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에 해당되는 글 2건
- 2011/02/16 '고향의 봄' 창작지에서 (2)
- 2009/11/28 시비(是非)는 가려야 (2)
1920년대 일제감점시기때의 마산부 오동리 71번지의 위치를 찾을 수 있냐고?
그 주소지가 이원수선생이 16세때에 '고향의 봄' 을 만든 창작지라고 한다.
마산 마산원도심의 지적자료를 정리하고 있던 터라, 그간에 지번이 변경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말떨어지기 무섭게 다음날 현장을 안내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토요일 오동동 현장을 안내하게 되었다.
현재의 지번도를 통해 과거의 지번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행여 도로라도 개설되어서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다행히 골목안에 있던 필지라 필지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당초의 골목길이 6미터 도로로 확장되어 필지가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고향의 봄’ 창작지 현재의 모습
현재의 위치는 구. 오동동파출소에서 오동동아케이드로 내려오는 길 중간쯤 삼거리가 있다. 거기에서우측방향, 고려모텔로 향하는 길로 약 50미터정도 가다보면 골목 4거리가 좌측에 면한 상가건물이 당시 오동리 71번지이다.
현재는 필지가 71-1,2,3,4번지로 4개로 분할되어, 개별 주택과 상가가 지어져 있었다. 당시의 주택의 모습이나 흔적은 알아볼 방법이 없으나 주택이 있었던 지번이라도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동행한 관계자들은 매우 감개무량해 하는 것 같았다.
71-4번지에 해당되는 모서리 부분에 세탁소가 있었으며, 나머지 필지에도 주택 및 상가가 들어서 있었다.
(오동세탁소가 창작지 71번지이다. )
(사거리에서 어시장방향 골목전경) | (오동동 하천방향 골목전경) |
(사거리에서 패션호텔방향) | (고려모텔 방향 골목전경) |
● 1920년대 원도심의 사회상
당시 1920년대 원도심의 사회상은 마산 지역도시사를 정리한 허정도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원마산 지역의 상가는 중심번화가인 남성동과 창동을 비롯해서 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형성되었다. 이밖에 부림시장과 그 주변 및 남성동 어시장 근처의 해안매축지에도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인들이 즐비했다.
1926년경 신마산의 대성동과 장군동의 전답 지가는 평당 2원 4-50전이었으며 비싸도 삼원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원마산의 오동동 방면은 평당 20여원이었으며 전답도 4-6원에 이르렀을 정도로 가격이 치솟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장차 원마산 지역이 크게 발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땅 값은 이렇게 높았지만 원마산의 도시 시설의 정도는 그 때도 매우 낮았다. 원마산에 있던 건물은 대부분 초가였으며 아직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콩기름을 이용한 램프나 촛불을 사용하고 있었다.
1920년대의 원마산 변화를 지적도에서 찾아내어 1930년 당시 원마산을 복원한 도면이 다음의 지도이다.
(1920년대 원도심 지도 : 붉은색 부분이 오동리 71번지) | (구글 지도상의 오동동 71번지 :감색부분은 매립전의 원도심이며 청색부분은 포구였다. ) |
● 당시의 사회상
당시의 상황을 위의 자료를 통해 정리해 보면 주변 환경을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볼수 있을 것 같다.
당시만 하여도 오동리는 원도심의 변두리 지역에 해당되었다. 주변에 인가가 적은 논밭으로 되어있었으며 원도심(현 고려모텔)방향으로 논두렁 같은 길이 나 있었다.
오동동 하천하류 방향으로 구.오동동 파출소에서 아케이드로 내려오는 길 주변에는 제법 많은 주택가가 형성되었음을 당시의 지도현황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로서는 하천이 주거지를 위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공공시설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원도심의 대부분 주택은 초가였으며, 전기 공급은 신마산 조계지에만 공급되던 시절이라서, 콩기름을 이용한 램프나 촛불을 사용하던 시기였었다.
오동리 71번지는 당시는 원도심 외곽지역이었으나 도심지역이 확산되면서 중심가로 변모 하였던 것 같다.
한편 일본이 마산설 철도부설시 건설인력들과 함께 묻어 들어온 기생, 이를 교육하고 공급하는 조합에 해당되는 '남선권번'이 오동리에 있었다.
이원수선생이 오동리에서 마산공립보통학교를 다닐 적,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이 문학 소년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누나 덕분이었는데, 바로 그 누나가 오동리에 있던 권번에서 교육을 받고 기생이 되어 동생을 키웠다고 한다.
오동리가 가졌던 장소적 특성과 가족사적인 애환이 그의 생애에서, 작품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 이원수선생의 역사적 재조명에 대한 논란
올해가 이원수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이원수 선생을 재조명하는 상황에서 상반된 입장이 대립되고 있다.
< 뉴스 1 >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 및 흉상 제막식'이 24일 오후 창원시 팔룡동 고향의 봄 도서관에서 열렸다.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사)고향의봄기념사업회 주최, 주관으로 열린 이 행사에서 "이원수 선생의 탄생 100주년이 창원시를 '동심의 고장'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편 "문학과 도시의 가치는 연결된다"면서 "이 일이 통합 창원시의 가치를 부여하고, 도시의 브랜드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날 선포식과 흉상 제막을 시작으로, 오는 4월 학술세미나와 '고향의 봄 어린이잔치', 10월의 '이원수문학상 제정 및 시상'과 기념집 <겨울나무의 노래> 발간 등으로 이어질 계획이란다.
< 뉴스 2 >
창원시의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해 열린사회희망연대(공동대표 이동근 외 4명)가 문제를 제기했다.
"통합 창원시가 친일 문인 한 사람을 끌어들여 시의 가치를 보태야 할 정도로 초라하고 구차한 도시인가"라고 지적했다.
문제 제기의 근거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등재 사실과 함께 1942년 이원수 선생이 조선금융조합 기관지 <반도의 빛>에 발표한 시 '지원병을 보내며' 일부를 공개했다.
"진실을 거부하거나 왜곡하며 그를 기리는 일에 자신들의 돈이 아니라 시민의 세금으로 기념사업을 하겠다는 그 몰염치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문제제기 배경을 밝혔다.
● 역사적 재조명에 대하여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논의의 대상 밖으로 제외시키기 보담은 두 가지 측면을 다 재조명하였으면 합니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이며, 하나는 문학적 성과에 대하여는 학문적 입장에서 재조명하자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부분으로 인해 나머지 한부분에 대한 공과가 희석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민족적인 행위를 통한 역사적 진실은 후세에 그 만큼 희생이 따른다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문학적 성과에 대한 부분은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정확하게 정리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부분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아니면 대비를 통해 다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원수선생의 역사적 재조명’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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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是非)를 던지다』
제목이 좋았습니다.
양시(兩是), 양비(兩非)가 아니라, 옳고 그름(是非)을 따져본다는 의미의 제목이 좋았습니다.
저자는 한문학자 강명관 교수입니다. 젊었을 때는 민주화니 운동권이니 하며 한 가닥 했던 분인 듯했습니다.
서너 페이지가 한 꼭지로 된 조선시대생활풍속사를 엮은 책입니다.
글이 참 맛깔스러웠습니다.
조선시대의 이야기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삶과 연관시킨 점이 좋았습니다.
중앙의 지방 차별, 거짓과 허위, 허망한 권력, 모순된 착취구조, 왜곡된 역사 등 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난마들이 줄줄이 엮여 나옵니다.
머릿속에는 있었지만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들을 낱낱이 밝혀낸 책이었습니다.
····································
지방에 대한 차별의식은 어느새 지방 사람인 나의 언어와 심성에까지 들어와 있다.
지방대학은 별 볼 일 없는 이류대학이란 말이요,
“지방방송 꺼라”는 말은 부질 없는 소리 하지 말란 말이요.
지방기업이란 보잘 것 없는 기업이란 것이다.
‘지방’은 모든 이류이고 보잘 것 없고 무시해도 좋을 것들의 대명사가 되었다.
····································
대한민국 지도에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부산, 울산이 있지만, 그건 지도상에만 있을 뿐이고, 실제로는 없다.
실제로 있는 것은 서울과 지방 뿐이고, 그 지방은 서울의 ‘식민지’일 뿐이다.
인재를 빼앗기고, 돈을 갖다 바치고, 서울의 물건과 문화를 소비하는 서울의 식민지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인 것이다.
···································
역사인식에 대한 이야기도 통렬했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며 흠모해 마지않는 광개토대왕에 대한 부분입니다.
····································
18세에 즉위하여 39세에 사망한 그가 20여 년간 한 일은 오직 전쟁이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힌 것이 그의 업적인 것이다.
그 영토는 비문에 나와 있다.
‘공격해서 격파한 성이 64개였고, 마을이 1천 4백 개’였다.
이 외에 다른 업적이랄 것은 없다.
비문을 읽지 않아도 우리는 국사교육을 통해 그가 ‘널리 땅을 확장한(廣開土)’ 왕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
이상하지 않은가.
왜 고구려는,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영토로만 기억 것인가.
기나긴 시간 동안 수많은 인간이 살았던 고구려 사회가 왜 국토의 넓이로만 기억되는 것인가.
····································
한국은 식민지를 경험했으되, 제국주의적 욕방을 근원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도리어 제국주의적 영토욕을 내면화했던 것이다.
····································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영토가 넓었다는 것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질타하는 이 부분에서는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바로 내가 그렇거든요.
공부라면 단 한 번도 남에게 뒤떨어본 적이 없는 친구.
최고에 최고의 학교를 거친 그 친구가 우리 학계의 좁고 왜곡된 벽을 넘지 못해 50이 넘은 지금도 대학 강사 신세를 못 벗어난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가짜와 위조를 싫어하지만, 졸업장이라는 종잇조각이 없으면 이 사회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사회구조는 더더욱 가증스럽다는 부분에서는 분이 끓었습니다.
대중을 선동해 관리의 잘못을 따지고 들었던 불평 많은 이계심을 두고 오히려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역설한 다산의 모습을 읽을 때는 그가 우리 조상 중 한 분이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는 게 시비(是非)가리는 것일 터.
건강한 사회는 시비가 정확하게 가려져야 하는 법.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친일인명사전’과 ‘친북인명사전’을 둘러 싼 싸움과 싸움이 시비를 가리기 보다는 양시(兩是) 양비(兩非)에 익숙함을 잘 말해줍니다.
시비 가리지 못하게 하는 사회, 정상적인가?
시비 가리자는 사람더러 ‘골치 아픈 사람’ ‘말 많은 사람’ 한 걸음 더 나가 ‘반대만하는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사회, 정상인가?
윗사람에 그저 순종하고 힘에 굴종하고 제 목소리는 죽여야만 ‘된 사람’으로 칭찬 받는 사회, 정상인가?
이런 사회 정상인가, 망쫀가?
강명관 교수가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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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는날 갑자기! 사는 곳이 해안도로 근처라 아침마다매 창문을 열면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시설물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시멘트를 담아두는 창고와도 같은 곳으로 '싸이로(Silo)'라는 놈이다. 그런데 몇일 전부터 이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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