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0.06.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마산' 지명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작년 11월 9일 포스팅했던 글인데 연재라서 또 올립니다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정립된 주장은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제기된 마산지명 기원설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구전으로 전해내려온 이야기에서부터 고려시대 여원연합군 일본원정 때 이곳에 몽고군들이 주둔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먼저,
일본인 추방사랑(
諏方史郞)의 주장입니다. 
그는 1926년에 간행한『마산항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창원 소재 오산진(현 산호동 용마고 부근)에도 매일 시체가 산을 이루어 50구, 30구 혹은 20구의 시체가 동시에 묻히는 등 참혹한 상황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 지역의 고로(古老)들이 서로 상의하여 유명한 풍수사에게 그 연유와 대책을 묻자 오산(午山)의 오(午)자에 문제가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오(午)자 대신 같은 의미인 마(馬)자를 사용하라고 하여 오산(午山)을 마산(馬山)이라 개명하게 되고 이때부터 마산이란 지명이 생겼다
고 하였습니다.
이 주장은『마산시사』를 비롯한 관찬자료와 마산과 관련한 많은 문헌에서 인용하였으며 사실상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마산의 지명 기원설입니다.

그러나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자료에서 마산이란 지명이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거 없이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를 한 일본지식인이 활자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
일제강점기 조선운송주식회사가 펴낸『조선항만지사정』에서는 마산지명의 기원에 대해
조선 제18대 현종(1660년-1674년 재위) 때부터 마산포라고 칭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현종의 재위기 이전에 이미 마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주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최초로 마산이란 용어가 등장한다며 그 기원을 주장한 학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중종 25년(1530년)보다 100여 년 전인 세종7년(1425년)에 편찬된『경상도지리지』(오른쪽 그림이 표지 제목) 내상조에
(경상)우도내상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인 마산포와 4리 317보 떨어져있다 (右道內廂 在昌原府 去海口馬山浦 四里三百十七步所屬)
라는 마산포에 관한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세종10년(1428년) 8월 기록에
경상도 마산포의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는데 물고기가 죽은 놈이 있었다 (그 당시 마산만에 적조현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다)
는 마산포 기록이 있으니 이 주장도 타당성이 없습니다.

음차현상으로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으나 근거가 불명확합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새로운 주장이 나왔습니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합포에 진주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한 박희윤의 주장입니다.

박희윤은 와세다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후 현재 일본굴지의 도시개발회사 간부로 근무하는 마산사람입니다. 마산도시사연구는 국내에서 공부할 때 했습니다.
작년 추석에 고향이라고 마산와서 쇠락해가는 도시모습을 보며 많이도 안타까워하더군요.

박희윤은 몽고군이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합포(마산일대의 당시 지명)에 진주할 때
몽고군 1인당 말 4필로 보면 4만 필인데 이를 먹일만한 장소로 산호동 지역 바냇들 뿐이어서 이곳에 몽고군의 목마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로 인해 「용마산」「큰 말굿」「작은 말죽통」 등의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용마산 아래에 있는 포구라는 의미와 일본원정당시 말들을 실어 나르던 포구라는 의미에서 「마산포」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 시기를 고려후기로 추정했습니다.

아래 그림은 현재 지도 위에 당시의 지리적 상황과 박희윤의 추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목마장으로 사용하였다고 추정한 바냇들의 면적은 약 25만여 평입니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이 곳 합포의 자산성에 정동행성을 둔 것이 1274년이고, 두 번째 원정이 1281년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도 더된 시기에 마산이라는 지명이 생긴 셈입니다.

600여년 전에 간행된 사료에 마산이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으니 앞의 주장들 처럼 시기적으로 오류가 있지는 않습니다.
몽고군-말-목마장-용마산-마산포로 이어지는 연결이 그리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몽고군이 ‘몽고정’만 남긴 것이 아니라 ‘마산’이라는 이름까지 남겼다는 주장, 참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창원'이라는 지명은 조선 제3대 왕 태종이 재위하던1408년에 탄생하였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1425년 세종이 편찬한 『경상도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창원'과 '마산' 중 어느 지명이 먼저 생겼을까요?

확인 되지도 않았고 확인할 수도 없는 ‘마산’ 지명의 정확한 기원은 무엇일까요?
이 오래된 지명은 언제 무슨 사연을 담고 만들어졌을까요?<<<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2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3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 4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5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6
2010/05/3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7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8

Trackback 0 Comment 4
  1. 따옥따옥 2010.06.09 14:5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지역에 관한 좋은 자료네요 ...
    마산이 왜 마산일까 가끔 별생각없이 궁금해 한 적이 있었던것 같은데...
    잘 보고 갑니다 ^^

    • 허정도 2010.06.11 15:12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 골드 2010.06.11 10:5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어제 KNN 다큐"마산"에 나오시더군요. 박사님의 글을 보고 마산의 근대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읍니다.

    • 허정도 2010.06.11 15:11 신고 address edit & del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합시의 미래에 기대를 걸어야 되겠지만, 마산시가 없어지는게 저는 참 서운합니다.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8

Ⅳ. 맺음말 이 글에서 우리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1차 시위에 참가한 하상칠이라는 특정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다음 두 가지 의문에 답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는 시위 참가 동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7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6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하상칠의 증언에서 품게 되는 두 번째 의문은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시위 참가 사실을 비밀로 유지해왔는지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증..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5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2) 개인적 요인 동일한 사회적 요인이 주어져 있다 해도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심이 강하든 정의감이 투철하든 또는 사회적 불만이 가득하든 모두..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Ⅲ.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년 7월 21일 14시 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년 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4

구르나 마을이야기 - 2 《극장》 극장은 아름다운 내부공간과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담쟁이가 덥혀있었다는 객석 회랑 목조 파고라 위의 담쟁이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흙으로 빚어진 구조물은 모두 원형대로 ..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1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1 (이 글은 이집트 여행 중 우연히 만났던 하싼 화티의 구르나 마을 경험담이다. 오래 전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우연은 내게 축복이었다. 울렁이는 감격으로 구르나를 둘..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4

도강언(都江堰)에 올라 이빙(李冰)을 생각하다 저명한 중국의 역사학자 위치우위(余秋雨)는, 중국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라고 했다. 도강언의 외관상 규모가 만리장성처럼 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3

위대한 목민관 이빙(李冰) 도강언 주변 일대는 성도나 인근 지역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천 매미가 왕왕거리며 울어댔고, 서북쪽의 산록에서는 시원한 고원 바람이..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2

5백 갈래로 나누어진 민강(岷江) 도강언의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가 그것이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