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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25. 00:00

새로움을 꿈꾸며 - 2 / 내부 고발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용기, 내부고발>

 

의인인가 배신자인가?

사회에서는 의인으로 칭송받지만, 동료에게는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내부고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며 왜 그런 결단을 하였을까.

내부고발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비리를 외부에 폭로하거나 신고하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를 바꾼 닉슨 대통령 워터게이트사건, 황우석 줄기세포 논문조작,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을 야기한 최순실 국정농단. 모두 내부고발로 시작되었다.

바깥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은밀한 곳에 숨겨졌던 것, 내부자가 아니고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베일 속의 비밀이었다. 공익을 위한 한 사람의 위대한 용기가 이 비밀을 세상에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내부고발은 공익신고자라는 사회적 평가와 달리 조직에서는 배신자로 치부된다.

실제로 내부 고발자 상당수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각종 불이익을 당했다.

조직에서는 축출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쫓겨난 후에도 배신자라는 굴레를 씌워 재취업마저 힘들다. 사회적 매장 상태, 정 맞은 모난 돌 신세가 된다.

 

 

이런 현실은 군대에서 하는 소원수리에 그대로 드러난다.

조직문화 개선을 위해 하급자의 불만을 무기명으로 적어내라지만 의도대로 잘되지 않는다. 솔직한 건의보다 상급자 칭찬이나 군 생활에 만족한다는 등의 형식적 글이 대부분이다.

불만이 없어서가 아니다. 비밀보장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말했다가 보복을 당한 선례를 병사들이 먼저 알고 있다.

최근 들어 부패와 비리의 수법이 날로 은밀화·지능화되고 있다.

외부기관의 감시만으로는 이를 적발하고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고도화된 비리에는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내부인의 정보제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공익신고는 배신이 아니다.

투명성과 신뢰성을 강화시켜 조직을 살리는 일이며,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용기다. 선진국일수록 공익신고가 많고, 이에 대한 인식수준이 높은 까닭도 그 때문이다.

2011년 '공익신고자 보호법'이 제정되었다.

신고자를 보호하고 그로 인한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법이다. 그 결과가 공공의 재정적 이익을 가져온 경우 거액의 보상금까지 지급한다.

그러함에도 이 법에는 약점이 많다. 금융실명거래법, 형법, 상법 등 대기업이 관련될 만한 비리가 대상에서 빠져있다. 때문에 법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법보다 앞서 필요한 것은 사회인식이다.

네덜란드의 한 컨설턴트가 '과속으로 교통사고를 낸 친구가 허위증언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진실을 말하겠다는 사람이 캐나다, 영국, 스웨덴 등에서는 90% 이상, 프랑스와 스페인은 60%대였지만 우리나라는 26%였다.

사적 의리가 공적 정의를 압도했다. 정실을 중시하는 우리 모습을 반영한 결과지만 이런 인식이라면 청렴사회는 요원하다.

개인적 이익을 계산하며 공익신고를 하는 이는 없다. 신고 뒤 불어닥칠 후폭풍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단시킨 것은 오로지 공리적 정의감이다.

그런 점에서 공익신고자의 용기 있는 결단을 기리는 '공익신고자 명예의 전당' 건립을 제안한다. 그것으로라도 그분들의 용기와 정의에 감사하고 싶다.<<<

 

<경남도민일보(2018. 10. 29)에 게재되었던 글을 일부 첨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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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8. 00:00

새로움을 꿈꾸며 - 1 / 고소득은 선진국?

오늘부터 8회에 걸쳐 '새로움을 꿈꾸며'라는 주제로 포스팅한다. 2018년과 2019년 경남도민일보에 기고했던 글을 첨삭하였다. 원래 제목은 '청렴사회를 꿈꾸며'이다.

 

<소득만 높다고 선진국 되는 것 아니다>

 

두 전직 대통령이 옥에 갇혔다. 일을 도왔던 고위공직자들도 형을 살고 있다. 그룹총수인 재벌들도 재판 중이다. 자신의 권한을 부당하게 사용하여 사적 이익을 취했거나 사회질서를 교란한 한국사회 지도층의 민얼굴이다.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다. 부정한 용도로 사라지는 돈이 한국기업은 매출액의 10%, 미국은 5%라는 추정까지 있다.

국제투명성기구가 180개국을 대상으로 발표한 국가별 부패인식지수에서 우리나라는 2018년 45위, 2019년 39위였다. 2017년 51위에 비해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멀었다.

국가청렴도 평가가 이렇듯 국민의 공직자와 공공기관에 대한 인식은 냉혹하다. 예외가 아닌 곳이 없다. 청렴도가 국가신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시댄데 가야 할 길이 멀다. 현 정부가 국정과제로 집권 중 20위권을 목표로 내걸었지만, 정부 노력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부패는 정녕 치유될 수 없는 것일까? 주어진 일을 하고 일한 만큼 보상받고 그 보상만으로도 행복한 세상은 불가능할까?

돈과 출세에 절박한 사회에서 부패를 막을 길은 없다.

부패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사회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끝없는 경쟁 속에 전개되는 금전만능 사회는 필연적으로 부패를 배태한다.

그런 점에서 부패는 사회적 산물이다. 미래는 각자 알아서 스스로 대비해야 하고, 돈 외에 어떤 것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사회에서 부정과 부패는 필연적이다.

부패는 부정(不正)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의 선택이다.

책임지지 않는 공권력과 부도덕한 경제력으로 대별된다. 소시민들의 생활에도 흠결은 있겠지만 권력 부패에는 견줄 바 아니다.

노동 없는 부, 도덕 없는 경제, 원칙 없는 정치는 나라를 망하게 한다. 간디의 말이다.

소득만 높아진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은 선진국민이 만든다. 누구나 원하지만,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촛불혁명으로 세운 정부라 기회가 좋다. 촛불을 들었던 그 손으로 부패의 사슬마저 끊어야 한다. 촛불혁명의 진정한 완성은 청렴사회다.

해낼 수 있을까 반문하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우리는 안 된다'고 포기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청렴사회는 어렵다고 포기해버릴 일이 아니다.

부패는 들판의 풀과 같다. 양의 차이가 있을 뿐 풀이 안 날 수는 없다.

문제는 어떻게 관리하느냐이다. 차별 있는 청렴사회는 없다. 엄중하되 공정한 잣대가 필요하다. 다수가 공존하는 복잡사회에서 준법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행복지수와 부패인식지수 둘 다 최상위권인 덴마크도 처음부터 그런 나라는 아니었다.

그룬트비의 바람대로, 덴마크 국민은 서로를 사랑했고 나라를 사랑했고 나라의 법과 제도를 사랑했다.

나라는 '부자를 많이 만드는 것보다 가난한 이를 적게 만드는' 정책을 펼쳤고 덴마크 국민은 나라의 정책을 사랑하고 따랐다. 그 노력이 오늘의 덴마크를 탄생시켰다.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인간이 1마일(1.6㎞)을 4분 안에 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54년 영연방체육대회에서 의학도였던 아마추어 육상선수 로저 베니스터(위 사진)가 3분 59초 4로 4분 벽을 넘었다.

그러자 한 달 후 1명, 1년 후 27명, 2년 뒤 300명이 따라 넘었다.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의 힘이었다. 새로운 사회, 청렴사회로 가는 길도 이와 같다.<<<

 

<경남도민일보(2018. 10. 16)에 게재되었던 글을 일부 첨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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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16. 00:00

코로나19가 가져다준 선물

이 글은 청란교회 목사이며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사진)가 3월 12일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되새겨볼만한 내용이라 옮겨 포스팅합니다.

 

나는 배웠다.

모든 시간은 정지되었다. 일상이 사라졌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만나도 경계부터 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마주 앉아 팥빙수를 겁 없이 떠먹던 날이 그립다. 가슴을 끌어안고 우정을 나누던 날이 또다시 올 수 있을까? 한숨이 깊어진다. 비로소 나는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한다. 속히 일상의 기적과 함께 기적의 주인공으로 사는 일상을 달라고.

나는 배웠다.

마스크를 써 본 뒤에야 지난날의 내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고 침묵을 배웠다. 너무나 쉽게 말했다. 너무 쉽게 비판하고 너무도 쉽게 조언했다.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경박했다. 나는 배웠다. ‘살아있는 침묵’을 스스로 가지지 못한 사람은 몰락을 통해서만 ‘죽음으로 침묵’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배웠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성직자도 아니었다. 소식을 듣자 대구로 달려간 신혼 1년 차 간호(천)사가 가슴을 울렸다. 잠들 곳이 없어 장례식장에서 잠든다는 겁 없는 간호(천)사들의 이야기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따뜻한 더치커피를 캔에 담아 전달하는 손길들을 보며 살맛 나는 세상을 느꼈다. 이마에 깊이 팬 고글 자국 위에 밴드를 붙이며 싱긋 웃는 웃음이 희망 백신이었다. 나는 배웠다. 작은 돌쩌귀가 문을 움직이듯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저들의 살아있는 행동인 것을.

나는 배웠다.

죽음이 영원히 3인칭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언젠가 내게도 닥칠 수 있는, 그래서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죽음인 것을 배웠다. 인간이 쌓은 천만의 도성도 바벨탑이 무너지듯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미생물의 침투에 너무도 쉽게 쓰러질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배웠다. 그런데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악다구니를 퍼붓고 살았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를 배웠다.

나는 배웠다.

인생의 허들경기에서 장애물은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라’고 있는 것임을.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재정의하고 살아남아 영웅이 될지, 바이러스의 희생양이 될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닥친 불행과 시련을 운명이 아닌 삶의 한 조각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때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었다.

나는 배웠다.

카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북아프리카의 항구 오랑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배척,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지옥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최대 피해 지역인 대구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었다. 침착함과 고요함이 버티고 있었다.’(미국 ABC 방송 이언 기자) 일본의 대지진 때 일어났던 사재기도 없었다. 오히려 ‘착한 건물주 운동’으로 서로를 감싸 안았다. 외출 자제로 인간 방파제가 되어 대한민국을 지켰다. ‘배려와 존중’으로 빛났다. 나는 위기에서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고 극한 상황에서 ‘도시의 품격’이 확인된다(이동훈)는 것을 배웠다.

나는 배웠다.

어떤 기생충보다 무섭고 무서운 기생충은 ‘대충’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대충이었다. 손 씻기도 대충, 사회적 거리 유지도 대충, 생각도 대충…. 이번 사태에도 너무 안이했다. 이제는 나 스스로 면역주치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환경 문제나 생태계의 파괴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다시 찾아올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해 두 눈 부릅뜨고 환경 지킴이가 되어야 한다. 나는 확실히 배웠다. 공생과 공존이 상생(相生)의 길이라는 것을.

나는 배웠다.

가장 큰 바이러스는 사스도 코로나도 아닌 내 마음을 늙고 병들게 하는 절망의 바이러스라는 것을. 나는 배워야 한다. 아파도 웃어야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아니 그게 진정한 인간 승리임을. 나는 기도한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안코라 임파로!(Ancora imparo!)”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는 이탈리어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스케치북 한쪽에 적은 글이란다. 87세 때 일이다. 내 나이 겨우 60을 넘겼다. 그래,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한다. 잘 살기 위해 배워야 한다.

“안코라 임파로! (Ancora imparo!)”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살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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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9.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2

본 회까지 총 12회에 걸쳐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포스팅하였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Ⅴ.맺음말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 두어 가지를 언급하면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이교재(우측 사진)의 사망 상황과 관련된 것이다. 현재까지는 옥사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예컨대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중 1차 피검 당시의 전신타박과 고문의 여독으로 49세의 일기로 옥중에서 정돈”이라는 1954년 4월의 이교재댁 방문 기사가 그렇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이보다 7년 뒤에 동일한 신문사에서 작성한 이교재의 추도식 관련 기사에는 “진주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는 추도문을 전하기도 하였다.(「죽헌 이교재 열사, 32주기 추도회, 4월 17일」, 마산일보, 1961년 4월 1일자)

이보다 10여 년 뒤에도 변지섭은 “1931년 사명을 띠고 입국, 진주의 허만정, 달성의 문대효, 창녕의 성낙문 등 부호가를 역방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事露하여 마산경찰서에 피검, 부산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영면”하였다고 기술하였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8쪽. 그러나 문대효, 성낙문 등 부호가를 역방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피검되었다는 기술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각종 문건이 세상에 드러난 이후의 사실을 과거에 소급하였기 때문이다. 이교재는 문대효나 성낙문을 방문하지 못하였다)

이 기술은 사실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이교재는 위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채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설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망 직후에 나온 신문 보도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교재의 사망 직후 동아일보는 「이교재씨 영면」이라는 제목 아래 “신유년 통영 사건으로 6년간의 철창생활을 겪고 나온 후 이래 10수년간을 해내외로 다니며 많은 활동을 하던 斗山 이교재씨는 풍상에 받은 악질로서 수년 동안 신음하던 바 불행히 지난 12일에 씨의 고향인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영영 이 세상을 이별하였다 한다.

유족으로는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고, 다만 80노모와 미망인 홍씨가 있을 뿐이라 한다”고 그의 부음을 전하였다.(「이교재씨 영면, 신유년통영사건으로 옥고 후 신음 중」, 동아일보, 1933년 3월 1일자)

“풍상에 받은 악질로서 수년 동안 신음하던 바.. 자택에서 세상을 이별”이라고 한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수년간 병으로 신음하였고, 마침내 악질로 인해 자택에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만 ‘신유년 통영사건’이라거나 ‘6년간의 철창생활’은 잘못된 설명이다.

통영사건은 신유년(1921)이 아니라 1923년(임술)에 있었으며 감옥생활 역시 4년이었기 때문이다.

부산교도소라든가 옥사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가족으로는 부인과 노모 외에 8살 된 딸이 있었으나, 이 역시 빠트렸다.

따라서 이 신문기사에는 세 가지 정도의 오류가 있지만 죽음과 직접 관련되는 오류는 아니다.

이교재의 사망과 관련된 최초이자 당시의 기사라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와병 중에 사망하였다는 사실은 김구의 백범일지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해방 이후 삼진의 이교재 묘소를 참배하고 유족들을 만난 뒤의 글에 따르면, “과거 상해 체류시 본국으로 파견하여 운동하다가 옥중 고문을 받고 결국 그 여독으로 세상을 떠난 이교재 지사의 유가족을 방문, 위로” 하였다는 것이다.(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417쪽)

와병의 원인을 각각 악질과 고문의 여독으로 약간 달리 보았지만, 악질 역시 고문의 후유증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두 종류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부산교도소 수감되었다거나 옥사하였다는 이야기는 결정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믿기 어렵다.

진전면에 소장된 범죄인명부에도 이 사실이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와병 중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또한 그의 사망 뒤 집이 경매에 넘어갔을 정도로 경제 사정은 극히 어려웠다. 당시의 건물등기부에 따르면,(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건물등기부, 고유번호 1901-1912-162796. 2017년 10월 24일 발행) 이교재의 집은 그의 사망 직후인 1933년 3월 20일에 馬山府 萬町(오늘날의 동성동, 필자)에 사는 川崎泰次(가와사키는 함안군의 일본인 토지소유 중 11,197평으로 전체 25,305평 중 약 44%를 차지한 지주였다-이정은, 「경남 함안군 3.1독립운동」, 122~123쪽)에게 4백엔에 저당 잡혔으나 빚을 갚지 못해 경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통영에 사는 朴喜鎣(박희형은 통영에 있는 하동집 박진영의 장손이고 통영군자금사건에 연루되었던 박성숙의 조카이다. 통영사연구회 회장 박형균의 증언에 따른다. 박형균은 박희영의 아들이다-2019년 4월 1일 인터뷰)이 이를 갚으면서 경매가 취하되었고, 최종적으로 그 집은 이교재의 모친인 金受室에게 유산으로 상속되었다.(김수실은 이교재의 모친이었다. 이교재의 손부인 조혜옥의 증언에 따른다-2019년 3월 27일 인터뷰)

이러한 어려움이 그의 유족으로 하여금 동대 마을을 떠나 도산 마을로 이주하게 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도산 마을을 방문한 김형윤은 ‘한두 섬의 저축이 있을 리 없는’ ‘불행한 혁명가’로 묘사하였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자)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교재의 독립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초기의 독립운동에서 마지막 단계까지 초지일관 해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영역의 확대와 심화가 두드러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10년대 직후의 초기 단계에서 이교재는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삼진 지역의 3.1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넘어서 진주지역으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량이나 형명으로 본다면 단순 참가가 아닌 주도자의 역할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상해 망명 직후에 전개된 것으로, 주요 임무는 국내에 밀입국하여 군자금을 모으는데 진력한 일이었다.

통영에서 항일적 지사와 인척을 통해 군자금을 모으는 임무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간 이 지역에서 구축한 그의 조직 능력과 군자금 모금에 대한 그의 책임감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이 시기의 임정은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이교재와 같이 헌신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임정이 1931년 9월에 시작된 중국 동북침략전쟁(만주사변)을 반침략전쟁의 중요한 기회로 삼고 이봉창·윤봉길 의사들의 거사를 통해 광복을 도모하던 때에 국내에 파견되어 그에 호응하는 조직을 갖추면서 준비하던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이교재가 1931년 11월 말 이후 입국시 휴대하고 들어온 9개의 문건은 임정의 광복계획과 그에 따른 이교재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휴대한 문서에 따르면 창녕·밀양·진주·달성 등 경상남북도 지역에 임정의 후원망이 있었고, 이교재는 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활용하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임정 설립 직후 구축한 연통제나 교통국이 일제의 단속에 의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교재는 특파원으로서 이 과업을 수행하였으니, 임정의 국내연락망은 1930년대에도 여전히 살아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두 번째의 의미는 이교재가 그의 본거지이자 초기 활동무대였던 경남과 상해의 임정이라는 두 지역을 연계하면서 임정이 추구하는 조국광복이라는 광대한 목표를 지역이라는 맥락 속에서 실천했던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의미는 임정에서 부여한 군자금 모집에 많은 힘을 기울였고, 독립운동의 방법론과 조직화에 큰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였다는 점이다.

해방 뒤에 김구가 이교재의 묘소에 와서 남긴 말은, 단순한 상찬을 넘어서 그의 업적을 정확하게 평가한 것이었고, 임정문서를 휴대하고 입국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투고일 : 4월 22일 심사일 : 5월 17일 게재확정일 : 6월 3일

주제어 : 이교재, 창원 진전면 오서리, 경행재, 3.1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 통영군

자금모금사건, 이교재임정문서

 

<참고문헌>

마산일보.

민주중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조선총독부 관보. 대한민국임시정부, 「이교재 상주대표 위임장」, 대한민국 13년 11월 2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달성 문장지 추조문」, 대한민국 13년 10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달성 문대효 특발문」, 대한민국 13년 10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밀양 황상규 추조문」, 대한민국 13년 10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창녕 성낙문 특발문」, 대한민국 13년 10월 3일. 조완구·김구, 「김관제·윤상태 台照 편지」, 대한민국 13년 11월 20일. 이시영, 「김관제 수신 편지」, 대한민국 13년 11월 20일. 대구복심법원, 刑事公訴事件簿, 大正 13년(1924),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 16705.

대구복심법원, 執行原簿, 大正 8年(1919)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6752.

마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 刑事公訴事件簿 1-1, 大正 12년(1923),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8428.

「騷擾に關する件(第7報)」, 大正8年 騷擾事件に關する道長官報告綴 7冊內の7, 문서번호, 「慶南地親第491號朝鮮總督府 內秘補 1358」.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건물등기부, 고유번호 1901-1912-162796.

2017년 10월 24일 발행.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발행, 폐쇄등기부 증명서고유번호 1901- 1996-359486, 2017년 10월 21일 발행. 慶尙南道 警察部, 慶南高等警察部高等警察關係摘錄 1919-1935, 1936.

權五翼, 素波閑墨, 소파 권오익박사 환력기념논문집간행회,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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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1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4)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상해격발」이라는 문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상화 소장 「상해격발」 참조.)

비단 위에 인쇄된 이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큰 주제는 ‘建國記念日建國對策建議案’이다. 현재 존재하는 임정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건의안인 셈이다.

격발의 대상은 국내와 韓僑를 포함하는 모든 선생이며, 이를 위해 특파원으로 李中光을 임명한다는 것이다. 건의안은 크게 임시정부 사명과 특파원 임무로 대별된다.

임시정부 사명에는 ‘建國策定衆議, 議會出席豫期, 議會日當通告, 各自集會決議, 統合機關組織, 戰務俱體議定’ 등 7개항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특파원의 임무는 ‘使命宣傳, 大勢宣傳, 黨員組織, 別隊組織, 戰資豫約, 交通部立, 交涉報告, 抗議報告’ 등 8개 항목이다.

요컨대 임정에서는 건국대책을, 의회에서는 항시 준비를, 각 기관과 조직을 통합하면서 戰務에 구체적으로 대비할 것을 사명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특파원들은 大勢, 곧 ‘일중대사변’으로 인해 광복의 기회가 이르렀다고 선전하는 일과 새로운 조직을 갖추면서 전쟁비용을 예비하고, 교섭이나 항의 사항을 보고하는 임무 등을 부여하였다.

이 과업을 수행할 특파원인 李中光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국내와 일본까지 활동범위에 넣고 있는 것으로 보아 특파원 중에서도 최상위의 요인이 아닐까 하지만, 현재까지 어떠한 독립운동 자료에도 검색되지는 않는다.

특파원 임무를 총괄하는 만큼 각 지역이나 각 업무에 맞는 특파원들도 있었을 것이나 이 역시 확인되지는 않는다.

여하튼 이 문건의 존재는 임정에서 새로 출현한 동아시아의 정세에 따라 국내외에서 총궐기하도록 격문을 만들었다는 점이고, 이것을 이교재에게 휴대하고 입국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이교재(위 사진) 역시 이러한 과업을 수행할 특파원이었고, 나아가 임정과 국내의 독립 세력을 연계하는 역할도 떠맡은 다중적 특파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것은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몇 가지 중요사항을 위임한다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위임장이다.(원본은 이상화가 소장하고 있으며, 복사본은 창원시 진전면 애국사당에 전시되어 있다.)

발행일은 대한민국 13년(1931) 11월 20일, 발행인은 임정의 내무장 조완구와 재무장 김구이다.

두 사람의 친필 사인이 쓰여 있고, 또 두 부서의 관인까지 찍혀 있어서 임정에서 발행한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임정은 이 위임장에서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다음의 몇 가지 중요 임무를 위임하였다.

1) 유지자 연락에 관한 일,

2)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적 지방조직을 행할 일,

3) 정부에 대한 특수헌성을 권행케 할 일 등 세 가지이다.

유지 연락, 비밀스런 독립조직, 그리고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도록 권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진 임무였다.

문제는 임정이 이러한 중차대한 임무를 왜 이교재에게 맡겼는가 하는 점이다.

독립 이후 진전의 이교재 묘소를 참배한 김구에 따르면(허성진,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 이교재」, 마산 창원 역사읽기, 불휘, 2003, 145쪽. 김구 선생이 진전면 이교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 때는 1946년 9월 17일이다. 진전면 임곡리 이교재묘 비석 참조) “그는 독립운동의 방법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관해 능력이 탁월하였고, 국내 주재 조직 및 독립운동 자금 모금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서 장관 몇 명이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였다고 술회하였다.

곧 독립운동의 방법과 조직화, 그리고 운동자금 모금에서 탁월했다는 것이다.

위임장을 작성할 당시 김구의 직책이 재무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임정에 필요한 부분은 특히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이에 적합한 인물로 이교재를 선택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요컨대 임정에서 위와 같은 능력을 갖춘 이교재에게 맡긴 책무는 네 가지 정도였을 것이다.

문서전달, 독립운동 자금 확보, 독립에 필요한 비밀조직, 거사 시의 가능성 타진 등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라는 직함을 부여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국내에서 이교재가 주어진 일을 추진하는 증명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중대한 임무를 부여한 일종의 특명서였다고 할 수 있다.

활동영역은 경상남북도이고, 따라서 해당 문건들을 전달하려는 대상 인물들도 숙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몇 차례의 감옥행으로 기록된 그의 독립운동 행적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감옥행은 드러난 것이지만 식민당국에 알려지지 않게 활동한 각종 행적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 준다.

김구가 이교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고 유가족을 위로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렇다면 임정에서는 왜 그 시기에 이교재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하였을까.

이를 위해서는 임정의 독립운동은 국가간의 전쟁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임정 출발 자체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였고, 조국의 광복은 일본의 패망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말하자면 일제의 패망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반침략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제2차 대비는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이었다.

앞의 특발문이나 김관제와 윤상태에 보낸 편지에서 확인되었듯이 만주사변은 일본을 패망에 몰아넣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이에 따라 임정은 1932년 전반기에 6건의 거사를 실천에 옮겼거나 준비하였으며 이는 반침략전쟁의 성격을 내포한 것이었다.

6건의 거사는

① 이봉창의 도쿄 의거(1932. 1. 8),

② 상해주둔 일본군사령부 폭파계획(중국인 용병- 실패, 1932. 2. 12),

③ 윤봉길 등의 상하이 일본비행장 폭파계획(좌절, 1932. 3. 3),

④ 이덕주·유진식의 조선총독 공략(좌절, 1932. 3),

⑤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1932. 4. 29),

⑥ 최흥식·유상근의 만주 관동청 공략(좌절, 1932. 5)

등이었다.(김희곤,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 지식산업사, 2015, 403쪽)

위의 6개 거사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윤봉길과 이봉창 의거는 임정의 반침략전쟁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김희곤,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 529쪽)

이러한 사실들과 이교재의 국내 파견을 연계시켜 보면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다.

그가 국내에 들어온 시기는 이봉창 의거나 윤봉길 의거가 실행되거나 준비되고 있던 시점이었고, 따라서 이교재에게 부여한 임무는 국내에서 전개될 반침략 전쟁을 준비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당시 국내에서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반전격문을 뿌리고 이 전쟁을 그치라고 나선 활동이 있었다. 박성숙의 친구이자 경성제대 학생이었던 신현중이 이 일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었는데, 이듬해 8월에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19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신현중은 가장 많은 3년형을 받았다. 이른바 ‘경성대반제동맹활동’이었다(박태일, 한국 근대문학의 실증과 방법, 소명, 2004, 41-42쪽). 이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박한용, 「 일제강점기 조선 반제동맹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논문, 2013, 162~172쪽.)

추정이지만 이교재가 국내에 들어오는 무렵에 이봉창(이봉창이 상해를 떠나 거사를 위해 동경으로 간 날짜는 1931년 12월 17일이었고 거사를 위해 준비하던 기간에는 임정 부근의 여관에 머물렀다(김구, 정본 백범일지, 400쪽). 이교재가 상해를 떠나기 전후의 시기와 중첩된다.)도 김구와 반침략전쟁을 모의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신들이 부여받은 임무를 모두 숙지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따라서 서로 만나 의논했을 가능성도 있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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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24.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0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3)

 

그렇다면 개별 문건들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이교재(우측 사진)가 전달하려던 문건 중에는 달성의 문영박(호는 장지, 1880~1930)에게 보내려던 두 종류의 문건이 있다.

하나는 문영박이 사망한 데 대해 임정에서 뒤늦게 조문한다는 추조문으로 내용은 ‘追弔 本國 慶北達成 大韓國春秋之翁 文章之先生之靈 大韓民國臨時政府一同’으로 되어 있다.

문영박은 1930년 12월 18일에 사망하였는데, 문서의 작성일자는 1931년 10월 3일이었으므로 사망한 지 10여 개월이 지난 뒤에 조문을 한 셈이다.

그의 자녀들, 곧 문대효에게 보낸 특발문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日中大事變’ 곧 1931년 9월의 만주사변이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고 있어서 국내에서 호응하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있으나 비용이 없으므로 특파원을 보내니 그에게 常備金을 보내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되면 무력감에 빠져있는 임시정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특발, 기원4264년· 대한민국 13년 10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 본국경북달성 문대효 애전」. 달성화원 인수문고 소장.)

제로 문영박은 191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30년까지 전국을 왕래하면서 임정에 군자금을 지속적으로 송달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1929년 2월 27일에는 대구경찰서의 고등계형사들에게 4시간 동안 가택수색을 당한 뒤, 장남 문원만과 함께 체포된 적도 있었다.(「大邱高等係員出動 文永樸富豪突然檢擧 사건내용은 중대시된다고 四時間의 家宅搜索, 삼월일일 압두고 예비검속인듯 」, 동아일보, 1929년 3월 3일자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문영박 [文永撲] ’(디지털달성문화대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는 1927년으로 기재되어 있다. 오류다.)

아울러 문영박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오세창과 유창환에게 각각 ‘수봉정사’와 ‘수백당’이란 친필을 받기도 하였고, 또 이들과 더불어 이승훈·한용운·김진호·姜邁·이상재·유진태·이득년은 1918년 망명지에서 국내로 잠입한 우당 이회영과 함께 국제정세의 변동에 대처할 방법을 비밀리에 논의하기도 하였다.(김종서, 「남평문씨(南平文氏) 수봉정사(壽峯精舍) 수백당(守白堂)과 하겸진(河謙鎭)의 ‘수봉정사기(壽峰精舍記)’」, [문헌과해석] 발표회 논문(2017년 12월 22일), 1-3쪽과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전편: 민족해방투쟁, 형설출판사, 1978, 127쪽.)

말하자면 전국적인 독립지사들의 네트워크 속에 포함되어 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문영박의 손자인 문태갑은, “조부가 큰 부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군자금을 많이 냈다는 말이 주변에 돌았다”고 하였다(2017년 9월 12~13일 양일간, 대구시 달성구 화원읍 남평문씨 세거지에 거주하는 문태갑 선생 방문 면담))

그는 특히 상해에서 활동하던 창강 김택영을 통해 많은 서책을 구입하였는데, 그 수송 방식은 상해에서 목포까지 배로 운송하면 그곳에서 다시 수레를 이용하여 화원까지 이송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문희응 씀, 仁興錄 -南平文氏與世居地, 규장각, 2003, 114쪽.)

이 역시 문영박과 임정과의 통로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임정에서 추조문을 보낸 이로는 밀양의 황상규가 포함되어 있다.

추조문 내용은 앞의 문영박 선생과 큰 내용은 같으나 일부 다른 점도 있다.

“追弔 本國慶南密陽/ 大韓國義士/白民黃尙圭君之 靈/紀元四千二百六十四年·大韓民國 十三年 十月三日(建國紀元節)/大韓民國臨時政府一同/派弔/上海(Shanghai)”이다.

문영박의 경우 ‘大韓國春秋主翁’으로 부른데 비해 황상규에게는 ‘大韓國義士’로 호칭하였다. 앞의 경우 역사의 주인이라는 뜻을, 황상규는 의사를 강조한 셈이다.

또한 문영박의 경우 수신인을 ‘본국 경북달성 문대효 애전’으로 표시하였으나 황상규의 추조문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검토해 보아야 하겠지만, 조문을 받을 대상이 마땅치 않았을 수도 있다.

밀양 출신인 황상규는 밀양 뿐만 아니라 만주와 임정에서도 활동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고, 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 창녕지역 관리인인 양인보를 설득하여 창녕군에서 받아들인 동척의 소작료 1년분을 받아 임시정부에 헌납한 것으로 알려졌다.(최필숙,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240~241쪽. )

이러한 공헌도 임정에게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황상규는 김약산의 고모부이자 의열단의 창립자로도 알려져 있었으나 1931년 9월 2일에 폐결핵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최필숙,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239~246쪽. 133)

임정에서 이교재를 통해 추조문을 보낼 때에는 그의 사망 사실이 거의 한달 만에 임정에 알려진 시점이었다.

임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그에 맞는 예우를 해 준 것으로 보인다.

추조문이 애국인사에 대한 예우 차원의 성격이 강한 문건임에 비해 특발문은 임정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는 문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영박에게 보낸 특발문은 이미 언급하였지만, 창녕의 성낙문에게도 거의 동일한 내용의 특발문을 보냈다.(「본국경남창녕 성낙문선생 귀하」라는 수신처만이 다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진주의 허만정에게 보낸 특발문도 위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허만정에게 보낸 특발문은 앞서 언급한 동아일보에만 소개되었을 뿐 소재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이를 알기 위해 2018년 9월 28일에 지수면 승산리에 있는 허만정 본가에 찾아갔지만 현재 그 후손이 부재 중이어서 특발문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성낙문과 허만정은 각각 창녕과 진주를 상징하는 부호들이었다.

창녕군 지포면 석리 출신의 성낙문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창녕지역의 대성이자 부호로서, 손녀인 성혜림(1937-2002)은 북한의 유명 여배우였고, 암살당한 김정남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성낙문은 1921년에 창녕자동차를 창립하는데 주주로 참여하였으며, 1940년에는 부산지방법원 창녕출장소 청사 신축 중에 건물 1동과 부속건물 등을 기부한 공로로 일제 당국으로부터 포상을 받은 기록도 있다.(조선총독부 관보 제3890호, 1940년 1월 12일자.)

표면상으로는 당시의 식민지배 당국에 협조하였던 것이다.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출신인 허만정은 1925년에 백산무역에 250주를 투자한 주주의 한 사람이자(朝鮮銀行會社要錄(1925年版), 東亞經濟時報社.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 한국근현대회사조합자료」 참고. h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hs_001_1925_08_14_0150) 중외일보의 창립자 명단에도 주식을 투자한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주식회사 중외일보사 창립총회의 건」,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 5 (京種警高秘 제15854호, 1928년 11월 24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내항일운동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GS 그룹의 창업주인 허만정은 ‘인심이 좋고 인권을 존중하는 유풍이 남아 있는 승산리’에서 만석꾼으로 이름이 났었고,(김동수 기자, 「진주시 지수면 ‘향토사’ 面誌(면지)발간 추진위 구성」, 「한국장애인신문/KJB방송, 2010년 6월 20일자) 또한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청년 중심으로 모인 보주청년회라는 단체에도 이름을 올린 34명 중 1인이었다.(「보주청년회 부흥기념식 성황, 사무실 낙성식도 거행」, 중외일보, 1926년 12월 28일자)

부호이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에도 적극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추조문과 특발문의 수신인들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먼저 상해임시정부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지사들이나 임정후원자들의 동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들을 정성들여 예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추조문이나 특발문은 비단에 쓸 정도로 세심하게 상대방을 배려하였다. 또한 특발문은 부호가들에게 보냈는데, 이들에게는 앞서의 문장지에서 본 바와 같이 ‘일중대사변’, 곧 만주사변으로 세계정세가 변하고 있으니, 재정적으로 독립투쟁을 더욱 지원해 달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예우를 넘어서서 실질적인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문장지나 허만정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는데 노출된 듯이 행동하였던 반면, 성낙문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지역유지로서 일제의 지역 지배 사업에 협력하는 양상도 보여 주었다.

수신인을 밝히지 않은 채 김관제와 윤상태에게 전달해 주기를 부탁한 편지에는 국내 지사들에게 투쟁을 독려하고 있는 내용이다.(임정 시절 김구는 “연구실행한 정책이 있으니 편지정책이다.. 임시정부의 현상을 극진 설명하고 동정을 구하는 편지를 써서 엄군(항섭), 안군(공근)에게 피봉을 써서 우송하는 것이 유일의 사무”라고 할 만큼 편지를 중요시하였다(김구 지음/도진순 탈초 교감, 정본 백범일지, 돌베개, 2016, 397쪽). 국내에는 우편으로 전하지 않고 개인에게 밀봉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곧 현재 적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세계가 변동하면서 폭발하기 직전이니 칼을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국내의 지사들과 연합하여 그 성취를 함께 도모해야 할 것이며, 이에 이군(이교재, 필자주)을 파견한다는 것이다.

조완구와 김구가 연명하여 보낸 것이므로 임정의 이름으로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시영이 김관제에게 보낸 편지 역시 독립의 당위성과 협조를 부탁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임시정부의 지도층이 당시 경상남북도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더불어 임정의 현안을 도와주도록 요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두통의 비밀편지 형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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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7.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9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2)

 

이교재(우측 사진)의 임정문서 일부가 동아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는 이정순의 아들인 이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이상화와의 면담은 2017년 9월 27일 마산의 이디야 커피집에서 있었다. 그는 부친께서 동아대학교 총장에게 기증하였다고 말하였다.)

해당 박물관에 찾아간 결과 밀양의 황상규에게 보내는 추조문, 창녕의 성낙문에게 보내는 특발문, 그리고 두 통의 편지 등 4개의 문건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간 까닭까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이상화의 말에 따르면 부친이 동아대학교 총장인 정재환에게 기증하였다는 것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소장자료 목록(74-4)과 관계자에 따르면(관련자료는 두 가지로서 1)분류번호: 74-4, 품명: 대한민국임시정부특발, 2) 분류번호:동아대 003776-00000, 명칭:대한민국임시정부특발. 후자는 박물관이 부민동으로 이사할 때 새로 작성한 것이라고 관계자가 말해 주었다.125) 이상순으로부터 정재환이 기증받은 것을 박물관으로 이장하였으며, 그 날짜는 1963년 2월 1일로 되어 있다.

연유는 적혀 있지 않다.

그렇다면 동아대 박물관으로 간 문건들은 동아일보에 기사화되기 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곧 일부는 이미 정재환에게 전달되었고, 나머지 일부가 동아일보에서 보도되었다고 짐작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홍여사의 발언과 김형윤의 기행문, 동아일보기사, 남평문씨 세거지 소유 문건, 이상화의 진술 등을 통해 이교재 선생이 마지막으로 입국할 때 9개의 문건을 휴대하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홍여사의 진술을 통해 이들 문건이 이교재 선생이 직접 휴대하고 들어왔으며, 임정에서 발행한 문건이라는 사실도 명백하다고 본다.

형태상으로도 이 임정문서는 임정에서 발행한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모두 한문으로 작성한 이 문건들은 ‘기원 4264년, 대한민국 13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라고 기록하고 임시정부라는 글자 위에 사각형의 ‘大韓民國臨時政府印’이 새겨진 국새를 찍어 임정에서 발행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림 3>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이교재임정문서 4건. 성낙문에게 보내는 특발문(상), 조완구·김구발 김관제·윤상태 대조 편지(중), 이시영발 김관제 수신 편지(하우)와 밀양의 황상규에게 보내는 추조문(하좌)

 

이교재위임장의 경우에는 국새와 더불어 ‘내무장인’, ‘재무장인’이라는 부서인을 문건 좌측 상단에 나란히 찍었다.

성낙문에게 보내는 특발문에는 작은 부전지에 주석이자 법무장이던 이동녕의 이름과 인장을 덧붙여 놓아, 임정 발행의 문건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위임장, 상해격발문, 추조문, 특발문은 모두 비단에 작성하였고, 편지는 종이에 쓴 것이다.

이교재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는 위임장과 격발문은 한 장인 듯이 보이지만 내용과 발행일, 인쇄방식, 비단의 섬세함 등에서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문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증명을 위해 두 문건을 겹쳐 놓고 국새를 찍었기 때문에 하나의 문건처럼 보일 뿐이다.(이 문건은 2019년 3월부터 6월까지 창원시립마산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한 액자 속에 들어있는 이 문건은 유족들이 이를 보관하기 위해 배접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문건으로 인식하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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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8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운동 중에서 증거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급한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라는 위임장을 비롯하여 다종의 문건을 휴대하고 입국한 일일 것이다.(여기서는 ‘임명장’보다 ‘위임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경상남북도상주대표’에게 독립운동과 관련한 여러 가지 중요한 사항을 위임한 까닭이다.)

작성연도 중 제일 늦은 것이 1931년 11월 20일이니만큼 그의 입국은 상해에서 창원군 진전면까지의 거리나 교통 수단 등을 생각하면 빨라도 1932년 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교재가 국내에 가지고 들어온 이른바 ‘이교재임정문서’를 중심으로 그의 마지막 독립활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까지 필자가 조사해서 파악한 이교재임정문서 속의 문건은 9개이다.(여기서 문서는 상위개념, 문건은 하위개념이다. 다시 말해 문서는 범위가 넓고, 문건은 정해진 서식이나 규범에 맞춰 작성된 것으로, 기관의 규정 업무에 따라 생산된 기록물을 말한다(松世勤(中國人民大學 檔案學科), 「文書, 文件與公文有區別麽?」, 「檔案時空 1986年 01期, pp. 42~43). 따라서 ‘이교재임정문서’라는 의미는 임정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생산하여 이교재에게 건넨 문건의 조합이라는 뜻을 가지며, 각각의 문건은 그 문서에 포괄된다고 하겠다.)

문서에 포함된 문건의 명칭과 세부 사항은 <표 3>과 같다.

 

우선 이와 관련해서 검토해야 할 사항은 이 문서가 언제 국내에 들어왔으며 어떻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서에 대해 최초로 보도한 이는 마산일보의 김형윤 기자였다.

1954년 4월에 진전에 있는 이교재의 자택을 방문하였을 때 “洪老媼(이교재의 부인, 필자)은 우리를 맞아들이며 과거 상해 임정으로부터 선생이 군자금 모집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조완구·김구 두 사람 명의로 발부한 비밀지령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귀한 기념물”(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자)이라면서 문건을 소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그 문서를 이교재의 부인인 홍노온이 직접 소개하였다는 것, 두 번째로 그것은 김구·조완구의 명의로 발부된 비밀지령서로서 이교재가 군자금 모집이라는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휴대하였다는 것이다.

미루어 보건대 이 문건은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주요 임무를 위임하는 위임장이었을 것이다.

이 기사에는 다른 문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보다는 전체문서를 보존하기 위한 홍여사의 피나는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김기자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석양이 닥칠 때는 반드시 오리라는 신념으로 이 지령서를 굴뚝 속이 아니면 밧줄에 묶어서 우물 속에, 어떤 때에는 부녀자의 월경대로서 일각일분도 머릿속에 떠난 일 없이…” 숨기고 살아왔다고 전한다.

지령서를 갖가지 방식으로 숨겨왔다가 김형윤에게 털어놓았는데, 홍여사는 이 문서를 지령서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이교재를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몇가지 중요사항을 위임한 위임장(좌)와 상해격발문(우). 본래 두 개의 문건이지만 이어놓고 가운데에 임정의 국쇄를 찍었다.

<그림 2> 달성군 화원의 문장지에게 보낸 특발문(우)와 추조문(좌)

 

이보다 늦은 1963년에도 동아일보에서 이 문서의 일부를 소개하였다.(「32년 만에 주인 찾는 감사장」, 동아일보, 1963년 3월 16일자)

「32년만에 주인찾는 감사장」이라는 제하의 이 기사에는 임정에 자금을 제공한 3명의 애국지사에게 임정에서 발행한 감사장과 조문 석장이 33년 만에 주인을 찾은 사정을 소개하고 있다.

세 사람이라고 소개하였지만, 실은 진주의 ‘허만기’(허만정의 오기일 것이다.)와 경북 달성의 ‘문대호’(문장지의 아들인 문원만을 지칭함, 필자주)(‘대호’는 실명이 아니라 ‘대효’의 오기로서 5형제의 효도를 통칭하는 칭호라고 한다. 문원만이 대효의 대표로서 이 문서를 찾아간 것이다. 남평문씨의 이름이 조금 복잡한데, 임정에서 조문을 보낸 문장지는 문영박의 호이며, 아래에 나오는 문원만은 문영박의 다섯 아들 중에서 둘째인 시채의 가내 호칭이다-문영박의 손자인 문태갑의 증언이다. 2019년 3월 18일의 통화) 두 사람만 언급되고 있고 있을 뿐이다.

언급되지 않은 한 사람은 창녕의 성낙문이었을 것이며, 조문은 문장지(장지는 문영박의 호. 필자주)와 황상규에게 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기사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쓰여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연고자가 있다면 楊경남지사 또는 홍여사에게 제시하고 찾아가 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의 말도 곁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남도와 홍여사가 합동으로 문건들의 주인을 찾아주는 행사를 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여기서 말하는 양 경남지사는 1961년 8월 25일부터 1963년 12월 16일까지 재임한 양찬우 지사를 말한다.)

이 기사에 호응한 이는 달성의 문대호, 곧 문원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3년 4월 5일에 이교재의 양자인 이정순이 달성군에 있는 문영박의 아들 문원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순은 이 편지에서 “상별지후로 소식이 적적하여… 가지고 가신 서류를 조속히 부송하여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본인의 구호관계 수속을 취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이 편지는 달성의 남평문씨 세거지의 인수문고에서 보존하고 있던 것이다. 이곳에는 2017년 9월 12~13일, 2018년 9월 28일에 걸쳐 방문하였다. 이 편지와 두 개의 문건은 2017년 9월 13일에 확인하였다.)

문원만은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보고 진전면에 찾아와 문장지 관련 문서와 그 외의 문서를 빌려갔다고 한다. 필자가 달성의 남평문씨에서 운영하는 인수문고에 가서 확인한 결과, 그곳에서 보관 중인 문서에는 임정에서 보낸 추조문과 특발문 원본이 있으며 「상해격발문」과 「이교재위임장」은 복사본 형태로 소장되어 있었다.(「상해격발문」과 「이교재위임장」은 문원만이 붓글씨로 베껴 놓았다고 전해 주었다. 문건을 보여준 문태갑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이정순이 송부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뒤의 두 문건일 것이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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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7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2)

 

이교재(우측 사진)가 상해 임정에 도착한 1921년대 혹은 1922년대 초는 임정으로서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공고화되고, 임정 내의 갈등도 증폭되었으며, 국내외의 독립자금 지원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임정은 1922년 이후 독립전쟁 준비론으로 나아갔다.

1922년 10월 여운형과 김구 중심의 임정 요인들은 한국노병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전쟁 준비 방략의 일환이었다.

곧 노동과 군사를 겸한 인물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면서 일본이 국제 전쟁에 휘말릴 때를 기다려 독립전쟁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임정에서 이것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었고, 거기에는 중국군관학교에 한국인 입학생을 보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192~198쪽)

이러한 시기에 임정에 도착한 이교재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일원이 되었는지 역시 알 수는 없다. 앞서 말한 1922년의 기부금모집 위반으로 체포되었을 때에도 임정과의 관계를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1923년 9월에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사건을 통해 볼 때, 이교재는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 모금이라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겼을 정도로 임정의 요인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교재가 주도한 통영군자금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기관에서 작성한 두 종류의 재판기록과(마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 「형사사건부」 1-1(1923),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8428, 대구복심법원, 형사공소사건부 대정 13년(1924),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6075) 경남고등경찰부가 작성한 일지형식의 기록이 남아 있다.

먼저 1923년 9월 21일자로 경남고등경찰부에서 작성한 기록에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前敎員 李敎載가 上海假政府의 密命을 받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내로 들어와서 통영군 통영면 署町의 金宗元에게 군자금을 강요하던 중 체포되어 당국에 보내져 징역 2년에 처하였다”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慶尙南道警察部, 高等警察關係摘錄 –1919년~1935년-, 소화 11년, 39쪽)

이교재의 신분이 ‘전교원’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이미 말한 바지만, 그의 활동 근거가 임정의 밀명이었고, 그 목적은 국내에 들어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는데 있었다.

그가 선택한 곳이 통영이었고 그 대상이 김종원이었다는 것이다.

1923년에 통영지청에서 작성한 刑事事件簿에 따르면, 통영경찰서에서 ‘비현행범’으로 체포된 이교재의 죄목은 ‘대정8년제령제7호위반’이었다. 구류일자는 대정 12년(1923년) 10월 4일, 검사에 이송된 날짜는 동년 10월 13일로서 ‘진주’로 표기되어 있다.

통영지청에서 재판을 받은 그날 진주교도소로의 이송이 결정된 것이다.

피고인의 본적과 직업, 그리고 연령은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 농민, 이교재 37세’로 적혀 있다.

같이 체포된 인물로는 金宗元, 姜相烋, 朴性淑, 朴世洪, 李瓚根, 潘光閔 등 6명으로 그 신상과 죄목, 구류일자, 검찰이송여부 등은 <표 2>와 같다.

<표 2> 이교재의 통영군자금 모금사건 관련자(마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 「형사사건부」 1-1(1923)에 의거하여 작성)

통영경찰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통영사건 관련자들의 죄명은 군자금 모금이 아니라 ‘증거인멸’이나 ‘범인은익’ 혹은 ‘동행취체령위반’ 등이었다.

모두 현행범이 아닌데다 증거를 확보하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명목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모두 10월 13일에 석방되었다. 이교재가 진주교도소로 간 것과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였을까?

김종원은 강상휴와 더불어 통영지역의 사회단체인 통영청년단의 창단멤버였다.(동아일보, 1921년 8월 27일자) 이 청년단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8월에 창립총회를 열고 통영기독교청년회장을 지낸 박봉삼을 초대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순회강연과 교육, 계몽, 순회공연 등이었다. 말하자면 통영지역의 애국운동과 사회계몽 운동의 본거지였다고 할 수 있다.

1923년 11월 18일에는 회관을 신축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창립 당시에는 34명이던 회원이 3년여 만에 400여 명으로 증가한데다 그만큼 갖가지 활동을 한 덕택이었고, 3대 단장이던 임철규가 사재를 털어 회관을 신축하려던 참이었다.

이교재의 군자금 모집 사건은 바로 이 회관의 낙성 직전에 벌어졌던 것이다.

위의 명단에 올라있는 박성숙(朴性淑, 1900~1932)은 통영에서 하동집으로 알려진 부유 집안의 자제로서 일본 유학을 마친 뒤 귀향하여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고, 박세홍은 훈련을 담당하면서 수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박세홍은 1920년 3월 10일에 설립한 통영노동당의 회장이기도 하였다.(통영청년단에 대해서는 김상환, 「1920년대 통영지역 청년운동과 ‘김기정 징토운동’, 역사와 경계91, 2014.6, 191~229쪽과 정갑섭, 「통영청년단 1~3」, 한산신문1993년 7월 22-8월 5일. 일제시기 통영의 3.1운동에 대해서는 김상환, 일제시기 통영의 3.1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전개, 도서출판, 제일, 2005 참조)

사건부 기록에 박세홍은 학교 교사로 기재되어 있지만 통영합동노동조합에서 검사원으로도 일하고 있었다.

이 조합은 통영지역 노동조합의 연대체로서 1930년에 박세홍은 이 조합의 집행위원장의 자리에 올랐다.(통영시사편찬위원회, 통영시지1, 566쪽)

이찬근(李瓚根, 1893~1950)의 이름도 올라 있다. 형사사건부에는 직업이 의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통영시 항남 1번가에 壽南醫院을 개설하였다. 1914년 6월 1일자 조선총독부관보에도 그 이름이 올라있다.(조선총독부 관보제548호 1914년 6월 1일 10면, 휘보-조사 및 보고-위생. 그의 주소는 용남군 동면 북문동으로 되어 있다.)

그의 경력을 보면 단순한 한의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에 창간된 중외일보는 1928년에 주식회사의 형태로 확대 개편하기 위해 주주를 모집하였는데 마산의 이형재·구성전·옥기환 등과 더불어 통영의 이찬근도 5주를 투자하는 것으로 이에 참여하였다.(경성종로경찰서장 발신, 「주식회사 중외일보사 창립총회의 건」,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 국사편찬위원회 국내항일운동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문서,1928년11월24일. htp:/db.history.go.kr/id/had_138_0720)

또한 이찬근은 통영지역에서 1920년대 말에 김두옥·최천 등과 더불어 동아일보사 통영지국장으로 거론되었으며,(김보한, 「김보한의 문화칼럼-진산 이찬근을 찾다」, 한산신문 2009년 9월 4일자) 1928년 3월 25일에 봉래좌에서 열린 신간회 통영지회 임시의장이기도 하였다.(통영시지 제1권, p.576. 설립준비위원으로 박세홍도 들어있다. 박세홍은 지회에서 조사연구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진보적이며 독립운동에서 관심이 있었던 인물이었다.(그는 통영수산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시와 글씨에 능해 통영출신의 시조 시인인 김상옥의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하였으나 한국전쟁 시기에 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당하였다-블루버드 블로그, 「통영별곡 51-초정 김상옥 거리를 아시나요? 4」 참조)

경찰의 기록에는 이교재가 김종원에게 군자금을 강요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죄로 판명되었다.

김종원은 형사사건부에 농민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鱈魚, 곧 대구잡이 사업가로서 통영에서 꽤나 이름난 수산업자였던 것으로 보인다.(통영시지1, 518~519쪽)

또한 그는 통영의 3.1운동에서 사전 준비와 여론을 환기하던 시기의 주도 인물 19명 중 한사람이었다.(통영시지 1, 524쪽)

그러나 군자금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박성숙일 것이다. 박성숙의 부친인 박진영(1853~1939)은 일제 시대에 통영에서 3대 부자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하동집의 주인이었다.

그의 부인인 李仁은 바로 이교재의 고모였다.(김상현, 「나의 삶 나의 통영- 박형균 하동집이 왜 하동집이냐 하면.」 인터넷 통영인뉴스( htp:/www.tyinnews.com/), 2019.2.21., 「박형균 –2 백석, 윤이상, 통영현악4중주단. 통영인뉴스2019.2.28. 성주이씨문열공파세포권지2.186. 109)

이교재의 외손자인 한철수의 회고에 따르면, 외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이교재는 통영으로 날아다니듯이 다녔다고 한다.(한철수 마산상공회의소 회장 증언. 2017년 9월 8일 오후 마산상공회의소장실)

이 배경에는 이교재의 고모인 이인과 그의 아들인 박성숙 등이 통영에 거주하고 있었고, 부호인 이들이 독립운동에도 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교재가 사망한 뒤 그의 집이 저당 잡혀 경매에 넘어갔을 때 400엔어치의 저당권을 사들여 이교재의 모친에게 되돌려준 것도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249번지에 살던 朴喜鎣이었다.(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건물등기부, 고유번호 1901-1912-162796. 2017년 10월 24일 발행. 이 주소는 박진영의 주소였다.)

또한 앞서 말한 대동청년단 멤버이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통영의 미곡상 서상호는 박성숙의 아내인 서말희의 오빠였다.

그가 통영에 자주 출입하면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씨네와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교재는 이 사건으로 인해 1923년 12월 20일에 끝난 제1심에서 제령제7호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9월 21일에 경찰에 체포된 지 4개월만이었다.

제2심의 공소신청은 같은 해 12월 24일이었다. 대구의 복심법원으로 넘어가 재판을 받았으나 검사의 공소 취하로 종결되었고, 확정판결은 1924년 1월 24일이었다.(대구복심법원, 형사공소사건부, 국가기록원관리번호 CJA0016705.)

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에도 죄명은 ‘대정8년제령제7호 위반’으로, 형명과 형기란에는 징역 4년으로 기재되어 있다.(진전면 범죄인명부18번 참조.)

그렇다면 그는 1924년 1월 24일부터 다시 4년간의 징역생활에 들어갔으니, 1928년 1월 23일에 만기출옥하였을 것이다. 42살 때의 일이다.

이후 이교재는 서대문형무소에서도 다시 수감되었다는 말도 있다.

주형무소에서의 출옥 직후 상해로 귀환하였고 그곳에서 임무를 부여받고 조선에 입국하는 도중에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는 것이다.(이현희, 「임시정부 수립 이후의 독립투쟁과 서대문형무소」, 백산학보70, 2004.12, 1014쪽. 이 글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투사 명단에 이교재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 전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기록물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한 기술은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게다가 2년간 복역하였다면 시기상으로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봉착한다.

1928년에 출옥하였고, 다시 1931년 말쯤 국내에 잠입하였던 사정을 감안하면 그 기간 동안 상해행과 감옥행을 모두 경험하여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국내로 들어오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2년 형을 살았다면, 1931년말에 임정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으면서 새로운 임무를 떠맡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형을 살았다는 저간의 서술은 결정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은 한 신뢰하기 어렵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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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27.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6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투쟁에서 두 번째 단계는 상해로 망명한 다음 상해 임시 정부의 일원으로서 활동한 시기이다.

그는 상해에 언제 갔으며, 어떻게 갔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가장 확실한 것은 임정의 지시를 받아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기록이다.

1923년 9월 21일에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재판을 받은 사실이 있다. 따라서 3.1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간 뒤 출옥했을 1921년 12월 이후에 상해행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간의 국내 기록들은 ‘3.1만세운동이 전국에 한창일 때 감연히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였다거나,(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1921년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갔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7쪽.)고 보았다.

만세운동이 한창일 때 상해로 망명한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1921년 출옥 후 혹은 1922년 4월 벌금형 이후 상해로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기부금품취체규칙 위반으로 체포된 사실도 상해 임정과의 연계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본다면, 그의 첫 번째 상해행은 1920년도 말의 출옥 직후가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교재는 왜 상해로 갔을까? 이 점 역시 불분명하다.

당시 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을 통해 조선을 해방시키자는 부류와 외교와 정치력을 통해 해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부류가 있었다.(김희곤,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 지식산업사, 2016, 114~115쪽)

전자에 뜻을 둔 이들은 만주로, 후자는 상해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교재가 상해를 택한 이유는 통상적으로 일찍부터 한인들이 집결하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3.1운동 이후 망명자들이 급증하고 일본과 만주, 러시아 등지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면서 3월 하순경 최고기관 설립 논의가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임시정부와 의정원을 설립함으로써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8~51쪽) 독립운동에 뜻을 둔 인사들에게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진전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맺은 인맥이나 단체를 통해 상해로 들어갔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상해의 임정과 마산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하는 조직은 국권회복단이나 대동청년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권회복단은 1915년 대구의 안일암에서 윤상태·서상일 등이 경북지방의 유림을 포섭하여 조직한 항일운동결사였다.

이 단체는 마산에 지부를 설치하고 안확을 지부장으로, 李瀅宰·金璣成을 임원, 부원으로 이순상·배중세·변상태 등이 참여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경남의 역사와 사회연구, 경남대 경남지역문제연구소, 2004 참조)

이 중에서 일부 단원들이 4.3삼진의거 때 많은 군중을 동원하였고, 이후 상해 임정에도 독립운동자금을 송금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80쪽. 79)

1909년 10월에 안희제·서상일·이원식·남형우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형식의 대동청년단은 1945년까지 비밀결사로서 활동했기에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는 대동청년단의 거점이었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164쪽. 80) 떤 경우 대동청년단의 표면적인 조직활동으로서 국권회복단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160~163쪽)

마산과 삼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형재·배중세·변상태·김관재 등과(김봉열, 「마산 삼진의거의 3.1운동사적 고찰」, 경남의 역사와 사회연구, 239쪽) 윤상태·서상일·신상태·남형우·박영모·안희제·박중화 등도 양 단체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임시의정원 구성에서도 의원 중 남형우를 비롯한 대동청년단 출신이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80쪽)

이렇게 볼 때 이교재는 지역 내에서 활동하던 대동청년단 및 국권회복단과 일련의 연락망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교재는 1923년 9월에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적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서상환과 서상호가 국권회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있었다.(통영시사편찬위원회, 통영시지1, 통영시사편찬위원회, 2018, 534쪽. 서상호는 이 지역의 독립운동가인 박성숙의 처남이었다. 박성숙은 또 이교재의 내종형제였다.)

또한 이교재가 마지막으로 국내에 들어올 때 임정에서 전한 문건 중에 김관제와 윤상태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2인 모두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917년에 대동청년단에 가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 마산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에서 김관제는 변상태와 함께 각각 경남 동부와 경남 서부 일원의 의기를 책임지고 분담하였고,(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88쪽. 김관제는 경남 창원군 동면 무점리 51번지 출신으로 1920년 5월경에 있었던 의열단 폭탄 밀송 사건 관련자로 체포될 당시 김해군 김해면 남문통에서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었다(高等警察要史,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5권 1920년 7월 31일 의열단원 곽재기 이성우 등 26명). 이후 김관제는 대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직의 주요 인물이었던 변상태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하는 책임을 맡았다.86) 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80쪽. 86) 상해의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국권회복단의 마산지부 멤버 이순상(이순상은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1911년 3월에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70쪽)은 상해에서 잠입한 高漢과 부산에서 접촉하기도 하였다.

권오봉의 동지였던 안희제는(이병철, 「다시 쓰는 인물독립운동사, 백산의 동지들 9, 성재 권오봉」, 부산일보1995년 1018일자 : 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권오봉선생비문, 삼진독립운동사, 88~89) 1917년에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고, 특히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남형우와 윤현진을 파견하였으며, 임정의 재정난이 심각할 때 누만의 자금을 조달하여 위기를 돌파하도록 도와준 사실도 있었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11~113쪽) 나아가 윤현진은 임시정부 원년 7월 7일에 열린

제5회 임정원 의원에 경상도 대표 6인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을 맡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9(임시정부사 자료집), 독립유공자 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5, 155쪽) 백산상회 자금 30만 원을 임정에 헌납하기도 하였다.(인터넷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검색어 윤현진)

상해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고한은 배중세와 안확과도 면식이 있었고, 결국 배중세와 함께 상해로 탈출하였다.(「이순상신문조서(제1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7(국권회복단),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넷판 참조) 이 때 상해로 탈출한 사람으로 배중세 뿐만 아니라 남형우, 윤현진도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교재는 권오봉, 안확, 변상태, 김관제, 안희제, 배중세, 남형우 등을 비롯한 삼진, 마산 및 경남지역과 상해를 연결하는 국권회복단 및 대동청년단이라는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상해행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교재는 당시 어떤 루트를 통해 상해로 갔을까.

3.1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상해 및 만주로의 망명 열기가 타올랐다. 이 당시 상해행 루트는 열차로 신의주까지 간 다음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의 단동(현 안동)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가는 노정이었다.

임정에서는 1919년 7월 10일에 연통제를 설립하면서 국내와 임정의 연락망을 조직화하였다. 연통제란 임정과 국내를 연결하는 비밀연락망 조직으로 당시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설립하여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되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9, 77~81쪽.)

남편을 따라 상해로 망명한 정정화는 연통제와 뒤이어 만들어진 교통국을 통해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에 파견되었다.

잠입경로는 상해에서 아일랜드인인 조지 루이스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안동으로 간 다음 그곳에 상주하는 통신원의 집에 머물고 그의 안내에 따라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로 오는 노정이었다.

신의주에서는 비밀연락 거점인 이세창 양복점을 접촉하였고, 그의 편의로 서울에 도착하면, 서울역 건너편 세브란스 병원 관사에 있는 신필호 박사를 찾아가 이곳에서 약 20일 동안 머물며 임정에서 지시한 사람을 만나고 자금을 모은 다음, 위의 귀환 코스를 거꾸로 되짚어 가며 상해로 귀환하였다.(한시준, 「정정화의 생애와 독립운동」, 사학지 47, 2013.12, 137~141쪽)

이교재도 이른바 ‘정정화루트’라고 부를 수 있는 코스를 따라 상해로 들어갔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위 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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