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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9/0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2) - 개항기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640여 평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였습니다. (도로면적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각종 자료에 나오는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마산지방해운항만청이 발간한 『마산항백서』에 의하면 이 매립공사는 1911년 착공되어 1914년 7월 준공되었다고 합니다.
『마산항지』에서는 1910년 착공하여 1913년 준공되었다고 기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매립공사는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은 일본 화가산현(和歌山縣) 출신으로 대판 오백정장평(五百井長平)상점에 들어갔다가 21세가 되던 해 한국으로 왔습니다.
무역업으로 일을 시작한 박간은 1905년부터는 독립하여 수산업․창고업․목물무역업․토지매매중개업 등에 종사했습니다.
유명한 동래별장의 주인이며 당시 부산 제일의 땅 부자였습니다.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경상남도회부의장․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였고 부산토지주식회사사장․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쥐락펴락한 인물입니다.
1923년 부산을 현지 르뽀한 잡지 개벽(開闢)의 기자는
「․․․․迫間方太郞 같은 사람은 그 한사람의 부력(富力)이 10,031호 조선인의 전 부력을 당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도시사학자 손정목은
‘그가 개인적으로 한반도 전체 일본인 중 최고의 자산가였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나온 일본인 중 최고부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지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경남 도내 소작지의 3.5%를 소유하였고 소작농이 2,000여 호가 될 정도의 대지주였으며 김해 진영면과 창원 대산면 동면 등 3개면에 걸친 진영농장의 주인이기도 했으니 옛 창원시의 땅도 많이 가졌던 셈입니다.
그런가하면 1896년 11월에는 부산에서 자본금 2만 5천원으로 부산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 세운 일본인 회사의 효시입니다.
유명한 '마산포 사건' 때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하도록 하였고, 그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도 했으니 마산과도 인연이 깊은 셈입니다.
유장근 교수와 함께 걸었던 도시탐방대 답사 때 무학산 어느 능선에서 그의 땅이었다는 표지석이 서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7-80년은 되었을 돌이었습니다.
후에 생길지도 모를 ‘마산근대사 박물관’에 전시하기 딱 좋은 유물이라, 보관해 놓을 생각도 했는데 무거워서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박간소유지(迫間所有地)’라고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간의 ‘마산과의 인연’은 바로 남성동 매립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개항 초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매립 때문에 생긴 충돌, 즉 앞서 포스팅한 김경덕 매축권에 대한 홍청삼(弘淸三)의 권한 계승 시비 사건(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이 있었던 이곳을 그가 매립한 것입니다.
매립의 실제 전주(錢主)는 박간방태랑이었지만 이 사업을 마산에서 직접 시행한 이는 바로 홍청삼(弘淸三)이었습니다.
홍청삼은 당시 마산거주 일본인의 거물로 현 제일여고에 있었던 신사건립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다음 그림은 제가 복원한 당시 지도인데 이 그림을 보면 쉽게 매립전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것은 매립 전인 1910년 경 도면이고 뒤것은 매립이 끝난 1920년 도면입니다.
이 때 매립된 토지의 지번과 소유자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토지는 총 52필지로 수성동115, 116, 117번지와 남성동 172번지부터 221번지까지였습니다. 수성동에 3필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 지역의 명칭을 ‘남성동 매립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매립된 52필지 중 수성동 116번지 374평과 117번지 34평, 합408평은 일본인 송원조장(松原早藏)의 소유(■부분)로, 남성동 200번지는 국유지(●부분)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매립주 박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항만의 요지(要地), 즉 초록색으로 표시한 ●부분의 남성동 200번지, 102평의 대지가 국유지로 된 사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박간이 너무 넓은 대지를 매립을 통해 일거에 소유하게 되자 그 답례로 부두용지 혹은 공공건물 부지로 총독부에 헌납했던지, 아니면 공공의 목적으로 그 땅을 정부가 매입했는지, 그저 추정만 해볼 뿐입니다.
박간 소유의 대지 49필지 7,568평은 아무런 변화 없이 전부 1936년 2월 22일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박간수웅(迫間秀雄)에게 이전되었고, 그런 상태로 해방까지 갑니다.
박간수웅(迫間秀雄)이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성이 같다는 점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미루어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승계 시켰다면 아들아닌가 라고 추정했을 뿐입니다.
다른 기록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경남지역 일본인 지주의 형성과정과 투자 사례, 1999, p.68, 한국민족문화 제14집」에 의하면 박간의 아들로 박간일남(迫間一男)이 등장하고, 그의 가계 중 박간무웅(迫間武雄)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간수웅은 혹 박간의 집안 조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이 많은 토지를 한 필지도 매매하지 않고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대지 혹은 건물을 전부 임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지역에서 발간된 자료에서는 ‘새로 매립된 토지의 가격이 최저 7원 50전에서 최고 22원까지 토지의 위치에 따라 상당한 격차가 있었는데 이를 박간이 분양하였다’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 매립지가 해방 때까지 소유자 변경이 없었다는 것을 토지대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馬山港誌』의「馬山浦 埋立地」편에서도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매립지에 대해「․․․유감스러운 것은․․․․․․차지료(借地料)가 비교적 고율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박간이라는 일본인 단 한 사람에게 마산포에서 생업을 이어 가던 모든 사람들이 대지와 혹은 건물을 임대하여 영업을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튼 매립 후부터 이곳은 원마산 상권의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것처럼 마산만에는 박간 매립 전부터 여러 차례 매립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군부 혹은 공공기관에서 시행했거나 임의의 매립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박간의 매립은 민간인이 이윤을 목적으로 법적허가를 득하여 매립한 사례로 최초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미 포스팅한 1910년경 마산포 토지소유상태를 통해 이미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은 확인했습니만 본 매립사업 이후 일제의 원마산 상권 장악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매립은 일제가 항만도시 마산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식민정책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수탈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때 매립된 남성동 해안에는 석축안벽(石築岸壁)과 석축돌제(石築突堤) 등의 항만시설이 조성되었고 소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과 물량장을 갖추었습니다.
이 부두는 어선과 소형 화물선들의 정박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통영․거제 등 남해안 일대를 운항하는 연안 여객선 부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립지에 신설된 도로 사이에는 원정우편소(元町郵便所, 현 남성동우체국)를 시작으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매립하고 10년 쯤 지난 1924년, 이곳에 다음과 같은 길이 63.6m의 사석방파제가 설치되었습니다.
제 나이 열 두세살 쯤,
이 방파제 위에서 낚시를 했는데 팔뚝만한 뽀드라치를 한마리 낚아 올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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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포만 내려다 본 일본 신사(神社)>
일제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위협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이 신사(神社)였습니다.
한반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일본신사는 부산신사인데 이미 17세기에 일본인들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후 1876년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개항된 도시에 각국공동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일본거류민들이 조계지에 신사를 세웠습니다.
마산의 일본 신사(神社)건립계획은 순종이 마산을 방문했을 때 쯤 (1909년 초) 홍청삼(弘淸三)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마산경제회 등 일본인 유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 차례 신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아무도 그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날 홍씨가 마산의 일본인 유지 27명을 요정 ‘망월’에 초대하여 신사 창건을 호소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산항지』의 기록에 의하면 홍청삼은 ‘거류민으로서 조상신을 애호하는 염원과 진충보국 정신을 발양할 목적’ 으로 신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합니다.
당시 마산이사관이던 삼증(三增)이 해관장의 사택 예정지를 신사 부지로 내놓았습니다. 바로 지금의 제일여고 교정입니다.
도시공간적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위계가 높았던 자리로 아래 그림의 위치입니다.
밑의 사진은 1910년대에 발간된 마산지도에 나타난 '마산신사'입니다.
일제기 마산신사 전경입니다.
신사건립을 위해 1909년(명치 42) 2월 8일 마산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에서 일본인 유지 백여 명이 모여 마산신사 창건위원 10명을 선출하였습니다. 그 중 전전(前田) 민장이 위원장에, 뒷날 『마산항지』를 펴낸 추방사랑(諏方史郞)이 지진제(地鎭祭)의 신관(神官)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지진제는 3월 3일 삼증 이사관, 전전 민장, 홍청삼 민회의장, 민회의원, 상업회의소의원 등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하였으며 전전 위원장은 신사 창건기부금 5천원의 모금계획을 이사관에게 신청, 인가를 얻어 즉각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신사 지진제를 거행하는 장면입니다.
공사는 마산에 거주하던 말광기오랑(末光磯五郞)이라는 장인이 맡았습니다.
공사장에는 욕조를 두어 직공들과 함께 매일 아침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산신사에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봉안한 본전 외에 술 만드는 신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도 있었습니다. 송미신사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1936년에 증설하였습니다.
1920년 대 이후 번성했던 마산의 주류산업이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산의 일본인 양조업자들은 일 년에 한차례씩 송미신사 앞에서 성대한 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지금도 제일여고 주변에는 당시의 신사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교문 안과 바깥 돌계단이 옛 신사입구 계단입니다. 이 돌계단은 일제기 마산포 주민들이 근로봉사작업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노역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정의 정원석으로도 신사의 흔적이 남아 사용되고있으며, 담벼락에는 축조발기인이라고 밝힌 일본인의 이름이 음각된 돌도 박혀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일제기 마산신사 입구 모습과 현 제일여고 정문 사진입니다.
정문 앞 계단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제일여고 교문이 신사의 신주문을 모방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것 같습니다.
『마산 창원 역사읽기』에서 설립자인 이형규 이사장이 제일여고 교문은 전주체육관의 정문을 모방한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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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가실 2010/11/29 20:31
아, 못보던 사진도 올라왔군요. 특히 지진제 사진....
어디서 구하셨나, 저 진귀한 사진을.....
그리고 추방사랑의 일본훈은 '수와(Suwa)입디다.
<상공회의소, 인력거, 매춘,,,,>
개항 이후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경제 침식에 맞서 지역 상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국개항장의 객주와 여각 등 상인들이 자위적으로 상인 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이러한 조직체를 통괄하여 외세로부터 민족 상권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5년 11월 10일「상무회의소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규례가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근대적 상공회의소에 관한 최초의 법령입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5월 12일에는 칙령 제19호로 전 조항을 개정했는데 이로써 근대적 면모를 갖춘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이 개정규례가 발포된 5월 12일을「상공의 날」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산도 1900년 5월 마산포 객주를 중심으로 「마산상호회」를 조직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당시 마산포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이규철, 이상태 등이 참여했으며 상호회의 운영자금은 어선창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 화물 1뭉치 당 엽전 1원씩을 징수하여 충당했다고 합니다.
원산(1882년)․한성(1884년)․부산(1889년)․인천(1896년)․목포(1898년)에 이어 전국 여섯 번째로 비교적 빠른 편이었습니다. 마산에 이어서 북청․대구․평양․김천․군산․개성․수원에도 ‘상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1906년 「조선인상업회의소」로 바꾸어 운영했으나 경술국치 후 일제의 압력 때문에 갈등을 빚다가 1914년 8월 28일 해산 총회를 가졌습니다. 이 때 운영비 잔액 500원을 민족학교였던 사립창신학교의 육영사업비로 기증하였습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볼 때 당시 「마산상호회」에는 마산의 양심적인 민족자본가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마산상호회」의 출범이 현재 마산상공회의소의 기원입니다. 올 해로 마산상공회의소가 110주년이 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창진 도시통합으로 마산상공회의소는 없어지지만 '통합창원시 상공회의소'의 역사는 마산상공회의소 것을 이어받는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1939년부터 일본인들이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1958년까지 사용되었던 마산상공회의소 회관입니다. 마산 중앙동 1가에 있었습니다.
〈개항 후 사회변화〉
일제가 우리나라를 삼키니 마산사회도 급격히 변해갔습니다.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 인력거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교통수단이 등장하
자전거와 하마차(荷馬車) 그리고 인력거였습니다.
그 중 인력거는 일본사람들이 발명한 것으로서 1894년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인력거를 가장 먼저 공식 교통기구로 인정하여 운행했던 곳이 마산입니다.
「인력차영업취체규칙」이 마산 이사청에 의해 제정 공포되어 시행한 것이 1908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서울 및 경기도 일원은 같은 해 8월 15일자 경무청 령으로 「인력차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어 인력거 영업과 관련된 사항을 규정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마산에서 전국 최초로 교통법을 만들어 적용' 한 셈입니다.
마산에서 인력거 사용과 조치가 이처럼 빨랐던 것은 '한국인들의 원마산'과 '일본인들의 신마산'이라는 두 지역이 도시 내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매춘
이 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사창(私娼)도 생겼습니다.
한국 땅에 공인된 창기업(娼妓業)의 집단지역, 즉 유곽(遊廓)이라는 것이 최초로 생긴 것은 1900년 10월에 재부산 일본영사관에서 허가한 부산 일본전관거류지 바로 동쪽 부평동 1가입니다.
부산에 이어 1902년 12월에는 인천에도 유곽(遊廓)이 허가되었습니다.
이런 유곽이 마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직후로, 1904년 마산선 철도공사 때 들어온 건설노동자와 함께 일본 매춘부가 들어왔습니다.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에 의하면 1907년경 현 자산동 몽고간장 뒤편에 일본인에 의해 조선인 창녀 7-8명이 기거하며 영업을 하였고 1910년경에는 전 미도식당 동쪽입구(제일은행마산지점 뒷골묵) 골목에 조선인 창녀 5-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 가포에 들어선 일본마을 지바무라
한편 일본의 한국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1905년 2월 율구미 남쪽 해변에 일본 지바껜(千葉縣) 수산연합회의 어민 20명이 어업이민으로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지바무라(千葉村)라 부르면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어구이 식당이 많이 들어서있는 가포마을이 바로 그곳입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집을 개조한 ‘소나무집’이라는 장어구이 식당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주택 정원에 있던 소나무가 남아 상호가 되었습니다.
○ 여관, 병원, 신문, 극장 그리고 동척,,,,
당시 마산에는 여관이 30여 개소있었는데 그 중 3개가 원마산에 있었습니다.
하루에 이용하는 투숙객이 150여 명으로 연인원 56,000여 명이었으니 마산에 출입하던 일본인들의 숫자가 대략 짐작됩니다.
그런가하면 1904년에는 마산 최초의 병원이 1904년 가을 창포동 3가에 덕영오일(德永吾一)이란 일본인이 「마산병원」이란 이름으로 개업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1911년에 편찬된 『마산과 진해만』에 실린 이 병원의 광고입니다.
1906년 2월에는 마산 최초의 언론, 「마산신보」가 창간되었고,
1910년경에는 5-600명의 수용이 가능한 일본식 목조 2층 회전무대식 극장 환서좌(丸西座)가 건립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중 손(田中 遜) 외 일본인 29명이 발기하여 1908년 5월 「마산상업회의소」를 창립하는 등 본격적인 식민통치도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본인들의 본격적인 마산진출,,,,
20세기 벽두, 마산은 그렇게 열려가고 있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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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손 닿기 전의 신마산 옛 모습
<마산포 각국조계도>
1899년 / 네델란드인 스태든으로 추정 / 각국정부 / 막대추정 / 군산 마산포 성진 각국조계장정 / 규장각
이 지도는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국 대표들이 맺은「군산․마산포․성진 각국조계장정」에 첨부된 설계도면입니다.
개항기 마산관련 자료 가운데 비교적 널리 알려진 지도로 근대적인 측량기법으로 작성된 마산시내 최초의 지형도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등고선으로 표시된 지도라 지형의 고저(高低)와 기복(起伏)을 잘 알 수 있으며 해안의 간조선과 만조선 그리고 하천까지, 사람 손이 닿기 전의 조계지(신마산) 옛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있는 자료입니다.
등고선의 단위(고저차)가 표기되지 않아 아쉽습니다만 현재의 지형과 비교해보면 등고선의 고저차가 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도에 나타난 자연지형 및 관련자료들을 종합해보면, 마산포에서 진주로 가던 '진주가도'는 해안에서 5-6번째 등고선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각국공동조계지의 범역(Settlement Boundary)이 그려져 있으며 주도로(Main Road)의 동쪽(도면의 방위표에는 착오로 W와 E가 바뀌어 있습니다) 해변에 세관을 비롯한 개별 필지들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조계지 최초로 조성할 부지로 계획했던 것 같습니다.
주도로는 지금의 월남동 성당 정문 앞의 간선도로이며 짙게 표기된 도로가 사잇길인데 이 지도에서 계획된대로 길이 뚫렸고 모두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북쪽 신월천 중간 쯤에 급경사로 인한 폭포(Bluff)가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복개되었기 때문에 지금 저 위치에 폭포가 보이지 않습니다만 이 주위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요즈음도 비가 많이 오면 지하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고 합니다.
지도 중간에 표기된 하천이 옛 마산시장 관사 앞의 창원천(대곡천)이며, 아래 쪽 하천이 월영천인데 지금은 복개되어 경남대 정문앞 월영광장 지하에 흐르고 있습니다.
폭포 윗부분에 해관장 관사(Grounds Reserved for a Commissioner's Residence)가 표기되어있습니다. 지금의 제일여고 자리입니다.
해관장 관사는 계획만 했을 뿐 지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마산 신사(神社)가 들어섰고 일제기 내내 마산공원으로 사용된 곳입니다.
지금의 월포초등학교와 경남아파트, 마산종합복지관 터는 봉곳하게 틔어오른 작은 봉우리라 조계지와 마산 앞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 가면 솟아 올랐던 당시의 지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체 지형을 보면 조계지는 마산 앞바다와 무학산 사이의 좁은 경사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형적 조건은 지난 100년간 이 도시에 매립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평지가 별로 없었는 당시 지형을 보면,
이곳 월영리와 신월리에 살았던 마산의 옛 사람들은 다랑이논 몇 뼘 외에 합포만과 갯벌, 그리고 무학산록에 기대어 생업을 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지도에 표기된 조계지의 범역을 현재로 옮겨 보았습니다.
속칭 깡통골목에서 경남대 정문 앞 월영광장까지, 뒤로는 제일여고 뒷경계 까지가 조계지였습니다.
두 개의 해안선은 간조선과 만조선입니다.<<<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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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 - 개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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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 - 개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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