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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1. 개항과 각국 영사관

 

141. 개항과 각국 영사관

 

 

강화조약에 의해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된 후 다음과 같이 항구와 시장이 개방되었다.

 

<조선의 시장과 조약항>

 

부산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13(1876) 1014(일본에게)

고종 20(1883) (다른 조약국에)

인락(認諾)의 형식 ; ·일 수호 조규(條規)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고종 2011

거류지 ; 일본 전관(專管) 거류지, 청국 전관(專管) 거류지

 

원산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17(1880) 5(일본에게)

고종 20(1883) (다른 조약국에)

인락(認諾)의 형식 ; ·일 수호 조규(條規)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고종 2011

거류지 ; 일본 전관(專管) 거류지, 청국 전관(專管) 거류지

 

인천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20(1883) 11(일본에)

고종 20(1883) 5(다른 조약국에)

인락(認諾)의 형식 ; ·일 수호 조규, ·미 수호통상조약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고종 2011

거류지 ; 일본 전관(專管) 거류지, 청국 전관(專管) 거류지, 각국거류지

 

 

서울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19(1882) 9(청국에)

고종 21(1884) (다른 조약국에)

인락(認諾)의 형식 ; 중조상민수륙(中朝商民水陸)무역장정, 한영수통상(韓英修通商)조약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융희 28

거류지 ; 잡거지

 

용산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21(1884) 10

인락(認諾)의 형식 ; ·일 양국간 양화진(楊花鎭)을 대신하여 용산을 개시(開示)하는 왕복서개시(往復書開始)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거류지 ; 잡거지(雜居地)

 

의주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19(1882) 9(청국에)

인락(認諾)의 형식 ; 중조상민수륙(中朝商民水陸)무역장정, 광무 83월 외부대신의 선언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융희 원년 4(감시서 監視書)

거류지 ;

 

회령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19(1882) 9(청국에)

인락(認諾)의 형식 ; 중조상민수륙(中朝商民水陸)무역장정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거류지 ;

비고 ;

 

경흥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25(1888) 8(노국에)

인락(認諾)의 형식 ; 조아로통상장정(朝俄路通商章程)

거류지 ;

 

목포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광무 원년(1897) 101

인락(認諾)의 형식 ; 외부대신의 조회(照會)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광무 원년 101

거류지 ;

 

진남포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광무 원년(1897) 101

인락(認諾)의 형식 ; 외부대신의 조회(照會)

거류지 ; 각국 거류지

 

군산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광무 3(1899) 51

인락(認諾)의 형식 ; 외부대신의 조회(照會)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광무 351

거류지 ; 각국거류지

 

마산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광무 3(1899) 51

인락(認諾)의 형식 ; 외부대신의 조회(照會)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광무 351

거류지 ; 각국거류지, 일본 전관 거류지

 

성진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광무 3(1899) 51

인락(認諾)의 형식 ; 외부대신의 조회(照會)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광무 351

거류지 ; 각국거류지

 

평양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광무 3(1899) 51

인락(認諾)의 형식 ; 외부대신 및 외부 사절의 조회(照會)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거류지 ; 잡거지

 

용암포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광무 8(1904) 2

인락(認諾)의 형식 ; 외부대신의 조회(照會)

해관개설일(海關開設日) ; 광무 108

거류지 ;

 

 

이상 기록한 바와 같이 청일 전쟁 후인 1897101일에 목포·진남포 개항의 뒤를 이어 189951일에 군산, 성진항과 같이 마산포도 개항되었다.

 

<마산포 조계장정에 첨부된 조계지 도면>

 

 

 

이때는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후퇴하고 일본의 적극적인 조선 침략과 아울러 3국 간섭 후 제정 러시아 세력이 조선으로 제정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영국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의 대륙정책은 곳곳에서 충돌하였다. 즉 목포만의 고하도(孤下島), 부산의 복병산(伏兵山), 절영도(絶影島) 등의 토지 이권을 둘러싼 노·일간의 대립은 이러한 표현이었다.

 

이 경향은 189951일 마산포, 군산, 성진항 등 개항시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마산포의 개항 경위를 살펴보면 1898526일 열강의 요청에 의해 조선 외부대신은 마산포, 군산, 성진의 개항과 평양의 개시(開市)가 결정되었음을 주재 각국 공사에게 통고하였다.

 

이와 아울러 조선 정부는 창원항인 신마산포에 창원감리서를 설치하고 창원부윤 안길수로 하여금 감리서 서리겸섭(署理兼攝)케 하는 동시에 구조창전운사아문(舊漕倉轉運使衙門)으로 하여 안감리(安監理)1개년 이내에 개항을 감행하도록 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 같은 외부의 명령을 받은 감리는 곧 창원군 외서면 내의 해안 신월, 월영 2동 지내(地內) 13888십여 평을 구획하여 각국 거류지를 정하고, 거류지 주권(周圈) 10여 리를 개방하고 그 권내 소유주에게는 대계(垈契), 지계(地契) 등을 발행하여 매매 양도를 자유롭게 하고 또 각국 거류지는 A호 즉 1등지, B호 즉 2등지로 대별하여 이를 189951일 각국 대표자인 부산 세관장 스가그리오(이태리인)에게 수여하였다.

 

한편 조계장정은 당시 총세무사 브라운 제이 메레아니(Brown J. Meleany ; 백탁안柏卓安, 영인英人)에 의해서 기초되고 이 초안으로 조선 외부대신과 각국 공사간에 절충이 이루어져 189952일에는 서울에서 3항의 조계장정이 조선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미 등 각국 대표(公使) 사이에 조인되었던 것이다.

 

이 조계장정은 각국 영사관 부지에 대한 제한 규정을 적용한 것으로 일본 침략자들이 목포, 진남포 개항 시()를 거울삼아 각국공동조계의 당사국 간에 세력균형을 유지함으로써 노국 세력의 침투를 막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즉 목포, 진남포의 조계장정에서는 조약국이 경매를 거치지 않고 영사관 부지를 토지 원가로서 수득(收得)할 수 있었으므로(동장정 제10) 그들에게 토지의 선취권(先取權)을 인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권리를 둘러싸고 노일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 바 있었다.

 

당시 노국 정부는 상기(上記) 양항(兩港)에 대하여 토지 구매금으로 25천 루불을 지출하였고(목포에 1만 루불, 진남포에 15천 루불) 불국(佛國) 또한 15십만 프랑을 투자하여 1백만 입방미터의 영사관 부지를 구매코자 예정한 바 있었다.

 

특히 노국은 진남포에 있어서 해항(該港) 조계지 총면적 975천 평방미터(293천 평) 중 폭지(瀑地)를 제외하면 46만 평방미터(138천 평)를 노국 영사관 부지로 보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때 각국 공사 중에서도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많았던 일본 공사는 해() 부지면적을 감소시키려고 갖은 힘을 다했고, 다른 공사들도 이에 호응하여 이 문제는 결국 4만 평방미터를 초과할 수 없다는 묵시적 의견으로 각국 공사간에 의견이 일치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거울삼아 마산포, 군산, 성진항의 조계장정에는 이 규정을 명문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마산포, 군산, 성진 조계장정에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노·일 관계가 그대로 첨예하게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189951, 조선 측과 각국 대표자들은 부산 세관장 스가그리오 사이에 마산 각국 조계지의 수수(授受)를 끝마친 후 부산 세관 곧 창원감리 별방(別房)에 부산세관 마산출장소를 설치하고 출장소 주임으로는 독일인 아노우스(Arnous), 보조 세관리로는 등본종태랑(藤本鍾太郞), 고교가길(高橋嘉吉)의 양 일인이 임명되어 조계지 획성(劃成) 사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 정부 부산세관 마산세관 출장소 설치 후인 522일 부산 일본 영사관 마산분관을 설치하고, 천상진일랑(川上辰一郞, 당시 일본 외무서기생外務書記生)으로 분관 주임 사무를 대행케 하였는데, 이에 앞서 부산 일본 영사관에서는 대로(對露) 감시와 아울러 일본 정책의 철저를 기하기 위해 순사부장과 1명의 순사까지 파견하여 일본 영사관 마산 분관사무에 간섭케 하였다.

 

한편 조선 외부에서는 마산 각국 공동 조계지 측량을 위해 개항 당초부터 조계지 측량에 종사하고 있던 세관리 기사 스타든(Staden)을 고용하였던 것이니, 이는 18995월말 마산포의 측량을 개시하여 8월 끝마치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계로서 구획된 토지의 위치는 대략 신월리(), 월영리()였는데 이 구역의 경계선에는 마산포 각국 조계라는 문자를 조각한 경계 석표(石標)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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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개항 종료와 신마산의 정체>



         <1910년대 신마산 전경입니다.
           마산을 소개하는 그림엽서 두장을 연결했으며 사진 속 선착장은 노란표식점에 있었습니다>


1910년대의 마산은 1911년 1월 1일을 기해 진해군항을 일제의 해군요새로 보호한다는 구실로 마산항을 폐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합방 일주일 후인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발표한「일한병합에 관한 선언」제4호에서 「종래의 개항장은 마산포를 제외하고는 종전대로 이를 개항으로 하며 다시 신의주도 개항에 추가하여 내외선박의 출입 및 이에 의한 화물의 수출입을 허한다」함으로써 마산의 개항은 종료되었습니다.

이로써 마산개항의 역사는 11년 8개월 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합방이후 사실상 형식적으로만 남아있던 각국공동조계지도 해제되고(1914. 3. 31) 마산부(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등 제도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개항이 종료되어 마산항이 대외적으로는 폐쇄되었으나 일제가 필요로 하는 외항선에 대해서는 세관장의 특별허가로 출입항을 허용하였습니다. 때문에 식민지 경제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찾아드는 일본 선박은 개항기와 달라진 것이 없었고 오히려 늘었습니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의 도시변화특징은 '신마산의 정체기'입니다.
개항기 동안 급속하게 형성되었던 신마산의 변화가 갑자기 답보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정체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변화가 적었습니다.
인구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로도 개설되지 않았고 개항기에 비해 건물도 많이 짓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이런 상황은 개항기의 급격한 확장과 성장을 겪은 이후였기 때문에 도시 정체에 대한 체감효과는 더욱 심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정체(停滯)는 신마산 지역에 국한되었을 뿐, 마산포(원마산)에는 대규모 매립이 시작되고 폭 8m의 근대식 도로가 개설되는 등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에 포스팅하겠습니다.

오늘은 1910년대 전후기, 일본인이 펴낸 두 권의 책에 나오는 마산관련 글을 소개합니다.
내용을 재구성할 수도 있지만 원본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다 싶어서 번역만 하여 그대로 올립니다.
일본인에 의해 작성된 자료이기 때문에 조사와 비교의 대상, 그리고 상황을 바라보는 입장과 관점에 일정한 편견이나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이 펴낸 책이나 한국인에 의해 직접 만들어진 자료 중 사용할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찾은 것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남궁준의『新朝鮮全誌 (唯一書館, 1913)』였습니다만 마산에 대한 부분이 너무 짧고 평범하여 인용할만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朝鮮誌』, 吉田英三郞, 1911년, p.587, 町田文林堂 

마산부(府)
․․․․시가(市街)는 신마산과 구마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가로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고 모든 관아 및 일본인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

구마산도 지금은 거의 신마산과 인가가 연접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이 잡거하면서 거리의 외관은 신마산에 필적하면서 항구의 주변은 번성하여 매월 5일되는 날을 기해 시장을 열고 상업이 매우 활발하다.

산업은 상업을 주로하며 그 다음이 어업이다. 공업은 아직 초보적 단계이며 정미업․비누․금물․기와제조․술․양조 등이다.

일본인이 1,656호에 인구가 6,310명이고 조선인이 1,570호에 7,100여명 거주한다.

주요 산물은 쌀․콩․우피․연초․목죽세공․어류․수산제조물 등이고 부청․진해만사령부방비대․지방재판소․구(區)재판소․헌병분대․경찰서․우편국․감옥분감․소학교․공립보통학교․지방금융조합․세관감시서․조선해수산조합지부․기타회사조합 등이 있고 구마산 및 신마산에 정거장이 있다.

『最新朝鮮地誌(中)』, 1918, pp.19-22, 朝鮮及滿洲社出版部

(1) 교통운수(交通運輸)
마산에는 외국으로 통하는 선박은 없지만 일본과의 항로는 대판상선회사의 대판-인천 간 정기선이 매월 4회 기항하고 있다. 그 외 연안 항로로서는 조선우선(郵船)회사의 부산-여수선, 부산-거제선의 정기선이 매월 2회 발착하는 것과 진해기선조합이 경영하는 마산-진해간의 1일 7회 왕복하는 작은 기선 3척이 있다.

육상운수는 철도를 이용해 삼랑진에서 경부선으로 접속하여 남북 각 도읍과의 교통이 편리하고 도로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인 진주에 통하는 2등도로, 칠원 및 창원으로 통하는 3등도로가 있다. 무엇보다도 차마(車馬)의 통행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특히 마산-진주 간에는 매일 자동차편있는데 거리는 17리(里, 1리 4km) 22정(丁, 1정 109.1m)이며 4시간이 소요된다.

(2) 시가(市街)
신마산과 구마산의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산록이 수려하고 가로의 구획이 정연하면서 시가지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다. 철도에서 동쪽으로 약 1리의 거리에 구마산으로 연결된다. 개항 후 거류지(신마산)를 설치하였으며 신시가지는 대부분 전부 일본인 상가(商街)로서 이루어져있다.

구마산은 옛날부터 군읍으로 알려진 소위 조선 마을로서 시구(市區)의 체제는 협소하고 불결하다. 그러나 조선인과 일본인이 혼거하면서 일반 상업은 신마산에 비해 번성한 편이다.

(3) 시장
신마산에는 어시장․식료품시장이 있고 구마산에는 잡화시장인 세 개의 시장이 있다.
어시장은 마산수산회사의 경영에 의해 수산물의 위탁 판매를 한다. 식료품시장은 생과(生果)․야채류의 위탁판매를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일 개시하는데 비해 구마산 시장은 매월 음력 5일․10일을 기해 개시하고 시장의 일일 판매고는 어시장 약 200원, 식료품시장 약 70원, 구마산 시장은 약 1,600원이다.

(4) 호수(戶數)
3,490호에 인구는 15,890인이다. 그 중 일본인은 1,135호에 4,497명이며 조선인은 2,341호에 11,351명이고 중국인 11호에 36인, 구미인 3호에 6명이 살고 있다.

(5) 관아 및 학교
마산부청․창원군청․마산경찰서․마산지방헌병분대․마산우체국․부산세관마산지서․부산지방법원마산지청․부산감옥마산분감․진해만중포병대대․조선주차군(駐箚軍)경리부마산파출소․마산지방금융조합․동척마산출장소․마산상업회의소․마산부립병원․마산학교조합․공립보통학교․공립마산심상고등소학교 등이 있다.

마지막 부분의 공립보통학교는 지금의 성호초등학교이며 공립마산심상고등소학교는 지금의 월영초등학교입니다. 그리고 이 학교의 고등부는 지금의 마산중학교 전신입니다.

이 두 자료는 전국규모로 한국을 소개하는 문헌 중 마산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숫자와 금액 등에서 사실과 약간의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에 접어든 1910대 마산은 위 책의 짧은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식민지성과 근대성이 혼재되고 있었고 그것이 이 도시의 정체성으로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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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7) - 개항이후

<다시 생각하는 개항 후 10년>

개항 직후 시작된 이 도시의 생성과 변화를 31회에 걸친 포스팅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처음 던졌어야할 질문을 뒤늦게 던져봅니다.

그들은 왜 '창원군 외서면 월영리와 신월리 해안'을 개항지로 삼았을까요?



근대 마산의 시작은 개항이었고 개항지는 마산포 남쪽 2㎞지점의 월영리와 신월리 일대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조계지였던 이곳은 ‘신마산’이라 불렀고 그들이 부른 ‘신마산’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항지로 선택되었던 월영리와 신월리,,,,, 그곳은 마산도시의 최남단으로 지형상 말단부였습니다.
동쪽은 합포만, 서쪽은 무학산이 막아 북쪽 마산포 쪽으로만 시역의 확장이 가능했던 좁은 공간이었습니다.

자연조건이 이러했슴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조계지로 선정되었던 이유는

① 외부와의 연결은 물론 당시에 문물교류 루트로 이용되었던 해로(海路)와의 입지적 조건이 유리하였으며

② 비록 면적은 넓지 않았지만 경사지와 해안평지를 동시에 끼고 있어서, 산업용지는 평지에 두어 해안을 이용하였고 주거용지는 경사지에 배치해 마산만의 경관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었으며

③ 마산포와는 2㎞ 거리였지만 지형적으로는 해안 평지로 이어지기 때문에 향후 도시 확장과정에서 연결이 용이한 지세였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개항지를 결정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월영리와 신월리를 택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신마산의 입지조건은 시역(市域)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무리한 토목공사가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다를 메우고 산을 깎아 가용부지를 넓혀나간 이 도시의 역사는 이와 같은 태생적 조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매끄럽지 못한 가로망 연결과 지금도 계속되는 매립 등 마산도시의 비효율적인 도시구조도 개항지의 위치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에 와서 개항지 결정에 대해 백번 말해봐야 자신의 탄생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부질 없는 줄은 알지만 '만약에,,,' 라는 마음이 없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마산의 개항지가 지금의 어시장과 남성동 일대인 '마산포' 였다면, 아니면 오산리였던 산호동이나 내륙이었던 양덕동 쪽이었다면 이 도시는 어찌되었을까요?
오늘처럼 이런 모습일까요?
상상할 수 없는 다른 모습이었을까요?

개항 후 10년,,,,
이 시기는 마산이 근대도시로 기틀을 잡기 시작했던 때였으며 서구의 온갖 근대적 문물들이 마산에 선을 보이기 시작했던 대변화의 시기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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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로써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2차 게재' 중 '개항(1899년) 이후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의 시기'가 끝났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음처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포스팅할 계획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1차 ; 고대부터 개항(1899년)까지
2차 ; 개항이후부터 해방(1945년)까지
3차 ;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미 완료한 '1차 게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려시대 이전 ------  9회
조선시대-----------  4회
개항기------------- 12회
합계--------------- 25회 완료

'2차 게재'는 다음처럼 구성하기로 했으며 그 첫번째 순서를 마쳤습니다.

개항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총 32회 (26회부터 57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1시기(1911년부터 1920년까지)
일제강점 제2시기(1921년부터 1930년까지)
일제강점 제3시기(1931년부터 1945년까지)

'3차 게재' 계획입니다.
산업화 이전시기(1945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도약 및 전성기(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체 및 쇠락기(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 본 연재는 마산도시를 연구하면서 확보한 자료를 공유하자는 목적도 있습니다.
   혹시 좋은 자료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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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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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1.05.09 09: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벌써 이렇게 진전이 되었나 하면서 놀랍니다.
    가랑비에 둑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계속 기다립니다.

2011.05.0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6) - 개항이후

<한일병합된 1910년 마산 모습>

도시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도시내부의 변화도 많았지만 도시외부의 변화도 있었습니다.

당시 마산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길은 크게 세 갈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동쪽으로 창원․덕산․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약 120리 길이 있었는데 바로 지금 진영을 거쳐 부산으로 연결되는 국도입니다. 이 길이 1909년 우마차가 쉽게 통행할 수 있는 신작로로 개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넓은 길은 없었습니다. 많은 물량을 실어 나를 수레도 없었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넓은 도로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청일과 러일 양 전쟁이 벌어지면서 일본군이 개통시킨 군사도로 경의․경인․경원선이 최초였으며 전국적으로 일반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이 도로의 확장공사는 매우 이른 편이었습니다.

또 다른 길은 서쪽으로 진동을 지나 진주로 가는 140리 길이었습니다.
좁은 오솔길로 여러 개의 험준한 산마루를 넘어야 했던 길이었습니다만 1908년 6월 폭 5m로 확장공사가 시행되어 1911년 3월 완성되었습니다(
朝鮮總督府 官報 第211號, 1911. 5. 16)

세 번째는 북쪽으로 칠원․창녕․현풍․성주를 지나 서울로 연결되는 길이었는데 확장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음 그림은 병합 당시(1910년) 마산일대 도시상황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1899년 직전의 마산일대 지도(2010/08/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 - 개항기)를 기초로, 개항기 동안 간행된 각종 문헌을 자료로 활용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지도의 아래 쪽 노란 색 칠한 부분이 신마산인데 노란색 중간 쯤 보이는 신월천(현 깡통거리)까지가 조계지였습니다.
하지만 개항 10년 후인 1910년 경, 이미 일본인들은 북쪽 원마산 방향으로 많이 뻗어나왔습니다. 근대식 도로도 현재의 장군천까지 건설되었습니다.

도시 중심에 길게 나있는 검은 선이 1905년에 개통한 철도 마산선입니다.
신마산 쪽에 마산역이, 원마산 인근(현 육호광장)에 구마산역이 있었으며, 이때 난 철로가 현 경남은행 본점 앞 중앙간선도로입니다.

지도처럼 마산포(원마산)와 신마산에만 도시가 형성되었을 뿐, 완월, 자산, 회원, 양덕, 석전, 합성지역 등은 그때까지 자그마한 자연취락이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일제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같은 달 29일 이 사실을 정식으로 공포함으로써 한반도가 자신들의 땅임을 공식화하였습니다.

이후 일본은 한국사회를 식민지 구조로 재편하였고, 그 과정에서 1911년 1월 1일 진해군항보호를 구실로 마산의 개항장을 폐쇄했습니다.

그러나 개항 당시에도 일본과의 교역 외에 타 국가와의 교역이 미미했던 마산항은 폐항이 된 이후에도 한국산 쌀의 대일 수출과 일제 소비성 물자 및 군수품 수입항으로 계속 활용됨으로써 크게 위축되지는 않았습니다.

개항과 함께 찾아온 인구의 증가와 근대적 도시시설 출현, 일제에 의한 정명변경(町名變更) 등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으면서 마산포의 도시구조는 급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듯이 성장 일변도의 길을 걸어온 마산도 1911년 진해에 군항이 설치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진해>

당시 진해 사정과 관련지어 마산도시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자료를 소개합니다.

먼저 평정빈부(平井斌夫)가 쓴『마산과 진해만』의 기록입니다.

‘1911년 1월 마산의 개항이 폐쇄되면서 산업이 위축될 것 같았지만 원마산의 왕성한 교역과 상거래, 진해만 군사시설의 건축, 진해 신시가지의 건설 등에 의해 오히려 폐쇄 전보다 시장이 활발해졌다’ 고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최근 친일 문제로 시끄러운 장지연의 『마산기행』기록입니다.

‘한 때 번성의 극치를 이룬 마산은 진해에 군항을 설치한 이래 마산의 상인들이 진해 쪽으로 넘어가는 이가 많아 요사이는 오히려 1911년 이후 인구가 줄어들고 점포들도 활기를 과거에 비해 잃었다’
고 한 것입니다.

두 주장은 각각 나름의 근거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개항기 이후 발간된 자료들과 1911년에 시작되는 남성동 해안 매립공사 등을 보면 장지연의 글처럼 마산이 비록 ‘과거에 비해 활기를 잃었다’ 하더라도 마산도시 전체가 크게 위축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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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비 2011.05.02 10:3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옛날 진해의 모습이 훨씬 정도되고 좋은 것 같네요.

    • 허정도 2011.05.02 20:57 신고 address edit & del

      일제의 진해 건설 초기사진입니다.
      잘 계시죠?

    • blokken 2011.05.13 08:39 신고 address edit & del

      잘 계시죠?

2011.02.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각국공동조계지 조성 때의 매립>

각국공동조계지를 건설할 때, 해안선의 경계는 해수의 간조선과 만조선을 고려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계지의 북단과 남단은 만조선이 깊어서 매립을 한 후 호안공사를 했으며, 중앙부 세관지역을 비롯한 호안선은 전부 매립이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매립여부가 잘 나타납니다.
노란선은 현재 시내버스가 다니는 간선도로인데 그림의 비교를 위해 그었습니다.

이 지도는 1899년 마산개항 때 각국조계장정에 첨부되었던 것입니다.
전체 조계지 중에서 1차로 조성할 부분이 표기되어 있는데, 마침 간조선(Low Water Line)과 만조선(High Water Line)이 표기되어 있어서 매립여부를 판단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 그림은 1916년 일본 육지측량부가 제작해서 발행한 같은 지역의 지도로 조계지 조성공사가 거의 완료된 후 간행된 것입니다.


두 지도를 비교해보면 붉은 원으로 표기한 세 지역이 매립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큰 면적은 아니지만 남북단의 만조선이 도로의 위치보다 안쪽으로 나타나 있으며, 도로공사 후에는 호안선이 만조선보다 아래로 내려온 것이 매립사실을 증명해줍니다.

순전히 추정이지만 면적은  5-6천 평 정도인 것 같으며, 매립시기는 직전에 포스팅한 마산역 매립공사와 비슷한 시기인 1904-5년 정도로 추정합니다.

이 매립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글이 있습니다.
일본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이『마산항지』에서, 개항초기에는 조계지의 북쪽 신월천 하구(오른쪽 붉은 원 지역)가 바다를 매립한 곳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
습니다.

「․․․․․昌原橋より斜に新月洞に向つて上る道路は埋築したもので予は路傍の潮溜に三四回沙魚釣を試みたこともある, 居留地より來る路線は茲に劃塞せられ其の東方一帶は一面の蘆山である

․․․․․․창원교에서 비스듬히 신월동으로 향하여 오르는 도로는 매축한 것으로서 나는 도로 옆의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이 고이는 여울에서 서너 차례 망둥어 낚시를 해본 적도 있다. 거류지에서 오는 노선은 여기서 끊어지고 그 동쪽 일대는 하나의 갈대밭이다․․․․․」

글 머리의 창원교는 지금은 땅속으로 들어가버린 현 통술거리의 깡통골목 지하 하천을 건너던 다리입니다. 지하하천의 명칭은 신월천이었으며, 지도의 초록색 점이 창원교가 있었던 위치입니다.
신월천에는 창원교 외에 완월교(깡통골목 입구), 웅천교(완월교 윗편) 등 세 개의 다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육지 한복판인 이곳에서 갈대밭에 노는 망둥어를 낚시질 했다니,,,, 세월의 무상함에 옷깃을 여밉니다.

아래 그림은 위 지도의 현재 위성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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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5) - 개항기

<다시 생각하는 마산 개항>


이것으로 개항기까지의 글은 마감합니다.

정리하는 의미로 최근 찍은 항공사진에 1899년 문을 연 마산개항장의 위치를 표시해 보았습니다.
노란색의 조계지를 포함한 도시전부가 당시에는 모두 논밭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탐욕스럽게 똬리를 틀었던 저 조계지가 근간이 되어 오늘날 마산도시의 골격이 형성되었습니다.

111년 동안 있었던 도시의 생성과 변환,,,,,
넓게 펼쳐진 저 도시가 노란색 조계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도시가 생명체임이 다시 한 번 실감납니다.


그렇다면 마산개항은 우리 정부가 자의적으로 했을까요? 아니면 열강의 강제에 의한 것일까요?

마산 개항의 성격은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크게보면,
대한제국 정부에 의한 자의적인 개항이다.
아니다, 열강의 강요에 의한 강제적인 개항이다.
그도 아니다, 그 둘이 섞인 복합적인 성격이다.
라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자의론(自意論)은 대한제국 정부가 러시아와 일본 등 열강과의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여 실익을 얻는다는 목적으로 시도한 자개조약항(自開條約港)이므로 다른 개항지와는 성격규정을 달리해야한다는 주장을 두고하는 말입니다.
일본학자 오평무언(奧平武彦), 전 부산대 김용욱 교수, 그리고 우리 지역에서는 김상민 선생이 이 주장에 힘을 실었습니다.

두 번째 강제론(强制論)은 설령 형식이 자주적이라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볼 때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강요에 불과한 굴욕적 개항이라는 주장입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 교수, 한국 개항장을 연구한 이현종 교수가 이쪽입니다. 또 경남대 유장근 교수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개항의 성격을 파악해야한다면서 이 주장에 동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복합론(複合論)은 이런 두 상반된 내용을 복합적으로 받아들여  강제적 의미와 자주적 의미가 동시에 담겨있다는 주장입니다.
경남대 사학과 김봉렬 교수를 비롯해 『마산시사(馬山市史)』『마산개항백년사』등 지역에서 발간된 관찬자료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1999년 발행된 마산개항100주년 기념우표>

마산이라는 도시명칭이 사라져버린 지금 보면 격세지감이 듭니다만 이런 상반된 주장 때문에 2001년 5월 30일 마산에서는 '시민의 날' 문제를 두고 토론회를 열고 여론조사도 했습니다.
마산 개항일인 5월 1일은 굴욕적인 강제개항일이기 때문에 시민의 날로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산개항의 성격은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의 당사국인 일본에서는 정작 마산개항을 어떻게 보고있는지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일본인이 간행한 몇몇 문건에 나타난 마산포개항 관련내용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① 조선의 항만, 1925, p.35, 조선총독부 내무부
한국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응하여 마산포를 개항장으로 하고․․․․(京城政府ハ日本ノ要求ニ應シ馬山浦ラ開港場トスヘク․․․․)」

② 諏方史郞, 馬山港誌, 1926, p.43, 朝鮮史談會
「한국정부는 우리(일본)제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함경북도 성진, 전라북도 군산와 함께 마산포․․․․(韓國政府は我が帝國の要求を容れ咸鏡北道城津, 全羅北道群山と共に馬山浦․․․․)」

③ 諏方史郞, 앞의 책, p.93
「개항일인 5월 1일을 개항기념일이라 칭하고 지금부터 거류민단 구역 내의 공휴일로 정해․․․․(馬山の開港日たる五月一日を開港記念日と稱し自今居留民團區域內の公休日と定む․․․․)」

④ 松岡美吉山․溝口秀次郞, 躍進馬山の全貌, 1941, p.26, 명승고적보존회
「우리 제국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인 한국정부는 창원군의 외서면 해안에 있는 월영, 신월․․․․(我が帝國政府の要求を入れた韓國政府は昌原郡內 外西面の海岸であゐ, 月影, 新月․․․․)」

우리들이 마산개항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더라도 정작 일본인들은 이처럼 ‘자신들의 의지로 개항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글은 위의 네 사례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이 땅을 식민지화시킨 뒤에 쓰여진 결과론적 기록이긴합니다만 지배국과 피지배국의 차이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일본인의 이런 입장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된다는 당위성을 주기도합니다.

도시사적 입장에서 볼 때,
일제의 식민지배는 마산포라는 전통취락도시를 근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공공적 도시행정과 수탈목적의 도시계획으로 점철된 식민지적 근대화였습니다.
개항은 바로 그 시작이었습니다. <<<

----------------------------------------------------------------------------

이 글로써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1차 게재'가 끝났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음처럼 3단계로 나누어 포스팅할 계획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1차 ; 고대로부터 개항(1899년)까지
2차 ; 개항이후부터 해방(1945년)까지
3차 ;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완료한 '1차 게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습니다.

고려시대 이전 ------  9회
조선시대-----------  4회
개항기------------- 12회
합계----------------25회 완료

다음 주 부터 2차 게재를 시작하겠습니다.
개항(1899년) 이후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 먼저 포스팅하겠습니다.

<2차 게재>

개항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 - 다음 주 부터 게재
일제강점 제1시기(1911년부터 1920년까지)
일제강점 제2시기(1921년부터 1930년까지)
일제강점 제3시기(1931년부터 1945년까지)

<3차 게재>
산업화 이전시기(1945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도약 및 전성기(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체 및 쇠락기(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 본 연재는 마산도시를 연구하면서 확보한 자료를 공유하자는 목적도 있습니다.
   혹시 좋은 자료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2010/04/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2010/04/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2010/04/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2010/04/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2010/05/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4) - 고려시대
2010/05/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2010/05/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 - 고려시대
2010/05/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 - 고려시대
2010/05/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2010/06/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2010/06/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2010/06/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2010/06/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2010/07/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 - 조선후기
2010/07/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 - 개항기
2010/07/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 - 개항기
2010/07/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 - 개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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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0.09.27 11: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수고했습니다.
    잘 정리해 주어서 고맙기도 하고...

    • 허정도 2010.09.27 15:20 신고 address edit & del

      별 말씀을,,, 모두 귀하 덕분이요

  2. 선비 2010.09.27 13:2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예전에 강의를 들으면서 선생님의 노고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의 논리에 의해 아메바와 같이 커가는 도시를 우리는 늘 방관만 하고 있었지요.
    이제는 변해야겠지요.
    우리의 도시에 대해 늘 고민하는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 허정도 2010.09.27 15:22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한 도시가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이 요구되지요.

2010.08.0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 - 개항기

<마산이 문을 열다>

1899년 5월1일, 마산이 문을 열었습니다.
'개항'이라는 이름으로 인근 신월리와 월영리(현, 신월동과 월영동)에 '각국공동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이 도시는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습니다.
'조계지'의 위치는 마산포의 남쪽 약 2km 거리의 해안이었습니다.
 


개항은 긴 세월 동안 마산사람들 삶의 터전이었던 마산포의 도시구조에도 결정적인 변화와 충격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마산포(원마산)의 모든 것들은 개항지인 소위 ‘신마산’과의 관계 속에서 진행됩니다.

마산포 개항은 1898년 5월 26일 의정부 회의에서 찬성 7표 반대 3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사흘 뒤인 5월 29일, 대한제국 외부대신이 마산포․군산․성진의 개항과 평양의 개시(開市)가 결정되었음을 각국 공사에게 통고하였습니다.
이 중 평양은 연기되었고 마산포․군산․성진 만 시행되었습니다.

개항업무를 관장하기위해 구(舊) 조창전운사아문(漕倉轉運使衙門)이었던「마산창」자리(현 남성동 파출소 일대)에 「창원감리서」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원군수 안길수를 창원감리서리로 겸임시킨 후 1년 이내에 개항준비를 마치도록 명령했으며, 해관(海關)측량사를 마산포에 파견하여 그 해 8월까지 조계지로 사용할 부지의 측량을 마치게 하였습니다.

외부대신의 명령을 받은 창원감리는 곧바로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 138,880여 평을 구획하여 각국공동조계지로 정하고 이를 1899년 5월 1일 각국 대표자인 부산세관장 스카글리오티(A. Scagliotti, 이태리인)에게 인도함으로써 마산포 개항이 시작되었습니다.
조계장정의 조인은 같은 해 6월 2일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공사가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스카글리오티는 각국공동조계지를 인도한 후 곧바로 창원감리서 내에 부산세관 마산출장소를 설치하고 출장소 주임에 독일인 아르노스(Arnous)를, 보조로 일본인 관세사 등본종태랑(藤本鍾太郞)과 고교가길(高橋嘉吉)을 임명하여 조계지 획성(劃成)업무를 보게 하였습니다.

지금의 '신마산'은 개항기 때 설계한 '조계지'의 도시형태 그대로입니다. 현 마산도시의 공간구조가 '조계지'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개항 당시 '조계지'의 설계는 현 마산도시구조의 근간이었습니다. 시내 간선도로를 살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 선생은 마산 조계지의 설계자가 네델란드인 스태든이라고 했습니다.

스태든은 일찌기 주한 초대 영국공사 파크스와 초대 경성총영사 아스톤(W. G. Aston)에 의해 고용된 측량기사입니다.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그들과 더불어 내한하여 마산조계지 외에도 인천 목포 군산 등 여섯군데 조계지를 설계하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마산포에 파견된 해관측량사'가 스태든 아닌가 싶습니다.

아래의 그림이 조계장정에 첨부되었던 마산의 각국공동조계지 설계도면입니다.
설계도면에 그은 푸른색 안쪽 부분과 현재 도시 상황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개항 때의 도시계획이 이 도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계지가 확정되자 공동조계의 획정을 내용으로 하는 조계장정을 조인했습니다.

각국공동조계지로 구획된 토지는 제1등지(甲地區․A地區․Low Lying Lots․低地區), 제2등지(乙地區․B地區․Hill Lots․山地區․高地區), 제3등지(丙地區․C地區․Foreshore Lots․海邊地區) 3종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제1등지는 해안에 근접한 상업지로 현재 시내버스가 다니는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동쪽 바닷가 일대입니다. 위 설계도면에 표기된 부분이 제1등지입니다.
제2등지는 제1등지가 근접해 마주보는 서쪽일대였으며, 제3등지는 제일여고 정문앞도로 주변의 경사지였습니다.

조계장정에는 조계지 주위 10여리를 개방하여 매매와 양도가 가능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조계지 내에는 경작을 금지하고 오직 건축만 하도록 했으며 위험하거나 고열을 취급하는 건물은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조계지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마산포각국조계(馬山浦各國租界)’라는 문자를 조각한 표목을 경계선 양단의 만조점에 각각 한 개씩, 그리고 조계지 구역 경계선이 꺾어지는 지점마다 한 개씩 세웠습니다.

마산에 외국인이 합법적으로 살 수 있었던 최초의 땅 '마산포 각국공동조계지'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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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 - 개항기

<개항기 마산의 모습은?>

「일 강경 이 창원」, 「동해 원산, 서해 강경, 남해 마산」 등의 찬사를 받았던 옛 마산의 도시 모습은 어땠을까요?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었던 1899년 개항 당시 마산의 모습은 아래 그림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마산도시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여러 자료를 토대로 그려본 추정도입니다.
개항기라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는 도시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시대 마산일대 지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중간 쯤에 노란색이 짙게 칠해진 삼각형 부분이 마산포(원마산)입니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 표시된 회색은 간석지입니다. 간석지의 폭은 최단 70m 최장 200m 정도였으며 봉암지역의 간석지 폭은 1km정도 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하천은 모두 10군데가 있었습니다.
남쪽에서부터 월영천(경남대정문앞, 복개), 창원천, 신월천(깡통골목, 복개), 장군천, 척산천(자산동 경남데파트 옆, 복개), 교방천, 회원천, 삼호천, 산호천, 양덕천 모두 10개였습니다. 그 중 세 하천은 복개되어 지금은 땅 밑으로만 흐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붐볐던 마산포를 약간 벗어난 지역, 즉 남쪽으로 지금의 신마산 방면과 서북쪽으로 회원동과 양덕동 방면은 민가가 산재한 경작지로서 그때까지 농경사회의 취락형태를 못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노란색이 옅게 칠해진 부분이 현재의 마산도시지역인데 당시에는 대부분 논밭이었습니다.

마산포 인근의 취락은 해안지역에 현재의 산호동(당시 오산리)과 봉암동 일대, 그리고 내륙지역에 월영․신월․완월․자산․성호․교방․상남․회원․석전․회성․양덕․합성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림에서 검은색의 작은 점들이 마을입니다.

외부로 연결되는 도로는 크게 세 개가 있었습니다. 
마산포를 기준으로 북쪽 방향으로 현 양덕동을 기점으로 창원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창원가도.
칠원, 창녕, 현풍, 성주를 지나 서울로 가는 길.
그리고 남쪽으로 구 크리스탈 호텔 앞을 지나 월영리와 지금의 삼진지역인 진해현을 거쳐 진주로 가는 진주가도가 있었습니다.

신마산 방향에서 볼 때 마산포의 입구라 할 수 있는 현 몽고정 부근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라고 쓴 장승이 여러 개 서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다음 그림은 노란 색으로 짙게 표시된 마산포 부분을 확대하여 상세히 그린 것입니다.



마산포(원마산)는 마산창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연발생 취락이었습니다.
현재의 남성동 일대를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으며 도시의 전체적인 범역은 삼각형 모양이었습니다.
가옥은 2,000여 호 가량이 조밀하게 들어서있었는데 대부분 초가였습니다.

도로변에는 상점이 들어서있었고 안쪽에는 주거용 건물이었는데 해변에 접한 도로변이 다른 길에 비해 더 번성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길은 보행전용 혹은 손수레나 지게 정도 통행이 가능한 폭 2m 전후의 좁은 골목이었고 이 골목들이 마산포 전체에 거미줄처럼 얽혀있었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동성동, 남성동, 창동의 골목길은 모두 그 때 부터 있었던 길입니다. 1760년 마산창이 설치된 후에 생긴 길이니 족히 200년은 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심재생이 최근 화둔데 이 골목길을 역사문화공간으로 살린다면 재생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보르겠습니다.
신도시에서는 돈주고도 못 사드릴 골목이니 말입니다.


해변에는 동․서 2개의 굴강과 서성선창․백일세선창․어선창․오산선창 등 4개의 선창이 직선거리 500m 정도 내에 있었습니다.
항만은 대부분 천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습니다만, 조창건립 당시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초보적 접안시설인 석축돌제(石築突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 지도에서 보았던 원래의 해안선과 지금의 해안선을 비교해보면 그 동안 마산 앞바다에 매립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음 두 그림이 매립 전의 해안선과 현재 해안선을 비교한 그림입니다.
오른쪽 그림의 매립부분 중 노란색 선을 그은 부분은 해양신도시 조성을 위해 계획되어 있는 매립과 신항만 조성 매립계획 부분입니다.


,,,,,,,,,,,,,넉넉했던 마산앞바다가 지난 100년 동안 참 많이도 쪼그라들었습니다.
             해양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저 매립계획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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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 - 개항기


<마산개항의 배경>

한국 개항의 효시인 부산에 일본단독조계가 설치된 이후 전국의 여러 도시에 조계(租界)가 계속 설치되었습니다.

1876년 부산에서 시작된 조선의 개항은 1880년대에 원산·인천·서울(*)·용산(*)·경흥(*), 1890년대에는 진남포·목포·평양(*)·마산·군산·성진, 1900년대에 들어 의주(*)·용암포·청진까지 모두 15곳을 개방하였습니다. (*)표는 개시장(開市場)입니다.

아래 그림은 전국개항장의 위치도(1890년대 이전 , 1890년대 , 1900년대 )입니다.



다음 사진은 대표적인 개항도시였던 인천개항장의 근경(위) 및 부산개항장의 원경(아래)입니다.




1890년대에 접어들자 조선은 강대국들의 이권쟁탈외교 각축장이 되어갔습니다.
특히 철도․광산․은행․통신․어업 등에서 이권을 독점하기 위한 경쟁이 격렬했고, 이러한 왜곡된 외교정세 때문에 국내 사정은 점차 악화되어 갔습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런 상황을 조정하는 한편 경제적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 강제로 개항장이 된 부산․원산․인천과 달리 1897년에 자발적으로 목포와 진남포를 개방하였습니다.
단독조계를 두었던 과거와 달리 목포와 진남포에는 각국공동조계지 만을 두어 열강들의 상호견제로 인한 세력균형 속에서 실익을 도모했습니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의 이런 의도와는 달리 목포와 진남포에 설치된 공동조계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토지이권다툼이 노골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산포는 그로 부터 2년 뒤인 1899년에 군산․성진과 함께 개항되었습니다.
마산.군산.성진
 개항은 앞의 목포․진남포와 같이 외견상으로 자발적이었고 그 형식과 절차도 목포.진남포와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개항이 결정되기까지 마산포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다툼은 목포와 진남포보다 더욱 치열했습니다.

개항직후인 1900년에 제정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조선에 관한 기술(記述)』에서 ‘마산포와 군산을 일찍이 영국에서도 장래성 있는 항구라고 평가했다’ 고 하면서 군산만(群山灣)은 자연적인 조건이 편리하지 못한데 반해 마산포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마산항의 상세(商勢)와 입지를 극찬하고 그들이 일본보다 마산항을 선점해야하는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산포는 부산에서 서쪽으로 60베르스트(verst, 핀란드의 옛단위, 1베르스트는 0.6641마일 또는 1.069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조선의 남쪽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지였다.
외국상업을 위해서 개방되자 이로 인해 현저한 타격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부산과 함께 상당한 양의 무역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조건이 우세하여 개항 이후 현재 부산항에 위협을 주는 경쟁지로 되었다.
만약 부산에 커다란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일본인들이 지금의 우세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부산의 모든 상업상 가치를 빼앗아 버릴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러시아뿐만 아니라 19세기말 모든 제국주의국가들에 깔려있었던 마산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마산 개항에는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이를 견제한 '일본의 대륙정책'이 많은 작용을 했습니다.

'러시아 남하정책'은 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한반도 남쪽에 부동항(不凍港)을 건설하여 자국의 블라디보스토크과 중국 요녕성의 여순을 해상으로 연결하려고 했던 정책입니다.

'일본의 대륙정책'은 이와 같은 러시아의 해양세력 확장계획에 대한 견제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향한 자국 세력 확장을 위한 거점으로서 마산포를 수중에 넣으려한 정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 각축의 먹잇감이 마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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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 - 개항기

'개항기'에 대한 글은 모두 10편으로 나누어 올릴 예정입니다.
도시문제에 시각을 맞추겠습니다만 개항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간략히 싣겠습니다.
이 글은 마산개항 직전의 국내외 상황을 소략하게 쓴 글입니다.


<개항 전야>

19세기 중엽,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 확보를 위해 동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는 19세기 중엽에 베트남을 지배하고 캄푸치아를 보호령으로 하였고, 일찌감치 인도를 병합한 영국은 19세기 전반기에는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여 미얀마와 말레이반도를 수중에 넣었으며 아편전쟁을 계기로 홍콩을 얻었습니다.
홍콩을 내 준 중국은 그 후 프랑스·러시아·미국 등에도 문호를 개방하였습니다.

이 무렵 일본은 태평양을 건너 온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강경했던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1854년 카나카와(神奈川)조약을 시작으로 영국․러시아․네덜란드 등 여러 선진 국가들도 받아드렸습니다.

1868년 일본은 하급 무사계급의 주동으로 명치유신을 단행하고 천황제 전제국가를 수립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시급한 과제는 빠른 시일 내에 자국의 후진성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양이쇄국정책(壤夷鎖國政策)이 대세였습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구미각국의 여러 차례 통상요구가 있었고 이로 인한 갈등과 충돌도 많았지만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여론을 등에 업고 굳어 갔습니다.

명치유신 후 일본정부는 덕천막부가 폐지된 사실을 조선정부에 통고합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조선정부는 문서의 격식과 인장이 옛 것과 다르다 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고종 9년(1872년)에 일본은 외무대신 화방의질(花房義質)을 부산에 파견하여 교섭을 추진했으나 조선정부는 이도 거절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일본지배층 내부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일본의 각료회의에서 조선침략에 대한 찬반논쟁을 하는 장면을 그린 「
정한논쟁도(征韓論爭圖)」입니다.


정한론에 힘입어 일본지배층은 장차 조선 침략에 필요한 조사도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침략 초기에 사용된 조선관련 문헌 중 대표적인 저작 『조선사정(朝鮮事情), 1876』도 이 때 나왔습니다.

정한계획의 실체는 1875년에 일어난 「강화도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일본은 그들이 당했던 것과 똑 같이 군함 운양호(위 사진)의 무력시위로 조선을 위협하여 강화도조약 혹은 병자수호조약으로 불리는 불평등한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선은 부산·원산·인천의 3개 항구를 일본에 개방했고 치외법권을 인정했으며 일본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하게 됩니다.

서구제국의 개항압력에도 불구하고 쇄국정책을 견지한 조선은, 서구제국에 의해 강제로 개방된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었습니다.

일본에게 문을 연 조선정부는 그 뒤 미국·중국·영국·독일·이태리·러시아·프랑스·벨기에·덴마크와도 수호조약을 맺고 전국 주요 도시의 문을 개항(開港) 혹은 개시(開市)라는 이름으로 열었습니다. 
마산포 개항도 그 산물이었습니다.<<<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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