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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2)

지금까지 올렸던 글에 대한 요점과 관점 그리고 성과를 정리한 글입니다.

 

마산은 오래 전부터 존속해왔던 조선인 집촌의 원마산(마산포) 지역과 개항 이후 인위적으로 조성된 신마산 지역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각각의 영역을 확산시키면서 마침내 하나의 도시로 연담화되어 가는 변화과정을 겪었습니다.

마산의 도시구조가 지금과 같은 틀을 갖춘 것은 이 시기였으며, 이 때 형성된 도시구조는 이후에 규모만 확장되었을 뿐 큰 변화 없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용 중 과거에 존재했던 도시공간의 복원은 그 자체로서 해당 시기에 지니고 있던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익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구조의 물적 형태를 시계열적으로 설명하였기 때문에 도시사학(都市史學)의 관점에서도 약간의 성과가 있다고 봅니다. 이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이후 계속적으로 전개된 도시의 변화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올린 제 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근대기에 진행된 도시 전체의 변화과정을 지도와 서지 등 각종 자료를 통해 분석하여 그 변화과정을 시기별로 밝혔고

둘째, 마산의 중심부인 원마산 지역에 대해서는 지적도를 이용하여 4시기에 걸친 토지이용도를 복원한 후, 각 시기에 이 지역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았으며

셋째, 위의 두 결과를 이용하여 마산 도시변화의 특성을 밝힌 것입니다.

내용 중 마산관련 지도와 자료를 이용하여 각 시기별 도시구조의 변화과정을 밝힌 작업은 마산이 지금과 같은 도시구조의 틀을 갖추게 되는 과정을 가시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는 개항부터 해방 때까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관심을 가진 시간의 범위를 이 시기로 택하였습니다.

이 작업을 통하여 자연취락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통 도시로서의 원마산과 개항 직후 각국공동조계지에서 시작되어 인위적으로 조성된 신마산이라는 두 도시가 하나의 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일본인들의 마산 이주 단계와 신마산의 형성과정 및 일본인들에 의해 경영되었던 마산 도시의 사회와 산업 및 도시 시설의 변화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원마산과 신마산의 사이에 중앙마산이라고 하는 제3의 도시공간을 의도적으로 형성하였다는 사실과 마산의 해안을 무차별적으로 매립한 사실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상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해방 이전까지 24회에 걸쳐 실시된 해안의 매립 시기와 규모 그리고 그 위치까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습다. 이를 통해 마산의 지형 변화뿐만 아니라 지질구조의 단편까지 파악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제에 의해 도시내부공간구조가 변화되기 전의 원마산(마산포) 원형을 복원한 작업은 제가 크게 공을 들인 부분입니다.

이 복원도를 통해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해온 마산포의 천연 해안선과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을 전국에 널리 알린 마산포 선창과 굴강, 그리고 수백 년 전에 형성된 좁은 길들을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재의 도시 공간 속의 어느 곳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마산의 도시 공간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이는 차후에 다른 영역의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복원한 결과를 통하여, 전통적 도시와 근대적 도시의 대비뿐만 아니라 두 공간의 절충 및 구조적 변화를 가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시기별 복원도를 비교․분석한 시계열적 연구를 통해 원마산이라는 전통공간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면서 도시의 중심성을 강화해 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이 식민도시에서 행한 경제적 침투, 즉 토지 소유권 침투에 대하여 그 소유량과 시기별 변화, 소유토지의 규모 및 소유 주체, 그리고 상권 변화에 따른 소유토지의 이동 등을 계량적으로 증명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개항 이전까지 한국인만의 공간이었던 원마산은 개항 이후부터 한․일 양 민족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바뀌었으며, 일본인의 지배력은 강점 후기로 갈수록 점점 대형화․집중화되어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배력은 도시지역의 범역이 확산되면서 전역화(全域化)되어 갔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흘렀던 마산의 도시변화가 일제의 강점이 끝난 시점에 이르자 전통 공간이었던 원마산의 도시구조는 새로 건설된 도로와 항만․매립 등으로 인하여 크게 변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변형된 데에는 식민지 행정 체계와 일본인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마산이 근대도시로 변하기 전의 지도와 1945년 해방되었을 때의 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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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3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4) - 강점제3시기

 

120회부터 시작된 1930년대 이후 마산도시변화에 대한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일제 강점 제3시기는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전쟁기로서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한 시기로,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잠재우기 위하여 소위 황국신민화정책을 폈습니다.

1930년의 마산 인구는 27,885명이었는데 1940년에는 36,429명이었습니다. 비율로 보면 30.6% 증가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목포가 85.2%, 부산이 70.9%, 진주가 71.9% 증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강점 후기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하게 됩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중앙마산 조성계획은 193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중앙동 2가와 3가, 즉 중앙간선도로 주위 지역에 시행되었고, 1930년대에는 고운로를 기점으로 그 아래 부분에 개설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운로의 바깥 지역, 즉 지금의 자산동 일대는 해방 직전인 1944-1945년경에 시행되었습니다.

둘로 나누어져있던 마산의 도시구조는 이처럼 중앙마산지역이 조성되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현 신포동 일대에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시행된 대 규모 매립공사가 완공되면서 크게 바뀌었습니다. 원마산과 신마산이 지형적으로 하나로 연결된 겁니다. 연결시기는 1935년경이라 볼 수 있고 이로써 마산은 대상형(帶狀型)도시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는 도시의 한쪽(신마산)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원마산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었던 관공서 건물들이 하나 둘 씩 이곳 중앙부로 옮겨와 공공업무지역이 본격 형성되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시도했던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한 마산의 시가지 계획은 면적 43,287,000㎡, 계획인구 80,000명, 목표연도는 1961년까지였습니다만 계획대로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강점 막바지였던 1942년에 마산은 부산과 함께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됩니다. 마산에 인접한 창원군 내서면 내의 5개 동리와 창원면․구산면 내에서 각각 1개 동리씩을 마산부에 편입함으로써 마산부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회사령 폐지 이후 시작된 마산의 산업시설도 주조 및 장유공장을 비롯하여 1930년대에는 대형 방직공작과 창고 등이 들어섰는데 이러한 산업시설은 주로 군수산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1930년대 중반, 마산에는 ‘건설업계가 지금 황금시대를 맞았다’고 할 만큼 건축물들이 많이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용도도 다양했으며 건축의 양식도 도회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고 구조는 철근콘크리트조가 많았습니다. 건축이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에서 크게 변화했던 시기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지속적으로 시행된 마산만의 매립은 1920년대 후반 이후부터 집중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를 마산 매립의 절정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강점 제3시기에 시행된 매립 횟수만 하여도 부두조성을 위한 매립을 포함하여 15회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매립이 도시의 전체적인 균형과 발전을 위해 거시적으로 일관되게 계획되어 시행되었던 것이 아니라 매립 주체인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필요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립된 부지 중 어느 곳도 도시의 균형발전을 위한 도시기반시설이나 공공용지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 부터 해방까지의 시기는 원마산 범역의 확산기로 볼 수 있습니다. 해방 무렵에는 북서쪽으로 상남동을 지나 회산교까지 원마산과 이어졌으며, 그 범역이 산호리까지는 못 미쳤지만 오동교까지 건물이 가득 들어었습니다.

도로 개설은 20년대에 비해 많지 않았다만 외곽으로 그 영역이 많이 넓어졌고 이미 개설된 도로의 폭을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을 기준으로 볼 때 원마산의 일본인 소유 대지는 36.2%로서 1930년의 38.8%에 비해 다소 낮아졌습니다만 기업 몫까지 합하면 42.3%로서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이처럼 기업 소유의 대지가 많아진 까닭은 일본인의 토지 지배가 강점 후기로 갈수록 대형화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은 1945년 마산지도입니다.

1930년, 1920년, 1910년, 1899년 개항 당시의 지도와 함께 올리니 비교해보기 바랍니니다.

<1945년>

 

<1930년>

 

<1920년>

 

<1910년>

 

<18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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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2차 게재' 중 '강점 제3시기(1930년부터 1945년까지)'가 끝났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음처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포스팅할 계획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1차 ; 고대부터 개항(1899년)까지

2차 ; 개항이후부터 해방(1945년)까지

3차 ;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미 완료한 '1차 게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려시대 이전 ------ 9회

조선시대----------- 4회

개항기------------- 12회

합계--------------- 25회 완료

 

'2차 게재'는 다음처럼 구성하기로 했으며 이번 포스팅을 끝으로 네 번째 순서를 마쳤습니다.

개항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총 32회 (26회부터 57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1시기(1911년-1920년)----------총 27회 (58회부터 84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2시기(1921년부터 1930년까지)----총 35회 (85회부터 119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3시기(1931년부터 1945년까지)----총 75회 (120회부터 194회까지) / 완료

이 계획과 달리 앞으로 몇 차례 2차 게재(1899년부터 1945년까지)된 부분을 정리한 내용을 포스팅 하겠습니다.

 

'3차 게재' 계획입니다.

산업화 이전시기(1945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도약 및 전성기(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체 및 쇠락기(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 본 연재는 마산도시를 연구하면서 확보한 자료를 공유하자는 목적도 있습니다.

  혹시 좋은 자료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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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2) - 강점제3시기

이번에는 강점 제3시기에 있었던 마산의 도시구조 변화에 대해 정리합니다.

만주사변 등으로 1930년 이후 국내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최악이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도시의 물리적 환경도 점점 열악해갔습니다. 그러나 마산의 경우, 위치가 전선과 멀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접점이라는 점과 군수물자 공급창이라는 점 때문에 새로운 매립도 시도되는 등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마산의 건설경기가 과도하게 상승하여 ‘황금시대’ 운운할 정도였습니다.

지형적으로 볼 때 매립 전의 마산은 자산동 입구, 즉 몽고정 부근에 해안이 깊고 환주산이 해안 쪽으로 돌출해 있어서 가용대지가 협소했습니다. 특히 이곳에는 두 개의 철도와 한 개의 간선도로(현재의 장군로)가 지나고 있어서 원마산과 신마산 두 도시가 연결되는데 악조건으로 작용했습니다.

바로 이 일대(현재의 신포동)에 1929년부터 1935년까지 대규모 매립공사가 진행되어 마산의 도시형상은 크게 바뀌었고, 이로 인해 원마산과 신마산은 지형적으로 연결되어 마산은 대상형(帶狀型) 도시로 변하게 됩니다.

도시의 기원과 사회적 배경을 달리하는 원마산·신마산이라는 양 도시가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변화․흡수되었던 것이 일제강점기 마산의 도시변천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마산의 도시사(都市史)에서 이들 두 도시가 하나로 연담화되는 시점은 도시변화과정의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연담화된 시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몇몇 주장이 있지만 각종 자료, 즉 이 시기에 제작된 지적도와 지도 및 도면 등에 나타나고 있는 정황을 보면 원마산과 신마산의 중앙지역에 관공서 건물을 비롯한 다수의 건물이 들어서서 어느 정도 중앙마산의 영역이 형성되고, 현 신포동 지역에 마산매축회사에서 시행한 대규모 매립이 준공된 1935년 이후라고 판단됩니다.

이 시기에 중앙 마산의 시가지 건설도 많이 진행되었는데, 중앙마산지역의 도로 개설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① 우선 1931년까지 현재의 장군교에서 성지여고 방향으로 오르는 도로는 원래 폭2m의 소로였는데 이 도로가 1931년에 7m로 확장되어 폭9m의 도로가 되었습니다.

② 장군교 북서쪽 토지 일대가 1933년 직사각형의 소로를 낀 택지로 분할 정리되었습니다.

③ 1934-1935년에는 현재의 법원부지와 세무서 부지가 각각 합필되어 1920년대 가로를 세분화 한 것을 다시 변경하였습니다.

④ 1932년부터 1935년까지의 시기에 현재의 고운로가 마산여고 남쪽 완월동과 신월동 경계까지 뚫렸습니다. 그리고 이 도로의 동남쪽 일대지역(고운로 저지대인 완월동 일부지역과 장군동 2가․3가․4가, 대성동, 신흥동)의 도로와 마산고등학교로 연결되는 도로가 이 시기에 대부분 개설되었습니다.

⑤ 자산동으로 진입하는 도로와 무학초등학교 부근의 도로는 1936-1937년 사이에 개설되었습니다.

⑥ 현 마산중학교에 이르는 길을 비롯하여 자산동 전 지역의 도로가 강점 말기인 1944-1945년 사이에 개설되었고, 같은 시기에 자산동 입구 부근에 철도직원용 집단주택을 건설하였습니다.

⑦ 1934년에 마산여고 남측까지 개통되었던 고운로가 1944-1945년 이미 마산신사(현, 제일여고) 정문 앞에 나있던 도로와 연결되어 완전히 뚫렸습니다.

이처럼 변화했던 중앙마산지역과 신마산지역의 도로개설을 시기별로 단순화 시켜보면 다음 그림과 같습니다. 

 

 

중앙마산지역에 시행된 다양한 도시개발사업은 1934년 6월 20일자로 제정․발포된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 때 세운 도시계획은 계획대로 시행되지 않았으며 완성도 보지 못하고 해방을 맞게 됩니다.

193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신마산의 건물들은 장군천 부근까지 다가왔습니다. 그렇지만 장군천 이북에는 1911년 개통된 대로변에 전기회사가 있었을 뿐 그 밖의 일반건물은 별로 없었습니다. 구(舊)도로, 즉 크리스탈호텔 앞 도로 변에 주로 민간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마산에 집중 배치되어 있던 관공서 건물들이 서서히 중앙마산으로 옮겨와 중앙마산의 공공업무지역화가 본격 진행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5년 마산부 청사 이전입니다.

1941년 기준으로 중앙마산 지역인 중앙동과 장군동에 위치한 공공건물을 보면 마산부청을 필두로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마산우편국․마산조선간이보험진료소․마산세무서․마산역․마산경찰서․도립마산의원․마산보선구(馬山保線區)․연초판매소․곡물검사소마산출장소와 그밖에 조선상업은행마산지점․마산금융조합․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 마산영업소․조선운송주식회사 마산지점․합자회사 협융회 등이 있을 정도로 크게 변해 공공업무지역의 성격을 완전하게 갖추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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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2) - 강점제3시기

<馬山府全圖**>

1937년 / 마산부 / / 마산시구개정관계서류, 문서번호 1014 / 정부기록보존소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입니다. 제작시기에 맞춰 아주 정확하게 표기된 지도로 보입니다.

조계지는 물론 신마산 전역에 이미 개통된 도로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주요 시설들도 명기되어 있습니다.

원마산 역시 그 때까지 개설되었던 도로가 그려져 있고 당시 이미 준공되었던 신포동 매립이 완성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죽본조(竹本組)가 매립한 오동동 해안의 매립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형태는 달랐습니다.

이 지도를 통해서 장군천까지 완전하게 도시를 이룬 신마산을 확인할 수 있으며 원마산 역시 교방천까지 도시의 범역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920년대부터 시작된 중앙마산의 조성도 진척이 많아 중앙간선도로(합포로)와 진주가도 사이 일대는 이미 도로가 개설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이때까지 개설된 중앙마산의 고지대 도로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의 중요한 특징은 중앙마산일대에 도시계획도로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선이 바로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해 8만명의 인구로 계획한 마산의 시가지 계획도로 추정된다.

이 계획도에 의하면 중앙마산지역의 도로개설영역은 중앙마산 전체와 신월동 윗 지역까지, 서쪽으로는 현 성지여고 부근까지 계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큰 도로만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지도를 통해서 중앙마산지역의 도로개설과 신포동 매립으로 신마산과 원마산이 지형적으로도 완전하게 연결되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소개한「馬山港略圖(141회)」에 나타나는 점선의 계획도로는 이 지도를 보고 그린 것입니다.

이 계획 도로들을 1947년에 촬영한 항공사진과 비교해 보면 실제로는 완전히 다르게 도로가 개설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변경되어버린 이유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2012/09/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2012/09/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2012/10/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2012/10/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2012/10/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2012/10/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2) - 강점제3시기

2012/10/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3) - 강점제3시기

2012/11/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4) - 강점제3시기

2012/11/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5) - 강점제3시기

2012/11/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6) - 강점제3시기

2012/11/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7) - 강점제3시기

2012/12/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8) - 강점제3시기

2012/12/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9) - 강점제3시기

2012/12/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0) - 강점제3시기 

2012/12/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1)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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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일본인과 한국인의 마산상권 판도>

『마산상공회의소 백년사』에는 1939년 현재 마산에서 활동한 개인 영업자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제조업과 운수업 등은 제외한 통계입니다.

이들 개인영업자 중 한국인 상인들은 주로 원마산 중심상가와 부림동 시장 및 남성동 해안 일대에서 곡물, 면사포 등의 포목류, 해산물, 식료품, 고무신 등 생활필수품을 많이 취급했고 대금업도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 상인들은 주로 건축자재, 철물, 과장, 서적과 문방구, 가구, 의복, 술과 고기, 연료, 선구(船具) 등을 판매했고 대금업도 10여명 정도 되었고 토건청부업도 있었습니다.

자료에 나타난 개인영업자의 숫자는 232명이며 영업장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이용해 232개의 영업장을 원마산․신마산․중앙마산으로 나누고 다시 각 동별로 나누어 표시해보았습니다.

다음 그림입니다.

 

전체 영업자 232명 중 한국인은 202명, 일본인은 130명 이었는데, 한국인 202명 중에서 94.5%인 191명이 원마산에서 영업했으며 중앙마산에는 2명, 신마산에는 9명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은 130명 중 원마산에 37.7%인 49명, 중앙마산에 26.9%인 35명, 신마산에 35.4%인 46명이 각각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료가 말하는 것은 한국인의 신마산 진출에 비해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이 월등히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인들이 신마산에 진출하지 못한 까닭은 신마산에 비해 원마산 상권이 활성화되어 있었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그 보다 신마산 일본인들의 배타적 성향이 더 큰 이유였을 겁니다.

나아가 일본인들은 풍부한 돈줄과 막강한 배후세력으로 중앙마산을 포함 도시 전역에 광범위하게 영업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 중앙마산으로 설정한 지역은 중앙동․장군동․자산동․완월동을 비롯해 매립으로 조성된 월포동․신포동 등입니다.

다음 사진은 1930년대의 두월동, 즉 신마산 일본인 상권의 중심지 입니다. 지금은 통술거리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쿄마치(京町)라 불렀던 신마산 최고의 번화가였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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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마산의 도시계획>

일제가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해 고시 제556호로 발포한 마산의 시가지 계획은 구역면적 43,287,000㎡, 계획인구 80,000명, 목표연도는 1961년까지, 내용은 가로개설 및 구획정리였습니다.

계획인구 8만명, 목표연도 1961년이라는 일제의 계획을 보니 어떻습니까?

이 고시가 발포된 시기는 1941년 4월 19일이었습니다.

발포시기와 달리 마산은 1936년과 1938년에 가로(街路)축조공사를 이미 시행하였는데 이 공사도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추정됩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사진)은 「조선시가지계획령」 분석을 통해 원마산 지역은 1920년대에 총독부의 재정 지원으로 실시한 시구개정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 반면, 신마산 지역은 시구개정을 하지 않았지만 개항장을 조성할 때 비교적 도시가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한 것 같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손정목의 이 견해에 따르면 원마산 지역은 이미 시구개정이 어느 정도 되었으며 신마산 지역은 이미 도시가 잘 정리되어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시구개정사업의 역점을 두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데, 바로 그 다른 곳이 중앙마산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원마산과 신마산이 아닌 곳에 이 시기 도로를 개설한 곳은 중앙마산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강점제2시기의 97, 98, 99, 100, 101>의 포스팅에서 설명했듯이 마산은 이미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중앙마산지역의 개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930년대에 시작된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한 마산시가지 계획은 이미 시행하고 있던 중앙마산 조성의 사실상 연장사업으로서 보다 체계적인 도시체제 정비계획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앙마산의 형성은 토지 용도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래 표를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밭을 畑이라 하고 논을 田이라 합니다.

1931년 기준으로 밭(畑)이 65.3정반(정반, 町反 / 1정반은 척관법(尺貫法)의 한 단위로서 1町의 뜻인데 3,000평(坪)에 해당됨), 논(田)이 138.0町反 대지(宅地)가 125.5町反이었습니다.

하지만 10년 후인 1941년에는 밭(畑)이 61.1町反, 논(田)이 131.5町反로 각각 4.2, 6.5町反 줄어들었으며 대지(宅地)는 172.0町反으로 46.5町反이나 늘어난 것이 그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구분

1931년

1932년

1935년

1936년

1938년

1941년

밭(畑)

65.3

64.2

64.3

59.7

60.4

61.1

논(田)

138.0

137.2

133.2

133.0

127.5

131.5

택지

125.5

129.4

150.0

152.2

159.4

172.0

 

-마산의 범역이 넓어지다-

강점 막바지였던 1941-1942년 사이에 몇몇 도․시․부(道․市․府)에서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습니다.

이 때 마산은 부산과 함께 1942년 9월 30일자로 총독부령 제242호에 의해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됩니다.

마산에 인접한 창원군 내서면 내의 5개 동리, 창원면․구산면내에서 각각 1개 동리씩을 마산부에 편입함으로써 마산부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된 것입니다.

이 때 편입된 곳이 그 때까지 창원군 내서면에 속해 있었던 교방리․회원리․산호리․석전리․양덕리와 창원면 봉암리와 구산면 가포리였습니다. 지금은 모두 동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마산부 관할구역의 면적은 29㎢로 확대되었는데, 1914년 4월에 결정된 마산부의 행정구역 약 10㎢에 비해 약 3배로 늘어난 셈입니다.

이 경계는 해방을 지나 1964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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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9) - 강점제2시기

85회부터 시작된 1920년대 마산도시변화에 대한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일제강점 제2시기인 1920년대는 한국이 일제의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 특히 식량공급지로 산업구조가 재편되었던 산업수탈기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기만적인 소위 문화정치가 표방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산미증식계획이 강행되었고 회사령이 철폐되었습니다.

1920년대의 마산인구는 1920년에 16,165명이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구성장의 폭이 조금씩 많아져 1930년에는 25,810명이 되었습니다.

일본인은 1920년 당시 4,172명이던 것이 1930년에는 5,559명이 되어 1920년에 비해 133.2%로 늘어났지만 한국인들은 같은 시기에 169.0%로서 일본인의 증가율에 비해 약간 높았습니다. 

조선회사령 폐지로 마산의 민족자본가들도 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일본인 역시 기업을 앞세워 원마산으로 많이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요인이 되어 1920년대 중반 이후 마산은 원마산의 도로건설과 마산만 해안 전역에 매립공사가 시작되는 등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원마산 지역의 매립은 박간(迫間)의 매립 때 매립되지 않고 남아있던 동굴강의 일부가 1927년 매립되었고, 1929년에는 오동동일대 해변 1,700여 평이 매립되어 대규모 매립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신마산에도 현재의 경남은행 신마산 지점 건너편 일대 총 10,500여 평이 매립되었고 중앙마산의 해면(현 신포동)도 대규모 매립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20년대 중반부터 마산은 매립이라는 도시의 대변화가 시작되었으며 이 변화는 해방 때까지 지속됨으로써 도시구조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합방기 이전에 이미 장군천까지 도로가 개설되었지만 건물은 많이 들어서지 않았지만 1920년대 후반에는 철근콘크리트조의 모더니즘 영향을 받은 건물도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건물의 용도는 산업시설과 교육시설 등이 많았습니다. 상수도는 1930년에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1920년대의 특이한 변화는 20년대 중반 이후 신마산과 원마산의 중간 지점인 장군천과 몽고정 사이의 중앙마산에 공공지역을 위주의 새로운 영역이 조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철도용지였던 이곳을 불하하여 가용지로 만들었던 중앙마산의 형성은 마산을 두 지역으로 분절하고 있었던 기현상을 해소해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두 도시가 연담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마산 서쪽 모퉁이에 집중해있던 관공서들이 도시의 중심부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중앙마산의 형성과정은 중앙동2가와 3가에 대규모 도로계획을 입안하여 1927년 총독부의 허가를 얻음으로서 착수되었는데, 허가를 득한 후 이곳을 마산부가 불하를 받아 도로를 개설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원마산은 현재의 추산동과 상남동․교방동 즉 현재의 북마산 쪽으로 범역이 확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원마산 범역 확산의 중요한 이유는 마산과 진주를 연결하는 철도 경남선이 개통된 것과 구마산 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 일대가 교통과 유통의 중심기능을 담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마산의 상황은 시구개정사업이란 명분까지 갖추어 보다 많은 도로가 개설되었는데 이 과정에 중앙정부의 재정지원까지 있었습니다.

1910년에 이미 개설되어 있던 창동과 남성동 지역의 도로망이 이 때 중성동․오동동․동성동으로 많이 확산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도로망 확산기’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1920년 기준으로 원마산에서의 일본인 소유 토지는 전체의 35.0%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1930년에는 38.8%로 늘어났습니다. 이에 반해 한국인들의 토지소유는 1920년 62.5%이던 것이 1930년에는 55.2%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변화는 개인소유의 대지만으로 산정한 결과입니다.

기업과 단체가 사실상 일본인들의 소유였기 때문에 이를 합하면 실제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율은 이보다 훨씬 높아집니다.

이런 토지소유율의 변화를 통해 일본인의 원마산 토지 지배는 강점기가 진행될수록 심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일병합 10년이 지난 1920년대,,,,  해안 매립과 중앙마산 개발로 마산의 지도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다음은 1930년 마산지도입니다.

1920년, 1910년, 1899년 개항 당시의  지도와 함께 올리니 비교해보기 바랍니니다. <<<

 

<1930년>

<1920년>

<1910년>

<1899년 개항 당시>

 

-----------------------------------------------------------------------------

이것으로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2차 게재' 중 '강점 제2시기(1920년부터 1930년까지)'가 끝났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음처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포스팅할 계획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1차 ; 고대부터 개항(1899년)까지

2차 ; 개항이후부터 해방(1945년)까지

3차 ;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미 완료한 '1차 게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려시대 이전 ------ 9회

조선시대----------- 4회

개항기------------- 12회

합계--------------- 25회 완료

 

'2차 게재'는 다음처럼 구성하기로 했으며 세 번째 순서를 마쳤습니다.

개항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총 32회 (26회부터 57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1시기(1911년-1920년)----------총 27회 (58회부터 84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2시기(1921년부터 1930년까지)----총 35회 (85회부터 119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3시기(1931년부터 1945년까지)

 

'3차 게재' 계획입니다.

산업화 이전시기(1945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도약 및 전성기(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체 및 쇠락기(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 본 연재는 마산도시를 연구하면서 확보한 자료를 공유하자는 목적도 있습니다.

혹시 좋은 자료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2011/12/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2011/12/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0) - 강점제2시기

2012/01/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1) - 강점제2시기

2012/01/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2012/01/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2012/01/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2012/0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5) - 강점제2시기

2012/0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6) - 강점제2시기

2012/0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7) - 강점제2시기

2012/0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8) - 강점제2시기

2012/03/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9) - 강점제2시기

2012/03/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0) - 강점제2시기

2012/03/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1) - 강점제2시기

2012/03/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2) - 강점제2시기

2012/04/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3) - 강점제2시기

2012/04/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5) - 강점제2시기

2012/04/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06) - 강점제2시기

2012/04/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7) - 강점제2시기

2012/05/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8) - 강점제2시기

2012/05/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9) - 강점제2시기

2012/05/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0) - 강점제2시기

2012/05/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1) - 강점제2시기

2012/06/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2) - 강점제2시기

2012/06/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3) - 강점제2시기

2012/06/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4) - 강점제2시기

2012/06/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5) - 강점제2시기

2012/07/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6) - 강점제2시기

2012/07/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7) - 강점제2시기

2012/07/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8)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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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09:0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0) - 강점제2시기

2010년 4월 8일에 시작한 연재가 오늘로 100회를 맞았습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글을 올린 것이 그럭저럭 2년이 다되었군요.

보잘것 없는 글을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다 - 중앙마산의 형성>

4) 문헌을 통해 본 당시 상황과 중앙마산의 도시계획

직전 포스팅에서 올린 중앙마산에 대한 문헌의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당시 중앙마산의 상황이 다음과 같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중앙마산의 범역은 신월천에서 장군천을 거쳐 척산교에 이르는 철도용지 내 시가를 뜻했다.

② 마산은 마산포․신마산․중앙마산이라는 세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마산포 방면은 한인을 상대하는 상점이 많고, 신마산은 정비된 가로에 군인 및 관리를 상대로 하는 상점이 많으며 중앙부는 관아․학교․사원․철도소재지가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사택이 많이 있다.

③ 1931년에는 중앙마산의 토지 5천 평을 경매했는데 그 부근에 매립도 5만평을 할 것이고 향후 중앙마산이 상업지 혹은 관공서지역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에 마산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입찰에 응할 사람이 많았다.

④ 완월․신월 두 개 동을 합하여 일본인 360호 1,500인, 한국인 750호 4,0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⑤ 중앙 마산 중 일부 신마산에 접한 곳은 상황(商況)이 오히려 신마산쪽을 능가하지만 그 외는 대부분 철도용지를 차용한 전답인데 장군천 이북, 즉 현재 시청 남측의 우방아파트 지역인 중앙공설운동장을 포함하여 척산교에 이르는 이 지역 때문에 신마산과 원마산이 전혀 공간적으로 융화되지 않으며 도시 발전에도 장애가 되었다.

⑥ 도시의 서쪽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관공서의 위치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고 도시발전에도 지장이 많았는데 이에 대해 특히 원마산 주민들의 불만이 심했다. 이런 이유로 교통이 편리한 중앙마산으로 관공서를 이전해 줄 것을 부민들은 원했다. 그러나 일부 관리들은 이를 원치 않았다.

⑦ 부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1930년 마산 우편국을 중앙마산으로 이전 신축하였고 같은 이유로 마산부청도 이전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⑧ 마산부가 중앙마산의 도시계획을 잘 세워 세 영역을 합쳐 하나의 대도시로 만들어야 하고 이 일이 머지않아 성사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⑨ 이런 연유로 부에서는 이 용지를 불하하는 대 개정을 실시하여 기본 조사를 마치고 총공사비도 계상(計上)하였다. 그 불용경지(不用耕地) 총면적 11,189.90평을 철도국에서 불하받아 이에 대하여 삭지(削地) 성토를 하고 도로 및 택지를 개설하는 계획이었다.

⑩ 장군천의 장군교 상부지역 일대가 田中 遜이 운영한 월포원이었으며 현존하는 장장군(張將軍)의 묘는 월포원 내에 있었다.

⑪ 1929년 이전에 이미 철도부지가 마산부로 불하되었다.

⑫ 철도용지가 마산부에 불하된 이후인 1929년경에는 속속 신건물이 들어서고 있으며 부청과 공회당의 부지가 확정되었다.

⑬ 중앙마산 해면의 매축이 시행 중에 있으며 이 공사가 완료되면 중앙마산의 발전으로 마산 시가지에 큰 변화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1920년대 당시 중앙마산의 출현과 그 가능성 그리고 필요성에 대한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시 실정이 반영되어 마산부에서는 중앙마산 조성을 위해 도시계획사업을 입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행정서류「마산시가계획인가의 건(馬山市街計劃認可ノ件)」이란 제목으로 계획․추진된 이 사업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산시가계획인가의 건」은 '중앙마산 연재'에서 보여드린 각종 문헌에서 나타나듯이 중앙마산의 도시조성 여론이 확산되고 있던 1924년 10월 30일 신청하여 1925년 5월 6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받았습니다.

철도용지 해제를 전제로 추진된 이 계획의 공간적 범위를 그림으로 그려보았습니다.


아래 그림은 중앙마산 도시설계도면인데 길이는 전 불로장유(장군로에서 마산여고 방향으로 꺾어지는 모퉁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장군천을 건너 지금의 마산세무서․마산법원․도립병원․미래치과를 지나 경남데파트까지입니다.

폭은 장군천을 기점으로 이북방향은 중앙간선도로인 현재의 장군로에서 장군교 정도까지의 직사각형 범위였고, 장군천 남쪽은 개항기 때 개설되어 마산 역과 연결되는 사선(斜線)도로 이북까지를 포함한 대 규모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장군로 동쪽(현․마산시청 쪽)도 길게 한 블록이 계획되었습니다.

두번 째 그림은 같은 축척의 현재 시가지 도면입니다.



도시설계의 내용은 원마산과 신마산의 시가를 연담화 시키기 위해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철도용지이면서도 사실상 철도용지로 사용되지 않는 곳을 관유지와 민유지 및 도로로 개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도로의 형태를 길이 방향으로는 7칸을 나눈 후 각 칸을 다시 소로를 이용해 두 칸씩 나누었으며 폭 방향으로는 3칸을 나눈 후 그 중 후면의 두 블록은 길이 방향처럼 소로를 이용해 두 칸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인가를 받기 위한 서류에는 당시의 설계도면인 이 그림 외에 축척 1/100의 단면도, 평면도 등까지 상세하게 그려서 첨부되어 있습니다.

중앙마산조성을 위한 도시계획은 총독부 인가를 득한 후 시행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지적도를 보면 계획도면과 같은 형태의 도로가 잘 표시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토지대장과 지적도를 확인해보니, 도로가 생기면서 토지가 분할된 시점은 1926년이었습니다.

지적도의 내용 중 계획도면과 다른 점이 있다면 토지를 분할하여 정리한 영역이 옛 진주가도 동쪽 부분(옛 크리스탈호텔 앞길과 중앙간선도로 사이)에만 우선 시행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토지대장에 나타나는 중앙마산의 토지는 1912년 사정(査定) 때부터 지목은「鐵(철)」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토지가 분할되고 지목이 바뀐 다음 해인 1927년에 장군로와 진주가도 사이의 모든 토지의 지목은「垈地(대지)」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중앙마산이 1929년 11월과 1931년 9월에 도립병원과 당 기숙사 및 지방법원 부지확보를 목적으로 세분화된 블럭을 합필하기 위해「馬山市街計劃路線 中 一部廢止ノ件(마산시가계획노선 중 일부폐지의 건)」이란 제목의 서류가 상정되어 추진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립병원은 현 도립의료원입니다.
1926년 현재의 위치에 2,600여 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연건평 438평의 병원건물을 신축하여 1927년 5월 10일 완공하였는데 이것이 마산 최초의 종합병원입니다.

또한 1929년 11월에 중앙동 2가와 3가의 도로 887m를 폭 20m로 확장하는 계획까지 세워 1930년 4월에 인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 도로 확장 계획은 이미 1929년에 분할해 놓았다가 이 때 총독부 인가를 받아 1934년에 도로로 지목을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이후의 각종자료(1947년 항공사진, 1954년 지도, 1965년 지도 등)를 보면 중앙마산의 이 도시계획사업은 장군로변의 한 블록 정도만 실제 시행이 되었으며 진주가도의 서쪽은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지적도와 토지대장 등 법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그 때까지 실제로 도로개설을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한편 이 계획서류에 첨부된 도면에는 시가계획구역 외의 지역도 점선으로 도로계획을 하고 있는데, 1930년대에 실제로 시행된 도로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 계획과 전혀 다르게 시행되었습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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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0)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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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상완 2012.03.16 15:0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의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스토리가 있는 문화 상품으로 개발한다면 그 경제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 저를 속물이라 욕할 수도 있겠지만 그 흔적들이 사라져 가는 현장들이 안타까울 다름입니다...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하고 자문해봅니다... 선생님의 건투를 빕니다.

2012.03.0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9) - 강점제2시기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다 - 중앙마산의 형성>

3) 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중앙마산'의 철도용지

‘중앙마산’이라는 용어는 이 글에서 처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일제기에 간행된 마산관련 몇몇 자료에서「중앙마산(中央馬山)」혹은「중앙방면(中央方面)」「중앙부」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지역이 신마산과 원마산의 두 영역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두 지역 사이에 있는 다른 성격의 도시공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1920년대 일본인이 발간한 문헌에 나오는 '중앙마산' 관련 기록들을 모아 소개하겠습니다.
내용을 간추려 번역한 것이며 명칭은 현재 사용하는 용어로 고쳐 적습니다.

①『馬山港誌(마산항지, 1926)』- 諏方史郞(추방사랑)

a. 위치와 지세(p.3)


마산부의 대체적인 지세는 본래 마산포 즉 마산포 방면과 이전의 각국거류지 및 군영, 군 관사 소재의 신마산 방면, 그리고 그 중간인 철도용지 즉 중앙부 방면의 크게 세부분으로 성립된다.
그 중 마산포 방면은 한인(韓人)을 상대하는 상점이 많으며 미곡, 해산물의 집산지다. 신마산은 정비된 가로와 좋은 가옥이 많고 군인 관리를 상대로 하는 상점이 대부분이며 중앙부는 관아․학교․사원․철도소재지가 있기 때문에 그 곳 관계자의 주택이 많이 있은데 중앙부 중 일부 신마산에 접한 곳은 상황(商況)이 오히려 신마산을 능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앙부 대부분은 철도용지를 빌린 전답들이다.
마산부는 중앙부에 대한 도시 및 거리조영(造營) 계획을 지금 시행한다면 세 도시가 합쳐져서 하나의 대도시로 되는 것이 먼 장래의 일 만은 아닐 것이다.

b. 신․구마산의 공칭 (pp.91-92)
․․․․․․․․따라서 그 중간인 신월천에서 장군천을 통해 척산교(尺山橋)에 이르는 철도용지 내 시가를 중앙부라 칭하였고․․․․․․․

c. 중앙 방면 (pp.202-203)
중앙방면은 신마산의 동북경계인 신월천부터 동북으로 나아가 장군천(將軍河)을 건너서 마산포의 서남부분의 척산교(尺山橋)에 이르는 사이를 총칭하는 것이다․․․․․․․․․․․․․․․그 부근에서 번영하는 중앙동거리를 지나 거류지의 위쪽으로 나있는 대 가로를 따라 창원군청, 자혜병원, 경찰서, 고녀고(高女校, 마산여고의 전신인 마산고등여학교를 말함
) 등이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점은 상점가로서 번영하는 외관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방면의 중앙을 관통하는 하천을 장군천이라고 한다. 상류 장군교 북쪽 일대는 전중손(田中遜) 백작의 농사경영과 관련되어 있는 월포원의 식림지인데 고려말의 처사 장장군(張將軍)이 왜구와 싸우다 충성스런 전사를 한 명예를 기리기 위하여 하천의 이름을 그렇게 붙였고 장군은 월포원 내에 영면해 있다. 이 하천의 중앙동 지역에 놓여진 다리는 월포교라 하고 장군동에 놓여진 것은 장군교라 한다.
장군교 부근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중앙동에 이르는 가로는 1906년 초겨울에 개통되어 당시 거류지인 마산포의 유일한 연락도로가 되었고 1910년에 마산, 진주간 일등도로가 마산 역전까지 개통을 보게 되면서 두 개의 길을 얻어 척산교에서 서로 만나 한 도로가 되어 마산포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까지 마산 역전에 높이 50척의 한 언덕이 있어 그 꼭대기에 정자를 지어 역무원들이 달을 보고 더위를 식히는 위안소가 되어 月見丘(월견구, 스키미오카)라고 불렀는데 아래 가장자리의 도로는 가끔 물에 잠겨 통행두절 상태가 되기도 했다. 마진도로개통과 함께 월견구도 평탄하게 깎아 도로로 만들었고 그 언덕자리는 현재 상반여관에서 丸二(환이, 마루니)운송점 창고가 있는 일대의 지역이다.
장군천 하류의 동쪽지역에는 1911년 5월 23일부터 전(全) 항구를 전기로 밝힌 일한와사전기회사의 후신인 경성전기회사 마산지점이 있었다․․․․․․․․
․․․․․․․․중앙방면, 반월동에서 부터 장군동의 전부 남측, 즉 중앙동, 월포동을 거쳐 해안에 이르기까지 인가의 유무를 불문하고 부설한 철도용지이며, 완월, 신월 두 개 동을 합하여 일본인 3백60호 1,500명, 한국인 약 750호 4,000명이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 방면을 평하자면․철도․은행과 회사․관리․교원들의 동네나 대서인(代書人), 변호사 및 은급자들이 거주하는 동네이며 사찰 동네가 될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은 가옥건축을 허용한 철도용지의 전답으로서․․․․․․․

d. 신시가의 실현이 가까웠다 (pp.220-221)
마산부는 원래 신마산과 마산포와 중앙부 철도용지로 세 영역으로 크게 구분된다. 중앙부의 신마산에 가까운 방면 및 마산 역과 그 관사․마산소학교․마산고등여학교․마산자혜의원․창원군청․마산지방법원지청소재 부근 등 약 3분의 1로는 민가 가옥이 줄지어 있지만 중앙공설운동장 방면, 장군천과 월포교를 지나 척산교에 이르는 사이에는 광막한 철도용지가 자리 잡고 있어서 동서(東西) 마산은 모든 분야에서 다른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발전상 종종 장애를 가져오고 있음으로 부(府)에서는 누누이 이를 부협의회(府協議會) 회원에 자문하여 이미 이 용지를 불하하여 시구에 대 개정을 실시하여 기본 조사를 마치고 총공사비108,471원65전을 계상(計上)하였다. 그 불용경지(不用耕地) 총면적 11,189평 9홉을 철도국에서 불하받아 이를 삭지성토(削地盛土)하여 도로 및 택지를 개설하였다.
그 신개(新開)도로의 연장 3,074칸5푼을 공제한 이외는 모두 택지로 구획하여 일반 공중에 매각하는 성산(成算)을 세우고 총독부에서 청원할 것이라고 전해져 그 실현이 먼 장래가 아니라 2-3년 이내라고 예상된다.

e. 마산민중의 소리 - 마산부청의 위치에 대하여 (pp.222-223)
마산부청은 정확히 마산의 중앙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이를 인간에 비유한다면 체구의 중앙에 있으며 각 장기와 신경기관 그 외 신체 전부를 활동시키는 최고기관의 심장이다. 그 기관인 부(府)가 서북 모퉁이에 위치한 것은 반드시 부치(府治)를 건전히 발달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수의 공무원이 이전을 원치 않는다 라고 해서 안 된다는 것은 치자(治者)의 생각인데 부민(府民)의 입장에서는 과연 어떠한지․․․․․․․․
공과의 체납도 이것 때문이며․․․․․․․․형무지소 소재는 옛날 논밭이었던 한가로운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큰 가로에 접하여 상점이 즐비하고 크게 발한 지역이 되었다. 마산포 방면의 민중은 이것 또한 다른 곳에 이전하는 것을 희망한지 여러 년․․․․․․․․마산부청이 중앙으로 이전하면 신구(新舊)마산 사이의 감정도 스스로 융화될 것이 아닌가.

 

②『朝鮮と建築(조선과건축, 1929)』- 朝鮮建築會

a. 마산부청 신축과 공회당(3월호, p.39)

현 마산의 시가는 바다에 면한 무학산록 일대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남북으로 길어 마치 띠의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마산부청의 위치는 남방 신마산의 구석에 치우쳐 있음과 동시에 약간 높은 언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특히 구마산 방면은 매우 불편을 느끼고 있다. 현 부청사는 메이지 41년 마산이사청 당시 신축된 콘크리트건물로서,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된 견고한 건물인 까닭에 아무리 부민의 절박한 희망이 있다고는 하나, 건축비로 10만 엔 내외가 필요하기에 즉각 해결할 문제는 아니나․․․․․․․․ 부청이전문제가 대두하여 그 위치를 중앙부에 선정한다는 것은 부민의 편리에는 이 이상 좋은 일은 없고 나아가 시가의 발전에도 커다란 이익이 있을 것이라․․․․․․․․

b. 마산우편국 개축에 착수(12월호, p.32)
경남 마산우편국은 전 영사관 옆의 건물인데, 현 청사는 협소하고 위치가 매우 치우쳐있기에 일반 민중의 불편이 적지 않고, 현재의 발전에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개축 이전문제가 민중 사이에 소리 높여 제기되어 오랫동안 현안이 되어왔기에 우편당국 역시 이 점을 고려하여 이전 철도국 용지인 마산 역전의 공지를 빌려서 부지로 예상하고 그 곳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c. 마산부 소유 주택지 매각(1931년 10월호, p.54)
마산부는 신마산과 원마산 사이에 있는 부(府) 소유지 약 5천 평을 이번에 매각하는데 희망자가 선택 시 그 편의를 고려, 30여 필지로 분할하여 오는 9월 30일 마산부청 재무계에서 경쟁 입찰에 붙인다.
마산은 남지교(南旨橋)의 공사가 착수된 것과 함께 최근에 중앙마산(금회 경매에 나온 부근 일대)의 해면 약 5만 평 매축공사도 착수할 것이라고 결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 지역은 상업적으로, 또 관공서거리로서도 마산의 중앙부를 형성하게 될 것으로서 그 급속한 발전을 예측하고 지방민뿐만 아니라 부산․대구․진주방면에서도 이 경매지에 관한 소개가 있어서 희망자가 많다.

③『馬山現勢錄(마산현세록, 1929)』- 長田 純(장전순)․高須瑪公(고수마공)

a. 중앙마산의 매축 정비 (p.156)
마산의 시가구(市街區) 구성은 종래 신구 양(兩) 마산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자연스런 시가구(市街區)의 연결이 좋지 않았다. 마산 발전의 암과 같았던 중앙 마산의 경지(耕地, 철도용지)가 부에 불하되어 여러 가지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었으며 그 결과 최근 더욱 더 시가지로서 모습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즉, 종래의 경전(京電)마산지점을 위시하여 도립마산의원, 부산법원마산지청은 이미 장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으며 남선일보사, 부산일보사 등도 그 새로운 모습을 뽐내고, 마산부청과 공회당의 부지도 결정되어 머잖아 그 당당한 건축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한다.
중앙마산시가구(中央馬山市街區) 구성과 관련해서는 뭐니뭐니해도 중앙마산 지선(地先)의 공유수면 매축사업을 간과할 수 없다․․․․본 사업의 완성은 더욱 마산항 발전의 기폭제를 이루는 것으로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보신 것 처럼 여러 문헌에서 '중앙마산'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기록을 통한 당시 중앙마산의 상황과 형성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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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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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6) - 강점제2시기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다 - 중앙마산의 형성>

오늘부터는 ‘중앙마산의 형성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앙마산’이란, 20세기 초에 존재했던 마산의 두 도시, 즉 옛 부터 자연발생적 취락으로 발전해온 '원마산(마산포)'과 일본인들이 건설한 조계지 '신마산'의 중간 지역을 말합니다.
두 도시 사이에는 약 2㎞ 정도의 이격공간(離隔空間)이 있었는데, 이 범위 안에 조성된 혹은 조성될 도시공간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대략 마산합포구청(구 마산시청)에서 부터 3.15의거탑까지를 말합니다.


사실 마산포(원마산)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리 잡은 신마산(조계지)은 태생 때부터 이미 마산포와의 도시연담화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각국공동조계지의 위치를 결정할 때부터 연담도시를 의도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항 직후부터 원마산 방향으로 서서히 도시영역을 확장해간 일본인들은 합방 때인 1910년경에 이미 조계지의 북쪽 경계인 신월천을 훨씬 넘어서 장군천까지 진출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1920년대의 마산도시를 알 수 있는 각종 자료를 보면 1920년대 초기까지 일본인이 개설한 신설도로는 장군천의 장군다리까지였습니다.
건물도 마산 역에서 장군천으로 이어지는 사선형(斜線形) 도로 위쪽에만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이 되면서 서서히 건축물들이 장군천 주변에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선형 도로는 다음의 도로입니다.



원마산과 신마산 두 도시가 이렇게 나누어지게 되었던 원인은 보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설명이 가능합니다.
러일전쟁기에 맺어진 치욕적인 한일의정서에 의해 강탈당한 철도용지, 즉 신마산과 원마산 사이에 있는 지금의 완월동․장군동․중앙동 일대인 중앙마산지역을 일본 군부가 군사용 철도용지에 편입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때 결정된 철도용지는 강점기 후 변화하는 두 도시의 연결을 차단했으며 이로 인한 주민들의 불편도 컸습니다.

이런 상황이 1920년대 중반 이후에 와서야 변하기 시작합니다.
철도용지가 해제되고 중앙마산이 관공서 건물이 군집(群集)하는 공공업무지역 성격의 도시로 형성되었던 겁니다. 
말하자면 나누어져 있던 두 도시가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죠.

이러한 중앙마산변화의 전(全) 과정을 다음 포스팅부터 설명하려 합니다.
당시 나온 각종 지도와 문헌 자료를 이용하여 분석 판단할 것입니다.

중앙마산변화의 핵심은 이 지역을 철도용지로 묶는 과정과 그것을 푸는 과정입니다.
철도용지로 묶는 과정은 이런저런 자료가 있어서 비교적 쉽게 정리가 되었습니다만 해제과정은 자료가 많지 않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정황을 참고해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글쓰는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주부터 싣겠습니다.

1) 중앙마산이 철도용지로 된 원인
2) 중앙마산이 철도용지로 강점되는 과정
3) 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중앙마산의 철도용지
4) 문헌을 통해본 당시상황과 중앙마산의 도시계획
5) 중앙마산의 형성과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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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윤의 <마산야화> - 136. 1900년대의 국제관계

136. 1900년대의 국제 관계 청일정쟁으로부터 노일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최고의 단계인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던 시기로 이 시기의 시대적 특징인 극동에 있어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의 심화와 그 확대로..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 국토의 약탈과 국민생활 제재(制裁) 일본은 노일전쟁 전에 거제도 일대(송진포松津浦 / 원문에는 송포진)를 근거로 어업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중 일본 대노국(對露國)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적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4. 매축권과 대일 투쟁

134. 매축권(埋築權)과 대일(對日) 투쟁 구마산포는 옛날부터 농수산물의 집산지로서 중부 경남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기능을 가진 요지로 발달해 온 곳이었다. 망국의 낌새가 스며들던 한말, 마산의 토지소유권을 비롯한 모든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3. 노공관의 점유지

133. 노공관(露公館)의 점유지 1899년 노서아와 일본 정부가 마산에 해군 근거지를 두려고 각축전이 치열했는데 노서아는 서부 마산에 조차 조약을 체결한 뒤 지금의 일성 펌프공장 자리에 영사관을 두고 백조악기점 자리에는 관사..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2. 아라사 함대 입항

132. 아라사 함대 입항 아라사(노국의 별칭) 함대가 마산포에 투묘(投錨)한 것은 1899년(광무 3년, 명치 32년)이 처음이었다. 주한공사인 파브로프가 탑승한 군함 만츄리아 호가 인천에서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상해로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1. 자복포의 매수 각축

131. 자복포(滋福浦)의 매수 각축 조선정부와 영·독(英·獨, 1883년 11월 26일 체결), 아국(俄國, 1884년 7월 / 원문에는 1885년 10월 24일 체결), 의국(義國, / 해방 후 미국을 의국이라 칭하기도 했..

새해인사
새해인사 2017.01.01

2017년, 모든 이들이 희망을 품고 사는 세상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애당초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노신>

한국 100명산이야기 21 : 비파와 거문고 형상의 비슬산

● 국가적으로 우환이 많았던 병신년을 마무리 하기 위해, 대구시 달성군 현풍에 있는 비슬산을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양덕동에서 모여 곰탕으로 유명한 현풍으로 향하였습니다. 현풍의 산업단지라 할 수 있는 '대구테크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