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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도시이야기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by 운무허정도 2018. 10. 8.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등에게서 탐문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쓰였음을 밝혀둔다. 정식으로 준비된 인터뷰가 아니어서 각 탐문이 있었던 시간과 장소를 적시하지 못한 것은 필자의 잘못이다.)

 

1) 성장 과정

하상칠은 192652일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산리(지리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서 부친 하원수와 모친 김령 김씨 사이에서 9남매(81) 7남으로 출생했다.

당시 조선의 대다수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극빈의 가정형편에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고, 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언제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어린 시절에 진양군(현 진주) 수곡면 대천리로 이사했고, 일가친척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인접 마을 사곡리에 자주 놀러 다녔다.

근처에 있는 낙수암(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542, 송정 하수일(1553~1612) 사적비, 유림의 강학소, 정사가 있다)과 대각서원(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344)에 자주 놀러 다녔다(이 과정에서 글도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안타깝게도 그의 청소년 시절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데다가 지금은 이에 대해 얘기해줄 사람이 한 명도 살아있지 않다).

1950(25) 여름 남원에 살던 양모(養母, 모친 친구라고 함)의 집안일을 도와주러 갔는데 인근 야산에서 나무하던 중 인민군에게 강제 징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포로로 잡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거의 3년을 보낸 후 19536월 중순 반공포로 석방 조치에 따라 수용소에서 풀려나왔고 고향에서 은신했다.

<하상칠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용자 기록>

* 필자 주: 주소에서 PYNYANG(핑양)DECHEL(데철)은 각각 JINYANG(진양)DECHEON(대천)의 오기로 판단된다.

 

2) 마산 이주

같은 해 몇 달 후 신을순과 결혼했고, 진해 소재 해병대 문관으로 취업되어 인접한 마산으로 이주했다. 마산에는 이미 몇 명의 일가가 살고 있었고, 진해로 통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해병대에 약 4년 간 근무한 후 자영업을 하기 위해 퇴직했다. 처음엔 이것저것 하다가 1957년부터 '대동얼음'이라는 상호로 얼음 소매업을 시작했고 운이 좋았는지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처 신을순의 증언).

35세의 중년 가장이었던 1960년 셋째 딸이 태어난 지 며칠 후에 3 15의거가 일어났다.

이날 그는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시위에 참가했지만 이 사실을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처 신을순도 산 지 며칠 되지 않은 빨간 구두가 다 헤진 것을 보고 시위하다 엄청 쫓겨다녔나보다 짐작만 했을 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한다.

 

3) 의거 참가 이후

3·15의거 참가 이후로도 얼음 판매업은 번창했고, 오동동의 한 요지(불종네거리 현 경남은행 지점 자리)에서 잡화점까지 운영해 상당한 돈을 모았고, 집도 더 좋은 곳으로 몇 차례 옮기는 등 부자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처 신을순은 우인의 채무 보증을 섰다가 당시 논 10마지기에 해당하는 막대한 빚을 대신 갚느라 상당한 재산을 날리기도하는 등 어려운 우인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받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 후로도 돈벌이는 잘 되었지만 주택이나 상가 등 부동산 투자는 하지 않았다.

1961년에 사단법인 경찰동우회(이하 경우회)에 자문위원으로 가입해 1981년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969년에 마산얼음상인조합 설립을 주도했고, 경남 인조빙 판매조합장을 맡아 1974년에 얼음 판매업을 완전히 그만둘 때까지 계속했다(참고로 이 무렵 냉장고와 제빙기의 보급으로 얼음 판매업은 사양산업이 되었다).

1972년부터는 마산 도심(구 한국은행 길 건너편)의 작은 땅을 임차해 제일주차장 을 운영했다.

1973~1975년 진양 하씨 종친회 마창지구 회장, 2006~2009년 양녕공 공신문화제 회장을 역임하는 등 가문을 유지하고 빛내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시골에 사는 수많은 조카들을 마산 도시로 불러들여 학교 다니게 했고, 남자 형제 중 일곱째이면서도 편모를 돌아가실 때까지 불평 하나 없이 모셨고, 명절이 아니더라도 집안은 친척들의 수시 방문으로 법석대었다.

80세가 되던 2004년에 오래 동안 생업이었던 주차장 영업이 힘에 부치자 생업을 중단했다.

그 후로는 주로 노인당에서 회장도 하면서 소일하거나 거의 매주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여생을 보냈다.

2010393·15의거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고민 끝에 증언을 결심하고 자식들에게 털어놓았다. 동년 7213·15의거기념사회 를 찾아가 증언을 녹취했다.

90세가 넘어서도 건강을 자랑하던 그는 어느 날 복통으로 병원에서 위암 4기 판정을 받았고 그 후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식사를 거부하는 등 스스로 생명 단축을 재촉해 2017726일 경남도립마산의료원에서 향년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별세 넉달 전인 2017년 3월 15일 제57회 3·15의거 기념식에 참석한 선생의 마지막 모습>

-마산3·15아트센터 대강당-

 

그는 슬하에 15녀를 두었다. 평소 그는 자식이든 조카든 후손 중 누구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임명직이나 선출직으로 관직에 진출하기를 바랐지만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해 항상 안타까워했음을 필자는 기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