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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창15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6) - 중성리에서 쿄마찌(京町)까지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1 중성리에서 쿄마찌(京町)까지 조선 중기, 대동법이 시행되자 해로가 연결되는 전국 각지에 조창(漕倉)이 설치 되었다. 경남에는 영조 36년(1760년)에 창원 마산창과 진주 가산창(駕山倉)이, 1765년에는 밀양 삼랑창(三浪倉)이 설치되었는데 마산창 관할구역은 인근 8개 읍이었다. 고려시대에도 마산포구에 석두창이란 조창이 설치된 적이 있었으나 이미 없어지고 이때 다시 신설되었다.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파출소 주변 1,700여 평의 부지에 총 8동, 53칸(間) 규모에 ㄷ자 형태로 바다 쪽을 향하고 있었다. 조창이 설치되자 먼저 관원과 상인들이 찾아들었고, 이들을 상대로 생업을 하기 위해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점차 동리를 이루었다. 동성, 중성, 오.. 2015. 1. 26.
마산·창원 역사읽기(5) -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5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창원이란 지명이 만들어진 것이 조선시대이다. 조선 태종대에 의창과 회원을 합쳐 창원이라 이름지었다. 부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도호부가 되었다. 선조 34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했다. 대도호부로의 승격은 임진왜란때 병사 겸 부사인 김응서와 그를 따르는 군인, 관인, 백성들이 한 사람도 일본에 항복하지 않았다는 체찰사의 장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과 벌였던 대표적인 전투는 노현 및 창원성 전투, 안민고개전투, 합포해전이 대표적이다. 칠원군과 합쳤다가 광해군 9년(1617)에 나누었다. 인조 5년(1627)에 진해와 합쳤다가 7년에 나누고, 현종2년에 전패를 잃었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1년에 다시 승격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이 지역은.. 2014. 6.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1) 지금까지 210회에 걸쳐 1945년까지의 마산 도시의 변천과정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살펴본 마산 도시의 변화과정을 각 시기별로 요약․정리합니다. 고려의 정종(靖宗, 1035-1046년 재위)대에 이르러 정부는 마산 해안에 조창인 석두창(石頭倉)을 설치하였습니다. 창(倉)의 위치는 오늘날의 남성동 부근에 있던 해안 지역으로서, 근대기까지 존속했던 동굴강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의 이런 추정과 달리 산호동 쪽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충렬왕 원년(1274년)에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마산에 정동행성을 두면서 이 도시는 군사 항구 도시로 변했으며,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의 국제도시로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조선의 영조 36년(1760년)에 조선 정부는 대동미를 운송할.. 2014. 4.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8) - 강점제1시기 통감부 시절인 1907년경에 이미 마산포의 도로 폭을 조금 넓히거나 형태를 곧게 하는 가로개수 공사가 마산경찰서 주관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근대식 도로가 건설된 것은 1912년부터 1915년까지였습니다. 이 때 개설된 도로들을 사정토지대장에서 확인해 보면 1912년부터 1915년까지이지만 시기는 다양합니다. 도로의 개설 시기가 토지대장에 기록된 시기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3-4년 사이에 공사가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업으로 자연발생적인 좁은 골목길뿐이었던 마산포에 폭8m, 10m의 쭉 뻗은 새 도로가 신설되었습니다. 다음 도면은 도로가 개설되기 전의 마산포와 개설 후 모습, 그리고 도로개설 후인 1916년 지도에 나타나는 마산포 모습입니다. 두 번째 도면에서 직선으.. 2011. 10.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7) - 강점제1시기 오늘부터는 1910년대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에는 세 가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남성동 매립. 마산창의 철거. 그리고 근대식 도로개설입니다. 남성동 매립에 대해서는 이미 직전 '매립'부분 (2011/09/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에서 포스팅했기 때문에 생략하고 오늘은 마산창 철거, 다음 주는 근대식 도로개설에 대해서 올리겠습니다. 1913년, 마산창이 자리 잡고 있던 1,500여 평의 정사각형 땅에 격자형의 8m, 10m 도로가 뚫려 세 토막으로 잘리고 잘린 땅들은 수십 평 규모로 낱낱이 분할되었습니다. 그리고 1760년 개창한 이래 150여 년 동안 우리 지역에서 위계상 가장 높은 지위로 위풍당당했던 마산창 본당 유정당(惟正堂.. 2011. 9.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1910년대에는 마산에 도시변화가 많이 없었던만큼 건축공사도 많이 없었습니다. 종교시설과 일부 교육시설만 약간 들어섰습니다. 개항기에는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한 관아시설들이 주로 건설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개항기에 지어 놓은 건물들의 증․개축이 많았으며 관아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업용 건물이 많았습니다. 또한 목조건축물이 많았던 이전과 달리 이 시기부터는 벽돌을 이용한 조적조 건축물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신마산에 집중되었던 건물들이 서서히 원마산 쪽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 장군천 이북에 지방법원지청이 들어섰고 현 마산시청 자리에 전기회사가 들어오는 등 공공건물들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일대(옛 마산시청부근)가 신마산의 마산포 진출이라는 의미 외에 마산포와 신마산.. 2011. 7.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2) - 개항이후 -마산포의 길- 포구를 끼고 발생한 마을의 경우, 마을 규모가 작을 때는 한 개의 선창을 중심으로 단순하지만 마을 규모가 클 때는 몇 개의 선창을 연결하는 주도로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길들이 형성됩니다. 마산포의 경우는 후자처럼 창원가도(昌原街道)를 중심으로 수계(水系)와 능선 그리고 등고선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얼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난 회에 올렸지만 다시 한 번 마산포 복원도를 보겠습니다. 남성동 파출소 일대, 즉 조창지 부근지역은 조창과 관련한 관리들 거주지 혹은 조창관련 건물들 탓에 계획된 도로로 보이는 직교격자형이 많았습니다. 이 지역은 한일병합 이후 근대식도로가 개설되면서 금융 등을 비롯한 새로운 산업시설을 담당하는 마산포의 중심공간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와 달리 인구 증가와 함.. 2011. 4.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오늘부터 마산포(원마산)의 옛 모습에 대해 7회로 나누어 포스팅하겠습니다. 근대적인 계획도시였던 신마산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전통도시 원마산의 사정은 사뭇 달랐습니다. 당시 마산포(원마산)의 규모입니다. 1900년-1910년 경 마산포는 인가(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했으며 2,000여 호의 재래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상점가는 주로 해변에 면해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중심부인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에는 정사각형의 1,500여 평의 부지에 150여 년 동안 존속해 온 마산창이 개항과 함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변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마산창은 100여년 전까지 존재했던 건물로서 규모․위상․역사성이란 측면에서 가장 상위의 관아였습니다. 마산창에 대해서는 에서 이미 소개하였습니다. .. 2011. 3.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일제는 그들의 편의에 따라 도시지역의 행정구역 최소단위를 ‘정(町, 마찌)’이라는 일본식 명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산창(馬山倉) 설치 후 생겼던 마산포의 6개리도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 글은 마산의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총독부를 개청한 1910년 10월 1일 하루 전날인 9월 30일,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과도기적 지방통치기구를 확립하였는데 거기에 동리명의 변경에 관한 지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변경방법은 그 때까지 사용되던 행정구역의 최소단위인 ‘동’과 ‘리’의 명칭을 일본식이나 한국식 중 어느 것이나 택하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본인이 행정책임자가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통 일본 세상이었던 때라 종래의 한식(韓式) 동리명이 채택되.. 2011. 2.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마산도시변천사는 매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립은 마산의 도시규모를 키웠고 교통과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때로는 도시중심권을 이동시키기도 했습니다. 매립이 지도만 바꾼 것이 아니라 마산시민의 생활까지 바꾸었습니다. 특히 근대도시 형성기였던 일제강점기의 매립은 마산도시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키쳤습니다. 그러므로 마산만 매립에 대한 이해 없이는 마산도시변천과정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일찍부터 마산이 항만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는 마산만 주변을 둘러싼 자연조건, 즉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마산만의 위치와 피항에 적합한 지형 때문입니다. 멀리 고려시대 조창인 석두창(石頭倉)과 일본정벌을 꿈꾸었던 정동행성, 그리고 조선시대 마산창(馬山倉)에 이르기까지 왕조시대 조정에서 마산항을 중시한 까닭도 .. 2011. 1.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개항 당시 각국거류지에는 러·일 영사관 건물 외에 러시아와 일본 민간인의 건물 몇 채만 있었을 뿐, 일본인 대부분은 한인거주지인 마산포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9년에 건축한 러시아 영사관 건물입니다. 마산이사청과 함께 지은 마산 최초의 2층 건물로 조계지 언덕에 걸터 앉은 모습이 위용 당당합니다. 경남대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옆에 있었습니다. 조계지 내에서 경제활동을 했던 러시아인들은 조계지내의 대지주이면서 무역업과 러시아군함에 대한 잡화용달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석이나 기와로 된 주택을 직접 지어 살았습니다. 1900년 연말 현재 조계지 내 러시아인 건물은 모두 6동이었으며 그 중 한 채는 건평 80평으로 호텔업을 목적으로 건축 중이었는데 조계지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위치는 조계지.. 2010. 11.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조용했던 마산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조창에서 일을 보는 관원은 물론 인근 지역 관원들의 왕래까지 잦아지고 여각(旅閣), 객주(客主) 및 강경상인(江京商人)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해로와 육로의 접점이니만큼 시장으로서의 지정학적 조건도 좋았지만, 17-18세기 인구증가로 비농업인구가 급증하여 임노동자들이 도시에 집중하는 등 조선조 후기에 발생한 '봉건적 사회질서의 붕괴'가 마산포를 도시화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마산창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민가도 들어섰습니다. 동성리·중성리·오산리·서성리·성산리·성호리, 지금도 대부분 동명으로 이름이 살아있는 6개리가 이 때 형성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마산 도시구조의 주심부(主心部)인 이들 6개리가 오늘날 마산이라는 도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처.. 2010. 6.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조선은 태조 재위 중 고려 때 실시하였던 조창제도를 거의 복구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전국 아홉 개 조창에서 세곡을 수납했습니다. 내륙 수로로 연결되는 조창이 충주의 사흥창(司興倉)․원주의 흥원창(興原倉)․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황해도 백천(白川)의 금곡포창(金谷浦倉)․강음(江陰)의 조읍포창(助邑浦倉)의 다섯 개였고, 바닷길이 연결되는 조창은 충청도 아산(牙山)의 공세관창(貢稅串倉)․전라도 용안의 덕성창(德成倉)․영광의 법성창(法聖倉)․나주의 영산창(榮山倉) 네 개였습니다. 경상도의 세곡은 충주의 사흥창에서 수납하였습니다.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조운제도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조선(漕船)의 빈번한 침몰사고와 민간인에게 운임을 지불하고 운송하는 임운(賃運)이 생기면서 조창의 기능은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이에.. 2010. 6.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조선시대 조창인 마산창은 위치와 규모 등 관련 내용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석두창(石頭倉)의 중요성도 결코 조선시대 마산창 못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두창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그 위치도 밝히지 못한 채 몇 가지 가설만 나와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주장된 석두창 위치에 대한 가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석두창 위치 비정은 모두 세 가지인데 모두 그 근거와 논리가 좀 복잡합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 일이니 그도 그럴 것입니다. 세 주장의 결론만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볼 수 있도록 자세한 내용은 이 글 뒤에 별도로 붙여 놓았습니다) 첫 번째는, 몇몇 문헌(마산시사, 창원군지, 박희윤, 이.. 2010. 5. 10.
마산도시의 발원지 「마산창(馬山倉)」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 참여, 세 번째 도시 탐방에 나섰다. 낯익은 사람, 낯선 사람 모두 30여 명이었다. 평안안과 건너 편 창동 입구에서 걷기 시작해 처음 머문 곳이 마산창, 시간은 250년 전 영조 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 마산포는 고려시대 조창이었던 석두창과 고려 말 몽고군의 일본정벌 시도로 북적인 적도 했으나 조선시대 중기에는 조용한 포구였다. 마산포에 다시 사람이 모인 것은 대동미의 수납과 운반을 위한 조창, 즉 마산창(馬山倉) 때문이었다. 조용했던 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정기시장이 섰고, 전국의 다양한 상품들이 몰려왔다. 조창과 관련있는 관원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도 마산포를 찾았다. 그리고 이들과 마산포 인근주민들의 왕래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민가가 들어섰다. 동성·중성·.. 2009.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