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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by 허정도 2010. 10. 18.


<105년 전, 마산에 철도가 놓이다>


마산에 최초로 일본군대가 들어온 것은 이 도시에 철도가 놓일 때였습니다.
러일전쟁에 앞서 일본은 마산에 있는 우체국과 전보사 및 율구미에 있던 러시아 해군육상사령부의 시설을 압수했고, 한일의정서 체결(1904. 2. 23) 후부터는 마산항에 일본군과 군수물자를 실은 군함이 무시로 드나들었습니다.
1904년 9월 1일에는 군용철도 마산선을 놓기 위해 일본군 건설공작대가 마산만을 통해 입항했습니다.


마산에 들어온 일본군은 철도용지 명목으로 마산포 주민들의 토지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압수하는 폭거를 저질렀습다. 마산 뿐아니라 전국적인 일이었습니다.

경계 측량을 할 때 경계를 속인다든지, 원래 정해진 경계보다 턱없이 많게 토지를 점령한다든지, 군용지라고 속여 민간의 토지를 침범한다든지, 일본군의 군용도로를 만든다면서 민가를 헐어버린다든지, 개인 사유지를 일본정부에서 내려준 것이라면서 팻말을 박아 자기 땅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하는 등 일본인들의 횡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강제로 논밭을 박탈한 일제는 그 보상은 외면한 채 오히려 '철도규칙'을 만들어 한국인과 한국의 관리들을 악랄하게 압박했습니다. 그 내용은

㉮ 철도 위를 보행하는 자 및 전선을 손대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하여 엄벌에 처하고 ㉯ 군용철도와 전선을 파괴하는 자 또는 그 모의를 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며
㉰ 범행자가 속한 군수와 촌리도 엄벌에 처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이 '철도규칙'에 저항한 조선사람들을 일본군인들이 학살하는 장면입니다. 1906년에 촬영한 자료입니다.



마산선 철도는 1904년 1월에 '한국인이 설립한 영남지선철도회사'
가 착공한 마산과 삼랑진간의 철도였습니다다.

영남지선철도회사는 한국정부의 외부참사를 지낸 바 있는 부산 태생의 박기종이 황족인 완순군 이재완(李載完)을 앞세워서 1902년 6월 한국정부 농상공부 대신으로부터 마산포와 삼랑진간의 철도부설을 조건으로 설립한 회사였습니다. 사장은 완순군 이재완이었습니다

회사를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 후 맺은 의정서를 핑계로 사업권을 강제로 접수한 다음, 자국의 인력을 동원해 1905년 5월 25일에 개통시킨 것입니다. 경부선과 같은 해였고 경의선과 경인선보다는 1년 빨랐습니다.

처음에는 군사용이었으나 개통한 몇달 후인 11월 1일부터는 민간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현재 마산도시의 간선도로로 이용되는 육호광장에서 경남은행 본점 앞을 지나는 중앙로가 마산선 철도였습니다.

철도 마산선의 종착역이기도한 마산역은 일본인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조계지에서 가까운 곳, 지금의 마산중부 경찰서 건너편 벽산 블루밍아파트 단지 일대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의 마산역사와 위치입니다.




일제는 한반도 식민정책에서 철도노선과 역사(驛舍) 위치결정 등 초기의 시가지 계획을 통해 큰 이권을 챙겼습니다.
신축하는 역사(驛舍)를 구 상권과 다소 떨어진 곳에 짓고, 역사 가까운 곳에 신시가지를 조성하여 그들 손에 넣었습니다.
서울의 종로상가와 동대문 상가를 겨냥하여 서울역 주변과 충무로를 개발한 것이 그 사례입니다.
마산의 경우도 지리적으로 볼 때 이런 맥락에서 마산 역 위치선정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산역의 준공과 때를 같이하여 역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조계지와 원마산(마산포) 일대까지 대대적인 건축공사가 일어나 여관에 빈 방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근대양식의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일본 건설기술자와 노무자들 때문이었습니다. 협소한 방에서 일본인 노무자가 4-5명씩 합숙하면서 지내기도 했다합니다.

철도건설의 특수를 타고 1905년을 전후해 일본에서 매춘부까지 이 도시에 들어왔다고 하니, 단기간이었지만 철도건설 때문에 이 도시가 북적였던 것 같습니다.

마산선 철도 개통은 이 도시를 해로(海路)와 육로를 통해 일본과 한반도 내륙을 연결시키는 결절점으로 부상시켰고 마산의 도시화를 촉진시켰습니다.
일본과는 배로, 서울까지는
당시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던 기차로 연결되었던 도시는 마산과 부산 인천 뿐이었습니다.

철도 개통 직후에는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신마산에만 역이 있었지만 5년 후인 1910년 7월 5일 원마산(마산포)에도 역을 개설하였습니다. 구마산역이라 이름짓고 한국사람들이 주로 이용했습니다.
현재 교보빌딩 앞 육호광장이 구마산역 터였는데 67년 간 이용되다가 1977년 12월 26일 마산의 세 역(마산역, 구마산역, 북마산역)이 현재 사용하는 석전동의 마산역으로 통합되면서 폐쇄되었습니다.
긴 세월 동안 마산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인데 아무 흔적도 남겨놓지 않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마산선의 철도건설공사는 전(全) 5공구로 나누어 일본인들에 의해 시행되었으며, 철도건설에 대한 아무런 경험도 없던 한국인들은 단순노무자로만 참여하였습니다.

일본의 ‘사단법인토목공업협회’가 펴낸 『일본토목건설업사』에는 마산선 철도공사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904년 8월 철도감부는 마산포를 기점으로 낙동강 우안(右岸)에 군용철도부설의 명을 받아 전선(全線)을 5공구로 나누고 가장 북쪽의 1공구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은 곧바로 노선기반공사에 들어갔다. 청부자는 좌등조구랑(佐藤助九郞). 태창토목조(大倉土木組), 지기신태랑(志岐信太郞) 등이다」

이 책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시공한 한국의 철도공사와 관련한 대담이 실려 있습니다. 당시 최고 최대의 건설공사였던 철도공사에 한국사람들이 참여한 수준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平井 ; (철도공사에서)조선인 청부업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江崎 ;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인은 자금이 없었습니다. 
         어떤 일이 나오면 일본의 대형 건설업자가 나왔습니다.
平井 ; 실제로는 하청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江崎 ; 하청의 하청 정도였지요.
飯吉 ; 노무자로 참여한 정도이지요. 
         자본력이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지요.

…………………
논과 밭이 헐린 곳에 두 갈레 쇠길이 생기고, 그 쇠길 위로 뱀처럼 긴 시커먼 쇳덩어리가 화통을 울리며 달려들었을 때, 이를 처음 본 마산포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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