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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4

김형윤의 <마산야화> - 98. 통주사변의 희생자 98. 통주사변(通州事變)의 희생자 통주사변이라 함은 소화 12년 7월 7일 북경 근교의 노구교(蘆溝橋)서 발발한 중일병(中日兵) 충돌사건의 한 개의 부산물적 비극을 말함이다. 발생 연월일이 기억되지 않으나 통주시내에 우거(寓居)나 거주하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을 준전시(準戰時) 중 중국병이 야반(夜半)과 미명에 걸쳐서 전격적으로 무차별 대학살을 행한 참상을 말하는 것인바, 그 당시 일본 신문을 보면 중국의 군인 혹은 비적(匪賊)이라고 했는데, 종전 후 일본의 전문가들의 진상조사 저서를 보면, 중국군이 단순한 일본인(조선인도 포함)들의 증오감이 아니라 오히려 남의 나라에서 야간 군사훈련이란 명목으로 도전 행동을 감행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그늘에서 중국인들에게 방약무인 행동을 한 자에 대한 분격이 폭발, 말하.. 2016. 6. 27.
김형윤의 <마산야화> - 97. 탄산가스 소동 97. 탄산가스 소동 마산의 도로 연혁이 별로 없으니 상보(詳報)는 어려우나 부림시장에서 서성동 내림길 일대에는 수백년을 헤아리는 고목들이 가히 천일(天日)을 가릴만치 울밀(鬱密)하여 이곳을 숲골(林谷)이라 불렀고, 또는 서림(西林)이라고도 하여 지금 이한철(李翰喆) 치과의원 아랫집 터에 보통학교 생도들의 복습방이 있어 그 이름을 ‘서촌숙(西村塾)’이라고 부르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곳에 신작로를 설치하기 위하여 모든 초부(樵夫)들을 동원하여 그 굵은 나무들을 톱질을 해서 베어내는 것인데, 그 초부라는 것이 산에 잡목이나 메는 말하자면 졸때기들이어서 고목을 베는 큰 톱을 써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고목을 베는 상식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몇 개의 고목을 베는 동안에 초부 수십명이 한꺼.. 2016. 6. 2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6. 박애의 두 간호원 96. 박애의 두 간호원 현재 마산시 가포동에 있는 국립마산병원은 소위 대동아전쟁을 계기로 해서 일본 해군 당국에서 상이군인 요양소로 발족한 후로 해방과 함께 오늘에 이르렀다. 이 병원의 위치에 있어서 요양지대로서는 전 동양적이라고 한 독일 의학도로부터 지적당한 곳이다. 전쟁 중반기부터 남방에서 부상한 육·해군을 비밀리에 수송하여 치료하던 곳으로 많은 환자들이 회복소생한 곳이다. 워낙 숫자가 많이 밀려와서 완전한 치료도 해 받기 전에 8·15가 닥쳤다. 한국에 있던 일인들은 ‘세화회(世話會)’의 주선으로 그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니 이곳에 입원환자 역시 목선을 빌려 귀국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이요양소는 원장을 필두로 일인 용원까지 앞을 다투어서 떠난 뒤에 맨 끝까지 병원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은 함경북도.. 2016. 6. 13.
김형윤의 <마산야화> - 95. 엄원도의 일본 의인 95. 엄원도(嚴原島)의 일본 의인(義人)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동경 고학생 중 거의가 무등산치(武藤山治)라면 기억할 것이다. 그는 종연방적회사(鐘淵紡績會社) 경영주인데 사회에 불행한 인물만 있으면 반드시 몇 푼을 등기 우송해 주던 사람이다. 중야(中野)인가 황천약사(荒川藥師)인가 문인(이름은 밝히지 않음) 2, 3인이 백구사(白鷗舍)라는 곳에서 자취생활을 한 일이 있었는데, 여름 폭우가 지난 뒤에 백구사(白鷗舍)의 사람들은 한 묘안을 냈다. 즉 조선인 노동자의 합숙소인데 저번 수해로 노동할 길이 없어 앉아 굶어 죽는 것보다는 무슨 범죄라도 해야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띄웠다. 인심 잘 쓰는 무등(武藤)은 긴급히 관할 경찰서를 통해 우선 50원을 가지고 임시 구조를 하라고 했다. 현금을 전달하려고 고.. 2016.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