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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5/0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4) - 고려시대 (2)
<전쟁, 그 이후의 고통>
두 번의 전쟁 후,
조정에서는 마산지역의 지명이었던 의안(義安)을 의창(義昌)으로, 합포(合浦)는 회원(會原)으로 개칭하고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수령이 통할하던 이곳에 현령을 직접 파견하여 행정지위를 승격시켰습니다. 일본 정벌기간에 보여준 마산지역 민관의 노고를 치하해 내린 조치로, 소위 민심수습책이었습니다.
'합포'와 '회원'은 최근 통합창원시 출범으로 두 개의 구청이 들어서는 마산에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행정구 명칭이 되었고 '의창'은 현 창원시의 두개 구 중 하나의 명칭인 '의창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정의 배려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고난을 겪은 백성들에게 다시 내린 충격은 왜구의 침입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왜구가 우리 연안을 처음 침범한 것은 고종 10년(1223년)으로 여원연합군 1차 전쟁 50여 년 전입니다.
그 이후 크고 작은 노략질이 계속되다가 공민왕 때와 우왕 때에 가장 심해 무려 452회나 침략을 받았습니다. 고려기 전체 침입 484회의 90%가량이 이때에 있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삼강행실도의 열부입강(烈婦入江) 부분입니다.
고려 말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정절을 지키려고 강으로 도망쳤다가 왜구의 화살에 맞아 죽은 열부의 행실을 칭송한 그림으로 당시 왜구의 횡포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지역은 경상도 연해지역이었습니다.
왜구는 2-3척의 배를 타고와 노략질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심할 때는 200-500척의 대규모 해적선단에 수천 명이 타고와 침범할 때도 있었습니다.
마산 인근에는 고종 14년(1227년) 5월 웅신현에 침범한 일이 최초이며 2차정벌 1년 전인 충렬왕 6년(1280년) 5월에 합포로 침범해 고기잡이 하던 어부 두 명을 잡아가기도 했지만 그 때까지는 모두 소규모 노략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70년 뒤 충정왕 2년(1350년) 6월에는 20여 척의 배를 타고 합포에 침입하여 병영에 불을 질렀고, 공민왕 1년(1352년) 9월에는 540여 척의 대규모 선단을 끌고 와 합포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왜구 침입사상 이곳 합포가 입은 가장 큰 피해는 공민왕 23년(1374년) 4월에 왜선 350척이 합포를 공격했을 때입니다.
이 때 왜구들은 별 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군영(軍營)과 병선(兵船)을 모두 불사르고 무려 5천여 명의 인명을 해친 다음 많은 재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러한 왜구의 침입은 우왕 때도 계속되었습니다.
우왕 2년(1376년) 11월부터 시작해 그해 겨울은 경남지방의 진주, 함안, 동래, 양산, 언양, 기장, 고성, 울산, 진해, 반성 등이 거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왜구가 이곳에 상륙하여 의창현과 회원현의 관가를 공격하고 민가를 불살라 남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왜구의 침범이 마산지역에 특히 많았던 사실을 두고 학계에서는 합포가 두 번에 걸친 일본 정벌의 원정기지였기 때문에 받았던 일본의 보복성 공격이라고 해석합니다.
돌이켜보면
근대 이전의 마산 역사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사건은 이곳이 두 번에 걸친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발진기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은 마산이 동아시아의 군사적 중심도시로 부각될 수 있었던 지정학적 가치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이래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주요 루트가 김해였던 사실에 비추어, 13세기 여원연합군의 대선단이 지금의 마산항을 발진기지로 설정한 점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 자체로 우리 지역의 소중한 역사자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동행성으로 사용되었던 자산성에 대해서조차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학술조사도 없었습니다. 역사자원을 보존, 활용하지 못하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설화도 사실인양 뭔가를 만들기도 하는 세상인데, 있는 자원도 활용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무관심은 일본이 하카다(博多) 일대에 당시 몽고군과의 전쟁 유적을 발굴 보존하고 이를 역사문화관광지로 다듬어둔 사실과 비교되어 더욱 안타깝습니다.
지금도 마산시 자산동 3·15의거기념탑 옆에는 ‘몽고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일제기였던 1930년대 몽고정의 사진이며 아래 사진은 80년 뒤에 찍은 지금 모습입니다.
몽고 군사와 말이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몽고정 옆에는 직경 1.4m의 바퀴모양 석물이 한 개 있는데 몽고군 전차바퀴이거나 물을 길을 때 발판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초기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의『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이 우물은 원래 ‘고려정’으로 불렀으나 일본인들이 ‘몽고정’으로 개명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6년경까지 이 우물에는 ‘서성리수백년지음정(西城里數百年之飮井)’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 여원연합군이 떠나고 난 뒤부터 마산포의 서성리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사용한 우물이었다는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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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생태주거단지 (6) '다이와(大和) 하우스'의 '고령자 실험주택'
이번 탐방에서 견학한 생태주거단지들은 20여년전에 시작한 초기단계의 작품에서 부터 현재 진행중인 생태주거단지까지 다양한 유형들을 소개하였다. 실제 건물을 통해 '친환경 생태주택'의 외형적 이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건물이 하나 하나 완성되기까지는 지방자치단체의 시범적 개발, 기업 연구소들의 미래형 주거형태 제시 그리고 시민단체에서 친환경 생태주거에 대한 홍보를 통한 시민들과 기업의 인식전환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이 되는 다이와 하우스의 '고령자를 위한 실험주택"과 탄소배출 제로를 선언한 '제로 에미션 센터' 그리고 동경도 이타바시구에서 운영하는 '에코폴리스센터' 그리고 환경공생주택을 시민운동으로 전개하는 '사단법인 환경공생주택 추진협의회' 와'NPO환경주택'의 활동상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의 건설회사는 우리나라와 달리 주택만을 전문으로 짓는 건설회사들이 많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건설회사는 문어발식 영업전략으로 주로 주택이건 일반건물이건 모든 용도의 건설공사에 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소개할 '다이와 하우스'는 회사의 이름에서 보듯이 주택만을 전문으로 건설하는 회사로서 자체의 연구소 및 실험동의 면적이 23,284M2이 정도 규모의 실험, 연구소를 가지고 있읍니다.
원통형 건물이 주택박물관이고 좌축은 실험동, 우측에 고령자 실험주택이 배치되어 있다.
● 고령자를 위한 미래형 시니어하우스
- 건물의 외관은 단아한 2층 양옥구조이다.
(현관진입 경사로 난간 하부에 조명이 매입되어 있었다.) | (외등은 태양광, 풍력발전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
- 현관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한 많은 편의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령자를 위한 수납형 의자) | (휠체어리프트가 바닥에 매입되어 있다.) |
- 주방의 싱크는 아일랜드형(노출형)으로 되어 있다.
(키에 따라 싱크의 높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 (주방벽면에 각종 정보를 게시하고 쓸 수 있는 보드가 설치되어있다.) |
- 욕실과 화장실은 거동이 불편한 중증장애인을 위한 설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장애인을 욕조까지 이동할 수 있는 리프트가 욕실에 설치되어 있다.) | (이동용변기: 안방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
- 안방은 친환경 자재로 마감되어 있다.
(주요재료는 대나무, 마, 화산재 등을 사용하여 습도조절, 공기정화기능을 겸하도록 되어있다.)
- 기타 편의시설들은 다음과 같다.
(바닥 조명을 통해 이동의 편의성을 고려하였다.) | (손이 끼지 않도록 문틀을 둥글게 만들었다.) |
(실태 채광창역할과 발열을 통해 난방기능을 겸하도록 되어있는 실내창) | (발연유리에 의해 접촉부 25도, 주변부는 약 20도의쾌적한 복사난방효과를 내고 있다.) |
- 거동이 불편한 점을 고려하여 이동의 편의성을 고려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며
- 특히 화장실 관련 설비가 추가적으로 설치
- 쾌적성을 고려한 건축자재, 난방방식에 대한 연구가 돗보였다.
- 고령자 주택은 노인 뿐만 아니라,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에게도 편리한 구조임을 분명할 것이다.
● 일본의 고령자 주거의 현황
- 일본의 고령자 대상 주택(맨션 등)이 4년전에 도입된 介護保険制度(고령자 배려 건강보험제도) 이후 민간 주택사업자 및 NPO(비영리)법인이 고령자용 주택건설 사업에 적극 뛰어들고 있는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 한편, 최근 인기를 끌고있는 고령자용 맨션으로는 별도 노인간병 등을 필요로 하지않는 건강한 노인층을 대상으로 한 건강한 노인층 맨션동과 간병 등이 필요한 고령자를 대상으로한 간병 노인 맨션동을 구별하여 단지내 건설하고 추후 건강한 노령자가 간병이 필요해질 경우 단지내 노인 간병 맨션동으로 손쉽게 옮길 수 있도록 배려한 종합 노인 맨션을 들 수 있다.
● 우리나라의 고령화 주거현황
- 우리나라의 고령화 추세는 이미 2005년에 UN이 정한 고령화사회(노인인구 비율이 전체인구의 9%) , 올해는 10.9%, 2019년에는 고령사회(14%)에 2026년에는 초고령사회(20%)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현재 LH 공사에서 고령자 주거를 위한 설계 지침을 제작중에 있는 현황이다. 앞으로 많은 연구가 관심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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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지방선거가 절정입니다.
통합 창원시의 미래는 이번 선거에서 선택받는 공직자들에 의해 크게 좌우됩니다.
그만큼 중요한 선거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60년대 이후 급격히 진행된 인구 도시집중현상은 도시의 양적 팽창이라는 물리적 변화와 함께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도시시설 사이에 해결하기 어려운 수많은 문제를 유발시켰습니다.
도시의 규모가 비대해진 대도시일수록 문제의 정도는 더 많고 더 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도시를 이끌어갈 공직자의 도시인식과 도시에 대한 철학은 다른 어떤 덕목보다 우선 검증되어야할 조건일 수 있습니다.
공직자의 도시철학은 그 도시의 경제 발전과 문화 품격을 상승시킬 뿐만 아니라 당장에 시민생활의 질과도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브라질 쿠리티바의 자이메 레르네르 시장을 통해 세계적으로 검증된바 있습니다.
도시문제 접근방법에는 두 가지의 큰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도시의 물리적 환경을 양적인 측면에서 공급 조절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도시의 구조적인 문제와 시민의 생활방식 등을 조정하여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믿는 문화주의입니다.
예를 들어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택할 때,
기술주의자는 도로를 넓히거나 지하터널을 뚫고, 문화주의자는 대중교통과 자전거도로의 질을 높이거나 출퇴근 방향을 분산시키는 정도의 차이입니다.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간단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의 대부분 도시정책이 기술주의적 방법에 치우쳐 있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기술주의자들이 말하는 개발과 성장이 문화주의자의 주장보다 위세 당당하고 발전적인 것 같지만 우리의 도시사정을 찬찬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전국에 걸쳐 진행된 '개발을 통한 성장정책'에서 얻은 것도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폐해도 적지 않았습니다.
개발이란 이름아래 뒤엉킨 도시는, 사람이 있어야 될 자리를 자동차가 차지했고 자동차가 있어야 될 자리는 건물이 서버렸습니다. 한가롭고 넉넉했던 농촌벌판 그 수평의 한 가운데마저 어느 날 괴기한 아파트가 우뚝 서고 말았습니다.
대다수의 지방자치단체가 자신의 역량과 특수성을 외면한 채 미래 발전계획 모델로서 '인구를 늘이고 공단을 조성하여 지역을 발전시키겠다'는 등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도 바로 이런 개발전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산의 경우,
무학산과 합포만이라는 천혜의 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환경이 척박한 까닭도 기술주의만 신봉한 도시행정의 탓이 큽니다.
지금은 도시의 외형적 성장보다 생활의 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입니다. 배가 고팠던 시절에는 음식의 양을 중시했지만 지금은 양보다 맛과 영양을 찾는 현상과 같은 원리입니다.
주민을 위한다는 행정이 오히려 주민을 소외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도시개발을 했지만 생활환경이 점점 척박해지는 지긋지긋한 도시정책들은 이제 정말 끝내야 합니다.
‘무엇이 공동체를 위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사람 중심의 도시는 이런 것이다’라고 답할 수 있는 지도력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현재의 도시수준에서 실현할 수 있고 변화할 미래의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단순하고 유연하면서 비용도 적게 드는 도시정책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통합시 출발과 함께하는 선거라 더욱 그렇습니다.
개발보다 생활의 질을 소중한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
도시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
차의 길보다 사람의 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어디, 이런 사람 한 번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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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2010/05/26 09:19
사진을 보니...좋은 도시를 만드는 것과 소득은 상관이 없는 일이네요.
늘, 좀 더 부자가 되면 좋은 도시를 만들어주겠다고 하던데..
거짓이었군요.
유념해야겠습니다. -
<합포 선정이유와 민중의 고통>
왜?
원 세조 쿠빌라이와 고려 충렬왕은 대일본 원정기지로 남도의 작은 포구 합포를 택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당시 이 도시가 가졌던 자연적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학계에서 정리된 내용은 대략 다음의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위치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합포가 해로(海路)상 일본과의 최단거리에 있는 항구입니다. 그리고 거제도와 쓰시마 사이를 지나는 쓰시마 난류를 타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쓰시마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갈 수 있는 첩경(합포-거제도-대마도-이키-일본본토)이라는 점입니다.
해로 뿐 아니라 육로도 수도 개경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한 최단거리에 위치한 항구가 합포였습니다.
둘째는 항구시설입니다.
합포에는 이미 조창이었던 석두창이 설치되어 상대적으로 다른 포구보다 양호한 항구시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조운선을 위한 정박시설, 내륙으로의 조세운반을 위한 교통로, 조운선의 건조와 수리를 위한 조선시설, 군량미 보관에 용이한 기존의 창고시설 등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석두창에서 인근 지역의 조세가 수납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량의 확보도 유리했을 것입니다.
셋째는 포구의 조건입니다.
아래 그림처럼 합포는 리아스식 해안에 포구가 깊어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형세입니다.
거제도를 비롯한 모도․저도 등의 크고 작은 섬들 때문에 외해의 풍랑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점도 작용하였을 겁니다.
넷째는 기존의 군사시설 때문입니다.
통일신라 이후부터 동남도병마절도사영(東南道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된 이래 합포에는 계속 군사기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위한 시설과 무기의 제조 및 보관 등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백성들의 고통-
이 네 가지 조건에 의해 합포가 대일본원정기지로 선택되었지만, 두 번에 걸친 전쟁준비로 겪은 마산인근의 백성들이 받았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벌준비에도 쉽게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조세도 타 지역민보다 가혹하게 부담하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정벌은 권력 확장을 꾀한 통치권자의 정치적 목적과 의도 이전에 백성들에게는 피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었던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수선사(오늘의 송광사) 승려 원감국사 충지(沖止)는 일본정벌로 고난을 당하고 있던 영남지방 민중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영남의 쓰러진 모습
말로 하려니 눈물이 앞서네
두 도에서는 군량을 바치고
세 산에서는 전함을 만드느라
세금은 백배나 늘었고
역역은 삼년에 걸쳐
징발은 성화같이 급하고
호령은 우레같이 전하네
····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고
부모는 하늘보고 울부짖네
저승과 이승은 다르건만
목숨 보전을 어찌 기약하랴
남은 사람은 노인과 어린이 뿐
억지로 살려니 얼마나 고달프랴
고을마다 반은 도망간 집이요
마을마다 모두 황폐한 토지로다
,,,, 전쟁 때 힘 없는 백성만 죽어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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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츠쿠바의 주거단지는 5개의 답방지 중에서 유일하게 (주요특징은 가로변 녹지와 가구별 주택양식의 차별화를 통해 단지별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민간회사에서 토지를 매수하여 생태주거단지를 개발한 사례이다.
<환경공생주거단지의 민간사업 시행방식>
* 사업방식
- 사업부지는 츠쿠바시의 중부지역인 연구학원도시 주변개발지구에 위치한다.
- 환경공생주택 촉진사업으로 지정되어 지원을 받은 사업이다.
- 사업 방식은 민간사업자 2업체가 시행사(NIPPO과 塚田陶管)가 되어 필지를 개발하였다.
- 6개의 건설사에서 구간별로 필지를 매입한후 주택을 지어서 분양하는 방식과 필지를 분양받아서, 해당 건설사에 주문하여 주택을 짓는 2가지 방법으로 시행하였다.
* 사업규모
- 총 사업면적은 31.9hadp 773필지로 구획하여 분양한 주택단지이다.
- 사업부지의 40%는 도로와 녹지를 조성하여 시에 기부채납하였다.
- 건축연면적은 평균적으로 36 - 38평 규모이며, 대지면적은 60 - 70평 정도임
- 현재 650세대 분양을 완료하였으며, 100여세대는 현재 분양중에 있음
- 사업적으로는 성공한 케이스는 아님, 개발 시행사의 홍보효과는 매우 크다고 함.
* 친환경 공생주택의 특징
- 분양가 : 일반주택보다 평당 10만엥(약 120만원) 정도 비쌈 - 세대당300-400만엥 비쌈
- 보조금 : 에코지원금 호당 100-200만엥 보조금 + 입주시 30만엥 지금
- 지역건축 협정 의무사항 : 녹지협정, 건축규모 형태 등 준수 의무
- 단지의 친환경 규정은 사업자가 대지 조성시 완료
- 대지를 매입후 자유설계시 : 환경공생 주택규정을 준수하여 건축하여야 함.
(단지배치도 : 6개의 건설업체가 구간별로 참여하여 다양한 가로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건물 배치도
- 부지의 중앙에 쇼핑센터와 관리사무소를 배치하고, 양측에 수변공원이 배치되어있다.
- 생상별로 시행사가 구분되어 각기 다양한 가로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부지 동측의 공용공원과 호수의 전경 : 사업자가 부지조성시 만듬)
(단지내의 수생비오톱)
<시행사별 주택의 컨셉>
* 삼정Home
- 전형적인 일본의 검소한 주택형식으로 별도의 컨셉없이 회사의 이름인 '삼정 홈'을 네이밍하여 분양하고 있다.
(1층 평면에서 화장실, 세면실, 샤워 및 욕조의 분리가 우리생활과 큰 차이를 보인다.)
(구조는 주로 목구조이며, 뿜칠 마감에 플라스틱 기와가 일반적이다.)
* Tiara Square
- 서구적인 분위기 자아내기 위하여 정면마다 박공지붕을 가지고 있으며, 파스텔 톤의 색상으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1층은 주로 응접실과 거실, 그리고 주방식당이고, 2층은 3개의 방을 배치한 구조이다.)
(외관의 모습 : 별도의 장식없는 것이 특징이다.)
(2층은 화장시 변기만 딸랑 하나있는 것이 우리와의 차이인것 같군요)
* Radian Pure
- 쾌적한 환경을 지향한다는 의미의 네이밍으로, 실내환경에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를 반영
(외관은 앞선 것과 별반 다른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개별주택의 외관이 아니라 단지의 환경을 우선시 한 것이라는 점)
* Sekisui(積水) House
- 이 주택은 '벗꽃 공원'에 인근한 점을 강조하였군요,
(외부 마당의 활용이 특이하죠. 특이 주차장 부분)
(이집의 외벽은 뿜칠이 아니라 판넬을 그냥 부착한 것이 다른 집과의 차이이군요)
* Belle West
- 서유럽의 우아함을 보여주려는 의미의 네이밍,
- 외관에 자연석 쌓기와 스페니쉬(오지)기와가 특징이다.
(그나마 가장 럭셔리한 스타일처럼 보이는 군요, 박공면의 조형물은 건축가가 집마다 다른 디자인을 하였다고 합니다.)
* 개성있는 주차장의 모습들
* 축소지향의 일본인
(친환경 냉장고, 지중열 이용) | (계단참을 독서실로 활용하는 지혜) | (손만 씻는 세수기) |
<<츠쿠바 생태주거단지의 성과>>
* 민간사업자의 입장에서 단기적인 사업수지 평가만 본다면 실패한 사업이다.
- 약 90%의 분양성을 감안하면 적자는 아니고, 손익계산상 제로섬 정도 될 것이다.
- 그러나 미래형 주거형태의 시장구조에 투자한 장기적인 수익성을 감안하면 성공한 사업일 수도 있다.
- 친환경 생태주거사업에 대하여 기업의 이미지 제고와 기술적인 노하우 축적과 선점효과를 비용으로 환산한다면 결코 실패한 사업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츠쿠바의 교육연구단지 지역임을 감안하면, 엘리트 연구원들이 향후 성과에 대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일단, 쾌적성 면에서는 우수한 환경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 사업이 가능한 이유는
- 일반주택에 비해 분양가가 평당 100만원 이상이 비싸다. 분양가로 환산하면 4-5,000만원이 비싼 주택이다.
- 그러나 계산이 빠른 사람들은 주택비용만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지 환경을 분양가에 넣었을 것이다. 호수가 2개나 있고, 녹지광장, 여름에 시원한 실개천이 있는 단지 환경비용으로 추가 비용을 지불했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 환경공생주택이란?
- 인간도 생태계에서 보면 하나의 종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간이 살기에 쾌적한 환경의 조성은 자연환경을 잘 가꾸는 것에서 출발하는 사고이다.
- 환경 공생주택은 생태계(동식물, 유기체, 무기체)와 공존하는 삶의 방식이
인간에게 가장 좋은 환경조건이라는 것을 깨달는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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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후반,
고려의 남쪽 해안에 있던 합포는 행정상으로 경상도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의안군 관할의 영현(領縣)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려 현종 군현체제 개편 때 지금의 양산인 양주에서 금주로 이속되었습니다)
하지만 합포는 동아시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국제군사도시였습니다.
당시 세계최대 강국이었던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이곳 합포를 일본정벌기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때는 1274년, 고려 충렬왕 원년이었습니다.
여원연합군은 지금의 합포고등학교 남쪽 일대를 싸고 있던 현 자산성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삼고 전함건조(戰艦建造) 및 군사훈련을 비롯하여 일본정벌을 위한 대대적인 준비를 시작합니다.
둔전은 황해도 봉주(봉산)과 경상도 금주(김해)에, 선박건조는 제주도와 전라도 쪽에서 맡았습니다.
군사만 자그만치 33,000명이었습니다.
이들의 숙식과 훈련을 비롯하여 일본까지 배로 건너가는데 필요한 인원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 합포에 모여들었겠습니까. 뱃사공과 도선공, 수리공이 6,700명이었다고 하니 이곳 마산이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을 겁니다.
사람뿐아니라 전쟁에 나설 크고 작은 배들도 깃발을 펄럭이며 마산만으로 몰려들어 땅 바다 할 것없이 전쟁기운이 합포 하늘을 찔렀을 겁니다.
『고려사』가 그때의 정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해 10월 3일,
여원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나섰습니다.
위 그림 중 위의 것은 여원연합군 일본정벌 원정루트이며 아래 것은 다카시마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된 당시 여원연합군의 전함입니다.
여원연합군은 쓰시마섬과 이키섬을 거쳐 하카타까지 승승장구하다가 밤이 되자 일본군의 야습을 피해 하카다만(博多灣)으로 후퇴해 선상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갑자기 들이닥친 태풍으로 배에 타고있던 연합군은 하룻밤 새 풍지박산되고 말았습니다.
세계 정복을 꿈꾼 원 세조 쿠빌라이의 첫 번째 패배였습니다.
7년이 지난 1281년,
여원연합군은 다시 원정군을 편성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병력 40,000여명에 전함 900척이었습니다.
5월 12일 출병했는데 출병 전 충렬왕이 친히 이곳 합포까지 내려와 연합군의 일본정벌을 격려했습니다.
국가통치권자가 마산을 방문한 첫 사례입니다.
연합군의 검열 차 내려와서 두어 달가량 있었는데 우부승지 정가신(鄭可臣)을 대동하였습니다. 환주산에 있는 현재의 자산성에 머물면서 중간에 김해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왕까지 내려왔으니 합포는 마치 전쟁기 임시수도와 같은 분위기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2차 원정에서도 갑자기 우박을 동반한 무시무시한 태풍이 일면서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두 번이나 태풍이 일본을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자신들을 지켜준 이 두번의 태풍을 두고 카미카제(神風)이라 부릅니다. 이로 인한 허황된 의식이 역사를 오판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두 번에 걸친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일본정벌의 출발지였던 합포에는 당시 주둔군 숙소와 군영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을 것입니다.
각지에서 들어오는 군량미는 물론,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들 때문에 시장도 활성화되었을 것입니다.
두 차례의 원정이 실패한 후에는 부상당한 군사들의 치료와 구제에 필요한 시설물들도 많았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도시의 규모와 성격 측면에서 본다면, 13세기 후반의 합포는 위상이 아주 높았던 국제군사항구도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 군사적 필요에 의해 조성된 각종 시설들이 뒷날 조선 후기 남해안 최대의 상업포구로 발전해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700여년 전에 이 도시 마산이 한중일 국제전의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 도시가 오늘이 있기까지 경험했던 사건들과,
이 도시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이야기들과,
이 도시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과 사람들의 사연들이,,,,
얼마나 많을까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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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바시구(板橋區)는 도쿄도의 23개 자치구의 북서부에 자리잡고 있는 지역이다.
'하수네(蓮根)아파트'는 환경공생주택 모델사업 의 적용을 받아 1998년 완공된 건물이다.
- 총 5동의 50호 규모이며, 고령자 주택 15호와 고령자의 생활지원 서비스를 위한 복지사 주택도 1호가 포함되어 있다.
각동의 접합부는 틈을 통해 빛과 환기를 고려한 배치로서 모든 주호가 3면을 외기에 면하게 한 구조이다.
환경공생주택의 특징으로는
1. 자연통풍과 채광을 위한 건물 배치
(공용홀 : 환기와 채광을 고려한 오픈배치)
(중정을 통해 각 세대로 진입토록 되어있다.)
(단위세대간의 틈을 통해 채광과 환기가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남측에 면한 중정 : 건물의 층수는 3-5층으로 되어있다.)
2. 태양광발전, 풍력발전설비
(옥상의 태양광 집광판)
(태양광발전 공공시계) (중정의 녹지와 다양한 수종들) (진입로의 녹지와 보행자도로: 물론 투수형 포장이겠죠!)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쌈지공원) (1층 복도의 벽면녹화 : 샤시를 설치하는 우리나라와 다른이유는 - 환기를 통한 공기질을 우선시 하기 때문임) (수생비오톱이 잘 만들어져 있군요) (공원광장 사용시 주의사항들) (우수활용을 위한 펌프) (한방울의 물도 버리는 법은 없다.) (옥상정원) (복도내 휴게벤치설치) (중정의 휴게파골라)
3. 다양한 녹지공간과 비오톱(생태서식지)
4. 수자원 처리시스템
5. 고령자를 위한 편의시설
(최상층의 공중복도)
(아파트 진입로 : 공원길 걷는 기분일것 같네요!)
* '하수네(蓮根) 아파트'가 정말 좋은 이유
- 고령자를 위한 세대수를 배려한점, 더구다나 간병을 위한 복지사의 집도 한채 고려하였다.
- 고령자나 노약자를 위한 배리프리(무장애)디자인이라는 점
: 일반인들이 편한 것은 두말한 나위가 없겠죠!
- 아파트가 고급이 아니라 단지 자연환경의 질이 높다는 점
(공원과 연계시킨점도 높이 평가)
- 역시 저밀도개발로 쾌적한 주거환경이라는 점 (용적율이 116%에 불과함)
- 이러한 여건이 가능했던 이유는 동경도청 직영의 도영주택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지자체 꼭 참조하길 바람)
- 이 정도면 환경공생주택의 모델이 될만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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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는?>
하지만 마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석두창(石頭倉)의 중요성도 결코 조선시대 마산창 못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두창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그 위치도 밝히지 못한 채 몇 가지 가설만 나와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주장된 석두창 위치에 대한 가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석두창 위치 비정은 모두 세 가지인데 모두 그 근거와 논리가 좀 복잡합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 일이니 그도 그럴 것입니다.
세 주장의 결론만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볼 수 있도록 자세한 내용은 이 글 뒤에 별도로 붙여 놓았습니다)
첫 번째는,
몇몇 문헌(마산시사, 창원군지, 박희윤, 이지우 경남대 교수)에서「당시 마산포라 불렀던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느 지점, 즉 현 산호동 어딘가에 있다가 조선조에 현 어시장 해변으로 옮겼다」라고 추정한 것입니다.
이 주장에서 사용한 근거자료는,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 영조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 1895년에 간행한 『영남읍지』 등 입니다.
두 번째는 저의 주장입니다.
저는 앞의 주장이 문헌 해석방법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석두창이 현재의 남성동 해안으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근거자료로는 지명과 자연조건 그리고 지형을 제시했고 사용한 자료는 『고려사』,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1899년 일본에서 제작한 근대식 지도, 조선시대 마산포 복원도 등 입니다.
세 번째는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석두창의 위치가 「산호동 일대이지만 반월산(무학여고 뒷산)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추정근거로 지명의 의미 및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들었습니다.
위 세 주장에서 제시된 위치를 세 종류의 지도에 표기해 보았습니다.
■ 첫 번째 주장 '산호동'은 청색,
■ 두 번째 주장 '남성동'은 적색,
■ 세 번째 주장 '반월산에서 해안가'는 녹색 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대충이나마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세 곳 모두 도시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해안이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인 녹색부분은 삼호천과 산호천이 합해진 하류인데 지금은 복개되었습니다>
셋 중 어느 주장이 맞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직 논의가 종결되지도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천 년 전 합포의 최대 최고시설이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다면 통합 창원시 최고의 문화유산이 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디쯤 있었을까요?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은,,,,
<석두창 위치비정에 대한 세 주장의 상세 글> - 길어서 읽기 지겹습니다 -
첫 번째,
‘산호동 일대’라는 주장의 근거자료로 사용되었던 문헌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조세(租稅)조에서「이전에는 도내(道內)에서 세(稅)를 거둬 실어다 바치는 곳이 세 군데 있었다.
김해 불암창, 창원 마산창(옛 석두창), 사천 통양창」이라는 기록.
② 『경상도지리지』 내상조(內廂條)에서「우도내상(右道內廂)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海口) 마산포와 4리317보 떨어져있다」는 기록.
'병영성(兵營城)과 내상성(內廂城)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내상(內廂)은 현 합성동의 당시 ‘우도병마절제사영성(右道兵馬節制使營城)을 말함'
③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창원도호부 산천조(山川條)에「馬山浦 在會原縣 猪島在月影臺南 合浦在府西十里․․․․․․」라고 하여 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
④ 영조(英祖)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대도호부조(昌原大都護府條)에 수록되어 있는 창원부의 지도에서 석두창의 위치가 반룡산(盤龍山, 현 팔용산)밑인 지금의 산호동 일대(팔용산과 월영대 중간지점)에 도시(圖示)되어 있다는 것
⑤ 1895년 간행한 『嶺南邑誌』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조에서「조창은 해창 부근에 있는데 새로 지은 것이다」라는 기록 등 입니다.
이 문헌들에 근거하여 내린 결론은
①「마산에 두 개의 포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산호동 일대)의 마산포이고 다른 하나는 현 어시장 쪽의 합포였다」고 규정하여
②「마산포에 석두창이 있었으니 현 산호동 어딘가에 석두창이 있었다」라고 결론짓고
③ 그러다가 조선 영․정조시기에 자연충적(自然沖積)으로 마산포에 선박출입이 어려워지자「현 어시장 해변인 해창 부근, 즉 합포로 옮겼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박희윤은 마산포에서 합포로 옮겨 간 사실을 두고 「산호동 일대는 구강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여기서 열리던 장을 ‘구강장’이라고 하였고 어시장 쪽에서 열리는 장을 ‘새강장’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예로 들었습니다.
즉 마산포에 있던 석두창이 퇴적물로 인해 조선 후기에 합포 지역으로 조창을 이전했기 때문에 원래의 지역을 ‘구강’, 새로운 지역을 ‘새강’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마산포라는 지명은 기존의 산호동 일대만 지칭하다가 현재의 남성동 일대인 합포 지역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고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였습니다.
두 번째,
‘남성동 어시장 일대’라는 제 주장입니다.
위 석두창 위치비정 논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합니다.
①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규명하는 방법에서「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의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을 이용하면서, 마치 자로 잰 듯이 당시 행정구역인 회원현의 범역과 창원대도호부의 위치를 자구(字句) 그대로 적용하여 현 산호동 일대가 마산포이고 남성동 일대가 합포인데 석두창이 마산포에 있다고 한 점입니다.
따라서 산호동의 용마산에서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딘가 그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가 석연치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래의「대동여지도」입니다.
이 지도에는 위의 주장과 정반대의 위치에 마산포와 합포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활용한 문헌의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표기 범례에는 ■은 倉庫, ●은 古縣이라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合浦●」의 표기는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시행한 행정구역 정비 때 의안군에 영속되었던 합포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과거에 현(縣)이었는데 성(城)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도에 표기된 양상을 보아도 마산포는 기존의 연구처럼 산호동 일대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부 지도에 도시(圖示)된 석두창의 위치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우리나라의 각종 고지도(古地圖)에 나타나는 시설물들을 보면 축척과 거리의 개념보다는 존재 유무의 개념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에 나타나는 석두창의 위치를 사실로 연결시키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무리가 많습니다.
또한 석두창이 산호동 부근의 마산포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시기와 명칭과의 관련성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③ 조선 영․정조에 석두창을 현 어시장 쪽인 합포로 이전했다는 내용에 대한 주장의 타당성입니다.
이 주장은 석두창을 현재의 산호동 쪽에 있었다는 것을 결정해 놓고, 『영남읍지』의 ‘조창이 합포에 있던 해창 쪽에 있다’는 기록과 연결짓다보니「이전」이라는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중요한 관아였던 조창이 이전되었다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석두창이 이전했다면 영조 때 개창한 마산창의 위치로 이전한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고 마산창은 별도로 신설한 것인지 정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석두창 이전 설은 현재로서는 논리적으로 납득할만한 어떤 근거도 없는 셈입니다.
④ 석두창이 오래 동안 사용되다가 자연충적 때문에 이전했다고 한 점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석두창이 있었다는 산호동 해안의 지형지세를 보면 원래부터 퇴적물이 많았던
이 지도는 1899년 일본 해군에 의해 작성된 근대식 지도로서 마산만의 간조선이 표시된 지도로서는 최초의 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지금까지 석두창이 있었다고 주장한 해안은 팔용산에서 내려오는 하천를 비롯하여 양덕천․산호천․삼호천 등의 하천 때문에 간석지의 폭이 무려 1㎞나 되는 곳이 있을 정도입니다.
조창부지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의 네 가지 이유를 보더라도 석두창이 현 산호동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석두창이 처음부터 현재의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비정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저의 주장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고려사』권79 조운, 성종 11년 수경가조(輸京價條)에 「나포 전호골포 합포현석두창 재언(螺浦 前號骨浦 合浦縣石頭倉 在焉)」이라고 하여「나포는 전에 골포라 하였고 합포현의 석두창이 여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기록은 석두창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즉 螺(라, 소라)라고 불렀던 포구라면 그 형상이 소라의 형태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버드나무가 많다고 해서 유호(柳湖)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제가 복원한 원마산 지형도입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동굴강의 형태가 나포(螺浦)라는 명칭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② 조창의 명칭이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점입니다.
중국어에서는 ‘석두(石頭)’라는 단어를 곧 돌(石)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 보면 대부분 갈대밭이었으며 간석지였던 해안에 소라 모양을 띤 움푹 들어간 포구 한 곳을 돌로서 호안(護岸)하여 굴강을 조성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 형상으로 보아 사실상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인 포구를 인공으로 호안(護岸)하여 조성한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③ 앞에서 말했듯이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 사이에는 여러 개의 하천 때문에 생기는 퇴적물로 인해 간석지가 매우 넓었을 뿐만 아니라 해안선의 형태가 밋밋하여 작은 풍랑도 피하지 못할 조건이었습니다.
반면 위의 두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표의 동굴강은 간석지가 좁고 해안선의 형태도 항만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인근에 이렇게 좋은 조건을 놔두고 산호동 쪽에 조창을 설치할 이유가 없었다고 봅니다.
이상과 같은 추정을 근거로 석두창의 위치는 애초부터 남성동해안의 동굴강에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동굴강을 끼고 몽고군의 일본 정벌 때 사용된 전선소(戰船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존의 굴강을 전선소 굴강으로 적절히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굴강은 그 규모로 보아 당시 900여 척에 달했던 전함의 수리를 모두 맡기에는 부족했을 것이지만 기왕에 존재했던 굴강이었기 때문에 일부라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이 추정이 적절하다면 그 위치는 현재의 어시장 입구에 있는 속칭「너른 마당」의 북쪽 인접대지 일대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조선시대의 마산창은 고려시대의 석두창을 이전한 것이 아니라 석두창으로 사용하다가 폐허가 되어버린 창지(倉址) 옆에 새로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 주장에 반론이 나왔습니다.
세 번째,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근거로 하여 석두창의 위치를 비정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① 석두창은 합포현 내에 있는 골포(=螺浦)에 위치하였다.
골포의 골(骨)자는 우리만 의미에서 골짜기 깊숙이 들어간 곳의 의미가 있으므로 마산만 깊숙이 들어간 어느 지점에 형성된 포구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남성동 보다는 더 내륙으로 들어간 산호동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②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을 검토한 결과, 만(灣)의 입구보다는 내륙으로 들어간 해안이나 만의 깊숙한 지점에 위치하였다.
바다로 부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는데 그 역시 산호동 일대가 타당한 조건이었다.
③ 조창의 운반 조건을 볼 때 수운 이용이나 하천을 따라 형성된 소로의 이용이란 측면에서 내륙하천과 마산 앞 바다의 결절지점에 석두창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볼 때, 석두창의 위치를 용마산 아래의 산호동 앞 바닷가 일대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나아가 조창의 입지조건이나 교통망 그리고 당시 해수면의 변화까지 고려한다면 용마산 일대보다 내륙으로 더 들어간 지점일 수 있다고했습니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석두창이 지금의 반월산(무학여고 뒷산, 이산, 이살미산, 와우산이라고도 불린다)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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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중심부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후카자와 환경공생주택'은 일본의 대표적인 친환경 주거단지로 알려져 있으며, 도쿄도에서 추진한 환경공생주택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1997년 일본 건설부의 [환경공생주택 건설추진사업]과 도쿄도의 '생태학적 마을만들기' 목표가 결합하여 추진된 사업이다.
본래의 부지는 세계2차 대전후 지어진 목조단층집의 도영주택으로 40년 이상 노후화된 슬럼가에서 '세타카야'구청의 역점사업에 의해 생태주거단지 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 단지의 설계 및 시공책임자는 무사시공업대학의 이와무라교수
에의해 초기계획부터 완공까지 무려 6년이 결려 완공된 건물이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설득하고 정부와 대학, 시민단체들의 의견을 모으는 등 설계 과정에서 오랜 준비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의 대표적인 '친환경주거단지'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단지계획의 특징
1. 원주민을 고려한 공간계획으로 만들어져 있다.
: 오래동안 이 단지에 거주해 왔던 고령자와 장애자 및 가족세대를 고려한 다양한 주호로 구성되어 있다. 세대는 70세개정도이며, 단지내 거주자와 지역 고령자를 위한 주간요양시설도 만들어져 있다. ( 고령자 주택 17호, 장애자용 3호(구영주택), 특적공공임대주택 10호, 구영주택 43호)
(입구간판 : 후카자와의 상징적 환경공생주택이라는 제목 아래 고령자를 위한 재택 서비스 센터, 주간요양시설이 건물과 연결되어있다.)
(좌측상단의 건물이 요양시설과 주택 복합건물이다. 나머지는 모두 3층건물5동으로 배치되어있다.)
2. 기존주택단지의 수목 및 시설을 최대한 활용한 사업이다.
: 우선 40년 이상 주민들이 가꾸어온 화초와 수목을 최대한 살려서 생태계를 고려한 비오톱(생태서식지)을 조성하였다.
: 단지내 우물도 일부 보존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기존 지형 토사를 외부반출토 없이 단지를 조성하였다. 심지어 철거시 나온 기와와 목재, 콘크리트 등을 재활용했다.
(기존의 우물 14개중 4개소 보존하여 단지내 시냇물과 화단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3. 친환경 기법를 처음 적용한 단지계획이다.
: 당시 일본 건설부와 도청의 자금지원을 받아서 친환경적인 모든 기법이 동원되었다.
- 옥상녹화, 벽면녹화, 테라스나 발코니 등 장소마다 식재 및 화단설치
- 투수형 포장 및 빗물저류조 설치하여 화장실 및 잡용수로 재활용
- 태양광 발전, 태양열 급탕설비, 풍력발전 가로등, 솔라시계 등 설치
- 환경친화적 건축자재 사용 및 움식물 쓰레기 퇴비화시설을 사용하여 단지내 화단에 사용
(일본은 절대 발코니에 샤시를 설치하지 않는다. 습한관계로 이불말리기 위한 공간 발코니에 샷시를 설치하면 불리한 관계로---)
(한적한 외부공간 : 용적율이 100%에도 못미치는 저밀도 개발이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3층규모이면 연립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난간옹벽에 환기를 위한 4개의 구멍이 포인트다.)
(벽면녹화를 위한 철구조물 : 비상시 사다리 역할도 할것 같군요!)
(이 단지의 특징은 담장이 없고 단지내 도로를 인근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구조이다. : 마음씀이 이쁘죠!)
(차고는 없어도, 자전거는 대접받는 동네랍니다.)
(단지내 태양광발전 가로등)
(1층 발코니앞의 화단 : 개인정원 같죠!)
(좌측건물은 2층부터 고령자 주택17호, 우측 공공임대주택은 재택요양서비스를 받을수 있는 주택6호를 배치)
* 후카자와 환경공생주택이 가지는 상징성은
- 최초로 지방자치단체에서 추진한 환경친화형 주거단지라는 점이며
- 사업성을 우선하기 보다는 환경을 고려한 저밀도 계획이라는 점 (용적율 83.9%)
- 기존에 살던 원주민들의 생활양식을 고려한 맞춤형 설계라는 점이며
- 주택개발이 인근지역주민들을 위한 배려 : 편의시설(노인요양시설) 및 도로의 개방
- 가장 중요한 상징성은 당시로서 아무도 추진하지 않았던
'환경친화형 주거단지'를 처음으로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 반대의 조건을 가정해 보자
- 사업성을 높이기 위한 고밀도 개발,
- 사용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몇가지 평면 유형을 가지고
- 친환경과는 거리가 먼 공동주택으로 개발되었다면
- 23년이 지난 지금쯤,
: 슬럼화가 되었거나, 이로 인해 재개발의 움직임이 보였을지도 ㅡㅡㅡㅡ
* 동경 후카자와에서 느낀점은?
- 고밀도 개발과 저밀도개발의 차이를
- 민간사업과 공영사업의 목적이 달라야 하는 이유를
- 친환경 주거단지의 역할이 왜 중요한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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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합포에 석두창이 서다>
고려시대는 조운제가 ‘국가지중최중자야(國家之中最重者也)’라고 표현될 정도로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조운제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만,
고려 제6대 성종(982-997년)기에 전국 여러 포구에 조운기지를 설치하였다가 이후 정종(1035년-1046년)대에 이르러서 이를 개경 남부 12조창으로 개편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12조창은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서해의,
하양창(충청도 아산), 영풍창(충청도 부성), 진성창(전라도 임파), 안흥창(전라도 보안), 부용창(전라도 영광), 해릉창(전라도 나주), 장흥창(전라도 영암).
내륙의,
흥원창(강원도 원주), 덕흥창(충청도 충주).
남해의,
해룡창(전라도 순천), 통양창(경상도 사천), 석두창(경상도 합포, 마산)이었습니다.
12조창 모두 개경 남쪽입니다.
그 후 문종(1046년-1083년) 때 서해도 장연현에 안란창이 하나 더 설치되어 고려시대 조창제의 골격이 완비되었습니다.
고려의 조운제는 이 13조창으로 유지, 발전되었습니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모두 바다나 강을 끼고 있는 곳이라 조운선이 다닐 수 있었던 곳입니다.
각 조창에는 설치 규정에 따라 6척의 조선(漕船) 외에 1,000석 정도를 실을 수 있는 초마선 1척이 배치되어 세공미의 수송을 담당하였습니다.
2월에 조운하여 가까운 곳은 4월을 기한으로, 먼 곳은 5월을 기한으로 수도 개경에 있는 경창에 수송하였습니다.
이 사진은 전남 나주시청 현관 로비에 전시된 나주선(羅州船)의 1/20 모형입니다.
이 배는 고려시대 나주 조창 해릉창에서 영산강을 통해 세공을 실어 나르던 초마선입니다.
2004년 나주역 뒤쪽 영산강 바닥에 도출된 선재를 주민이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를 나주시가 전문기관에 추정복원 설계 용역을 의뢰, 컴퓨터 3차원 분석 및 전문가들의 고증과 자문을 통해서 추정복원도를 작성한 후 8억 원을 들여 현재 복원 중에 있습니다.
선체는 길이 29.9m, 너비 9.9m, 높이 3.16m의 크기에 95톤에 이르며, 승선인원은 96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마산 합포 석두창에도 이런 배가 오갔겠지요.
합포 석두창에는 지금의 창원 김해 함안 칠원 웅천 의령 일대의 세공미가 보관 되었습니다.
석두창까지 수취물을 운송하는 방법은,
지역에 따라 낙동강 수운이나 연근해 항로를 이용했거나, 혹은 22역도(驛道) 중의 하나로 김해 덕산역을 중심역으로 했던 금주도(金州道)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시대 조창은 단순한 창고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촌락으로서 작은 행정기구를 이루었으며 주민들은 조창민으로서 조운에 관계되는 일을 하였습니다.
합포의 석두창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사천 선진리에 있었던 통양창의 예로 추정한다면,
석두창에도 창(倉)을 관리하기 위한 토성이 있었을 수 있으며, 창(倉)을 중심으로 판관과 향리 그리고 조창민이 거주하면서 선박 관리 등 조운 업무에 임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로 인해 사람들의 왕래도 잦았을 것이니 자연히 석두창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고 교통망도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가하면 합포현은 조창 때문에 중앙정부와 직접 소통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건과 배경으로 합포(마산)는 중부 경남의 유통을 중심지로 발전해갔으며, 이러한 합포의 물적 토대는 장차 이곳이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기지로 선택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정황들을 생각할 때,
고려시대 석두창이 이 도시의 중심지였다는 추정은 쉽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합니다.
초마선이 오갔던 석두창은 과연 지금의 마산 어디쯤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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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 2010/05/03 10:25
허선생님,
지금 그노무 해양신도시인가 뭔가 그거 공사를 시작한거 같습니다. 바지선에 기둥이 네개가 삐쭉세워진 거 두대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뭘하고 있습니다. 매립을 위한 말뚝을 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기어이 하는갑습니다.
그노무 매립... 죄송스럽지만 막말이 절로 나옵니다, 매립, 그거 생각하고 시작하고 추진하고, 그게 무슨 광영을 가져다 주기라도 할 것 같이 생각하는 멍텅구리들 싸그리 매립해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마산은 이미 죽어 나자빠진데다가 아주 추악스럽기까지한 도시가 돼버렸습니다. 선생님의 마산변천사씨리즈를 읽는 지금 느낌이 더 그렇습니다.
도시를 죽인데다가 흉칙하고 추악하게 만든자들은 하늘이 반드시 벌을 내릴것이라 믿지만, 거기에 좀비같은 몰골이 돼버린 마산의 역사와 시민들은 우짭니까! 바다는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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