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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595

김형윤의 <마산야화> - 90. 국농소의 소작권 쟁의 90. 국농소(國農沼)의 소작권 쟁의 밀양군 하남면 수산리 소재 국농소(國農沼) 전답 수백 두락을 둘러싸고 한일 반동분자와 소작인 간에 불씨가 튀는 쟁의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 국농소(國農沼, 옮긴 이 / 송산서원 카페에서 인용) 수산(守山)의 국농소(國農所)는 조선시대 초기의 수산국둔전(守山國屯田)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조 후기에는 수산지(守山池) 또는 국농호(國農湖)라 불렀으며 그 제언(堤堰=물을 가두어놓기 위한 둑)을 수산제 혹은 대제(大堤)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지형이 모두 바뀌고 비옥한 수전 경작지로 화하여 당초의 경역(境域)을 분간하기 곤란하나 하남읍 수산리와 초동면 김포리(金浦里) 사이의 광활한 들판을 아직도 국농호 또는 ‘궁노수’라 부르고 있으며 댓섬(竹島), 자라목(鼈山) 등의 유적도 남.. 2016. 5. 2.
김형윤의 <마산야화> - 88. 법원과 검찰, 89. 제1차 공산당 사건 88. 법원과 검찰 현재 장군동 4가(통정 4정목)에 자리잡 고 있는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지청)과 부산 지방검찰청 마산지청(검사분국)은 당초에는 구마산 시장입구 근처였던 속칭 ‘아래학교’(여자보통학교-현 白洸燒酎工場) 언덕에 소재하고 있었던 것인데 1910년(명치43년)에 현위치에 신축 이전했다. 초대 상석판사(上席判事)는 대우가차(大友歌次), 상석검사(上席檢事)는 복산장병위(福山長兵衛)였으며 조선인 초대 판사는 고某 씨로 이분이 두 자제는 신마산 소재 일인의 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다. 89. 제1차 공산당 사건 소위 101명 조선공산당 사건이 신의주에서 변호사를 하던 심유정이란 친일파를 습격한 것이 발단이 되어 경찰은 이들 청년들의 가택을 수사한 결과 사건은 발로(發露)되고 말았다. 무산자신문(無産者新.. 2016. 4. 25.
김형윤의 <마산야화> - 86. 고춧가루 강도, 87. 제2의 헤스마 86. 고춧가루 강도 확실히 1924년 봄이다. 그때만 해도 구마산(元町, 현 남성동) 우편소에서 직접 집배는 물론 적행낭수송(赤行囊輸送)하던 때다. 오전 7시면 먼동이 트이고 모든 물체를 확연히 볼 수 있는 때다. 7시 몇 분에 구마산의 발차시간에 우편직원(全모라 했다)이 행낭과 우편물을 둘러메고 가는데 당시 상업학교 정문 근처에서 별안간 괴이한 청년이 나타나 아무 말 없이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뿌리는 찰나 직원은 쓰러졌다. 세상이 어둡기만 했으면 다행인데 눈이 따가운데다 눈물과 콧물 그리고 재채기까지 병발(倂發)하여 상당한 시간 동안 땅바닥에 쓰러져서 고통을 겪는 중 역으로 가는 승객들에게 구조되었는데 소중한 적행낭(赤行囊)만 없어지고 말았다. 행낭에는 대소액환 송금증이 들어 있었다는 신고를.. 2016. 4.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84. 105인 사건의 후환, 85. 역장의 폭행 84. 105인 사건의 후환 마산원동회사가 발족하기 훨씬 오래전, 초대 조선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가 북한을 초도 순시할 때의 일이다. 조선인 지사(志士)를 탄압하기 위해 조만식 등 1백 수십 명을 타진하고 사내(寺內)암살 음모라는 모략을 조작했다. 이것을 트집하여 지방에 산재한 열혈지사(熱血志士)까지 마수가 뻗쳐졌던 것이다. 원동회사 사옥 자리에서 학부(대한제국 문교부) 편찬교과서를 판매하던 김지관(서울 출신)에게 뜻하지 않던 한 장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발행국 소인은 불명한 것이나 내용을 약기(略記)하면 ‘3년 전에 우리의 원수이며 한국민의 대적인 이등박문을 안중근 의사가 죽였으니 이번엔 사내(寺內)라는 흉적을 처치해야 안되겠냐? 이 글월을 받는 즉시 때를 잃지 말고 거사준비를 하라!’ 이 글을 본 .. 2016. 4. 11.
김형윤의 <마산야화> - 83. 엽총 정사 83. 엽총 정사(情死) 1923년(대정12) 초봄 무학산 봉우리에 아지랑이가 서리고 시냇가 버들가지엔 강아지가 겨우 필락 말락하는 약력 3월 중순경, 시내 장군교 교반(橋畔)으로 나이 60이 넘은 일본 노인 한 사람이 다비(일본 버선) 발로 헐레벌떡 달리다 역시 일본인 순사에게 검문을 당하고 있는데, 다리에서 서녘 윗길 30미터 되는 노상에서 총소리가 터져나왔다. 도망치던 노인은 일본 사족(士族)이요, 법정에서 입회 검사와 싸움 잘하는 변호사 장자빈(莊子斌) 노인이었다. 장자(莊子) 변호사집 건너편에 서기로 있는 관원(管原)이 살고 있었다. 이 자는 대구 검사국에서 사기 사건인가 공갈죄로 형을 받아 이 자와 동서(同棲)생활을 하던 조선인 여자가 이 자의 대리 복역을 하고 있었다. 진범은 그 자인 것을 .. 2016. 4. 4.
김형윤의 <마산야화> - 82. 총각회 사건 82. 총각회 사건 시내 중성동에 자리 잡은 목조는 1921년 경에 진동읍내 김상범이란 청년지주가 장만한 주택건물이다. 5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수리 한 번 한 일이 없이 그대로의 모습이다. 오직 변한 것이 있다면 집 주인 뿐이다. 주택으로 병원으로 여관으로 변하였다가 현재에 이르렀다. 외면으로는 평탄하게 지낸 듯 하지마는 처음 주인 김 씨 때 벌써 큰 문제가 생겼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전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소위 총각회 사건이다. 내용인 즉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중산계급이면 으레 소실을 두는 것이 공공연한 통례이니 여기에 김 씨가 빠질 수 없다. 시내 모 사립여학교를 중퇴한 묘령에다 미모인 조(曺)섭이란 처녀가 있었다. 여학교를 중퇴하였다 하면 그 가정 형편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나 18,9세의 묘령.. 2016. 3. 28.
김형윤의 <마산야화> - 80, 어속령의 참화, 81. 두 청년의 순정 80. 어속령(魚束嶺)의 참화 마산 시내에 자동차를 운영한 곳은 대정 2년(1913) 마산역전 상반여관(常盤旅館)인 것 같다. 마산에 소위 신작로가 생기고, 함안, 진주로 통하는 길은 1908년(지금 신마산 쪽에서 시청 앞 도로는 1914년 경인 듯)이다. 이의 증거로 마산 창신학교 앞 회원교에 융희 2년 건립이란 표석이 있었으니 이를 미루어 보아 1908년인바 해방 후에 반가지(半可知)의 애국자들의 손으로 삭제되고 단기연호로 박혀버린 것이다. 각설 상반여관이 소유한 차량은 그때는 ‘포드’ 포장차(布裝車) 7인승이며 이것으로 매일 혹은 격일제로 진주까지 내왕하던 한산한 시절이었다. 1917년 가을경이다. 지방신문인 남선일보사 주최로 미기(美妓) 투표의 승자인 배학희 양은 애인의 본댁으로 가는 도중 군북을.. 2016. 3. 21.
김형윤의 <마산야화> - 78. 일경부의 피습, 79. 일기루의 화재 78. 일경부(日警部)의 피습 1905년(광무 9) 2월 모임 마산포 주재(일본 영사관 소속) 경부 경익태랑(境益太郞, 병합 후 마산초대서장)은 낙동강 하류 연안에 수렵갔던 귀로(歸路), 일몰로 해서 창원군 내서면 근주(近珠, 일명 살구징이) 한인객사에 투숙했다가 밤중에 괴한 십수명이 기습하여 그가 소지한 엽총, 탄환, 행이(行李) 등을 탈취한 후 흉기로 난자하여 경(境)은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일본 영사 삼포(三浦)는 일헌(日憲)과 일경(日警), 한경(韓警)에 급히 연락하여 즉각 인군(隣郡)에 비상망을 펴고 범인 체포에 활동하였으나 수색 8개월이 되도록 단서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간단한 실마리로 함안읍에서 수괴 정원길을, 일미(一味) 등 8명은 창녕읍에서 타진, 마산경무청(현재 부림동 시장에 있었.. 2016. 3. 14.
김형윤의 <마산야화> - 77. 광산 약탈에 대한 항거 77. 광산 약탈에 대한 항거 / 한자가 많아 해독이 쉽지 않습니다(옮긴이) 개항 이래 일본인들은 마산포 일대의 토지 소유권의 약탈과 아울러 광산권까지도 침탈해 가게 되었다. 마산에 이웃한 창원군 북면에 있는 구룡산 아래 고암동(古巖洞) 동광(銅礦)은 20년의 역사를 가진 유명한 것이었다. 이를 탐낸 일본인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이라는 자가 전 광무감리(礦務監理) 김위섭과 결탁하여 정부에도 알리지 않고 자기들 맘대로 1901년 6월부터 기계와 재력을 투입하여 약 5년 한(限)으로 채굴을 시작하였다. 이를 탐지한 내장원(內藏院)은 1902년 2월 철광(撤礦)을 명령하였다.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은 투자를 구실로 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감리보고를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접광.. 2016. 3. 7.
김형윤의 <마산야화> - 76. 부자는 오월동주 76. 부자(父子)는 오월동주(吳越同舟) 고사에 오월동주(吳越同舟)란 말이 있다. 오왕 부차(夫差)와 월왕 구천(句踐)은 수구(讎仇)의 사이인데,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이 좌석을 같이 했을 때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예를 들 수 있는 분이 있으니 위암 장지연 선생과 그의 장남 장재식과의 부자지간이다. 위암은 구한말 을사오조약 체결 당시 황성신문 사설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필화사건으로 유명한 분이며, 선생의 장남인 재식은 마산부제(馬山府制) 실시와 동시에 조선총독부 판임관에 취임한 사람이다. 선생의 혈육관계를 살펴보면 이남 재철은 웅지를 품고 상해도 갔다가 일찍 타계한 애국청년이며, 삼남 재륜은 유근 선생(1861~1921 / 한국의 언론인 / 장지연,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 2016. 2. 29.
김형윤의 <마산야화> - 74. 변호사 명록과 대서인, 75, 오촌 변호사 74. 변호사 명록(名錄)과 대서인(代書人) 마산에 법원이 설치됨과 동시에 정착 변호사와 출장 변호사(마산에 연락사무소와 서기만 둔 사람)는 다음과 같다. ○표는 출장 변호사. 정상의리(井上義理), ○굴지(掘池), 이용재, ○김기정(통영), ○박해극, 오촌(奧村), 천기(川崎), 서기홍, 박지영, 중촌(中村), 소출(小出), 장자빈(莊子斌) * 마산 최초의 변호사는 정상의리(井上義理) 법원이 현 장군동(通町 4丁目)으로 이전한 다음 모든 대서인들은 이곳으로 집중한 바 그 당시의 대서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천수 김기수(형제), 길천쾌조(吉川快造), 장도의마(長島義磨), 고교덕조(高橋德助), 미농부 모(美濃部 某), 강인중, 강선중, 선철환, 여병섭, 상야영조(上野榮助), 좌등선구랑(佐藤善九郞), 제.. 2016. 2. 22.
김형윤의 <마산야화> - 73. 어떤 일인 변호사 73. 어떤 일인(日人) 변호사 장자(莊子) 빈(斌) 노인은 한문학자로서 다분히 야인적 정치 색채를 띤 일종의 장한(壯漢) 타입이다. 일찍 조선 토지조사국에 봉직한 일이 있으나 언제 어떻게 되어서 법조계에 뛰어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가 오래 우거(寓居)한 곳은 장군동 3가이며 만년의 가족으로 자부(子婦)와 시부(媤父) 단 두 사람이다. 말하자면 형영(形影) 상조(相弔)라는 표현이다. 그는 사족(士族)으로 선대의 무사(武士)집 자제라고 하며 일설에는 일본의 정당인 정우계(政友系)라고도 한다. 당시 망(望) 70년령인데 소장(少壯) 2, 3명 쯤이야 때려 눕힐만한 건강체이고 술도 두주불사하리만큼 호주(好酒)이며 대식(大食)이다. 자기가 맡은 사건이 여의치 못한 판결이 있을 때에는 으레 집에 돌아오던 길.. 2016. 2. 15.
김형윤의 <마산야화> - 72. 법창야화 72. 법창야화 율산(栗山)검사의 저울질 마산 검사국 검사로서 인격자도 있었지마는 풍각장이 형(型)의 검사도 몇 사람 있었다. 그 중 대표적 인물로 율산(栗山) 검사를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동경제국대학 즉 적문(赤門) 출신의 법학사로 전임처가 어딘지는 기억이 안 되지만 성품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광적이었다. 그가 재임 시에 연출한 기상천외의 연극 몇 토막을 소개해 본다. 매월 21일은 관공리(官公吏)의 봉급날이라 평소의 인색하기 한이 없는 율산은 검사의 본때를 보일 양으로, 당시 소도 효(小島 孝)라는 경찰서장을 요정 망월루로 불러놓고 제법 호기 있게 ‘산재(散財)’를 하다 취흥이 무르익자 면도칼 같은 10원권에 코를 풀어 내던지면 서장은 코 묻은 돈을 닦아 율산에게 무릎을 꿇은 채 바쳐 올린다. 이에.. 2016. 2. 8.
김형윤의 <마산야화> - 71. 변심 여자의 참수사건 71. 변심(變心) 여자의 참수(斬首) 사건 서(序) 통칭 ‘살로매’란 이름이 세계에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첫째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지는 광경을 멀리서 바라본 여인 ‘막달라 마리아’와 둘째 작은 ‘야곱’,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리고 ‘살로매(마가 15장 40절)’로 되어 있다. 독일의 음악가 ‘리히알트 스트라우스’의 악극 살로매의 내용을 약술하면 헬롬 대왕의 생신 축하에 춤을 춘 살로매에게 감격한 헬롬 대왕은 살로매가 원하는 것은 무언이든지 들어 주겠다고 하니 살로매는 자기의 불타는 사랑을 거절한 요카난(세례 ‘요한’을 말함)의 목을 베어 달라고 했다. 헬롬 대왕은 즉시 요카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살로매는 피투성이의 요카난의 목에 키스함으로써 실연의 복수는 하였지만 이 꼴을.. 2016. 2. 1.
김형윤의 <마산야화> - 70. 영미연초의 출현 70. 영미연초(英美煙草)의 출현 1907, 8년 경에 일본서 창설된 영미연초(英美煙草)와 동아연초주식회사는 한국으로 진출. 마산에서 맨 처음으로 선전 판매한 담배는 오본입(五本入) 병정표와 십본입(十本入) 새표, 파이레트(통칭 칼표)와 자전거표. 그 다음으로는 담배가 나올 때마다 이상한 차림을 한 선전 부원들은 나팔과 북을 치며 가두 행진을 하면서 담배를 공짜로 마구 던지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기다란 연죽(煙竹)에 엽초(葉草)를 즐기는 때라 생활의 여유있는 사람들은 옥(玉)이나 호박 빨뿌리에다가 금박 장식을 한 은삼조동(銀三鳥銅) 담배통을 즐겼으며, 담배는 한때 이름났던 원산초(元山草)가 아니면 충청도산 엽초에다 소주와 꿀물을 뿜어가지고 이것이 습도나 건조의 중간쯤 해서 곱게 접어 그 위에 무게 있는.. 2016. 1. 25.
김형윤의 <마산야화> - 69. 도로의 변천 69. 도로의 변천 신마산 일대의 해군기지를 둘러싸고 일·로의 각축이 첨예화되어 가던 무렵 일본은 그들 거류민의 집단 거주지 지역에 대한 시가지 도로의 확충에 주력했다. 진해의 근대식 시가지 구획정리와 더불어 신마산 일인가(日人街) 도로 역시 미비하다고는 하나 그 당시로 봐서는 제법 제격을 갖춘 형태였다. 그러나 구마산 일대의 도로는 1913년까지 노폭이 겨우 3미터 정도(신마산에서 구마산으로 연결되는 길, 진주 방면으로 가는 길)를 가지고 소위 ‘신작로’로 불리었다. 그런데 1913년에 현재의 부림시장에서 해안으로 내려가는 도로와 제일은행 앞에서 남성동 쪽으로 동행(東行)하는 길이 확장됐으며, 1923년 10월경에는 중성동에서 시민극장 앞으로 내려가는 길과 현 조흥은행 앞길이 현재의 폭으로 확장되었다(.. 2016. 1.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68. 회상되는 각계 건물 68. 회상되는 각계 건물 도시계획에 따라 허물어지고 없어진 시내에 점재(點在)하던 이름난 건축물을 살펴본다. ● 동척(東拓)지점(와가 / 瓦家 - 목조단층) - 오동동 삼각상점에서 동으로 신작로가 남으로써 건물과 정원의 2/3 이상이 철훼(撤毁)되는 동시에 지점도 폐쇄되고 그 자리가 중화요정 봉래관(蓬萊館)이 되었다. ● 명태창고 - 이 건물은 1920년 여름 남한을 휩쓸던 호열자(虎列刺) 때 환자 수용소로 일시 이용한 때도 있었으나 역시 도로 확장에 따라 반 이상이 철훼(撤毁)되고 지금은 잔영만이 있을 뿐이다. ● 박간(迫間) 창고 - 이곳은 창고와 광장이 있어서 그때는 환등(幻燈)과 활동사진을 공개하였고, 창고는 농구상(農具商), 보덕상회(報德商會)와 서야도기(西野陶器) 창고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 2016. 1. 11.
김형윤의 <마산야화> - 66. 마금산 온천 67. 행려병자 수용소 66. 마금산 온천 창원군 북면은 멀리 문창군(文昌郡) 관할, 그 다음으로 회산군(檜山郡)으로 개칭하였다가 이조 말엽에 창원부에 속한 곳이다. 여기에 마산 근교의 유명한 온천이 있었는데 이조 초에는 약수온천이라 하여 환자의 왕래가 부절(不絶)함에 따라 여인(旅人)을 수용할 숙소가 없던 그 시절이라 부득이 무료 민박의 폐단이 심한 관계로 지방민들과 상의 끝에 온수구(溫水口)를 매몰하여 버렸다. 이것을 안 엿장수 한 사람이 극히 소규모의 수원(水源)을 발굴하고 엿을 사는 환자에 한하여 목욕과 음복수(飮服水)를 제공해 왔다. 여기에 착안한 마산부 선정(扇町, 현 반월동)에서 치과의 겸 총포화약상을 하던 일본인 여창(與倉) 모가 엿장수에게 대단히 헐값으로 권리를 인수하여 정식으로 수원을 착굴하여, 얼마 안가서 .. 2016. 1. 4.
김형윤의 <마산야화> - 64. 오보와 똥소동 65. 목장 64. 오보(午報)와 똥소동 지금 마산은 장군천변에 있는 소방서와 남성동 경찰파출소의 두 곳에 오보(싸이렌-오전 4시 통금 해제, 정오 12시, 오후 11시반과 12시에 취오吹嗚) 장치가 되어 있지만 12,3년 전에는 완월 심고(新敎-천주교) 성당의 신부 시계에 의해서 오종(午鐘)을 치는데 그 때만 해도 지금 성지교(聖旨校) 이하는 일인주택 1동과 조금 내려와서 오반전(五反田) 양조장(푸른집 / 도립의료원으로 증축하고 있는 전 크리스탈 호텔-옮긴이) 그리고 산전(山田)장유공장(현 몽고장유) 외에는 허허벌판이며, 구마산 입구 주차장 가는 첫 골목에는 장승 한 쌍과 세칭 아래학교(현 성호초교 전신) 뿐이었던 때다. 성당 종소리가 현 구마산 천주교회 근처까지 은은히 들려오므로 동민들은 정오 12시를 알게 된다.. 2015. 12. 28.
김형윤의 <마산야화> - 62. 금융계의 공황 63. 각 관공서의 한동 62. 금융계의 공황(恐慌) 1927년(소화2년) 전국 금융가를 휩쓸던 모라토리엄(moratorium : 지불유예 또는 지불정지)은 금융가 뿐 아니라 국민생활에 일대 공황을 가지고 왔다. 때는 동녕 4월 22일자로부터 대만은행을 제외한 전 일본 영토를 포함한 은행과 금융기관(조선의 금융조합도 동일)에 예치한 금액을 향후 3주일간, 즉 5월 12일가지 5백운 이상은 지불 유예하기로 긴급 칙령 96조로서 공포했던 것이다. 당시 마산 식은(殖銀)지점과 조선은행 출장소 문전에 게시한 공포문은 다음과 같다. 사법(私法)상 금전 채무의 지불 및 수형(手形) 등 권리보존 행위의 기한 연장을 하는 건이 바로 ‘모라토리엄’이라 해 놓고는 1. 국·부·현(國·府·縣) 그 외의 공공단체의 채무지불. 2. 급료 및 임금의 지.. 2015. 12. 21.
김형윤의 <마산야화> - 61. 은행 61. 은행 이곳에 제1착으로 은행이 설치된 것은 일본 굴지의 재벌인 삽택영일계(澁澤榮一系)의 제일은행 출장소. 현재 신마산 진일기계 제작소 건너편에 있는 천주교당(현 월남동 성당-옮긴이) 자리이다. 물론 한일합병 전이며 그곳이 조선은행 출장소가 되었다. 그 뒤에 조선식산은행 출장소로서 8·15 후에 구마산 지점으로 합병되었는데 조선은행 출장소 시절에는 조선인 행원이라고는 칠원인 김성현 단 한 사람뿐이었다. 1911년경에 식산은행(현 제일은행) 후정(後庭) 서북 모서리에 목조 평옥(平屋)의 농공은행 마산지점이 설치되었으며 노폭은 현재대로였으나 신작로로 확장되면서부터 현재 건물로 신축했었다. 그래서 은행이라고는 일본인들의 독점 경영하는 것뿐으로 조선인 상인들은 부득이 이 은행 외에 거래할 곳이 없었다. 1.. 2015. 12. 14.
김형윤의 <마산야화> - 60. 해방 전의 전기 60. 해방 전의 전화 해방 전(소화 13년, 1938년) 부산 체신국 관할 중 경남 도내의 전화 가설 상황을 보면 부산을 필두로 하여 부·군·읍 소재지 25개처인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화 소유자가 없는 곳이 두 곳이었다. 장승포와 진해읍이 그것이다. 진해는 일본 해군의 군항이며 일본인의 집단지이기도 하지만 조선인 거주촌인 경화동을 포함하여 전화대수 199대 중 경화동 주조주식회사가 전화번호에 나와 있는데 그것이 탁주양조장(조선인 경영?)이라 해도 전화는 개인 소유는 아니엇을 것이며, 읍내에 화월(華月)이란 중국요리점을 빼면 진해읍의 전화는 일본인 일색이었다. 그 당시의 전화에 관한 각종 요금을 오늘날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격세의 감이 불무(不無)하다. 1. 국내 통화료 통화선 해방 .. 2015. 12. 7.
김형윤의 <마산야화> - 59. 마산의 전기약사 59. 마산의 전기약사(電氣略史) ※ 『마산야화』 원문의 ‘한일와사전기주식회사’는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를 오기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원문을 고쳐 ‘일한와사’로 적습니다. 1898년(광무 2) 1월 18일 한성전기주식회사가 미국인 골부란에 의하여 수도 한성에 창설되고 1904년 7월 18일 이를 한미전기주식회사로 개칭, 1908년 7월 30일 일본인 삽택영일(澁澤榮一)에 의하여 일한와전주식회사가 창설되더니 다음해 1909년 6월 24일에 한미전기를 일한와전이 매수하고 이어 명칭을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日韓瓦斯電氣株式會社)로 변경하였다. 마산에 전기회사의 지점이 설치된 것은 와전(瓦電)의 지점 개설이 그 효시인데 금일까지의 경과를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11년(명치 44) 3월 16일 일.. 2015. 11. 30.
김형윤의 <마산야화> - 58. 역대 마산부윤 58. 역대 마산부윤(歷代 馬山府尹) 마산포는 요새지로서 일로(日露) 양국의 각축지로 각광을 나타낸 유명한 곳이다. 일본은 재빠르게 선수를 뻗쳐 신마산 현 월영국민학교로부터 서편에 걸쳐 99개년 즉 1세기의 조차조약(租借條約)을 체결함으로써 그들의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영사(초대 三浦, 현 중화소학교), 헌병분견대, 경찰, 세관 등 중요기관을 설치하고 학교조합을 만들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때에 한인들은 신마산을 조계(租界) 혹은 거러지(거류지)로 천칭하였다. 1899년(원문에는 1905년) 5월 1일에 소위 개항이라고 저희들 멋대로 개장하였던 것이다. 영사제(領事制)는 1907년 경에 이사로 하여 현 창원군청에 이사청을 구미식(歐美式)으로 건축하고 초대 이사에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이 취임하였.. 2015. 11. 23.
김형윤의 <마산야화> - 57. 치과의 57. 치과의(齒科醫) 마산에 치과의가 어느 때 들어왔는지 알 길이 없으나 일본인으로서 신마산에 총포화약상 겸 광산업을 하던 여창(與倉) 모(某)라는 자와 구마산에 고목(高木) 모(某)라는 자가 있었다. 이들은 정규의 치의(齒醫)가 아니라 일본인 당국자의 묵인 아래 버젓이 한글로 ‘병든 니(齒) 빼고 곤치고 새로 해 방은 병원이요’라는 말목을 문 앞에 세워 놓고 성업(?)을 했지만 사실인즉 그들은 구강위생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단순한 입치업자(入齒業者)에 불과해서 전문의가 없었던 때라 충치, 풍치 등의 발취(拔取) 정도도 일반 개업의들에게 의존하곤 했다. 그들 외에도 가짜들이 횡행하던 무렵, 조선인으로서 일본 동경에서 오랜 수업을 닦고 정규의 절차를 거쳐 온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등장한 사람이 약관의 고상목.. 2015. 11. 16.
김형윤의 <마산야화> - 56, 의료기관 56. 의료기관 마산에 최초로 병원을 설치한 것은 1908, 9년 경 구마산 박석고개(남성동) 전 동인(同仁)병원 왼편에 일본인 판전(坂田)이란 사람이다. 원장은 그 때로 상당히 연로하였다. 다음으로 구마산 시장 입구 현재 산업경제신문 지국 아래층 자리에 홍생(弘生)병원이 개업되었다. 1909년 경에 현재 마산상공회의소 건너편 협신중화공사(協信重貨公司) 사무소에서 농업협동조합까지 광역(廣域)에 걸쳐 종합병원-마산병원이 개원되었는데 원장에 구주제대(九州帝大) 출신 덕영오일(德永吾一)이며 산과(産科), 안과, 외과, 내과, 소아과 등 그 당시에도 병원 구실을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전 제길윤(諸吉允) 내과의원 이전에 일인 대강(大岡)병원 그리고 대강(大岡)이 사망 후 수상(水上)이라는 사람이 경영하였다... 2015. 11. 9.
김형윤의 <마산야화> - 55, 두 의사의 순직 55. 두 의사의 순직 1943년 일본인 태평양 서전(序戰)에서 까불던 것과는 달리 아이러니컬한 패전 기색이 결정적으로 흘러가던 3월 18일-. 이날 오후 마산 중앙동에 있는 도립병원 격리병사에 누더기를 걸친 50 가까운 조선인 남자 진객(珍客)을 칼 찬 순사가 호송해 왔다. 남자는 행로에 쓰러져 있는 성명, 주소 미상인 거지요, 순사는 정복을 입은 마산서에 외근하는 판본친차(坂本親次, 36)라는 청년이다. 보고를 받은 삼구미일랑(森久彌一郞) 원장은 이 거지를 곧 장질부사 환자로 진단하고 즉각 격리 병사에 수용하면서 원장 자신은 주치의가 되고 무산애자(茂山愛子) 양(19)을 주임 간호원으로 임명했다. 수용되었던 행려병자는 날이 갈수록 회복이 빨라 만 27일 만인 4월 12일 퇴원했다. 그러나 주치의 삼구.. 2015. 11. 2.
김형윤의 <마산야화> - 53. 우편국, 54. 화장장 53. 우편국 명치 32년(1899년) 11월 26일 창원부 외서면 중성리(현 마산시 남성동 142 성남병원)에 그 당시 사정으로 부산우편국 마산출장소를 설치하고 우편과 일문(日文) 전보를 취급하다가 이것을 1902년 8월 1일 신마산 본정(本町) 서정목(西丁目)에 청사를 신축 낙성한 것을 시발로 구마산소(舊馬山所)와 완전 분리되었다가 마산국(馬山局)으로 승격했다.(1900년 4월 15일) 다시 1922년에 마산역 앞 일각(一角)으로 이전한 것이 현재의 사옥 그대로이다. 초대국장은 하합영길(河合英吉)인바 구역은 창원군 일부 구산면에서 내서면 봉암 등으로 시가지가 확장 됨에 따라서 창원군 3분의 1 범역(範域)을 미구(未久) 옹위될 가능도 없지 않을 만치 업무가 폭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우편집배를 모두 .. 2015. 10. 26.
김형윤의 <마산야화> - 52. 돝섬의 전설 52. 돝섬의 전설 돝섬은 마산 앞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 일명 월영도(月影島)라 부르기도 한다.(행정구역 상 월영동에 속해 있기 때문) 1910년경에는 인가가 불과 7,8호였으나 지금은 20여 호. 아동 10여 명의 초등학교 분교장이 있고, 주민은 대개 영세 어민으로 섬의 동남 비탈에 보리와 채소를 가꾸기도 한다. 멸치 어장막이 있어 신·구마산 어판장과의 사이에 배의 왕래가 잦고 여름 한 때는 낚시꾼들과 피서객들이 득실댄다. 섬의 형상은 서쪽에서 바라보면 오리(鴨)가 먹이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인도산 코브라가 염소(羊)를 삼킨 것과 흡사하다. 일본인들은 이 섬이 일본의 비파(琵琶)와 같다 하여 그 어음(語音)에 비겨 미화(美和)라 했으며 마산만의 공원지로 지정하고 매번 벚꽃 묘목을 심었으나 바.. 2015. 10. 19.
김형윤의 <마산야화> - 50. 금은 세공업 일람, 51. 장날과 골목 50. 금은(金銀) 세공업 일람 마산의 금은(金銀) 세공업소는 아득한 옛날은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까지는 다음과 같다 개원상회(開元商會) = 김상노 정진환 김인규 영광당(永光堂) = 박태룡 단 박태룡을 제외한 4명은 타계하였음. 현재 시내에는 13개소가 있다. 51. 장날과 골목 마산포의 장날은 경남에서 유명했다. 장터를 두고 바다 건너 거제를 비롯하여 고성, 삼진, 함안 칠원, 의령, 창녕, 김해, 진해, 창원 등 원근의 백성들을 탄토(呑吐)하는 곳으로 굴지의 터전이지만 장날 또한 모여 든 백성들이 폭주하여 은진(殷賑)의 극을 이루었다. 장날이 되면 고정된 점포에서 물건들이 거래되는 것이 아니라 거개가 난전(노점)에서 동업자가 끼리끼리 모여 앉아 고객들을 부른다. 이들 상인들은 보부상.. 2015.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