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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by 허정도 2010. 6. 14.

<창원 탄생-합포성-임진왜란>

창원(昌原)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조 3대 태종 8년(1408년)에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을 합쳐 창원(昌原)부로 승격되면서 그 이름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2008년에 창원시가 펼친 ‘창원탄생 600년’ 기념행사는 바로 이 사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의창(義昌)의 ‘昌’자(字)와 회원(會原)의 ‘原’자(字)를 합쳐 만든 이름입니다.


7년이 지난 1415년(태종15년)에는 부(府)였던 창원이 도호부(都護府)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성(府城)은 별도로 없었습니다. 현재 마산 합성동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합포성'의 병마도절제사가 창원도호부까지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합포성'은 고려 우왕 4년(1378년)에 부원수 배극렴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축성한 병영입니다.
올해 초 경남대학교박물관에서 『합포성지 정밀지표조사보고서』를 발간하여 당시 합포성을 도면으로나마 복원하였습니다.
연구책임을 맡았던 이상길 교수는 "역사적 가치로 보아 소중히 보존해야할 유적인데 시민들로 부터 외면 당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소회를 밝히더군요.

아래 사진은 1930년대 일본인이 촬영한 당시의 합포성 사진이며 그 다음 것들은 각 시기별로 촬영된 합포성의 항공사진입니다.
1947년도 사진은 미군이 촬영한 것인데 흐릿하게 보이는 사각형 윤곽이 성지(城址)입니다. 1967년 이후의 사진은 국토지리정보원 보관자료이며 이상길 교수의 도움으로 올렸습니다.

                                       <1930년대 합포성 모습>

                                          <1947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67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75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82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2008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합포성은 방어상 목적 때문에 해안에 바로 접하지 않고 내륙에 입지하였으며 내성과 외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지명인 '합성동'은 내성 외성을 합했다고 해서 '합성'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합포성'을 줄여 '합성'이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성의 구조에 대해서『동국여지승람』창원도호부 관방조에는
「右道兵馬節度使營 在古合浦縣距府十三里 石城周四千二百九十一尺 高十五尺 內有五井 裵克廉築」이라고 하여,
우도병마절도사영은 옛 합포현에 있으며 창원도호부에서 서쪽으로 13리 거리에 있고 석성(石城)인데 둘레가 4,291척이고 높이는 15척으로서 성안에는 우물이 5개소 있으며 배극렴이 쌓았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현재 합성동 어느 주택 담벼락에 남아있는 합포성벽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합성동 155-42번지입니다.
가벼운 현대식 블록 담장을 떠 받치고 있는 오래된 과거의 석축이 내 눈에는 마치 '시간의 낙관(落款)'처럼 보입니다.





합포성 성곽유적 일부가 유형문화재로 남아 이처럼 보존되고 있습니다.

                                             <합포성 성곽 유적>


다음 그림은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합포성입니다.

중앙 상부의 원형 표식 안에 '창원'이라 적은 것이 의창동에 있었던 창원읍성이고 그 좌하의 작은 원형 표식 위에 고병영(古兵營)이라고 적은 것이 합포성입니다.




다음 그림은 이상길 교수가 복원한 합포성의 위치를 현재의 지도 위에 표시한 것입니다.

                                     
                                                 <합포성 위치>

창원시 의창동 일대에 있었던 창원읍성은 성종 8년인 1477년 완공되었습니다. 완공은 되었지만 창원도호부가 언제 신축한 부성으로 이전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아무튼 1408년 탄생한 창원부의 행정치소는 짧게보아 칠십년 이상 지난 뒤 마산에서 창원으로 옮겼습니다.

부성(府城)이동이라는 도시의 대변화는 마산지역(당시 합포)에 있었던 행정과 군사의 중심기능이 창원(의창동 일대)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성이 이전하자 합포성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만 남았는데 이 영(營)은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6년(1603년) 진주로 옮겨갔습니다.

그 후부터 합포성은 역사적 소명을 상실하였고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방치되었습니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3호로 등록되어 명맥만 유지되고 있을 뿐, 위상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존 받아야할 이 오래된 성곽은 '도시화'의 이름 아래 무너져 내렸습니다.
철도 마산선(마산-삼랑진) 개설로 1904년-1905년 사이에 성곽이 관통되었고, 이어서 1909년에는 마산-창원-부산을 잇는 신작로가 성곽을 관통하였습니다.
1960년대 말에는 현 마산자유무역지역 조성과정에서 합포성의 성벽이 매립용 골재로 사용되면서 성의 형태가 대부분 망실되었습니다.
1970년대 말에는 마산시의 도시확장정책으로 동마산개발이 시작되면서 합포성은 형체를 완전히 잃었습니다. 이 시기에 마산의 기차역(마산역, 구마산역, 북마산역)들이 현 마산역으로 통합되면서 기존의 철도는 광로(현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앞 대로)가 되고 그 옆으로 새로운 철로가 생겨 합포성은 또 한 번 관통당했습니다.

우리 지역도 임진왜란(1592년-1598년)의 피해가 많았습니다.
마산인근지역의 대표적인 전투는 현재의 창원시 동읍 신방리 서쪽 고지인 노현(露峴)일대 및 창원성 전투, 의병장 최강이 분전한 안민고개 전투,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투입된 합포해전과 안골포 해전 등입니다.


전쟁기에 왜적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남해안 여러 곳에 성(城)을 수축했는데 마산 산호동 용마산에는 그 때 축성한 왜성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오른쪽 사진이 바로 그것입니다.

임진왜란 중 우리 지역 주민들은 왜구의 침입에 불굴의 저항의식과 희생정신으로 민족 자존심과 자주의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7년이라는 장기간의 전쟁와중에서 병사 겸 부사인 김응서와 그를 따르는 군관민이 한 사람도 일본에 항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34년(1601년)에 창원도호부는 행정과 군사상 요충지인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습니다. 이유는 임진왜란 때 보여준 창원지역민들의 높은 충절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합포성에 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을 진주로 이전한 것이 대도호부 승격 2년 뒤인 것을 보면, 이 병영(兵營)이 떠나고난 뒤 약화될 창원지역의 행정과 군사적 비중을 강화시킬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1408년에 시작된 창원부는 도호부를 거쳐 200여년이 지난 1601년 드디어 대도호부가 되었습니다. 1661년(현종2년)에 잠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으나 1670년(현종11년) 다시 대도호부가 되어 1894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임진왜란 때 단 한 사람도 왜군에 항복하지 않은 불굴의 저항정신이 3.15의거와 부마민주항쟁으로 절대 권력을 두 번씩이나 쓰러뜨린 마산 사람들의 저항정신으로 이어진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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