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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3) - 개항이후

<마산포구의 두 굴강과 네 선창>

마산포가 조선시대 번성했던 포구라고 알려져 있지만 옛 마산포의 해안선이 현재 도시 속 어디였는지 정확하게 밝힌 적은 없었습니다. 시사(市史)를 비롯한 몇몇 자료에서 대충 언급했지만 추측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 밝히는 마산포 해안선(海岸線)은 사정지적도(査正地籍圖)와 그 외의 여러 자료들을 통해 확인한 것입니다. 저는 정확(?)하다고 봅니다만 땅을 파보지 않아서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마산포에는 일찍이 두 개의 굴강과 네 개의 선창이 있었습니다.

동굴강과 서굴강으로 불렸던 두 굴강에 대해서는 1964년 『마산시사 사료집 제1집』의 「마산축항지」에서 김준이 그 용도를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습니다.

「서굴강(西掘江)은 인공(人工)으로 구축된 듯한 방축(防築)이며 여러 파도를 막고 범선(帆船)들이 정박하는 곳으로서 방축 위에는 수 백년된 포구가 무성해 있었으며 그 위치는 현 남성동 우체국 지점이 된다.

동굴강(東掘江) 역시 서굴강과 같은 부두로서 북선(北鮮)서 온 명태 배가 풍랑을 피하기 위해 정박한 곳이다」

복원도를 놓고 보겠습니다.


복원도에 나타난 굴강의 위치․규모․형태를 보아 마산창 앞에 있으면서 규모가 큰 서굴강은 마산창과 관련한 관용기능을 하던 인공 굴강이었고, 동굴강은 민간인들의 영업과 관련한 민용 기능을 담당했던 자연굴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관민구분 사용은 조운제도가 폐지된 19세기 후반까지였습니다.

서굴강과 동굴강을 중심으로 직선거리 약 500m의 해안에 걸쳐 네 개의 선창이 있었습니다.
명칭은 서성선창․백일세선창․어선창․오산선창이었고 그 위치와 형태는 위 그림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백일세선창(百一稅船艙)이라는 특이한 명칭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백일세(百一稅)가 아니라 ‘백일세(百日稅)’라고 하면서 이를 2월에서 5월까지 백일(百日) 내에 세(稅)를 서울 선혜청에 수송하기 위한 선창이란 의미라고 해석하고 그렇기 때문에 백일세선창을 조창부두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는 일반적으로 백일세(百一稅)란 수입의 백분의 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제도를 말한다면서, 예로써 군산항의 객주가 내장원에 백일세를 납부한 일이 있었다고 제시합니다.

여기서는 1907년 11월 1일 창원부윤 이기(李琦)가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의 매립과 관련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보낸 보고 제3호에 첨부된 마산 해안도면에 ‘百一稅船艙’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百一稅라고 적었습니다.

우리나라간척사업과 제방공사의 효시로 고려 고종 35년(1248) 김방경(金方慶)에 의한 평안도의 위도(葦島) 간척사업을 듭니다만, 마산포 복원도를 보면 마산의 해안에도 석축호안(石築護岸)과 방파시설(防波施設)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아래 그림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해안 곳곳에 자연발생적 형태라기보다는 인위적인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추정될만한 흔적이 여러 군데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인 석축호안과 방파시설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더 있습니다.
이미 이 시기에 석축돌제(石築突堤)가 있었다는 기록과 『창원군지』등 여러 자료에서 고려시대 석두창(石頭倉)에는 조곡(漕穀) 천석을 싣는 조선(漕船) 여섯 척이, 조선시대 마산창에는 천석을 싣는 조선(漕船) 스무 척과 이 배들을 운행시킬 조군(漕軍) 구백육십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기록들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해 줍니다.

물이 들어오면 바다가 되고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되는 갯벌지(간석지역)는 다음 두 그림에서 해안선과 인접해 그려진 점선 부분까지였습니다.
해안에서 가장 근접한 수심선에 1/2m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동해 원산, 서해 강경과 더불어 조선 3대 포구였던 남해의 마산포 해안은 한일병합 1년 후인 1911년,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이 착수한 매립공사에 의해 그 모습을 잃게됩니다.

동굴강 서굴강과 서성선창․백일세선창․어선창․오산선창은 바다를 떠나 육지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그림에서 본 당시 해안의 석축들은 지금도 마산도심 땅밑에서 잠들고 있겠죠.
우리나라에 조선시대 항구가 보존된 도시는 없다는데, 발굴해서 역사문화자원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요? 전혀 불가능한 일일까요?<<<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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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2011/03/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0) - 개항이후
2011/03/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1)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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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1) - 개항이후

<조선시대 마산포를 복원하다>

지금부터 소개할 마산포 복원도는 1905년-1910년 시기의 마산포 도시상황입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보아 이때 상황이 19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어서 이 복원을 ‘조선후기의 마산포 복원도’라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복원도 작성 범위-

복원작업의 범위는 토지의 지목과 형상을 분석하여 주거용지로 사용되었을법한 토지들이 일정한 형태로 집합되어있는 영역으로 결정하였으며, 외곽경계는 가급적 도로로 하였습니다.

설정된 범위는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당시 원마산의 주거용지 경계와 비교하면서 조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적도에서 복원한 당시 주거지 영역과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주거지 영역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복원도 작성 방법-

복원방법은 제가 임의로 착안하였습니다.
사정지적도 복사본을 만들어 이미 분할과 합병으로 변형된 지적도의 원형을 추적 복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모번(母番)과 자번(子番)의 관계를 이용하여 가능했던 작업입니다.
최초의 사정지적도는 모번(母番) 밖에 없었고, 모번 만 있던 땅이 분할되면 자번(子番)이 생기게 됩니다.
이 점을 착안하여 사정지적도 상에 모번으로 구획되어진 원래의 경계선을 모두 찾아내어 복원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1과 1-2와 1-3번지가 있으면 이 세 필지를 합한 외곽선을 이어서 원래의 1번지를 찾는 방법입니다.

복원된 사정지적도는 컴퓨터(AUTO-CAD)를 이용해 모사(模寫)한 후, 각 필지의 사정토지대장(査定土地臺帳)과 비교 확인하여 사정(査定) 당시에 존재했던 최초의 지적도를 복원했습니다.

이렇게 작성된 사정지적도를 관련문헌자료 등을 이용하여 보정(補正)하여 복원도의 정확성을 기했습니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 최종 작성한 1910년 경의 마산포 복원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정지적도에 나타나지 않았던 서굴강 방파제-

복원도를 작성하고 난 뒤 사정지적도에서 나타난 도면과 그 외의 다른 자료에서 나타나는 형태가 다른 부분이 한군데 있었습니다. 서굴강 앞의 방파제였습니다.
서굴강 앞 방파제는 사정지적도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이용도의 작성과정 중 별도의 판단을 요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옆 그림은 이미 소개한 김경덕의 매축청원도(2010/09/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를 활용하여

1960년대에 김용욱 부산대 교수를 비롯한 몇몇연구자들이 마산포 해안 도면을 작성하였는데, 이를 토지이용도와 대조하기 쉽도록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림의 오산동은 지금의 오동동입니다.

 
이 도면은 이른바 변현되기 전의 마산포 해안선 원형을 가장 확실하게 알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이 그림과 사정지적도를 비교해본 결과 해안형태가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서굴강을 막아주는 방파제 부분만이 서로 다를 뿐이었습니다. 김경덕의 도면 등에는 서굴강을 감싸고 있는 방파제가 있었지만 사정지적도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백일세선창 부분도 이와 유사하게 돌출된 형태이지만 김경덕과 사정지적도 두 도면에 모두 나타나 있었습니다.

김경덕의 도면과 사정지적도 중 어느 것이 당시의 사실과 동일한가 하는 문제는 단정적으로 밝힐 수가 없습니다만 김경덕의 도면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서굴강의 방파제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가정(假定)하면서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습니다.

① 옆의 다른 지도(2010/08/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 - 개항기)에 나타나는 원마산 부분에도 김경덕과 창원부윤이 그

린 매축청원도와 같은 모양의 방파제가 뚜렷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지도를 통해 당시 해안의 형태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시장이 열렸던 지역은 건물이 없으며 중앙에 비어있는 부분이 조창부지다. 海岸線에서 點線까지가 창탄(漲灘), 즉 간석지입니다.

② 굴강(掘江)이라는 명칭을 통해서도 방파시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굴강이란 개천․도랑못․ 해자(垓字) 등의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인위적으로 만든 포구를 의미합니다.

③ 조창과 서굴강의 위치를 볼 때 서굴강은 조운선 전용 굴강이었을 것이라고 가정(假定)이 가능합니다. 서굴강이 조운선 전용굴강이었다고 가정하는 이유는 (가) 조창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이라는 것과 (나) 굴강의 형태가 규모 있게 의도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으며 (다) 그림3-36에서 보면 서굴강이 선창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김경덕의 도면 등에는 선창이란 이름을 갖고 있지 않고 (라) 당시 오산진(현, 산호동)에서 많이 사용했던 오산선창을 제외하면 세 개의 선창이 서굴강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는 점 등입니다.

④ 위 ③의 가정 하에서 보면 사정지적도 작성을 위한 측량이 시행될 시점에는 이미 조운이 폐지된 지 십 수 년이 지난 뒤라서 조운 전용이던 서굴강은 그 기능이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의 방파시설은 관리 소홀로 인해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근대적 토목 기술이 없었던 시대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방파제가 유지보수를 하지 않으니 빠른 속도로 훼손되었을 것이고 훼손이 심한 방파제를 측량에서 제외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⑤ 만약에 방파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일본인에 의해 매축이 곧 시행될 시점이었거나 이미 매축공사가 시행되고 있었던 시점에서 도로나 대지도 아닌 보잘 것 없는 시설물이었던 방파제를 측량에서 제외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마산포 항만매축공사는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월일미상) 착공되어 총공사비 13,700원을 들여 1914년 7월 14일 준공을 보았습니다.

⑥ 방파제가 시작되는 부분을 확대하여 그린 오른쪽 그림에서

보듯이 방파제와 육지가 연결되는 지점으로 추정되는 「가」부분의 형태가 뾰족이 나와 있어서 대단히 어색합니다. 그리고 방파제가 시작되는 위치로 추정해 볼만한 곳까지 도로가 연결되어 있는 「나」부분 등이 「다」의 점선처럼 계속 이어지는 길, 즉 방파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합니다.

이상과 같은 여섯 가지의 이유를 근거로 서굴강을 감싸고 있는 방파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다른 자료를 통하여 추정되는 위치와 형태를 결정한 후 복원도에 추가 삽입하였습니다.


이 외에 사정지적도 만으로 1910년 당시의 토지이용도를 정확하게 작성할 수 없었던 다른 한 가지는 1905년 개통되면서 이미 형태조차 없어진 마산선 철도부지 내의 도로와 대지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료로도 정확한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복원도에 그려진 이 부분의 형태는 주위에 형성되어 있는 도로 및 대지의 모양을 참고하여 추정 복원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과 같지 않습니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완성된 복원도를 현재의 도시 도면과 오버랩(over-lap)시킨 것과 항공사진에 비교시킨 그림입니다. 항공사진은 1999년에 촬영한 것인데 해안의 원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길고 복잡한 작업을 통해 얻은 이 복원도를 통해 20세기 초, 더 멀리 조선시대 마산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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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1/03/28 09:35 address edit & del reply

    잘 보고 갑니다. 참으로 애쓴 결과입니다.
    이걸 바탕으로 당시의 마산포를 복원하면 아주 멋진 작품이 될 터인데..
    가능한 일이지요?

2010/07/0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 - 조선후기


<동해 원산, 서해 강경, 남해 마산>

18세기 후반부터 조창과 더불어 발달하기 시작한 마산포는 중서부 경남의 곡물과 남해안 수산물의 대표적 집산지로서, 화폐경제와 함께 성장한 굴지의 시장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마산포구에는 두 개의 굴강, 곧 조운선 전용 선착장인 서굴강과 민간전용인 동굴강이 있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오산선창(午山船艙)․어선창(漁船艙-東城漁船艙)․백일세선창(百一稅船艙)․서성선창(西城船艙) 등 4개의 선창이 펼쳐진 유수한 어항이었습니다.


당시 경상도의 중심포구는 왜관이 있었던 동래와 부산포, 창원의 마산포, 김해의 칠성포였습니다.
창원에는 마산포 뿐만 아니라 지이포(只耳浦, 창원시 상복동 지귀상가 부근), 사화포(沙火浦, 창원시 팔용동 홈플러스 부근), 합포(合浦), 여음포(餘音浦, 귀산부근)가 있었습니다만 이 중에서 중심포구는 마산포였습니다.

마산포 선창은 어선과 상인들로 항상 붐볐고 ‘일창원(一昌原) 이강경(二江景)’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했습니다.
'동해 원산, 서해 강경, 남해 마산'이라고 하여 전국 3대 수산물 집산지이기도 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19세기 이후에는 동북산 북어(北魚)가 원산포에 집하되었다가 마산포를 거쳐 은진(恩津)과 강경포(江景浦)까지 선운되기도 하는 등, 동해와 서해를 연결하는 원격지(遠隔地) 수산물 중개항구로 발전하여 경상도 시장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마산포 시장을 전국에서 손꼽힐만한 규모라는 주장과 달리 어류에 국한하여 시장의 규모를 설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마산포 시장의 규모가 대단했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19세기 후반에 이미 일본인 상인들도 진출해 있었습니다.

당시 마산포의 정황을 말해주는 문헌들을 소개합니다.

『일성록』순조 33년(1833년) 기록에 의하면 마산포 선창은 객주가 130여 호에 달할 정도로 번성했다고 합니다.

고종 때 4년 간 함안군수로 재임한 오횡묵의 『경상도 함안군 총쇄록』에는 마산포에 어물과 곡물을 실은 수백 척의 상선이 출입하여 해안에 빈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상업이 발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순조 8년(1808년)에 편찬된『만기요람(萬機要覽)』의 재용편(財用編)에서는 전국 각 도 1,061개의 향시(鄕市) 중 국내 최대의 장시(場市) 15개를 소개하면서 경상도에 있는 276개 향시 중 최대 장시(場市)로 창원 마산포장(馬山浦場) 하나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3년부터 세곡운송을 위해 마산만을 드나들던 기선 현익호입니다.
현익호는 444톤 2범(帆) 기선으로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배였습니다.



갑오경장에 의해 지세가 현물에서 금납으로 개정되어 마산창의 기능은 중지되었습니다. 1895년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경남의 중심상권으로 자리잡은 마산포 시장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전국에 위세를 떨쳤던 마산포 시장,,,,
19세기 이 도시 마산은 조선에서 이름 높았던 상업도시였습니다.
개항으로 도시가 커지고, 해방 후 귀한동포와 6.25전쟁 후 피난민으로 도시가 커졌습니다.
1960년대 후반 부터는 자유무역지역과 한일합섬으로 공업도시가 되어 '전국 7대 도시'라는 이름까지 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위상에서는 '20세기 마산'이 '19세기 마산포'보다 낮았던 것 같습니다. <<<



2010/04/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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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2010/06/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2010/06/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2010/06/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2010/06/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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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팬저 2010/07/05 07:45 address edit & del reply

    http://panzercho.egloos.com/2767221 마산시립박물관에 있는 마산포 전경 디오드라마의 모습입니다. 위에 있는 마산포구의 동굴강과 서굴강의 경우 예전 합포진성의 전선을 정박시키던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 허정도 2010/07/05 08:14 address edit & del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지난 토요일 팬저님 덕분에 공부 많이 했습니다.
      주워온 도편은 거실에 잘 모셔놓았습니다.
      저 도편을 구웠던 도공도 가족을 뒤로 하고 일본에 끌려갔을까요?

Co2배출 줄이는 그린빌딩(Green Building)설계(12)조명: 광선반(Light Sh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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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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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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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2배출 줄이는 그린빌딩(Green Building)설계(11)조명: 측창채광

측창채광은 천창채광과는 달리, 말그대로 벽면에 위치한 개구부(창문 등)를 통해 자연채광을 실내로 들여오는 방법입니다. 창문외에도 유리블럭, 낮은 고창, 채광뜰(Sunken)이나 안뜰로난 수직 개구부 등을 통해 측창채광으로 얻는..

진해
진해 201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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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마산사람들의 배일감정> 일본인에 의해 사회 모든 분야가 달라지면서 한국인의 생활 방식도 많이 변했습니다. 1918년경만 하더라도 마산포 장날에 머리카락을 짧게 단발한 한국인이 보이면 신기하게 쳐다보았지만 1년이 지난 1919..

Co2배출 줄이는 그린빌딩(Green Building)설계(10)조명: 천창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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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되면 많이 받게되는 달력, 디자인 확 바꾸면

1년동안 벽에 걸어두고, 또는 책상위에 놓게 되는 달력들은 1월에는 넘쳐납니다. 여기 저기서 받아둔 달력중에서 어떤 달력을 놓을까 잠시 고민하게 됩니다. 절에서 나온 달력이며, 근사한 미술작품을 곁들인 은행달력, 자사의 실적홍..

동영상 - 마산
동영상 - 마산 201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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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2배출 줄이는 그린빌딩(Green Building)설계(8)조명: 주광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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