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0. 3. 29. 07:00

바다가 살아야 마산이 산다


바다가 있지만 바다를 활용하지 않는 유일한 도시.
도시지역에만 약 4킬로미터의 해안이 있지만 수변공간다운 장소를 한 뼘도 가지지 못한 도시.
그래서 해안도시라 차마 말하기 부끄러운 도시, 해안도시라 말할 수 없는 도시.
지도에서만 바다와 면했을뿐 시민들의 삶과 동떨어져 바다 제 혼자 있는 도시.
바로 마산 아닌가요.



해방 전에 이미 대부분의 해안이 매립되었지만 어느 곳에도 공공용지는 없었습니다.
해방 후 시행된 여러 번의 매립공사에서도 일본인들과 똑 같이 공공용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매립 때마다 제각기 자기 잇속 채우기 바빴습니다.

가장 최근의 매립은 80년대 이후 시행된 구항과 서항 매립이었습니다.
시기나 규모나 위치로 볼 때 마산도시를 획기적으로 바꿀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곧 위기라 했던가요? 오히려 도시수준이 이 때문에 더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슬럼화 된 구항일부와 판상아파트가 버티고 선 서항의 난개발을 보면 잘 알것입니다.

3·15아트센터는 해안에 지어야 한다고, 그래야 건물이 산다고, 그렇게도 주장했으나 막무가내 고집하여 결국 양덕동 북향 고립지에 세웠습니다.
신포동 매립지에는 아파트 짓기보다 공공용지로 사용하라고 법과 제도까지 동원해서 나서보았지만 초지일관이었습니다.

결국 해변에서 장어구이라도 먹을 수 있는 곳은 아스팔트 위뿐, 불법영업을 안할래야 안할 수 없게 만들어진 곳이 이 도시의 해안입니다.

도시 곳곳에 내걸린 구호처럼 이 도시가 정녕 ‘드림베이’ ‘꿈의 항만도시’라면,
정말 그 말이 맞다면,,,,
적어도 가족 손잡고 연인과 어깨 맞대고 삼십 분 쯤은 맑은 해풍마시며 걸을 수 있는 해변산책로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김병종이 아바나의 말레콘 방파제를 두고,
쿠바의 아이들은 말레콘 너머 바다에서 수영을 하며 자라고,
말레콘에서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며 청년기를 보내고,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말레콘에서 노년을 맞을 것이다.
싯다르타의 뱃사공 바스데바가 자신은 강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고 한 것처럼...
정도는 아니라도 말입니다.

수변공간의 확보와 개발 은 도시디자인에서 널리 이용되는 기법입니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그 가치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마산은 바다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서익진 교수의 말처럼 ‘미항(美港)’으로 디자인해서 ‘수향(水鄕)’을 구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산이 삽니다.

데크도 좋고, 매립도 좋고, 기존 토지를 이용해도 좋습니다.
해안에서 넉넉하게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자전거 탈수도 있는 그런 수변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바닷가 넓은 공원에서 공연도 보고 놀이도 하고 계절에 맞는 횟감도 즐기는, 그런 생산적 해안이 있어야 합니다.

해안공원을 도심 속 그린웨이와 연결되어, 나무가 늘어선 길이 창동 남성동 어시장을 지나 해안까지 이르는 상상을 해보았습니까?

도심지역과 맞닿아 있는 마산만은 친수공간의 중요조건인 '활용도에 의한 생산성'에서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존 구도심 상권에서 어시장을 지나 해안으로 이어지는 동선의 흐름은 이 도시의 수변개발의 당위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임항선 철로가 그린웨이가 되어 바다와 연결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멈추고 있던 마산 앞바다의 생명력이 되살아나 시민들과 일상 속에서 만나는 최고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어시장은 물론 마산구도심의 상권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요코하마의 야마시다 공원처럼 ‘마산’하면 맑은 바닷물에 면한 해안공원,,,
키 큰 나무가 있고 고운 잔디와 사이사이 벤치가 놓인 아름다운 해안공원이 있어야 합니다.

해안도시의 시민이라는 만족감과 행복감은 그래야 느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어렵,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으니 얼마나 어려운지 조차도 모르지 않습니까?
비전만 있다면 무슨 상상인들 하지 못하며, 무슨 꿈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세 도시통합으로 큰 판을 다시 짜야될 시점이라 마산해안에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폐허였던 기타큐슈 모지항의 재생을 생각하면 우리라고 결코 못할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창의적 도전과 사회적 합의입니다" <<<

                                                        <모지항>

Trackback 0 Comment 4
  1. 후배유림 2010.03.29 09:46 address edit & del reply

    선배님 글으 읽다보면 어느새 근사한 수변공원이 있는
    마산을 상상하게 됩니다.
    더 많은 이들이 이런 상상을 현실로 되기 꿈꾸면 좋겠어요

    잘계시죠^^

    • 허정도 2010.03.29 10:36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어때요, 사업은 잘 되나요?
      간다 간다하면서 못가봤네요.
      일간 한번 들리겠습니다.

  2. 노상완 2010.03.30 16:11 address edit & del reply

    반드시 그런날들이 와야겠죠

    • 허정도 2010.03.31 15:55 address edit & del

      방문감사합니다.
      그런 날이 오도록 함께 힘을 모으면 좋겠습니다.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5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4) 그렇다면 이교재와 함께 형무소에 갇힌 위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순서대로 적힌 인물들을 검토해 보자. 沈相沅에 관한 기록은 재판 기록 이외에서는 신상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4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3) 이교재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뛰어든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의 동지와 더불어 선언서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문..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3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2) 이교재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조선조 말기와 대한제국시기에 진전면 일대에는 몇몇 서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마을 단위이자 문중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문중 중에서도 ..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2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1) 이교재(사진)는 1887년(고종 24년) 7월 9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부농의 아..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 1

앞서 9회에 걸쳐 1954년 김형윤 선생이 마산일보에 기고한 '이교재 선생 생가 기행문' 「삼진기행」을 포스팅했다. 오늘부터는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

김형윤의 <삼진기행> 9 / 1954년 4월 23일 (금)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3 이 황교전투로 말하면 삼진방면의 만세의거로서는 제3회째라고 하는데 제1회가 현동 제2회가 진북의 순으로 황교전이야말로 규모를 확대하였든 만큼 피해가 우심(尤甚, 정도가 더욱 ..

김형윤의 <삼진기행> 8 / 1954년 4월 22일 (목)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2 논둑 받아(?) 둑아 날 살리라 심의중(沈宜中)이 불콩이 날 죽인다! 이것은 누구의 창작인지 미상이나 지금도 산야엘 가면 나물 캐는 촌새악씨나 나무하는 목동이나 또는 소먹이는..

김형윤의 <삼진기행> 7 / 1954년 4월 21일 (수)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1 우리일행은 이교재선생의 묘소에 정중한 전배식(展拜式)을 마치고 산에서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에는 사양(斜陽)이 부락에 빚칠 때이다. 일행은 노부인과 작별인사를 할 때 굵은 눈물..

김형윤의 <삼진기행> 6 / 1954년 4월 20일 (화)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6 불우 순국열사들!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백년 일세기를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의 식민지로서 정치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치명상을 입고 경제적으로 약탈착취(掠奪搾取..

김형윤의 <삼진기행> 5 / 1954년 4월 18일 (일)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5 그러면 다른 말은 잠간(暫間, '잠깐'의 비표준어) 차정(次頂)에 미루어두기로 하고 정부에서는 무수한 순국열사에게 무엇으로 보답하였으며 무엇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는가? 또..

김형윤의 <삼진기행> 4 / 1954년 4월 17일 (토)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4 이야기는 본선(本線)에서 조금 지났지만은 이교재 선생을 검거한 이만갑이라는 자(者)는 어떠한 자인가를 말 안할 수 없다. 기자(김형윤 선생 자신)와 이만갑은 (지금은 일반..

김형윤의 <삼진기행> 3 / 1954년 4월 16일 (금)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3 산협의 좁은 비렁(&lsquo;벼랑&rsquo;의 방언)을 얼마쯤 나가니, 간데 마다 산은 백구질을 하여 황토만 노출(露出)한 독산인데 이 산 중복(中腹)쯤 되는 곳에 선..

김형윤의 <삼진기행> 2 / 1954년 4월 15일 (목)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2 일행은 이(李) 열사가 생전에 생장하셨다는 봉곡 부락 길가에 정차를 하고, 좁다란 밭 기슭을 타서 가면 신작로에서 불과 3&middot;4분 만에 선생의 구거에 당도된다...

김형윤의 <삼진기행> 1 / 1954년 4월 14일 (수)

오늘부터의 포스팅은 창원지역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살다간 목발(目拔) 김형윤(金亨潤) 선생이 남긴 기행문이다.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실렸고, 기고자는 본명 대신 &lsquo;H 생&rsquo;이라 되어 있다. 제목은 「삼진기..

총독에게 폭탄 던진 65세 강우규 의사

부끄러웠던 그날 저녁 지난 9월 19일 옛 서울 역 건물에서 열린 &lsquo;대한민국 건축문화제&rsquo;에 갔다가 역 광장에서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의사 동상을 처음 보았다. 세운지 오래되었겠지만 서울 갈 일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