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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9 00:00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

“일본국민 대다수는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세 신문 중 하나를 본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다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에서 만난 더글러스 러미스(C. Douglas Lummis) 교수의 말입니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더글러스 러미스 교수는 '오키나와에서 동아시아를 바라보고 그 시선을 통해 세계평화의 길을 찾는 미국인 정치사상학자이자 평화운동가'입니다.

오키나와-일본-미국, 다시 돌아와 한반도-중국-동아시아에 이르기 까지 그의 지식은 넓고 깊었으며 그의 자세는 진지했고 겸손했습니다.

       <한반도를 일본영토로 표기한 1920년대 일본지도를 보여주고 있는 러미스 교수>

두 시간의 강연과 뒤풀이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았던 말 중, 내 귀를 가장 진하게 울렸던 것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는 한 마디였습니다.

그 한마디 때문에 섬에 머무는 동안 오키나와 사람들이 읽는 신문을 살펴봤습니다.
그의 말대로 일본 어디를 가나 한국의 조중동처럼 눈에 띄었던 ‘아요마’(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요마’ 대신 오키나와의 두 신문 「류큐신보(琉球新報)」와「오키나와타임즈(沖繩タイムス)」는 식당, 호텔로비, 주점, 공항에서까지 손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오키나와타임즈(沖繩タイムス)」는 미군정 시기였던 1948년 창간되었고, 「류큐신보(琉球新報)」는 19세기 말인 1893년 창간된 오키나와 최초의 신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정부발행 「한성순보」창간이 1883년이고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 창간이 1896년인데, 작은 섬 오키나와의 민간발행 「류큐신보(琉球新報)」가 1893년 창간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거기에다 120년이 다 된 지금까지 제호도 바꾸지 않고 발간되고 있어서 더 놀랐습니다.

                                     <류큐신보와 오키나와 타임즈>

내용을 살펴보았더니, 두 신문 모두 1면에는 전국적인 기사가 실려 있었고 나머지 모든 면은 우리처럼 지역기사였습니다.
순간 '웬 전국소식?'하고 의아스러웠지만 다시 생각하니 ‘아요마’를 읽지 않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당연한 편집이었습니다.

조중동 중 하나를 반드시 읽는 우리에게는 지역소식만 있더라도 아무 문제없지만 러미스 교수의 말처럼 이곳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만 보니 전국소식을 지역신문이 다루는 건 당연했을 터입니다.

지역관련기사들도 우리와 사뭇 달랐습니다.
미군철수니 오키나와 정체성회복이니 하는 소위 오키나와평화운동의 동력이 지역신문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지면 곳곳에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국제사회와 오키나와의 관계 등에 관한 기사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특히 미국과 일본본토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오키나와평화문제에 대한 기사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예민한 반응이었는지 몰라도 오키나와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오키나와가 진정 오키나와다워지기 위한 주민들의 염원이 신문활자 한자 한자에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키나와 역사문화안내단체의 회원인 히카료코 씨가 태평양전쟁 때 오키나와 주민들이 집단자결한 동굴 앞에서 전쟁의 참상을 설명하던 도중, 일본정부의 오키나와 전쟁 왜곡의도에 항의하는 오키나와 주민집회를 보도한 류큐신보 호외판을 보여주고 있다. 신문은 정부입장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입장을 강하게 전하고 있다>


<
오키나와 전쟁 60주년이던 지난 2005년에 류큐신보는 「오키나와 전쟁신문(沖繩戰新聞)」이라는 특집을 발간하였다. 사진은 2005년 4월1일자 특집7호 신문 1면.
신문의
왼쪽 상부에 오키나와 전쟁 60년 - 당시의 상황을 지금의 정보와 시점에서 구성이라는 제작의도가 밝혀져있고  그 곁에제7호-1945년 소화(昭和)20년 4월1일 일요일」이라고 적혀있다. 기사 큰 제목은 '본 섬에 미군상륙' 작은 제목은 '병력18만3천명 투입' '일본군 반격않고 각지에서 집단사'라고 적혀있으며 사진은 '미군상륙장면'을 사용하였다.
1945년 4월 1일은
미군이 오키나와에 최초로 상륙했던 날로, 참혹했던 오키나와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이
>


지난 달, 합포문화동인회가 주최한 김두관 도지사 초청 강연에서 김 지사는 “옛날 제가 대학 갈 때만 해도 부산대학과 경북대학이 상당한 명문이었습니다만 요즈음은 서울의 대부분 사립대학보다 입학이 쉽다고 들었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찌 지방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해 참석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었습니다.
어디 참석자뿐이겠습니까. 서울사람을 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생각일 겁니다.

그 동안 수도권은 마치 아귀처럼 지역을 삼켰습니다. 수도권 빨대현상을 생각하면 정말 나라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한국의 서울집중현상에는 언론이 능동적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제대로된 지역소식은 다룰 수도 없고 다루지도 않으면서 전 국민을 지배하고 있는 신문이 더욱 그렇습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신문의 중앙집중현상(보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집중현상)은 중앙과 지방의 격차를 점점 더 넓힐 뿐만 아니라 지역을 피폐화시키는 원인이기도합니다.

오죽 심했으면 부산일보 모 논설주간이 서울언론의 태도를 두고 “지역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지역민의 자존심까지 상습적으로 추행 당하게 될 것”이라 경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전국지라 부르는 서울지는 공짜 신문에다 자전거, 가전제품, 심지어 현금까지 뿌려대며 독자를 사들이는 통에 돈이 없는 지역신문들의 위축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제가 경남도민일보 사장으로 근무하던 2006년 경, 우리나라 지역신문 구독률은 평균 6%를 밑돌았습니다.
그나마 경남지역은 16%대로 타 지역에 비해 많이 높은 편이었지만 충청 호남 강원지역은 3-6%에 그쳤고 경기지역은 1%정도였습니다.

같은 시기 독일은 93%, 프랑스가 73%, 영국이 67% 정도를 지방지가 차지했으니 우리나라의 신문시장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잘 비교되실 겁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최근 경상남도에서는 ‘지역신문발전을 위한 지원 조례’도 만들고 위원회까지 구성했습니다만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 주민들의 자발적 관심이 없으면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해보는 생각입니다.
오키나와주민에게 배우는 건 어떨까요.
설령 정보량과 편집과 서비스가 조금 미흡하다하더라도, 우리자신이 우리 문제와 우리 사정을 잘 알아야 우리다워지고, 그래야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지역 언론 사랑하기, 어떻습니까?

몸은 지방에 있으면서,
아침마다 서울시내 출근길 도로사정 TV방송을 보고, 화장실에 앉아 여의도 소식만 담긴 신문을 읽고, 그 이야기를 점심 먹으며 되새김질하고, 밤에는 강남 부자이야기 연속극을 보며 살아가는데, 지방의 정체성과 자생력이 어떻게 생기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무관심한데 누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겠습니까.


“일본국민 대다수는 요미우리 마이니찌 아사히 세 신문 중 하나를 본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다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

오키나와의 작은 미술관에서 들었던 벽안의 노(老) 교수 음성이 지금도 귀에 쟁쟁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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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주완 2011/02/09 14:58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10/09/29 00:00

도시 한복판에 동굴이?


도시 한 복판에 동굴이 있다면 믿어집니까?
최근 마산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마산 창포동이었습니다.
공사를 하던 중 땅바닥이 아래로 꺼지면서 발견되었습니다.

지하 1.5m 지점에 폭 3m, 높이 2m, 길이 20m 정도되는 반원형 동굴이었습니다.
벽이나 기둥, 지붕 등 동굴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물은 아무 것도 없었고 인력으로 흙만 파내 뚫은 것이었습니다.
마사토와 황토가 섞인 토질이었는데 매우 견고해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동굴의 위치는 1899년 개항 직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신마산이라는 도시를 만들기 시작한 각국공동조계지의 해관(현, 세관)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조계지를 조성 때 최초로 개발되었던 지역으로 당시에는 바다와 인접한 부지였습니다.
사정(査定)토지대장의 기록에, 일제강점기 내내 이 터의 소유주가 국가(일본, 조선총독부)였던 걸로 보아 해방될 때까지 계속 공공시설로 사용된 터였던 것 같습니다.

아래 위치입니다.



연세 높은 이웃 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판 동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께서 어렸을 적 이 동굴 안에서 놀기도 했다니 말입니다.
지금은 땅 속에 묻혀있지만 원래는 동굴 양쪽으로 입구가 트여있었다고 합니다.
1950-60년대까지 사람들이 이 동굴을 지나 다니기도 하고 무언가를 저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 눈에는 일본인들이 방공호로 팠던 굴 같았습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한반도에도 연합군의 공습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한반도 근해, 즉 부산과 제주도 남방에 미군비행기가 날아다닌 것은 1944년 7월 8일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심심찮게 내습하다가 1945년 들어서는 빈도가 잦아져 45년 5월 경 부터는 거의 매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한반도 남부뿐만 아니라 인천 황해도 대전 광주 원산 청진 나남 나진 등에까지 내습하여 항해중인 선박과 운행 중인 열차 및 육상 해상 시설에 총격과 폭격을 가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제는 1945년 4월 4일자로 '소개(疏開)실시요강'을 공포하였고 이어서 4월 7일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로 경성 5개, 부산1개, 평양1개소를 고시했습니다. 
그러다 6월 14일에는 전국의 중소도시 20 곳에 소개공지(
疏開空地)를 고시했는데 신의주 함흥 여수 대구 원산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때 마산에도  소개공지 1개소가 고시되었습니다.

소개관련 공지는 지역에 따라 규모와 형태가 달랐습니다.
마산에 고시된 '소개공지'는 중요시설 주변 30m∼50m내에 있는 기존건축물을 철거·소개하여 공지를 확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그 때 마산에 고시된 '소개공지'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겁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 선생은 일제기의 '소개공지대'와 '소개공지'에 대해,
'도시계획의 눈으로 보면 소개공지대는 방공법에 의한 새로운 계획가로의 설정이었고 소개공지는 새로운 계획광장의 설정이었다' 견해를 밝힌바 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동굴이 '소개공지'와 직접 상관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해방직전의 급박했던 전황을 생각해보면 이 동굴은 바로 그 시기, 한반도에 미공군기의 폭격이 시작되었던 그 때 팠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무시무시한 공습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땅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최선이었고,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등 태평양 전쟁을 겪었던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쟁흔적이니까 말입니다.

시청 관련부서에서 신속히 조치를 취해 위험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만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폐쇄하지 말고 식민지시대 유적으로 보존할 수도 있다 싶었지만 주변상황이 워낙 위험해 권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사진을 한 번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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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한 복판에서 갑자기 땅이 아래로 꺼졌습니다.

지하 1.5m 지점이었습니다.

입구 폭은 2.4m 정도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3m 정도 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높이는 2m가 조금 넘어 행동하기에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꽤 넓어 보이지 않습니까?

안전하게 동굴을 막기 위해 준비공사를 시작합니다.
아래 큰 놈은 콘크리트 주입구이고, 위 작은 놈들은 공극을 없애기 위한 조치입니다.

밀도를 높이기 위해 모래와 시멘트만 섞은 모르타르를 주입하고 있습니다.

공사가 끝났습니다.
동굴 위에 2층 건물이 두 채나 있던데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 했습니다.


도시 한복판 땅 속에서 긴 세월 잠자고 있었던 이 동굴을 보며 지난 세기 이 도시 마산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조용했던 포구에 일본인들이 밀고 들어와 땅을 차지하고, 신작로를 뚫고, 이 도시를 제 멋대로 삼켰습니다.
해방이 되자 미군과 귀환동포에 도시가 북적였습니다.
전쟁이 나자 피난민들로 이 도시가 다시 들끓었습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지만 이 도시에 사연을 남기고 간 그 많았던 사람들,,,,,
그들의 음성이 귓전에 돌고, 그들이 흘린 땀냄새가 코 끝을 스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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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3 07:00

나도향, 김지하 그리고 '산장의 여인'


'마산도시탐방대' 여덟 번째 길이다.
1월 30일 오후 1시 반, 걷기 좋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였다.
우리는 가포로 가기 위해 비움고개를 넘었다.

마산도시의 끝자락인 가포(자복포, 율구미 포함)는 한 많은 땅이다.
110년 전,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을 때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먹겠다고 각축을 벌인 ‘마산포 사건’의 현장이다.
잊혀져가는 굴욕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겨울 오후 바닷가를 4시간 쯤 걸었다.



나라 뺏긴 설움만 있는 곳이 아니다.
가포에는 마지막 꺼져가는 심지처럼 생명이 사그라진 가슴 아픈 현장도 있다. 바로 국립마산결핵병원이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에 상이군인요양소라는 이름으로 세운 결핵전문병원이었지만 지금은 한국 최대의 국립특수의료기관이다.

우리는 병원 건너편 숲 속에 있는 ‘산장병동’ 터를 찾아 들어갔다.
이곳은 노래
‘산장의 여인’의 애절한 주인공이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그 여인의 가슴 아픈 사연이 겨울 낙엽 밑 어딘가에 숨어 있기라도 하듯 기대를 안고 숲으로 들어갔다.



 <국립마산결핵병원입구(위)과 건너편 '산장병동'이 있던 숲으로 들어가는 길>

울창한 숲 속에는 산장이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작은 건물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카테이지(cottage)라 불렀던 2인용 병사(病舍) 10동과 부속건물들의 흔적이었다. 일제 때 세웠지만 1950년대 후반에 모두 철거된 뒤 남은 잔해였다.
썩을 것들은 이미 썩어 없어지고 수십 년 세월에 이긴 것들만 남아 있었다. 건물의 구조와 규모는 잔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였다.
사방에 콘크리트 기초가 둘러 진 것으로 보아 입원실이었음직한 자리에 한 아름드리 나무가 자라 서있었다.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외로이 살았던 여인이 떠난 뒤 긴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었다.


                             <병사(病舍)와 부속건물의 잔해>

      <한국결핵협회 발간『한국결핵사, 1998년』에 실린 2인병동 카테이지>

지금은 OECD가입국까지 되었지만, 한 때 대한민국은 ‘결핵왕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었다. 대부분 폐결핵이었다.
결핵은 가난에 의한 비위생적인 생활관습이 주요 원인으로 선후진국을 구별 짓는 사회상징 중 하나였다.

변변한 치료약조차 없었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의 약이었다.
하여 물 좋고 공기 좋기로 전국최고였던 마산과 인근에 결핵환자를 위한 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6·25전쟁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도립마산병원, 국립마산요양소, 마산교통요양원 외에 마산상고 교사(校舍)를 징발해 급히 세운 국립신생결핵요양원, 결핵전문 제36육군병원, 공군결핵요양소, 진해해군병원결핵병동 등이 그것이며 결핵을 전문으로 보는 개인병원도 많았다. 바야흐로 마산은 결핵치료의 메카였다.

결핵은 ‘글쟁이들의 직업병’이라고 불릴 만큼 문인들 사이에 만연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마산결핵병원에도 수많은 문인들이 거쳤고 글자취도 남겼다. 마산문학관 학예사 한정호박사가 정리한 바 있다.

결핵을 앓다 죽은 대표적 문인들로는 최승구, 나도향, 이상, 이광수, 김유정, 임화, 권환, 이용악, 오장환, 현진건, 채만식, 권태웅 등이고,
한 때 결핵을 앓았던 문인들로는 백석, 구상, 박철석, 남윤철, 고은, 이형기, 김지하, 김혜순, 천양희, 박정만, 성찬경 등이다.

일제기에 요양 차 이곳 마산에 왔던 문인은 나도향, 임화, 지하련이었고 광복 후에는 권환, 이영도, 김상옥, 구상, 김지하 등이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밖에도 함석헌, 김춘수, 서정주 등 유명 문인들이 결핵을 매개로 마산을 오갔다.
「이름모를 소녀」로 70년대를 풍미하다 요절한 가수 김정호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나도향은 가난과 방랑으로 떠돌다 1925년 요양 차 마산에 와서 3개월 동안 노산 이은상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하며 염상섭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단편 소설 「피 묻은 편지 몇 쪽」을 남겼다. 그 해는 그의 대표작「물레방아」「뽕」「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한 나도향 소설의 절정기였다.
다음 해 그는 스무 넷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엄혹했던 시절,
김지하는 폐결핵으로 서울시립 서대문요양원과 인천 적십자병원을 거친후 장편 시 비어(蜚語)을 발표, 체포되었는데 폐결핵 때문에 기소되지 않고 마산결핵병원에 강제 연금 당했다.
그 시절 발표한 글이다.

벗들
병든 나를 찾지 마라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머물려거든
매화 봉우리
아조아조 향그럽게 머물고
피우려거든
더욱더 새빨갛게 꽃피워라
동백이여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따뜻한 춘삼월에 만나자 벗들
눈겨울 외로움 속에
맑은 향기로 머물었다
매운 꽃으로 들에 홀로 피어났다
춘삼월 그 흔한 바람 속에 흐드러져
수월히 만나자 벗들
어렵게 수소문하여
나를 찾지 마라
병든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김지하, 「편지」 전문-


마리아가 내게 은단을 보내왔다. 마치 사약을 내리듯이, 독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해야 할 일, 그것은 쓰는 일이다. 연필 한 자루와 한 뭉치의 종이, 그것이면 족하다. 나머지는 모두 여기, 그리고 저기에 가득하다.  
                                           
-김지하, 「가포일기」중-


사랑도 친구도 가족도 결핵 때문에 잃어야 했던 그 시절,
가수 권혜경이 부른 ‘산장의 여인’은 전 국민의 심경을 녹아내리게했다.
애절한 노랫말을 쓴 이는 마산사람 반야월이었다. 그는 진방남이란 이름으로 가수로도 활동했다.
그가 가수 진방남으로 불렀던 곡은 ‘불효자는 웁니다’이고,
작사자 반야월로 쓴 노래는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소양강처녀’ 등이다.

6·25 직후 반야월은 고향 마산에서 위문단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한번은 그가 마산결핵병원 환자위문공연에서 자신의 대표곡 ‘불효자는 웁니다’를 한 곡 뽑았는데, 객석 맨 뒤편에서 하얀 옷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공연 후 사연을 물었더니, 그녀는 병원 건너편 숲속 ‘산장병동’에서 요양 중인 폐결핵환자였다.

꺼져가는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쓸쓸히 살아가는 미모의 젊은 여인에 끌려 작사자 반야월은 가사 한편을 남긴다.
이 글을 뒷날 마산결핵병원에서 요양하기도 했고 결국 한쪽 폐를 잘라내기까지 했던 「나그네 설움」「번지 없는 주막」의 작곡가 이재호에게 넘겼다.
「산장의 여인」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


나이가 들어 울창하게 숲을 이룬 키 큰 나무들,
가포만에서 불어드는 청량한 바람,
뚜렷이 남아 있는 병사(病舍)들의 잔해,
외롭게 살아갔던 여인이 남긴 애절하고 낭만적인 스토리텔링,
그리고 '산장의 여인'·······.

이만한 볼거리가 없다 싶었다.
애처로이 밤 새워 울었던 풀벌레와 행운의 별을 보며 속삭였던 그날 밤의 추억까지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숲이었다.

마산을 찾는 사람에게,
아니 마산을 찾고 싶도록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근대낭만유산이었다.

               <공용 화장실의 변기 / 건물 구조로 보니 여성용이었다>

                                    <현관 턱으로 보이는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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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03 09:03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허정도 2010/02/03 23:13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적절히 참여하겠습니다.

  2. 삼식 2010/02/03 18:07 address edit & del reply

    나도향이 1920년대에 이병사에 있었다면,
    과연 결핵 병원의 최초 건립역사는 언제쯤인지요?

    • 허정도 2010/02/03 23:15 address edit & del

      감사.
      나도향은 약 3개월 동안 노산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했습니다.
      지난 번에 나눈 자료에 있더군요.

  3. 김영철 2010/02/04 17:14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이 고향인 저로서도 처음 접하는 이야기들이네예.
    가포 결핵병원에 그렇게 슬픈 사연이 많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했습니다.
    마산의 숨은 이야기 계속 부탁 드리겠습니다.

    • 허정도 2010/02/04 17:23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혹시 숨은 이야기 중 알고 계신 것 있으면 연락 좀 주십시오.

  4. 유림 2010/02/05 13:09 address edit & del reply

    매번 참석을 하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기쁨이 참 큽니다.
    가포 탐방도 참 좋았습니다
    비록 신발이 엉망이 되고 온 바지에 도둑놈(?)이 붙어서 귀찮았지만..

    스잔했던 그 숲이 떠오릅니다

    • 허정도 2010/02/05 14:06 address edit & del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도시탐방대 참 좋은 시됴죠?

  5. 조원문 2010/02/05 18:21 address edit & del reply

    가끔 지나는 길인데,,이렇게 알고 보니 정말 새로운 기운이 남닙다,
    회장님 정말로 마산을 많이 배우고 싶읍니다,,

    함께 많은 시간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열심히 노력 하겠읍니다,,,수고 많이 하셨읍니다.

    • 허정도 2010/02/06 10:45 address edit & del

      방문감사.
      내가 늘 신세를 많이집니다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6) - 강점제2시기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다 - 중앙마산의 형성> 오늘부터는 ‘중앙마산의 형성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앙마산’이란, 20세기 초에 존재했던 마산의 두 도시, 즉 옛 부터 자연발생적 취락으로 발전해온 '원..

Co2배출 줄이는 그린빌딩(Green Building)설계(12)조명: 광선반(Light Shelf)

광선반은 간단히 말해 앞서 설명되었던 측창채광으로 들어오는 빛을 실내 깊숙이 들이는 장치입니다. 햇빛이 선반의 반사면에 부딪혀 다시 천정으로 반사되어 유입되는 것으로 측창채광에 비해 실내에 빛이 고른 분포를 가지게 됩니다. 개..

선거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마우스랜드'라는 생쥐들이 모여사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들도 우리가 사는 사회처럼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뽑은 지도자는 생쥐가 아니라 매번 고양이였습니다. 고양이가 생쥐를 위해 일할리가 없..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5)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교장들의 학교건물에 대한 생각> 직전 포스팅에서 설명드린 『朝鮮と建築(조선과 건축)』의 1928년 편을 보면 「學校建築號」라는 주제의 특집기사가 있습니다. 당시의 학교건축물 현황의 일편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쌍용양회 '싸이로'는 근대산업유산이다!

● 어는날 갑자기! 사는 곳이 해안도로 근처라 아침마다매 창문을 열면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시설물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시멘트를 담아두는 창고와도 같은 곳으로 '싸이로(Silo)'라는 놈이다. 그런데 몇일 전부터 이 싸..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건축물과 각종공사> 마산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근대식 건축물을 많이 세웠습니다. 한일병합 이전까지는 주로 목조로 지은 공공기관이 주류였습니다만 1910년경부터는 벽돌조도 많이 지었습니다...

Co2배출 줄이는 그린빌딩(Green Building)설계(11)조명: 측창채광

측창채광은 천창채광과는 달리, 말그대로 벽면에 위치한 개구부(창문 등)를 통해 자연채광을 실내로 들여오는 방법입니다. 창문외에도 유리블럭, 낮은 고창, 채광뜰(Sunken)이나 안뜰로난 수직 개구부 등을 통해 측창채광으로 얻는..

진해
진해 2012/01/25

‘진해’ 지명에 대한 글입니다.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한제국시대에는 ‘통합 이전 창원시(옛 의창군)와 옛 마산시 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일원’을 ‘진해군’이라..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마산사람들의 배일감정> 일본인에 의해 사회 모든 분야가 달라지면서 한국인의 생활 방식도 많이 변했습니다. 1918년경만 하더라도 마산포 장날에 머리카락을 짧게 단발한 한국인이 보이면 신기하게 쳐다보았지만 1년이 지난 1919..

Co2배출 줄이는 그린빌딩(Green Building)설계(10)조명: 천창채광

자연채광 부분에서 잠시 거론되었지만, 파사드(전면) 개구부(측면 창문)를 통해 유입되는 자연채광이 닿지 않는 공간에 보조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으로 천창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측면에 창을 두는 것이 아니라 머리위 천정에 창을..

신년되면 많이 받게되는 달력, 디자인 확 바꾸면

1년동안 벽에 걸어두고, 또는 책상위에 놓게 되는 달력들은 1월에는 넘쳐납니다. 여기 저기서 받아둔 달력중에서 어떤 달력을 놓을까 잠시 고민하게 됩니다. 절에서 나온 달력이며, 근사한 미술작품을 곁들인 은행달력, 자사의 실적홍..

동영상 - 마산
동영상 - 마산 2012/01/16

지난 연말, 재경마산향우회 송년회용으로 마산도시사에 대한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서툰 작품이지만 나쁜 평은 하지 않아 공개합니다. 곧 설입니다. 마산사람들, 가족들과 함께 보면서 마산에 얽힌 추억이라도 나누어보시죠. 분량은 1..

Co2배출 줄이는 그린빌딩(Green Building)설계(9)조명: 자연채광 조닝

자연채광은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건물내 다양한 공간들에 햇볕이 잘 들도록 하는 통합적 설계방법입니다. 자연채광을 위한 설계에 있어서는 방(실)별로 유사한 목적과 유사한 빛 환경을 필요로 하는 방들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

보도 조차 맘 편하게 걸을 수 없다니

최근 창원호텔 맞은편에 현장이 생겼습니다. 두 달 남짓 사무실이 있는 정우상가쯤에서 중앙동 민원센터까지 하루에 두세번씩 걸어갔다 옵니다. 분명 보도가 설치되어 있는 길임에도 주차된 차량으로 인해 차도로 내려갔다 올라오길 몇차..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마산상공회> 1914년에 조선인 상업회의소가 와해되고 1908년에 설립된 일본인 상업회의소도 그 뒤 흐지부지된 후 1920년대까지 지역의 상공인들 단체는 없었습니다. 이 공백기에 「마산간담회」「마산경제회」「마산번영회」라는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