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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오늘부터는 1920년대 10년간을 올리겠습니다.
'일제강점 제2시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산업수탈이 시작되다>

1920년대는 한국이 일제의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 특히 식량공급지로 산업구조가 재편되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으로 수출되기 시작했던 시기로 「산업수탈기」라 부릅니다.

정치적으로는 3․1운동을 전환점으로 무단정치가 철폐, 소위 「문화정치」가 표방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산미증식계획이 강행되었습니다.

「문화정치」라는 말은 1919년 8월 12일 제3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재등(齋藤)이 서울에 부임해 온 다음 날, 즉 9월 3일 아침에 내린 훈시 중에서 8월 19일에 있었던 관제개혁과 헌병경찰 폐지, 복제(服制) 폐지 등을 언급하면서

「이는 요컨대 문화적 제도의 혁신에 의하여 조선인을 유도 제시하고, 그로써 그 행복 이익의 증진을 도모하여 장래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에 응하여 정치․사회상의 대우에 있어서도 내지인과 동일한 취급을 할 究極의 목적을 달하게 할 것을 서기(庶幾)하는 바이다 ․․․․․․․」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이때 신문과 잡지의 발간이 허가되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었고 교육기관도 설립합니다. 마산상고(현, 용마고)도 이 때 개교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1920년 7월에는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도 발족해 전국적으로 퍼졌는데 마산은 1923년 2월에 조선물산장려회가 설립 활동하였습니다.

일본공업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교전국의 전쟁수요와 교전국이 이미 장악하고 있던 세계시장에 진출하여 막대한 이윤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국내시장에서도 구미(歐美)상품의 수입이 줄어 국산화가 많이 되었으며 전시 중 내외시장이 급격히 확대되어 낙후되었던 중화학공업부문도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시경기를 타고 급속하게 발전한 일본경제는 대전 종료 후 전시 수요가 격감하면서 불황에 빠지고 맙니다. 대외무역도 줄어들었습니다. 대전(大戰) 중에 과잉투자를 한 일본공업이 불황에 접어들자 자본의 해외진출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가 자본진출기지로 우선 착안한 곳이 한국이었습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자신들의 과잉자본을 한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그 동안 한국 경제를 짓눌렀던 조선회사령을
철폐하였습니다.

일제가 회사령을 철폐한 주된 요인은 이와 같은 일본국내 과잉자본의 해외진출이었지만 이밖에도 한국 내 식민지 공업화의 내적 조건의 성숙도 들 수 있습니다.

즉 1910년대의 「식민지 기반 구축기」에 철도․도로․항만 등 사회기반시설의 확충과 금융기관의 정비 및 1915년 12월 조선광업령 시행 이후 주요 광물자원의 생산이 증대되고 또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 등 한국 내부의 공업화 여건도 상당히 작용했던 것입니다.

조선회사령 철폐는 한국공업정책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철폐 시기는 1920년 4월이었으며, 같은 해 9월에 일본 내의 재벌들을 불러들여 산업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자본유치를 꾀하고 유치공장에 대한 지원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조선회사령 철폐는 도시의 인구집중을 불러, 1910년대 전국인구증가율 2.6%보다 낮았던 도시인구증가율(1.6%)이 1920년-1930년 10년 간 연평균 7.1%로 상승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마산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 기업 설립 붐을 이룹니다. 대부분은 일본인들에 의한 것이었지만 원동무역처럼 한국사람들에 의한 창업도 있었습니다.
20년대 부터 대규모로 시작되는 마산만의 매립공사도 이때의 기업 설립과 관계가 깊습니다.

다음 사진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27년 일본의 노구치 재벌이 건설한 흥남조선질소비료공장입니다.



그러나 회사령을 철폐한 강점 제2기에도 산업정책의 중심과제는 여전히 식량 및 원료 증산을 위한 산미증식계획의 추진이었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일본은 항구적인 미곡수입국으로 변하여 한국으로부터 매년 150만석의 미곡을 수입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농업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더욱 침체되어 곡가(穀價)가 급등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유명한 「富山(도야마) 쌀 폭동」이 일어납니다.

「富山(도야마) 쌀 폭동」은 1918년 7월 23일 도야마(富山)현 시모니카와군 우오즈(魚津, 현재 우오즈시)읍의 우오즈항에서 일어 났습니다.
당시 우오즈항에는 북해도로 가는 쌀 수송선 이취환(伊吹丸)이 기항했는데 쌀값 폭등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주부 수십 명이 쌀을 선적(船積)하고 있던 오오마치해안의 십이은행(十二銀行) 쌀 창고 앞에 모여 쌀 반출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이 도야마 쌀 폭동의 시작입니다.
당시 모였든 주부들의 남편들은 멀리 출어하였던 어부들이었습니다. 폭동은 8월에 접어들어 현내의 각 읍으로 퍼졌고 결국 경찰과 주부 데모대가 충돌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태를 도야마현의 지방지들이 보도하기 시작했고 8월5일에는 아사히, 마이니치 신문까지 보도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폭동은 8월9일, 대도시인 교토와 나고야로 번졌는데 교토의 경우 4일간에 걸쳐 대소동으로 발전, 급기야 군대까지 출동하여 겨우 가라 앉았습니다.
7월 23일부터 시작된 도야마현 쌀 폭동은 9월 12일 삼지(三池)탄광의 폭동을 끝으로 진정되었습니다.
폭동 와중에서 십 수 명이 사살되었으며 군경의 피해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데라우치 내각이 총사퇴하였고 1920년 말「일본사회주의동맹」 결성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일본국내에서는 그들 스스로 쌀 증산에 큰 기대를 걸 수 없었습니다.
이에 비해 당시 한국은 관개시설이 낙후되어 논 대부분이 천수답(天水沓)이기는 하였지만, 일본 농업에 비해 한국 농업의 발전비용이 훨씬 저렴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산미증식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제의 의도는 일본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쌀농사를 강요함으로써 한국 농업을 쌀 중심의 단종경작형(單種耕作型)구조를 한층 더 심화 시켰습니다.
그런가하면 생산율을 웃도는 기아수출을 강요하여 한국인의 1인당 쌀 소비량을 감소시켰고, 결국 대다수 한국인의 일상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인천항에 쌓아 놓은 쌀가마니입니다.

강점기 동안 마산항의 쌀 수출량이 그렇게 많았던 이유도 이런 식민지 농업수탈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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