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립27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3-마지막 회) - 매립의 도시, 마산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8 매립의 도시, 마산 19세기 말, 동성리(현 동성동)에 김경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개항된 해인 1899년 10월, 마산포 조창에 들어있던 창원감리서에 ‘서성리에서 오산리(현 오동동)에 걸친 간석지 50파(把, 1파는 양팔을 벌린 길이)를 매립하여 선창의 혼잡을 덜고 지역을 발전시키겠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여 정부로부터 매립허가를 받은 사람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항만건설과 매립사업을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상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에게 15,000량의 공사비를 차용하여 매립공사에 착공했으나 안타깝게도 사망하여 그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1906년 히로시는 김경덕의 매립인허장을 저당 잡을 때 작성한 전집표에 ‘차용금을 갚지 못하면 매립권은 .. 2015. 3.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9) - 강점제3시기 먼저 1945년 원마산 상황과 1930년 상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위의 두 그림에서 보다시피 1930년부터 1945년까지에 원마산에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변화의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정리한 번호는 위 1945년 그림에 표기되어있는 번호와 일치합니다. ① 1935년에 지금의 신포동 일대 매립으로 원마산과 신마산이 지형적으로 하나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② 같은 해 기선권형망수협지소와 그 인근 건어물 시장 주변 매립으로 동성동과 오동동의 경계까지의 해안이 직선으로 변했습니다. ③ 1937년에는 수성동, 즉 시민외과 앞 도로가 부림시장과 이어져 신포동 매립지와 연결되었습니다. ④ 같은 해 현 오동동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도로가 개통되었습니다. ⑤ 같은 해 ④의 도로가 새로 매립된 지역의 도로망과.. 2013. 4.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58) - 강점제3시기 오늘부터는 1930년~1945년의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는 대규모 매립이 시행되어 규모도 커지고 근대식 도로망도 확산되는 대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시가지가 확산되었습니다. 1930년~1945년 사이의 원마산에는 한국인 상인들에 의해 부림동 시장과 남성동 해안 일대에 걸쳐 곡물․면사포 등의 포목류․식료품․고무화․기타잡화 등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소점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상인들도 원마산에 많이 진출하여 건축자재․철물․과자․서적과 문방구․가구․의복․주류․육류․연료․선구(船具) 등을 판매했습니다. 대금업자도 10여명에 달했으며 건축 붐을 타고 토건청부업도 호황을 누렸습니다. 1931년에 간행된『경상남도 통계연보』에서는 당시 마산 토지 중 대지․논․밭을 종류.. 2013. 4.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7) - 강점제3시기 일제강점기 마산만 매립 관련 글은 지난 번까지였습니다. 개항기 9회, 강점 제1시기 2회, 강점 제2시기 3회, 강점 제3시기 15회로 총 29회였습니다. 하지만 개항기 매립 중 5회는 계획으로만 끝났기 때문에 실제로 시행된 매립 횟수는 총 24회였습니다. 매립 면적은 모두 325,000여 평이었습니다. 매립 주체를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조선총독부․마산부․기업․개인 혹은 공동매립과 단독매립 등이 있었으며, 1회 매립 면적도 최소 100여 평에서 최대 10만 평 가까운 면적까지 다양하였고 일거에 수만 평의 매립을 했는가 하면 한 사람이 세 번에 걸쳐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매립의 목적도 다양했습니다. 항만건설을 비롯해서 농지로 사용하기 위한 매립이 있었는가하면 군용지 혹은 철도용지를 목적으로 매립한 것도 있.. 2013. 4.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5) - 강점제3시기 -부두의 건설- 부두 역시 매립으로 건설되었지만 그 목적이 항만건설이라는 점에서 일반 매립과 구분하여 다룹니다. 일제강점기 마산에는 부두를 건설하기 위한 네 번의 매립이 있었습니다. 모두 강점 제3시기(1930년 이후)에 이루어 졌으며 조선총독부 혹은 마산부가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사정 및 권력 체제로 보아 마산부는 명의만 제공했을 뿐, 모두 조선총독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급속히 대규모로 시행된 이 항만공사는 마산을 상업무역항으로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일본의 침략전쟁을 돕는 병참기지로의 역할 수행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로 이어지는 일제의 전쟁 광란에서 .. 2013. 4. 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3) - 강점제3시기 1940년부터 1942년 9월 5일까지 부산 토건업체인 죽본조(竹本組)의 사주였던 竹本熊次(부산부 수정동 116번지 거주)가 시행된 매립공사입니다. 원마산(마산포) 매축지 동쪽 해변일대로서 마산시 수협이 있던 오동동 251-3을 비롯하여 동일제빙․동양공업․신기사 등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복어거리와 탑마트 그리고 웨딩그랜덤 건물이 있는 일대입니다. 총 11,860여 평이었으며 이중 대지로 사용한 면적이 8,885평, 도로는 2,539평, 하치장이 436평이었습니다. 이 외에 물양장이 254평 있었고 방파제 153m도 함께 시공했습니다. 다음 그림은 정부기록보존소가 소장하고 있는 「매립준공인가관계서류」에 첨부된 본 매립공사의 설계도입니다. 시간을 되돌려 보면 이 매립지의 위치는 오랜 세월 동안 마산포.. 2013. 3.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2) - 강점제3시기 이번 포스팅에서는 강점 말기에 시행된 네 곳을 소개하겠습니다. 매립지 모두 공장부지로 사용한 사례입니다. 지금은 경남대 앞 상업용지로 도시 한복판인 이 땅들이 불과 7-80년 전에는 바다였으니 정말 격세지감입니다. 1938년 1월 28일 창포동 3가 5-12 전 심건(心建)조선소 자리 594평을 앞의 국전암시(菊田岩市)가 자영 국전(菊田)조선소 용지로 매축 준공하였습니다. 총 세 번에 걸쳐 매립을 한 국전암시(菊田岩市)는 1909년에 마산으로 이주해 와서 국전(菊田)조선소를 경영했던 일본인입니다. 위치는 현 경민 아파트 자리로 그림의 A입니다 1940년 2월 15일 창포동 3가 5-14번지인 전 심건조선소(心建造船所) 건너편 주택지 437평을 교본육삼랑(橋本六三郞)이 매립하였습니다. 위치는 역시 경민 아.. 2013. 3.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9) - 강점제3시기 1933년 1월 25일 준공된 매립입니다. 위치는 현 경남대 앞 삼우상가와 월드프라자 빌딩 사이의 부지와 그 뒤쪽 횟집이 많이 있는 삼각형 블록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노란색으로 표시한 땅입니다. 면적은 속칭 번개시장 옆 삼각형으로 남아있는 부지 창포동 3가 7-1번지의 589평과 그 주변 일대에 해당되는 월남동 5가 4-1번지 23평, 월남동 5가 4번지 일대 1,596평을 합쳐 총 2,185여 평이며 도로까지 합친 면적은 3,300여 평입니다. 매립을 추진한 이는 일본 문사(門司 / 모지)에 거주하던 지전원차(池田源次)와 창포동에 거주하던 영삼구간(永森久幹) 두 사람입니다. 처음 매립권을 취득한 자는 경성에 살던 고영경일(高榮京一)과 영삼구간(永森久幹)이었지만 자금사정 때문에 고영경일(高榮京一)의 매립.. 2013. 2.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8)- 강점제3시기 -강점 제3시기의 매립-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마산 해안의 매립은 1930년대 들어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하이라이트가 1929년에 착공하여 6년 간 시공한 후 1935년 완공한 신포동의 중앙마산지역 매립인데 이 매립으로 그 동안 둘로 나누어져있던 마산의 도시공간이 지형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1931년 12월 4일 창포동 3가 1-1번지 801평이 매립되었습니다. 일본인 조선업자로 창포동 3가 5번지에 살던 국전암시(菊田岩市)에 의해 조선공장 부지조성을 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정부기록보존소에 보존된 「공유수면매립준공인가서 / 문서번호 87-969」에 의하면 토지소유권 취득자 통지서에 토지 취득 일자가 1932년 3월 25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비고란에는 도로․구거 및 호안석원(護岸石垣.. 2013. 2. 11. 마산만 매립해서 땅 장사하려는 기업들 성동산업 마산조선소가 취득한 마산 앞바다 공유수면 16,000평 매립권을 두고 장사꾼들의 농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작은 수년 전부터였습니다. 마산만 내만에 자리를 잡은 성동조선이 "사업을 일으키려면 바다에 접한 땅이 더 필요하다"고 요구하면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오염총량제 실시 이후 마산만의 매립은 더 이상 없을 것이었지만 성동조선의 요구에 대해서는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당시 마산에는 내놓을만한 기업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동조선이 사업을 일으키면 고용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매립을 해서라도 지역경제를 살려보라고 여기저기서 지원했습니다. 마산지역의 상공계를 대표하는 마산상공회의소가 직접나서서 “공유수면매립이 완료되면 연 매출액 1조원에 2천명의 고용이 발생할 것”이라면서 “기업이 .. 2012. 4.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1) - 강점제1시기 -일본인의 마산포 토지 소유- 남성동의 매립으로 1912년 당시 전체면적의 31.4%이던 일본인 소유 토지가 1920년에는 35.0%로 변했습니다. 매립 직후에는 매립시행자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이 전량 소유함에 따라 41.1%로 급증하였다가 35.0%가 된 것입니다. 이 시기 한국인들이 소유한 토지는 1912년 당시 63.2% 이었으나 1920년에는 62.5%로 줄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토지소유변화를 단순 비교하면 일본인 소유의 토지는 3.6% 증가하고 한국인 토지는 0.7% 줄어든 셈입니다. 아래 표는 1912년과 1920년의 마산포 토지소유 변화를 나타낸 것입니다. 구분 정부. 마산부 기업. 단체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게 필지수 5 10 853 271 18 1,157 비(%) 0... 2011. 10.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9) - 강점제1시기 1912년부터 1915년까지의 시기에 일어난 마산포의 대대적인 도로개설공사 결과, 그 때까지 자연발생 취락에서 생긴 꾸불꾸불하고 좁은 길을 자르면서 폭 8-10m의 직선형 도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때맞춰 시행한 매립지에서도 같은 크기의 도로가 개설되면서 두 지역의 도로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도로의 규모와 형태변화는 마산포(원마산) 도시구조에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마산포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모인 시기를 마산창이 개설된 1760년으로 볼 때 이것은 실로 150년 만의 대변화였습니다. 지난 주에 보았지만 다시 한 번 더 매립 후 달라진 마산포 도면을 보겠습니다. 매립과 도로개설 이전의 도면과 이후 도면입니다. 이 도면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에 동서방향으로 동성동에서 부.. 2011. 10.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8) - 강점제1시기 통감부 시절인 1907년경에 이미 마산포의 도로 폭을 조금 넓히거나 형태를 곧게 하는 가로개수 공사가 마산경찰서 주관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근대식 도로가 건설된 것은 1912년부터 1915년까지였습니다. 이 때 개설된 도로들을 사정토지대장에서 확인해 보면 1912년부터 1915년까지이지만 시기는 다양합니다. 도로의 개설 시기가 토지대장에 기록된 시기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3-4년 사이에 공사가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업으로 자연발생적인 좁은 골목길뿐이었던 마산포에 폭8m, 10m의 쭉 뻗은 새 도로가 신설되었습니다. 다음 도면은 도로가 개설되기 전의 마산포와 개설 후 모습, 그리고 도로개설 후인 1916년 지도에 나타나는 마산포 모습입니다. 두 번째 도면에서 직선으.. 2011. 10.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 2011. 9.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한가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강점 제1시기에 시행된 매립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에는 봉암동과 남성동 두 번의 매립 밖에 없었습니다. 매립이 시작되기 전, 마산의 해안에는 70m에서 200m에 이르는 간석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봉암동, 현 마산자유무역지역에는 최고 1㎞에 달할 정도의 대규모 간석지가 있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지도 중 마산만의 수심이 나타나 있는 것들을 보면 봉암 지역의 넓은 간석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보시죠. 연두색으로 표시된 지역으로 현재 마산자유무역지역입니다. 이런 간석지는 당시 마산포 주변의 주민들에게는 해산물을 제공하는 보고(寶庫)였지만 일제의 눈에는 얕은 수심이 경제적으로 매력 있는 매립 대상지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합방 직 후 곧장 매립.. 2011. 9.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마산포 최초의 수익용 매립- 馬山(1919年修正測圖) 1919년 / 육지측량부 / 조선총독부 / 1:10,000 / 柏書房 影印本 / 울산대 도서관 지난 주에 포스팅한 「馬山」을 보완한 지도입니다. 1916년 측도하여 1917년 발행했던 지도「馬山」을 1919년 제1회 수정측도하고 1924년 6월 25일 인쇄하여 6월 30일 발행한 것이 이 지도입니다. 따라서 이 지도의 도시상황은 1919년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저작권과 인쇄 및 발행자는 앞의 지도와 같습니다만 지도 가격은 인상되어 18전하던 것이 40전으로 많이 올랐습니다. 영인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삭제했는지 모르지만 이 지도에는 범례가 없다는 것이 앞 지도와 다릅니다. 지도에 나타나는 도시공간의 상황은 1916년 당시의 지도인 「馬山」과 거.. 2011. 9.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2) - 강점제1시기 -한일병합 직 후 제작된 마산인근 군사극비 지도- 1916년 / 육지측량부 / 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 / 1 : 50,000 / 1/50,000지형도 / 국립중앙도서관 확대해 보았습니다. 이 지도는 1906년에 측도하고 1921년에 축도제판(縮圖製版)하여 같은 해 11월 25일 발행된 지도입니다. 제작자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육지측량부․참모본부가 동시에 표기되어있으며, 제목은 「軍事極秘 (戰地ニ限リ極秘)」로 되어 있고 그 아래 진해만요새근방9호(共三十一面), 오만분일지형도 마산5호(共十五面)라고 기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용 지도인 것 같습니다 이 지도와 관련된 기록을 소개합니다. 1986년 일본인 청수정부(淸水靖夫)가 쓴 『日本統治機關作製にかかる朝鮮半島地形圖の槪要』라는 책에 나옵니다. 조선반도 1/.. 2011. 8. 22. 해양신도시, 지금이라도 다른 길 찾아야 여러 정황을 보아 머지않아 마산해양신도시의 토지이용계획이 확정될 것 같습니다. 가포신항만 준공일자가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통합창원시가 ‘옛 마산시에서 계획하던 34만 평을 19만 평으로 축소하여 섬 형으로 신도시를 조성할 계획이며 이제는 매립지의 토지이용 문제만 남았다’고 밝힌 지 몇 달이 지났습니다. 마산만 내만에, 그것도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섬 형으로 매립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고 다양한 해결책도 있었습니다만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통합창원시에서는 ‘고민과 노력을 다해보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라는 입장이지만 제 눈에는 중앙정부와 그 주변에서 정해주는 안을 그대로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원안이 최악이라면 지금 안은 차악입니다. 지난 3월 17일 해양신도시문제.. 2011. 8.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각국공동조계지를 건설할 때, 해안선의 경계는 해수의 간조선과 만조선을 고려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계지의 북단과 남단은 만조선이 깊어서 매립을 한 후 호안공사를 했으며, 중앙부 세관지역을 비롯한 호안선은 전부 매립이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매립여부가 잘 나타납니다. 노란선은 현재 시내버스가 다니는 간선도로인데 그림의 비교를 위해 그었습니다. 이 지도는 1899년 마산개항 때 각국조계장정에 첨부되었던 것입니다. 전체 조계지 중에서 1차로 조성할 부분이 표기되어 있는데, 마침 간조선(Low Water Line)과 만조선(High Water Line)이 표기되어 있어서 매립여부를 판단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 그림은 1916년 일본 육지측량부가 제작해서 발행한 같은 지역의.. 2011. 2.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 앞에서 포스팅한 '계획만으로 끝난 다섯 번의 매립시도' 와 달리 지금부터는 실제로 시행된 매립공사를 소개합니다 - 지금도 마산만의 매립 때문에 지역사회가 갈등하고 있습니다. 마산해양신도시 건설용 34만 평 매립 계획의 원안추진과 백지화를 두고 시민들의 찬반이 팽팽하고, 매립으로 조성된 가포신항부지의 용도변경문제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100년 넘게 지속된 마산만 매립, 그 최초의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불행하게도 마산만은 첫 매립부터 마산포 주민들의 의사와 아무 상관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마산만 첫 매립은 한반도 지배를 꿈꾸며 승승장구하던 일제의 군부가 저질렀습니다. 1904년-1905년 마산과 삼랑진을 잇는 철도 마산선의 출발점인 마산역 부지를 조성하기 위한 매립이었습니다. 원래 이 철도는 한국인이 .. 2011. 2.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마산도시변천사는 매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립은 마산의 도시규모를 키웠고 교통과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때로는 도시중심권을 이동시키기도 했습니다. 매립이 지도만 바꾼 것이 아니라 마산시민의 생활까지 바꾸었습니다. 특히 근대도시 형성기였던 일제강점기의 매립은 마산도시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키쳤습니다. 그러므로 마산만 매립에 대한 이해 없이는 마산도시변천과정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일찍부터 마산이 항만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는 마산만 주변을 둘러싼 자연조건, 즉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마산만의 위치와 피항에 적합한 지형 때문입니다. 멀리 고려시대 조창인 석두창(石頭倉)과 일본정벌을 꿈꾸었던 정동행성, 그리고 조선시대 마산창(馬山倉)에 이르기까지 왕조시대 조정에서 마산항을 중시한 까닭도 .. 2011. 1. 17. 마산해양신도시 '조정안을 제시하면서' 「마산해양신도시 건설사업 추진방향 조정위원회」의 책임을 맡아 고민 참 많이 했습니다. 이해당사자가 있는 일이라 어려움이 더 했습니다. ‘도시정책을 변경하는 이런 목적의 위원회가 두 번 다시 생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 수 없이 했습니다. 지난 10월 15일 조정위원회 마지막 회의에서 채택한 문건을 소개합니다. 조정안에 대한 ‘서문’ 성격의 글입니다. 위원회에서 채택한 후 위원들과 참관인 그리고 기자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낭독해 공개된 글입니다. 《조정안을 제시하면서》 마산지역의 도시미래를 결정짓는 해양신도시의 추진방향을 조정하면서 도시정책의 중도변경이 얼마나 많은 출혈을 요구하는지 실감하였습니다. 매립계획변경에는 거액의 비용이 필요했고,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 천혜의 마산만이 매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2010. 10. 27. 바다가 살아야 마산이 산다 바다가 있지만 바다를 활용하지 않는 유일한 도시. 도시지역에만 약 4킬로미터의 해안이 있지만 수변공간다운 장소를 한 뼘도 가지지 못한 도시. 그래서 해안도시라 차마 말하기 부끄러운 도시, 해안도시라 말할 수 없는 도시. 지도에서만 바다와 면했을뿐 시민들의 삶과 동떨어져 바다 제 혼자 있는 도시. 바로 마산 아닌가요. 해방 전에 이미 대부분의 해안이 매립되었지만 어느 곳에도 공공용지는 없었습니다. 해방 후 시행된 여러 번의 매립공사에서도 일본인들과 똑 같이 공공용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매립 때마다 제각기 자기 잇속 채우기 바빴습니다. 가장 최근의 매립은 80년대 이후 시행된 구항과 서항 매립이었습니다. 시기나 규모나 위치로 볼 때 마산도시를 획기적으로 바꿀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곧 위기라 .. 2010. 3. 29. 통합 앞서 마산시민이 해야 할 일 도시의 통합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우리들만의 일도 아니다. 유익하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합칠 수도 있고 나눌 수도 있는 것이 도시다. 마창진 통합은 당위성도 있다. 역사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 그리고 도시경쟁력의 측면에서 통합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통합을 통해 세 도시의 약점은 보완시키고 강점은 키울 것이다. 나아가 100만 도시의 위상에 맞는 새로운 발전 가능성도 제시될 것이다. 오래 기다려온 만큼 통합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비전이 크다. 하지만 창원 진해시민과 달리 마산시민들은 통합에 앞서 짚어 봐야할 것이 있다. 진해 창원과 달리 90%에 달했던 마산시민의 통합 찬성률에 대해서이다. 마산은 수백 년의 역사가 있는 도시다. 3·15의거, 부마항쟁 등 현대사의 격랑을 몸소 겪은 만큼 .. 2010. 2. 8. ‘현대아이파크’의 추억. 마산 앞바다 신포동 매립지에 현대아이파크 고층아파트가 우뚝 섰다. 짓기 전에는 몰랐지만 다 올라가고 난 지금, 많은 시민들이 혀를 찬다. ‘도시를 막았다’ ‘추산공원에서 돝섬이 보이지 않는다’ 말들이 많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돌이킬 수도 옮길 수도 없다. 도시와 건축은 그런 것이다. 비록 늦었지만 저 아파트가 지어질 당시를 기억해 보자. 오래된 일이 아니라서 기억이 생생하다. 시민들의 반대서명, 토론장에서의 날선 소리, TV공개토론 등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끝난 일인데 왜 다시 짚어봐야 하는가? 두 번 다시 이런 식의 행정을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기왕 지어진 건물, 옮길 수도 없으니 반면교사로라도 삼기 위해서이다. 현대아이파크 고층 아파트는 마산시가 이 아파트가 들어서면 도시가 .. 2009. 9. 18. 절망과 희망이 교차한 마산의 9월 12일 9월 12일 아침 10시 반, ‘태풍 매미 희생자 6주기 추모제’가 신마산 서항부두 옆 태풍매미추모공원에서 열렸습니다. 마산시장을 대신한 부시장 외에 마산에서 내노라하는 기관단체장들이 참석하여 엄숙하게 거행되었습니다. 모두들 표정이 무거웠고 웃음소리는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추모제단에 각계에서 보낸 조화가 늘어서있다 추모식장 곁에는 6년 전 태풍 매미가 몰고 온 참혹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는 시민들마다 혀를 차고 한숨을 지으며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던 6년 전 그날의 참상을 기억해내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 절망과 슬픔에 비통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2003년에 발생한 모든 태풍을 통틀어 가장 강력했고, 상륙했을 때의 위력은 그 때까지의 모든 태풍 .. 2009. 9. 14. '마산 해양신도시' 지금 중단해야한다 오는 11월 착공예정인 마산 앞바다 해양신도시는 재고되어야 한다. 이곳에는 마산도시를 바다와 단절시킬 고층 아파트 1만 가구가 계획되어 있다. 아파트 외에 다른 구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계획은 이로움보다 해로움이 많을 것 같다. 바로 잡아야 한다. 석 달 남았으니 아직 기회는 있다. 선진해안도시를 보라, 생산적이면서도 바다를 즐길 수 있는 고품격 수변공간이 얼마나 많은지. 가포에 항만공사를 하면서 발생할 준설토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도시정책이니 지금이라도 계획을 바꾸어야 한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첫째, 현 마산 도시상황에서 1만 가구의 대규모 아파트 건설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마산 곳곳에서 추진되는 재개발 사업은 총 48개 지역, 3만7000 가구이다. 이들.. 2009. 8. 11.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