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에 해당되는 글 15건
- 2009/11/30 마산시 회원동 500번지 (12)
- 2009/11/28 시비(是非)는 가려야 (2)
- 2009/11/26 마산 청주 주조장의 마지막 모습: 장군동 주조장의 정체 ? (13)
- 2009/11/25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4)
- 2009/11/23 마산도시의 발원지 「마산창(馬山倉)」 (11)
- 2009/11/20 모지를 바라보며 마산을 생각하다 (11)
- 2009/11/18 내 집 앞을 지켜라! (4)
- 2009/11/16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6)
- 2009/11/16 MBC 일요광장 방송
- 2009/11/13 걷고 싶은 거리, 걷기 싫은 거리① (5)
11월 28일(토) 오후,「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네 번 째 길을 걸었다.
마산시립박물관 앞마당에서부터 길을 열었다.
벌써 네번째라 낯이 익었고, 처음보는 얼굴도 있었다.
성덕암→회원현성→환주산 정상망루→성문→일제기 화장장터를 거쳐 한강 정구를 기려 세운 관해정을 둘러본 뒤 산복도로를 길게 걸어 회원동으로 왔다.
회원동 코스는 화란주택→회원천→정자나무와 비석들→회원동 500번지 골목길→철도시장→구 창신학교 터까지 였고, 이어서 북마산역 터와 노비산을 끝으로 네 번째 일정을 마쳤다.
오후 1시 반에 시작된 도시탐방은 5시 15분, 모두 3시간 45분 걸려 끝났다.
걸은 길은 대략 5-6킬로미터 정도.
스스로 원해 걸은 탓인지, 어느 한 사람 다리 아프다 투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학생, 공무원, 주부, 사업가, 회사원, 각계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고 20대 초반에서 50대 후반까지 연령 폭도 넓었다.
지적 호기심이 많은 탓인지 모두들 관찰과 해석에 열중했다.
선선한 바람에 늦가을 하늘은 높았고, 웃음 섞인 말들이 훈훈하고 즐거웠다.
많은 것을 보았지만 두 가지만 쓴다.
먼저 회원천.
회원성당 앞 회원동 8거리 인근 하천.
허연 폐수가 찐득히 흐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은 역겹다고 했다.
차마 오래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이도 있었고 코를 막기도 했다.
마산시가 야심차게 생태하천을 계획하고 있는 상류다.
하천 전체를 치면 중상류 정도지만 도시지역만 보면 최상류나 마찬가지다.
며칠 전 마산21포럼이 주관한 토론회에서 마산시는 교방천 회원천 삼호천 산호천 광려천 등 마산의 주요 하천을 생태하천으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한 방청객이 발언권을 얻어 ,
“생태하천이 완공되더라도 사실상 생물서식은 불가능하니 사업명칭을 하천정비사업 정도로 바꾸어야 되지 않느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안일한 생각.
상류의 썩은 물이 내려갈 텐데 생태하천은커녕 하천정비사업이라도 제대로 될까?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너도 나도 한마디 씩 했다.
"이렇게 더러운 물이 내려가는데 생태하천이 될까??"
"이것부터 해결해놓고 다른 걸 계획해야지, 어휴~~"
원인은 간단하다. 우수와 오수 분리가 안 되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유이지만 도시의 지하관로가 워낙 복잡해 바로잡기가 어렵다.
몇년 전부터 마산시 전역에 우오수 분리공사를 한다고 했으나 회원천의 수질은 큰 변화가 없다.
어떻게 구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썩은 하천 그대로 두고 생태하천 만든다며 하류에서 공사를 시작할 런지.
상식만으로 알 수 있을 터.
상류가 썩었는데 하류에 생태하천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오래 전, 마산 하천을 두고 쓴 글 한 조각을 소개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별 달라지지 않았다.
························
그것은 시궁창이었다.
10분 정도 걸으니 역한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났다.
슬펐다.
썩은 하천냄새 때문에 구토가 나는 도시에 살고 있는 내가 슬펐다. ························
오늘도 마산시 청사 정면에는 이 도시를 ‘세계 일류’로 만들겠다는 구호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을 터.
세계 일류, 그 환상의 야무진 꿈을 생각하니 더욱 슬펐다.
························
<경남도민일보 칼럼, '슬픈 도시' 중 / 2003년>
다음은 회원동 500번지, 그 골목길.
폭 1-2미터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걷기 힘든 길.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집안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길이 신기해 입술을 뾰르퉁 모으기도 했지만 내게는 오래된 과거의 익숙했던 놀이터였다.
공동화장실을 지나 교회 담장을 돌고 공동우물터, 대장간, 두부공장, 이발관, 구멍가게를 지나 내가 살던 옛 집에도 가보았다.
일부러 간 건 아니고 탐방코스 중 자연스레 지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직접 지은 집.
30년간 살았으니 내 마음의 뼈와 살이 묻어있어 결코 잊지 못할, 잊어서도, 잊을 수도 없는 좁은 골목과 낮은 집,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나서 자랐고, 결혼하여 신방을 꾸몄고, 지금은 서른하나 스무아홉이 된 두 아이를 낳고 길렀던 집이다.
이 집과 골목길, 그리고 어린 시절에 대해 쓴 글이 두어 편 있다.
경상남도 마산시 회원동 500번지.
내가 태어난 곳입니다.
빈민촌이었지만 부끄럽지 않은, 내 삶 전체에 축축이 젖어 있는 몸과 마음의 고향입니다.
························
회원동 500번지는 일본 군용창고와 마구간이 있던 곳인데, 해방 이후 마산항을 통해 일본에서 귀환자들이 떼로 몰려와 거주하면서부터 사람 사는 동네가 되었습니다.
························
10대가 되도록 회원동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산자락 대밭의 후드득거리는 바람 소리를 헤치며 다녔고, 해가 떨어지고 나면 어둑어둑한 골목길에서 편을 갈라 연탄 부스러기를 던지며 싸움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
자장면을 처음 먹어본 게 고등학교에 가서였으니 중학교에 다니도록 나의 세계는 회원동 작은 공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책 읽어주는 남편' 중 / 2009년>어릴 때 살던 집을 떠난 지 30년이 되었다.
나는 좁은 골목길 끝의 낮은 양철지붕 조그만 집에서 30년 쯤 살았다.
흙 놀이에서 축구경기까지 가능했던 그 골목길은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회상 장치다.
전에는 컬러였는데 지금은 흑백으로 보인다.
나는 일 년에 두어 번 쯤 그곳을 간다.
혼자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내와 함께 가기도 하는데 그때는 아내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 토막 해준다.
내 어린 날의 흔적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그 작은 집과 좁은 골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공간이다.
재개발로 내 추억의 장소가 사라질 것이라 걱정이다.
장소란 바로 이런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오래 전의 추억을 만나게 되는 곳. 과거 속에서 지금의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문신예술과 도시의 장소성' 중 / 2007년>
5시 15분.
탐방이 끝났다.
노비산 언덕에 올라 옛 시인의 노래를 불렀다.
<옛 동산에 올라 >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려
지팡이 도로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려
지금은 주거지가 되어버린,
그래서 그 땅에 서린 역사도 문학도 추억도 모른 채 아스팔트 포장길을 무심코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곳.
옛 동산과 그 큰 소나무도 없어졌고 키를 재려는 새 솔도 남아 있지 않다.
스토리텔링이라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하니 아쉽다.
사람 없는 노비산 언덕,
늦가을 저녁 바람이 스산했고 발 아래 도시는 회색빛이었다.
'찾아간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섬유왕국 '한일합섬'이 남긴 교훈 (30) | 2010/01/07 |
|---|---|
| 내서읍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15) | 2009/12/13 |
| 마산시 회원동 500번지 (12) | 2009/11/30 |
|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4) | 2009/11/25 |
|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6) | 2009/11/16 |
| 마지막황제 순종의 행차길 (0) | 2009/10/26 |
-
-
이진규 2009/12/01 09:35
회원천이 저토록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무심했던 마산시민이 도시탐방대의 걸음뒤에서 고개를 떨굽니다.
역사와 문화와 환경을 아울러 관찰하고 고민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도시탐방대 화이팅!!! -
구선미 2010/04/13 17:45
아! 내가 살던 회원동500번지. 초,중,고를 다니면서 친구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내 고향,
내 집... 지금은 결혼한지 18년째,이제 내가 내아이를 위해 서울 강남에 살고 있네요.
다시 한번 가보고싶은 회원초등학교길, 친정부모님이 살고 계셔도 마음놓고 가지를
못하네요. 사진을보니 가슴한쪽이 아련합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
-
-
『시비(是非)를 던지다』
제목이 좋았습니다.
양시(兩是), 양비(兩非)가 아니라, 옳고 그름(是非)을 따져본다는 의미의 제목이 좋았습니다.
저자는 한문학자 강명관 교수입니다. 젊었을 때는 민주화니 운동권이니 하며 한 가닥 했던 분인 듯했습니다.
서너 페이지가 한 꼭지로 된 조선시대생활풍속사를 엮은 책입니다.
글이 참 맛깔스러웠습니다.
조선시대의 이야기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삶과 연관시킨 점이 좋았습니다.
중앙의 지방 차별, 거짓과 허위, 허망한 권력, 모순된 착취구조, 왜곡된 역사 등 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난마들이 줄줄이 엮여 나옵니다.
머릿속에는 있었지만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들을 낱낱이 밝혀낸 책이었습니다.
····································
지방에 대한 차별의식은 어느새 지방 사람인 나의 언어와 심성에까지 들어와 있다.
지방대학은 별 볼 일 없는 이류대학이란 말이요,
“지방방송 꺼라”는 말은 부질 없는 소리 하지 말란 말이요.
지방기업이란 보잘 것 없는 기업이란 것이다.
‘지방’은 모든 이류이고 보잘 것 없고 무시해도 좋을 것들의 대명사가 되었다.
····································
대한민국 지도에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부산, 울산이 있지만, 그건 지도상에만 있을 뿐이고, 실제로는 없다.
실제로 있는 것은 서울과 지방 뿐이고, 그 지방은 서울의 ‘식민지’일 뿐이다.
인재를 빼앗기고, 돈을 갖다 바치고, 서울의 물건과 문화를 소비하는 서울의 식민지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인 것이다.
···································
역사인식에 대한 이야기도 통렬했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며 흠모해 마지않는 광개토대왕에 대한 부분입니다.
····································
18세에 즉위하여 39세에 사망한 그가 20여 년간 한 일은 오직 전쟁이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힌 것이 그의 업적인 것이다.
그 영토는 비문에 나와 있다.
‘공격해서 격파한 성이 64개였고, 마을이 1천 4백 개’였다.
이 외에 다른 업적이랄 것은 없다.
비문을 읽지 않아도 우리는 국사교육을 통해 그가 ‘널리 땅을 확장한(廣開土)’ 왕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
이상하지 않은가.
왜 고구려는,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영토로만 기억 것인가.
기나긴 시간 동안 수많은 인간이 살았던 고구려 사회가 왜 국토의 넓이로만 기억되는 것인가.
····································
한국은 식민지를 경험했으되, 제국주의적 욕방을 근원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도리어 제국주의적 영토욕을 내면화했던 것이다.
····································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영토가 넓었다는 것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질타하는 이 부분에서는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바로 내가 그렇거든요.
공부라면 단 한 번도 남에게 뒤떨어본 적이 없는 친구.
최고에 최고의 학교를 거친 그 친구가 우리 학계의 좁고 왜곡된 벽을 넘지 못해 50이 넘은 지금도 대학 강사 신세를 못 벗어난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가짜와 위조를 싫어하지만, 졸업장이라는 종잇조각이 없으면 이 사회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사회구조는 더더욱 가증스럽다는 부분에서는 분이 끓었습니다.
대중을 선동해 관리의 잘못을 따지고 들었던 불평 많은 이계심을 두고 오히려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역설한 다산의 모습을 읽을 때는 그가 우리 조상 중 한 분이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는 게 시비(是非)가리는 것일 터.
건강한 사회는 시비가 정확하게 가려져야 하는 법.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친일인명사전’과 ‘친북인명사전’을 둘러 싼 싸움과 싸움이 시비를 가리기 보다는 양시(兩是) 양비(兩非)에 익숙함을 잘 말해줍니다.
시비 가리지 못하게 하는 사회, 정상적인가?
시비 가리자는 사람더러 ‘골치 아픈 사람’ ‘말 많은 사람’ 한 걸음 더 나가 ‘반대만하는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사회, 정상인가?
윗사람에 그저 순종하고 힘에 굴종하고 제 목소리는 죽여야만 ‘된 사람’으로 칭찬 받는 사회, 정상인가?
이런 사회 정상인가, 망쫀가?
강명관 교수가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책 읽어주는 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꿈의 도시 (2) | 2011/01/05 |
|---|---|
| 시비(是非)는 가려야 (2) | 2009/11/28 |
| [동영상] KBS 아침마당 (2009년 10월 20일 방송분) "책 읽어주는 남편 허정도" (0) | 2009/10/27 |
|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 (0) | 2009/10/24 |
| 책읽어주는 남편, KBS 아침마당 출연 (4) | 2009/10/19 |
| 집에 일찍 들어가 아이와 함께 놉시다 (0) | 2009/10/15 |
삼광청주 공장전경 (출처 : 마산시청 포토자료실/역사)
그후 마산 역사사진을 정리하다가 혹시나 해서,
대조해보니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굴뚝과 건물의 지붕선을 보면 정확히 동일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 '빙고',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위 사진에서 모서리 가로수를 지우면 정확히 같은 각도에서 본 사진이 된다. )
유장근대장 촬영 (09.10.24)
- 이건물은 1925년에 청주양조면허를 얻어 마산부 통정(장군동)에서 창립한 千島園 주조장으로, 창업주는 遠勝豊吉, 명주 彌生의 생산량은 연간 500석 내외였다고 한다.
(마산상공회의소 100년사)
- 천도원 주조장은 옛 상호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삼광청주로 바뀌었으며, 해방이후 적산 청주공장들은 연고자들에게 불하하였는데, 손삼권씨가 인수하여 운영하였었다.
삼광 청주는1962년 기존 업체들이 문을 닫아 삼광과 백광 2개 양조장만이 마산에서 청주을 생산하였던 양조장이다.
삼광청주 상호 (사진출처 : 마산문화원 전시사진)
- 1971년도에 청주 제조업체는 백광, 신광, 삼광 등을 비롯한 5개의 양조장이 향토 명산의 청주를 제조하였으나, 1973년 정부의 군소 주조업체의 통합조치 이후 삼광주조장은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백광 양조장 하나만 생산을 계속 하다가 이마저 생산을 중단하고 문을 닫게 되어 酒都馬山의 명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999년 경남신문에 인터뷰한 손삼권씨는 45년 10월 지시마엔 양조장을 당시 일본인 사장이던 엔도(遠藤豊吉)로부터 인수, 합포구 장군동 3-13번지 공장에서 삼강(三江)양조장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본공장 이름을 그대로 쓰고 술 이름도 「무궁화」로 정했으나 「나라 꽃을 마시면 되느냐」는 주변의 지적에 따라 공장은 「三江」(대동강 한강 압록강), 술 이름은 「三光」(해 달 별)으로 바꿨다. 45년 11월부터 청주를 만들기 시작했으니 광복이후 한국사람으로서는 가장 먼저 청주를 만들었다 한다.
- 근대문화유산 목록화사업 (경상남도. 2004)자료에 의하면,
이 건물은 1945년에 건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공장은 블록조 단층건물로 중앙에 벽돌조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주변의 주택은 2층 목구조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중정으로 열린 마당과 그 둘레에 2층의 주택들이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경남신문 인터뷰 시기인 1999년 에서 경남의 근대문화유산리스트 정리시기인 2004년 사이에 유명을 달리한 것 같다. 그래서 목록화리스트에서 건물의 소유는 작고한 손삼권씨 앞으로 되어있었다.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손삼권씨가 해방이후 적산가옥을 인수한 것을 감안할 경우,
1925년 천도원주조장 설립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현재 이건물은 개축되어 다가구 형태의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으나, 그나마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이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경남의 근대문화유산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것을,
이번 도시탐방대를 통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건물은 없어지더라고 기록은 남겨져야 된다.
물론 이 건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한 개인의 기억에 남아있기도 하고
어느 신문 한켠에 남아있을 뿐이다.
지역사에서 이러한 양조 변천사와 근대 건축물에 대한 자료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것 같다.
소홀히 취급하기 쉬운 미시사 부분의 정리를 통해,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문화시설 인프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문화도시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본 건물은 진주가도변에 있는 건물로 주소는 장군동3가 1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감춰진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잊혀진 마산의 청주공장을 찾아서 (2) (3) | 2010/01/21 |
|---|---|
| 잊혀진 마산의 소주공장을 찾아서(1) (12) | 2010/01/12 |
| 마산 청주 주조장의 마지막 모습: 장군동 주조장의 정체 ? (13) | 2009/11/26 |
| 산호동 효자각의 건축적 가치 (2) | 2009/10/09 |
| 추석에 산호동 효자각을 찾아갔습니다 (6) | 2009/10/06 |
| 추석엔 산호공원 옆 효자비 한 번 둘러보세요 (11) | 2009/10/01 |
-
옥가실 2009/11/26 12:57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자료입니다.
또 그 당시에 사진을 찍던 이와 최근에 사진을 찍은 이의 생각과 구도가 같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그게 누구라고는 말 못하겠구요^^
한가지,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1974년 마산상공회의소 인명록에 보니, 백광(이성훈, 마산시 홍문동 9, 1973.10월 설립, 종업원 33명), 신광(최동연, 마산 산호동 128, 1965.12.13일 설립, 종업원 10))은 있는데, 삼광은 없어요. -
삼식이 2009/11/26 13:32
삼광이 73년에 문들 닫고, 백광만이 남았다가 곧 없어졌다고 합니다.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차 탐방사진은 우리카페에서 복사를 했는데, 촬영자는 미처 확인을 못했읍니다. 확인후 수정하겠읍니다.)
가능하면 개항이후 주조장의 위치 및 흔적들을 한번 정리하다보면
그 실마리가 풀릴것 같습니다. -
-
허정도 2009/11/26 13:59
어때요?
이 건물은 원형도 크게훼손된 것 같지 않은데 '마산주류박물관'으로 하는 것이.
즉석에서 청주 만들어 판매도 하면 수입금도 꽤 짭짤할 것 같은데. -
-
-
최정건 2010/01/13 01:04
허정도 님 제가 그 건물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이
예전에 철도청 관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세 번째 참석 후의 글이다.
원마산(마산포)에 자연취락이 형성되면서 생긴 ‘길’에 대한 이야기다.
1760년, 마산창(馬山倉)이 설치된 후 마산이 도시 형태를 띠면서 도시공간의 성격도 형성되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마산창 주변은 공공업무지구로, 현재 황금당 옆 골목길 주변은 상업지역으로, 동성동과 오동동 즉 코아양과점 뒤편 일대는 배후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는 루쉰의 말처럼,
마산포에도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자연취락 특유의 좁고 꾸불꾸불한 ‘길’이었다.
<옛 마산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골목길>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원마산의 좁은 골목길들은 멀게는 250년 가깝게는 200년이 족히 된 마산사람들의 ‘길’이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곳 사람들이, 때로는 조창 쪽으로 때로는 해변의 선창 쪽으로 아침저녁 부지런히 다녔던 바로 그 길이다.
단지 길로서만이 아니라 마산 선인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남성동 성당 옆 좁은 내리막 길도,
마산사람 누구나 친숙한 전설적인 떡볶이가게 ‘복희집’ 앞길도,
삼겹살로 유명한 삼도식당 골목도,
홍화집과 골목식당 길도, 아구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복잡하게 얽혀있는 동성동 좁은 골목길도,
옛 마산사람들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는 것만큼 느낀다’고 했는데,
이 좁고 보잘 것 없는 골목이 ‘조선시대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사람들은 무심코 길을 지난다.
도시탐방대원들과 골목길 내력을 이야기하고 복원도와 비교확인도 하면서 이 도시의 지난 시간을 맛보며 함께 걸었다.
간간이 들리는 옅은 탄성과 함께 탐방의 즐거움이 거리를 메웠다.
<마산사람들의 자랑이었던 「원동무역」>
탐방길 시작한 후, 마산창(馬山倉), 매립 전 해안선, 어시장의 진동골목, 대풍골목, 서굴강, 동굴강을 지나 도착한 곳은 원동무역주식회사.
원동무역은 1919년 9월 독립지사 옥기환 선생과 명도석 선생이 마산 최초로 설립한 회사다.
현재 남성동 91-1번지에 남아 있는 사옥은1927년 8월에 착공해 1928년 4월에 준공한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이다.
영욕의 세월을 지내고 외피만 바뀐 채 오늘도 말 없이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설계한 사람이 누구이지 시공한 이는 또 누구인지 알길 조차 없지만 세련된 근대미의 격조 높은 이 건물은 일제기 마산포 사람들의 자부심을 한껏 채워준 건물이었다.
이 회사에서 남긴 이익금의 일부가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로, 상해임시정부로 건너갔다고 한다.
옥기환 선생은 해방 후 초대 마산부윤(마산시장)을 지냈고, 허당 명도석 선생은 건준에 참여하는 등 해방 후에도 많은 일을 했다. 봉암로에 가면 허당 선생의 추모비도 있다.
마산이 배출한 주요인물 중 친일이니 친독재니 궂은소리 때문에 기념사업에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분의 삶에는 흠결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암흑기의 자랑스러운 마산 어른이시다.
<원마산 복원도 제작>
10여 년 전, 도시연구를 하면서 원마산(마산포)의 도시형태를 복원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사정지적도(査定地籍圖)를 이용해 분할과 합병으로 변형된 지적도의 원형을 추적해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난했던 작업이 끝난 후 복원도를 들고 시내로 나갔다. 실제상황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현장 확인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골목골목 다니며 현장과 도면을 비교하면서 두 번 놀랐다.
도면상 복원한 작업의 정확도에 스스로 놀랐고, 복원도에 나타난 그 복잡한 골목길들이 그때까지 대부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난 토요일, 도시탐방대가 걸었던 길은 바로 그 때 확인되었던 길들이었다.
조그맣게 복사된 복원도와 창동 남성동의 골목길을 대조하면서 탐방대원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도 즐거웠다.
뒤늦게 합류한 ‘창동의 산 역사’ 이승기 선생님의 창동과 극장과 영화에 읽힌 이야기가 분위기를 한층 더 띄웠다.
듣는 이와 말하는 이 즐겁기는 매한가지, 지나간 마산이야기에 토요일 오후가 금세 지나갔다.
<도시에서 역사란?>
마음만 먹으면 현대기술로 어떤 도시라도 만들 수 있다.
넓은 도로를 뚫고 번쩍번쩍한 건물도 짓고 키 큰 나무도 얼마든지 심을 수 있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를 급조할 수는 없다.
때문에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하게 보존해야 하고, 다음 세대에 잘 넘겨주어야 한다.
웬만큼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여행이란 것이 대부분 도시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의 어떤 도시에서는 심지어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인 조계지까지도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도시의 역사는 단지 옛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그 도시의 소중한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서부 개척시대의 술집 따위들까지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집주인에게 국가재정까지 지원하면서 함부로 바꾸지 못하게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산 도시의 역사를 모두 복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사를 가진 도시에서 어떠한 역사적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이를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는 것은 심각한 도시적 비극이다.
창동과 동성동 일대에 남아 있는 골목길들은 자연취락을 원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며 마산의 도시역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곳이다. 다른 도시에서는 도저히 이런 길을 만날 수 없다.
혹자는 꾸부러지고 좁은 골목길이 수치스러운 전근대적 모습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오늘의 마산이 있기까지 마산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았던 발자국이며 고금 모든 마산 사람들의 호흡과 땀이 녹은 생생한 기록이다.
그 역사적 가치는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한때 번성했던 마산 오동동이 최근 들어 점차 쇠퇴해지고 있는데 이곳을 살릴 길이 이 오래된 골목길 속에 묻혀있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자.
250년이라는 긴 시간의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는 ‘골목길’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서 하루저녁 친구와 즐길 것인지.
'찾아간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섬유왕국 '한일합섬'이 남긴 교훈 (30) | 2010/01/07 |
|---|---|
| 내서읍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15) | 2009/12/13 |
| 마산시 회원동 500번지 (12) | 2009/11/30 |
|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4) | 2009/11/25 |
|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6) | 2009/11/16 |
| 마지막황제 순종의 행차길 (0) | 2009/10/26 |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 참여, 세 번째 도시 탐방에 나섰다.
낯익은 사람, 낯선 사람 모두 30여 명이었다.
평안안과 건너 편 창동 입구에서 걷기 시작해 처음 머문 곳이 마산창,
시간은 250년 전 영조 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
마산포는 고려시대 조창이었던 석두창과 고려 말 몽고군의 일본정벌 시도로 북적인 적도 했으나 조선시대 중기에는 조용한 포구였다.
마산포에 다시 사람이 모인 것은 대동미의 수납과 운반을 위한 조창, 즉 마산창(馬山倉) 때문이었다.
조용했던 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정기시장이 섰고, 전국의 다양한 상품들이 몰려왔다. 조창과 관련있는 관원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도 마산포를 찾았다.
그리고 이들과 마산포 인근주민들의 왕래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민가가 들어섰다.
동성·중성·오산·서성·성산·성호 등 지금도 동명으로 사용되는 6개리가 그 때 형성되었다.
이처럼 마산창은 마산포의 중심이자 마산포를 도시화시킨 발원지였다.
오늘의 마산도시를 있게 한 역사적인 공간이다.
〈마산창과 유정당〉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 파출소 일대, 지금은 세 블록으로 나누어진 직사각형 1,500여 평의 부지가 마산창이 있었던 유서 깊은 터다.
1760년 영조가 대동법을 시행하며 세운 경남지역 두 조창 중 하나다.
규모와 위상에서 당시는 물론 근대 이전까지 마산인근 최상위의 관아였다.
1899년 마산이 개항되자 개항업무를 집행하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그 보다 일 년 전인 1898년부터는 마산포우편물취급소로 일부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창동(倉洞)이란 동명도 마산창의 창(倉)자(字)에서 따온 것이다.
마산창의 본당은 「유정당(惟正堂)」이라 불렀다.
마산창 내 8채 건물 중 중심건물이며 세곡미 호송관으로 조정에서 내려온 조운어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유정당이 어떤 건물이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두 글이 있다.
건물 준공 후 이곳을 찾은 창암(蒼巖) 박사해와 간옹(澗翁) 김이건의 시(詩)다. 김이건의 詩 중 양창(兩倉) 혹은 좌창우고(左倉右庫)는 마산과 진주의 두 조창을 말한다.
漕倉 惟正堂 朴師海
坐 來 新 棟 宇 새로 지은 집에 와 앉으니
蕭 灑 客 心 淸 나그네 마음 상쾌하게 맑아지네.
海 色 楹 間 入 바다 빛은 난간 사이로 스며들고
島 霞 席 底 生 섬 노을은 자리 밑에서 일어나네.
倘 非 經 緯 密 경위가 치밀하지 않았더라면
那 得 設 施 宏 어찌 규모가 넓었으리오.
南 路 知 高 枕 남쪽 지방이 태평함을 알겠거니
蠻 氓 可 樂 成 변방 백성들이 즐겨 지었다오.
送漕船歌 金履健
․․․․․ ․․․․․
始 建 兩 創 儲 稅 穀 비로소 두 조창 지어 세곡을 저장하고
繼 造 衆 艦 艤 海 澨 이어 많은 배 건조하여 바닷가에 대었다네.
暮 春 中 旬 裝 載 了 늦은 봄 중순에 세곡을 다 싣고는
卜 日 將 發 路 渺 渺 좋은 날 받아 떠나려니 길은 아득도 할 사
玉 節 來 臨 燈 夕 後 저녁 등 밝힌 뒤 옥절이 임하고
州 郡 冠 盖 知 多 少 각 고을 관리들 많이도 모였는데
翼 然 傑 構 究 兀 起 나를 듯 헌걸하게 우뚝 솟은 집은
左 倉 右 庫 干 彼 涘 저 물가의 좌창과 우고라네
․․․․․ ․․․․․
이 두 편의 시에 의하면 유정당은 규모가 상당히 컸을 뿐 아니라 웅장했고 시공 수준이 높아 섬세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전망을 가졌다니 아마 대청에 앉아 마산 앞바다에 둥실 떠있는 돝섬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복원도에 의하면 유정당은 현재의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고 마산창의 정문은 현 중화요리점 북경성 자리, 거기서부터 남성동 성당까지는 해변공지, 남성동우체국 부지가 서굴강 즉 바다였으니 당연히 마산 앞바다가 보였을 것.
기가 막히는 그림이다.
아쉬운 것은 유정당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그간 연구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겨우 『창원보첩』에 대청(유정당) 7칸․동별당 6칸․서별당 5칸․동고 15칸․서고 13칸․좌익랑 2칸(추정)․우익랑 2칸(추정)․행랑 3칸으로 총 8동 53칸 정도라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조창부지는 1910년대 초 일본인들에 의해 세 개의 블록으로 나누어지면서 현재의 도로가 생겼다.
유정당은 그시기에 헐렸다. 지어진지 150년 후의 일이다.
1918년,
그 자리에는 벽돌조 1층 근대식 건물의 조선식산은행이 들어섰고 이 건물은 현재의 건물을 짓기까지 사용되었다.
지금의 큰크리트조 제일은행 건물은 1970년대에 지었다.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이 쓴 『마산항지』에 의하면 개항 직후인 20세기 초, 조창 주변은 좁은 길가에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상점으로 가득 차있었으며 주위 안팎에 공덕비를 비롯한 석탑이 많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현재 사용하는 창동이라는 지명은 해방 후에 생겼는데 조창과 관련한 송덕비로 추정되는 이 석탑들 때문에 일제기에는 이곳을 석정(石町)이라 불렀다.
마산창에서는 8개 읍, 즉 창원·함안·칠원·진해(지금의 진동)·거제·웅천·의령 동북면·고성 동남면에서 보내온 대동미를 수봉(收捧)하였다.
모두 9,215석(石) 5두(斗)였다.
초 봄에 마산포를 출발한 조운선은 거제 견내량 → 남해 노량 → 전라도 영암 갈두포 → 진도 벽파정 → 무안 탑성도 → 영광 법성포 → 만경 군산포 → 충청도 태안 서근포 → 보령 난지포 → 경기도 강화 이고지포 → 한강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에 6월 하순 경 도착하여 임금께 세곡을 바쳤다.
사용된 조선은 판선(板船)이었고, 조세징수와 감독을 관장한 도차원(都差員)은 창원부사, 영운차사원(領運差使員)은 구산첨사였다.
조선(漕船)이 떠날 때는 풍악을 울리고 선원들에게 술을 대접했으며 대포를 쏘아 장도(壯途)를 축하했다.
그 축하의 자리가 지금의 남성동성당 터 정도 아니었을까?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창동(倉洞)이란 지명과 이곳이 마산창 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올드시티(Old City)의 정체성과 한 도시공간에 녹아 있는 역사와 문화의 말 없는 몸짓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탐방이었다.
늦가을 토요일 오후,
무심한 길과 표정 없는 건물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그것들은 지금도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게 해준 소중한 체험이었다. <끝>
<부림시장에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 함께 '찰칵'>
'역사속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11) | 2010/04/08 |
|---|---|
| 오래된 사진 두 장 (13) | 2009/12/08 |
| 마산도시의 발원지 「마산창(馬山倉)」 (11) | 2009/11/23 |
| ‘마산’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6) | 2009/11/09 |
| 술과 꽃의 도시 (4) | 2009/11/02 |
| 마산의 해안선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0) | 2009/09/07 |
-
천부인권 2009/11/23 07:18
마산은 옛것을 뜨올릴 수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창원시는 그런 그림 자체를 떠올리기가 힘듭니다.
개발이란 이름은 사람의 추억을 파괴합니다. -
-
林馬 2009/11/23 19:41
정말 대단한 발견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요?
헐고 부수어 새로운 도시를 만들것이 아니라
역사문화자산을 찿아 보존하여 역사성을 자랑으로 여기며
관광자원으로 삼는 것이 더 나은 지역사랑이 될것이요.
시민이 먹고 사는데도 더 기여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모델을 어제 벌교와 순천만을 둘러보고
뼈저리게 느끼고 돌아 왔습니다. -
김정수 2009/11/23 22:57
정말 대단한 마산의 재발견입니다.
탐방대에 회원가입해놓고 한번도 못갔네요.
그날 은행나무단풍을 찍고 있었지요.
이 앞주도 그랬고...
12월에는 시간내서 가봐야겠습니다. -
이은진 2009/11/24 13:00
지도와 같이 놓으니,
아주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 프린트 해둘려고 하니,
하는 방식이 없군요.
아쉽습니다.
요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있는데
그저 그리스 부근의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인데
전세계의 사람들이 읽고
관광을 가고는 하는군요.
우리와 지형이 비슷한 섬이 많고 해안이 복잡한 곳에서
우리도 발굴하면 많은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
김판균 2010/01/07 12:09
무학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마산은 천혜의 입지조건을 가진 도시라는걸 느낍니다.
강과 바다가 접하며, 삼면이 산을 이루고, 바다엔 돝섬이 파도를 막아주니...
저의 어릴적 기억으론 마산이 전국 두번째가는 어시장으로 알고 있으며,
당시 마산포구엔 수백척의 배들이 정박을 하고, 진해,거제 외 남해안일대 고깃배들이
수없이 드나들던 곳...청과시장이 같이 있어 창원,진동,함안 외 지역의 농산물이 전부
마산으로 모였던 그런 도시가 마산인데...
어쩌다가...지금의 마산으로!!!!!!!!!!!!!!!!!!
도시 이야기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낡고 오래된 도시공간을 되살리거나 이미 죽었던 옛 도시의 영광을 부활시키는 도시재생프로그램은 현대도시설계의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
잿빛 벽돌의 폐허였던 화력발전소를 한해 관광객 400만 명이 찾게 만든 런던의 ‘테이트모던미술관’.
오래된 철도역을 재활용하여 ‘오르세’라는 이름의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변모시킨 파리.
설탕공장을 개조한 이탈리아 파르마의 ‘파가니니 음악당’.
모두 재생의 비전으로 되살린 현대도시 최고급 보석들이다.
기타큐슈의 모지항(門司港)도 그렇다. 재생에 성공하였다.
마산보다 10년 빠른 1889년 개항한 모지는 한 때 국제무역도시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던 도시다.
은행, 무역회사, 호텔, 대형점포 등 근대산업을 상징하는 대형건물들이 해안을 가득 메웠던 도시다.
- 마산을 생각하며 모지로 가다 -
신문사 대표직 퇴임 후, 부관페리로 밤의 현해탄을 건너 모지로 갔다. 오래 미뤄온 계획이었다.
모지항은 큐슈의 끝자락에 붙어있는 작은 항구다.
간몬해협을 사이에 두고 시모노세키와 마주보고 있다.
마산과 닮은 항구였다.
항구의 지난 과거가 닮았고 바다와 산, 자연이 닮았다.
건너보이는 시모노세키와 오른쪽 오사카로 나가는 간몬해협 위의 간몬대교는, 건너보이는 창원과 오른쪽 거제로 나가는 마산만 위의 마창대교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다른 점이 더 많았다.
바닷물의 맑기가 달랐고, 사람의 손길이 닿은 건물들과 시설들이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아스팔트 직선도로에 앉을 곳 하나 없는 해안과 오목조목 물터 만들고 데크(Deck)며 잔디며 벽돌이며 벤치며 사람을 유인하는 해안이 달랐다.
문을 연지 100년이 넘었지만 시간의 흔적을 알 수 없는 마산항과 곳곳에 지난 세월 그 번성했던 흔적을 간직한 모지항은 너무 달랐다.
두 도시 모두 영화와 퇴락의 부침을 겪었지만 모지는 개안하여 살아났고 마산은 정체성조차 알기 어렵다.
모지는 희망을 얘기하지만 마산은 드디어,
'우리 힘만으로는 희망이 없다, 옆 도시와 합쳐버리자'고 합의되는 도시가 되고 말았다.
옛 정취를 되살려 놓은 뒤 모지사람들은 이 새 항구를 ‘모지 레트로’라 이름 지었다.
‘레트로(Retro)’는 영어 ‘Retrospective(회고적)’의 약어다.
한 때 번성했던 항구의 풍경이 회상되는 곳이라는 의미다.
모지항은 ‘역사와 자연’을 키워드로 해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하였다.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모지항역’을 보존하기로 결정하면서 시민들이 직접 나서 ‘모지항보존회’를 조직, 보존기금까지 모금하였다.
그 후,
유럽풍의 모지호텔, 오사카 상선빌딩, 옛 모지항 세관건물, 창고 벽을 그대로 살린 주차장과 미술관, 지난 시절 번성했던 모지항 원래 경관과 항구의 흔적들을 그대로 재생시켰다. 아인슈타인이 묵었던 미쓰이구락부도 있다.
랜드마크 역할은 일본이 자랑하는 건축가 구로가와 기쇼(黑川紀章)가 설계한 전망대가 맡았다.
해변 벤치에 앉은 중년부부의 평화로운 모습이 주변 전경과 잘 어울렸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블루윙모지였다.
블루윙모지는 보행자 전용 도개교, 배가 지날 때마다 다리가 번쩍 들린다.
밤의 조명도 아름다웠다.
보고 싶었던 것들을 실컷 보고 시모노세키로 건너왔다.
가라토 수산시장 데크에서 바다건너 모지를 보며 두 항구를 생각했다.
해풍 건강하게 마시며 바닷길 걷고 싶어서,
키 큰 나무 사이로 걷고 뛰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 보고 싶어서,
··························· 모지를 바라보며 마산을 생각했다.
'배우는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밀턴 케인스' - 내일의 도시 (0) | 2009/12/10 |
|---|---|
| 대박가능성인가? 지속가능성인가? (10) | 2009/12/02 |
| 모지를 바라보며 마산을 생각하다 (11) | 2009/11/20 |
| 특별시 서울의 특별한 녹지사업 (4) | 2009/10/28 |
| 행정통합의 역발상 슬로시티를 아시나요? (8) | 2009/10/17 |
| 폭우도 대비하고 빗물도 활용하는 일거양득 (3) | 2009/07/31 |
-
-
-
-
주여진 2009/11/22 00:09
저도 허정도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것은 처음엔 새것이였죠...하지만 모든것에는 시간이 따르는 법이죠.
마산에는 아직도 흙으로 만든 집이 있답니다.
새것만 고집하지 말고 오래된 것을 어떻게 하면 재활용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할 시점인것 같습니다.
말로만 환경을 외치지 말고...진정한 환경을 위해 무엇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아야겠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마산은 어느 도시 보다 문화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건물은 어는 도시에도 있는법...
오래된 것, 추억에 잠들어 있는 것들을 찾아 시대별 마을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예를 들어 반월동이나 문화동를 60년대 모습을 간직한 마을로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게 되면, 세트장을 새롭게 만들기 보다는 있는것에 조금만 첨가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너무 개인적인 제 마음을 늘어 놓았네요...
즐거운 걷기를 방해하는 요소 중 첫번째는 아마 자동차일 것이다.
주차된 차든, 움직이는 차든 보행자가 알아서 비켜가지 않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것이 현실이다.
보행로와 차도가 분리되지 않은 도로에서 보행자의 지위는 제일 아래이다.
자동차 못지 않게 걷기를 방해는 것은 길에 내어놓은 온갖 장애물 들이다.
영업을 위한 도구부터 자기차의 주차공간을 확보하기위한 가지각색의 구조물까지 종류만해도 손에 꼽기 힘들 정도다.
이러한 장애물들은 보행안전상의 문제 뿐 만 아니라, 도시 미관을 저해하고,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갈등을 일으킨다.
엄염한 불법이지만 단속의 손길은 멀다.
자동차 피하랴, 장애물 피하랴 보행자는 위태롭다.
문제점을 한번 파악해 보고자 '의식적으로' 마산 회원동과 석전동 일대를 걸어보았다.
평소에 걷기를 좋아하지만 두시간도 채 못되어 피곤과 짜증이 몰려왔다.
아마 걷기 싫은 길만 골라 걸어서 그럴것이다.
걷기를 방해하는 온갖 장애물이 거리곳곳에 있었고 그 종류도 다양해 흥미로울 지경이었다.
주인이 사용할 잠시를 위해 온종일 도로를 막고선 장애물들을 종류별로 분류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 편집해 보았다.
기성품형
주로 공사장에서 사용하는 물품들이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눈에 잘띄어 효과가 좋으나 바람이 불면 넘어지거나 날아갈 우려가 있다.
물통형
집에있는 물통을 내어 놓은 경우이다. 노력 대비 효과가 크지만 큰 물통의 경우 쓰레기통으로 오인해 쓰레기가 쌓일 우려가 있다.
생태형
그나마 환경과 미관을 생각하는 양심형이라 볼 수 있다. 때로는 배추등 채소를 길러 먹기도 한다.
영업형
광고나 작업도 하고 자리도 확보하고 일석이조다.
위장형
마치 약초쯤을 말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 접근을 차단하지만, 자세히보면 그냥 말라죽은 잡풀이다. 오른쪽은 오토바이가 주차된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폐차 상태다. 아주 지능적인 방법들이다.
벤치형
때에 따라 앉아 쉴수도 있는 일석이조형이다.
이 이외에도 빨래도 말리고, 차도 못오게 말리는 생활형, 주인이 직접 제작한것으로 추정되는 목재제작형, 옮기고 차댈 엄두가 안나는 중량형 등이있다. 드럼통주인이 힘세고 험악할것같은 분위기를 풍겨 접근을 차단한다.
워스트
그중에 정말 성의도 없고 미관도 심하게 해치는 두 장애물을 워스트로 선정했다. 단속의 손길이 절실하다.
베스트
보방이야기
독일 남서부의 작은도시 보방은 집앞에 주차를 없애는 것을 시작으로 친환경도시를 만들어 가고 있다.
주차는 마을 외곽 공동주차장을 이용하고 마을 내부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차량의 진입을 막는다. 그결과 길은 통로로서의 의미를 뛰어넘어 아이들이 뛰어놀고 마을사람들이 만나는 커뮤니티의 공간으로 재탄생 되었다.
우리의 현실에서 보방같은 도시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건물규모에 따른 법정 주차장을 반드시 설치, 사용토록 하고 구역별로 공공부지를 확보해 주차장으로 활용한다면 지금보다는 나은 보행환경을 만들 수 있을것이다.
대구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지상에는 공원 지하에는 주차장을 만들어 주변의 주차수요를 수용한다.
'오늘의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할아버지의 위험한 선택, 그 까닭은? (10) | 2009/12/22 |
|---|---|
| 걷고 싶은 거리, 걷기 싫은 거리 ③ 광고물로 뒤덮힌 도시 (4) | 2009/12/04 |
| 내 집 앞을 지켜라! (4) | 2009/11/18 |
| 걷고 싶은 거리, 걷기 싫은 거리① (5) | 2009/11/13 |
| 창의적 도전 필요한 민선교육감 (2) | 2009/11/11 |
| 나무와 인간의 아슬아슬한 공생 (6) | 2009/10/30 |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 사진과 지도를 통해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유장근교수의 도시탐방대에서는 신마산의 조계지에 설치된 신작로를 따라서 유서 있는 건물들을 찾아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현재 건물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건물사진과 지도를 통해서 시간속의 여행을 체험하는 색다른 의미가 있을것 같았다.
특히 조계지내에 설치된 세관은 개항과 함께 설치된 시설로서 그 위치가 변천하는 과정과 건축의 이력을 알아보는 것을 통해서, 땅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추어 보고자 한다. 조계지 지도 : 중앙하단부가 해관부지임(1907)
● 남성동 해관업무개시
해관은 110년 전 구한말인 1899년 5월 1일 마산항이 개항장으로 발족됨과 동시에 마산해관지서로로 창설되었다.. 당시 창원감리서가 있던 곳,조선식산은행(이후 제일은행, 1918)
해관세무사는 조선말기 관세의 징수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개항장에 창설하였던 해관의 제반업무를 관정한 기관이다. 이후 해관이란 명칭은 1907.12.16부터 세관으로 개칭되었다.
마산해관지서가 처음으로 그 업무를 개시한 곳은 현재 남성동 제일은행 2층이었다.
마산항 개항에 앞서 1898년 5월에 외부대신 박제순을 통해 마산포 개항사실을 조선 주재 각국공사에게 통고하고 마산포에 있는 유정당에 창원감리서를 설치하였다.
창원부윤 안길수가 개항을 위한 감리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그 별방에 마산해관지서가 남성동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
● 창포동 세관 이야기
이후 조계지내 가로가 형성됨에 따라 창포동 2가-31에서 1901년부터 업무를 보다가 1910년에 마산세관지서 건물을 지어 1946년까지 업무를 본 곳이다.
현재 수협이 있는 자리이며, 접안시설로 목조 잔교가 설치된 위치는 현재 창포경남맨션과 한백아파트 사이 길에 해당되는 곳이다. 당시 조계지 지도를 보면 이 두아파트는 바닷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해관이 있는 창포동은 조계지내에서 당시 영사관(현 경남대 평생교육원)에서 해안으로 향하는 길에 접하는 위치로 맞은편에 우체국(1902년 설립)과 함께 영사관과 업무연락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입지를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06년에 정부는세관의 해륙설비공사를 하기로 의결하고 08년에 추진하게 된다. 당시 공사예산액은 1만 천원으로 부두의 길이84.5M 돌제부 길이10M를 보완하여 등대를 설치하고 여기에 폭이 3.4M 길이9M의 목조잔교를 가설하고 해안의 세관구내를 간조면 위로 3.79M 와 5.76 높이로 땅을 정리하여 창고 1동을 세웠다. 해관 주위는 철조망을 두르고 세관지서장 관사 1동도 신축했다. 마산항 최초의 항만시설이 완성된 것이다.
목조 잔교가 있는 해안 구내의 좌측에 목조 단층건물로서 아연도칠을 한 골함석을 지붕의 50평규모의 창고 한동이 있으며, 건평23평의 2층 목조건물인 세관지서장 관사 1동이 사진 우측에 나타나고 있다. 부두에 전신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은 1911년 이후에 촬영한 듯 하다.
(마산에는 한일와사전기회사에 의해 1911년에 시작됨)
마산해관 목조잔교(1908-1910)
창포동에 소재했던 세관지서는 러시아식 단층 목조건물로서 외벽은 목제 비늘판벽으로 되어 있다. 정면은 포치(현관부분)를 두어서 박공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부산해관 마산지서전경(1910)
현재의 건물은 영생아파트와 1층에 수협이 자리하고 있다. 창포동 해관위치의 현모습
당시 영사관에서 바로 보이는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다.
해관에서 영사관(경남대 평생교육원)을 바라본 모습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이 거리를 지나건만 그 때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런지-----
● 월남동 부두국 이야기
세관은 1943.12.18 폐청되고 조선총독부 교통국 산하에 부두국 소속됨에 따라 월남동에 월남동 46-4번지에 소재하는 부두국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창포동 세관이 이 곳으로 이전한 기록이 없다.
세관은 폐쇄되어도 마산항을 출입하는 모든 외항선들은 입출항은 일본인 마산세관장의 출입을 받아야 했던 것으로 보아, 양측에서 업무를 나누어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월남동 부두국 건물은 목조2층 구조로, 외벽은 목제 비늘판벽으로 되어 있으며 90년대까지 사용되었으나 해안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철거되었다. 월남동 부두국, 1943 부두국 위치의 현재의 모습
현재 타이어상점이 들어서 있다.
해안도로의 확장에 의해 필지가 짤려지고 일부에 건물이 남은 모습이다.
이마저도 주변 아파트 재개발계획에 포함되어 있어 땅의 흔적도 없어질 지경이다.
● 월남동 세관이야기
해방이후 1946.08.19 세관은 월남동2가 47번지(현재 마산식당)로 이전하였다. 여기로 세관을 옮긴 이유는 해방까지 해안의 매립에 부두가 현재의 해안도로변까지 확장됨에 따라 업무기능상 동선의 편의를 고려하여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월남동 마산식당 청사는 해방후 마산교회로 사용하던 것을 미군정청과 마산세관이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여 사용하였고 한다.
그리고 원래의 창포동 해관자리가 59년에 마산교회의 자리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마산교회와 임대차 계약이후 창포동 건물과 교환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마산식당의 건물은 다행히 당시의 구조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현재의 마산식당 모습
건물의 이력을 알아본 바 [근대문화유산 목록화사업] 경상남도, 2004에 의하면 건축물 관리대장상은 1939년 등재되어 있으나 건물은 1905년에 지어진 것을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 개인영업(1939년 기준)에서 이 건물은 일이삼식당이란 상호로 古本露라는 사람이 요리집을 경영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상공회의소 100년사)
특히 이건물은 원형이 잘보존 된 상태라서 누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주변개발에 포함되어 곧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안타까울 뿐이다.
● 월포동 세관이야기
55년 8월 현재의 세관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당시 1부두, 2부두, 중앙부두가 확장된 상태이었으며, 현 청사 부지는 당시에 보세지역으로 1951년 3월 2일 고시되었으나, 보세구역 및 창고는 조국해방에 따른 귀환동포 임시거처로 사용되었다. 임시세관으로 사용된 월포공립초등학교(1955)
당시 임시청사로 사용된 건물은 월포공립국민학교로 사용중이던 건물을 미군이 보급창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955년 4월 19일 징발한 것을 임시청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58년 건축한 벽돌조 2층청사 95년 신축한 현재의 마산세관
건물을 보수해 사용하다 57년 사라호 태풍으로 넘어지자 1958.4.1.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을 신축했다. 지금의 청사는 1995년 1월에 신축한 건물이다.
그나마 현재의 청사마저도 지방합동청사 추진계획에 의해 옮겨질 신세에 놓여 있다.
건물은 가만히 있으려 하나, 사람이 가만히 두지 않는 꼴이다.
신포동 2만㎡ 부지 이달 입찰 공고·내년 6월 착공
2012년 완공…세관·검역소 등 6개 정부기관 입주
마산 서항 지구 해양신도시 조성 예정지에 산재해 있는 6개 정부 기관을 한 곳으로 이전시키기 위한 지방합동청사가 신포동 1가 78 일대 2만6155㎡에 2012년까지 들어선다. 마산시는 3일 국비 482억원을 투입해 건물 연면적 2만4600㎡ 규모의 지방합동청사를 내년 6월 착공, 오는 2012년 3월 준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건물과 땅의 흔적들을 생각하며
한 건축물의 110년간의 이동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사람과 같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동을 하게 되고 다양한 건물의 형식을 통해 변모하는 것을 보았다.
세관건물은 물리적인 위치의 변경을 가지게 된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한 장소에서 지어지는 건물의 수많은 흔적들도 누군가는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화산재에 묻혀있던 폼페이라는 도시를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독일의 요한 빙켈만 같은 고고학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찾아간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섬유왕국 '한일합섬'이 남긴 교훈 (30) | 2010/01/07 |
|---|---|
| 내서읍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15) | 2009/12/13 |
| 마산시 회원동 500번지 (12) | 2009/11/30 |
|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4) | 2009/11/25 |
|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6) | 2009/11/16 |
| 마지막황제 순종의 행차길 (0) | 2009/10/26 |
'언론속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하나방송 '두름손인터뷰' 허정도 '마산도시재생 민간협의회' 공동대표 출연 (0) | 2009/12/14 |
|---|---|
| MBC 일요광장 방송 (0) | 2009/11/16 |
'디자인서울'을 표방한 수도 서울을 필두로 전국 지차체의 공공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하고, 가시적인 효과가 뚜렷한 가로경관의 개선사업을 앞 다투어 시행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디자인총괄본부 홈페이지
개선은 좋지만 과잉디자인 경계해야.
가히 가로디자인의 '춘추전국시대'라 불릴만 하다.
하지만 지자체간 경쟁하듯 '예쁜성과물 내기'에만 집착하기에는 사업의 중요성이 너무나 크다. 새로 지은 건물은 맘에 안들더라도 주로 그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만 불편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거리는 시민 모두의 불편으로 다가온다. 로마의 거리가 지금도 남아있듯 최소한 100년은 내다보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타임지가 선정한 '21세기 세계의 리더 100인'에 선정된적이 있는 도시계획 및 건축가 김진애씨도 인사동길을 설계하면서 '가로 디자인은 어렵다'고 토로했다.
가로디자인은 형태적, 오브제적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자칫 과잉디자인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위 사진은 국내의 한 지자체에서 얼마전에 새롭게 단장한 거리의 모습이다.
사람에 따라 느낌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 길을 보고 걷고 싶은 감정이 생기질 않는다.
'지나치면 모자란만 못하다'고 했다.
과도한 시설물과 과다한색상, 시설물간의 이질감. 한마디로 과잉디자인이 편안함을 주지 못하고 혼란스럽다.
지금은 새것이라 그나마 깨끗한 맛이라도 있지만, 10년 후쯤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가장 걷기 좋은 길은 안전하고 편안한 길이다.
보행자천국 유럽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를 보자.
내가 가 본 도시가 전부라고 말할 순 없지만 대부분의 거리가 걷는데 별 불편함이 없다. 편안한 걷기는 걷는이의 피로감을 훨씬 줄여준다.
우리나라의 새롭게 단장한 거리보다 화려하진 않지만 길이 참 예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더 부러운 것은 도시 변두리의 어떤 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길의 배경이 되는 건물의 분위기에 일조한 면도 있겠지만, 길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와 다른점이 분명히 있다.
일부구간에 집중하기 보다는 골목마다 걷기 편하게 해야.
대부분의 가로경관사업은 좋은 계획을 위해 설계공모를 통해 추진된다.
일단 당선되기 위해서 눈에 띄는 과감한 디자인을 고려하게 되고,
가시적 결과물로 성과를 평가받는 관에서도 이에 동조하게 된다.
가로에 접한 건물주들의 '님비'는 가로경관의 도시환경적 접근을 막고 기형적 형태를 유발한다.
또한 사업구간이 대부분 직선구간이고 짧은탓에 조금만 돌아가보면 예전 그대로다.
예산을 한 곳에 집중하기 보다는 불필요한 시설물을 과감히 줄이고, 사업의 구간을 확대해야 한다.
더불어 거리를 점령한 차량, 영업이나 주차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내어 놓은 온갖 잡동사니들, 크고 어지러운 간판, 마구버려진 쓰레기등. 걷기싫은 거리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요소들도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오늘의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걷고 싶은 거리, 걷기 싫은 거리 ③ 광고물로 뒤덮힌 도시 (4) | 2009/12/04 |
|---|---|
| 내 집 앞을 지켜라! (4) | 2009/11/18 |
| 걷고 싶은 거리, 걷기 싫은 거리① (5) | 2009/11/13 |
| 창의적 도전 필요한 민선교육감 (2) | 2009/11/11 |
| 나무와 인간의 아슬아슬한 공생 (6) | 2009/10/30 |
| 제안, <신(新) 7대 도시 마산> (8) | 2009/10/20 |
-
이윤기 2009/11/13 10:51
어제 이주영 국회의원 정책토론회에서 보니... 임항선 그린웨이 사업계획에도 온갖 시설물을 설치하는 계획으로 가득하더군요.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걷고 싶은 하는 길은 온갖 시설물을 설치한 곳이 아닌데 말 입니다.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모두 돈도 별로 안 들이고, 시설물도 안 만들었지만 단지 걷기에 좋은 것, 이야기가 있는 것 만드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데 말 입니다. -
광선반은 간단히 말해 앞서 설명되었던 측창채광으로 들어오는 빛을 실내 깊숙이 들이는 장치입니다. 햇빛이 선반의 반사면에 부딪혀 다시 천정으로 반사되어 유입되는 것으로 측창채광에 비해 실내에 빛이 고른 분포를 가지게 됩니다. 개..
'마우스랜드'라는 생쥐들이 모여사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들도 우리가 사는 사회처럼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뽑은 지도자는 생쥐가 아니라 매번 고양이였습니다. 고양이가 생쥐를 위해 일할리가 없..
<1920년대 교장들의 학교건물에 대한 생각> 직전 포스팅에서 설명드린 『朝鮮と建築(조선과 건축)』의 1928년 편을 보면 「學校建築號」라는 주제의 특집기사가 있습니다. 당시의 학교건축물 현황의 일편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
● 어는날 갑자기! 사는 곳이 해안도로 근처라 아침마다매 창문을 열면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시설물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시멘트를 담아두는 창고와도 같은 곳으로 '싸이로(Silo)'라는 놈이다. 그런데 몇일 전부터 이 싸..
<1920년대 마산의 건축물과 각종공사> 마산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근대식 건축물을 많이 세웠습니다. 한일병합 이전까지는 주로 목조로 지은 공공기관이 주류였습니다만 1910년경부터는 벽돌조도 많이 지었습니다...
측창채광은 천창채광과는 달리, 말그대로 벽면에 위치한 개구부(창문 등)를 통해 자연채광을 실내로 들여오는 방법입니다. 창문외에도 유리블럭, 낮은 고창, 채광뜰(Sunken)이나 안뜰로난 수직 개구부 등을 통해 측창채광으로 얻는..
‘진해’ 지명에 대한 글입니다.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한제국시대에는 ‘통합 이전 창원시(옛 의창군)와 옛 마산시 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일원’을 ‘진해군’이라..
<마산사람들의 배일감정> 일본인에 의해 사회 모든 분야가 달라지면서 한국인의 생활 방식도 많이 변했습니다. 1918년경만 하더라도 마산포 장날에 머리카락을 짧게 단발한 한국인이 보이면 신기하게 쳐다보았지만 1년이 지난 1919..
자연채광 부분에서 잠시 거론되었지만, 파사드(전면) 개구부(측면 창문)를 통해 유입되는 자연채광이 닿지 않는 공간에 보조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으로 천창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측면에 창을 두는 것이 아니라 머리위 천정에 창을..
1년동안 벽에 걸어두고, 또는 책상위에 놓게 되는 달력들은 1월에는 넘쳐납니다. 여기 저기서 받아둔 달력중에서 어떤 달력을 놓을까 잠시 고민하게 됩니다. 절에서 나온 달력이며, 근사한 미술작품을 곁들인 은행달력, 자사의 실적홍..
지난 연말, 재경마산향우회 송년회용으로 마산도시사에 대한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서툰 작품이지만 나쁜 평은 하지 않아 공개합니다. 곧 설입니다. 마산사람들, 가족들과 함께 보면서 마산에 얽힌 추억이라도 나누어보시죠. 분량은 1..
자연채광은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건물내 다양한 공간들에 햇볕이 잘 들도록 하는 통합적 설계방법입니다. 자연채광을 위한 설계에 있어서는 방(실)별로 유사한 목적과 유사한 빛 환경을 필요로 하는 방들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
최근 창원호텔 맞은편에 현장이 생겼습니다. 두 달 남짓 사무실이 있는 정우상가쯤에서 중앙동 민원센터까지 하루에 두세번씩 걸어갔다 옵니다. 분명 보도가 설치되어 있는 길임에도 주차된 차량으로 인해 차도로 내려갔다 올라오길 몇차..
<마산상공회> 1914년에 조선인 상업회의소가 와해되고 1908년에 설립된 일본인 상업회의소도 그 뒤 흐지부지된 후 1920년대까지 지역의 상공인들 단체는 없었습니다. 이 공백기에 「마산간담회」「마산경제회」「마산번영회」라는 상..
앞서까지는 외피에 대한 내용을 다뤄왔으면, 이제 더욱 시스템적이면서도 메카니즘적인 조명분야에 대한 내용을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주광율(DF)는 실내와 실외 밝기간의 관계를 수치로 나타낸것입니다. 자연채광을 통한 건물의 그린빌딩..




Prev
Rss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