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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9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57일이었다) 3년 동안엔 거의 매일 바냇들 길로 다녔었다. 등교 땐 공군병원 스리쿼터를 많이 탔지만 하교 땐 거의 빠짐없이 그 길로 다녔다.

당시엔 모든 학교가 오후 세시경이면 파했기 때문에 부림시장, 철로, 바냇들에서 구경하고 장난칠 여유가 좀 많았었다.

바냇들은 용마산과 문둥산(반월산을 두고 그 땐 그렇게 불렀다. 거기에 한센일들 집단 수용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 꽤 넓은 들을 말하는데 동쪽 끝은 국도2호선, 서쪽 끝은 회원동 창신농업고등학교(현 회원동 한효아파트)까지를 대강 그렇게 불렀었다.

동쪽 끝에는 신흥방직주식회사(일제 때부터 있어온, 짐작에 만여 평이 넘었던 듯한 공장. 지금 신세계백화점 남쪽)가 있었는데, 1960년대까지도 존속했던 큰 회사였다.

1956년쯤 시내쪽으로 인접해 신한가공이라는 회사가 설립되고 그 바로 옆으로 새 길이 남으로써 산호동에서 회원동까지 차가 다닐 수 있는 벌판길이 형성되었다.

들 동북쪽, 지금의 종합운동장 위치 정도에 벽돌공장이 있었고, 그 남쪽 칠팔십 미터 쯤에 네댓 채의 집과 두세 채의 집이 각각 있었을 뿐 주로 논뿐인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그런데 그 들판에 대한 기억으로 배배꼬인 벼 잎이나 갈라진 논바닥이 거의 전부이고, 누렇게 물든 풍요로운 들판의 기억은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들판 규모에 비해 수로가 너무 빈약하여 가뭄을 많이 탔던 것 같다. 수원(水源)은 무학산 밖에 없겠는데 수로가 몇 안 되고 작아 벌판 남북을 횡단해 나 있었던 철로(3·15대로) 아래쪽으로는 물이 얼마 안 흘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1950년대 바냇들 지도와 현재>

 

우리 동네에서 선배 세 명, 동기 네 명, 후배 한 명이 함께 다녔으므로 으레 등하교 때 두세 명이나 네댓 명이 함께 다니기 마련이었다.

학교 파하면 몽고정에서 두레박 물을 얻어 마셔가면서 철로변(3·15기념탑 옆 도도록한 지역이 구마산 역이었던 현 육호광장에서 신마산 역이었던 월포동 벽산블루밍아파트로 가는 철도 부지)를 따라 부림시장을 지났다. 시간에 쫓길 땐 철로 따라 바로 갔지만 대부분의 경우 볼거리가 많은 시장 길로 다녔던 것이다.

전쟁 중에도 그랬지만 정전 후에는 더 많은 군용물자들이 흘러나와 사람들을 많이 불러 모았다. 거기에다 온갖 약장수, 마술사 등이 재주와 속임수를 부려 사람들을 모았다.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기웃거렸고 때론 넋을 잃기도 하면서 다니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걸 배워 흉내 내는 재미도 꽤 괜찮았다.

생각나는 하나가 있다.

사오십 센티 정도의 철로 조각 위에 돌을 올려놓고 수도(手刀)로 내려쳐 깨는 위력에 감탄하며 한참 보다가 집으로 향했는데, 구마산 역을 넘어 철로타고 오다가(철로 위로 걷기를 즐겼었다) 한 친구가 그걸 보여주는 것이었다.

처음엔 우리도 어리둥절했었는데 설명을 듣고 해보니 의외로 쉬웠다. 왼손바닥 오른쪽 끝으로 돌 끝을 잡고, 왼손 등을 철로에 붙이고, 돌이 철로에서 일 센티 정도 떨어지게 하고는 오른손 수도로 돌을 내려치면 순간적으로 돌이 쇠에 부딪치면서 깨어진다. 사실상 속임수였는데 우린 그걸 또 후배들한테 써먹으면서 우쭐대기도 했었다.

일 년에 한두 번이었지만 부림시장에서 구마산 역으로 가다 들렀던 환상적인 맛집도 생각난다.

지금 백제삼계탕 앞 주차장에 있었던 중앙중학교 담벼락에 붙여 지은 판잣집 가게였는데, 젠자이(단팥죽의 일본말)에 국화빵을 찢어 넣어 먹는 맛은 그때의 우리들에겐 그야말로 꿀보다 더한 맛이었다.

<합천 5일장에 가면 지금도 국화빵 넣은 단팥죽을 사먹을 수 있다>

 

구마산 역에서 삼사백 미터 가다가 용마산 끝자락쯤에서 벌판길로 들어서는데(지금 운동장 방향의 길) 거기에서 왼쪽 길로 가면 한센인들 집단촌을 거쳐 율림동, 합성동(그때는 창원군)으로 가고, 오른쪽 길로 곧장 가면 신한가공 쪽이었다. 이 길로 가다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가면 어린교로 통했는데(현 백화점 북쪽 옆길 쯤) 이 길 외에도 군데군데 논두렁길 길들이 많았다.

들 가운데쯤에 삼사기 정도의 묘역이 있었는데, 지금 추상으로 이백여 평은 족히 되었음직한 넓이였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온갖 장난질을 다하며 놀았다.

무릎치기, 말놀이 등을 많이 했고, 긴 풀잎끼리 맺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소위 결초놀이도 했다. 감정을 못 푼 친구끼리 혹은 타교생끼리 한판 겨루는 장소로도 활용되었고, 동중이나 창신중에 다니는 동네친구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부모님 속여 모은 돈으로 부림시장에서 깡통(미군용 휴대식품 통조림) 몇 개 사서 파티 장소로도 거기가 안성맞춤이었다.

한편 한센인들과 애기들을 연관시킨 무서운 소문들이 떠돌았던 때라 어둑살이 지면 그쪽으로 두려움의 눈길이 가기도 했고, 용마산 북쪽비탈에 자리 잡은 공동묘지도 비 오고 컴컴해질 땐 공포감을 주기에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기도 했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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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8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0

10. 정권 후의 체험들 - 깡통문화, 총탄

 

정전 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행진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마산에서도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나 형들로부터 엿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였던 기억은 없다.

아마 선생님의 설명을 통하여 상황인식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정부에선 백두산까지 밀고 올라가 통일하자고 했는데 유엔이 정전을 강행했다는 것만 알았다.

혼자서 수류탄을 들고 적 탱크 밑으로 들어가 산화한 전쟁영웅 열 명의 사진에 간단한 설명을 붙인 소의 육탄 십 용사포스터가 교실 벽마다 붙었고, 그들은 한동안 반공웅변대회의 중심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에 있는 '육탄 십용사' 충용탑>

 

그리고 이때부터 각 학교에서 반공강연회가 수시로 열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에 비해 훨씬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소위 양키시장이라 불리던 곳에 쏟아져 나왔던 깡통식품들에 대한 기억과 쉽게 만질 수 있을 정도로 흘러 다녔던 총탄과 그걸 이용한 총 놀이, 그리고 군에서 불하된 트럭들로 인한 차타기 경험들이었다.

부림시장을 국제시장이라 부르기도 했고, 거기에 있었던 극장을 국제극장이라 명명했던 이유이기도 했는데, 마산에서 미군물자를 가장 많이 취급하던 곳이 그 시장이었다. 지금 부림지하도 근처에 철로가 있었는데 그 양쪽 시장이 중심지였다.

깡통식품뿐 아니고 옷, 구두, 야전침대, 공구 등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물품들이 나왔었다고 기억되는데 거의 모두가 군수품들이었다.

전쟁 중에는 몰래 빼돌려진 물건들이 조금씩 나왔었지만 정전이 되어 미군이 대다수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전쟁잉여물자가 되어 시중으로 범람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정전 두어 달 후가 되겠는데, 집집마다 깡통 배급이 나왔다. 한 되 남짓들이 깡통이었다. 전쟁용 비축식품들이었는데 잉여 물품들이 되어 전 국민들에게 배급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식구가 많아 3개였다. 따보니 콩과 쇠고기로 만든 통조림이었는데 처음 먹어볼 때의 그 고소하고 진한 맛에 대한 끌림은 그 후에 국제시장을 더 찾게 했다.

그러나 그 기름진 음식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설사에 시달리기도 했었다고 후에 들었다.

 

<미국에서 온 구호품을 보며 내심 기대하는 아이들>

 

이렇게 깡통제품들이 흔해지니 우리들 생활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주로 나무로 만들어졌던 두레박이 양철제품으로 바뀌었고, 나무함지도 가볍고 튼튼한 양철다라이(다라이는 대야의 일본 말)로 대부분 바뀌었다.

웅덩이 물 두레도 그랬고, 각종 그릇들도 강통이 대신했다. 가을 논의 참새 떼 쫓는데도 수많은 깡통이 동원되었다. 또 깡통차기라는 놀이도 생겼다.

전에는 자치기나 비석놀이, 일제잔재인 다스께또놀이(술래잡기와 비슷) 등을 주로 했는데 이 놀이가 나온 뒤로는 역동성과 소리의 효과로 해서 이걸 많이 했던 것 같다.

술래보다 먼저 달려가 깡통을 차서 소리와 함께 깡통이 날아가고, 잡힌 동료들이 해방될 때의 쾌감은 큰 즐거움이었다.

정전 후 군대 내의 무기 관리체계가 좀 엉성했던지 이상할 정도로 총알들이 많이 굴러다녔었다.

주로 칼빈 탄환이 많았었는데, 탄알을 뽑아내고 뇌관 부분에 구멍을 뚫어 장난감 총 만드는 데에 많이 활용했다.

꼭 우산대만한 쇠파이프가 당시 시중에서 유통되었는데, 그걸 10센티 남짓 끊어 칼빈 탄피에 끼우면 맞춘 듯이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그걸 당시 가게에서 많이 팔았던 나무권총의 총신에 홈을 파 묶었다. 파이프 안에 딱지화약을 까서 넣거나 총탄에서 빼낸 화약을 재어 넣는다.

그 뒤에 잔돌이나 철사 조각 따위를 넣고 그 뒤를 진흙이나 물에 적신 솜 같은 것으로 단단히 봉하고, 탄피 구명에 딱지화약을 붙인 뒤 고무줄에 걸린 공이를 튕겨주면, 공이가 피스톤처럼 나아가 화약을 쳐서 폭발이 일어나고 그 불이 파이프 안에 전달되어 폭발이 일어나서 잔돌이나 철사조각이 탄환처럼 날아갔는데 그 위력이 제법 컸다.

총신을 좀 길게 해서 잘 만든 것으로는 둑에 가깝게 온 오리 잡는데도 사용했었다.

이 파이프를 우리는 댓(철판의 일본어 てっぱん을 말한 것으로 추정)이라 불렀기에 이 총을 댓방총이라 했었다.

그리고 총탄과 관련된 참으로 무지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기억도 있다.

당시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회충검사를 하고 구충약을 나눠줄 정도로 회충구제가 골칫거리였는데, 구충에 좋다는 말이 돌아 상당수의 아이들이 총탄 화약을 뽑아 씹어 먹고 다녔던 것이다.

나도 먹어본 기억이 있는데 무미 무취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배탈 났단 말도 못 들었던 것 같다.

차타기 이야기는 수학여행과 더불어 해야 좋을 것 같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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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7. 탄산가스 소동

97. 탄산가스 소동

 

마산의 도로 연혁이 별로 없으니 상보(詳報)는 어려우나 부림시장에서 서성동 내림길 일대에는 수백년을 헤아리는 고목들이 가히 천일(天日)을 가릴만치 울밀(鬱密)하여 이곳을 숲골(林谷)이라 불렀고,

 

또는 서림(西林)이라고도 하여 지금 이한철(李翰喆) 치과의원 아랫집 터에 보통학교 생도들의 복습방이 있어 그 이름을 서촌숙(西村塾)’이라고 부르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곳에 신작로를 설치하기 위하여 모든 초부(樵夫)들을 동원하여 그 굵은 나무들을 톱질을 해서 베어내는 것인데,

 

그 초부라는 것이 산에 잡목이나 메는 말하자면 졸때기들이어서 고목을 베는 큰 톱을 써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고목을 베는 상식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몇 개의 고목을 베는 동안에 초부 수십명이 한꺼번에 졸도를 해 버린 사실이다.

 

몰려든 가족들로 하여 난데없이 작업장 현지는 상갓집처럼 울음바다가 되었다.

 

원인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오래 묵은 고목을 베는 데는 제물을 갖추어 목신(木神) 앞에 경건히 제사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목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 벌을 받은 것으로 단정하였다.

 

졸도해서 깨어난 초부들은 지금부터라도 목신에게 치성을 드리기 전에는 작업을 거부한다는 태세이었는데, 알고 본즉 오래된 고목을 베는 데서 발산하는 탄산가스 때문에 그것을 마신 초부들이 의식을 잃고 조롣한 것을 그 뒤에야 알아낸 것이었지만, 미신에 젖은 몽매한 그들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소뿔에 벌 쏘는 격이 되어 막무가내였다.

 

과연 그들의 고집대로 목신제(木神祭)를 올리고 작업을 계속했던 것인지 그 후문은 듣지 못하였지마는,

 

그 당시 신작로라고는 해도 현재의 부림시장 입구 구도로의 넓이와 별로 다를 게 없었고,

 

옛날의 강본(岡本) 사진관(현재 이한철 치과) 앞에는 신작로 이전까지만 해도 노목(老木) 10여 주가 늠름히 서 있었던 것으로 그 기억이 새롭다.<<<

 

 

숲골이라 불렀던 서성동 내림길은 아래 지도 가운데 있는 동서동주민센터 앞 길이다 - 올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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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6) - 강점제3시기

도시변화와 관련된 기사 두 개 소개합니다.

6. 1935년 10월 22일자 매일신보 3면 기사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舊馬山驛移築 用地買收完了’ 이며 기사 내용은경남 제2의 능률을 내고 있는 구마산역은 외관상 누추와 내용상 협애(狹隘) 및 이의 장래발전에 반(伴)하는 요충지대에 이축을 계획하고 그 동안 용지 매수에 열중 중이던 바 가격 평가가 원만히 되지 못하여 매수에 지장이 되어있던 바 근일에 이것이 호전되어 매수가 거의 완료된 모양이라 하며 가급적 금년 내 완성을 보게되도록 할 것이라 하며 완성 후는 구마산에 신위관(新偉觀)을 정(呈)하리라 한다’ 입니다.

지금의 육호광장 자리에 있었던 구마산 역은 이 신문 기사처럼 위치를 약간 옮겨온 자리입니다. 처음에 있었던 역도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만 역사(驛舍)가 오래되고 좁아서 더 넓게 역 터를 잡고 역사도 다시 짓기로 했다는 기사입니다.

구마산역은 철도 마산선이 개통된 1905년에는 없었습니다만 마산포 주민들의 요구에 의해 1910년 7월 5일 개설되었습니다. 개설 후 67년 간 사용하다가 1977년 12월 26일 지금의 마산역으로 마산역·구마산역·북마산역의 세역이 통합되면서 그 소임이 끝났습니다.

기사 아래 사진은 애당초 있었던 구마산역과 이전 후 지은 역입니다.

 

7. 다음은 1935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 5면 기사입니다.

제목은 ‘구마산공설시장’ 이며 기사 내용은 ‘구마산 공설시장의 상옥 개축 낙성식은 그 동안 공사도 끝났으므로 오는 5일 11시 동 공설시장에서 거행키로 되었다고 한다’ 입니다. 오는 5일은 1935년 12월 5일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마산공설시장은 부정(富町, 현 부림동)공설시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현재의 부림시장을 말합니다.

이 시장은 1924년 9월에 개설되었고 주로 한국인들이 이용하였으며 간혹 일본 아낙들이 야채나 두부를 들고 나와 팔기도 했습니다. 평일에도 사람들이 많이 붐볐지만 특히 음력 5일과 10일에 열리는 5일장 때에는 인근 50리 안에서 모여드는 장꾼들과 고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시장건물은 5-9칸으로 된 3동의 벽돌건물과 여러 채의 함석지붕으로 된 바라크형 건물로 되어 있었는데 이 기사는 그 시장건물들을 개축했다는 기사입니다.

기사에서 말하는 상옥(上屋 / うわや 우와야)은 일본어에서 ‘역이나 부두에 있는 간이건물’이나 ‘벽체가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는 간이건물’을 말합니다. 신문기사에 나온 상옥(上屋)은 오래된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벽체 없이 기둥과 지붕만 건물’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기사 아래 사진은 1937년 경 구마산공설시장(현재의 부림시장)의 모습입니다. 사람들 건너 편에 있는 건물이 기사의 건물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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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동공화국 2013.11.10 09:2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교수님께서는 창원시의 노면전차 도시철도도입에 관하여 비판적인 입장인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저또한 그렇습니다. 꿈의도시라 불리는 "꾸리찌바"와 같이 원통형 버스정류장, 유니버셜디자인, 정류장선불시스템, 스크린도어등을통해 기존 버스승객의 편의제공이 먼저 확충되면서 대중교통이용의 수요자를 늘리는 방법에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허정도 2013.11.12 10:24 신고 address edit & del

      각 도시의 조건이 달라 꾸리찌바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겁니다만 큰 틀에서 보면 가장 적절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2013.08.0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3) - 강점제3시기

오늘도 재미있는 사진 석 장 소개합니다

23. 구마산공설시장

지금의 부림시장입니다. 1924년 개설된 시장으로 당시 마산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습니다. 특히 마산장날인 매 5일과 10일에는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건물은 연와조와 장가(長家)점포 3채였고 그밖에 아연지붕의 바라크식 건물 여러 동이 있었는데 수많은 노점 상인들이 어울려 저녁시장 시간이면 언제나 크게 붐볐다고 합니다.

 

24. 원동무역주식회사

조선회사령이 폐지되자 1920년 5월 16일 자본금 50만원으로 창립한 마산 최초의 한국인 회사입니다. 이 사진은 1927년 8월에 착공하여 1928년 4월에 준공한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로 지은 사옥입니다.

외형이 변하긴 했지만 아직 원형이 남아있으며 건물 앞에는 이 건물의 역사를 말해주는 표지석이 서있습니다.

 

25. 공사 중인 마산공립중학교

마산공립중학교는 1936년 개설한 지금의 마산고등학교 본관입니다. 수년 전에 헐려 없어지고 새로운 건물이 이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마산공립상업학교(현 용마고, 전 마산상고)가 한국인 위주로 발족한 것과 달리 마산공립중학교는 입학생의 대다수가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친일파 자제이거나 성적이 우수한 극소수의 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헐려 없어진 건물 외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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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8 00:00

창원도시철도, 바로 알고 바로 하자 - 2

지난 7월 5일 창원시의회에서 있었던 「창원도시철도 약이 될까? 독이 될까?」라는 제목으로 시민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가능한한 저는 지난 번 포스팅 했던 두 분의 주장과 다른 것을 찾아보려고 애썼습니다.

 

타당성평가에서 최종안으로 제시된 노선을 직접 왕복 답사하면서 눈으로 확인하면서 문제점이 없는지 살폈습니다. 하지만 타당성평가서의 전체 내용을 못보고 공청회 자료만 볼 수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고 따라서 심도 깊은 분석도 불가능했습니다. 이 글은 공청회 때 배포된 타당성평가서에만 근거했습니다.

내용은 정체 현상, 공사비 증액, 자동차 이용객 유입, 수요 예측, 차량 시스템 등 다섯 가지입니다. 

 

-창원 도시철도 타당성 평가 용역에 대한 의견- 

정체 현상 문제

교통 정체 현상에 대해서는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신호등 문제와 도로상황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1) 신호등

최종 검토된 창원의 도시철도는 33.88km입니다. 여기에는 123개소의 신호등이 있습니다. 현재 126개의 신호등이 있었습니다만 뺄 건 빼고 넣을 건 넣고 해서 제 나름대로 최종 확정한 것이 123개소였습니다.

이 중에는 광장형(실제 광장이거나 여러 4개 이상의 도로가 집중된 교차로)이 12개소, 십(十)자형 48개소, 티(T)자형 33개소였습니다. 이들 93개소의 교차로는 좌회전 신호가 있습니다.

좌회전 없이 직진 신호만 있는 일(一)자형 신호, 즉 보행자도로만 있는 곳이 30개소, 모두 123개소에 신호등이 있었습니다.

이 외에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로 적잖게 있었습니다.

다음은 신호등의 종류와 위치를 표시한 그림입니다.

 

신호등이 123개나 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 신호등 작동을 도시철도 우선 혹은 도시철도에 맞춰 연동식으로 추진하겠지만 123개 신호등 통과하려면 무리가 따를 것이다.

- 따라서 도시철도 외에 버스·택시·자가용승용차의 교통 혼잡이 일어날 것이다.

- 이를 피하기 위해 촘촘하게 설치된 신호등의 간격을 늘일 경우 해당 지역의 출입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 때문에 전 구간 운행에 소요되는 시간을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타당성 평가서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2) 도로 상황

타당성 평가서에 의한 철도노선을 보면 3차선과 4차선이 상당부분 있습니다.

3차선은 마산 육호광장-구 로얄호텔 200m이고

4차선은 창원 가음정동 일대 1.2km, 마산 구 로얄호텔-구 서성동 로타리 1.6km, 마산 경남대 앞-방통대 800m입니다.

그리고 3,4차선은 아니지만 진해 풍호고가차도의 입구와 출구 부분도 문제입니다.

 

이 구간에서 타 차량 통행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2개 광장형 교차로에도 교통 정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공사비 증액 문제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토목공사 가운데 공사하면서 증액되지 않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물가상승에 의한 자연상승(에스컬레이션) 외에도 이런 저런 사유로 설계변경을 하다 보면 공사비가 처음 계획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르게 됩니다. 김해경전철도 공사도, 고속철도 공사도 그랬습니다.

여기서는 당장 눈에 보이는 공사비 증액 요소들만 보겠습니다. 이 글 외에도 증액요소들은 수 없이 많습니다.

1) 서비스차량 공간 확보

300여m에 이르는 마산어시장 인접부분 도로의 폭은 절대 부족합니다. 도시철도가 도로 중앙에 자리 잡게 되면 타 차량 운행 공간, 서비스 차량 공간, 노점상 공간 등이 절대 부족해집니다.

특히 이 구간을 포함한 1.8km의 불종로가 단선 운행 구간이라 만약 정체가 생기면 대기 차량 진입이 불가능해 대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 구역에는 미리 도로 폭을 넓히기 위해 도로에 접한 부지를 매입하는 비용 계획을 세워야 하고 이에 따른 추가 공사비도 미리 계산되어야 합니다.

전 구간 서른 곳이 넘는 승차장 일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승차장은 최소 한차선을 차지합니다. 이것은 곧 왕복 3차선을 차지한다는 뜻인데 3·4차선 도로에서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고 설령 4차선 이상이라도 병목현상이 샐길 수 있습니다.

2) 불합리한 노선

기존의 부림시장 구간을 불종로 구간으로 변경한 것은 이용객 편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채택입니다만 불종로 구간 1.8km가 단선으로 운행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곳 불종로와 어시장은 번잡한 곳입니다. 도로 폭도 좁습니다.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가 3개(본초당 앞 네거리에 설치되어야할 신호등 포함)이고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9개나 있습니다.

이런 번잡한 곳에서 정체가 안 생길 수 없는데, 정체가 생기면 다음 차량이 진입을 못하는 단선 왕복 구간은 너무 비현실적인 계획 같습니다.

따라서 공사 도중에 부림시장 노선 추가공사가 시작될 개연성이 높습니다. 미리 공사비를 증액 시켜 놓아야 합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제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전문성을 필요로하는 내용이 아니라 상식적인 내용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정체현상 문제와 추가될 비용 문제를 피해 가려고 할까요? 몰라서 그럴까요?

그것은 아마 이 사업에 대한 여론 문제와 비용편익분석(B/C)의 답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일 겁니다.

참고로, 비용편익분석(B/C)이란 어떤 계획을 결정하는데 있어, 그 안을 실현하는데 드는 비용과 그 안으로 얻어지는 편리와 이익을 서로 대비하여 평가함으로써 그 계획안의 실현 여부를 결정하는 방법입니다.

규정 상, 비용편익분석에서 1.0 이하면 사업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창원도시철도 타당성평가서에 산정된 창원도시철도의 비용편익분석은 1.05입니다. 공사비가 조금만 높아져도 투입비용이 많아져서 1.0 이하로 떨어지게 되어 있고, 그렇게 되면 이 사업은 못하게 됩니다. 이유는 이 때문이지 싶습니다.

자동차 이용객 유입, 수요 예측, 차량 시스템 문제는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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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동공화국 2013.07.18 01:0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도시철도는 지금당장 지을필요가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시민들의 발이 한개 더 늘어난다는 대승적의 차원에서 해야하는 사업은 맞다고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지자체기금을 통해 건설 및 운영비용을 조달한 후에 재정상의 문제를 없앤뒤에 하는것이 옳다고 보여지고 특히 노면전차가아닌, 비싸 더라도 저는 고가 모노레일 방식의 경전철을 해야한다고 보여집니다. 단순히 노면이나 BRT와같은 수단적방법에서 접근할것이 아니라,
    교통계획에서 궁극적으로 "자가 승용차"량을 줄이는데 목적을 둔다면,
    노면전차의 예상 노면구간에는 "중앙자전거도로"로 이용하고 또 중앙노면 그위(고가)에는 도시철도가 지나가게 함으로써 입체적인 교통시스템의 연계방식인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용자전거와의 환승 및 연계성도 강조되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http://unkostar450.blog.me/150171755962
    이것은 제가 만든 cg입니다. 참고해보시길바랍니다.

    • 허정도 2013.07.18 15:13 신고 address edit & del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나그네 2013.07.18 15: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왜? 하는 겁니까? 돈이 남아 돕니까? 있는 시설로 잘 활용하면 불편한게 있습니까?
    누구의 돈으로 도시 노면 전차를 만듭니까! 창원대로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마산은
    더 혼잡해지지 않을지 잘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 허정도 2013.07.18 15:14 신고 address edit & del

      더 혼잡해질 수 있는 구간도 있습니다.

  3. 이정현 2013.07.18 16:4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창원시 도시철도가 빨리생기길 바라는 한사람이지만 노면전차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안그래도 복잡한데 가끔지나가는 전차를 위해 차선을 내주거나, 아니면 전차가 많아 몇 분 마다 신호가 지연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양 할거면 저심도 지하철이나 고가철도로 해야합니다. 그리고 적자 나고있는 진해선 같이 창원 내 깔려있는 국철을 적극 이용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허정도 2013.07.19 00:02 신고 address edit & del

      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2.09.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마산의 상업 및 유통·저장산업 등>

강점 제3기 마산의 산업 중 상업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시장입니다.

마산의 시장은 1924년 개설한 원마산의 부림동공설시장과 1923년 신마산에 개설된 반월동공설시장 외에 구마산 어시장․신마산 어시장․우시장․신마산청과시장이 있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1937년경 부림시장 전경입니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 마산해산주식회사(1940년)와 부림동(富町) 부영(府營)청과시장(1941년)이 전 강남극장 앞에 개설되었습니다.

1931년 경상남도가 펴낸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 마산에서 법인으로 등록된 회사는 주식회사 20개와 합자회사 5개로 총 25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한국인이 소유한 회사는 8개였습니다.

1940년에는 법인조직으로서 마산에 본사를 갖고 있던 기업체는 주식회사 21개사․합명회사 2개사․합자회사 11개사 등 모두 34개로 9개가 늘어났습니다.

1920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원동무역회사가 이때까지 건재하였습니다.

일제강점 제3기에는 이전까지 주로 도소매업의 판매업에만 진출해 있던 한국인들도 제조업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벌이게 됩니다. 회사령 폐지 이후 꾸준히 지속된 한국인들의 자본축적의 결실이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회사는 합자회사환천(丸天)상회(1933년, 남성동 93-1번지, 미곡․자동차부품 판매 및 정미업), 신정상사주식회사(1935년, 창동 123번지, 해륙물산 위탁판매와 무역업 및 잡화 등 판매), 합명회사 낭화(浪花)양품점(1937년, 동성동 254번지, 양품점), 석산상사주식회사(1939년, 창동 49번지, 초자(硝子)․철물 및 페인트 도소매업) 등이었습니다.

원마산의 중심 상가와 부림시장 및 남성동 해안 일대에는 곡물과 해산물, 잡화 등을 파는 상인들이 많았으며, 일본 상인들은 주로 신마산 상가에 점포를 가진 자가 많았으나 원마산 지역에 진출하여 크게 사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외에 보관․창고업도 성행하였는데, 기존의 마산창고주식회사 외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마산지점이 대표적인 창고였습니다.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는 1930년 11월 경성에서 설립된 회사로, 1943년 신포동 1가 해안매축지(현 마산시 의회 청사 건너 편)에 임해창고를 건립하여 산미증산계획과 군량미 조달에 전략적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해방 후 오랫동안 대한통운 창고로 사용되다가 몇 년 전 철거되었습니다. 해방기와 전쟁기를 거치면서 피난민 거처로도 사용된 건물로 격동기 마산의 역사를 온 몸에 담았던 건물이었는데 그만 사라져버려 아쉽습니다.

다음 사진이 조선미곡창고건물입니다.

 

1930년 4월 1일 경성에서 설립한 조선운송주식회사도 마산에 지점을 두었습니다. 위치는 중앙동 2가 8번지에 있었으며 철도국 지정으로 철도화물을 취급했습니다.

이 외에, 정미업은 1924년 당시 25개소였으나 193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정미소가 점차 쇠퇴하여 1939년에는 전체 정미업소는 16개였습니다. 그 중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는 3개소뿐이었습니다.

1907년 마산철공소에 의해 처음 시작된 마산의 철공업은 1939년에는 10여개의 중소 철공소가 가동되고 있었는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업체는 2개소였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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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0)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시장(市場)>

1920년대 마산의 대표적인 시장(市場)에 대해서 조선총독부서무부조사과에서 간행한『朝鮮の市場』의 내용과『마산상공회의소백년사』의 내용을 복합하여 인용해 보겠습니다.

① 우선 1924년에 개설된 부정공설시장(현 부림시장)이 가장 큰 시장으로서 제일 붐볐습니다.
특히 마산장날인 매 5일과 10일에는 대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건물은 연와조(煉瓦造)의 장가(長家) 점포 3채였고 그 밖에 아연지붕의 바라크식 건물 여러 동이 있었는데 수많은 노점 상인들이 어울려서 저녁 시장 시간이면 더 크게 붐볐다고 합니다.

『朝鮮の市場』에 나타나는 「구마산 시장」은 부림동․수성동․남성동․동성동 창동의 도로(등외도로)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면적과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도로연장으로 200칸(360m)내외라고 했습니다. 노상(路上)시장이었기 때문에 시장과 관련한 설비는 없었으며 개시일은 음력 5․10일로 월 6회 열렸습니다.
주요 취급품은 곡류․면류․마류․면사류․어류․기타 일용잡화였으며 상인 수는 소매상 약 300여 명으로 5-7리에서 까지 장사하기 위해 나왔다고 합니다. 시장 이용자도 부근 3 리 내외에서 찾아왔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이「구마산 시장」이「부정공설시장」이란 이름으로 상설화되면서 건물도 갖춘 것으로 보이는데 아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건물을 갖춘 시장과 노상 시장의 경계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② 1923년 신마산 반월동에「선정(扇町)공설시장」이 들어섰습니다.
부지 2,281평에 81평과 25평의 건물 두 동을 지었으며 건물과 건물 사이로 적당한 크기의 도로를 내었습니다. 상설시장이었으며 주요 취급품은 야채․곡류․어류였고 상인은 소매상 28명이 있었습니다.
점포주는 모두 신마산의 일본인이었으며 이용자도 신마산에서만 오고 원마산의 한국인들은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개설초기에는 전화 주문까지 받으면서 배달도하는 등의 친절전략을 구사했지만 개설 1년도 못되어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③ 합방 이전, 일본인들이 주식회사 체제로 발족시킨 마산수산(주)를 1920년 재편성하여 창포동 3가에 경매시장인「마산수산시장」을 개설하였습니다.
사설(私設)이었으며 시설은 해면에 접한 96평 규모의 목조 건물이었습니다.
양․음력 설과 추석을 제외하고는 매일 오전 7시부터 11시까지 영업하였고 해산물만 취급했습니다. 중매인 11명이 있었으며 모든 거래는 경매로 이루어졌습니다.
출품하는 사람은 진해와 거제에서 주로 왔으며 구입자는 마산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마산 남성동에 출장소를 두고 영업했습니다.

④「마산 우시장(牛市場)」도 있었습니다.
사설(私設)이었고 1924년 오동동에서 마산축합조합에서 운영해 오다가 1926년부터 마산부 직영으로 바뀌어 운영되었습니다.
면적은 1,044평이었으며 주위에 목책(木柵)이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개시일은 음력 5․10일로 월 6회였으며 생우(生牛)거래만 하였습니다. 중개자 15명이 활동하고 있었고 인근 5리 이내의 사람들이 소를 매매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⑤ 중앙동 1가에 1925년 1월 사설「마산청물시장」이 개설․인가되었습니다.
89평의 부지와 64평의 건물에서 매일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장사를 하였습니다.
취급품은 야채 및 과일류였으며 중매인 11명이 종사하고 있었고, 출품자는 시모노세키와 모지 및 마산부근 일대의 과수원 경영자였고 구매자는 마산부민이었습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2011/12/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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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산업>

1920년대 마산항의 물동량은 일본 국내의 불황과는 달리 오히려 더 늘어만 갔습니다. 주요 수출품은 여전히 미곡이었으며 전체 수․이출액의 80%를 차지했습니다.
1925년 마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된 미곡은 약 15만석이었는데 1928년에는 65%가 증가한 25만석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미곡 수․이출의 증가는 수치상으로는 무역의 증대였지만 사실은 일제에 의한 미곡의 약탈적 반출이 점점 증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미업은 1911년 하목철삼(夏目哲三)에 의해 전기모터를 설치한 것이 기계화된 정미소의 시작인데 그 후 많이 늘어나 1924년 현재 25개소였습니다.
그 중 한국인의 것이 12개소, 일본인의 것은 13개소였습니다.

섬유공업은 회사령 폐지 이후부터 마산에 유치되기 시작한 업종입니다.
특히 1923년 6월 일본 오사카의 본전안오랑(本田安五郞)이 전 조선면화 마산공장을 매수하여 그 해 10월부터 작업을 시작한 주식회사 마산조면공장이 1924년 1,300평의 부지에 280평의 공장과 50평의 하치장을 신축하여 운영하였습니다.
그 후 1927년에는 태전성일(太田誠一)에 의해 창립된 태전마사(太田麻糸) 공장이 부지 5,000평에 건평 1,000평의 공장을 세우고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1920년대는 마산-진주 간 철도가 개설됨으로써 서부 경남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북마산 역 주변에 역세권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제법 규모 있는 점포들이 원마산에 들어서게 되면서 상가지역이 두드러지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마산은 창동․남성동․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상가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부정공설시장(현 부림시장)부근과 남성동 해안 매축지에서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이 즐비했습니다.
제조업 분야에 손을 뻗지 못한 한국 상인들은 주로 이 지역 상가에서 도․소매업을 경영했던 것입니다.

신마산의 상가는 京町(두월동) 거리의 양쪽에 형성되었지만 일본인조차도 값이 싼 원마산에서 구매를 하였으니 상거래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 상인들은 판매업보다는 여관․요식업․대금업 등으로 업종을 바꾸거나 대상(大商) 중에는 원마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도 있었습니다.

금융기관으로는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지방 농공은행이 통합하여 창설되어 전 경상농공은행이 있던 자리에 1918년 10월 개설되었다)이 현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으며 이 외에 마산금융조합이 신마산에, 구마산 금융조합이 척산천 이동(以東)으로 구역을 분할하여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밖에 농민을 대상으로 한 내서금융조합과 사금융(私金融)인 마산금융회사 등도 있었다.

1910년 신설된 구마산 역은 도시 범역의 확산과 함께 이 지역의 교통 및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구마산 역 부근 시장통에는 상업조사자가 4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승객의 숫자도 마산 역보다 많아 부산 대구에 이어 번성했던 역이었습니다.
화물은 경부선․호남선․경의선․진해선 등과 연결되었으며 1년간의 승차인원이 176,104명, 하차인원은 153,495명이었습니다.
부근에는 상업학교․형무소지소․보통학교․식은지점․내서와 구마산 양 금융조합․금융회사․기업전습소․조면공장․정미소 2개․양조장 4개 등이 있었습니다.
이 외에 구마산 역에는 신마산과 다니는 승합차가 27대 있었으며 부외(府外)와 연결되는 자동차가 준행되고 있었다.

마산의 대표산업이었던 양조산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산전 장유양조장 / 현 몽고간장 / 1950년대 촬영>

                                     <마산의 일본인 양조장 / 1920년대>

 

                                  <소화주류주식회사 / 무학주조 전신>

1926년에는 약 7,450석을 생산했으나 역시 부산의 생산량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28년에는 당시의 조합원 12개 공장에서 세운 계획량 9,853석 보다도 1,200석이 더 많은 11,000석을 생산하여 10,000여석을 생산한 부산업계를 제치고 한국의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제1위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후 마산의 청주업계는 호황을 지속했고 생산량은 해마다 증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산의 청주는 국내 시장에 이어 만주와 중국 대륙까지 팔려 나갔습니다.

1920년대에 설립된 마산의 양조회사는 합자회사淸水양조장(1921년), 濱田주조장(1923년), 村崎주조장(1923년), 千島園주조장(1925년), 山邑주조주식회사마산공장(1929년), 昭和주류주식회사(1929년, 현 무학주조) 등입니다.

이 중 천도원주조장이 최근 철거된 삼광청주의 전신입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일제는 1928년부터 개인의 자유 양조를 금지하고 양조를 허가제로 전환하면서 면허를 발급했습니다.
주로 한국인 업자들에 의해 경영되던 탁주와 약주 양조업은 일본인이 독점했던 청주업계에 비해서 규모는 영세했습니다.
한 예로 1928년 마산의 탁주 생산량은 불과 1,500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마산에서 생산된 장유는 그 품질이 우수하여 경남 일원뿐만 아니라 멀리 원산과 청진에 까지 판매되었습니다.
장유업은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마산의 장유 생산량은 1928년 기준으로 평균 5,000석 정도였습니다.

일제시대 마산의 대표산업이었던 술과 간장 된장 제조업은 지금까지 무학주조와 몽고장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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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5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2) 개인적 요인 동일한 사회적 요인이 주어져 있다 해도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심이 강하든 정의감이 투철하든 또는 사회적 불만이 가득하든 모두..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Ⅲ.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년 7월 21일 14시 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년 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4

구르나 마을이야기 - 2 《극장》 극장은 아름다운 내부공간과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담쟁이가 덥혀있었다는 객석 회랑 목조 파고라 위의 담쟁이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흙으로 빚어진 구조물은 모두 원형대로 ..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