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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5) - 강점제3시기

오늘도 사진 석장 소개합니다.

 

29.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

1904년 일본거류민회에 의해 발족된 학교로 현 월영초등학교의 전신입니다. 1936년 4월에 마산공립중학교(현 마산고)가 설립된 이후 고등과를 폐지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개항 직후부터 일제 패망까지 운영된 마산 유일의 일본인 학교입니다.  

30. 마산공립보통학교

1901년 4월 마산공립소학교라는 교명으로 개교한 마산공립보통학교는 현 성호초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위 마산공립심상소학교가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였다면 이 학교는 한국인들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31. 식산은행 마산지점

1918년에 지은 건물로 남성동 현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던 건물입니다. 벽돌조 1층 양식으로 1970년대까지 남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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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강점3시기 마산의 교육기관>

1941년 간행된『약진마산의전모(躍進馬山の全貌)』와『마산개항백년사』에 게재된 내용에 의하면 1930년대 마산의 교육기관은 공립으로 마산공립중학교․마산공립상업학교․마산공립고등여학교가 있었습니다.

반면 사립으로는 창신․호신․의신학교․마산노동야학교 등이 있었으며 초등교육기관으로서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마산성호공립심상소학교․마산완월공립심상소학교가 있었습니다.

유아교육기관으로는 사립마산유치원과 사립대자유치원 등 몇 개의 시설이 있었으며 종교기관에서 사회교육차원에서 행한 교육시설도 있었습니다.

현 마산고등학교의 전신인 마산공립중학교는 1936년 개설하였으며 입학생의 대다수가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친일파 자제이거나 성적이 우수한 극소수의 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마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몇 년 전 용마고등학교로 바뀐 마산공립상업학교는 대부분 한국 학생들이었습니다.

1922년에 개교한 마산공립상업학교는 1939년 수학연한 5년제 상업학교로 바뀌었으며 1940년에 이르러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습니다. 이 학교는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수학연한을 4년으로 단축하였고 1942년에는 신입생의 50%가 일본인 학생으로 채워지기도 했습니다.

다음 사진은 마산공립상업학교가 현재 자리로 옮기기 전 건물입니다.

 

 

마산공립고등여학교는 1927년 수학연한 5년제의 고등여학교로 개정한 현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입학생은 주로 일본인이었으며 한국인 입학은 매우 어려워서 전체 재학생 수의 20%에도 못 미쳤습니다.

1932년 공사비 36,000원을 들여 기숙사를 지었는데 이 기숙사가 전국의 모범이 되어 각 지에서 온 시찰단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산고녀는 1936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특히 1937년에 준공한 대강당은 기숙사와 마찬가지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드높아 부인회 등 그 밖의 집회에도 자주 이용되어 부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민(府民)이란 당시 마산에 살았던 일본인을 말합니다.

다음 사진은 마산고녀 이전 개교기념식 장면입니다.

 

 

 

하지만 창신학교에서 고등과로서 분리된 호신학교(濠信學校)가 1932년, 창신학교는 1939년에 문을 닫았고 여학교였던 의신학교도 이 시기에 문을 닫았습니다.

노동야학은 강점3시기에도 활기가 넘쳤습니다. 사설교육기관이었던 마산노동야학은 그 전통이 깊습니다.

1907년 시작된 마산노동야학은 1931년에 교사를 신축했습니다.

옥기환교장이 지역유지들과 협력하여 6,000엔의 교육기금을 마련하여 중성동에 있는 전답 1,000여 평을 사들여 여기에 5개의 교실과 사무실․회의실 및 2동의 사택 등이 있는 신교사(新校舍, 전 영남자동차학원자리)를 지었습니다. 원래의 노동야학교이었던 창동 교사는 마산여자야학교의 교사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외에 일본인이 운영한 복수야학회도 있었습니다. 일본 조동종복수사(曹洞宗福壽寺)의 사회교화사업으로서 광영박명사(光英博明師)가 경영하였습니다. 한국인 자제를 대상으로 했으며 1924년 교사 신축을 하였습니다.

현재의 성호초등학교인 공립보통학교는 1938년 학교명이 마산성호공립심상소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인 가정에서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학생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통학거리 등을 감안하여 완월동에 분교를 설치하였는데 이 분교는 1938년 마산완월공립심상소학교로 독립 개교하였습니다. 지금의 완월초등학교입니다.

1904년에 일본인거류민회에 의해 발족된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는 1936년 4월에 마산공립중학교가 설립된 이후 고등과를 폐지하고, 1938년경부터 마산포(원마산)에 사는 일본인 자녀 1․2․3학년에게 통학상의 편의를 위해 자산동에 분교를 두었습니다. 그 분교가 지금의 무학초등학교입니다.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는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개항 직후부터 패망까지 운영된 마산 유일의 일본인 학교로서 현재의 마산월영초등학교 전신입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2012/09/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2012/09/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2012/10/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2012/10/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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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16:0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강점3시기 마산의 인구변화>

강점 제3시기에는 마산의 인구도 많이 변했습니다.

1930년에 25,810명이던 것이 1941년에는 41,546명이 됨으로써 증가율이 161%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 한국인이 20,149명에서 35,670명 177%가 늘어난 데 비해 일본인은 5,559명에서 5,865명 105.5%로 변화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을 제외한 기타의 외국인은 102명에서 11명 10.8%로 심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다음사진은 1930년대 한국인들이 다녔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와 일본인들이 다녔던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입니다.

 

1930년 이후부터 해방 때까지의 인구 변화는 다음 와 같습니다.

(1944년의 54,000명은『통계연보』를 인용한 표를 이용했는데 천 단위 이하는 삭제되어 있었으며, 1945년의 6천 명과 6만 명은 각종 문헌의 것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년도

한국인

일본인

외국인

합계

日人비율(%)

1930

20,149

5,559

102

25,810

21.5

1931

21,506

5,265

75

26,846

19.6

1932

22,183

5,138

50

27,371

18.8

1933

22,242

5,187

41

27,470

18.9

1934

23,142

5,235

53

28,430

18.4

1935

24,413

5,387

58

29,858

18.0

1936

25,529

5,427

56

31,012

17.5

1937

26,991

5,402

18

32,411

16.7

1938

27,522

5,496

19

33,037

16.6

1939

29,211

5,689

11

34,911

16.3

1940

30,887

5,643

19

36,549

15.4

1941

35,670

5,865

11

41,546

14.1

1942

48,169

6,125

12

54,306

11.3

1944

 

 

 

54,000

 

1945

 

6,000

 

60,000

 

1942/1930

177.0%

105.5%

10.8%

161.0%

 

 

이 표를 보면 1941년에 비해 1942년의 인구가 1년 동안 무려 12,760명, 130.7%로 급격히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1942년 9월 30일자로 발포된「총독부령 제242호」에 의해 마산의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되어 내서면의 교방리․회원리․산호리․석전리․양덕리와 창원면 봉암리 그리고 구산면 가포리가 마산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구 증가의 비교 연도를 1930년과 1941년으로 설정한 이유도 이 때 있었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그 이후의 시기는 비교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 한국인은 12,499명이 늘어난 반면, 일본인은 260명 늘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이 260명밖에 증가하지 않았던 것은 위의 교방리․회원리 등 7개 동리에는 일본인들이 별로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전체 인구 중 일본인의 비율은 1930년에는 21.5%이던 것이 1941년에는 14.1%가 되어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꾸준한 증가 추세에 비해 일본인의 인구변화가 미미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표를 보면 전국 도시별 인구증가율에서도 마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증가율순서

1

2

3

4

5

6

7

8

9

10

11

12

전국평균

도시평균

1930-

1935

청진

49.5

진남포

31.9

평양

29.4

목포

26.8

부산

24.9

인천

21.8

신의주

21.7

군산

20.7

원산

16.1

대구

15.1

마산

14.0

서울

12.6

8.7

35.1

1935-

1940

청진

256.4

서울

110.6

인천

106.2

대구

66.6

평양

57.0

부산

36.8

진남포

35.9

원산

31.8

마산

14.6

목포

5.8

신의주

4.6

군산

-2.7

6.2

75.4

1940/1944

신의주

93.6

마산

49.5

원산

42.3

군산

42.0

부산

31.8

인천

24.9

진남포

19.6

평양

19.4

대구

15.5

목포

7.8

서울

5.7

청진

-6.9

6.5

21.3

1930년부터 1935년까지는 14.0%로 전국평균 8.7%보다는 높았지만 전국 도시평균 35.1%보다는 훨씬 낮은 증가율이었습니다.

1935년부터 1940년까지도 마산의 인구증가율은 비슷한 추세입니다.

1940년과 1944년 사이의 증가율이 높은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행정구역 개편 때문이었습니다.

전국 도시별 인구 규모 측면에서 보면 1910년 마산은 서울․부산․평양․대구․인천․원산에 이어 7번째 순위였지만 다른 도시의 인구성장률에 미치지 못한 결과 해방 1년 전인 1944년에는 19번째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마산의 인구수를 앞지른 도시들은 청진․신의주․함흥․광주․해주․대전․개성․성진․전주․군산 등이었습니다. 강점 후반기에 공업화 및 도시화가 빨랐던 지역들이 마산의 인구를 앞질렀던 겁니다.

1944년 우리나라 총인구는 25,917,881명이었고 그 중 도시인구는 3,411,542명으로 전체의 13.2%에 불과했으며, 해방 당시 마산의 인구는 6만여 명이었고 그 중 일본인은 6천여 명 정도였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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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5)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교장들의 학교건물에 대한 생각>

직전 포스팅에서 설명드린 『朝鮮と建築(조선과 건축)』의 1928년 편을 보면 「學校建築號」라는 주제의 특집기사가 있습니다.
당시의 학교건축물 현황의 일편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잡지 편집진에서 국내의 중요한 학무당국자와 전국 각 학교 교장들에게 당시의 학교시설에 관해 세 가지의 질문지를 보낸 후 이에 응답한 학교관리자의 의견을 게재한 것입니다.

마산에서는 일본인들이 다녔던 마산공립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와 한국인들이 다녔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의 교장이 이 질문에 응답하였고, 그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마산공립소학교(월영초, 위)와 마산공립보통학교(성호초, 아래)>


책에 실린 질문과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질문
1) 재래학교의 건축에 대한 감상
2) 장래 지을 학교 건축에서 개선해야할 점
3) 기타 학교 건축에서 눈에 띄는 점

■ 마산공립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교장 田坂松太郞(전판송태랑)의 답

1) 복도의 넓이는 적절하지만 통풍과 채광에 결함이 적지 않으며 水害를 입지 않는 장소를 선정하여 건축해야 될 것임.
2) 위 1)의 결함을 제거할 것.
3) 외관보다는 위생 및 내구성을 고려하여 건축할 것.

■ 경남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교장 上原榮(상원영)의 답

1) 
① 종래의 교사(校舍)는 복도를 6척(1.8m)으로 하여 좁으니 가능하다면 9척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함.
② 단층건물 복도 또는 2층 건물 복도는 흙 복도로 하고, 교실마다 출입구를 설치한다면 비상시에 매우 편리할 것임. (9척 중 안쪽 7척은 흙 복도로 하고, 2척은 높이 5寸 내지 7寸의 테두리로 함.)
③ 신발장은 복도와 교실 경계를 이루는 창 아래를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임.
④ 창의 유리를 끼우는 방식은 나무포테(木ポテ, putty)는 쓸모가 없음. 아이들이 유리를 쉽게 빼낼 수 있어서 관리가 곤란함.

2) 근래 교사(校舍) 건축에서 일본이나 조선에서 다 함께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쓸데없이 건축미를 다투는 경향이 있는데 현재의 재정을 감안하여 매우 주의할 점이라고 생각함.
나의 교사건축에 관한 이상 안은 아연즙(亞鉛葺)구조가 적절하며 1평에 70원으로 충분할 것이고 내구적이라고 봄.

3) 교사를 증축할 경우에는 도부군(道府郡)에서 먼저 당사자인 학교장의 의견을 청취한 후 설계에 착수해야 함. 지금까지 가끔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고 설계하여 건축했기 때문에 사용상 불만스러운 점이 적지 않음.
교사건축에 관한 이상과 희망이 더 있지만, 지금은 단지 그 일부분만 답함.


두 답을 놓고 보면,
현 월영초등학교 교장에 비해 성호초등학교 교장이 훨씬 상세하게 학교시설의 상황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짧은 질문과 답 만으로 당시 학교건축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좀 어렵다고 봐야겠죠? 

아무튼 이 기사를 통해 『朝鮮と建築(조선과 건축)』을 편찬하는 건축학자나 전문가 등 건축계 인사들이 당시 변해가는 근대건축사조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이 많았던 것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성호초등학교 교장의 2)번 답에서 "근래 교사(校舍) 건축에서 일본이나 조선에서 다 함께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쓸데없이 건축미를 다투는 경향이 있는데....."라는 대목을 통해, 당시 변해가는 건축계의 상황을 잘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이 간단한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1. 건물의 사용과 관리의 책임을 진 학교장은 건물 기능과 관리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2. 형태 위주의 건물이 비경제적이고 관리에도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3. 설계자가 사용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조선 소학교의 모든 교장들도 마산의 두 교장선생님과 마찬가지로 건축물의 구조․기능․공사비․관리의 편리함 등의 측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떻습니까?
84년 전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보통교육을 담당했던 일본인 교장들의 생각말입니다.

아쉽다는 생각도 드네요.
두 학교건물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당시 교육환경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되었을텐데 말입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2011/12/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2011/12/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0) - 강점제2시기
2012/01/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1) - 강점제2시기
2012/01/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2012/01/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2012/01/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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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9) - 강점제1시기


<1910년대 마산포 도로>

1912년부터 1915년까지의 시기에 일어난 마산포의 대대적인 도로개설공사 결과, 그 때까지 자연발생 취락에서 생긴 꾸불꾸불하고 좁은 길을 자르면서 폭 8-10m의 직선형 도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때맞춰 시행한 매립지에서도 같은 크기의 도로가 개설되면서 두 지역의 도로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도로의 규모와 형태변화는 마산포(원마산) 도시구조에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마산포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모인 시기를 마산창이 개설된 1760년으로 볼 때 이것은 실로 150년 만의 대변화였습니다.

지난 주에 보았지만 다시 한 번 더 매립 후 달라진 마산포 도면을 보겠습니다.
매립과 도로개설 이전의 도면과 이후 도면입니다.


이 도면
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에 동서방향으로 동성동에서 부림동을 지나 신마산과 이어지는 도로(현 남성동 파출소 앞도로)와 신마산에서 시작하여 북마산 지역을 지나 창원으로 연결되던 외곽도로(좌상단)가 뚫였습니다.

그리고 교방동과 회원동 지역, 성호동과 추산동지역이 원마산과 원활히 연결되게하는 두 도로(현 부림시장과 창동 네거리를 지나는 도로)도 뚫렸습니다.
성호동의 현 성호초등학교 진입도로의 폭도 넓어졌습니다.

좌측, 즉 신마산에서 들어와 동서로 길게 뻗은 도로의 동쪽 끝 부분 공지는 개인 소유지였습니다.
지도의 형태를 보면 이 땅은 정차장이나 회차장(回車場)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동성동 101, 105, 124번지로 추정되는데 현 본초당한의원과 한마빌딩 사이의 부지로 추정됩니다.

마산포 도로개설공사는 1915년 이전까지 시행되었으며 1915년 이후부터 1920년까지는 별로 없었습니다. 1918년 수성동의 남쪽부분에 있던 폭3-4m 도로가 6-7m의 폭으로 넓혀졌을 뿐입니다.
새롭게 개설된 직선형 도로는 매립지에는 6m와 10m, 조창 부근에 개설한 도로는 8m와 10m의 폭이었습니다.

1910년 당시 원마산 복원도에 의하면 전체면적은 198,369.27㎡였는데 그 중 대지 면적이 169.467.77㎡이었으며 도로 면적은 28,901.50㎡로 도로율이 14.57%였습니다.

그러나 박간(迫間)의 남성동매립으로 원마산의 면적은 원래 면적의 19.4%인 38,479.34㎡가 늘어나 236,848.61㎡로 변했으며 도로면적은 매립과 신설도로 등으로 인해 원래 면적의 무려 75.5%나 되는 21,826.44㎡가 늘어난 50,727.94㎡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원마산의 도로율은 1910년 당시 14.57%였던 것이 1920년에는 21.42%로 급증하였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도로율이 높아진 시점은 매립과 도로개설사업이 종결된 1915년경으로서, 약 3-4년에 걸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마산포 도시의 근대화는 이렇게 식민지배를 위한 일본의 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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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3) - 강점제1시기


마산최초의 근대식 지도

<馬山>

1916년 / 육지측량부 / 조선총독부 / 1:10,000 / / 울산대 도서관

이 지도는 근대적 측량법에 의해서 제작된 최초의 마산 지도입니다.
1916년에 측도하여 1917년에 제판하였고 1917년 6월 25일 인쇄하여 6월 30일 발행하였습니다.
저작권소유자는 조선총독부이고 인쇄 겸 발행자는 육지측량부입니다.

정가(定價)가 십팔전(金拾八錢)이라고 기재된 것을 보아 판매도 했던 것 같습니다.
범례도 지금까지의 것과 달리 각종 시설물은 물론 토지의 상태와 도로의 종류 및 행정구역의 경계까지 세밀히 나누어 표기해 놓았습니다.

본 지도의 제작과정에 관해서 1986년 백서방(栢書房)에서 펴낸 淸水靖夫의 『日本統治機關作製にかかる朝鮮半島地形圖の槪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그 내용을 소개합니다. 

조선의 일 만분의 일 지형도는 주요도시의 대부분에 걸쳐서 작성되었는데 당초에는 45도시, 제2차대전 말기에는 63도시까지 시행되었다. 이것은 일본과 비교해도 놀랄 일로서 당시 일본에서는 6대 도시와 일부의 연습지(演習地) 뿐이었지만 조선에서는 지방정치의 중심지는 물론이고 역사도시, 군사도시는 인구 일만 이사 도시에도 시행되었다.

이것은 한일합방 후 정치적인 예민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민간 도시지도 제작술의 미 발달에 의한 영향도 크다.

일 만분의 일 지형도 제작의 시기는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오만분일 지형도 측량 때 동시에 행해진 것으로서 1915-1917에 43지구, 1919년과 1920년에 각 1지구가 제작되어 당초의 45도시가 된다.

두 번째는 1929년부터 1938년까지 19지구가 제작되었으며 지방도시에 미치고 있다.

당초는 道路․集落 ; 赤, 水部․水田 ; 靑, 地貌 ; 茶, 植生(森林등) ; 綠, 注記․鐵道․地類記號 ; 黑의 5색 인쇄로서 ‘京城’의 菊判2枚, ‘平壤’의 四六變形判, 진남포, 부산, 마산의 菊判이외는 전부 柾判이었다.

시가지의 확대, 주변부의 도시화와의 관계에서 점차로 圖積을 정판에서 국판 또는 四六판, 2면에서 4면으로 크게 하고 주변부를 포함하게끔 되어있다. 색채는 제2회 수정(주로 1919-1922)이후 植生(森林등)의 錄의 特殊網版을 폐하고 등고선을 녹으로 한 4색인쇄로 하고 대부분은 이대로 제2차대전 종료까지 계속하고 있다.

4색인쇄 중에는 赤版의 集落에 문자가 그대로 겹쳐져서 인쇄되어 있는 것과 문자 밑에 적판이 없이 희게 된 것도 있다.

전자는 희게 묘사한 집에 판상으로 万線을 덮어 놓은 것도 있고 후자는 銅原版上으로 이미 가옥에 万線이 그려져서 原版은 1색으로 완성되고 인쇄과정에서 색판마다 分版한 것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일 만분의 일 지형도는 거의 여기에 해당한다. 더욱이 ‘경성’4면은 4색 인쇄 외에 1색 인쇄도 판매되어 있다.

 

이상의 제작과정 기록을 보면 이 지도는 1:10,000 지형도 제작의 1단계였던 1915년-1917년, 43개 도시에 걸쳐 제작될 때 만들어 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소개한 1:50,000 「마산(군사극비)」지도 제작 때 동시에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래는 채색판인데 제가 입수한 것은 흑백 영인본입니다.

지도에서 나타나는 도시공간의 변화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 1910년대 중반까지 변한 마산의 도시공간을 정밀하게 알 수 있습니다. 도시의 가로 및 건물 등의 상황뿐만 아니라 해안선과 작은 선착장에 이르기 까지 조그마한 시설물도 대부분 표기되어 있습니다.

공공건물은 물론 교량 명칭도 대부분 표기되어 있으며 일본인들의 종교시설인 복수사(福壽寺, 현 마산여고 담장 남서쪽 모퉁이 부근), 본파본원사(本派本願寺, 전 KBS방송국자리), 묘국사(妙國寺, 장군교의 북서쪽 모퉁이)와 피병원(避病院) 2개소(신마산은 현 월성초등학교 남쪽, 원마산은 현 성호초등학교 서쪽 환주산 언저리) 및 화장장(火葬場, 현 산복도로 위쪽 완월계곡 남쪽 산기슭) 등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신마산지역의 도시 상황도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지도와 내용상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보아 한일병합 후 도시공간의 변화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도에서도 장군천까지는 신마산 도시가 확장되었으나 장군천 이북은 지방법원지청과 전기회사만 있을 뿐 원마산까지 아무 시설도 없습니다.

구도로(옛 크리스탈호텔 앞 도로)변에 몇몇 건물이 있을 뿐인데 이것으로도 신마산과 원마산(마산포) 두 도시의 연담화는 아직 요원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도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내용은 원마산의 변화인데 일본인 박간(迫間)에 의한 남성동 매립과 최초의 근대식 도로가 개설된 것이 정확히 나타난 것입니다.

매립지에는 이미 우편소라는 이름으로 건물도 들어서 있으며 이 밖에 몇몇 건물이 더 표기되어 있습니다.

박간이 남성동 해안을 매립한 후에도 동굴강은 매립되지 않다가 1927년에 일부 매립되고 1935년 매립 때 완전히 자취를 감춥니다.
이런 상황이 반영되어 이 지도에 동굴강이 본 모습으로 형태를 드러내고 있으며 신마산에서 원마산의 중심부까지 연결되는 도로와 원마산 중심부 일대의 근대식 직선도로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편, 원마산 도시 영역은 아주 미미하지만 북쪽 방향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삼각형의 원마산 외곽선 형태 는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1910년대의 마산도시구조 변화는 이 지도로 인해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마산도시변천사를 알려주는 정말 귀중한 자료입니다.

위 지도를 현재 위성사진으로 옮겨보았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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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1910년대 건축물>

1910년대에는 마산에 도시변화가 많이 없었던만큼 건축공사도 많이 없었습니다. 종교시설과 일부 교육시설만 약간 들어섰습니다.
개항기에는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한 관아시설들이 주로 건설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개항기에 지어 놓은 건물들의 증․개축이 많았으며 관아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업용 건물이 많았습니다.

또한 목조건축물이 많았던 이전과 달리 이 시기부터는 벽돌을 이용한 조적조 건축물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신마산에 집중되었던 건물들이 서서히 원마산 쪽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 장군천 이북에 지방법원지청이 들어섰고 현 마산시청 자리에 전기회사가 들어오는 등 공공건물들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일대(옛 마산시청부근)가 신마산의 마산포 진출이라는 의미 외에 마산포와 신마산 양도시를 관장하는 공공업무지구 성격의 새로운 영역(중앙마산)으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910년 건축된 부산지방법원의 마산지청입니다.

1919년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해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10,000지도「마산」을 보면 마산포에 근대식 시설들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
현 삼성생명 부지에 부산감옥 마산분관과 인근에 동척(東拓)출장소, 그리고 전 북마산 파출소 앞의 삼성라디에타 부지에 조면공장(繰綿工場)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또 옛 중앙극장 건너편에 금융조합이, 그리고 보통학교(성호초등학교)와 통도사 포교당, 보통학교의 서쪽 약 250m 지점에 피병원(避病院)이 있습니다.
피병원은 전염병환자 전용병원으로 이 외에 신마산 완월리 아래(현, 마산여고 뒷편)에도 있습니다.
위치를 보아 신마산의 것은 일본인 전용, 원마산의 것은 한국인 전용 아니었나 싶습니다.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이 현 제일은행 부지에 들어섰는데 이 부지는 원래 마산창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이 때 지은 조선식산은행 건물은 해방을 거쳐 현재의 건물을 지은 1970년대까지 이용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았던 근대건축물 중 변변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도시라, 아무리 생각해도 참 아까운 건물입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이 시기에 건축된 교육시설은 의신여학교와 마산실과고등여학교가 있었습니다.
창신학교 여학생들로서 시작했던 의신여학교 건물은 성지학교에 이어 벽돌조 건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규모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추산동에 있는 포교당 정법사는 1912년 건축되어 최근까지 남았다가 얼마 전 새 건물 짓는다고 철거했습니다. (2011/07/0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불교시설인 포교당을 지은 7년 후(1919년) 마산 최초의 개신교회인 마산포교회가 문창교회로 개명하면서 석조 1층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예배당을 신축하였습니다.
1만 6천원의 건축비를 모아 무학산 기슭의 석재를 사용하여 지었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한국교회 석조건물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시기입니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 지은 건물 중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No

건물명

현위치

건축연대

有無

구조 및 규모

양식

면적

비고

1

도립마산병원

 

1911

 

 

 

 

 

2

마산포교당

추산동65

1912

목조1층

한식

30평

통도사正法寺

3

의신여학교

상남동

1913

벽돌조1층

양식

 

창신학교여학생

4

구마산우편소

남성동

1913

 

 

 

매립지(남성동우체국)

5

노동야학교

창동

1914

 

 

140평

1,300엔․교실 6개

6

실과고등여학교

장군동3가

1915

목조1층

의양풍

 

마산여고 전신

7

조선식산은행

남성동3가

1918

벽돌조1층

양식

 

농공은행합병․현제일은행자리

8

문창교회

추산동

1919

석조1층

로마네스크

84평

최초의 석조예배당

9

마산창고(주)

남성동198

1920

 

 

 

한국인 신설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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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산신세대 2011.08.30 13:1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런 블로그를 발견해서 뛸듯이 기쁩니다. 그런데 사진을 어떻게 구하시는지요?

    • 허정도 2011.08.30 16:57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사진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구합니다.
      문헌에 나와있는 것들입니다.

2011.07.0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요보?>

<한 시기의 마산사회상황을 짧은 글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만 1910년대 마산상황 중 종교와 교육 그리고 당시 사회분위기의 일편을 간략히 포스팅합니다>

합방 2년 후인 1912년 4월 8일 당시 양산 통도사 주지인 천보(天輔) 김구하(金九河) 큰 스님이 마산지역의 포교를 위해 사답(寺畓)을 팔아 현 추산동 포교당(정법사) 터에 설법전(說法殿)을 창설한 것이 근대 마산불교의 시초입니다.

1년 후인 1913년 서울 각황사에서 전국 30본사(本寺) 주지들이 조직한 ‘불교진흥회’의 발기 간사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년-1921년)이 진주에서 마산으로 이주하여 8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 때 위암은 마산불교진흥회를 조직하여 불교 발전에 진력을 다했으며 천보(天輔)스님과 자주 교류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1912년에 건축한 추산동 포교당입니다.
 

새 건물을 짓는다고 최근 헐었습니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건축이 사라진 겁니다. 우리 지역 불교사의 상징적인 유산이 없어진다고 일각에서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지만 소리가 너무 작았습니다.

1901년 조선예수교 장로교회 공의회가 조직되면서 마산교회를 태동시킨 기독교는 이후 노산 이은상의 부친 이승규 등이 입교하는 등 교세를 넓히다가 1903년에는 마산포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919년에는 추산동에 신축예배당을 준공하고 명칭을 문창교회로 고쳤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신축한 문창교회의 사진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건물입니다.

 20세기 벽두에 들어온 가톨릭은 완월동에서 천천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개항직후 들어온 일본불교도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 시절 마산의 교육기관으로는 합방 이전부터 있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사립 창신학교, 노동야학을 비롯해 1910년에 설립해 1911년 학생 50명으로 인가를 받은 외서면 완월리의 사립성지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는 창신학교의 여학생들로 구성된 의신여학교가 독립하여 개교하였고, 1915년에는 장군동 2가에 마산공립실과여학교가 개교하였습니다.
사립여학교는 의신과 성지가 있었지만 공립으로는 마산실과고등여학교가 최초였습니다. 이 학교는 1921년 실과여학교에서 고등여학교로 바뀌었는데 현재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이 중 사립창신학교는 당시 신교육을 접한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안확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이 학생을 가르쳤고 고루 이극로 같은 선각자들이 이분들에게 배웠습니다.
창신학교는 식민지 백성의 혼을 일깨우고 민족독립을 위한 저항정신을 불어 넣는 신식교육기관으로 마산사람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뿐만아닙니다.
개교할 때 호주선교사들의 도움이 컸던 탓에 학문, 체육, 예술 등 서양문물도 창신학교를 통해 많이 들어왔습니다.
한 예로 1914년 한강이남 최초로 창신학교 고등과에 7인조 밴드부가 창설되어 서양음악을 경남지역에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창신학교밴드부입니다.


당시 창신학교를 말할 때 유독 ‘사립’을 강조하며 접두어로 붙였습니다.
식민지시대라 ‘공립’은 사실상 일본인 것이었고 '사립'만 한국인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 1907년 마산의 유지들에 의해 개교된「노동야학」은 1914년 10월, 1,300엔이라는 당시로서는 큰돈으로 창동에 교실 여섯 개를 가진(140평) 교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마산의 노동야학활동은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1921년 한 해 동안 동아일보가 마산의 노동야학에 대해 보도한 것이 열일곱 번이나 될 정도였으니까요.

강점제1시기인 1910년대는 이질적인 두 나라의 문화충돌이 심했습니다.
지배자의 오만과 피지배자의 절망이 낳은 충돌과 갈등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식민지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식민지 땅에서 일어난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간의 차별과 탄압, 그리고 전혀 다른 가치관과 문화에서 오는 이질적인 생활 습관 때문에 전국적으로 두 민족 간의 갈등과 마찰이 노골화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요보’(‘여보세요’에서 ‘여보’의 일본인 발음으로 한국인을 놀리는 표현)라고 불러대며 모욕하였습니다.
공중목욕탕에서는 일본인들이 목욕을 마친 다음에라야 한국인의 입탕이 허용되었습니다.
기차나 전차에서 일인의 옆 좌석이 비어있더라도 한인은 앉을 수 없었으며, 길 가던 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함부로 구타하는 횡포가 일상화되어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마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그 시기 언론보도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① 매일신보 1915년 2월 6일
「중전(中畑)이라는 일본인이 인천나무시장 근처를 가다가 나무바리가 길가에까지 차서 통행에 지장이 있다고 하여 성냥불로 이 나무 저 나무에 불을 질러 불이 크게 번짐」
② 동아 1920년 4월 19일
「시야(矢野)」라는 부산의 일인 운수업자가 노임 시비 끝에 한인 노무자 수백 명에게 권총을 난사」
③ 동아 1920년 6월 21일
「여름철만 되면 일인들이 벌거벗고 길거리를 횡행하여 큰 사회문제화」
④ 동아 1920년 8월 6일
「서울 황금정(을지로) 4가 공동수도물을 먼저 길러가겠다고 일인 우체국원 조천(早川)이 한국 부인을 군도(軍刀)로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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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성호, 창신, 근대식 학교가 서다>

마산 최초로 근대식 학교가 섰습니다. 
창원군에 있던 소학교가 마산으로 이전하면서 개설한 공립소학교로, 현재의 성호초등학교입니다. 1901년 4월에 개교하였으며 한국인들이 다녔습니다.

마산공립소학교는 1904년에 지방 유지들의 성금 2,000여원으로 교사(校舍)를 지었고 1911년 마산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습니다.
아쉽게도 1904년에 지은 교사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래 사진은 1927년에 벽돌조 2층으로 지은 교사입니다.



일본인을 위한 최초의 정식 교육기관은 마산심상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입니다.

1902년 11월 조계지 내 남쪽 끝 해안의 한옥을 한 채 빌려 일본불교 정토종 개교사(開敎師) 삼우전지문사(三隅田持門師)가 마산포일본인소학교를 세웠는데 1904년 6월 마산심상소학교가 설립되자 합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6년 9월 마산거류민단의 단립(團立)「마산심상고등소학교」로 바뀌었고 1908년 2월 지금의 월영초등학교 자리에 교사를 지어 준공했습니다.
마산심상고등소학교의 고등과가 후에 마산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가 됩니다.
아래 사진이 1908년에 건축한 마산심상소학교입니다.



이 두 학교 외에 1906년 5월, 마산포 성호리 교회당(현 문창교회)에 독서숙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사립 창신학교의 전신입니다.

「창신」이라는 이름은 1908년 9월부터 사용하였지만 사립학교령에 의해 정규학교의 인가을 받은 것은 1909년 8월 19일이었으며 남녀공학이었습니다.

창신중고등학교가 2008년 9월에 개교100주년 행사를 가진 것은 창신이라는 교명을 사용한 날을 창신학교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원조와 마산 및 부산․통영․의령․함안 등지의 유지들의 도움으로 같은 해 상남동에 양옥을 짓고 낙성식을 가졌습니다.

아래 사진은 개교 후부터 1912년 5월까지 창신학교 초등과 교사로 사용했던 마산포 교회 예배당 건물이며 그 아래는 창신학교 설립인가서입니다.



이런 공식적인 교육기관 외에 원마산(마산포) 주민 스스로 교육기관을 만들었습니다.
1907년 7월 10일 개교한「마산노동야학」이 그것입니다.
노동야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1920년대였는데 마산은 아주 빨랐습니다. 「마산노동야학」은 전국 최초였습니다.

나중에 마산 최초의 주식회사인 '원동상사'의 대표가 되는 민족자본가 옥기환 등이 설립한 이 학교는 남성동 69번지에 있는 창고를 수리하여 1년 과정으로 한국어․일어․산술․한문 등을 무료로 가르쳤습니다.

노동야학의 학생들은 주로 선창 어물상의 고용원이거나 공장노동자․농민․도시빈민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교사의 대다수는 창신학교의 교사와 마산의 청년지식인 및 보통학교 졸업생들이었는데, 무보수였고 교육방침은 억압받는 민중의 각성과 계몽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창신학교 다음으로 설립한 사립학교는 성지학교입니다. 현 성지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으로 1910년 10월 24일 외서면 완월리에서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개항과 함께 일본의 불교도 마산에 들어왔습니다.
1902년 정토종 포교소가 설치되었고 이어서 서본원사 출장소(1903년 3월), 진언종 풍산파 마산포교소(1908년 8월), 일련종(1909년 3월), 조동종 포교소(1909년 8월), 천리교 마산포교소(1910년 4월) 등의 일본 사찰이 섰습니다.
이들은 일본인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하면서 마산의 불교신도들에게도 포교활동을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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