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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0. 마산포와 열강

140. 마산포와 열강

 

 

1901년 노국은 북청(北淸)사건을 이용하여 만주에 군사적 관리권을 확립했다. 1902년에는 동청(東淸)철도도 개통되고 1903년에는 시베리아 철도의 본선도 완성되었다.

 

노국의 경제적 세력은 광산, 기타 사업에 융자하기 위한 노청(露淸)은행의 설립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이 노청(露淸)은행 자본금 15백만 루불은 1895년 말 대 중국 자본 수출을 목적하고 불국(佛國) 금융자본과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식민은행이었다.

 

·일전쟁 후 노국이 대일 배상금 지불 제1회의 인수를 맡아 점차 상해를 비롯하여 일본의 장기(長崎)지점 수표로 조선정부에 납입되었고, 마산포 개항 후 이 거대한 투자는 노청은행의 전통적인 금융자본이었다.

 

그 뒤 이 노청은행의 자매 은행이 노국의 유류, 사탕 등을 판매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노국의 무역업자들은 가는 곳마다 그림자를 나타내어 그 자본가들은 광산을 채굴하고 제분소를 세우는 등 분주하였다.

 

1900년 말부터 노국은 소위 노청조약 체결을 통한 특수적 권익 범위의 확장을 시도하였다. 이 노청 조약이 열강에 알려지게 되자 미···일 등 열국은 중국에 대하여 일국(一國)과 특별 협정을 맺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여 그들의 이익옹호를 도모하였다.

 

19013월 일본은 단독으로 노국 정부에 대하여 노청밀약(露淸密約) 같은 것은 이를 열국 회의에 제출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중국 정부에 대하여는 밀약에 조인하지 말라고 통고하는 등 극력 그 성립을 방해하였다.

 

노국은 일본의 항의에 따라 밀약을 포기하였으나, 북경의 주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만주 점령 계속을 선언하였다. 일본이 중국, 조선에 대하여 태도를 급격히 적극화시킨 것은 1902년 영·일동맹의 성립부터였다. 우리나라 마산포를 비롯한 남해안에서 노국 세력이 후퇴한 것도 극동 정세의 반영에서였다.

 

영국은 이 영·일동맹의 체결에 따라 청일전쟁 후 급속히 팽창하고 있던 일본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인도에 대한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고 또 노국 진출로 인한 중국에 있어서의 이권 침해를 막으려 하였다. 일본은 노국이 추진하고 있는 만주와 조선 침략에 대항하여 자국의 침략 의도를 수행하려 하였던 것이다.

 

제정 러시아로 하여금 시베리아로부터 중국으로 맹진케 한 힘은 기술한 바와 같이 불국(佛國) 금융자본이었다. 노국(露國)과 불국(佛國)을 중국으로 전향케 한 배후의 압력으로 나타난 것은 독일제국주의였다.

 

19세기로부터 20세기 전환기에 있어 이미 세계 식민지 영역의 분할은 거의 완료하고, 각국은 보호 관세가 점차 높아가는 상태에 있었다.

 

기술적 진보와 경제적 조직의 발전에 의한 끊임없는 압박력은 신진 제국주의 독일로 하여금 삼국동맹(····)의 힘을 이용하면서 발칸반도의 자본주의적 침략의 길을 필연케 하여, 그 결과 이 같은 세계 부분에 걸쳐 이전부터 침략을 계획하고 있던 노불(露佛) 양국을 위압하면서 그 정책은 점차 동방, 즉 중국으로 전향케 한 방책도 취하였다.

 

이 같은 사정은 특히 독일과 격렬한 대립관계에 있던 영국으로 보아 근동(近東) 문제에 있어 독일의 압력은 그 대보고(大寶庫)인 이집트 및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침과 아울러, 중국에 있어서 새로운 불·로국(·露國)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 사면초가의 정세 가운데 소위 영국의 명예와 고립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영국은 드디어 영·(·) 동맹의 결의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주요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격렬한 대립의 필연적 소산이었다.

 

영일(英日) 동맹의 성립은 일본으로 하여금 자신 있는 태도로 노국과 교섭할 수 있게 하였다. 1902915일부터 시작된 노국의 만주 철병은 107일에 완료하였으나, 2기 철병기 19034월에 이르러 태도는 일변하여 드디어 군대를 북한지역에 이동시키고 압록강 상류의 삼림벌채를 개시하여 더 한층 조·(·滿) 경영에 노력하였다.

 

이에 노국의 경영 정책은 더욱 노골화 되어, 1903812일 노국황제 니콜라이는 극동위원회와 그 지령을 극동에서 실행하는 극동 총독 설치의 인칙(認勅)을 내려, 알렉세이브를 극동 총독으로 임명하고 문무일절(文武一切)의 전권(全權)을 부여했다.

 

이 극동위원회는 내각 이외의 직할 관청으로 하고 극동의 경영을 한속에 쥐게 하여 일거 만주 병합의 실현을 기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에 대해 노군의 만주 철퇴를 요구하면서, 그 동안 대로(對露)전쟁 준비를 완전히 갖추어 용암포(龍岩浦) 사건을 계기로 190426일 무력적 해결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18개월간의(19042~19059)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 포츠마츠조약이 체결되고 노국의 동방정책은 좌절되었다.

 

이 결과 그들의 지위는 태평양 강국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승리한 일본의 최대의 수확은 조선의 완전한 획득(통감기를 거쳐 병합=1910) 반독점지(半獨占地) 만주의 획득(만주 선후조약善後條約에 의해 노국이 청국으로부터 얻은 일절一切의 계승)

 

·(·) 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1905년 혁명이 일어나 동양으로의 야심은 물론 신흥 독일 자본조의의 약진을 가져와 세계 자본주의의 최대 대립은 영·(·)로부터 영·(·)으로 옮겨져 1914년 제2차 세계대전의 기점을 만들게 되었다.

 

<영국의 부추김으로 러시아와 맞서는 일본을 풍자한 그림. 영국이 “네가 뿔을 잡아당기면 내가 꼬리를 잡을게”라고 외치고 있다. (출처 : ‘풍자화로 보는 러일전쟁’ 지식산업사)>

 

 

이상은 마산포를 둘러싼 근대 노일관계를 고찰함에 앞서 1900년 전후 조선을 둘러싼 극동의 국제관계를 극히 개괄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한편 노일전쟁 직전의 노국 궁정의 내박을 보면, 19038월 니콜라이를 회장으로 하고 외무(外務), 대장(大藏), 육해(陸海) 각 대신을 위원으로 하여 극동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이 위원회는 극동의 광대한 영역에 대한 행정권, 극동 육·해군 전반에 걸친 사령권과 한··청과의 외교의 지배권을 가진 극동 총독이 신설되었다.

 

그러나 노국 내 수뇌 간에 대립 항쟁의 극치가 있었다. 베즈브로크파가 일본과 타협하여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비터 캄스드트로프킨등 일파를 봉쇄하고 그들의 모험주의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베즈브로크파에 의해 극동총독으로 임명된 알렉세이브는 육군에 대해서는 물론 해군에 대하여서까지도 극동의 난관에 처할 식견과 수완을 갖지 못해 황제의 총애에만 의존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대일 정책에 있어서도 사태의 병화에 적응된 정책을 취하지 못하고 황제와 전문(電文)의 왕복에 긴박한 시일만 공비(公費)하였다.

 

제정로(帝政露)는 이같이 외관상으로는 세계의 강국으로 보였으나 내부적으로 대두하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운동에 의해 동요하면서 수뇌부 내부의 대립 항쟁 가운데 열강의 여론이 무시된 채 강경개전(强硬開戰)으로 돌진했다.

 

이들은 대일전(對日戰)에 근소한 승리로 위엄을 보지(保持)하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부 정세는 노일 전쟁 개시 후 작전 수행에도 영향을 끼쳐 총사령관 알렉세이브와 만로(滿露) 군사령관 크로프도킹 사이에 심한 대립이 일어나 전략상에 커다란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크로프도킹은 노국이 전쟁 준비가 정비될 때까지 일본군과 근소의 전투를 하면서 하르빙까지 퇴각하여 전투력을 강화한 후 맹공격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알렉세이브의 적극적인 주장에 눌려 드디어 여순(旅順), 요양(遼陽), 봉천(奉天)의 패전을 초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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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진섭 2017.03.08 13: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지금의 한반도 상황이 그때의 긴박함과 비교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듯 합니다. 다만 지금은 정세에 어두웠던 그때와 달리 정보통신의 발달로 국민이 이 사태를 시시각각 주시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 허정도 2017.03.09 18:08 신고 address edit & del

      맞는 말씀입니다. 나라 일이 걱정입니다.

2017.02.2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9. 노일전쟁과 율구미

 

139. ·(·) 전쟁과 율구미(栗九味)

 

 

노국의 조계지인 율구미는 190315일을 마지막으로 노국 수변 8명이 철수한 후에는 공지화되었다.

 

이를 그냥 둘 수 없어 노국 영사 카자코브는 치지코브라는 자에게 그곳을 관리 시켰다. 관리 조건은 마산포에 입항하는 노국 군함에 공급할 용수정(用水井) 하나를 마련할 것과 산에 감시인을 두기로 하고 매월 10원씩 주던 것을 무급으로 하되 한국인에게 소작을 시켜 수확된 절반을 취득케 하였다.

 

노일 전쟁이 일어나 18일 치지코프가 마산포를 철수할 때 그가 가졌던 상품을 일본인 강기(岡崎)라는 자에 매도한 것이 연고가 되어 율구미 조계지를 이 강기(岡崎)가 관리했다.

 

또 부산에 살던 일본이 강본(岡本)이라는 자가 로인(露人)과 친했기 때문에 치지코프로부터 호텔 관리를 의뢰받은 관계로 같이 그 관리에 관계했다. 노일전쟁이 일어난 뒤 1904518일 조선정부는 조로(朝露)조약을 폐기키로 선언했다(·로 조약폐기칙선언서·露 條約廢棄勅宣言書). 1조에 한·(·()) 양국 간에 체결한 조약과 협정은 폐파(廢罷)하고 실시(實施)할 사().

 

따라서 190064일 외부통상국장 정대유와 마산 노국부영사(露國副領事) 소코브가 이에 체결한 율구미호약(栗九味互約)도 폐기됨과 동시에 율구미 노국 조계지는 자동적으로 조선정부에 복귀된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조로(朝露) 조약의 폐기와 아울러 감리서에게 훈령하여 이를 정식으로 접수하고 주체적 입장에서 지방민을 위해 유효하게 활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하무인격으로 횡포를 자행하던 일인들이 율구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즉 길야문길(吉野文吉)이라는 자는 전쟁이 일어난 1904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율구미의 재목을 맘대로 벌채한 것이 오천 원어치나 되고 그 수는 부지기수였다. 그 후 전술한 로인(露人) 치지코프가 철수할 때 그의 상품을 샀다는 강기(岡崎)90여 만원어치나 벌목하여 울창했던 율구미는 황폐하고 말았던 것이다.

 

율구미가 무방위 상태에서 일인들의 남벌로 황폐해가는 것을 보고도, 중앙 정부로부터 지령이 없어 감리(군수)는 외부대신에게 그것을 관리함이 타당한지 여부를 질문했던 것이다. 일본 영사 삼포미오랑(三浦彌五郞)은 이 기회를 틈타 율구미를 일본 세력권 내로 확보해두기 위해 일본 천엽현(千葉縣) 어업단을 이주시킬 계획을 추진시켰던 것이다.

 

그때 천엽현 어민들은 고기가 잡히지 않아 조선 남해 연안의 적지(敵地)에 그들 어민을 이주시킬 목적으로 천엽수산시험장장(千葉水産試驗場長) 이하 그 관하 어업 대표자가 시찰차 마산에 오게 되었다.

 

이들은 1904929일 마산 일본영사 삼포미오랑(三浦彌五郞)를 찾아가 그에게 협조를 구했다. 삼포(三浦)는 이들 시찰원들을 데리고 이곳을 답사했는데 먼저 50, 200명을 이주시키겠으며 1호당 일백 원씩 모두 오천 원의 보조로 19054월에 이주 실행을 하겠다고 했다.

 

이 조계지 면적은 30여만 평인데 그 5분의 3은 산지와 경사지이며 거기서 받은 30만 평(원문에는 두락) 중 논은 2백여 두락이고 수전(水田)수확은 벼 150석이 된다.

 

벼 일석을 5원으로 치면 총액 750원이 되고 밭에서는 연 수입 백 원은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는 종래의 조선인 소작 14, 15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땅은 이주 어민의 경작지로 정하고 연 수입은 어민들의 적립금만 제외하고는 모두 그들이 찾아가도록 할 것이라 했다.

 

이 무렵 천엽현(千葉縣) 수산시험장장(水産試驗場長)에게 마산 일본영사가 어민 이주를 위해 사전조건을 다음과 같이 내세웠다.

 

(1) 마산 일본영사의 독단으로 율구미의 사용을 묵허(黙許)하는 것이므로 전쟁 계속 중에는 아무 일이 없겠으나 영원한 것은 보증하기 어렵다.

(2) 이주 어민이 올 때는 감독인을 보낼 것.

(3) 이주 어민이 다른 곳으로 전업하여도 억제하지 않겠으나, 단 전업에 관한 제정(提定)을 요한다.

(4) 이주자 조난을 위해 그 적립금을 마산 일본영사에 납입한다.

(5) 어민은 군용어부의 명의로 율구미에 이주시키고 조선 해수산조합 이외에 둔다.(이때 해수산조합의 감독권은 부산 일본영사가 가지고 있었다.)

 

시찰원 일행이 전기(前記) 사항에 합의를 본 106일 귀국 도상에 올랐는데 마산 일본영사는 곧 이 사실을 일본 외무대신에게 품청(稟請)했다.

 

율구미는 노국 조계지였으나 그 조약이 폐기되어 조선 정부에 복귀된 것인데도 이같이 법적 원칙을 무시하고 마산 일본영사가 그들의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일본 어민을 이주시킬 계획을 서둘렀다. 이 얼마나 침략적이며 만행이냐. 이 한 가지 일로써 나머지 일을 상상해 보라.

 

마산 일본영사의 품청(稟請)에 대해 외무대신은 동년 1025일자로 회훈(回訓)을 통하여 재마산 노국 조차지가 소멸할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으나 일단 소멸한 이상은 조선 정부에 복귀해야 된다는 유권적 해석으로 훈령하였다.

 

그 후 천엽현(千葉縣) 지사와 마산 일본 영사는 거듭 어민 이주를 청허해 줄 것을 일본 외무대신에게 요청하였으나, 동년 1122일 부산 일본 영사에게 한 훈령 마산포의 노국 조차지에 관한 외무성 의견서가운데 광무 4330일의 조약 제3항에 의하면 만일 조차지 내에 조선인민의 토지·가옥 등이 있을 때는 조선 정부에서 이를 매상(買上)하여 노국에 인도한다. 운운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해() 민유지(民有地)는 조선 정부에서 매상(買上)하여 조선 정부로부터 다시 노국(露國) 정부에 인도한 것으로 단순히 해() 지소(地所)를 조선으로부터 다시 조차한데 불과하고 노국 정부에서 직접 민유전(民有田)을 매수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로조(露朝)조약의 폐기 결과 해조차권(該租借權)은 당연히 소멸하였으니 율구미 조차지는 조선 정부에 귀속한다는 유권 해석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도 아랑곳없이 19051월 일본 천엽(千葉) 어업자 20여 명의 총대표 길야문길(吉野文吉, 千葉縣 夷隅郡 수산조합 이사)은 다시금 율구미의 일부를 어업 가근거지로 사용케 해줄 것을 마산 일본 영사에게 출원(出願)하였다.

 

이때 마산 일본 영사는 일시 사용이라는 조건하에 통감정부의 허락을 받아 드디어 이를 허가하고 말았다. 당시 조선 정부는 주체성이 상실되어 친일 매국노가 가득 차 있어 일본 영사들이 이러한 불법을 감행해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산 일본 영사의 허가를 받은 일본 천엽촌 수산연합회는 현비(縣費) 보조 4천원을 얻어 먼저 20명의 어부를 선발하여 19052월 전 율구미 북서안에 불법 이주를 감행했다.

 

 

<일본 어업이민지였던 율구미 천엽촌 / 율구미는 국립마산병원과 창원기상대 일대의 산 전체를 말하며, 일본어민들이 정착했던 천엽촌의 위치는 창원기상대 인근에 보이는 마을이 있는 곳이다. 지금도 일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

 

 

이를 근거로 어획물 정리장을 건설하여 약권현망일통(鰯權現網一統), 조정승(鯛廷繩), 수조망(手操網) 등에 종사케 하고 19065월 중에는 다시 일본 당국에 80여 명의 이주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노국과의 전후 고말(姑末) 교섭이 완결되지 않아 허가하기 어렵다는 것을 동현지사(同縣知事)에게 통보하였다.

 

이 결과 50명만이 이주했는데 이 해 대실패를 하여 사망자와 귀향자가 생기고 잔류자는 30명에 불과하였다.

 

동년 12월 통감대신은 조선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재마산 구로국(舊露國) 조차지는 일본 어민의 근거지로 극히 적당하여 전년 이래 해목적(該目的) 이용 중에 있으므로 당분간 차용하겠다는 것을 조회하여 동년 1220일 조선 친일 매국 정부의 동의를 받아 천엽(千葉)어업단의 사용이 묵허(黙許)되었던 것이다.

 

한편 일로(日露) 전쟁이 일어난 뒤로부터 전쟁이 끝나고 로인(露人)이 다시 율구미로 돌아올 때까지 율구미 관리 상황은 그 조계지에 조선인 소작인이 14,5이나 되었다. 이들 작물은 사음(舍音) 하성겸(河聖兼)이 받아 매각하여 그 대금 약 270원을 전후(戰後) 치지코프가 돌아 왔을 때 이를 지불했던 것이다.

 

1906년에 이르러 부산 노국영사 티 아이 봐시리트가 마산 겸임 영사로 마산을 관리하게 된 뒤, 종전에 치지코프가 가진 것과 동일한 조건으로 노국에 귀화한 조선인 이봉형(러시아 명 키리코오프)에게 관리시켜 취득케 했다.

 

관리 로인(露人)이 마산으로 돌아오고 율구미의 황폐가 문제로 대두되자 마산 일본 영사는 일인의 도벌을 조선 측에 전가시키기 위해 그곳 토지와 산판송추(山坂松楸)의 관리를 감리서에 의뢰했다.

 

이에 감리측은 응낙하지 않았다. 19066월 초에 귀환했던 로인(露人)이 돌아와 율구미의 책임을 일본 측에 추궁하게 되자, 일본 측은 우리는 무관하며 감리서에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여 감리 측은 여러 번 추궁을 당하게 됐다.

 

천인공노할 일본의 간사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감리는 로() 영사가 래주(來駐) 이전에 이에 대한 조선 측의 대책을 외부대신에게 청훈(請訓)하였던 것이다.

 

한편 1907년에 율구미에 불법 이주한 천엽현 어업단은 다시 실패하여 동년 말에는 재류자 11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1908년에는 어획의 호조를 가져와 이주자 19명의 증가를 보게 되고 19096월 현재에는 52명으로 증가하였다.

 

1909년으로부터 3년간은 매년 5천원의 현비 보조를 받게 되어 있었다. 이들 자본과 현비 보조는 다음과 같다.(1909년까지)

 

율구미 천엽(千葉) 어업단의 자본 및 현비 보조액

자본 수입액, 현비 보조액 4,000원 합계 4,000(비고 ; 수산연합회 보조) / 원본에는 1906년으로 실려 있으나 그 이전의 것으로 보임

1906년 자본 수입액 2,500원 현비 보조액 8,000원 합계 12,500

1907년 자본금 수입액 2,500원 현비 보조액 5,000원 합계 7,500

1908년 자본금 수입액 2,500원 현비 보조액 5,000원 합계 7,500

1909년 자본금 수입액 현비 보조액 5,000원 합계 5,000

 

그 뒤 율구미 노국 조계지는 일본 육군성이 노국에서 4만원에 이곳을 매수하여 일본 육군 군용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율구미에 불법 이주한 천엽 어업단도 1915년에는 보조의 길이 끊어져 어호(漁戶)의 태반은 귀향하고 그곳은 마산 중포병대의 군용지, 군용림이 되었다.

 

일제 치하는 마산 일본학교 조합이 그 관리를 위촉받아 그 수입을 교육비에 충당해 오고 있었다,

 

율구미는 1904518일 조로(朝露)조약이 폐기됨에 따라 이같이 일인들이 불법 점거하여 막대한 이익을 누렸다는 것은 마산 항민은 말할 것 없고 국가적으로 크나큰 손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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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6. 1900년대의 국제관계

 

136. 1900년대의 국제 관계

 

 

청일정쟁으로부터 노일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최고의 단계인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던 시기로 이 시기의 시대적 특징인 극동에 있어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의 심화와 그 확대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시기는 나이 어린 제국주의 열강(일본, 독일, 미국)이 식민지 쟁탈전의 무대로 등장함으로써 국제 발전 관계에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열게 되었고, 불균등 발전 법칙에 의한 이 같은 자본주의 제국의 급속한 진보는 특히 침략적인 이러한 여러 나라의 정책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청일 전쟁 전 청국의 발전단계는 겨우 근대적 산업의 발생을 보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체기에 있는 봉건사회가 그 반식민지 상태에서 절대주의로 전형(轉形)을 보이는 것뿐으로 그 기본적인 생산양식은 역시 후진적인 봉건제에 불과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은 청국보다 뒤늦게 개방되었으나 1868년의 명치유신으로 극히 불완전하면서도 근대적 자본 형성으로의 길을 열어 반봉건적인 농업생산관계를 기초로 하여 소위 일본형의 자본주의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그 자본은 특수성으로 인한 국내시장의 협애(狹隘)로 중국 진출 및 조선 시장이 독점을 필수 조건으로 규정짓게 하였다.

 

, 일 두 나라 생산구조의 이 같은 기본적인 상위(相違)는 각각 그 외교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청의 대()조선 정책은 조선 시장으로의 상업적 진출을 기초로 하는 청(), () 종속관계의 유지 확보로 그것은 처음부터 방어적인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외교정책은 군사적 산업자본 확립의 요구를 반영하여 매우 계획적이고 조직적이었다.

 

이 같은 정세 하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가고 18943월 일본의 사주로 김옥균의 살해 및 조선 정부의 배일적 의사 표시는 청일개전(淸日開戰)의 공기를 일본 국내에 양성(釀成)케 하여 이를 이용한 일본 정부는 갑오동학 농민란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전쟁(1894~1895)은 중국 봉건제에 대한 일본 자본에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명확하게 반식민지로 전락했고 이에 반해 일본은 급속히 자본주의적 성숙을 촉진하게 되었다.

 

 

<프랑스 삽화가 조르주 비고가 1887년에 그린 ‘낚시 놀이’. 일본 중학교 교과서들이 ‘한국(COREE)’을 낚싯감으로 묘사한 이 그림을 실어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시각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한편 처음 유럽 열강의 청·일전쟁에 대한 태도는 제정 러시아와 같이 직접적으로 중국 영토에 대하여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 이외에는 이 전쟁이 오히려 중국 영토적 침략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인식하에, 소위 일본의 요구가 전승(全勝)을 틈타 과대해지지 않도록 상호간에 일치하여 중국을 원조하지 않으면서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이때 제정 러시아는 그 확대된 자본제 상품생산의 필연적 경제적 모순의 출구를 식민지에 구하려는 내적 요구에 따라, 당시 부동항 획득의 정책에 의해 점차 남하하여 만몽(滿蒙)에 그 세력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

 

1895년 드디어 청·일전쟁이 끝나고 전승국 일본이 조선에 있어서 지배권을 독점하고 요동반도를 획득한 것은, 제정 러시아의 극동 정책에 커다란 장해가 되므로 제정 러시아는 독·(·)과 손을 잡고 3국 간섭으로 노국황제폐하(露國皇帝陛下)의 정부는 일본국으로부터 청국에 대하여 요구한 강화조약을 사열(査閱)컨대, 요동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오로지 청국 정부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국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래 극동의 영구 평화에 대하여 지장을 주는 것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노국 정부는 일본 황제 폐하의 정부에 향하여, 거듭 그 성실한 우의를 표하기 위하여 여기에 일본정부에 권고하기를, 요동반도를 영유(領有)하는 것을 포기케 함으로써 한다.’ ‘청일강화조약 조인 후 423일 동경 주재 노··(··) 3공사에 의해서 일본 외무성에 제출한 권고 중 노국 공가의 각서라고 권고하였다.

 

당시 제정 러시아가 불국(佛國)과 결탁하게 된 유력한 요인은 1888년으로부터 1894년까지의 40억 프랑의 공채가 불국(佛國)에서 조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공채는 주로 제정 러시아에 있어서의 철도, 광산 및 군수품 공업에, 또 불국(佛國)을부터 순수품을 구입하는데 사용하였다. 제정 러시아는 이 공채로 아시아에 있어서의 영토 확장의 대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불국(佛國) 측으로부터 이 공채는 금융자본 수출의 신무대로, 또 자국의 야금(冶金) 공업을 위한 새로운 시장을 연 것이었다.

 

청일전쟁 후 제정 러시아는 중국이 일본에 지불하기로 되어 있는 배상금의 반액 즉 4억 프랑을 사분이자(四分利子) 공채로 모집에 착수하게 되었다.

 

한편 독일이 3국 간섭에 착수한 것은 이로써 노·(·)동맹을 차단하고 노·(·)로 하여금 고립의 지위에 서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노·(·)은 발칸반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대립상태에 있었으므로 각각 노국(露國)을 자기편으로 끌어넣어 적수(敵手)에 대비하고 제국주의 패권을 쥐려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대립이 그들을 일치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가 이 3국 간섭을 단독으로 하지 않고 독·(·)을 끌어 놓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는 것, 여기에 성공하고 독·(·)도 용이하게 여기에 협력하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제국주의의 동양에 있어서의 지위에 대한 3국의 일치 즉 영··(··)의 대립이었으니, 이는 1902년에 영·(··) 동맹의 성립을 가능케 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노·(·)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관계하에서 삼국간섭 후 조선 주() 노국공사(露國公使) 웨벨(Weber)은 청을 대신하여 배일파인 민비파 정권과 결탁한 후 대원군과의 암투대립의 모순 및 그 일본의 노골적인 내정간섭과 침략행위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을 이용하여 그 세력을 부식(扶植)하여 갔다.

 

이리하여 친로파의 우세를 가져오게 하고 친일정부를 위기에 빠뜨리게 하였다. 조선정부 내의 이 같은 급격한 정치적 선회에 놀란 일본은 강경책을 취하기 위해 새로이 육군 소장 삼포오루(三浦五樓)를 주조선공사(駐朝鮮公使)로 파견하였다.

이들 침략자들은 1895108(820) 드디어 민비를 학살하는 야수적인 만행을 감행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유명한 기미 살해사건인 것이다.

 

이 같은 일본의 만행은 조선 민족의 분노를 가져와 반일 의병투쟁이 전개되어 갔고, 한편 조선 정계는 친일파, 친청파로 분열되어 자주성은 한층 더 상실되는 가벼운 동요와 혼란이 계속되어 갔다.

 

189622일 밤 박정석, 이범보 등 친로파는 웨벨과 결탁하여 고종을 노국(露國) 공사관으로 옮김으로써(아관파천俄館播遷) 노국세력의 조선 침투와 친로파 세력의 일시적인 강화를 보장하였다.

이리하여 중국 진출의 일환으로 나타난 제정 러시아의 조선 진출은 독자적 중요성을 지니고 일본과 심한 외교적 투쟁을 계속하면서 노일(露日)전쟁의 전초전을 양성(釀成)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한·(·滿)을 둘러싼 이 같은 노·(·)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전쟁만이 만능이라고 생각하여 청으로부터의 배상금을 토대로 방대한 군비계획안을 작성하여 대로(對露)전쟁에 대비해 갔던 것이다.

 

이에 의하면 단기간 내에 육군의 인원을 3배로, 해군의 함선 톤수를 4배로 확장하여 제정 러시아가 시베리아 간선철도를 완성하기 전에 대로(對露)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전쟁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일시 조선에 있어서의 노국 세력의 팽창을 허()하고 또 견제하는 한편 자기들의 기득권을 최대한으로 유지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와 수차에 걸쳐 외교 담판을 거듭하였다.

1896514일 노·(·) 간에 웨벨, 소촌(小村) 협정(協定)’이 체결되어 일본은 아관파천 후의 친로파 내각을 승인하고 조선에 있어서의 노국세력의 우의를 확인하였다.

 

189669일에는 노일 양국 간에 로바노프 산현(山縣) 의정서(議定書)’ 1차 노·(·) 의정서가 체결되어 조선에 있어서의 양국의 동등의 지위를 상호 확인하고 일본의 특수권리가 부인되었다.

 

이 때 제정 러시아는 조선보다도 만주 침략에 더 힘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일본은 이 기회를 틈타 조선에 있어서의 지위 유지 강화에 필사적으로 광분하였다. 그 결과 1898425일에는 로센 서(西)의정서(2차 노일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이 의정서에서 제정 러시아는 조선에서 이미 획득한 경제적 우월권과 조선의 자주권 및 완전 독립을 승인하고, 또 조선 내정에 직접 간섭하지 않으며 양국의 상호 동의 없이 조선에 어떠한 군사 및 재정고문도 파견하지 않는다는, 이 같은 협정으로 이때 조선에 있어서의 모순과 대립은 일부 완화된 것 같이 보였으나 실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갔다.

 

즉 이때 일본은 상술한 협정과 외교 담판 배후에서 영·(·)의지지 하에 대로(對露)전쟁 준비를 급속히 추진하면서 조선에 있어서 경제적 이권 약탈과 장차 조선을 점령하기 위한 경제적 군사적 토대구축에 광분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은 벌써 조선에서 확고한 경제적 우위를 차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니, 1896년 현재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 총수 18,812명 가운데 일본인이 15,602명이나 되었고, 조선에서 활동한 외국 상사(商事) 총수 258개 중 일본 상사가 210개나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일본은 개항장(開港場)과 개시장(開市場)을 통하여 조선에 대한 무역액 중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1895년에는 72%였던 것이 1900년에는 75.3%로 증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세력은 여전히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독점정책을 강력히 견제하고 있었다.

18991월 노국정부는 외무대신 파브로프를 조선 주재 노국(露國)공사로 임명하여 대조선(對朝鮮) 정책을 적극화하면서 극동정책상의 요지 대련(大連) 여순(旅順)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중계지점인 마산포와 거제도를 노국의 해군 근거지로 착목(着目)하였다.

 

이 같은 정책은 이에 앞서 1899년 초 노국(露國) 해군사관 중 동양 대세에 통효(通曉)하는 자들이 중심이 되어 노국(露國)의 국방상으로 보아 마산포와 거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의서를 노국 정부에 제출한데 힘입은 바 큰 것이다.

 

이때 제정 러시아의 극동 정책은 만주를 중심으로 적극화되어 갔다.

이에 앞서 1896년 모스크바에서의 이홍장(李鴻章로바노프에 의한 소위 쿠시니 조약의 성립으로, 노국에 자국의 철도를 만주 지방을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통하게 하는 권리 및 합이빈(哈爾濱, 하얼빈)으로부터 남하하여 요동반도를 지나 대련에 이르는 지선을 부설하는 권리를 얻었다.

 

그 후 노국은 자국민의 재산 보호라는 명목 하에 드디어 만주에 군대를 파견하는 권리를 얻고 말았다. 노국은 귀중한 광산 채굴권 및 목재 벌채권을 얻는 동시에 수천의 군대를 그 지방에 보내어 그 확보에 노력하였다.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군대는 항상 따르는 법이다.

독일의 교주만조차(膠州灣租借 / 189835)에 자극 받은 노국은 2,3주일 후(327) 여순항의 25개년의 조차권을 획득하였다. 여순항은 실로 열강이 북경의 보전(保全)을 위협하는 것이라 하여 그 환부(還付)를 일본에 충고한 것이었다.

 

노국의 철도부지, () 지방으로의 군대 파송(派送), 여순의 방어설비는 영구적인 점령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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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7) - 강점제2시기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다 - 중앙마산의 형성>

1) 중앙마산이 철도용지로 된 원인

마산포와 신마산의 중앙부가 1920년대까지 도시형태를 띠지 못하게 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일대가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일본의 군용철도용지로 수용당한 뒤 1920년대까지 변하지 않고 그 상태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1904년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서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선전포고를 하여 러일전쟁을 시작합니다.

이 전쟁에 앞서 일본은 마산에 있는 우체국과 전보사 및 율구미에 있던 러시아 해군육상사령부의 시설을 압수했습니다. 그리고 1904년 9월 1일, 군용철도 마산선의 건설공작대가 마산에 입항했습니다.
러일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 조정을 강압하여 의정서를 체결했기 때문입니다.

삼랑진 - 마산 사이의 철도공사는 의정서 제4조의 내용에 준한 사건입니다.

1904년 2월 23일자로 조인된 한일의정서 제4조는

제3국의 침해에 의하여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有할 경우에는 대일본제국정부는 곧 臨機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대한제국정부는 右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십분 편의를 공여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수용할 수 있을 것.

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일의정서 체결 직후 찍은 사진과 한일의정서>


이 한일의정서는 그 조문 모두가 어처구니없는 구절들이지만 특히 이 제4조는 가장 악랄한 내용입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있다, 혹은 없다의 판단이나「臨機 필요한 조치」의 범위,
즉「어느 정도의 행위가 필요한 조처의 범위인가」의 판단,
그리고 수시로 언제나 수용이 가능한「군략상 필요한 지점」의 위치나 범위의 판단도 모두 일본만이 할 수 있는 일방적 규정이었습니다.

또한 이 의정서가 러일전쟁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 협정 어디에서도 시한에 대해서 규정하지 않고 있어서 일본은 이 의정서 조문만으로 한국 도처에 그들의 군사기지를 무제한으로 주둔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이어서 자행된 여러 조치들,
즉 5월 30일과 31일의 「대한방침 및 대한시설강령」, 9월 24일의 「長谷川 훈령」, 6월의 「한국에 있어서의 군사적 경영요령」 등에 의해 몇 해 안 가서 서울 용산에 주둔군사령부와 사단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회령․함흥․원산․강계․평양․춘천․대전․대구와 함께 마산에도 이른바 「긴요한 지점」이란 핑계로 대규모의 군사기지가 설치되었던 겁니다.
이 때 진해는 일본 해군의 군항으로 개발되었죠.

1905년 일본군부가 일본육군 군용지로 강제 수용한 마산의 토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용도 면적(평)  수용액(원)  수용일자 
 병영부지 9,000  2,700  1907. 9. 3 
 수도용지  91,376  2,982 1909. 3. 30 

이 표의 토지는 중앙마산지역의 철도용지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수용 동기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강점의 큰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중앙마산의 철도용지 수용입니다.

철도용지로 수용된 중앙마산지역의 범위는, 북으로 원마산의 경계인 몽고정 부근, 남으로 조계지의 경계인 신월천, 서쪽으로 진주가도, 동으로 해안선까지의 전(全) 지역입니다.

철도용지구역을 찾아내기 위해 정부기록보존소의 문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1920년에 펴낸 축척 1/3,000「마산부 시구개정 일부평면도 (馬山府市區改正一部平面圖)」에 표기되어 있는 철도용지의 경계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경계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사정지적도에 나타나는 지목과 재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1904년에 발간된 '마산포 군용정차장 부지'라는 제목의 도면을 구했습니다. 마산도시재생TB센터 연구진을 통해 얻은 귀중한 자료입니다.
앞의 「마산부 시구개정 일부평면도 (馬山府市區改正一部平面圖)」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음 자료입니다.
아래 것은 현재 지도에 표기한 것입니다.
현재 지도는 해안매립이 많이 진행된 이후라 앞의 것과 많이 다릅니다.<<<



 



2011/10/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0)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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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5 00:00

진해

‘진해’ 지명에 대한 글입니다.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한제국시대에는 ‘통합 이전 창원시(옛 의창군)와 옛 마산시 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일원’을 ‘진해군’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1908년 행정구역변경 때 진해군이 현재의 진해지역이 포함된 웅천군과 함께 창원부로 통합되면서 ‘진해’라는 지명은 사라졌습니다.

2년 뒤인 1910년, 창원부가 마산부로 바뀌면서 이 일대도 마산부에 속했다가 1912년 지금의 진해군항과 배후도시였던 신도시 지역을 ‘마산부 진해면’으로 결정합니다.
4년 동안 이름이 없어졌던 진해는 현재의 위치에서 다시 행정구역명칭으로 되살아난 것입니다.
진동 쪽의 지명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되살아 난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지명으로 역사에 나타난 '진해'는 1914년 3월에 '창원군 진해면'으로 바뀌었고, 1931년 4월 1일 진해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진해가 독립 시로 승격된 것은 해방 10년 후인 1955년 9월 1일이며, 그때부터 진해는 한국 최고의 군항도시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하지만 2010년 7월 1일 마산 창원과 통합되면서 창원시 진해구가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지난 100여 년 간 ‘진해’라는 명칭이 겪은 부침이 참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정구역명칭의 변화와 달리, 일본군부에서는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시기부터 거제군과 웅천군 및 고성군까지를 포함한 넓은 해역 전체를 ‘진해만’이라고 불렀습니다.

빠르게는 1898년 육군대신 가쓰라의 문서와 1903년 해군작전계획서에서도 이 해역을 ‘진해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진해현’ ‘진해군’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명칭이기도 했지만, 이 해역이 러시아 함대를 격멸시킬 수 있는 해군근거지라는 뜻에서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의 ‘진해(鎭海)’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조선시대 사용했던 진동지역의 진해는 우리 선조들이 만든 명칭이었지만, 지금 사용하는 ‘진해’는 일본군부가 지은 것이어서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지명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은 일본인 죽국우강(竹國友康)의 저서 『ある日韓歷史の旅』에서 “일본이 제멋대로 붙인 이름이라, 해방 후에 실은 진해라는 이름은 바꾸어야 되는 것이었으나.......”라며 진해라는 지명 사용에 아쉬움을 나타내었습니다.

유명한 도시사학자 손정목 교수도 황정덕 회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인들이 지은 이름이라 진해라는 지명은 해방 후 바뀌었어야 했다’ 고 합니다.

일견 수긍되는 측면도 있지만, '진해'라는 지명이 지금의 진해와 멀지 않은 진동지역에서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최근에 “진해시민으로 살고 싶다”면서 통합창원시에서 진해가 분리되기를 원하는 주장도 나왔는데, 생명체처럼 변하는 것이 도시니 미래에 진해는 다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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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1 Comment 6
  1. 장복산 2012.01.25 10:3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와 “일본이 제멋대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진해현이 부활된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진해를 창원시에서 분리하자는 이야기는 이름에 기인하기보다는 진정한 지방자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치단위를 작게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규모의 효율성도 중요할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주민들이 참여하고 스스로 자기가 사는 지역을 가꾸어 가는 자치제도의 정착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진해사는 사람도 잘 모르던 진해이야기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 허정도 2012.01.25 11: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반갑습니다.
    설령 일본의 뜻대로 진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도 조선시대부터 사용했던 진동지역의 진해에서 따온 것은 분명합니다.

  3. 노상완 2012.01.25 13:0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진동면사무소 옆에는 조선시대의 진해현청이 아직 남아있는것을 보았습니다.
    바다를 다스린다는 의미의 진해... 욕심낼만한 이름이군요......

    • 허정도 2012.01.25 17:12 신고 address edit & del

      해군기지가 있는 도시 명칭으로는 최고의 이름이 진해입니다. '바다를 진압하다' 대단한 이름 아닙니까?

  4. 실비단안개 2012.01.25 21:4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진해시민 -

    • 허정도 2012.01.25 22:28 신고 address edit & del

      진해시민 '실비단안개'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올 한해 좋은 글 많이 쓰시고 몸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11.12.28 00:00

강탈당한 진해와 두 지도자


지난 11월 23일 올린 글에서처럼,      <2011/11/23 -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100여년 전 진해의 중평벌판 그 평화로웠던 마을에
일본의 군대가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쳤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부랑자 신세가 된 당시 진해사람들의 정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을 것입니다.

이 참담한 상황을 전후해 민족의 최고지도층이 보여준 극단적인 두 사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주민들의 아픔에 동참한 사례로 매천 황현에 대한 이야깁니다.

당시 진해지역에서 일어난 아비규환을 두고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倭人勒奪慶南之鎭海灣………定期軍港………熊川距鎭海數百里而亦捲入港域吏民漁散如逢亂離  ; 웅천에서 수백리의 항역이 군항으로 포함되어 이속도 농민도 고기잡이도 모두 흩어져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웅천에서 수백리’라고 표현한 것은 웅천에서 거제도 끝까지에 이르는 진해만 군항지역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을사조약 1년 후인 1906년에 쓴 글입니다.
이등박문의 강압적인 통감정치가 횡횡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매천의 애국심과 기개가 더욱 잘 드러납니다.



둘째는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일본군부가 진해 11개 마을주민들을 내쫓기 직전의 일로, 왕족이자 내부대신이었던 향운 이지용이 저지른 일입니다.

그는 진해지역 토지강제수용에 대한 안건이 고종황제에게 상주(上奏)되기 이틀 전에 경상남도관찰사서리 진주군수 민병성에게 훈령을 내렸습니다.
 
「진해만을 우리나라 군항으로 예정하는 사항은 이미 정부의 협의를 거쳤으니 조속히 해당지역의 각 군수로 하여금 該 지방민에게 주지케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고종황제가 최종 결정도 하기 전에 훈령을 내린 것은 힘없는 황제를 능멸하고 일본을 향한 자신의 적극적인 충성심을 과시한 사악한 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황제의 재가가 내린 다음날인 8월 22일에는 경상남도관찰사서리에게,
「………본 훈령이 도달되면 조속히 당해 만(灣) 부근 각 군수에게 별칙(別飭)하여 적선 내 토지의 매매·교환·양여·전당·대차를 일절 엄금하라. 만약에 사호(絲毫)라도 소우(疏虞)함이 있을 때는 해당 각 군수는 중경(重警)에 처해질 것이고 귀관 또한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충분한 주의를 가하라」는 훈령을 내렸습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싶었는지, 이틀 후인 8월 24일에는 진해군수·거제군수·웅천군수에게도 같은 취지의 훈령까지 내렸습니다.

일제에 대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충성으로, 일본군부가 추진하는 진해군항 건설에 진력을 다했습니다.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러일전쟁 와중에서 굴욕적으로 체결한 한일의정서를 작성 서명하였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매천 황현은 한일병합 사실을 전해 듣고 1910년 9월 10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로써 망국의 한을 풀었고,
이지용은 훈1등 백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매천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민족의 사표가 되었고,
이지용은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표적인 친일파로 규정하였고 그가 남긴 재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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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들 직업은 ?>

1910년대 초, 마산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직업은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그들의 직업을 보면 그들의 산업도 알 수 있는 것, 오늘은 당시 마산의 일본인들이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미 작년 10월 11일자 제27회 글(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에서 일본인 이주 초기인 1902년 마산의 일본인들 직업을 포스팅 한바 있습니다. 모두 46종류였으며 겸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8년의 세월이 흐른 1910년경에는 양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업종도 169종으로 다양해 졌을 뿐만 아니라 종사자도 1,821명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시작된 이주로 일본인의 숫자도 많아졌지만 식민지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했던 시대상황의 작용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의사․변호사․측량사․치과의사․수의사 등 전문직뿐만 아니라 관리․교원 등의 공직자 그리고 미장과 목수를 비롯한 건설 기술자와 청부업자까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당포․숙박업․목욕업․무역업 등의 서비스업은 물론 소매업․도매업․제조업 그리고 이발사․전화교환수․사진사․표구사(表具師)․대서사(代書士)에다 인부와 작부(酌婦)까지 각양각색의 직업들이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식민지배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직업분포는 이 시기에 마산은 이미 전통도시의 옷을 벗고 근대도시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합니다.
이런 현상은 마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가 된 이 땅 모든 도시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1911년 일본인 평정빈부(平井斌夫)와 구관정이(九貫政二)가 쓰고 마산에 있던 빈전(濱田)신문점이 발행한 『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에 보면 당시 마산의 일본인들 직업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아래 글입니다.
읽어봐도 무슨 직업인지 모르는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옛글이기 때문에 일본어를 꽤 많이 아는 분들도 해득하지 못한 직업도 많습니다.

관리(官吏) 69명 / 공리(公吏) 10명 / 은행 및 회사원 22명 / 교원 12명 / 의사 8명 / 변호사 1명 / 주류상 6명 / 청물상 4명 / 식염상 1명 / 연초상 2명 / 채자(菜子)상 16명 / 금전대부업 23명 / 금물(金物)상 4명 / 활우(活牛)상 1명 / 약제사 4명 / 수의사 1명 / 치과의사 1명 / 산파 7명 / 무역상 5명 / 청물(靑物)상 1명 / 약종상 6명 / 건구상 2명 / 가구상 1명 / 오복태물(吳服太物)상 5명 / 이물(履物)상 5명 / 고물상 15명 / 초자물(硝子物)상 2명 / 곡물상 33명 / 장유(醬油)상 3명 / 재목상 9명 / 어류상 17명 / 잡화상 56명 / 신탄(薪炭)상 4명 / 회엽서(繪葉書)상 3명 / 육군용달 1명 / 화(糀)상 1명 / 사탕(砂糖)상 3명 / 관힐(罐詰)상 1명 / 미숀기계상 1명 / 서적상 2명 / 우육상 4명 / 도기상 6명 / 건물(乾物)상 3명 / 우유상 1명 / 반물행(反物行)상 1명 / 지류(紙類)상 2명 / 석유상 1명 / 여인숙 및 하숙 16명 / 질(質)상 9명 / 미증화상 / 총포화약상 2명 / 선구상 1명 / 어구상 2명 / 채자(菜子)소매 53명 / 소간물(小間物)상 2명 / 시계상 5명 / 사립물(仕立物)상 5명 / 주류소매 4명 / 계육(鷄肉)행상 1명 / 잡화소매 30명 / 야채소매 24명 / 두부소매 10명 / 램프행상 1명 / 온돈(饂飩)소매 1명 / 어류행상 13명 / 우육소매 1명 / 석유행상 1명 / 매약(賣藥)상 1명 / 화본(貨本)상 2명 / 식목(植木)상 1명 / 우피(牛皮)상 1명 / 잡화행상 2명 / 포모(蒲鉾)상 3명 / 과물(果物)상 4명 / 피복인구입업(被服人口入業) 1명 / 하수문(荷受問)업 4명 / 운송업 8명 / 철공업 1명 / 토목건축청부업 29명 / 좌관(左官)청부업 1명 / 주류양조업 9명 / 장유(醬油)양조업 5명 / 탁주양조업 2명 / 와(瓦)제조업 1명 / 연초(煙草)제조업 5명 / 차(車)제조업 1명 / 粉접구(粉摺臼)제조업 2명 / 빵제조업 1명 / 조선업 2명 / 단야옥(鍛冶屋)업 4명 / 페인트업 3명 / 염물(染物)업 2명 / 세탁업 4명 / 활판인쇄(活版印刷)업 3명 / 양복사립(洋服仕立)업 4명 / 지물(指物)업 7명 / 화공(靴工)업 1명 / 석판인쇄(石版印刷)업 1명 / 세장(洗張)업 3명 / 석감(石鹼)제조업 2명 / 통준(桶樽)공업 5명 / 관힐(罐詰)업 2명 / 첩(疊)공업 4명 / 승(繩)제조업 6명 / 제등장(提燈張)업 2명 / 철력세공(鐵力細工)업 3명 / 삼미선(三味線)장업 2명 / 사진사 5명 / 표구사 3명 / 탕옥(湯屋)업 8명 / 이발업 14명 / 여발결(女髮結) 14명 / 필(筆)제조업 1명 / 인각사(印刻師) 6명 / 철력(鐵力)직 2명 / 좌관(左官)직 14명 / 단야(鍛冶)직 4명 / 목만(木挽)직 54명 / 화직(靴職) 2명 / 대공(大工)직 103명 / 선대공(船大工)직 7명 / 석공직 65명 / 주괘(鑄掛)직 1명 / 관아용인(官衙傭人) 2명 / 통신(通信)인부 6명 / 우편집배인 6명 / 통공(桶工)직 3명 / 연와(煉瓦)직 1명 / 첩(疊)직 6명 / 활판(活版)직 3명 / 사립(仕立)직 5명 / 죽세공(竹細工)직 2명 / 요리옥(料理屋) 11명 / 음식점업 21명 / 과자(菓子)직 13명 / 입치(入齒)직 1명 / 선원 5명 / 어부 41명 / 주부(舟夫) 11명 / 상가고인복비(商家雇人僕碑) 279명 / 소송대리인 3명 / 유기장(遊技場)업 6명 / 어업 2명 / 농업 15명 / 도수(屠獸)업 1명 / 승려 5명 / 간호부 8명 / 전화교환수 10명 / 관아고인(官衙雇人) 21명 / 신문통신원 4명 / 측량사 1명 / 예기(藝妓) 61명 / 중거(仲居) 20명 / 일고가(日雇稼) 18명 / 생화사장(生花師匠) 1명 / 안마침구술 3명 / 체송(遞送)인 2명 / 대서업 5명 / 토공 20명 / 우차만(牛車挽) 27명 / 인력차부(人力車夫) 40명 / 마차만(馬車挽) 7명 / 요리직 13명 / 중사(仲仕) 32명 / 유예순장(遊藝順匠) 5명 / 작부(酌婦) 21명 / 매복자(賣卜者) 1명 / 잡업 35명 / 대변(代辨)업 2명

어떻습니까? 참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지 않아습니까?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마산의 일본인들,,,,
이 사람들이 활보했던 1910년대 후반의 신마산 쿄마치 입구(지금의 두월동 통술거리) 사진입니다.
거리 풍경으로 보아 무슨 축하행사기간으로 보입니다.

다음 사진은 이 거리의 현재 사진입니다.
오른쪽 건물이 옛 모습과 똑 같아 보입니다만 자세히 보면 조금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일제시기부터 있었던 위 건물이 워낙 멋있다 싶어서 건물주가 옛 건물을 본 떠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 확인해 보겠습니다.

 


다음 사진은 같은 시기의 창원천(옛 마산시장 관사 앞 하천) 부근과 현재 모습입니다.
비슷하긴 합니다만 위치가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일제기에는 이 다리를 무학교라 불렀습니다만 지금은 다리에 이름이 새겨져 있지는 않습니다.
옛 사진은 4월에 찍은 야경 같습니다.
활짝 핀 벚꽃과 거리를 밝힌 가로등(가스등)이 눈부십니다. 화려했던 거리로 보입니다.

 
위 두 사진을 찍은 위치입니다. 노란색이 위 사진, 푸른색은 아래 사진입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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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1.06.20 09: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두월동 입구의 쭈구미집 건물이 꽤나 오래된 것이군요.
    지나갈 때마다 그 연혁이 궁금했는데, 고맙습니다.

    • 허정도 2011.06.20 17:23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

  2. 장복산 2011.06.20 10: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박사님ᆞ진해국밥이 맛이있던가요? 너무메몰차게 거절을 해서 서운했습니댜 ㅎㅎㅎ

    • 허정도 2011.06.20 17:22 신고 address edit & del

      폐가 될 것 같아 그랬습니다. 미안합니다. ^ ^

  3. 신월동 2011.12.02 13:3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쭈구미 간판 그자리는 옜날 아시아 다방 자리네요.

    • 허정도 2011.12.02 22:21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런가요?

2011.02.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 앞에서 포스팅한 '계획만으로 끝난 다섯 번의 매립시도' 와 달리 지금부터는 실제로 시행된 매립공사를 소개합니다 -


<마산만 최초의 매립 - 1905년 철도공사 때 마산역 일대 매립>


지금도 마산만의 매립 때문에 지역사회가 갈등하고 있습니다.
마산해양신도시 건설용 34만 평 매립 계획의 원안추진과 백지화를 두고 시민들의 찬반이 팽팽하고, 매립으로 조성된 가포신항부지의 용도변경문제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100년 넘게 지속된 마산만 매립, 그 최초의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불행하게도 마산만은 첫 매립부터 마산포 주민들의 의사와 아무 상관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마산만 첫 매립은 한반도 지배를 꿈꾸며 승승장구하던 일제의 군부가 저질렀습니다.
1904년-1905년 마산과 삼랑진을 잇는 철도 마산선의 출발점인 마산역 부지를 조성하기 위한 매립이었습니다.

원래 이 철도는 한국인이 설립한 영남지선철도회사의 사업이었지만 러일전쟁 때 강제로 맺은 의정서에 준해 약탈해간 사업입니다.
명분이 군용철도였기 때문에 아마 우리 정부도 이 매립의 허가과정이나 공사에 관여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1904년 체결한 한일의정서 제4조의 규정을 이유로 일제는 마산조계지 북쪽 끝에서 원마산(마산포) 쪽으로 약 12만 평의 한국인 토지를 무상으로 일본철도감부의 군용철도 용지로 점유했습니다.

이때 일본 철도건설대는 마산역에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현 마산중부경찰서 앞의 벽산아파트(전 월포 삼익아파트) 인근해안을 매립하였습니다.

부근의 야산을 허물어 매립했다고 전해지고 있을뿐 매립의 규모나 방법 등 상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군용지 매립이어서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매립이 마산만 최초의 매립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매립전후시기의 지도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립 규모는 대략 3만6천여 평 정도로 추정합니다.

아래 그림은 이 매립공사가 완공된 10여년 후인 1916년에 일본육지측량부가 간행한 지도입니다. 이 지도에서 매립부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산역 건설을 위해
‘철로아래 직선해안 부분’을 매립한 것입니다. 해안선의 직선만 보아도 이 지역이 인공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파란 선이 원래의 해안선입니다.

  

매립 전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자료는 오른쪽 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1899년에 일본해군에서 제작한 마산포지도입니다.

위 그림의 자연해안선은 이 지도의 해안선을 옮긴 것입니다.

두 지도를 비교하면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앞 지도에서는 장군천이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뒷 지도에서는 장군천(파란색)이 마산만가까이에서 왼쪽으로 휘어져있습니다.
두 지도의 차이를 통해 마산역 일대를 매립하면서 장군천이 지금처럼 직강하천으로 변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위 그림을 현재 도시의 위성사진에 옮겨보았습니다.
그림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만
두 그림에 그려진 노란 선(현재 사용되는 간선도로)을 비교하면 위치를 가늠해보기가 쉽습니다.
매립경계선 바깥에 있는 부지(쌍용양회, 마산지방해양항만청,마산여객터미널)는 마산역 매립 후 한참 뒤에 매립된 부분입니다.


한반도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러일전쟁(1904년-1905년) 때 있었던 마산만 최초의 매립,,,
도시의 공공적 이익은 물론, 제대로 된 주민 의사가 한 번도 반영된 적이 없는 마산만 매립의 나쁜 전통이 첫 매립부터 시작되었던 겁니다.

지금은 도시 한 복판이 되었습니다만,
100여년 전, 이곳에 철도를 건설하며 바다를 매립했던 그 시절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2011/01/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2011/01/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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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계획으로 끝난 수산시장과 군용지 매립구상>


1) 신마산 수산시장 매립계획

1905년 7월 29일 창원감리 현학표는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매립신청을 했습니다.
위치는 마산포의 각국공동조계지 밖 남쪽 해안이었고, 그 절차로 신동공사에 청원을 심의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창원감리 보고 제50호’로 제출되었으며 도면까지 첨부되었습니다. 아래 그림이 당시에 첨부되었던 도면입니다.

위 도면의 좌하부 삼각형 부분이 매립신청지인데 '수산회사축정지, 5천㎡정계(定界)'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그림의 삼각형 매립계획지를 현재 위성지도에 표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연두색 삼각형이 수산시장 매립계획지, 노란색은 각국공동조계지, 파란색은 당시의 간조시 해안선입니다)



이 매립은 일본인 10여 명이 수산회사를 설립하여 신마산에 수산시장을 건립하겠다는 목적이었으며 위치는 조계지 최남단이었고 규모는 5,000㎡(1,500평)이었습니다.

관련 기록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매립허가와 시행 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1905년 이후 제작된 문헌자료와 지도 등 아무 곳에도 이곳에 매립된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이 구상은 계획만으로 끝났을 뿐 시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철도용지 앞 매립계획

1906년(광무10년) 5월 7일 창원감리가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보낸 ‘창원감리 보고 제14호’에 일본군부의 매축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매립계획은 바로 그
일본군부의 매립계획을 말하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매립계획이었습니다.
다음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현재의 경남대학교 정문 쯤에서 시작하여 마산역과 장군천을 지나 마산포 어시장까지의 규모입니다.
(파란색은 간조시 해안선, 주황색이 매립계획부분)


이 보고서의 내용에는「일본군부가 철도용지 앞 해안을 매축할 계획을 세우고 각국공동조계지에서 구마산포에 이르는 해안 약 10리를 군항지로 매축코자 하오나 이미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지금에 와서 온당치 못한 일」이라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전쟁은 1년 전에 끝난 러일전쟁을 두고한 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5월 16일 지령 20호로 창원감리에게「이미 평화가 찾아온 마당에 군용지도 물러나 주어야 할 것이니 매축공사는 교섭하여 정지(停止)하게 하라」라는 내용의 매축계획중지를 지시하는 훈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앞의 매립계획과 마찬가지로 이 매립에 관한 기록도 여기서 끝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진척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도 1906년 이후 제작된 지도 및 각종 자료에 이런 식의 매립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을사조약으로 한반도를 손에 쥔 일본의 야욕이 마산포에 드러났던 두 번의 매립계획은 이렇게 계획으로만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계획만으로 끝난 그들의 마산포 매립시도는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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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마산에 들어온 일본군대>

일본 신사(神社)가 우리 민족을 정신적으로 위압했다면, 물리력으로 우리를 억누른 것은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었습니다.

일본군대의 마산진출은 1905년 마산선 철도가 건설될 때 쯤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1909년 7월 일본육군의 중포병대대(重砲兵大隊)가 진해에서 마산 월영동(현 월영동아파트단지)로 이전한 것과 같은 해 12월 대구헌병분유소(大邱憲兵分遺所)을 신마산에 설립한 일입니다.
이 글은 월영동에 주둔했던 「육군중포병대대」에 대한 내용입니다.

러시아와의 각축기에 일제는 율구미와 자복포 일대(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 및 구 한국철강 부근 일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로 확정했다가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이 체결될 즈음 이 지역은 군용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1908년부터 본격적인 병영 건설에 착수하여 1909년 7월 완공, ‘진해만 요새사령부’와 ‘진해만 중포병대대’가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후 1913년 '진해만 요새사령부'는 진해 좌천리로 이전해 가고 중포병대대는 해방 때까지 이곳에 주둔합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의 중포병대대 전경입니다.
첫째 사진은 앞면, 둘째는 뒷면, 셋째는 정문입니다.

두번 째 사진의 산은 지금의 해운동 주공아파트단지이고 산 왼쪽에 일렬로 선 건물은 군용관사인데 관사 앞 길이 지금의 월영동 아파트단지 입구 도로입니다.

 




저 사진 속에 보이는 벚나무들이 잘 자라 현재의 월영아파트단지를 조성할 무렵에는 둥치가 아름드리였고 꽃도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남아 있었다면 장관일텐데,,,,
기계톱에 잘려나간 고목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현재 사진입니다.
뒤에서 찍었습니다.



다음 그림은 중포병대대가 들어오기전인 1899년의 이 지역 지도와 들어온 후인 1910년대에 제작된 1/20,000 지도를 비교입니다.
구 한국철강 부지의 일부가 그 당시 이미 일부 매립되어 군용지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16에 일본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1/10,000 지도에 표시된 같은 위치의 지도와 현재의 위성사진입니다.
붉은 점이 동일한 위치인데 자세히 보면 당시의 해안선 따라 도로가 나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군대 주둔은 식민지 무단통치수단이었던 터라 월영동에 똬리를 튼 중포병대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19년 3월 독립운동 때 이 부대는 마산인근의 만세시위현장 곳곳에 투입해 시위 군중을 진압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3월 19일 함안군 함안읍 장날 의거,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 의거, 3월 28일 마산의 진동 고현시장 의거 등입니다.

마산중포병대대병들의 훈련 장면입니다.


 

해방 후에도 이곳은 군사용지로 이용되었습니다.
해방 2개월 후인 1945년 10월 8일, 미 40사단 산하 2개 대대병력이 이곳에 들어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정 말기인 1948년 5월 20일 조선경비대 제15연대가 이곳에서 창설되었고 5월 30일에는 제1차 모병이 여기서 있었습니다.

당시 모병을 위한 마산지역의 실력자 간담회가 열렸는데, 장소는 일본인이 운영했던 요정 ‘망월루’였고 15연대장, 미군사고문, 경찰서장, 부윤(지금의 시장)대리, 마산지역의 각 청년단장 등이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15연대의 주요임무 중 하나가 ‘폭동진압’이었습니다.
1948년 10월에 발발한 여순사건 진압에 출동하여 열다섯 명이 전사했으며 1949년 4월 거제민중봉기에도 투입되었습니다.

일본군과 미군을 거친 이곳은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국군의 의무부대로 변신합니다.
그 시작은 1950년 12월 수도육군병원이 서울에서 옮겨오면서 부터였지만 본격적인 변신은1952년 9월 27일 부산 동래에서 육군군의학교가 이곳에 옮겨오면서 부터였습니다.

육군군의학교는 11월에 완월초등학교, 다음 해인 1953년 5월에 마산중학교를 인수하여 3천명 규모의 본격적인 의무교육을 시작하여 1963년까지 11년간 총 84,969명의 의무관련 교육수료자(군의관, 간호장교, 위생병)를 배출하였습니다.
육군병원과 공군병원 마산분원 등 많은 군 관련 병원들도 이곳을 거쳐 갔습니다.

지금은 조용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수도육군병원(1950년, 1952년부터 1963년까지는 육군군의학교도 함께 운영)→36육군병원(1953년, 1954년 육군의무기지사령부가 이곳에서 창설되어 9년간 활동)→26육군병원(1968년)→국군마산통합병원(1971년)→국군마산병원(1984년)을 거쳐 1993년 진전면 임곡리로 이 병원이 이전되기까지 이 터는 우리나라 국군의무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아파트 단지 한쪽에 국군의무병과요람지지(國軍醫務兵科搖籃之址)라고 새겨진 국군의무사 기념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수치스러워 그랬는지 식민지 시대의 역사는 적어 놓지 않았습니다.

기념하는 글 마지막 부분에는
“지금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옛 병영물은 보이지 않지만 국군의무부대의 역사가 서려있는 이곳이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오래토록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100년 전 일본군 중포병대대로 시작된 월영동 아파트단지 터,,,,
해방 후에는 미군이 점령했고 정부수립 뒤에는 국군병원을 거쳐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했습니다.

기구했던 자신의 궤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중포병대대가 판 연못과 그들이 심은 듯한 고목 몇 그루, 그리고 이 땅이 군용지였음을 보여주는 표지석만 남아 저 터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표지석 손의 주인은 경남대 유장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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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팬저 2010.12.21 22:5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보았습니다. 마산중포병대대병들의 훈련 장면에 나오는 포의 경우 280미리 유탄포로 러일전쟁 당시 뤼순항 전투에서 유력을 발휘하여 일본이 승리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포입니다. 280미리 유탄포는 1884년 이탈리아 군사고문의 의견을 듣고 개발을 시작하여 1887년에 제식화가 된 화포라고 하는데 주로 해안포로 사용되었는데 1940년 이후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1920년대가 접어들면서 280미리 유탄포의 경우 구식이라 천대를 받게 됩니다.

    이 유탄포의 경우 진해로 들어오는 길목인 가덕도 외양포에도 설치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놈을 마산에도 설치했다고 하니 놀라운데요. 외해가 아닌 내해에 설치를 했다고 하니까요?

    러일전쟁 직후 유탄포를 설치했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1904년 이후 마산에 부대가 설치된 후 사진을 찍었다고 보았을때 1910~12년 사이로 보입니다.

  2. 팬저 2010.12.21 22: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모형으로는 보았는데 중포병대의 모습의 사진은 처음봅니다. 마산중포병대대의 포기지의 경우 사방으로 높게 쌓은 흙이 보이는데 저런 방식의 경우 가덕도 외양포에도 있더군요. 방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입니다.

    외양포뿐만 아니라 부산에도 포부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똑 같은 280미리 유탄포이고 조선뿐 아니라 일본 전역에도 이런식으로 포부대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훗가이도 하코다테에도 280미리 유탄포를 설치하였는데 포기지가 외양포와 같네요.

    일본이 요새를 건설한 것을 보면 1차대전후 도쿄만, 대마도, 이키, 진해만이고
    2차대전시 도쿄만, 시모노세키, 유라, 마이즈루, 츠가루, 사세보, 나가사키, 진해만, 대마도, 이키, 풍예, 뤼순, 대련, 료고 만, 나진, 모토타카, 법호도, 고웅, 아미미오시마, 치치지마 인데 1, 2차 대전 모두 진해만이 포함됩니다. 얼마나 일본이 진해만을 공들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 허정도 2010.12.22 00:22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저는 군사문제에 대해 문외한이라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팬저님의 박식함에 대해서는 혀가 내둘러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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