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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by 허정도 2010. 11. 1.

<개항직후 마산의 산업>


개항 후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마산에도 근대산업의 문이 열렸습니다.
무역이 본격화되었고, 금융업과 건설업이 선을 보였습니다. 마산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던 장유업도 이 때 시작되었습니다.

○ 항만

『110년 전인 1900년, 마산항의 무역량은 수입 154,765엔, 수출 87,024엔으로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두 배 가량 많았다.
쌀․콩․동광(銅鑛)․사금(砂金)․소가죽․소금 등을 수출하였고 방적사(紡績絲)․옥양목․석유․솜․명태․누룩․성냥․철제품 등 생활용품이 마산항을 통해 들어왔다. 그 중 일부 수입품은 칠원․진주 이북 지방뿐만 아니라 전라도 상인들까지 마산포에 와서 일본에서 수입한 소비품들을 사갔다』

이 글은 1902년 일본인 향월원태랑(香月源太郞)이 1발간한 『한국안내』에 실린 기록입니다. 『한국안내』는 일본인에 의해 기록된 마산관련 최초의 문헌으로, 마산포에 대해서는 열다섯 쪽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의 소비제품들은 마산포를 통해 한반도 내륙 깊숙이 공급되어 1908년경에는 전라도는 물론 멀리 충청도까지 판로가 아주 넓었습니다.

1910년에 들어서도 마산항은 수출액이 158,834,000엔인데 비해 수입액이 566,869,000엔으로 수입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항구였습니다.

이 시기의 수출은 주로 웅천․칠원․진해․영산․함안․창원․의령․김해․덕산․거제․사천 등지에서 생산되는 곡류를 일본의 大阪과 兵庫․중국의 대련․국내의 부산과 염포(울산에 있었던 포구) 등지로 내 보냈습니다.

이 때도 수입품은 대부분 생활에 필요한 소모품이었는데 수입품 중 1/3이 동경, 2/3가 오사카 제품이었으며 그것도 효능 위주의 필수품이 아닌 양산․모자․가방․넥타이와 면포․면사․솥․성냥 등 사치성 고급소모품과 고급 생활필수품 등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마산항은 이 땅에서 생산되는 곡류를 일본으로 내보내고 일본에서 생산된 소비품을 수입하는 항구였던 겁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 수출입 창구였던 마산세관 뱃머리입니다. 1910년 사진입니다.



○ 금융업

러일전쟁
승전 후 한국에서 유리한 지위에 선 일본은 종전 이후 경술국치에 이르는 시기까지 식민지 통치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의 화폐개혁․금융제도, 재정정리, 교통운수 등을 정비하였습니다.

이런 정책 기조 속에서 마산에서도 일본인들에 의한 금융업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878년 일본제일은행 부산지점이 한국 땅에 들어 온 외국 금융업의 최초였습니다만 마산에는 그로부터 27년 후인 1905년 12월 25일 제일은행 마산출장소가 개설되었습니다.
마산포에 있던 제일은행 마산출장소는 1907년 현 월남동 성당 자리로 신축하여 이전하였습니다.
다음 사진이 1907년 신축 이전 기념사진입니다.


이 건물은 1960년대 중반에 현재의 성당이 거립되면서 철거되었지만 사진 속에 서있는 일본인들이 밟고 섰던 현관입구의 계단석은 성당 마당 한쪽에 보존되어 흘러간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 현 성당 건립 때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께서 선물한 종을 안치하기 위한 기념물을 만들면서 그 계단석을 땅에 묻어버렸다고합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랫동안 보존해왔던 의미있는 계단석인데 참 안타깝습니다.
아래 사진이 성당 마당 한 켠에 있는 기념물입니다. 이 탑 아래에 계단석이 묻혀있다고 합니다.



다음 사진은 성당 마당 한가운데 서있는 나무 밑 보호석입니다. 원래 은행건물의 화단석으로 유일한 흔적입니다.



제일은행 마산출장소 외에 진주농공은행 마산출장소, 마산금융주식회사, 창원지방금융조합이 이 시기에 문을 열었습니다.
사채업자도 약 20명 있었으며 전당포 10여개소가 영업을 시작하였고 보험업도 번성하여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개설한 보험회사가 11개소나 되었습니다.

모든 금융기관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창설 운영되었으며 금융조합은 한국인이 조합장을 맡았으나 중요 업무는 역시 일본인이 맡았습니다.
사채업자와 전당업자도 전부 일본인이었으며 영업이 잘되었다고 합니다.
이율이 월 2.3%에서 7%의 고리였는데 주로 한국인들이 빌려 썼습니다.

○ 양조업 및 기타

일제시대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마산의 대표적 산업인 양조업은 1904년 1월 일본인 동충용(東忠勇)에 의해 세워진 아즈마(東)양조장이 효시였습니다.
무학소주와 몽고간장으로 그 맥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마산의 양조업이 드디어 마산에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사진은 1905
년 창업한 석교(石橋)주조장입니다. 사진의 공장건물은 1914년에 지었으며 서성동에 있었습니다
.

 
일본인들의 이주와 정착으로 신마산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건설관련업체들이 속속 자리 잡기 시작해 1910년경에는 17명의 토목건축청부업자가 있었습니다.
전문건설업체도 많아 1909년에는 미장업 35명, 목공업 40명의 회원들이 조합을 구성할 정도로 건설관련 종사자가 많았습니다.
이 시기 거류지에는 주택임대업을 위한 임대주택 건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확대되어 가는 마산의 산업 및 상권을 주도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상품판매를 기업화시키는 일환으로 마산청과물시장과 같은 대규모 채소매장을 1910년 9월에 열었습니다.

당시 마산에는 10개의 목재상과 13개의 석유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재상들은 모두 신마산에 자리잡은 데 반해 13개 석유상들 중 11개가 원마산(마산포)에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해안에 정박하는 선박의 양과 생활필수품의 판매량이 신마산에 비해 월등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상업에 비해 공업부분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는데 1911년까지 정미소 6개와 소규모 비누공장과 철물공장이 각 1개씩 있었습니다.

이 외에 근대적인 주식회사 형식으로 1905년 마산수산주식회사가 창포동 3가에 설립되어 일본인들을 상대로 활어 위판업을 시작했으며 1906년에는 사(私)금융업체인 마산금융주식회사가, 1908년에는 마산곡물주식회사가 설립되기도 했습니다.

개항 후부터 경술국치 이전까지 일본인들이 마산에 세운 공장들입니다.<<<

업종

상호

대표자

소재지

설립일

자본(원)

 청주양조업

東양조장

 東忠勇

 

 1904. 1

 

石橋주조장

 石橋市太郞

서성동

 1905. 10

 12,000

五反田주조장

 五反田富次郞

장군동

 1906. 10

10,000

水式주조장

 水式富次郞

청계동

 1906. 11

 10,000

西田주조장

 西田嘉惣市

홍문동

 1907. 11

 20,000

岡田주조장

  岡田玉吉

상남동

 1908. 9

  12,000

千鳥園주조장

 遠藤豊吉

장군동

 1909. 10

 15,000

 장유양조업

赤門장유양조장

 管式夫

신창동

 1906. 11

 10,000

 정미업

夏目정미소

 夏目哲三

남성동

 1907. 5

 10,000

松原정미소

 松原甲藏

남성동

 1910. 8

 20,000

 기타

上野제면소

 上野玄一

추산동

 1910. 7

  5,000

마산철공소

 松本多藏

월포동

 1907. 3

 10,000

瀨川하차공장

 瀨川渚之助

상남동

 1908. 4

   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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