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마산 창신공고 건축과에서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입니다.
2학년 1학기가 시작되던 1969년 봄에 우리 반 담임으로 부임하셨으니 선생님 만난 지 꼭 40년 되었습니다.
첫날 인사에서 선생님은,
마산이 고향이며 한양공대 건축과를 졸업한 후 공군 제대하고 학교로 왔다고, 잘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그 날 입었던 선생님의 차분하고 개성 있는 카키색 양복과 화려하게 붉었던 넥타이가 참 멋졌습니다.
옷 뿐 아니었습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서늘한 눈매, 약간 웨이브진 머리칼, 요즘 말로 얼짱이었습니다.
첫날 그 멋졌던 선생님의 모습은 그 후 오래 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부장을 했다는 선생님은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흰색·붉은색·푸른색 분필로 세계의 유명 건축물들을 그려가며 강의하던 모습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지금의 사모님과 열애 중일 때라, 그 야릇한 소문이 하이틴이었던 우리들을 더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밀어붙이던 경제개발 시기라 공고졸업하면 취직은 잘되었습니다만 교육시설은 엉망이었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원래 인문고였는데 정부시책에 맞춰 공고로 전환하였고, 나는 첫 입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니 실업교육을 시킬 충분한 준비를 못한 채 학생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건축공부에서 기본인 제도판조차 준비가 제대로 안 되었고 교재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어영부영 1학년을 대충 마친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대학교재에서 우리 수준에 맞는 내용을 발췌, 등사본 교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내용이 대학교재의 엑기스였다는 건 세월이 제법 흘러 내가 건축에 대해 뭘 좀 안 뒤 알았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찍은 졸업사진>
-졸업 후에도 이어진 선생님의 사랑-
1972년 말, 겨울 날씨가 한창일 때였습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마산시청 옆의 작은 설계사무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저녁 8시 쯤 선생님께서 사무소에 찾아 오셨습니다.
가끔 찾아왔지만 밤에 오신 적은 없었는데, 그 날은 내가 야근하는 줄 아신 것처럼 그렇게 찾아 오셨습니다.
분명히 마음먹고 날 찾아오셨을 겁니다.
그날 저녁 사무소에는 나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날보고
“여기 난로 옆에 와 앉아보라”고 하셨습니다.
피어오르는 불이 빤히 보이는 검은 색 난로였는데 깔때기 모양의 석유통과 난로가 한 세트로 장착된 것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를 뿐 아니라 ‘선생님’은 왠지 어렵고 무서워 주저주저하며 의자를 끌어와 선생님 곁에 슬 앉았습니다.
“이제 건축을 좀 배웠냐?”
“아, 예에, 조금,,,”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예-에”
“지금 네 실력은 건축하지 않는 일반사람들도 알고 있는 상식 수준 정도다, 조그만 재주 믿다가 큰 코 다치니 절대 노력을 게을리 하지마라.”
“아, 예-에”
그날 밤 선생님의 그 한마디, 그것은 내게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내 능력이 상식수준’이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내가 제법 하는 줄 착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럴만한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전 해에 실업계고등학생들이 겨루는 각종 기능경기대회에서 설계 잘 한다고 상을 많이 받았거든요.
주변에서 ‘잘한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고요.
그런 분위기 때문에 내가 마치 뭐나 된 것처럼 속으로 우쭐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직 어렸거든요.
그러나 나는, 그날 밤 내 기를 콱 죽이는 선생님의 그 말씀을 가슴 깊숙이 새겨 넣었습니다.
제법 긴 세월이 흐른 뒤까지 선생님의 그 말씀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 겨울밤,
선생님의 그 말씀 한 마디는 젊은 시절 내가 건축가로 성장하는 기름진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몇 년 후,
공부가 하고 싶어 어려운 여건을 뚫고 대학에 가려했을 때, 선생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내가 유명 건축가 문하로 가게 되어 서울로 올라갈 때, 선생님은 더 없이 기뻐하시며 “꼭 좋은 건축가가 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도 선생님처럼 건축사가 되었고, 동종업계 같은 회원으로 사회생활을 했습니다.
건축이나 도시 관련 각종 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는 선생님과 나란히 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내가 도시문제를 주제로 발표나 토론을 할 때면 선생님은 언제나 방청석에 앉아 내게 힘을 보내주었습니다.
좁은 지역이라, 사회생활하면서 선생님과 자주 얼굴을 마주치며 지냈습니다.
해마다 오월 스승의 날이 되면,
어느 해는 넥타이니 카네이션이니 조그만 선물을 들고 선생님을 찾았고,
어느 해는 통술집에서 선생님께 술잔을 드리기도 하면서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십년 전 쯤 이었을 겁니다.
한 번은 선생님께,
“그 겨울 밤 난로 옆에서 하신 그 말씀 한마디가 제게 끼친 영향이 너무 컸습니다”
고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잘 모르겠는데, 내가 그랬던가? 허허”
웃으셨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면 늘 무언가를 의논드리고 묻고 했습니다.
도의원을 지내기도 한 선생님은 지역의 주요현안에 대해 당신 나름의 생각을 갖고 계셨기에 들어 두어야할 말씀이 많았습니다.
그랬는데,
언제부터인가 선생님께서도 가끔 내 의견을 물었습니다.
내 나이 쉰 가까이 되고, 선생님께서 예순 정도 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선생님의 둘째 아들 진로문제를 두고도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이 좋았습니다.
날 믿어주는 선생님이 고마웠습니다.
그 옛날,
까마득한 40년 전 사제지간이 그렇게 이어지는 게 참 좋았습니다.
서너 달 전,
신문사 대표직을 마치고 나니 앞으로의 내 진로를 물으시고 깊은 신뢰를 보내주셨습니다.
나는 선생님께,
‘옛날의 선생님으로 다시 돌아가 절 이끌어 달라’고 부탁드렸고, 선생님은 내 청을 기분 좋게 받아주셨습니다.
그랬던 우리 선생님께서 며칠 전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6일 아침 일찍,
선생님의 둘째 아들이 내게 부음을 알려 왔습니다.
전화하던 중 목이 콱 막히며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녁에 도립 마산의료원 영안실에서 아들을 만났더니,
“어제 밤에 선생님(선생님의 아들은 날 선생님이라 부릅니다)의 얼굴이 TV에 비치는 걸 보며 좋아하셨는데 오늘 새벽 2시에 그만 돌아가셨......"
끝내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장례식 날,
땅에 묻히는 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습니다.
영정 속 선생님은 조용히 웃고 계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허전했습니다.
기댈 수 있는 언덕 하나가 허물어져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밤,
선생님 생각이 나서
‘혹시 고등학교 앨범이 있는지, 있다면 선생님 젊은 시절 사진이 있을 텐데’
싶어서 이리저리 찾아보았더니 책장 한 구석에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낡은 졸업앨범이 있었습니다.
앞의 흑백사진은 거기서 찾은 선생님의 40여 년 전 모습입니다.
스물아홉 우리 선생님입니다.
"김정수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끌어 주시고 믿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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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2009/10/13 18:07
저는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어느덧 교직경력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학교 수업이, 학교 생활이 이제는 익숙해지고
그 만큼 열정도 엷어졌습니다.
이버님께서....짧은 시절 교직생활 동안에 이렇게 제자의 가슴속애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음에 비해
저는 아직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
김동훈 2009/10/13 22:18
선생님,
저는 큰아들 동훈입니다.
위로와 격려 덕분에 아버지를 마지막 가시는 길 잘 모시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묘소도 잘 정돈하고 아버지 유품도 정리하고 왔습니다.
사람들과 무심코 하던 얘기가 저에게 이렇게 닥칠 줄은 몰랐는데
현실이 되었습니다.
樹欲靜而風不止 , 子欲養而親不待
불과 며칠사이에 세상이 많이 달라진 느낌이네요.
약간의 적응기가 필요할 것 같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돋보기, 틀니 등 평소 쓰시던 물건들을 챙기고,
학생증, 교사신분증, 수십년 전의 비망록, 메모들을 비롯한
수십년씩 된 기록들을 챙기고,
병상에서도 마지막까지 쓰시던 글들을 읽어보며 회상했습니다.
깨알같은 글씨로 연말까지의 일정을 꼼꼼이 기록해두신 수첩에서
날이 갈수록 힘이 약해지는 필체와 실천하지 못하고 X표를 하신 계획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지막 열흘여간 병원에서 함께 생활하며 수발을 들었습니다.
일생동안 가장 고통스러웠지만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산소호흡기 탓에 발음은 부정확하지만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대화를 나누고
숟가락으로 식사를 떠서 드리고, 세수를 시켜드리고, 이를 닦아드리고,
어릴적 저의 기저귀를 갈아 주셨듯이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드렸던,
운명하시기 며칠 전에는 신부님을 모시고 병자세례를 받으시고
하염없이 울기도 했고,
며느리의 배를 만지시면서 뱃속의 아기이름을 지어주지 못해서
끝내 미안하다고 하시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의식이 돌아오실 때면
어머니와 자식들의 볼에 입맞춤을 하시며 안아주시던
어버지가 그립습니다.
평소 깜끔하신 분이셨는데 함께 목욕 한번 제대로 못한 것과
하루 시간을 비운 사이 운명하셔서 임종을 하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 아픕니다.
하늘에서 고통없이 편안히 계실 겁니다.
이제는 암으로 투병 중인 어머니 잘 모셔야 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김동훈 拜上-
허정도 2009/10/14 07:39
선생님게서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던 큰 아들이군요.
큰 아들 결혼 않는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가시기 전 큰 며느리도 보고 임신한 것까지 아셨으니 제 마음도 참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무는 바람이 건드리고, 부모는 예고 없이 떠나버리지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어려운 시간 보내실 때 함께하지 못해 정말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가셨지만 두 아들 두 며느리, 그 밑에 손자들,,,
이렇게 이어 갈거니 외롭지는 않으실테죠.
어머님이신 우리 사모님 건강 회복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아드님과 가족 모두에게 진심으로 위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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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식 2009/10/20 11:07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벌써 10여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기억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잘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자주 찾아뵙고 해야하는지 그러지 못해서 너무나 죄송할 뿐입니다.
이번에 고인이 되신 김정수선생님 글을 읽다가 낯익은 허교수님 글을 읽고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둘째 아들 동한이형과 친분이 있어서 저도 간간이 얼굴만 뵙고 했었는데
부고 소식을 듣고 대구에서 부랴부랴 마산에 찾아 갔었습니다.
저는 지금 대구에서 공무원 신분으로 있습니다.
건축학도로서 끝까지 최선을 못하고 있어서 늘 아쉽지만 나름대로 건축 공무원으로써
성실하게 맡은 바 직무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 방학때 한번씩 찾아뵙던 때가 그립습니다.
지나고나면 추억이 참 소중하다는걸 느낍니다.
그리고 아침 방송에 나오신다길래 보았습니다.
긴장되지 않고 말씀을 너무나 잘 하시는 모습에 뿌듯했습니다 ㅎㅎ
덕분에 저도 갈수록 집사람한테 소흘히 하는것 같아서 미안했는데 이제 책도 읽어주고 해야겠습니다
얘기가 길어지는것 같습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시고 사모님과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
영영사랑 2009/11/26 01:01
김정수지부장님의 소식에 너무 놀랬습니다. 제가 협회다닐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때오셔서 `천양아 부모잃은 죄인이니 하늘보지말고 울어라`하시면서 어깨를 두드려주셨는데......
무심히 세월이 지났네요. 허소장님의 아름다운추억이 계시듯 저에게도 철없던이십대에 4년을 모신 지부장님이신데 이렇게 소식을 듣네요. 살면서 지난시절이 그리워지고 후회도하지만 그때가 참 행복했습니다 늦었지만 지부장님~고통없는 하늘나라에서 편안하시기를 빕니다. ~ 올해가 가기전에 연락한번드릴께요~
광선반은 간단히 말해 앞서 설명되었던 측창채광으로 들어오는 빛을 실내 깊숙이 들이는 장치입니다. 햇빛이 선반의 반사면에 부딪혀 다시 천정으로 반사되어 유입되는 것으로 측창채광에 비해 실내에 빛이 고른 분포를 가지게 됩니다.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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