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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지명에 대한 글입니다.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한제국시대에는 ‘통합 이전 창원시(옛 의창군)와 옛 마산시 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일원’을 ‘진해군’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1908년 행정구역변경 때 진해군이 현재의 진해지역이 포함된 웅천군과 함께 창원부로 통합되면서 ‘진해’라는 지명은 사라졌습니다.
2년 뒤인 1910년, 창원부가 마산부로 바뀌면서 이 일대도 마산부에 속했다가 1912년 지금의 진해군항과 배후도시였던 신도시 지역을 ‘마산부 진해면’으로 결정합니다.
4년 동안 이름이 없어졌던 진해는 현재의 위치에서 다시 행정구역명칭으로 되살아난 것입니다.
진동 쪽의 지명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되살아 난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지명으로 역사에 나타난 '진해'는 1914년 3월에 '창원군 진해면'으로 바뀌었고, 1931년 4월 1일 진해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진해가 독립 시로 승격된 것은 해방 10년 후인 1955년 9월 1일이며, 그때부터 진해는 한국 최고의 군항도시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하지만 2010년 7월 1일 마산 창원과 통합되면서 창원시 진해구가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지난 100여 년 간 ‘진해’라는 명칭이 겪은 부침이 참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정구역명칭의 변화와 달리, 일본군부에서는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시기부터 거제군과 웅천군 및 고성군까지를 포함한 넓은 해역 전체를 ‘진해만’이라고 불렀습니다.
빠르게는 1898년 육군대신 가쓰라의 문서와 1903년 해군작전계획서에서도 이 해역을 ‘진해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진해현’ ‘진해군’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명칭이기도 했지만, 이 해역이 러시아 함대를 격멸시킬 수 있는 해군근거지라는 뜻에서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의 ‘진해(鎭海)’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조선시대 사용했던 진동지역의 진해는 우리 선조들이 만든 명칭이었지만, 지금 사용하는 ‘진해’는 일본군부가 지은 것이어서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지명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은 일본인 죽국우강(竹國友康)의 저서 『ある日韓歷史の旅』에서 “일본이 제멋대로 붙인 이름이라, 해방 후에 실은 진해라는 이름은 바꾸어야 되는 것이었으나.......”라며 진해라는 지명 사용에 아쉬움을 나타내었습니다.
유명한 도시사학자 손정목 교수도 황정덕 회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인들이 지은 이름이라 진해라는 지명은 해방 후 바뀌었어야 했다’ 고 합니다.
일견 수긍되는 측면도 있지만, '진해'라는 지명이 지금의 진해와 멀지 않은 진동지역에서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최근에 “진해시민으로 살고 싶다”면서 통합창원시에서 진해가 분리되기를 원하는 주장도 나왔는데, 생명체처럼 변하는 것이 도시니 미래에 진해는 다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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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복산 2012/01/25 10:37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와 “일본이 제멋대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진해현이 부활된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진해를 창원시에서 분리하자는 이야기는 이름에 기인하기보다는 진정한 지방자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치단위를 작게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규모의 효율성도 중요할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주민들이 참여하고 스스로 자기가 사는 지역을 가꾸어 가는 자치제도의 정착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진해사는 사람도 잘 모르던 진해이야기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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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3일 올린 글에서처럼, <2011/11/23 -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100여년 전 진해의 중평벌판 그 평화로웠던 마을에 일본의 군대가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쳤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부랑자 신세가 된 당시 진해사람들의 정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을 것입니다.
이 참담한 상황을 전후해 민족의 최고지도층이 보여준 극단적인 두 사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주민들의 아픔에 동참한 사례로 매천 황현에 대한 이야깁니다.
당시 진해지역에서 일어난 아비규환을 두고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倭人勒奪慶南之鎭海灣………定期軍港………熊川距鎭海數百里而亦捲入港域吏民漁散如逢亂離 ; 웅천에서 수백리의 항역이 군항으로 포함되어 이속도 농민도 고기잡이도 모두 흩어져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웅천에서 수백리’라고 표현한 것은 웅천에서 거제도 끝까지에 이르는 진해만 군항지역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을사조약 1년 후인 1906년에 쓴 글입니다.
이등박문의 강압적인 통감정치가 횡횡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매천의 애국심과 기개가 더욱 잘 드러납니다.
둘째는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일본군부가 진해 11개 마을주민들을 내쫓기 직전의 일로, 왕족이자 내부대신이었던 향운 이지용이 저지른 일입니다.
그는 진해지역 토지강제수용에 대한 안건이 고종황제에게 상주(上奏)되기 이틀 전에 경상남도관찰사서리 진주군수 민병성에게 훈령을 내렸습니다.
「진해만을 우리나라 군항으로 예정하는 사항은 이미 정부의 협의를 거쳤으니 조속히 해당지역의 각 군수로 하여금 該 지방민에게 주지케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고종황제가 최종 결정도 하기 전에 훈령을 내린 것은 힘없는 황제를 능멸하고 일본을 향한 자신의 적극적인 충성심을 과시한 사악한 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황제의 재가가 내린 다음날인 8월 22일에는 경상남도관찰사서리에게,
「………본 훈령이 도달되면 조속히 당해 만(灣) 부근 각 군수에게 별칙(別飭)하여 적선 내 토지의 매매·교환·양여·전당·대차를 일절 엄금하라. 만약에 사호(絲毫)라도 소우(疏虞)함이 있을 때는 해당 각 군수는 중경(重警)에 처해질 것이고 귀관 또한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충분한 주의를 가하라」는 훈령을 내렸습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싶었는지, 이틀 후인 8월 24일에는 진해군수·거제군수·웅천군수에게도 같은 취지의 훈령까지 내렸습니다.
일제에 대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충성으로, 일본군부가 추진하는 진해군항 건설에 진력을 다했습니다.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러일전쟁 와중에서 굴욕적으로 체결한 한일의정서를 작성 서명하였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매천 황현은 한일병합 사실을 전해 듣고 1910년 9월 10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로써 망국의 한을 풀었고,
이지용은 훈1등 백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매천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민족의 사표가 되었고,
이지용은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표적인 친일파로 규정하였고 그가 남긴 재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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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초, 마산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직업은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그들의 직업을 보면 그들의 산업도 알 수 있는 것, 오늘은 당시 마산의 일본인들이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미 작년 10월 11일자 제27회 글(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에서 일본인 이주 초기인 1902년 마산의 일본인들 직업을 포스팅 한바 있습니다. 모두 46종류였으며 겸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8년의 세월이 흐른 1910년경에는 양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업종도 169종으로 다양해 졌을 뿐만 아니라 종사자도 1,821명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시작된 이주로 일본인의 숫자도 많아졌지만 식민지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했던 시대상황의 작용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의사․변호사․측량사․치과의사․수의사 등 전문직뿐만 아니라 관리․교원 등의 공직자 그리고 미장과 목수를 비롯한 건설 기술자와 청부업자까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당포․숙박업․목욕업․무역업 등의 서비스업은 물론 소매업․도매업․제조업 그리고 이발사․전화교환수․사진사․표구사(表具師)․대서사(代書士)에다 인부와 작부(酌婦)까지 각양각색의 직업들이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식민지배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직업분포는 이 시기에 마산은 이미 전통도시의 옷을 벗고 근대도시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합니다.
이런 현상은 마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가 된 이 땅 모든 도시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1911년 일본인 평정빈부(平井斌夫)와 구관정이(九貫政二)가 쓰고 마산에 있던 빈전(濱田)신문점이 발행한 『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에 보면 당시 마산의 일본인들 직업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아래 글입니다.
읽어봐도 무슨 직업인지 모르는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옛글이기 때문에 일본어를 꽤 많이 아는 분들도 해득하지 못한 직업도 많습니다.
관리(官吏) 69명 / 공리(公吏) 10명 / 은행 및 회사원 22명 / 교원 12명 / 의사 8명 / 변호사 1명 / 주류상 6명 / 청물상 4명 / 식염상 1명 / 연초상 2명 / 채자(菜子)상 16명 / 금전대부업 23명 / 금물(金物)상 4명 / 활우(活牛)상 1명 / 약제사 4명 / 수의사 1명 / 치과의사 1명 / 산파 7명 / 무역상 5명 / 청물(靑物)상 1명 / 약종상 6명 / 건구상 2명 / 가구상 1명 / 오복태물(吳服太物)상 5명 / 이물(履物)상 5명 / 고물상 15명 / 초자물(硝子物)상 2명 / 곡물상 33명 / 장유(醬油)상 3명 / 재목상 9명 / 어류상 17명 / 잡화상 56명 / 신탄(薪炭)상 4명 / 회엽서(繪葉書)상 3명 / 육군용달 1명 / 화(糀)상 1명 / 사탕(砂糖)상 3명 / 관힐(罐詰)상 1명 / 미숀기계상 1명 / 서적상 2명 / 우육상 4명 / 도기상 6명 / 건물(乾物)상 3명 / 우유상 1명 / 반물행(反物行)상 1명 / 지류(紙類)상 2명 / 석유상 1명 / 여인숙 및 하숙 16명 / 질(質)상 9명 / 미증화상 / 총포화약상 2명 / 선구상 1명 / 어구상 2명 / 채자(菜子)소매 53명 / 소간물(小間物)상 2명 / 시계상 5명 / 사립물(仕立物)상 5명 / 주류소매 4명 / 계육(鷄肉)행상 1명 / 잡화소매 30명 / 야채소매 24명 / 두부소매 10명 / 램프행상 1명 / 온돈(饂飩)소매 1명 / 어류행상 13명 / 우육소매 1명 / 석유행상 1명 / 매약(賣藥)상 1명 / 화본(貨本)상 2명 / 식목(植木)상 1명 / 우피(牛皮)상 1명 / 잡화행상 2명 / 포모(蒲鉾)상 3명 / 과물(果物)상 4명 / 피복인구입업(被服人口入業) 1명 / 하수문(荷受問)업 4명 / 운송업 8명 / 철공업 1명 / 토목건축청부업 29명 / 좌관(左官)청부업 1명 / 주류양조업 9명 / 장유(醬油)양조업 5명 / 탁주양조업 2명 / 와(瓦)제조업 1명 / 연초(煙草)제조업 5명 / 차(車)제조업 1명 / 粉접구(粉摺臼)제조업 2명 / 빵제조업 1명 / 조선업 2명 / 단야옥(鍛冶屋)업 4명 / 페인트업 3명 / 염물(染物)업 2명 / 세탁업 4명 / 활판인쇄(活版印刷)업 3명 / 양복사립(洋服仕立)업 4명 / 지물(指物)업 7명 / 화공(靴工)업 1명 / 석판인쇄(石版印刷)업 1명 / 세장(洗張)업 3명 / 석감(石鹼)제조업 2명 / 통준(桶樽)공업 5명 / 관힐(罐詰)업 2명 / 첩(疊)공업 4명 / 승(繩)제조업 6명 / 제등장(提燈張)업 2명 / 철력세공(鐵力細工)업 3명 / 삼미선(三味線)장업 2명 / 사진사 5명 / 표구사 3명 / 탕옥(湯屋)업 8명 / 이발업 14명 / 여발결(女髮結) 14명 / 필(筆)제조업 1명 / 인각사(印刻師) 6명 / 철력(鐵力)직 2명 / 좌관(左官)직 14명 / 단야(鍛冶)직 4명 / 목만(木挽)직 54명 / 화직(靴職) 2명 / 대공(大工)직 103명 / 선대공(船大工)직 7명 / 석공직 65명 / 주괘(鑄掛)직 1명 / 관아용인(官衙傭人) 2명 / 통신(通信)인부 6명 / 우편집배인 6명 / 통공(桶工)직 3명 / 연와(煉瓦)직 1명 / 첩(疊)직 6명 / 활판(活版)직 3명 / 사립(仕立)직 5명 / 죽세공(竹細工)직 2명 / 요리옥(料理屋) 11명 / 음식점업 21명 / 과자(菓子)직 13명 / 입치(入齒)직 1명 / 선원 5명 / 어부 41명 / 주부(舟夫) 11명 / 상가고인복비(商家雇人僕碑) 279명 / 소송대리인 3명 / 유기장(遊技場)업 6명 / 어업 2명 / 농업 15명 / 도수(屠獸)업 1명 / 승려 5명 / 간호부 8명 / 전화교환수 10명 / 관아고인(官衙雇人) 21명 / 신문통신원 4명 / 측량사 1명 / 예기(藝妓) 61명 / 중거(仲居) 20명 / 일고가(日雇稼) 18명 / 생화사장(生花師匠) 1명 / 안마침구술 3명 / 체송(遞送)인 2명 / 대서업 5명 / 토공 20명 / 우차만(牛車挽) 27명 / 인력차부(人力車夫) 40명 / 마차만(馬車挽) 7명 / 요리직 13명 / 중사(仲仕) 32명 / 유예순장(遊藝順匠) 5명 / 작부(酌婦) 21명 / 매복자(賣卜者) 1명 / 잡업 35명 / 대변(代辨)업 2명
어떻습니까? 참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지 않아습니까?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마산의 일본인들,,,,
이 사람들이 활보했던 1910년대 후반의 신마산 쿄마치 입구(지금의 두월동 통술거리) 사진입니다.
거리 풍경으로 보아 무슨 축하행사기간으로 보입니다.
오른쪽 건물이 옛 모습과 똑 같아 보입니다만 자세히 보면 조금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일제시기부터 있었던 위 건물이 워낙 멋있다 싶어서 건물주가 옛 건물을 본 떠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 확인해 보겠습니다.
다음 사진은 같은 시기의 창원천(옛 마산시장 관사 앞 하천) 부근과 현재 모습입니다.
비슷하긴 합니다만 위치가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일제기에는 이 다리를 무학교라 불렀습니다만 지금은 다리에 이름이 새겨져 있지는 않습니다.
옛 사진은 4월에 찍은 야경 같습니다.
활짝 핀 벚꽃과 거리를 밝힌 가로등(가스등)이 눈부십니다. 화려했던 거리로 보입니다.
위 두 사진을 찍은 위치입니다. 노란색이 위 사진, 푸른색은 아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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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포스팅한 '계획만으로 끝난 다섯 번의 매립시도' 와 달리 지금부터는 실제로 시행된 매립공사를 소개합니다 -
<마산만 최초의 매립 - 1905년 철도공사 때 마산역 일대 매립>
지금도 마산만의 매립 때문에 지역사회가 갈등하고 있습니다.
마산해양신도시 건설용 34만 평 매립 계획의 원안추진과 백지화를 두고 시민들의 찬반이 팽팽하고, 매립으로 조성된 가포신항부지의 용도변경문제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100년 넘게 지속된 마산만 매립, 그 최초의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불행하게도 마산만은 첫 매립부터 마산포 주민들의 의사와 아무 상관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마산만 첫 매립은 한반도 지배를 꿈꾸며 승승장구하던 일제의 군부가 저질렀습니다.
1904년-1905년 마산과 삼랑진을 잇는 철도 마산선의 출발점인 마산역 부지를 조성하기 위한 매립이었습니다.
원래 이 철도는 한국인이 설립한 영남지선철도회사의 사업이었지만 러일전쟁 때 강제로 맺은 의정서에 준해 약탈해간 사업입니다.
명분이 군용철도였기 때문에 아마 우리 정부도 이 매립의 허가과정이나 공사에 관여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1904년 체결한 한일의정서 제4조의 규정을 이유로 일제는 마산조계지 북쪽 끝에서 원마산(마산포) 쪽으로 약 12만 평의 한국인 토지를 무상으로 일본철도감부의 군용철도 용지로 점유했습니다.
이때 일본 철도건설대는 마산역에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현 마산중부경찰서 앞의 벽산아파트(전 월포 삼익아파트) 인근해안을 매립하였습니다.
부근의 야산을 허물어 매립했다고 전해지고 있을뿐 매립의 규모나 방법 등 상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군용지 매립이어서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매립이 마산만 최초의 매립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매립전후시기의 지도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립 규모는 대략 3만6천여 평 정도로 추정합니다.
아래 그림은 이 매립공사가 완공된 10여년 후인 1916년에 일본육지측량부가 간행한 지도입니다. 이 지도에서 매립부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산역 건설을 위해 ‘철로아래 직선해안 부분’을 매립한 것입니다. 해안선의 직선만 보아도 이 지역이 인공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파란 선이 원래의 해안선입니다.
이 지도는 1899년에 일본해군에서 제작한 마산포지도입니다.
위 그림의 자연해안선은 이 지도의 해안선을 옮긴 것입니다.
두 지도를 비교하면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앞 지도에서는 장군천이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뒷 지도에서는 장군천(파란색)이 마산만가까이에서 왼쪽으로 휘어져있습니다.
두 지도의 차이를 통해 마산역 일대를 매립하면서 장군천이 지금처럼 직강하천으로 변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위 그림을 현재 도시의 위성사진에 옮겨보았습니다.
그림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만 두 그림에 그려진 노란 선(현재 사용되는 간선도로)을 비교하면 위치를 가늠해보기가 쉽습니다.
매립경계선 바깥에 있는 부지(쌍용양회, 마산지방해양항만청,마산여객터미널)는 마산역 매립 후 한참 뒤에 매립된 부분입니다.
한반도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러일전쟁(1904년-1905년) 때 있었던 마산만 최초의 매립,,,
도시의 공공적 이익은 물론, 제대로 된 주민 의사가 한 번도 반영된 적이 없는 마산만 매립의 나쁜 전통이 첫 매립부터 시작되었던 겁니다.
지금은 도시 한 복판이 되었습니다만,
100여년 전, 이곳에 철도를 건설하며 바다를 매립했던 그 시절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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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으로 끝난 수산시장과 군용지 매립구상>
1) 신마산 수산시장 매립계획
1905년 7월 29일 창원감리 현학표는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매립신청을 했습니다.
위치는 마산포의 각국공동조계지 밖 남쪽 해안이었고, 그 절차로 신동공사에 청원을 심의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창원감리 보고 제50호’로 제출되었으며 도면까지 첨부되었습니다. 아래 그림이 당시에 첨부되었던 도면입니다.
위 도면의 좌하부 삼각형 부분이 매립신청지인데 '수산회사축정지, 5천㎡정계(定界)'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그림의 삼각형 매립계획지를 현재 위성지도에 표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연두색 삼각형이 수산시장 매립계획지, 노란색은 각국공동조계지, 파란색은 당시의 간조시 해안선입니다)
이 매립은 일본인 10여 명이 수산회사를 설립하여 신마산에 수산시장을 건립하겠다는 목적이었으며 위치는 조계지 최남단이었고 규모는 5,000㎡(1,500평)이었습니다.
관련 기록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매립허가와 시행 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1905년 이후 제작된 문헌자료와 지도 등 아무 곳에도 이곳에 매립된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이 구상은 계획만으로 끝났을 뿐 시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철도용지 앞 매립계획
1906년(광무10년) 5월 7일 창원감리가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보낸 ‘창원감리 보고 제14호’에 일본군부의 매축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매립계획은 바로 그 일본군부의 매립계획을 말하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매립계획이었습니다.
다음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현재의 경남대학교 정문 쯤에서 시작하여 마산역과 장군천을 지나 마산포 어시장까지의 규모입니다.
(파란색은 간조시 해안선, 주황색이 매립계획부분)
이 보고서의 내용에는「일본군부가 철도용지 앞 해안을 매축할 계획을 세우고 각국공동조계지에서 구마산포에 이르는 해안 약 10리를 군항지로 매축코자 하오나 이미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지금에 와서 온당치 못한 일」이라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전쟁은 1년 전에 끝난 러일전쟁을 두고한 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5월 16일 지령 20호로 창원감리에게「이미 평화가 찾아온 마당에 군용지도 물러나 주어야 할 것이니 매축공사는 교섭하여 정지(停止)하게 하라」라는 내용의 매축계획중지를 지시하는 훈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앞의 매립계획과 마찬가지로 이 매립에 관한 기록도 여기서 끝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진척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도 1906년 이후 제작된 지도 및 각종 자료에 이런 식의 매립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을사조약으로 한반도를 손에 쥔 일본의 야욕이 마산포에 드러났던 두 번의 매립계획은 이렇게 계획으로만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계획만으로 끝난 그들의 마산포 매립시도는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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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사(神社)가 우리 민족을 정신적으로 위압했다면, 물리력으로 우리를 억누른 것은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었습니다.
일본군대의 마산진출은 1905년 마산선 철도가 건설될 때 쯤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1909년 7월 일본육군의 중포병대대(重砲兵大隊)가 진해에서 마산 월영동(현 월영동아파트단지)로 이전한 것과 같은 해 12월 대구헌병분유소(大邱憲兵分遺所)을 신마산에 설립한 일입니다.
이 글은 월영동에 주둔했던 「육군중포병대대」에 대한 내용입니다.
러시아와의 각축기에 일제는 율구미와 자복포 일대(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 및 구 한국철강 부근 일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로 확정했다가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이 체결될 즈음 이 지역은 군용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1908년부터 본격적인 병영 건설에 착수하여 1909년 7월 완공, ‘진해만 요새사령부’와 ‘진해만 중포병대대’가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후 1913년 '진해만 요새사령부'는 진해 좌천리로 이전해 가고 중포병대대는 해방 때까지 이곳에 주둔합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의 중포병대대 전경입니다.
첫째 사진은 앞면, 둘째는 뒷면, 셋째는 정문입니다.
두번 째 사진의 산은 지금의 해운동 주공아파트단지이고 산 왼쪽에 일렬로 선 건물은 군용관사인데 관사 앞 길이 지금의 월영동 아파트단지 입구 도로입니다.
저 사진 속에 보이는 벚나무들이 잘 자라 현재의 월영아파트단지를 조성할 무렵에는 둥치가 아름드리였고 꽃도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남아 있었다면 장관일텐데,,,,
기계톱에 잘려나간 고목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현재 사진입니다.
뒤에서 찍었습니다.
다음 그림은 중포병대대가 들어오기전인 1899년의 이 지역 지도와 들어온 후인 1910년대에 제작된 1/20,000 지도를 비교입니다.
구 한국철강 부지의 일부가 그 당시 이미 일부 매립되어 군용지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16에 일본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1/10,000 지도에 표시된 같은 위치의 지도와 현재의 위성사진입니다.
일본군대 주둔은 식민지 무단통치수단이었던 터라 월영동에 똬리를 튼 중포병대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19년 3월 독립운동 때 이 부대는 마산인근의 만세시위현장 곳곳에 투입해 시위 군중을 진압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3월 19일 함안군 함안읍 장날 의거,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 의거, 3월 28일 마산의 진동 고현시장 의거 등입니다.
마산중포병대대병들의 훈련 장면입니다.
해방 후에도 이곳은 군사용지로 이용되었습니다.
해방 2개월 후인 1945년 10월 8일, 미 40사단 산하 2개 대대병력이 이곳에 들어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정 말기인 1948년 5월 20일 조선경비대 제15연대가 이곳에서 창설되었고 5월 30일에는 제1차 모병이 여기서 있었습니다.
당시 모병을 위한 마산지역의 실력자 간담회가 열렸는데, 장소는 일본인이 운영했던 요정 ‘망월루’였고 15연대장, 미군사고문, 경찰서장, 부윤(지금의 시장)대리, 마산지역의 각 청년단장 등이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15연대의 주요임무 중 하나가 ‘폭동진압’이었습니다.
1948년 10월에 발발한 여순사건 진압에 출동하여 열다섯 명이 전사했으며 1949년 4월 거제민중봉기에도 투입되었습니다.
일본군과 미군을 거친 이곳은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국군의 의무부대로 변신합니다.
그 시작은 1950년 12월 수도육군병원이 서울에서 옮겨오면서 부터였지만 본격적인 변신은1952년 9월 27일 부산 동래에서 육군군의학교가 이곳에 옮겨오면서 부터였습니다.
육군군의학교는 11월에 완월초등학교, 다음 해인 1953년 5월에 마산중학교를 인수하여 3천명 규모의 본격적인 의무교육을 시작하여 1963년까지 11년간 총 84,969명의 의무관련 교육수료자(군의관, 간호장교, 위생병)를 배출하였습니다.
육군병원과 공군병원 마산분원 등 많은 군 관련 병원들도 이곳을 거쳐 갔습니다.
지금은 조용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수도육군병원(1950년, 1952년부터 1963년까지는 육군군의학교도 함께 운영)→36육군병원(1953년, 1954년 육군의무기지사령부가 이곳에서 창설되어 9년간 활동)→26육군병원(1968년)→국군마산통합병원(1971년)→국군마산병원(1984년)을 거쳐 1993년 진전면 임곡리로 이 병원이 이전되기까지 이 터는 우리나라 국군의무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아파트 단지 한쪽에 국군의무병과요람지지(國軍醫務兵科搖籃之址)라고 새겨진 국군의무사 기념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수치스러워 그랬는지 식민지 시대의 역사는 적어 놓지 않았습니다.
기념하는 글 마지막 부분에는
“지금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옛 병영물은 보이지 않지만 국군의무부대의 역사가 서려있는 이곳이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오래토록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100년 전 일본군 중포병대대로 시작된 월영동 아파트단지 터,,,,
해방 후에는 미군이 점령했고 정부수립 뒤에는 국군병원을 거쳐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했습니다.
기구했던 자신의 궤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중포병대대가 판 연못과 그들이 심은 듯한 고목 몇 그루, 그리고 이 땅이 군용지였음을 보여주는 표지석만 남아 저 터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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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2010/12/21 22:54
잘보았습니다. 마산중포병대대병들의 훈련 장면에 나오는 포의 경우 280미리 유탄포로 러일전쟁 당시 뤼순항 전투에서 유력을 발휘하여 일본이 승리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포입니다. 280미리 유탄포는 1884년 이탈리아 군사고문의 의견을 듣고 개발을 시작하여 1887년에 제식화가 된 화포라고 하는데 주로 해안포로 사용되었는데 1940년 이후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1920년대가 접어들면서 280미리 유탄포의 경우 구식이라 천대를 받게 됩니다.
이 유탄포의 경우 진해로 들어오는 길목인 가덕도 외양포에도 설치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놈을 마산에도 설치했다고 하니 놀라운데요. 외해가 아닌 내해에 설치를 했다고 하니까요?
러일전쟁 직후 유탄포를 설치했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1904년 이후 마산에 부대가 설치된 후 사진을 찍었다고 보았을때 1910~12년 사이로 보입니다. -
팬저 2010/12/21 22:57
모형으로는 보았는데 중포병대의 모습의 사진은 처음봅니다. 마산중포병대대의 포기지의 경우 사방으로 높게 쌓은 흙이 보이는데 저런 방식의 경우 가덕도 외양포에도 있더군요. 방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입니다.
외양포뿐만 아니라 부산에도 포부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똑 같은 280미리 유탄포이고 조선뿐 아니라 일본 전역에도 이런식으로 포부대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훗가이도 하코다테에도 280미리 유탄포를 설치하였는데 포기지가 외양포와 같네요.
일본이 요새를 건설한 것을 보면 1차대전후 도쿄만, 대마도, 이키, 진해만이고
2차대전시 도쿄만, 시모노세키, 유라, 마이즈루, 츠가루, 사세보, 나가사키, 진해만, 대마도, 이키, 풍예, 뤼순, 대련, 료고 만, 나진, 모토타카, 법호도, 고웅, 아미미오시마, 치치지마 인데 1, 2차 대전 모두 진해만이 포함됩니다. 얼마나 일본이 진해만을 공들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개항직후 마산의 산업>
개항 후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마산에도 근대산업의 문이 열렸습니다.
무역이 본격화되었고, 금융업과 건설업이 선을 보였습니다. 마산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던 장유업도 이 때 시작되었습니다.
○ 항만
『110년 전인 1900년, 마산항의 무역량은 수입 154,765엔, 수출 87,024엔으로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두 배 가량 많았다.
쌀․콩․동광(銅鑛)․사금(砂金)․소가죽․소금 등을 수출하였고 방적사(紡績絲)․옥양목․석유․솜․명태․누룩․성냥․철제품 등 생활용품이 마산항을 통해 들어왔다. 그 중 일부 수입품은 칠원․진주 이북 지방뿐만 아니라 전라도 상인들까지 마산포에 와서 일본에서 수입한 소비품들을 사갔다』
이 글은 1902년 일본인 향월원태랑(香月源太郞)이 1발간한 『한국안내』에 실린 기록입니다. 『한국안내』는 일본인에 의해 기록된 마산관련 최초의 문헌으로, 마산포에 대해서는 열다섯 쪽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의 소비제품들은 마산포를 통해 한반도 내륙 깊숙이 공급되어 1908년경에는 전라도는 물론 멀리 충청도까지 판로가 아주 넓었습니다.
1910년에 들어서도 마산항은 수출액이 158,834,000엔인데 비해 수입액이 566,869,000엔으로 수입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항구였습니다.
이 시기의 수출은 주로 웅천․칠원․진해․영산․함안․창원․의령․김해․덕산․거제․사천 등지에서 생산되는 곡류를 일본의 大阪과 兵庫․중국의 대련․국내의 부산과 염포(울산에 있었던 포구) 등지로 내 보냈습니다.
이 때도 수입품은 대부분 생활에 필요한 소모품이었는데 수입품 중 1/3이 동경, 2/3가 오사카 제품이었으며 그것도 효능 위주의 필수품이 아닌 양산․모자․가방․넥타이와 면포․면사․솥․성냥 등 사치성 고급소모품과 고급 생활필수품 등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마산항은 이 땅에서 생산되는 곡류를 일본으로 내보내고 일본에서 생산된 소비품을 수입하는 항구였던 겁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 수출입 창구였던 마산세관 뱃머리입니다. 1910년 사진입니다.
○ 금융업
러일전쟁
이런 정책 기조 속에서 마산에서도 일본인들에 의한 금융업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878년 일본제일은행 부산지점이 한국 땅에 들어 온 외국 금융업의 최초였습니다만 마산에는 그로부터 27년 후인 1905년 12월 25일 제일은행 마산출장소가 개설되었습니다.
마산포에 있던 제일은행 마산출장소는 1907년 현 월남동 성당 자리로 신축하여 이전하였습니다.
다음 사진이 1907년 신축 이전 기념사진입니다.
이 건물은 1960년대 중반에 현재의 성당이 거립되면서 철거되었지만 사진 속에 서있는 일본인들이 밟고 섰던 현관입구의 계단석은 성당 마당 한쪽에 보존되어 흘러간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 현 성당 건립 때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께서 선물한 종을 안치하기 위한 기념물을 만들면서 그 계단석을 땅에 묻어버렸다고합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랫동안 보존해왔던 의미있는 계단석인데 참 안타깝습니다.
아래 사진이 성당 마당 한 켠에 있는 기념물입니다. 이 탑 아래에 계단석이 묻혀있다고 합니다.
다음 사진은 성당 마당 한가운데 서있는 나무 밑 보호석입니다. 원래 은행건물의 화단석으로 유일한 흔적입니다.
제일은행 마산출장소 외에 진주농공은행 마산출장소, 마산금융주식회사, 창원지방금융조합이 이 시기에 문을 열었습니다.
사채업자도 약 20명 있었으며 전당포 10여개소가 영업을 시작하였고 보험업도 번성하여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개설한 보험회사가 11개소나 되었습니다.
모든 금융기관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창설 운영되었으며 금융조합은 한국인이 조합장을 맡았으나 중요 업무는 역시 일본인이 맡았습니다.
사채업자와 전당업자도 전부 일본인이었으며 영업이 잘되었다고 합니다. 이율이 월 2.3%에서 7%의 고리였는데 주로 한국인들이 빌려 썼습니다.
○ 양조업 및 기타
일제시대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마산의 대표적 산업인 양조업은 1904년 1월 일본인 동충용(東忠勇)에 의해 세워진 아즈마(東)양조장이 효시였습니다.
무학소주와 몽고간장으로 그 맥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마산의 양조업이 드디어 마산에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사진은 1905년 창업한 석교(石橋)주조장입니다. 사진의 공장건물은 1914년에 지었으며 서성동에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의 이주와 정착으로 신마산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건설관련업체들이 속속 자리 잡기 시작해 1910년경에는 17명의 토목건축청부업자가 있었습니다.
전문건설업체도 많아 1909년에는 미장업 35명, 목공업 40명의 회원들이 조합을 구성할 정도로 건설관련 종사자가 많았습니다.
이 시기 거류지에는 주택임대업을 위한 임대주택 건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확대되어 가는 마산의 산업 및 상권을 주도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상품판매를 기업화시키는 일환으로 마산청과물시장과 같은 대규모 채소매장을 1910년 9월에 열었습니다.
당시 마산에는 10개의 목재상과 13개의 석유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재상들은 모두 신마산에 자리잡은 데 반해 13개 석유상들 중 11개가 원마산(마산포)에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해안에 정박하는 선박의 양과 생활필수품의 판매량이 신마산에 비해 월등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상업에 비해 공업부분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는데 1911년까지 정미소 6개와 소규모 비누공장과 철물공장이 각 1개씩 있었습니다.
이 외에 근대적인 주식회사 형식으로 1905년 마산수산주식회사가 창포동 3가에 설립되어 일본인들을 상대로 활어 위판업을 시작했으며 1906년에는 사(私)금융업체인 마산금융주식회사가, 1908년에는 마산곡물주식회사가 설립되기도 했습니다.
개항 후부터 경술국치 이전까지 일본인들이 마산에 세운 공장들입니다.<<<
|
업종 |
상호 |
대표자 |
소재지 |
설립일 |
자본(원) |
|
청주양조업 |
東양조장 |
東忠勇 |
|
1904. 1 |
|
|
石橋주조장 |
石橋市太郞 |
서성동 |
1905. 10 |
12,000 | |
|
五反田주조장 |
五反田富次郞 |
장군동 |
1906. 10 |
10,000 | |
|
水式주조장 |
水式富次郞 |
청계동 |
1906. 11 |
10,000 | |
|
西田주조장 |
西田嘉惣市 |
홍문동 |
1907. 11 |
20,000 | |
|
岡田주조장 |
岡田玉吉 |
상남동 |
1908. 9 |
12,000 | |
|
千鳥園주조장 |
遠藤豊吉 |
장군동 |
1909. 10 |
15,000 | |
|
장유양조업 |
赤門장유양조장 |
管式夫 |
신창동 |
1906. 11 |
10,000 |
|
정미업 |
夏目정미소 |
夏目哲三 |
남성동 |
1907. 5 |
10,000 |
|
松原정미소 |
松原甲藏 |
남성동 |
1910. 8 |
20,000 | |
|
기타 |
上野제면소 |
上野玄一 |
추산동 |
1910. 7 |
5,000 |
|
마산철공소 |
松本多藏 |
월포동 |
1907. 3 |
10,000 | |
|
瀨川하차공장 |
瀨川渚之助 |
상남동 |
1908. 4 |
3,500 |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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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년 전, 마산에 철도가 놓이다>
마산에 최초로 일본군대가 들어온 것은 이 도시에 철도가 놓일 때였습니다.
러일전쟁에 앞서 일본은 마산에 있는 우체국과 전보사 및 율구미에 있던 러시아 해군육상사령부의 시설을 압수했고, 한일의정서 체결(1904. 2. 23) 후부터는 마산항에 일본군과 군수물자를 실은 군함이 무시로 드나들었습니다.
1904년 9월 1일에는 군용철도 마산선을 놓기 위해 일본군 건설공작대가 마산만을 통해 입항했습니다.
마산에 들어온 일본군은 철도용지 명목으로 마산포 주민들의 토지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압수하는 폭거를 저질렀습니다. 마산 뿐아니라 전국적인 일이었습니다.
경계 측량을 할 때 경계를 속인다든지, 원래 정해진 경계보다 턱없이 많게 토지를 점령한다든지, 군용지라고 속여 민간의 토지를 침범한다든지, 일본군의 군용도로를 만든다면서 민가를 헐어버린다든지, 개인 사유지를 일본정부에서 내려준 것이라면서 팻말을 박아 자기 땅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하는 등 일본인들의 횡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강제로 논밭을 박탈한 일제는 그 보상은 외면한 채 오히려 '철도규칙'을 만들어 한국인과 한국의 관리들을 악랄하게 압박했습니다. 그 내용은
㉮ 철도 위를 보행하는 자 및 전선을 손대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하여 엄벌에 처하고 ㉯ 군용철도와 전선을 파괴하는 자 또는 그 모의를 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며
㉰ 범행자가 속한 군수와 촌리도 엄벌에 처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이 '철도규칙'에 저항한 조선사람들을 일본군인들이 학살하는 장면입니다. 1906년에 촬영한 자료입니다.
마산선 철도는 1904년 1월에 '한국인이 설립한 영남지선철도회사'가 착공한 마산과 삼랑진간의 철도였습니다다.
영남지선철도회사는 한국정부의 외부참사를 지낸 바 있는 부산 태생의 박기종이 황족인 완순군 이재완(李載完)을 앞세워서 1902년 6월 한국정부 농상공부 대신으로부터 마산포와 삼랑진간의 철도부설을 조건으로 설립한 회사였습니다. 사장은 완순군 이재완이었습니다
이 회사를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 후 맺은 의정서를 핑계로 사업권을 강제로 접수한 다음, 자국의 인력을 동원해 1905년 5월 25일에 개통시킨 것입니다. 경부선과 같은 해였고 경의선과 경인선보다는 1년 빨랐습니다.
처음에는 군사용이었으나 개통한 몇달 후인 11월 1일부터는 민간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현재 마산도시의 간선도로로 이용되는 육호광장에서 경남은행 본점 앞을 지나는 중앙로가 마산선 철도였습니다.
철도 마산선의 종착역이기도한 마산역은 일본인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조계지에서 가까운 곳, 지금의 마산중부 경찰서 건너편 벽산 블루밍아파트 단지 일대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의 마산역사와 위치입니다.
일제는 한반도 식민정책에서 철도노선과 역사(驛舍) 위치결정 등 초기의 시가지 계획을 통해 큰 이권을 챙겼습니다.
신축하는 역사(驛舍)를 구 상권과 다소 떨어진 곳에 짓고, 역사 가까운 곳에 신시가지를 조성하여 그들 손에 넣었습니다.
서울의 종로상가와 동대문 상가를 겨냥하여 서울역 주변과 충무로를 개발한 것이 그 사례입니다.
마산의 경우도 지리적으로 볼 때 이런 맥락에서 마산 역 위치선정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산역의 준공과 때를 같이하여 역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조계지와 원마산(마산포) 일대까지 대대적인 건축공사가 일어나 여관에 빈 방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근대양식의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일본 건설기술자와 노무자들 때문이었습니다. 협소한 방에서 일본인 노무자가 4-5명씩 합숙하면서 지내기도 했다합니다.
철도건설의 특수를 타고 1905년을 전후해 일본에서 매춘부까지 이 도시에 들어왔다고 하니, 단기간이었지만 철도건설 때문에 이 도시가 북적였던 것 같습니다.
마산선 철도 개통은 이 도시를 해로(海路)와 육로를 통해 일본과 한반도 내륙을 연결시키는 결절점으로 부상시켰고 마산의 도시화를 촉진시켰습니다.
일본과는 배로, 서울까지는 당시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던 기차로 연결되었던 도시는 마산과 부산 인천 뿐이었습니다.
철도 개통 직후에는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신마산에만 역이 있었지만 5년 후인 1910년 7월 5일 원마산(마산포)에도 역을 개설하였습니다. 구마산역이라 이름짓고 한국사람들이 주로 이용했습니다.
현재 교보빌딩 앞 육호광장이 구마산역 터였는데 67년 간 이용되다가 1977년 12월 26일 마산의 세 역(마산역, 구마산역, 북마산역)이 현재 사용하는 석전동의 마산역으로 통합되면서 폐쇄되었습니다.
긴 세월 동안 마산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인데 아무 흔적도 남겨놓지 않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마산선의 철도건설공사는 전(全) 5공구로 나누어 일본인들에 의해 시행되었으며, 철도건설에 대한 아무런 경험도 없던 한국인들은 단순노무자로만 참여하였습니다.
일본의 ‘사단법인토목공업협회’가 펴낸 『일본토목건설업사』에는 마산선 철도공사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904년 8월 철도감부는 마산포를 기점으로 낙동강 우안(右岸)에 군용철도부설의 명을 받아 전선(全線)을 5공구로 나누고 가장 북쪽의 1공구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은 곧바로 노선기반공사에 들어갔다. 청부자는 좌등조구랑(佐藤助九郞). 태창토목조(大倉土木組), 지기신태랑(志岐信太郞) 등이다」
이 책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시공한 한국의 철도공사와 관련한 대담이 실려 있습니다. 당시 최고 최대의 건설공사였던 철도공사에 한국사람들이 참여한 수준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平井 ; (철도공사에서)조선인 청부업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江崎 ;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인은 자금이 없었습니다.
어떤 일이 나오면 일본의 대형 건설업자가 나왔습니다.
平井 ; 실제로는 하청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江崎 ; 하청의 하청 정도였지요.
飯吉 ; 노무자로 참여한 정도이지요.
자본력이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지요.
…………………
논과 밭이 헐린 곳에 두 갈레 쇠길이 생기고, 그 쇠길 위로 뱀처럼 긴 시커먼 쇳덩어리가 화통을 울리며 달려들었을 때, 이를 처음 본 마산포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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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포는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식민야욕을 불태웠던 각축장이었습니다. 시기는 개항 전후였고 그 절정이 「마산포사건」입니다.
「마산포사건」은 러시아가 부동군항(不凍軍港)을 얻기 위해 마산포를 점령하려했던 사건입니다. 사건개요를 요약합니다
러시아는 군사적 목적의 부동항을 얻기 위해 우선 조선정부와 마산포 저탄소(貯炭所) 설치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일본이 러시아가 목적한 토지를 미리 매입해버림으로써 러시아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1900년 때 일입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단념하지 않고 마산포 남쪽의 율구미(현 마산시 가포동의 국립결핵병원에서 MBC 송신소에 이르는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역)를 얻어 1900년 6월 4일 30여 만평의 러시아 단독조차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에 질세라 일본도 1902년 5월 17일을 기해 자복포(구 한국철강과 월영동 아파트단지, 구 국군통합병원 일대)에 일본 전관거류지 30여만 평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미 설치된 신마산 각국공동조계지 인근 두 곳에 러·일 단독조계지가 추가되는 기현상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나라 각축이 있었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러시아 단독조계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러시아 단독조계가 없어지니 일본도 굳이 단독조계를 설치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일본은 각국공동조계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처럼 사용하고 자복포의 단독조계는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상황 몇가지 소개합니다.
당시 마산의 분위기가 그랬던 만큼 강대국 군함의 마산 입출항도 많았습니다.
1899년 4월부터 1900년 11월까지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외국 군함의 마산항 출입 상황은 러시아가 가장 많은 28척, 일본이 10척, 영국이 4척, 독일이 1척이었는데 이 배는 모두 병함(兵艦) 혹은 수뢰정(水雷艇)이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러시아는 가포 인근인 율구미에 군대까지 주둔시켰습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의미는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그림 두 장은 당시 러시아 해군이 율구미에 주둔했던 사진입니다.
먼저 것은 ‘율구미 주재 러시아 사관 및 부영사 가족’ 사진입니다. 사택으로 보이는 뒷 건물에 사용된 재료는 형태를 보아 조선 현지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조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율구미 주재 러시아 군대 체조장의 사관 및 수병’들 사진입니다. 수병들이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했습니다.
개항 나흘 후인 1899년 5월 5일, 러시아 고위공직자들이 마산포에 왔습니다. 주(駐)조선 러시아공사 파블로프가 일행과 함께 만추리아호를 타고 마산포에 도착합니다.
일행은 율구미라 부르는 자복봉 능선을 따라 30여만 평의 토지에 표석 500본, 표목 500본을 꽂아 임의로 그곳이 자신들의 영역임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국기가 달린 5.4m의 표간(標杆)을 자복포 배후의 구릉과 가포에 인접한 해안에 각각 12개를 세웠습니다.
이곳이 나중에 러시아 단독조계지가 됩니다.
위 그림 왼쪽에 그려진 것이 바로 그 표간입니다.
미의회 도서관자료인데 마산포사건과 관련한 일본해군대신 관방서류에 수록되어 있는 자료입니다.
이 도면에는 율구미 능선을 따라 늘어선 표석과 표목의 위치와 함께 러시아 국기가 달려있는 표간의 상세한 도면이 그려져 있으며 표시물의 위치와 숫자는 이 도면을 설명하는 보고서에 별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구미 일대에 꽂힌 표석과 표목 각각 500개, 그리고 율구미 능선과 가포해안에 선 5.4m 높이의 24개 깃발을 상상해 보십시오. 러시아의 위세가 당시 어떠했는지,,,,
표목과 표간은 이미 썩어 없어졌겠지만 표석 500개는 땅 밑 어딘가에서 아직 잠자고 있겠지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표석 발굴에 나서 보면 어떨까요?
이러한 러시아의 행동은 호시탐탐 마산포를 넘보던 일본을 자극하였습니다.
일본은 마산포의 당시 상황을 일일이 본국 정부에 보고하면서 마산포를 러시아보다 선점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에 이어 일본도 자복포에 전관거류지를 설치하게 되었던 겁니다.
다음 그림은 그 시기에 첩보용으로 율구미를 촬영했던 사진입니다.
일본 해군소속 군함 '대도(大嶋)'의 첩보주임 이집원후(伊集院後)가 1900년 5월 1일에 촬영한 것입니다. 가운데 높은 봉이 갈마봉인가요?
마산포로 진출할 의사를 가진 나라가 러시아와 일본, 영국뿐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도 석탄하역장과 해군병원의 부지로 사용하기 위해 마산포 부근에 진출을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1885-1913년 외교보고서』 중 마산관련 자료입니다.
No 65
1901년 9월 17일, 동경
조선에서의 프랑스와 러시아
존경하는 백작각하!
제가 이미 이전의 보고에서 자주 말씀드렸던 바, 조선 내에서의 프랑스의 활동은 일본신문에 계속 표제화되고 있습니다․․․․․․․․
신문들에 의하면 이전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이제 프랑스도 석탄하역창과 해군병원의 부지로 사용하기 위해 마산포 부근에 위치한 작은 항구를 양도해 줄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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