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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8) - 강점제2시기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다 - 중앙마산의 형성>

 2) 중앙마산이 철도용지로 강점되는 과정

철도용지를 둘러싼 일제의 공공연한 토지약탈은 마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경계 측량을 할 때 경계를 속인다든지, 원래 정해진 경계보다 턱없이 많게 토지를 점령한다든지, 군용지라고 속여 민간의 토지를 침범한다든지, 일본군의 군용도로를 만든다면서 민가를 헐어버린다든지, 개인 사유지를 일본정부에서 내려준 것이라면서 팻말을 박아 자기 땅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하는 등 일본인들의 횡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마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산의 철도용지도 지난 주 포스팅에서 언급한 한일의정서 제4조를 적용시켰던 겁니다.            
2012/0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번천사 (97) - 강점제2시기
 
철도용지 확보과정에서 마산의 일본 세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고, 그 과정에서 도시도 중대한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조약체결 직후부터 마산에는 일본군인과 군량 및 마량(馬糧)을 실은 일본군함이 무시(無時)로 드나들면서 유린했는데 이 시기에 철도용지 명목으로 토지를 압수했던 겁니다.

압수 면적은 일본인 대지주 박간(迫間)의 개인사유지를 제외하고도 12만평(1,210斗落)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마산합포구청이 된 옛 마산시청 일대의 중앙마산지역이었습니다.

토지강탈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 하나를 소개합니다.

1904년 7월 일제는 점찍어둔 철도부지에 입표(立標)하고, 마산포 내 한국인 소유의 토지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강제 점용하는 폭거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사정에 대하여 마산포 주민의 안녕을 책임진 감리가 도면을 그려가면서까지 그 부당성을 외부대신에게 보고하기도 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마산포 주민들의 생활근거지를 박탈한 일제는 그 보상은 외면한 채 오히려 철도규칙을 만들어 한국인과 한국의 관리들을 우롱하였습니다.

창원보첩 四, 광무 9년(1905년) 2월 5일자 감리보고 제8호에 나와있는 철도규칙의 내영은 다음과 같습니다.

㉮ 철도 위를 보행하는 자 및 전선을 손대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하여 엄벌에 처하고
㉯ 군용철도와 전선을 파괴하는 자 또는 그 모의를 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며
㉰ 범행자가 속한 군수와 촌리도 엄벌에 처한다

이런 악랄한 규정 때문에 억울하게 재산 뺏기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사례도 많았습니다.
다음 사진은  당시 철도용지 수용 방해자 학살장면입니다. 1906년 찍은 사진인데 마산에서 촬영한 것은 아닙니다.


토지주였지만 토지의 매매와 경작은 물론 심지어 출입까지 통제 당했던 마산포 주민들은 이 악랄한 일제의 탈취에 격분하여 창원감리에게 사정을 호소하였고, 창원감리 현학표는 이런 사실을 외부대신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 보고에 대해 외부대신은 지령을 통해 간섭 의사를 밝혔으며 이때부터 이 문제가 확대되었습니다.

정부의 지령에 따라 감리는 뒤늦게 철도부지에 대해 조사를 착수하였습니다.

조사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일인(日人)들이 토지를 강탈하면서 당시 일본영사와 철도감부반장이 일본인 박간(迫間)의 하수인 홍청장(弘淸藏,)
과 공모하여 한국인 손덕우를 앞 세워 한국인 토지주들을 회유했던 겁니다.  철도부지와 관련된 기록에는 모두 홍청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弘淸藏은 후에 남성동 매립 때 박간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당시 마산의 유지 일본인 홍청삼입니다
)

한국인 손덕우는 구한말 창원 감영의 감찰사 역임한 지역 유지로, 마산민의소 의장, 마산구락부 초대부장, 마산정미소 중역, 창신학교 부교장, 기독교 장로, 한말 박영효의 지인으로 창신학교 설립자 중 한 사람입니다.
1910년대에는 마산부 참사와 학무위원을 지낸 사람입니다. 마산포 사건 때도 박간(迫間)의 요구에 응해 박간이 원하는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지주를 찾아 통영까지 가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지역에서 덕망은 높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손덕우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손덕우를 통해 토지 가격은 얼마든지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여 토지주의 서명날인을 받아 표목까지 박았지만, 뒤에 가서 이 약속을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손덕우만 구금되는 수모를 겪고 일본영사와 철도감부반장은 그 책임을 서로 전가시키며 발뺌을 했다 합니다.

여기까지가 일본군(日本軍)의 마산철도용지 강점 과정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입니다.
김용욱과 김준의 연구에서 밝혀진 내용을 옮겼습니다.

이 이후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록을 발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을사조약 체결로 통감정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철도용지 강점 계획이 일본의 의도대로 쉽게 시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1911년 간행된『馬山と鎭海灣(마산과 진해만)』에서 나오는 통계와 다른 여러 자료에서도 중앙마산지역의 철도용지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아도 을사조약 직전에 일본군부의 의도대로 마산의 철도용지가 결정된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만, 그후 제작된 사정지적도와 사정토지대장을 확인해본 결과, 사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단, 원래 그들이 계획했던 규모와 형태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탈취한 토지 중 일부는 나중에 마산 거주 일본인들의 자녀 교육비 충당을 위한다는 명복으로 일본거류민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1908년 일본거류민단은 예산의 상당부분을 점하는 교육비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철도용지를 싸게 대부 받아 원하는 사람에게 전대(轉貸)함으로써 연간 10,000원의 이익을 얻었습니다. 당시 백미가 1石當 19원이었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강제로 빼았은 땅을 임대하여 후세교육비로 사용했던 셈이죠.

강압적으로 무상 탈취한 토지를 철도용지란 이름으로 20여 년간 소유한 일본 군부는 1920년대에 들어서 입장이 바뀝니다.

1920년대 들어서자 마산부민들이 마산포와 신마산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는 철도용지가 마산의 도시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마산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상 불편했던 관아건물의 위치에 대하여 불만 때문에 관아건물을 중앙지역으로 옮기자는 요구가 일었습니다.

이런 여론에 따라 일제는 철도용지를 마산부에 불하하게 되었고 마산부는 이 토지 중 상당 부분을 기업과 개인에게 불하하는 한편 마산의 중요한 광공서를 이곳으로 이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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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8 00:00

강탈당한 진해와 두 지도자


지난 11월 23일 올린 글에서처럼,      <2011/11/23 -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100여년 전 진해의 중평벌판 그 평화로웠던 마을에
일본의 군대가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쳤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부랑자 신세가 된 당시 진해사람들의 정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을 것입니다.

이 참담한 상황을 전후해 민족의 최고지도층이 보여준 극단적인 두 사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주민들의 아픔에 동참한 사례로 매천 황현에 대한 이야깁니다.

당시 진해지역에서 일어난 아비규환을 두고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倭人勒奪慶南之鎭海灣………定期軍港………熊川距鎭海數百里而亦捲入港域吏民漁散如逢亂離  ; 웅천에서 수백리의 항역이 군항으로 포함되어 이속도 농민도 고기잡이도 모두 흩어져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웅천에서 수백리’라고 표현한 것은 웅천에서 거제도 끝까지에 이르는 진해만 군항지역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을사조약 1년 후인 1906년에 쓴 글입니다.
이등박문의 강압적인 통감정치가 횡횡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매천의 애국심과 기개가 더욱 잘 드러납니다.



둘째는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일본군부가 진해 11개 마을주민들을 내쫓기 직전의 일로, 왕족이자 내부대신이었던 향운 이지용이 저지른 일입니다.

그는 진해지역 토지강제수용에 대한 안건이 고종황제에게 상주(上奏)되기 이틀 전에 경상남도관찰사서리 진주군수 민병성에게 훈령을 내렸습니다.
 
「진해만을 우리나라 군항으로 예정하는 사항은 이미 정부의 협의를 거쳤으니 조속히 해당지역의 각 군수로 하여금 該 지방민에게 주지케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고종황제가 최종 결정도 하기 전에 훈령을 내린 것은 힘없는 황제를 능멸하고 일본을 향한 자신의 적극적인 충성심을 과시한 사악한 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황제의 재가가 내린 다음날인 8월 22일에는 경상남도관찰사서리에게,
「………본 훈령이 도달되면 조속히 당해 만(灣) 부근 각 군수에게 별칙(別飭)하여 적선 내 토지의 매매·교환·양여·전당·대차를 일절 엄금하라. 만약에 사호(絲毫)라도 소우(疏虞)함이 있을 때는 해당 각 군수는 중경(重警)에 처해질 것이고 귀관 또한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충분한 주의를 가하라」는 훈령을 내렸습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싶었는지, 이틀 후인 8월 24일에는 진해군수·거제군수·웅천군수에게도 같은 취지의 훈령까지 내렸습니다.

일제에 대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충성으로, 일본군부가 추진하는 진해군항 건설에 진력을 다했습니다.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러일전쟁 와중에서 굴욕적으로 체결한 한일의정서를 작성 서명하였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매천 황현은 한일병합 사실을 전해 듣고 1910년 9월 10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로써 망국의 한을 풀었고,
이지용은 훈1등 백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매천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민족의 사표가 되었고,
이지용은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표적인 친일파로 규정하였고 그가 남긴 재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습니다.<<<



2011/08/31 - [감춰진 도시이야기] - 욱일승천기를 모방했다는 진해 중원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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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 [감춰진 도시이야기] -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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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00:00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일찍이 제포 왜관 설치 후 삼포왜란이 발발하였고 그로부터 100년도 못돼 임진왜란을 겪은 진해지역이 다시 300여 년 만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 군항도시가 되었습니다.
넓지 않은 한 지역이 일본이라는 인접한 나라와 이처럼 모진 악연을 이어오다가, 해방 후부터는
우리나라 해군의 요람이 되어 지금에 이른 도시가 진해입니다.

일본이 진해를 군항으로 삼은 것은 10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청일(1894-5년) 러일(1904-5년) 두 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 패권국이 되겠다는 야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마도를 중심으로 남쪽의 좌세보(佐世保, 사세보)와 북쪽의 진해에 군항을 두어 대한해협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할 수 있다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진해가 군항이 되자 일본의 한 민간단체는 「일본의 한국경영 가운데 이보다 중한 것이 없다. 한일의정서나 보호조약도 이보다는 못하고 통감설치나 철도점유도 이보다는 못하며 두 군항(진해만·영흥만)의 획득이 최대 환영이다」라고 극도의 만족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정부가 러시아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한 것은 1904년 2월 10일이었지만 일본이 실질적인 전투행위에 들어간 것은 2월 5일이었습니다.

이 날 일본의 군사본부였던 대본영은 「연합함대는 황해방면의 러시아함대를 격멸하고 육군의 선유부대(先遺部隊)를 호송할 것. 제3함대는 진해만을 점령하고 조선해협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일본해군 제3함대가 진해만을 점령한 것은 2월 6일부터 7일 아침까지였고 이때부터 창원·웅천·거제 각 군은 사실상 일본해군의 세력권에 들어갔습니다.

이어서 2월 23일자로 체결된 한일의정서 제4조 「일본의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거제도와 진해만뿐만 아니라 이 나라 해안을 온통 일본해군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도 강제가 아닌 한일 두 나라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진해만을 점령한 일본해군이 가근거지(假根據地)로 마련한 곳은 거제도 장목면 송진포였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진해만’은 다음 그림에서 나타낸 지역으로 웅천·창원·칠원·진해·고성 등 각 군의 일부와 거제도 전역에 걸친 해역일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이미 그때부터 송진포항의 규모가 작아 영구적인 군항으로 부적합함을 알고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하였습니다.
때는 미국이 한반도를 사실상 일본에게 넘기기로 약속한 소위 가쓰라-테프트 밀약(7월 29일)과 치욕적인 을사조약(11월 17일)이 체결되던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진해만 내해에 위치한 현 진해지역의 막대한 땅을 수용하겠다는 일본 측 요청이 한국정부에 전달된 것은 다음해인 1906년 7월이었습니다. 원산 영흥만과 함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통감 이등박문은 마치 진해군항을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였습니다.
그는 의정부참정대신 박제순에서 보낸 공문에서
「………귀국정부는 진해만과 영흥만을 군항으로 예정하고………」
라며 한국정부에서 진해군항을 추진하는 양 표기하면서
「………군사시설은 일본에서 하는데 한국의 군비수준이 높아질 때 까지 사용할 것」
이라고 위장하였습니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군항과 신도시에 대한 민심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때 ‘군항’으로 예정된 지역의 면적은 4,388.8정보(43.52㎢, 1,300여만 평)였습니다.
범역은 1973년 7월에 창원군 웅천면이 진해시에 편입되기 이전의 진해시 전역이었으며 그 중에서 시가지면적은 약 12만평이었습니다. 거제도의 장목면과 하청면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군항과 신도시 건설 때문에 철거대상이 되었던 마을은 서부지역의 현동(縣洞)․도만(道滿)리․도천(道泉)리․여명(余明)리․중평(中平)리․좌천(佐川)리․신좌천(新佐川)리․안곡(安谷)리․속천(束川)리 등 9개 마을과 동부지역의 하구․중동 등 2개 마을, 모두 11개 마을이었습니다.
11개 마을의 가구 수는 390호, 쫓겨나야 했던 사람은 2천여 명이었습니다.

(하구와 중동에는 일본육군연병장을 둘 예정이었으나 나중에 계획이 취소되었습니다. 하구와 중동의 위치에 대해서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은 하구는 자은동, 중동은 석동과 하구마을 사이라고 했습니다)

군항으로 예정된 1,300여만 평의 땅은 한국정부에 의해 매수와 철거 조치를 끝낸 후 곧장 일본해군의 관할 아래 들어갔고, 이때부터 진해는 해군기지와 군항도시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지금부터 104년 전인 1907년, 진해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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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마산시의 시작>

사라져버린 ‘마산시’,,,,
오늘은 그 ‘마산시’의 시작을 알아보겠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였습니다만 이 글은 행정구역명칭으로서의 ‘마산’에 대한 내용입니다.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1895년 을미개혁으로 태종13년(1413년) 이후 480여 년간 지속되어온 8도제가 폐지되고 부제(府制)가 시행되었습니다.
전국에 23부를 두고 336군을 부의 관할로 두어 종래의 부, 목, 군, 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던 하급행정구역들을 군으로 통칭하였습니다.
이때 마산은 진주부 관할의 21개 군 중 창원군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부제(府制)의 인위적인 행정구역획정이 마찰을 빚어 실시 1년 3개월 만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1896년 병신개혁(丙申改革)으로 13도제가 채택되었습니다.
이때의 13도는 종래의 8도를 바탕으로 경기․강원․황해의 3개도를 제외한 나머지를 남북 양도로 분할한 것이었는데 오늘날의 도(道) 구역은 이때 결정된 것입니다.
13도 밑에는 7부(광주․개성․강화․인천․동래․덕원․경흥), 1목(제주), 331군을 두었는데 마산은 경상남도 창원군에 속했고 경상남도의 수부도시는 진주였습니다.

3년 뒤인 1899년(광무3년), 창원군은 개항에 따른 조치로서 창원부로 승격되어 창원감리서를 두었고 개항장의 관리업무를 감리가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3년(광무7년)에 창원부는 다시 창원군으로 바뀌었는데 이 때 전국은 3부, 1목, 339군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는 통감부와 이사관 관제를 발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00년에 설치된 일본영사관을 1906년 9월 1일자로 이사청으로 바꾸고 일본 거류민에 대해서는 치외법권적 행정권을 행사하는 거류민단제(居留民團制)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조치에 따라 우리 정부는 같은 해 9월 24일 개항장의 감리서를 폐지하고 창원군을 다시 창원부로 개칭하여 감리의 소관 업무를 부윤에게 인계하였습니다.

여기까지의 복잡한 변화가 한일병합 이전까지 일입니다.

한일병합으로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통치기구에 관한 일련의 관제(官制)를 발포하면서 강점 직후의 과도기적 체계를 발포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 개청 하루 전날인 1910년 9월 30일이었습니다.

이 때 종전 13도 1수부 11부 317군에서 수부였던 경성부(京城府)를 격하하여 13도 12부 317군으로 개편하였습니다.
이 개편에서 마산은 이전의 창원부에서 마산부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됩니다. 마산이 최초로 행정구역명칭으로 되었습니다. 경남에는 부산과 마산이 부(府)가되었습니다.

이전의 11개 부(府)는 모두 개항장 혹은 개시장이었던 곳이었지만 다시 개편된 부(府) 12개는 모두 통감치하의 일본이사청과 일본거류민단이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부(府)의 명칭, 예컨데「마산부」는 ‘마산’이사청과 ‘마산’일본거류민단의 ‘마산’을 그대로 딴 것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1908년 마산이사청으로 건축하여 1914년 마산부청이 된 건물 사진과 당시 이 건물이 있었던 자리(노란 점)입니다. 지금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터는 옛 창원군청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정문 기둥의 현판을 자세히 보면 '馬山府廳(마산부청)'이라는 한자가 보입니다.


부청은 1910년 10월 1일 개청하였습니다.
이사청은 이 날로 폐지되고 전국의 이사청 청사가 각각의 부청 청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마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창원부가 마산부로 바뀌었지만 호칭이 달라진 것 외 지방행정단위로서의 성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1899년 시행되었던 마산의 개항도 1911년 1월 1일 진해 일본군항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폐지되고 개항과 함께 시작된 각국공동조계지도 1914년 3월 31일자로 폐지되었습니다.
한국 땅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조계지 폐지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합방 후 3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식민통치의 틀이 잡히자 총독부는 본격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대대적으로 지방행정을 개편합니다.
1913년 10월과 1914년 4월에 걸쳐 단행된 이 개편은 1914년 3월 1일과 4월 1일을 기해 일제히 실행에 옮깁니다.

마산은 이 지방제도 개혁 때 경성․인천․군산․목포․대구․부산․평양․신의주․원산․청진․진남포 등과 함께 관하에 면(面)을 가지지 않는 지방행정의 기초단위로서의 부(府, 지금의 시)가 되었습니다.
이 때 결정된 마산부의 관할구역은 마산부의 각국거류지와 창원군 외서면의 완월리․신월리․월영리․자산리․서성리․성호리․중성리․성산리․동성리 및 오산리․상남리․교방리.회원리의 일부였습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동쪽으로 마산만 해안선을 경계로 서쪽으로 대곡산과 무학산 정상, 남쪽으로 밤밭고개, 북쪽으로 오동동다리를 경계로 노비산까지의 범위였습니다.

그러다가 1942년 9월 30일자로 마산부의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됩니다.
창원군 내서면의 교방리·회원리·산호리·석전리·양덕리와 창원면의 봉암리, 구산면의 가포리 등 7개리가 마산부에 편입됨으로써 마산부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이때의 마산부가 해방 4년 뒤인 1949년 지방자치법제정 때 부(府)에서 시(市)로 바뀌면서 마산시가 되었습니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마산의 행정구역 개편은 이처럼 창원군(1895년)-창원군(1896년)-창원부(1899년)-창원군(1903년)-창원부(1906년)-마산부(1910년)-마산부(1914년)-마산시(1949년)로 바뀌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와 같은 곡절을 겪었던 마산시는 2010년 7월 1일 진해 창원과 합쳐 창원시가 되었습니다.
마산부로 시작된 독립 시(市)의 백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죠.

‘마산시’가 없어진지 그새 1년이 되었습니다.
평생 ‘마산시 회원동...’으로 시작되는 주소를 사용했던 저로서는 제 의지와 상관 없이 갑자기 ‘창원시.....’로 시작되는 주소를 사용하자니 아직 뭔가 어색합니다.
별로 내키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마산 창원 진해가 아닌 다른 이름, 예를 들어 ‘경남시’였다면 ‘마산’이 없어져버렸다는 느낌보다 세 도시가 통합되었다는 느낌이 더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통합시의 명칭을 세 도시 중 하나였던 창원시로 결정해버린 것은 사회통합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름을 잃은 진해와 마산시민들의 상실감 때문에 말입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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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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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한일병합 전, 마산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늘부터 마산포(원마산)의 옛 모습에 대해 7회로 나누어 포스팅하겠습니다.

근대적인 계획도시였던 신마산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전통도시 원마산의 사정은 사뭇 달랐습니다.

당시 마산포(원마산)의 규모입니다.


1900년-1910년 경 마산포는 인가(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했으며 2,000여 호의 재래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상점가는 주로 해변에 면해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중심부인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에는 정사각형의 1,500여 평의 부지에 150여 년 동안 존속해 온 마산창이 개항과 함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변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마산창은 100여년 전까지 존재했던 건물로서 규모․위상․역사성이란 측면에서 가장 상위의 관아였습니다.
마산창에 대해서는   <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에서 이미 소개하였습니다.

마산창 주변은 좁은 길가에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상점으로 가득 차있었으며 주위 안팎에 마산창과 관련된 공덕비를 비롯한 석탑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기에 창동을 석정(石町)이라고 불렀는데 이 석탑들 때문에 지어진 지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록으로 당시 마산포 상황을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01년 창동 구 시민극장 뒷골목에 있었던 황영택 장로의 집에서 마산의 기독교가 시작되는 최초의 모임이 있었다는 『문창교회백년사』 기록과
같은 해 마산 최초의 천주교 신자 김달시시오의 집이 오동동에 있었다는 『
天主敎馬山敎區設定10주년기념집』이 그것입니다. 
이 두
기록을 보면 도로변을 제외한 골목 안쪽은 대부분 주거용 건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밖에 창동의 옛 시민극장 자리에 마산민의소가 1908년 건립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며 1898년 마산창 내에 마산포우편물취급소가 설치된 후 1909년에 구마산우편소로 개칭되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 외에 남성동 일대에 마산금융조합과 진주농공은행마산지점 등의 금융시설이 있었으며 1909년에는 수성동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출장소가 생겨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1906년 조창부지 서쪽에 일본인 등기공수(藤崎供秀)가 한인가옥 사이에 일본식의 점포를 2-3채 지어 세를 내주고 그 지역이 마치 제 지역인양 등기정(藤崎町)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1908년에 마산포 영역인 서성동에 길천(吉川)이란 일본인이 사는 목조2층의 요정 '명월루'에 화재가 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등기공수(藤崎供秀)와 길천(吉川)에 대한 두 기록은 을사조약 후 일본인들의 마산이주가 본격화되고부터 원마산에도 일본인들이 건축물도 짓는 등 상당한 진출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데 더 이상 자세한 정황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산포의 시장은 번화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의 마산포(원마산)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사진 두 장을 소개합니다.

조선통감부농상공부수산국에서 1910년 펴낸 『韓國水産誌』에 수록된 사진입니다. 책의 간행연도가 1910년(隆熙4년)이니 사진촬영 시기는 1908-1909년 혹은 그 이전일 수도 있습니다.




「구마산예시의 건염어점(舊馬山例市の乾鹽魚店)」이라는 설명과 함께 소개된 두 사진을 보면 좁은 시장통에 초가의 상점이 늘어서 있는 정경과 사람 수를 보아 상당히 성황을 이룬 거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조 흙벽에 초가를 얹었지만 늘어선 품새로 보아 시장이 번성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마산포 시장의 이런 모습이 조선 후기 내내 이어져 왔을 것입니다.

다음 글은 1908년 일본인 전연우언(田淵友彦)이 쓰고 박문관(博文館)에서 펴낸『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254쪽에 수록된 마산관련 글입니다. 

**************************************************************************************한인가(韓人街, 마산포)는 마산만 안쪽의 북쪽에 각국거류지로부터 20여 정(丁, 1丁은 109.1m, 町이라고도 함)에 있으며 구마산이라고도 칭한다.

수 천 여 호에 인구가 약 4,500에 이르는데 옛날 조공미를 모은 집산지로서 함경도의 원산, 충청도의 강경과 더불어 팔도 3대 항구 중 하나로 일컬어 온 곳으로서 경상남도에서는 시가(市街)로서 제3위를 점한다.

마산 개항 당시에는 일본 상인들이 모두 여기에서 조선인들과 혼거하여 살았다. 또한 본 항 무역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미곡은 가을과 겨울, 출하의 계절에 오직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므로 일본인들도 여기서 거주하는 사람이 많은데 1904년 6월 현재 호수는 42호이고 남자89명․여자 56명이다.

구마산의 개시일(開市日)은 매월 3회로 5일․15일․25일에 열리는데 장날에는 부근 10 리 내지 20 리 떨어진 지역으로부터 주민들이 모인다. 특히 쌀이 출하되는 계절에는 조선화폐 취급고가 50,000관(貫, 관은 ‘괘’의 뜻으로 엽전 열 꾸러미, 곧 열 냥을 하나치로 계산하는데 쓰는 말이므로 1관은 10냥(兩)을 말한다) 이상 달하기도 한다.

구마산은 또한 어류집산지로서 염장어(鹽藏漁)를 위시하여 해삼․명태 등의 건어물을 취급하는 상점이 20여 호이며 매년 취급고가 수 십 만원까지 오른다. 어류는 일본어선 및 한국어선으로 공급하고 판로는 경상도․전라도로부터 충청도 방면까지 이른다.

일본인 중에서 구마산에서 일본어 학교를 열어 한국인 자제의 교육에 착수한 사람이 있다. 현재 학생이 수 십 명에 달하며 점차 발전하고 있다.




다음 글은『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보다 6년 먼저 나온『韓國 案內』의 마산기록 중 마산포의 도시상황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책은 일본인이 쓴 근대기 마산관련 최초의 문헌으로, 일본인
香月源太郞이 쓰고 東京 靑木嵩山堂에서 1902년 출간했습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는
『韓國 案內』를 '대한제국기에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여행객들을 위하여 한국의 개항장 등의 경제발전상황을 통계자료를 이용하여 소개하고 관광할 만한 명승고적과 은행 등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는 책자이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 마산포(舊 馬山浦) p.322

각국 거류지를 지나 약 10리 거리의 창원가도(昌原街道)에 있고 인가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한 곳이다. 호수는 2,000여호이며 감리서(감리는 창원군수가 겸임), 경찰서 등이 있고 시가는 해변에 면하여 선박화물의 폭주가 매우 빈번하다.

옛날에는 이곳이 일본상인(행상)의 근거지였지만 마산개항에 즈음하여 신마산으로 이전하였다. 지금도 20여 호가 있고 대부분 조선가옥에 기거하고 있다.
 
**************************************************************************************

에 나오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숫자는 다른 자료와 차이가 많아서 정확도에 의문이 생기지만 당시 마산포가 얼마나 활발했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산포의 세밀한 상황은 복원도를 포스팅할 때 소개하겠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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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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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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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2011/01/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2011/02/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2011/02/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2011/02/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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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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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계획으로 끝난 수산시장과 군용지 매립구상>


1) 신마산 수산시장 매립계획

1905년 7월 29일 창원감리 현학표는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매립신청을 했습니다.
위치는 마산포의 각국공동조계지 밖 남쪽 해안이었고, 그 절차로 신동공사에 청원을 심의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창원감리 보고 제50호’로 제출되었으며 도면까지 첨부되었습니다. 아래 그림이 당시에 첨부되었던 도면입니다.

위 도면의 좌하부 삼각형 부분이 매립신청지인데 '수산회사축정지, 5천㎡정계(定界)'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그림의 삼각형 매립계획지를 현재 위성지도에 표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연두색 삼각형이 수산시장 매립계획지, 노란색은 각국공동조계지, 파란색은 당시의 간조시 해안선입니다)



이 매립은 일본인 10여 명이 수산회사를 설립하여 신마산에 수산시장을 건립하겠다는 목적이었으며 위치는 조계지 최남단이었고 규모는 5,000㎡(1,500평)이었습니다.

관련 기록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매립허가와 시행 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1905년 이후 제작된 문헌자료와 지도 등 아무 곳에도 이곳에 매립된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이 구상은 계획만으로 끝났을 뿐 시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철도용지 앞 매립계획

1906년(광무10년) 5월 7일 창원감리가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보낸 ‘창원감리 보고 제14호’에 일본군부의 매축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매립계획은 바로 그
일본군부의 매립계획을 말하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매립계획이었습니다.
다음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현재의 경남대학교 정문 쯤에서 시작하여 마산역과 장군천을 지나 마산포 어시장까지의 규모입니다.
(파란색은 간조시 해안선, 주황색이 매립계획부분)


이 보고서의 내용에는「일본군부가 철도용지 앞 해안을 매축할 계획을 세우고 각국공동조계지에서 구마산포에 이르는 해안 약 10리를 군항지로 매축코자 하오나 이미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지금에 와서 온당치 못한 일」이라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전쟁은 1년 전에 끝난 러일전쟁을 두고한 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5월 16일 지령 20호로 창원감리에게「이미 평화가 찾아온 마당에 군용지도 물러나 주어야 할 것이니 매축공사는 교섭하여 정지(停止)하게 하라」라는 내용의 매축계획중지를 지시하는 훈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앞의 매립계획과 마찬가지로 이 매립에 관한 기록도 여기서 끝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진척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도 1906년 이후 제작된 지도 및 각종 자료에 이런 식의 매립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을사조약으로 한반도를 손에 쥔 일본의 야욕이 마산포에 드러났던 두 번의 매립계획은 이렇게 계획으로만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계획만으로 끝난 그들의 마산포 매립시도는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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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마산에 들어온 일본군대>

일본 신사(神社)가 우리 민족을 정신적으로 위압했다면, 물리력으로 우리를 억누른 것은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었습니다.

일본군대의 마산진출은 1905년 마산선 철도가 건설될 때 쯤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1909년 7월 일본육군의 중포병대대(重砲兵大隊)가 진해에서 마산 월영동(현 월영동아파트단지)로 이전한 것과 같은 해 12월 대구헌병분유소(大邱憲兵分遺所)을 신마산에 설립한 일입니다.
이 글은 월영동에 주둔했던 「육군중포병대대」에 대한 내용입니다.

러시아와의 각축기에 일제는 율구미와 자복포 일대(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 및 구 한국철강 부근 일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로 확정했다가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이 체결될 즈음 이 지역은 군용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1908년부터 본격적인 병영 건설에 착수하여 1909년 7월 완공, ‘진해만 요새사령부’와 ‘진해만 중포병대대’가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후 1913년 '진해만 요새사령부'는 진해 좌천리로 이전해 가고 중포병대대는 해방 때까지 이곳에 주둔합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의 중포병대대 전경입니다.
첫째 사진은 앞면, 둘째는 뒷면, 셋째는 정문입니다.

두번 째 사진의 산은 지금의 해운동 주공아파트단지이고 산 왼쪽에 일렬로 선 건물은 군용관사인데 관사 앞 길이 지금의 월영동 아파트단지 입구 도로입니다.

 




저 사진 속에 보이는 벚나무들이 잘 자라 현재의 월영아파트단지를 조성할 무렵에는 둥치가 아름드리였고 꽃도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남아 있었다면 장관일텐데,,,,
기계톱에 잘려나간 고목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현재 사진입니다.
뒤에서 찍었습니다.



다음 그림은 중포병대대가 들어오기전인 1899년의 이 지역 지도와 들어온 후인 1910년대에 제작된 1/20,000 지도를 비교입니다.
구 한국철강 부지의 일부가 그 당시 이미 일부 매립되어 군용지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16에 일본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1/10,000 지도에 표시된 같은 위치의 지도와 현재의 위성사진입니다.
붉은 점이 동일한 위치인데 자세히 보면 당시의 해안선 따라 도로가 나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군대 주둔은 식민지 무단통치수단이었던 터라 월영동에 똬리를 튼 중포병대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19년 3월 독립운동 때 이 부대는 마산인근의 만세시위현장 곳곳에 투입해 시위 군중을 진압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3월 19일 함안군 함안읍 장날 의거,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 의거, 3월 28일 마산의 진동 고현시장 의거 등입니다.

마산중포병대대병들의 훈련 장면입니다.


 

해방 후에도 이곳은 군사용지로 이용되었습니다.
해방 2개월 후인 1945년 10월 8일, 미 40사단 산하 2개 대대병력이 이곳에 들어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정 말기인 1948년 5월 20일 조선경비대 제15연대가 이곳에서 창설되었고 5월 30일에는 제1차 모병이 여기서 있었습니다.

당시 모병을 위한 마산지역의 실력자 간담회가 열렸는데, 장소는 일본인이 운영했던 요정 ‘망월루’였고 15연대장, 미군사고문, 경찰서장, 부윤(지금의 시장)대리, 마산지역의 각 청년단장 등이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15연대의 주요임무 중 하나가 ‘폭동진압’이었습니다.
1948년 10월에 발발한 여순사건 진압에 출동하여 열다섯 명이 전사했으며 1949년 4월 거제민중봉기에도 투입되었습니다.

일본군과 미군을 거친 이곳은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국군의 의무부대로 변신합니다.
그 시작은 1950년 12월 수도육군병원이 서울에서 옮겨오면서 부터였지만 본격적인 변신은1952년 9월 27일 부산 동래에서 육군군의학교가 이곳에 옮겨오면서 부터였습니다.

육군군의학교는 11월에 완월초등학교, 다음 해인 1953년 5월에 마산중학교를 인수하여 3천명 규모의 본격적인 의무교육을 시작하여 1963년까지 11년간 총 84,969명의 의무관련 교육수료자(군의관, 간호장교, 위생병)를 배출하였습니다.
육군병원과 공군병원 마산분원 등 많은 군 관련 병원들도 이곳을 거쳐 갔습니다.

지금은 조용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수도육군병원(1950년, 1952년부터 1963년까지는 육군군의학교도 함께 운영)→36육군병원(1953년, 1954년 육군의무기지사령부가 이곳에서 창설되어 9년간 활동)→26육군병원(1968년)→국군마산통합병원(1971년)→국군마산병원(1984년)을 거쳐 1993년 진전면 임곡리로 이 병원이 이전되기까지 이 터는 우리나라 국군의무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아파트 단지 한쪽에 국군의무병과요람지지(國軍醫務兵科搖籃之址)라고 새겨진 국군의무사 기념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수치스러워 그랬는지 식민지 시대의 역사는 적어 놓지 않았습니다.

기념하는 글 마지막 부분에는
“지금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옛 병영물은 보이지 않지만 국군의무부대의 역사가 서려있는 이곳이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오래토록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100년 전 일본군 중포병대대로 시작된 월영동 아파트단지 터,,,,
해방 후에는 미군이 점령했고 정부수립 뒤에는 국군병원을 거쳐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했습니다.

기구했던 자신의 궤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중포병대대가 판 연못과 그들이 심은 듯한 고목 몇 그루, 그리고 이 땅이 군용지였음을 보여주는 표지석만 남아 저 터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표지석 손의 주인은 경남대 유장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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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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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팬저 2010.12.21 22:5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보았습니다. 마산중포병대대병들의 훈련 장면에 나오는 포의 경우 280미리 유탄포로 러일전쟁 당시 뤼순항 전투에서 유력을 발휘하여 일본이 승리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포입니다. 280미리 유탄포는 1884년 이탈리아 군사고문의 의견을 듣고 개발을 시작하여 1887년에 제식화가 된 화포라고 하는데 주로 해안포로 사용되었는데 1940년 이후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1920년대가 접어들면서 280미리 유탄포의 경우 구식이라 천대를 받게 됩니다.

    이 유탄포의 경우 진해로 들어오는 길목인 가덕도 외양포에도 설치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놈을 마산에도 설치했다고 하니 놀라운데요. 외해가 아닌 내해에 설치를 했다고 하니까요?

    러일전쟁 직후 유탄포를 설치했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1904년 이후 마산에 부대가 설치된 후 사진을 찍었다고 보았을때 1910~12년 사이로 보입니다.

  2. 팬저 2010.12.21 22: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모형으로는 보았는데 중포병대의 모습의 사진은 처음봅니다. 마산중포병대대의 포기지의 경우 사방으로 높게 쌓은 흙이 보이는데 저런 방식의 경우 가덕도 외양포에도 있더군요. 방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입니다.

    외양포뿐만 아니라 부산에도 포부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똑 같은 280미리 유탄포이고 조선뿐 아니라 일본 전역에도 이런식으로 포부대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훗가이도 하코다테에도 280미리 유탄포를 설치하였는데 포기지가 외양포와 같네요.

    일본이 요새를 건설한 것을 보면 1차대전후 도쿄만, 대마도, 이키, 진해만이고
    2차대전시 도쿄만, 시모노세키, 유라, 마이즈루, 츠가루, 사세보, 나가사키, 진해만, 대마도, 이키, 풍예, 뤼순, 대련, 료고 만, 나진, 모토타카, 법호도, 고웅, 아미미오시마, 치치지마 인데 1, 2차 대전 모두 진해만이 포함됩니다. 얼마나 일본이 진해만을 공들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 허정도 2010.12.22 00:22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저는 군사문제에 대해 문외한이라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팬저님의 박식함에 대해서는 혀가 내둘러지네요.

2010.11.1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마산 최초의 근대 건축>

개항 당시 각국거류지에는 러·일 영사관 건물 외에 러시아와 일본 민간인의 건물 몇 채만 있었을 뿐, 일본인 대부분은 한인거주지인 마산포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9년에 건축한 러시아 영사관 건물입니다.
마산이사청과 함께 지은 마산 최초의 2층 건물로 조계지 언덕에 걸터 앉은 모습이 위용 당당합니다. 경남대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옆에 있었습니다.


조계지 내에서 경제활동을 했던 러시아인들은 조계지내의 대지주이면서 무역업과 러시아군함에 대한 잡화용달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석이나 기와로 된 주택을 직접 지어 살았습니다.
1900년 연말 현재 조계지 내 러시아인 건물은 모두 6동이었으며 그 중 한 채는 건평 80평으로 호텔업을 목적으로 건축 중이었는데 조계지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위치는 조계지 남단 해변의 전망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현 경남대학교 정문 앞 광장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경술국치 전인 이 시기에 식민 지배를 위한 법원 등 관아와 교육시설․금융시설을 비롯하여 요정․상점 등의 상업용 시설들이 일본에 의해 들어섰으며 이 외에 서양선교사들에 의해서 종교시설과 교육시설들도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양식은 대부분 의양풍(서양식과 유사한 형식) 혹은 일본식의 단층 건물이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대표적인 관아건물로 1908년에 지어 마산이사청으로 사용됩니다. 목조2층으로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자리에 있었습니다.
1899년 지은 일본영사관 건물을 헐고 지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910년 건축한 부산법원 마산출장소 건물입니다.
목조2층 양식으로 마산시청 앞에 있는 현 마산법원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음은 개항기(1899년-1910년) 마산의 근대건축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상술의 논문자료입니다.
 

No

건 물 명

현 위 치

건축연대

有無

구조 및 규모

양식

면적

비고

1

일본영사관

대내동

1899

목조2층

르네상스풍

 

1906년 마산이사청

2

러시아영사관

대내동

1899

목조2층

식민지양식

 

현 월포초등교 내

3

마산우편국

월남동4가

1902

목조1층

의양풍

42평

1930.2.24중앙동이전

4

마산포교회

성호동

1903

벽돌조1층

개량한식

 

문창교회전신

5

심상고등소학교

장군동3가

1904

목조1층

의양풍

384평

일본인학교, 후 이전

6

마산공립소학교

 

1904

 

 

 

1901開校,성호초등교

7

마산병원

중앙동철도용지

1905

목조1층

의양풍

75평

도립병원전신

8

마산 역사(驛舍)

중앙동철도용지

1905

목조1층

일식

 

 

9

제일은행출장소

월남동3가

1907

벽돌조1층

의양풍

 

 

10

서전(西田)주조장

홍문동

1907

 

 

112평

마산最古酒造場

11

마산이사청

대내동

1908

목조2층

의양풍

 

1914년 마산부청

12

망월루

두월동1가

1908

목조3층

일식

96평

여관, 요정

13

심상고등소학교

중앙동

1908

양풍 平家

 

612평

이전하여 신축

14

창신학교

상남동87번지

1909

목조1층

의양풍

56평

호주선교사(신교)

15

마산신사(神社)

문화동

1909

 

 

 

 

16

마산헌병분대

월남동3가

1909

 

 

 

현건물은1926년신축

17

육군중포병대대

월영동

1909

기와

 

 

여러 채가 있었음

18

환서좌(丸西座)

신마산

1909

목조2층

 

 

5-600명 수용

19

마산 세관

월남동4가

1910

목조1층

의양풍

 

 

20

지방법원마산지청

중앙동4가

1910

목조2층

양식

 

 

21

성지학교

완월동206번지

1910

벽돌조1층

양식

 

프랑스선교사(구교)

22

부산감옥마산분감

장군동

1910

 

 

 

 


여기서 소개한 건물들은 그 시기를 대표할만한 것들만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외의 건물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전 글에서 밝힌 대로 보험회사․목재상․정미소․양조장등의 공업시설과 마산청과물 시장 등의 유통시설, 여러 개의 유곽과 30여 개소의 여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 시기에 매우 다양한 시설물이 들어서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표의 세번 째에 적힌 마산우편국(1902) 사진입니다. 의양풍으로 목조1층이었습니다.


여관과 요정으로 사용되었던 망월루 사진입니다.
목조 3층 일본식 건물로 창원천변에 있었는데 사진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처럼 영업규모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한편, 일제는 1906년부터 부산․인천․성진과 함께 마산에도 항만 및 세관 설비공사에 착수하였습니다.
1908년에서 1910년까지 신마산 세관에 종래의 부두연장 84.5m에 돌제(突堤)의 연장 10m를 보강해서 등대를 설치하고 계단이 딸린 목조잔교를 설치했습니다.
다음 사진이 그 때 설치한 마산세관의 목조잔교입니다.


세관 구내에 목조 단충의 파상형(波狀形) 철판지붕으로 된 50평 규모 창고 1동을 건설했으며, 세관 주위에 철책을 두르고 세관지서장 관사(목조 23여 평) 1동도 이 시기에 신축하였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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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상공회의소, 인력거, 매춘,,,,>


개항 이후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경제 침식에 맞서 지역 상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국개항장의 객주와 여각 등 상인들이 자위적으로 상인 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이러한 조직체를 통괄하여 외세로부터 민족 상권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5년 11월 10일「상무회의소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규례가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근대적 상공회의소에 관한 최초의 법령입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5월 12일에는 칙령 제19호로 전 조항을 개정했는데 이로써 근대적 면모를 갖춘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이 개정규례가 발포된 5월 12일을「상공의 날」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산도 1900년 5월 마산포 객주를 중심으로 「마산상호회」를 조직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당시 마산포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이규철, 이상태 등이 참여했으며 상호회의 운영자금은 어선창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 화물 1뭉치 당 엽전 1원씩을 징수하여 충당했다고 합니다.
원산(1882년)․한성(1884년)․부산(1889년)․인천(1896년)․목포(1898년)에 이어 전국 여섯 번째로 비교적 빠른 편이었습니다. 마산에 이어서 북청․대구․평양․김천․군산․개성․수원에도 ‘상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1906년 「조선인상업회의소」로 바꾸어 운영했으나 경술국치 후 일제의 압력 때문에 갈등을 빚다가 1914년 8월 28일 해산 총회를 가졌습니다. 이 때 운영비 잔액 500원을 민족학교였던 사립창신학교의 육영사업비로 기증하였습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볼 때 당시 「마산상호회」에는 마산의 양심적인 민족자본가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마산상호회」의 출범이 현재 마산상공회의소의 기원입니다. 올 해로 마산상공회의소가 110주년이 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창진 도시통합으로 마산상공회의소는 없어지지만 '통합창원시 상공회의소'의 역사는 마산상공회의소 것을 이어받는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1939년부터 일본인들이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1958년까지 사용되었던 마산상공회의소 회관입니다. 마산 중앙동 1가에 있었습니다.



〈개항 후 사회변화〉

일제가 우리나라를 삼키니 마산사회도 급격히 변해갔습니다.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 인력거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교통수단이 등장하

였습니다.
자전거와 하마차(荷馬車) 그리고 인력거였습니다.
그 중 인력거는 일본사람들이 발명한 것으로서 1894년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인력거를 가장 먼저 공식 교통기구로 인정하여 운행했던 곳이 마산입니다.

「인력차영업취체규칙」이 마산 이사청에 의해 제정 공포되어 시행한 것이 1908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서울 및 경기도 일원은 같은 해 8월 15일자 경무청 령으로 「인력차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어 인력거 영업과 관련된 사항을 규정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마산에서 전국 최초로 교통법을 만들어 적용' 한 셈입니다.
마산에서 인력거 사용과 조치가 이처럼 빨랐던 것은 '한국인들의 원마산'과 '일본인들의 신마산'이라는 두 지역이 도시 내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매춘

이 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사창(私娼)도 생겼습니다.

한국 땅에 공인된 창기업(娼妓業)의 집단지역, 즉 유곽(遊廓)이라는 것이 최초로 생긴 것은 1900년 10월에 재부산 일본영사관에서 허가한 부산 일본전관거류지 바로 동쪽 부평동 1가입니다.
부산에 이어 1902년 12월에는 인천에도 유곽(遊廓)이 허가되었습니다.


이런 유곽이 마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직후로,
1904년
마산선 철도공사 때 들어온 건설노동자와 함께 일본 매춘부가 들어왔습니다.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에 의하면 1907년경 현 자산동 몽고간장 뒤편에 일본인에 의해 조선인 창녀 7-8명이 기거하며 영업을 하였고 1910년경에는 전 미도식당 동쪽입구(제일은행마산지점 뒷골묵) 골목에 조선인 창녀 5-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 가포에 들어선 일본마을 지바무라

한편 일본의 한국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1905년 2월 율구미 남쪽 해변에 일본 지바껜(千葉縣) 수산연합회의 어민 20명이 어업이민으로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지바무라(千葉村)라 부르면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어구이 식당이 많이 들어서있는 가포마을이 바로 그곳입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집을 개조한 ‘소나무집’이라는 장어구이 식당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주택 정원에 있던 소나무가 남아 상호가 되었습니다.

○ 여관, 병원, 신문, 극장 그리고 동척,,,,

당시 마산에는 여관이 30여 개소있었는데 그 중 3개가 원마산에 있었습니다.


하루에 이용하는 투숙객이 150여 명으로 연인원 56,000여 명이었으니 마산에 출입하던 일본인들의 숫자가 대략 짐작됩니다.

그런가하면 1904년에는 마산 최초의 병원이 1904년 가을 창포동 3가에 덕영오일(德永吾一)이란 일본인이 「마산병원」이란 이름으로 개업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1911년에 편찬된 『마산과 진해만』에 실린 이 병원의 광고입니다.

1906년 2월에는 마산 최초의 언론, 「마산신보」가 창간되었고,
1910년경에는 5-600명의 수용이 가능한 일본식 목조 2층 회전무대식 극장 환서좌(丸西座)가 건립되었
습니다.

같은 시기인 1909년 10월 6일에는 경제수탈의 첨병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출장소가 수성동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중 손(田中 遜) 외 일본인 29명이 발기하여 1908년 5월 「마산상업회의소」를 창립하는 등 본격적인 식민통치도시의 길을 걷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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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105년 전, 마산에 철도가 놓이다>


마산에 최초로 일본군대가 들어온 것은 이 도시에 철도가 놓일 때였습니다.
러일전쟁에 앞서 일본은 마산에 있는 우체국과 전보사 및 율구미에 있던 러시아 해군육상사령부의 시설을 압수했고, 한일의정서 체결(1904. 2. 23) 후부터는 마산항에 일본군과 군수물자를 실은 군함이 무시로 드나들었습니다.
1904년 9월 1일에는 군용철도 마산선을 놓기 위해 일본군 건설공작대가 마산만을 통해 입항했습니다.


마산에 들어온 일본군은 철도용지 명목으로 마산포 주민들의 토지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압수하는 폭거를 저질렀습다. 마산 뿐아니라 전국적인 일이었습니다.

경계 측량을 할 때 경계를 속인다든지, 원래 정해진 경계보다 턱없이 많게 토지를 점령한다든지, 군용지라고 속여 민간의 토지를 침범한다든지, 일본군의 군용도로를 만든다면서 민가를 헐어버린다든지, 개인 사유지를 일본정부에서 내려준 것이라면서 팻말을 박아 자기 땅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하는 등 일본인들의 횡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강제로 논밭을 박탈한 일제는 그 보상은 외면한 채 오히려 '철도규칙'을 만들어 한국인과 한국의 관리들을 악랄하게 압박했습니다. 그 내용은

㉮ 철도 위를 보행하는 자 및 전선을 손대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하여 엄벌에 처하고 ㉯ 군용철도와 전선을 파괴하는 자 또는 그 모의를 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며
㉰ 범행자가 속한 군수와 촌리도 엄벌에 처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이 '철도규칙'에 저항한 조선사람들을 일본군인들이 학살하는 장면입니다. 1906년에 촬영한 자료입니다.



마산선 철도는 1904년 1월에 '한국인이 설립한 영남지선철도회사'
가 착공한 마산과 삼랑진간의 철도였습니다다.

영남지선철도회사는 한국정부의 외부참사를 지낸 바 있는 부산 태생의 박기종이 황족인 완순군 이재완(李載完)을 앞세워서 1902년 6월 한국정부 농상공부 대신으로부터 마산포와 삼랑진간의 철도부설을 조건으로 설립한 회사였습니다. 사장은 완순군 이재완이었습니다

회사를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 후 맺은 의정서를 핑계로 사업권을 강제로 접수한 다음, 자국의 인력을 동원해 1905년 5월 25일에 개통시킨 것입니다. 경부선과 같은 해였고 경의선과 경인선보다는 1년 빨랐습니다.

처음에는 군사용이었으나 개통한 몇달 후인 11월 1일부터는 민간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현재 마산도시의 간선도로로 이용되는 육호광장에서 경남은행 본점 앞을 지나는 중앙로가 마산선 철도였습니다.

철도 마산선의 종착역이기도한 마산역은 일본인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조계지에서 가까운 곳, 지금의 마산중부 경찰서 건너편 벽산 블루밍아파트 단지 일대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의 마산역사와 위치입니다.




일제는 한반도 식민정책에서 철도노선과 역사(驛舍) 위치결정 등 초기의 시가지 계획을 통해 큰 이권을 챙겼습니다.
신축하는 역사(驛舍)를 구 상권과 다소 떨어진 곳에 짓고, 역사 가까운 곳에 신시가지를 조성하여 그들 손에 넣었습니다.
서울의 종로상가와 동대문 상가를 겨냥하여 서울역 주변과 충무로를 개발한 것이 그 사례입니다.
마산의 경우도 지리적으로 볼 때 이런 맥락에서 마산 역 위치선정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산역의 준공과 때를 같이하여 역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조계지와 원마산(마산포) 일대까지 대대적인 건축공사가 일어나 여관에 빈 방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근대양식의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일본 건설기술자와 노무자들 때문이었습니다. 협소한 방에서 일본인 노무자가 4-5명씩 합숙하면서 지내기도 했다합니다.

철도건설의 특수를 타고 1905년을 전후해 일본에서 매춘부까지 이 도시에 들어왔다고 하니, 단기간이었지만 철도건설 때문에 이 도시가 북적였던 것 같습니다.

마산선 철도 개통은 이 도시를 해로(海路)와 육로를 통해 일본과 한반도 내륙을 연결시키는 결절점으로 부상시켰고 마산의 도시화를 촉진시켰습니다.
일본과는 배로, 서울까지는
당시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던 기차로 연결되었던 도시는 마산과 부산 인천 뿐이었습니다.

철도 개통 직후에는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신마산에만 역이 있었지만 5년 후인 1910년 7월 5일 원마산(마산포)에도 역을 개설하였습니다. 구마산역이라 이름짓고 한국사람들이 주로 이용했습니다.
현재 교보빌딩 앞 육호광장이 구마산역 터였는데 67년 간 이용되다가 1977년 12월 26일 마산의 세 역(마산역, 구마산역, 북마산역)이 현재 사용하는 석전동의 마산역으로 통합되면서 폐쇄되었습니다.
긴 세월 동안 마산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인데 아무 흔적도 남겨놓지 않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마산선의 철도건설공사는 전(全) 5공구로 나누어 일본인들에 의해 시행되었으며, 철도건설에 대한 아무런 경험도 없던 한국인들은 단순노무자로만 참여하였습니다.

일본의 ‘사단법인토목공업협회’가 펴낸 『일본토목건설업사』에는 마산선 철도공사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904년 8월 철도감부는 마산포를 기점으로 낙동강 우안(右岸)에 군용철도부설의 명을 받아 전선(全線)을 5공구로 나누고 가장 북쪽의 1공구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은 곧바로 노선기반공사에 들어갔다. 청부자는 좌등조구랑(佐藤助九郞). 태창토목조(大倉土木組), 지기신태랑(志岐信太郞) 등이다」

이 책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시공한 한국의 철도공사와 관련한 대담이 실려 있습니다. 당시 최고 최대의 건설공사였던 철도공사에 한국사람들이 참여한 수준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平井 ; (철도공사에서)조선인 청부업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江崎 ;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인은 자금이 없었습니다. 
         어떤 일이 나오면 일본의 대형 건설업자가 나왔습니다.
平井 ; 실제로는 하청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江崎 ; 하청의 하청 정도였지요.
飯吉 ; 노무자로 참여한 정도이지요. 
         자본력이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지요.

…………………
논과 밭이 헐린 곳에 두 갈레 쇠길이 생기고, 그 쇠길 위로 뱀처럼 긴 시커먼 쇳덩어리가 화통을 울리며 달려들었을 때, 이를 처음 본 마산포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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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윤의 <마산야화> - 마지막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2015년 3월 23일 시작해 이번 회까지 만 2년 동안 포스팅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馬山野話)」143꼭지가 오늘로 끝납니다. 지나간 시절 마산사회와 마산 사람들을 추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2. 영불의 함대 입항

142. 영·불(英·佛) 함대 입항 1920년 여름, 안남(安南, 월남)에 있는 불함(佛艦)이 마산 저도 좌편 안쪽에 투묘(投錨)했다가 삼일 후에 출항한 뒤를 이어, 상해에 주둔하고 있는 영함(英艦) 호오킨스호가 동도(同島)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1. 개항과 각국 영사관

141. 개항과 각국 영사관 강화조약에 의해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된 후 다음과 같이 항구와 시장이 개방되었다. <조선의 시장과 조약항> 부산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13년(1876) 10월 14일(일본에게)..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0. 마산포와 열강

140. 마산포와 열강 1901년 노국은 북청(北淸)사건을 이용하여 만주에 군사적 관리권을 확립했다. 1902년에는 동청(東淸)철도도 개통되고 1903년에는 시베리아 철도의 본선도 완성되었다. 노국의 경제적 세력은 광산, 기타..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9. 노일전쟁과 율구미

139. 노·일(露·日) 전쟁과 율구미(栗九味) 노국의 조계지인 율구미는 1903년 1월 5일을 마지막으로 노국 수변 8명이 철수한 후에는 공지화되었다. 이를 그냥 둘 수 없어 노국 영사 카자코브는 치지코브라는 자에게 그곳을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8. 신상회사와의 투쟁

138. 신상회사(紳商會社)와의 투쟁 신상회사(紳商會社) 혁파 투쟁은 국내 본건지배층에 대한 투쟁이지만 외세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고, 또 마산항민들의 저항심의 성장을 고찰하는데 의의를 가진 투쟁이기 때문에 여기 서론(叙論)코자..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7. 노·일(露·日) 마산포 경영

137. 노·일(露·日) 마산포 경영 노·일(露·日) 양국인의 마산포 경영에 대하여서는 일본 외교문서 제33권에 당시 마산 일본 영사 판전중차랑(坂田重次郞)이 일본 외무대신에게 한두 가지의 보고 즉 마산포에 있어서 노국간의 경..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6. 1900년대의 국제관계

136. 1900년대의 국제 관계 청일정쟁으로부터 노일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최고의 단계인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던 시기로 이 시기의 시대적 특징인 극동에 있어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의 심화와 그 확대로..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 국토의 약탈과 국민생활 제재(制裁) 일본은 노일전쟁 전에 거제도 일대(송진포松津浦 / 원문에는 송포진)를 근거로 어업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중 일본 대노국(對露國)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적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4. 매축권과 대일 투쟁

134. 매축권(埋築權)과 대일(對日) 투쟁 구마산포는 옛날부터 농수산물의 집산지로서 중부 경남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기능을 가진 요지로 발달해 온 곳이었다. 망국의 낌새가 스며들던 한말, 마산의 토지소유권을 비롯한 모든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3. 노공관의 점유지

133. 노공관(露公館)의 점유지 1899년 노서아와 일본 정부가 마산에 해군 근거지를 두려고 각축전이 치열했는데 노서아는 서부 마산에 조차 조약을 체결한 뒤 지금의 일성 펌프공장 자리에 영사관을 두고 백조악기점 자리에는 관사..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2. 아라사 함대 입항

132. 아라사 함대 입항 아라사(노국의 별칭) 함대가 마산포에 투묘(投錨)한 것은 1899년(광무 3년, 명치 32년)이 처음이었다. 주한공사인 파브로프가 탑승한 군함 만츄리아 호가 인천에서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상해로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1. 자복포의 매수 각축

131. 자복포(滋福浦)의 매수 각축 조선정부와 영·독(英·獨, 1883년 11월 26일 체결), 아국(俄國, 1884년 7월 / 원문에는 1885년 10월 24일 체결), 의국(義國, / 해방 후 미국을 의국이라 칭하기도 했..

새해인사
새해인사 2017.01.01

2017년, 모든 이들이 희망을 품고 사는 세상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애당초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노신>

한국 100명산이야기 21 : 비파와 거문고 형상의 비슬산

● 국가적으로 우환이 많았던 병신년을 마무리 하기 위해, 대구시 달성군 현풍에 있는 비슬산을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양덕동에서 모여 곰탕으로 유명한 현풍으로 향하였습니다. 현풍의 산업단지라 할 수 있는 '대구테크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