한 해안선의 변화에 기인하는 패각의 구성인자 분석과 패총의 분포권을 토대로 해안선 추정에도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성산패총에서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는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성산패총의 중심 유적은 패총과 야철지로서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쇠부리터가 확인된 점은 획기적인 발견이랄 수 있다. 지금도 이 유구는 이전 복원되어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다.

성산산성은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조사된 유물들을 구역별로 살펴보면, 동쪽 패총구역은 지금은 없어진 성산마을 배후 사면의 해발 약 20m 정도되는 곳에 정남향으로 입지해 있었다.

<성산패총 발굴광경>

 

패총의 규모10×15m 정도의 소규모이다. 조개껍데기는 굴이 대부분이며, 전복·대합·소라 등이 섞여 있다.

유물은 연질도기 위주이고, 경질도기와 골각기도 출토된다.

이 구역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청동기시대 문화층의 확인이다. 즉 무문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반월형석도를 비롯한 석기와 수정제곡옥, 각종 골각기, 두형토기, 시루 등의 연질도기류가 출토되었다.

서남쪽 패총구역에서는 유구석부와 지석, 마제석촉, 석부 등의 석기류와 각종 골각기가 출토된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도기류가 검출되었다.

중국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어 패총이 어느 시기부터 사용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갖가지 조개껍질과 짐승뼈가 출토되어 당시인의 생계유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패류는 굴·방갑·고동 위주였다.

재첩도 보였는데 이 성산부근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짐승뼈는 사슴·노루·멧돼지·말 등을 비롯하여 개·닭·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류로는 참돔·농어·다랑어·새치다래 등이 있는데 다랑어 등의 존재로 미루어 당시의 어업이 연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산패총 출토유물>

 

패각층 아래에서 야철지가 조사되었다. 야철지는 굴뚝의 하부로 여겨지는 소형의 원형유구와 쇳물을 흘러내린 것으로 보이는 홈통 등의 유구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야철송풍관이 출토되어 이 곳이 야철유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야철지의 조성시기는 출토된 오수전으로 볼 때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구역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쇠부리터의 발견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오수전은 중국 한나라 선제때 주로 사용된 것이므로 성산패총의 연대가 기원전 1세기 경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북쪽 패총구역에서는 마제석검, 유구석부, 지석 등의 석기류와 각종 골각기 및 도기류가 출토된 것을 비롯해 다른 패총 구역에 비해 철기가 많이 출토된 것이 특징이랄 수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철기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철기의 제작시 이용되었던 망치가 출토된 점이다.

성곽은 자연석으로 축조하였는데, 성곽의 형태는 성산 정상부위의 외곽을 따라 구축한 테뫼식이다.

서벽의 경우에는 성내에 성곽과 관련된 생활유적이 확인되어 성곽 내에 일정한 규모의 병력이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의 서남쪽 구간에서 당나라 고종 무4년( 621)에 처음 주조되어 당나라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개원통보(開元通寶)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성의 축조 시기는 7세기였을 가능성이있으나, 삼국시대 전기의 도기류 출토에 근거하여 3세기 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옛사람들의 삶을 쓰레기장에서 알 수 있고-

성산패총의 발굴조사를 통해 혹은 그 존재로써 우리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패총의 존재로써 당시의 환경을 헤아려 볼 수 있다. 패총의 분포 사실로써 이곳과 가까이에 바다가 있었음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패총의 분포권을 잇게 되면 옛날의 해안선에 대한 대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실제 창원분지내에는 성산패총과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많은 수의 패총이 분포한다.

가장 북쪽의 소답패총 및 남산패총, 가장 남쪽의 성산패총과 가음정동 패총으로 이어지는 그 가운데의 낮은 곳이 당시의 해역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조선시대의 지리지에 등재된 포구와 염전 등의 분포를 통해 방증된다.

그 범위는 지금의 시외주차장을 중심으로 한 사화동(조선시대에 사화포가 있었음, 북측 외곽에는 반계동패총과 남산패총, 소답동패총이 있음)과 명서동(한마음병원 일대에 염전 및 염창이 있었음), 대원동, 지귀동(조선시대의 지이포가 있었음) 반림동, 내동(내동패총이 있음), 외동(외동패총 및 성산패총이 있음), 가음정동(가음정동패총이있음) 부근으로추정된다.

또한 패총에서 출토된 다종다양한 자연유물의 분석을 통해 당시의 생계경제와 이를 위해 활동한 자원영역 등을 알 수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육지와 바다의 각종 동물유체가 출토되어 이들이 식료로 사용되고 그 부산물은 도구로 혹은 장신구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지동물은 사슴, 돼지, 노루 등이 잡혔다. 이는 지금의 동물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해수산 어패류 중 다랑어의 존재는 당시의 자원영역이 연안어로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민물조개인 재첩의 존재는 성산 부근이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지역임을 알게 해 준다.

청동기시대의 구조물은 세 차례의 조사에서 한 번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동쪽과 서남쪽 패총구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은 이 시기에도 성산 구릉에서 사람이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다른 곳에서의 유적 발굴 예를 비교해 보면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구릉지에 입지하는 경향이 많은데 가까운 곳의 남산유적에서는 구릉의 정상부에 입지한 청동기시대 마을의 한 형태로서 구릉의 꼭대기나 그 비탈에 형성된 마을의 바깥에 둥근 고리 모양의 고랑(환호 環濠)을 파서 외적을 막는 방어적 성격을 가진 마을 즉, 환호취락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예를 통해 볼 때, 성산의 정상부에도 청동기시대의 취락이 입지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조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다.

조사 전의 성산 일대는 북측사면을 제외한 삼면은 경사가 완만하였고, 그 남쪽사면에는 약 30여호의 민가로 구성된 외동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사 전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사진에 의하면 성산의 정상부는 주위 사면과 구분되는 봉우리가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취락이 조성된 곳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곳은 주변 사면부의 야철지와 패총에 대한 조사만 진행된 채 삭토가 진행되어 조사의 손길조차 미치지 못하였다.

조사당시의 상황이야 여러 모로 보아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취락 전반에 대한 조사로 진행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성산패총에서의 야철지 발견은 고대 창원지역사회의 발전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철을 매개로 인근지역과 교역했고, 선진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지금 창원지역이 기계생산의 메카로 자리잡았던 것은 고대사회의 철생산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먼 옛날의 철제련 역사는 오늘날 야철제(冶鐵祭)로 이어지고 있다.

이 행사는 창원시로 승격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의 날에 선보이는 향토 고유의 축제이다. 광활한 시청 광장 가운데 마련된 제단에 인조 용광로에 불을 지펴 창원시의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공단 내의 용광로 기술자들이 성산패총 야철지에서 부싯돌로 불씨를 만들고 성화에 불을 붙여 시청앞 광장까지 봉송한다. 창원시장은 이 불씨를 받아 용광로에 불을 지핀다.<<<

최현섭 / 당시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조사연구부장

이 글은 창원시가 마산 진해와 통합되기 이전에 쓴 글이기 때문에 현재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신고
Trackback 0 Comment 0
2014.11.17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26) -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이었나?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1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이었나?

 

인류가 지구상에 처음 출현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과거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무덤을 통해서 그 생각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무덤을 만들어 시신(屍身)을 따로 모시는 것 자체가 ‘죽음’은 삶의 연장이었으며, 내세관(來世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시신을 별도의 장소에 모시는 것은 물론 껴묻거리副葬品를 함께 묻은 것으로 보아 내세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구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서 무덤이 만들어졌던 예가 가끔 있기는 하다.

한반도의 경우 구석기시대의 무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석기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무덤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춘 초기적인 형태의 매장시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무덤 역시 그 수가 그다지 많지 않고 무덤의 구조 또한 매우 단순하다. 따라서 이 시기에도 시신을 매장하는 습속이 일반화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듯 하다.

이와 같은 전반적인 흐름으로 볼 때 무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창원 덕천리 11호 무덤 (석곽묘)>

 

-마산·창원지역에도 고인돌이 있었다-

고인돌 또는 지석묘(支石墓)라 불려지는 무덤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졌던 여러 종류의 무덤 가운데 대표적이다.

땅 속에 돌로써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큰돌을 얹은 것이 보통인데, 무덤 속에는 시신과 함께 돌칼이나 화살촉, 토기, 장신구 등을 함께 묻는다.

땅 위에 드러난 큰 돌을 상석(上石)이라 부르고 그 아래에 받쳐진 작은 돌을 굄돌 또는 지석(支石)이라 한다.

‘고인돌’ 혹은 ‘지석묘’라는 이름은 상석 아래에 받쳐진 작은 돌에서 유래하고 있는 듯하나, 실제로 고인돌의 가장 큰 특징은 땅 위에 드러나 있는 상석에 있다.

이 상석으로 말미암아 고인돌의 존재 그 자체를 쉽게 파악할 수가 있으며, 상석의 크기 또한 몇 톤에서부터 수십 또는 수백 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무엇 때문에 무덤 위에 그토록 큰 상석이 필요한지가 의문의 시작이다. 상석은 무덤을보호하는 동시에 뚜껑돌(蓋石)의 역할을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상석 아래에 있는 무덤에는 대부분 별도의 뚜껑돌이 덮혀 있으며, 상석 때문에 무덤이 찌그러진 경우도 많아서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풀어야할 첫 번째의 문이다.

수십 톤 이상의 큰 돌을 옮겨와서 무덤을 만드는데에 많은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이런 까닭으로 고인돌을 한 집단의 장(長)의 무덤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있었다.

한 사람의 시신을 묻기 위해 수백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하다면, 그 무덤에 묻힌 사람은 결코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매우 타당성이 있지만 반대의견도 적지 않다. 고인돌을 집단의 장, 즉 수장(首長)의 무덤으로 보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고, 상석의 크기에 비해 부장품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상석이 아주 큰 무덤의 부장품이 아주 보잘 것 없는 데 반해 조그마한 상석을 가진 무덤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상석의 크기와 부장품의 질이나 양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고인돌에 관한 연구나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 풀어야 할 두 번째의 숙제이다.

마산·창원지역에 있는 고인돌 관련 유적은 모두 20개소 이상으로, 100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부터 상석이 없었거나 한 개의 상석 주위에 여러 기의 무덤이 배치되어 있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실제 무덤의 수는 이 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할 때, 마산 창원지역의 고인돌 분포는 크게 3개의 지역군(地域群)으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는 해안지역으로서 삼진(진동, 진전, 진북)과 구산면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진동만을 끼고 있으면서 그 주위의 평지나 산기슭에 분포하는 유적들로, 진동 진동리 유적과  고현리유적, 진전 곡안리·오서리유적, 구산 반동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 진북 신촌리유적에서는 3기의 주거지와 30여 기의돌상자무덤(石棺墓)이 조사되었고, 진동 송도와 다구리에서는 돌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또한 지금의 자동차운전 면허시험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파괴된 진동리 유적은 마산·창원지역에서는 드물게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이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반동리 고인돌은 이미 도굴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청동검이 출토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발굴조사된 유적을 중심으로 볼 때,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둘째는 내륙지역으로서 내서읍과 북면, 동읍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바다와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하천 주위나 산지에 인접한 평지이다. 함안 오곡리유적, 북면 외감리유적, 동읍의 덕천리·용잠리·봉산리·신방리·봉곡리·화양리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오곡리유적은 행정구역상으로는 함안군에 속하나, 내서읍을 가로지르는 광려천변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에 포함시켰다.

이 유적에서는 고인돌을 비롯하여 돌곽무덤(石槨墓), 돌상자무덤, 움무덤(土壙墓) 등 모두 30여 기 이상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내서 안성리에서는 손잡이의 모양이 특이한 돌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동읍 일대에는 3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에서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곳은 덕천리유적 한 곳 밖에 없다. 덕천리유적은 모두 5기의 고인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발굴조사 결과 주위에서 모두 2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 1호 고인돌은 주위에 56×17.5m의 돌담장(石築)이 돌려져 있고, 그 가운데에 무덤이 만들어져 있다. 무덤은 8×6m 크기의 구덩이를 4.5m 깊이까지 파고 돌로써 쌓은 것인데,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무덤 가운데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1호 고인돌의 상석 무게는 35톤 정도이다.

2호 고인돌에서는 160여점의 대롱옥이 출토되었으며, 이것과 인접한 작은 무덤에서 청동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인접한 용잠리에서도 크기나 구조상 이것과 비슷한 고인돌이 도굴된 채 발견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동읍 일대의 고인돌이 대체로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독특한 구조를 갖춘 것은 매우 특이한 점이다.

이처럼 대규모의 무덤에 묻힌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이다.

<창원 덕천리 유적 1호 지석묘 전경>

 

셋째는 창원분지이다.

마산만으로 흘러드는 하천변에 형성되어있는 창원분지는 얕고 완만한 구릉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창원시내의 가음정동, 외동, 내동, 상남동, 남산동 등 곳곳에는 다양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상남동에서는 고인돌과 함10여기의 무덤이 발굴조사되었고, 외동의 고인돌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2단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구조의 무덤방이 조사되어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 남산유적에서는 환호(環濠)라고 하는 방어용 도랑으로 둘러싸인 대규모의 취락이 조사되어 고인돌을 축조할 당시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창원 외동 지석묘(창원 남고등학교 내)>

 

이상으로 마산, 창원지역에 분포하는 고인돌을 크게 3개의 그룹으로 묶어서 살펴보았다.

고인돌의 분포에 비해 주거나 취락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점이 아쉽다. 그러나 고인돌은 상석이 땅 위에 드러나 있으므로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반해, 주거지나 취락은 모두 땅 속에 있으므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발견된 주거유적이 전부라고는 할 수가 없으며, 무덤이 있으면 인접한 곳에 당연히 주거지도 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고인돌과 같은 무덤은 아니지만 독특한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마산 가포동유적을 들 수 있다.

가포유원지의 뒷산 경사면에 위치하는 이 유적은 동검(銅劍)과 동모, 동과(銅戈) 등의 청동기가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

바닷가에 위치한 산의 급경사면에 자연적으로 굴러 내린 바위틈 사이에 청동기를 끼워 넣어둔 이 유적은 청동기를 이용한 제사유적(祭祀遺蹟)으로, 흔히 청동기 매납(埋納) 유적으로 불려진다.

청동기의 매납은 집단의 수장이 청동기를 이용하여 제사를 지낸 후 그것을 바위틈에 감춰 둔 것인데, 이러한 유적이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것은 가포동유적이 처음이다.

-고인돌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까지 확인된바로는 마산, 창원지역에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없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마산, 창원지역은 넓지는 않으나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변에 형성된 평지가 있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거의 전지역 곳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진동만 일대의 삼진지역과 내서읍, 창원분지 등은 모두 거의 비슷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인돌은 농경사회와 관련된 거석(巨石) 기념물로 알려져 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정착되고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였으며, 한 곳에서 대를 이어 살아가는 동안에 조상의 중요함도 깨닫게 되었다.

조상의 시신을 모셔두고, 그곳을 관리하고 참배하는 풍습은 오늘날 농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땅 위에 드러나 있는 상석은 지금의 무덤에 있는 봉분과 마찬가지로 무덤을 보호하는 동시에 무덤의 표시였다.

이러한 점은 덕천리유적이나 상남 고인돌 등과 같이 상석을 가운데에 두고 그 주위에 일정하게 무덤이 배치된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다.

창원 남산유적의 취락은 대규모의 저장시설, 수확용 반달돌칼이나 목제 농기구를 가공하기 위한 돌도끼의 존재 등으로 보아 농경을 위주로 하는 취락이었다.

더구나 대규모의 방어용 환호는 집단 모두가 동원되지 않고서는 만들거나 보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집단 구성원의 공동 작업은 큰 돌을 옮겨서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고인돌이 반드시 수장의 무덤이라 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품앗이와 같은 공동의 노동으로도 가능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덕천리 1호 고인돌과 같이 엄청나게 규모가 큰 무덤의 경우는 그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다른 무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무덤에 묻힌 주인공은 그 신분이 매우 특별났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가포동유적에서 청동기를 이용하여 제사를 지낸 수장(首長)이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고 이상길 / 경남대 역사학과 교수

 

 

 

신고
Trackback 2 Comment 0
2014.11.03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4) -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원수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7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원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를 불러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노랫말을 쓴 사람이 동원 이원수다.

그는 15세 되던 해 방정환이 내던 잡지『어린이』에 <고향의 봄>이 당선된 후 71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옥같은 작품을 수도 없이 남겼다.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아동극, 수필, 시, 아동문학 평론 등 모두 800편의 방대한 작품을 남겨 아동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의 문학은 늘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하였고, 우주 만물의 모든 사물을 소재로 삼으면서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념의 갈등으로 희생되고 서로를 죽였던 처참한 전쟁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우리 겨레의 삶, 외세에 의한 고난 등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한가운데서 어린이와 함께 호흡했다.

또한 부정한 사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어린이 문학이 현실을 떠나 알록달록한 모습만 그리는 관념적인 이야기들이 난무할 때도 이원수는 늘 아이들이 처한 현실에 주목하면서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민족 수난의 가운데에서-

이원수는 1911년 경남 양산 북정동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1년 뒤 창원으로 이사 와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흘러가는세월속에」, 1980)

 

1920년 마산으로 이사를 간 다음 해에 바로 마산 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하여 신식 공부를 하게 되면서『어린이』와『신소년』을 애독하기 시작했다.

<고향의 봄>으로 아동문학에 입문하던 그 무렵 이원수는 ‘신화 소년회’에 가입하고 민족의 현실에 눈뜨게 된다.

이 소년회의 정신은 그의 자전적 소년소설 <오월의노래>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다 할지라도 죽는 날까지 조선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 말을 쓰고 우리 혼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고, 우리 소년회에서는 늘 서로 말하고 생각하고 해온 것이다. 

 

이원수는 1927년 마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한다.

1939년 지은 시 <고향바다>에서 확인되듯이〈고향의 봄〉창원과 더불어 마산은 그에게 정신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분위기가 강했던 마산에서 이원수가 소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며 소년회 활동을 한 사실은 이후 그의 문학에 짙게 배인 현실성을 설명해 주는 요소가 된다.

1930년 마산 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함안 금융조합에 취직을 한다. 이곳에서 이원수는 일본 사람들에게 착취당하고 굶주리는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게 되는데, 그의 시 <여항산>을 읽으면 짐작할 수가 있다.

함안에서 독서회에 참가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문학에 대해 배우고 농촌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려 했다.

그러나‘함안 독서회’는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1935년 회원 6명이 모두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독서회에 카프 중앙위원이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원수는 프로문학에 강한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언도 받게 된다.

19361월 출옥한 그는 3개월 후 수원에 있는 최순애(『어린이』에 <오빠생각>, <가을>을 발표한 동시 작가)와 마산 산호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린다. 산의 한약방 서기로 일하다 이듬해 함안 금융조합에 복직되어 함안에서 살게된다.

1945년 해방은 국민 모두에게 환희였으나 식민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남북한에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했으며, 그들은 한반도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자주적인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국민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좌우익의 정치적 충돌은 극심했다. 이러한 상황은 문학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원수도 당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흐름을 이어 받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

이원수는 종래의 동요, 동시 쓰기와 함께 1947년부터 동화와 소년소설을 쓰면서 이전보다 더 치열하게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동심천사주의적인 노랫말이나 이념의 갈등으로 흔들리고 있을 때 혼란과 격동기를 살아가는 아이들과 사회의 모습을 그리기에 운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산문으로 전환하여 동화와 소년소설을 발표한다.

압제자는 갔으나 감시자가 더 많아진 조국의, 자리 잡혀지지 않은 질서 위에 이욕에 눈이 시뻘개진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노예근성을 가진 벼락장군처럼 사방에서 큰소리들을 치고, 또 권세와 재물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 이런 동시로써 내 가슴이 후련해질 까닭이 없었다. 동화를 쓰자. 소설을 쓰자. 그런 것으로 내 심중의 생각을 토로해 보자는 속셈이었다. 쫓겨가는 외인에게 주먹을 들어보이며 욕을 하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외인에게는 허리를 굽혀 환영을 한다. 외인의 것이면 물자건 풍습이건 즐겨 받는다. - 이런 세상이 싫었다. (나의 문학 나의 청춘」, 1974)

 

이원수의 첫 장편동화인 <숲 속 나라>(1949)는 당시의 현실을 바탕으로 돈과 권력을 배제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나라로, 이원수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사회를 그린 판타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사상적 토대는 “자주적 독립, 민족의 눈을 속이는 경제적 침략 등을 경계하는정신” (「아동문학프롬나이드」)이었다.

일제식민지시대를 마감하고 자유와 민주의 나라를 세워 우리 뜻대로 살아볼 희망과 꿈에 부풀어있던 우리 민족은 1950년 민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을 겪게 된다.

이원수는 1·4후퇴 때 3녀 영옥과 3남 용화를 잃게 된다. 그에게 전쟁은 고아들, 굶주림, 이별 등 온갖 고통의 원인이었으며, 세상에서 부정되어야할 모든 것들의 집합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전쟁의 참상은 작품의 중심소재가되었고, 평화를 열망했던 그의 정신이 작품 곳곳을 가득 메웠다.

19604·19겪으면서 이원수는 정치와 사회문제, 분단과 실향의 문제, 무분별한 문명수용에 대한 비판과 고발정신을 담은 작품을 많이 발표하면서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염원했다.

<'고향의 봄' 가사에서 '울긋불긋 꽃대궐'로 묘사된 근대조각의 선구자 김종영 생가 /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현존>

 

-죽는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최근 이원수의 친일작품이 발견되었다.

조선금융연합조합회의 국책 기관지인『반도의 빛』이라는 월간 잡지 428월호에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친일 시를 비롯하여 몇 편의 친일 글을 남겼던 것이다.

친일글을 쓰게 되었던 당시 상황의 변명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그의 처지를 글로 남기기도했다.

여전히 생활은 어려웠다. 그런데 이듬해인 일천 구백 삼십 칠년에 나는 함안 금융조합에 다시 가게 되었다. 이른바 사상범으로 형을 받은 사람을 써줄 턱이 없는 시절이었건만 그 곳의 이사 김정완 씨는 우선 임시 직원으로라도 오라고 했던 것이다. …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어 세상 살기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 정말 막막한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일본의 노예로 사는 것만이 가장 정당하고 옳은 것 같은 시대였다. …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친일분자의 하나로 보였을 지도 모르고. (<털어 놓고 하는 말>,1980)

 

일제시기를 살았던 대부분의 문인들처럼 그도 일제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고통스러웠다 하더라도 친일글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 만이라도 ‘친일분자로 보였을지도 모르고’가 아니라 진정한 참회의 글을 남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원수가 태어난 1911년부터 세상을 떠난 1981년까지 우리 나라는 격랑의 세월이었다.일제식민지, 해방, 6·25 전쟁, 분단, 4·19, 5·16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극심한 물리적, 정신적 수난은 그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 장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온몸으로 고스란히 겪어내야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작품에 짙게 녹아 들어있다.

1981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용인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지막 병상에서도 이원수는 정신을 꼿꼿이 해서 갱지 위에 글을 썼다. <때묻은 눈이 눈물 지을 때>(1981)와 <겨울 물오리>(1981)는 눈앞에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그의 심경을 짐작케 한다.

이원수는 스스로 때묻은 눈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어린이를 감싸고, 목을 축여 활짝 피어나게 하는 때 묻은 눈이기를 바란 것이다.

이원수의 호는 ‘동원(冬園)’으로 스스로 겨울들판이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태어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힘겹게 살아온 그의 삶과 관련이 있다.

추운 겨울 들판에 서있는 겨울나무와 같이 수많은 고비를 넘기면서 꿋꿋하게 쓰러지지 않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아이들 편에서 글을 쓰려 했다.

죽어가면서도 그 자세 그대로‘겨울 물오리’가 되어 죽어간 아이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넘쳐 있었던 것이다.<<<

박종순 / 당시 진주교육대학교 강사. 아동문학 전공

 

 

 

 

 

신고
Trackback 0 Comment 4
  1. 멩물 2014.11.03 09: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보일러 한번 살펴봐야 할 날씨 입니다..건강 유의 하십시요.

    • 허정도 2014.11.03 10:51 신고 address edit & del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2. 실비단안개 2014.11.10 21: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나오나...
    친일에 대한 이야기도 있군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이니까요.
    감사합니다.

    • 허정도 2014.11.11 13:11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잘 계시죠?

2014.07.28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10) - 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3 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가야 후기에 창원지역에는 탁순국(卓淳國)이 자리잡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창원시의 옛 지명은 굴자군(屈自郡)인데, 『삼국유사』와『고려사』에는 구사군(仇史郡)이라고 나오며, 『일본서기』에는 구사모라(久斯牟羅), 또는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이라고도나온다.

 

-다양하게 남아 있는 유적들- 

창원 지방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은 발견된 바 없고, 청동기시대 유적은 더러 발견되었다. 즉, 창원시 남산 유적, 외동, 가음정동 민무늬토기 포함층과 진해시 성내동(웅천) 출토민무늬토기 등을 비롯하여, 창원시외동, 토월동, 가음정동, 용지동, 동읍 덕천리, 용잠리, 화양리, 신방리, 남산리, 북면 외감리 등에서는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었다.

창원시 남산 유적은 마을이 야산의 구릉에 높이 조성되어 있고 그 전체가 사람 두길 이상되는 환호(環濠)에 둘러싸여 있는 방어성 취락 유적으로서, 이미 청동기시대에 창원 지방에 농경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92년부터 1993년 사이에 걸쳐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덕천리 1호 지석묘는 길이 8미터, 폭 6미터, 깊이 4.5미터의 토광 하단에 석곽을 설치하고 그 위를 판석과 괴석으로 3단에 걸쳐 덮은 후 다시 흙을 덮고 지석과 상석을 설치한 것이었다.

그 외곽에는 방형의 주구(周溝: 주위를 도랑으로 판 것)가 만들어져 있고 안쪽으로는 높이 40∼50센티미터의 석축이 쌓여 있었다. 유물로는 민무늬토기 평저옹, 홍도, 대롱구슬(管玉) 일괄, 간돌검, 간돌화살촉, 비파형동검 등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묘역을 갖춘 대형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기는 최초의 일로서, 지석묘 유적 단계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계급 분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

기원 전후한 시기 이후의 유적으로는 분묘와 성지가 있는데, 목관묘 및 목곽묘 유적으로는 창원시 가음정동, 반계동, 도계동, 봉곡동, 봉림동, 불모산동, 서상동 고분군, 동읍 다호리 고분군, 북면 화천리, 동전리 고분군, 진해시 성내동(웅천) 고분군 등이 있고, 옹관묘 유적으로 삼동동 고분군이 있다.

 

<창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계동 유적>

 

창원시 토월동 진례산성(進禮山城), 동읍 무성성지(武城城址), 북면 화천리성지(花川里城址) 등은 해당시기의 성지로 추정된다.

위의 고분군 중에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다호리 1호분인데, 봉분이 없고 길이 278센티미터, 너비 85센티미터, 깊이 205센티미터의 토광에 길이 240센티미터의 통나무형 목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부장품으로는 세형동검, 철검, 철제 고리자루손칼[鐵製環頭刀子], 청동투겁창, 쇠투겁창, 판상철부, 쇠따비, 성운문 거울[星雲文鏡], 청동띠고리[靑銅帶鉤], 오수전[五銖錢], 청동말종방울[銅鐸] 등의 금속기와, 휴대용 화장품곽을 비롯하여 검집, 원형두(圓形豆), 방형두(方形豆), 원통형 칠기,뚜껑, 각형(角形) 칠기, 붓, 부채 등의 칠기류, 유리구슬, 민무늬토기와 와질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 가운데에서 성운문 거울, 오수전, 띠고리, 청동말종방울, 유리구슬, 칠기 화장품곽 등의 중국 한나라식(漢式) 유물은 평양 정백동이나 경주 조양동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서, 이 시기에 한반도 남부지역과 낙랑과의 교섭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목관의 형태나 청동기, 철기 및 칠기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는 다른 독창적인 세형동검 문화의 전통을 보인다. 따라서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경남 해안 지대에서 창원 지방에 가장 선진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창원시 도계동 및 다호리 분묘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나, 기원 후의 시기에 이들은 다호리 초기와 같은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지는 못했다고 보인다. 이는 같은 시기에 김해 양동리나 대성동 고분군이 번성하던 것과는 대조된다.

4세기경의 창원 도계동18호 목곽묘는 길이 350센티미터, 너비 160센티미터, 잔존 깊이 55센티미터의 토광 안에서 철제 손칼 2점, 투겁창 2점, 미늘쇠[有刺利器] 1점, 도끼 2점, 낫 1점, 끌 1점 등의 철기류와 적갈색 양이부소호(兩耳附小壺) 2점, 회청색고배 2점, 원저단경호 1점, 유개대부호(有蓋臺附壺) 1점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창원 지방의 중심지가 아닌 도계동 고분 축조 집단도 어느 정도의 세력은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김해 양식의 고배, 즉 아가리 부위가 급격하게 바깥으로 꺾여있고 굽다리가 팔자형(八字形)으로 퍼지되 투창이 없는 외반구연 무투창 고배(外反口緣無透窓高杯)가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들은 김해의 가락국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패총 유적으로는 창원시 외동 성산패총, 가음정동, 남산동 패총, 진해시 웅천 패총, 진해 패총, 용원동 패총 등이 있다.

특히 용원동 패총에서는 움집(수혈주거지) 14기, 고상가옥(高床家屋) 4기, 저장공, 승석타날문(새끼줄로 두드린 무늬)이나 무문의 평저단경호, 고배, 장경호, 단경호, 옹, 하지키 뚜껑(土師器蓋) 등의 적갈색 연질토기, 타날문 단경호, 고배류, 대형 단경호, 평저단경호, 화로형토기, 원통형 기대 등의 회청색 경질토기, 철정, 쇠손칼, 쇠화살촉, 소형 쇠도끼, 녹각제 자루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원통형기대는 원통의 중간 부위가 주산알 모양으로 약간 부풀어 오르고 하단부의 곡선이 불룩하게 내려가는 것으로서, 4세기 후반의 김해 대성동 41호분, 양동 9호분, 230호분, 부원동 패총, 부산 복천동 95호분 출토품과 같은 양식이므로, 해당 시기의 그 지역들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긴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과의 교류- 

『일본서기』신공 섭정 46년(366) 조에서 백제는 창원의 탁순국(卓淳國)을 매개로 해서 왜국과 통교하기를 원했고, 탁순국 말금한기(末錦旱岐)는 왜로 통하는 길을 묻는 백제사신에게 자문해 주고 왜국사신에게 백제 사신의 말을 전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탁순 사람 과고(過古)를 보내 왜국사신의 시종을 백제로 인도해 주기도 했으며, 탁순국은 왜국 사신 일행이 귀국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또한「신공기(神功紀)」49년(369) 조의 기사에서, 탁순국은 왜군의 집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서기>

 

『일본서기』에 전하는 이런 기사들이 얼마나 진실을 전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창원 탁순국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정치집단이었음은 확실하다.

4세기대 이후의 어느 시기에 창원지역에 탁순국이 자리 잡고 있었음은틀림없다. 『양직공도(梁職貢圖)』백제국사 전의 ‘탁국(卓國)’과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탁순국(卓淳國)’이 바로 그것이다.

창원 반계동 고분군은 6세기의 것으로서 25호분에서 쇠망치, 쇠집게 등의 단야구가 출토되어 이들이 제철집단 임을 알 수 있으며, 23호분에서는 고령양식의 유개대부 장경호, 단추형꼭지 뚜껑 단각고배, 개배, 유개대부 파수부발(有蓋臺附把手附鉢) 등이 출토되어, 이들이 대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창원 탁순국의 왕 또는 유력자로 추정되는 아리사등(阿利斯等)은 대가야의 맹주권을 인정하며 후기 가야 연맹의 한 소국으로 편입되어 있다가, 522년대가야와 신라의 결혼 동맹 당시 따라온 수행 인원 중 창원 지방에 배치된 사람들이 돌연 신라 관복으로 갈아입자, 그 수행 인원들을 신라로 쫓아 보내는 자주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이를 트집 삼아 탁순국을 공격하고, 백제군이 함안 안라국 주변의 걸탁성까지 진주해오자, 탁순국은 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왜국의 사신단도 구사모라((久斯牟羅)=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에 머물면서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자, 아리사 등은 백제, 신라에게 사신을 보내 회의를 요청했다.

백제는 군대를 더욱 전진시켜 칠원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쌓고 주둔하면서 탁순국을 압박했다.

그러자 탁순국 내부에서는 백제에게 투항하자는 일파와 신라에게 투항하자는 일파가 있었는데, 그 왕이 신라에 종속되기를 원했다. 그 멸망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530년대 후반의 어느 시점이었다고 추정된다.

신라는 탁순국을 복속시켜 굴자군(屈自郡)으로 삼았으며, 경덕왕이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영현(領縣)은 칠제현(함안군 칠원면), 합포현(合浦縣: 마산시), 웅신현(熊神縣: 진해시 성내동)의 셋이다.

이는 멸망 시기 탁순국의 영역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보여준다. 혹은 멸망 직전의 탁순국이 신라에게 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전쟁 없이 투항했기 때문에 신라에 의하여 군현 편제될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탁순국 당시보다 넓은 영역을 신라로부터 배정받은 때문일 수도 있다.

김태식 /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신고
Trackback 0 Comment 0
2014.06.23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5) -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5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창원이란 지명이 만들어진 것이 조선시대이다.

조선 태종대에 의창과 회원을 합쳐 창원이라 이름지었다. 부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도호부가 되었다. 선조 34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했다.

대도호부로의 승격은 임진왜란때 병사 겸 부사인 김응서와 그를 따르는 군인, 관인, 백성들이 한 사람도 일본에 항복하지 않았다는 체찰사의 장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과 벌였던 대표적인 전투는 노현 및 창원성 전투, 안민고개전투, 합포해전이 대표적이다.

칠원군과 합쳤다가 광해군 9년(1617)에 나누었다. 인조 5년(1627)에 진해와 합쳤다가 7년에 나누고, 현종2년에 전패를 잃었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1년에 다시 승격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이 지역은 경제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마산지역은 조선후기에 물산의 집산지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대동법이 시행으로 해로가 연결되는 전국 각지에 조창이 설치되었는데. 영조 36년(1760년)에 창원 마산창이 설치되었는데 마산창 관할구역은 인근 8개 읍이었다.

고려시대의 석두창이 없어진 후 이 때 다시 신설된 것이다.

마산창은 남해안의 수산 물집산지이자 교환의 중심지역활을 담당했다.

조선시대에 남해의 마산은 동해의 원산, 서해의 강경과 더불어 전국 3대 수산물집산지의 하나였다.

이렇게 번성한 마산장은 함경도 덕원의 원산장, 충청도 은진의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후기 15대 자아시 중의 하나로 발전하면서 마산이 남해안 최대의 상업도시가 되었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아래 그림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각선도본(各船圖本)에 실린 조운선 그림과 조선시대 이용했던 조운선의 모형이다. 그림에서는 배의 골격만 나타내었지만 모형은 섬세하게 복원된 것이다. 배의 기본구조 위에 삼판(杉板)을 얹어 용적량을 늘린 것이 특징이며 배 안에다 세곡을 적재했다.

초 봄에 이런 조운선 16척이 각 읍에서 보내온 대동미 9,215석(石) 5두(斗)를 싣고 마산포를 출발하여 거제 견내량→고성 사량도→남해 노량→전라도 영암 갈두포→진도 벽파정→무안 탑성도→영광 법성포→만경 군산포→충청도 태안 서근포→보령 난지포→경기도 강화 이고지포를 지나 6월 하순경 한강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에 도착한다. 1886년 일본과 미국의 차관으로 구입한 기선 해룡호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세곡이 이 배로 수송되었다.

 

 

 

신고
Trackback 0 Comment 0
2014.06.09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3) - 고대사회의 마산과 창원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3 고대사회의 마산과 창원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고려군읍」 연혁도칠폭, 채색필사본, 19세기 이후,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 단군조선 이후 고려까지 각 왕조의 강역을 그린 일종의 역사지도. 강역의 역사적 변천과 도성을 비롯한 주요지명의 위치를 이 지도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흔히들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시대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에 한강의 남쪽 지역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중국의 정사서인 “삼국지”에는 마한(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남지역), 진한(낙동강의 동쪽), 변한(낙동강 서남부지역)이 있었다.

이들 삼한에는 다양한 이름의 나라들이 있었다. 마한에는 백제국을 비롯한 54개국이, 진한에는 사로국을 비롯한 12개국이, 변한에는 구야국,안야국을 비롯한 12개의 나라가 있었다.

이와 같은 나라 외에도 다른 나라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들장하고 있다. 포상팔국이 대표적인데 그 중의 하나가 골포국이다.

골포국이 “삼국유사”에는 합포로 비정되고 있다. 하지만 유적과 유물의 분포로 보아 고대사회의 마산.창원지역에서 정치집단이 형성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세 곳이다.

성산패총 일대의 창원시 지역, 다호리를 중심으로 하는 창원 동읍일대와 마산의 진동만 일대이다.

따라서 합포가 마산만이므로 마산의 중심지 보다는 마산만을 끼고 있는 창원시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는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가야시기까지의 유적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가음정동유적(지석묘,청동기시대주거지.패총,고분군,수전지), 성산패총, 내동패총, 삼동동고분군, 외동패총 등이다.

다호리유적이 있는 창원의 동명일대도 정치집단의 성장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집단의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다호리 유적에서 조사된 오수전이나 중국제 거울은 당시 북쪽에 존재하였던 낙랑군 등 다른 나라와도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삼국지”의 기록처럼, “변한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이것을 낙랑이나 왜 등지로 수출하였다”라는 것은 정치집단이 존재했던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이를 재료로 하여 만든 다량의 철기유물, 그리고 그 원료인 철광석 등이 다호리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성산패총은 철생산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마산.창원지역에 있었던 골포국 등의 나라들은 4세기대를 지나면서 다른 나라로 바뀌었다. 창원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집단은 탁순국이었다.

4세기대가 되면 백제국과 사로국은 인근 지역으로의 진출을 통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백제.신라로 발전해 나갔다. 변한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가야지역에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13개의 나라가 있었다. 고령의 가라국, 김해의 남가라국, 함안의 안라국등이었다.

탁순국은 창원지역을 포함하는 정치집단이었다.

탁순국의 성장과 발전을 보여주는 유적은 고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마산의 경우 고성과 인접한 진동쪽의 대평리유적을 비롯하여 현동유적, 자산동고분군이 있고 창원에는 주남저수지와 인접한 야산과 저지대에 넓게 형성된 다호리유적, 도계동고분군, 가음정동유적, 삼동동 옹관묘유적, 반계동유적, 천선동고분군, 창곡동유적등 10개소에 달한다.

탁순국은 신라와 백제의 가야지역 침략과정에서 가야지역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끝까지 기울였다. 하지만 신라의 끊임없는 가야지역 진출과정에서 김해의 금관국이 신라에 멸망됨으로써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6세기 중반경에 신라에 자진 투항하고 말았다.

신라가 가야지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던 것은 6세기대에 접어들어 신라가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부터였다. 법흥왕은 금관국을 함락(532년) 시켰고, 562년 고령의 가라국이 신라에 정복됨으로써 신라는 가야의 전역을 차지 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는 한반도에서 군사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7세기 중엽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일부 영역도 차지하게 되어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통일후 신라는 새로이 확보된 영역을 통제하기 위하여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다. 685년 신문왕은 대동강 이남의 지역을 주-군-현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마산과 창원지역은 이미 신라가 탁순국을 정복하여 굴자군으로 삼았으며, 경덕왕이 의안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소속된 지역은 칠제현(함안군 칠원면), 합포현(마산시), 웅신현(진해시 성내동)의 셋이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신고
Trackback 0 Comment 0
김형윤의 <마산야화> - 마지막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2015년 3월 23일 시작해 이번 회까지 만 2년 동안 포스팅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馬山野話)」143꼭지가 오늘로 끝납니다. 지나간 시절 마산사회와 마산 사람들을 추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2. 영불의 함대 입항

142. 영·불(英·佛) 함대 입항 1920년 여름, 안남(安南, 월남)에 있는 불함(佛艦)이 마산 저도 좌편 안쪽에 투묘(投錨)했다가 삼일 후에 출항한 뒤를 이어, 상해에 주둔하고 있는 영함(英艦) 호오킨스호가 동도(同島)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1. 개항과 각국 영사관

141. 개항과 각국 영사관 강화조약에 의해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된 후 다음과 같이 항구와 시장이 개방되었다. <조선의 시장과 조약항> 부산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13년(1876) 10월 14일(일본에게)..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0. 마산포와 열강

140. 마산포와 열강 1901년 노국은 북청(北淸)사건을 이용하여 만주에 군사적 관리권을 확립했다. 1902년에는 동청(東淸)철도도 개통되고 1903년에는 시베리아 철도의 본선도 완성되었다. 노국의 경제적 세력은 광산, 기타..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9. 노일전쟁과 율구미

139. 노·일(露·日) 전쟁과 율구미(栗九味) 노국의 조계지인 율구미는 1903년 1월 5일을 마지막으로 노국 수변 8명이 철수한 후에는 공지화되었다. 이를 그냥 둘 수 없어 노국 영사 카자코브는 치지코브라는 자에게 그곳을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8. 신상회사와의 투쟁

138. 신상회사(紳商會社)와의 투쟁 신상회사(紳商會社) 혁파 투쟁은 국내 본건지배층에 대한 투쟁이지만 외세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고, 또 마산항민들의 저항심의 성장을 고찰하는데 의의를 가진 투쟁이기 때문에 여기 서론(叙論)코자..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7. 노·일(露·日) 마산포 경영

137. 노·일(露·日) 마산포 경영 노·일(露·日) 양국인의 마산포 경영에 대하여서는 일본 외교문서 제33권에 당시 마산 일본 영사 판전중차랑(坂田重次郞)이 일본 외무대신에게 한두 가지의 보고 즉 마산포에 있어서 노국간의 경..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6. 1900년대의 국제관계

136. 1900년대의 국제 관계 청일정쟁으로부터 노일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최고의 단계인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던 시기로 이 시기의 시대적 특징인 극동에 있어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의 심화와 그 확대로..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 국토의 약탈과 국민생활 제재(制裁) 일본은 노일전쟁 전에 거제도 일대(송진포松津浦 / 원문에는 송포진)를 근거로 어업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중 일본 대노국(對露國)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적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4. 매축권과 대일 투쟁

134. 매축권(埋築權)과 대일(對日) 투쟁 구마산포는 옛날부터 농수산물의 집산지로서 중부 경남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기능을 가진 요지로 발달해 온 곳이었다. 망국의 낌새가 스며들던 한말, 마산의 토지소유권을 비롯한 모든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3. 노공관의 점유지

133. 노공관(露公館)의 점유지 1899년 노서아와 일본 정부가 마산에 해군 근거지를 두려고 각축전이 치열했는데 노서아는 서부 마산에 조차 조약을 체결한 뒤 지금의 일성 펌프공장 자리에 영사관을 두고 백조악기점 자리에는 관사..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2. 아라사 함대 입항

132. 아라사 함대 입항 아라사(노국의 별칭) 함대가 마산포에 투묘(投錨)한 것은 1899년(광무 3년, 명치 32년)이 처음이었다. 주한공사인 파브로프가 탑승한 군함 만츄리아 호가 인천에서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상해로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1. 자복포의 매수 각축

131. 자복포(滋福浦)의 매수 각축 조선정부와 영·독(英·獨, 1883년 11월 26일 체결), 아국(俄國, 1884년 7월 / 원문에는 1885년 10월 24일 체결), 의국(義國, / 해방 후 미국을 의국이라 칭하기도 했..

새해인사
새해인사 2017.01.01

2017년, 모든 이들이 희망을 품고 사는 세상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애당초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노신>

한국 100명산이야기 21 : 비파와 거문고 형상의 비슬산

● 국가적으로 우환이 많았던 병신년을 마무리 하기 위해, 대구시 달성군 현풍에 있는 비슬산을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양덕동에서 모여 곰탕으로 유명한 현풍으로 향하였습니다. 현풍의 산업단지라 할 수 있는 '대구테크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