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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마산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4) 개항부터 해방 때까지 47년 동안 진행된 마산의 도시변화과정 속에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철저히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제가 자본 축적을 위해 마산을 투자의 대상으로 삼아 도시를 물리적으로 확대하거나 변형시켜 나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원래 조계지로 설정되었던 신마산 지역은 식민 지배 이후 부분적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근대적 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던 원마산 지역의 사정은 전혀 달랐습니다. 도시정책을 좌우했던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도시는 단지 투자의 대상이었기 때문에「근대도시로의 변화」와「전통 공간의 보존」이라는 도시의 기본적인 발전방향은 철저히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도시변화과정의 바탕이 이러했기 때문에 근대기 마산 도시는 경제적 잉여를 창출하.. 2014. 5.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2) 지금까지 올렸던 글에 대한 요점과 관점 그리고 성과를 정리한 글입니다. 마산은 오래 전부터 존속해왔던 조선인 집촌의 원마산(마산포) 지역과 개항 이후 인위적으로 조성된 신마산 지역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각각의 영역을 확산시키면서 마침내 하나의 도시로 연담화되어 가는 변화과정을 겪었습니다. 마산의 도시구조가 지금과 같은 틀을 갖춘 것은 이 시기였으며, 이 때 형성된 도시구조는 이후에 규모만 확장되었을 뿐 큰 변화 없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용 중 과거에 존재했던 도시공간의 복원은 그 자체로서 해당 시기에 지니고 있던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익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구조의 물적 형태를 시계열적으로 설명하였기 때문에 도시사학(都市史學.. 2014. 5.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1) 지금까지 210회에 걸쳐 1945년까지의 마산 도시의 변천과정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살펴본 마산 도시의 변화과정을 각 시기별로 요약․정리합니다. 고려의 정종(靖宗, 1035-1046년 재위)대에 이르러 정부는 마산 해안에 조창인 석두창(石頭倉)을 설치하였습니다. 창(倉)의 위치는 오늘날의 남성동 부근에 있던 해안 지역으로서, 근대기까지 존속했던 동굴강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의 이런 추정과 달리 산호동 쪽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충렬왕 원년(1274년)에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마산에 정동행성을 두면서 이 도시는 군사 항구 도시로 변했으며,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의 국제도시로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조선의 영조 36년(1760년)에 조선 정부는 대동미를 운송할.. 2014. 4.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208) - 강점제3시기 지난 주 까지 일곱 가지 분석 틀을 통하여 마산의 토지이용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중에는 각 필지의 토지가격을 이용한 구체적인 접근방법도 있었지만 추상적이거나 포괄적인 방법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일곱 가지 분석의 결과를 보면 대체적으로 일관된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 이들을 종합한다면 당시의 토지이용상태에 대한 개괄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원마산(마산포) 개항기 원마산은 마산창에서 남쪽해안일대에 강력한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상당히 넓은 지역까지 토지가 상업용으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일부 도로 안쪽의 대지와 동성동의 동쪽 일대만 주거용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개항 이후 마산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원마산으로 진출한 후 마산창 주변과 수성동 일.. 2014. 4.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7) - 강점제3시기 지난 글의 ‘사정(査定) 당시 원마산의 토지등급’에 이은 글입니다. 2) 1933년 당시 마산의 각 동(洞)의 토지가격 (원본에는 동(洞)이 아니고 정(町)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편의를 위해 동(洞)으로 고쳤습니다) 당시 마산 시가지 내 토지가격을 기록해 놓은 자료로는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에서 1932년 간행한 『鄕土の硏究』와 마산교육회가 1933년 간행한 『鄕土の調査』라는 두 문헌입니다. 이 책에서 1932년 기준으로 한 마산 각 정(町)과 동(洞)의 토지가격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이 두 문헌은 모두 당시 마산공립보통학교의 교장이던 일본인 上原 榮에 의해 편집된 것입니다. 발행 시기와 비슷하다는 점과 편집자가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보통학교와 마산교육회에서 간행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전자의 .. 2014. 3. 3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5) - 강점제3시기 지난 회까지는 ‘토지이용’에 대한 추정을 각종 문헌과 사진(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을 이용하여 살펴보았습니다만 이번에는 도시의 공간구조와 소유상태를 통해 추정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 도시공간·소유상태를 통한 추정 1) 도시공간구조를 통한 추정 도시공간구조를 통한 추정이란 도로의 상태, 즉 도로의 폭․형태․위치 등과 해안 선 상태 및 철도역과 인접지역과의 관계 등을 통한 접근입니다. 문자나 그림 등 구체적인 근거를 이용하지 않고 도시공간구조의 다양한 상황을 통해 토지이용상태를 추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분석 방법은 매우 자의적일 수 있지만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이나 도시 각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증명되는 각 필지의 토지 기능과 종합하여 사용한다면 자료로서 일정한 정도의 .. 2014. 3.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3) - 강점제3시기 지난 주 포스팅한 ‘각종 문헌에 나타난 토지 이용’에 이어 오늘은 ‘사진 및 관련 자료를 통한 추정’을 해보겠습니다. 2) 사진 및 관련 자료를 통한 추정 각 시기의 도로구조와 중요건축물의 위치는 지금까지 제시한 지도 38점과 각 시기의 시설물 설명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이 외에 당시의 도시현황을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소개한 그림자료 중 토지이용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6점의 사진과 지도 2매를 통하여 당시의 현황을 추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진 「1910년 경 원마산 건염어점(乾鹽魚店)」전경 1 2. 사진 「1910년 경 원마산 건염어점(乾鹽魚店)」전경 2 두 사진은 합방 직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좁은 길을 따라 초가지붕의 상점들이 조밀하게.. 2014. 3.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2) - 강점제3시기 토지 이용이란 도시 내 각 지역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실상의 용도지역 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지나간 시기의 토지이용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가지 범역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토지이용과 건물에 관한 자료가 없으면 입증이 곤란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자료를 찾아 도시 전체의 토지이용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비록 정확도가 떨어지더라도 각종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의 일편들을 총 망라하는 등 현 상황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나. 공간구조․소유상태를 통한 추정 다. 토지가격에 의한 추정 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접근해보도록 하는데 이 글에서는 ①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중 .. 2014. 2.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1) - 강점제3시기 원마산의 도로는 1910년까지 자연발생적 세도 밖에 없었으나 1910년대 들어서 근대식 도로가 격자형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해안에 매립도 시행되어 짧은 기간 동안 급격한 도시구조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도로망의 패턴은 매립을 하면서 조성된 도로와 자연취락 내에 신설된 도로의 축(軸)이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서로 상이하였습니다. 도로망의 패턴이 일정한 체계를 갖추어 발달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도로를 확장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또한 초기의 도로망에 비해 후기에 갈수록 도로망 개설 영역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으며 강점 말기에는 기존 원마산 시가지 전체가 격자형 도로망 구역 내의 영역으로 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해안의 매립지는 직사각형 격자형 도로망이 뚜렷이 그 형태를.. 2014. 2.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0) - 강점제3시기 지난 글에 이어 도로망패턴에 대한 내용입니다. 2) 강점 제1시기(1911년-1920년) 강점 제1시기인 1910년대 초기에는 신마산과 원마산을 연결하는 중심가로가 약 15m 폭으로 준공되었으며 이 무렵 진주가도의 확장공사도 완료되어 두 도로가 연결되었습니다. 신마산과 원마산을 연결하는 중심가로는 원마산의 시가지 한복판까지 이어졌고 때를 맞춰 원마산에 다수의 근대식 격자형도로가 개설되었고, 이 도로는 남성동 매립지의 격자형 도로와 연결되었습니다. 이로써 최초로 신마산과 원마산을 연결하는 근대식 중심가로와 두 시가지에 격자형의 도로망이 개설되어 도시의 도로망 패턴이 근대적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계획된 신마산과 달리 원마산의 도로망은 격자 체계가 명쾌하게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2014. 2.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9) - 강점제3시기 도시는 교통망, 즉 도로를 중심으로 배치․형성되며 이들 도로의 얽힘 상태를 일컫는 것이 바로「도로망 패턴」입니다. 도시의 형태 구성은 크게 방형상형(方形狀型)․대상형(帶狀型)․방사환상형(放射環狀型)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들 세 가지 도시의 도로망 구성을 보면 방형상형은 격자(格子)와 장방형(長方形), 대상형은 선상(線狀), 방사환상형은 방사동심원형(放射同心圓形)입니다. 다음 그림은 현대도시계획의 선구자로 불려지는 소리아 이 마타 (Soria Y. Mata)가 1882년 제안한 선상도시입니다. 도시의 형태가 특정한 양식으로 결정되는 과정은 그 도시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성인(成因) 및 입지조건이 작용합니다. 특히 자연조건은 도시형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어느 요소보다도 능동적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 2014. 2.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6) - 강점기 정리 어느 도시건 시가지의 확산은 사회경제적 조건과 인구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진행됩니다. 확산과정에서 나타나는 양상, 즉 방향성․속도․형태 등은 자연적 조건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 위치를 비롯한 강약과 완급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은 원마산(마산포)과 신마산 두 도시로 나누어져 있었던 마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마산과 신마산을 나누어 설명해보겠습니다. 1) 원마산(마산포) 현 남성동과 동성동 해안일대에 밀집하여 조성되어 있던 자연취락 형태의 전통도시였던 원마산은 개항이후 일본인에게 토지의 소유권이 넘어가고 상권 침범을 당했습니다. 특히 원마산에서 볼 때 신마산 방향(남쪽)인 수성동 일대는 1910년 경 무려 66%의 토지가 일본인의 소유가 되어버리는 큰 변화를 겪습니다. 비록 도.. 2014. 1. 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2) - 강점제3시기 이번에는 강점 제3시기에 있었던 마산의 도시구조 변화에 대해 정리합니다. 만주사변 등으로 1930년 이후 국내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최악이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도시의 물리적 환경도 점점 열악해갔습니다. 그러나 마산의 경우, 위치가 전선과 멀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접점이라는 점과 군수물자 공급창이라는 점 때문에 새로운 매립도 시도되는 등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마산의 건설경기가 과도하게 상승하여 ‘황금시대’ 운운할 정도였습니다. 지형적으로 볼 때 매립 전의 마산은 자산동 입구, 즉 몽고정 부근에 해안이 깊고 환주산이 해안 쪽으로 돌출해 있어서 가용대지가 협소했습니다. 특히 이곳에는 두 개의 철도와 한 개의 간선도로(현재의 장군로)가 지나고 있어서 .. 2013. 12.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2) - 강점제3시기 1937년 / 마산부 / / 마산시구개정관계서류, 문서번호 1014 / 정부기록보존소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입니다. 제작시기에 맞춰 아주 정확하게 표기된 지도로 보입니다. 조계지는 물론 신마산 전역에 이미 개통된 도로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주요 시설들도 명기되어 있습니다. 원마산 역시 그 때까지 개설되었던 도로가 그려져 있고 당시 이미 준공되었던 신포동 매립이 완성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죽본조(竹本組)가 매립한 오동동 해안의 매립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형태는 달랐습니다. 이 지도를 통해서 장군천까지 완전하게 도시를 이룬 신마산을 확인할 수 있으며 원마산 역시 교방천까지 도시의 범역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920년대부터 시작된 중앙마산의 조성도 진.. 2013. 1.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마산상공회의소 백년사』에는 1939년 현재 마산에서 활동한 개인 영업자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제조업과 운수업 등은 제외한 통계입니다. 이들 개인영업자 중 한국인 상인들은 주로 원마산 중심상가와 부림동 시장 및 남성동 해안 일대에서 곡물, 면사포 등의 포목류, 해산물, 식료품, 고무신 등 생활필수품을 많이 취급했고 대금업도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 상인들은 주로 건축자재, 철물, 과장, 서적과 문방구, 가구, 의복, 술과 고기, 연료, 선구(船具) 등을 판매했고 대금업도 10여명 정도 되었고 토건청부업도 있었습니다. 자료에 나타난 개인영업자의 숫자는 232명이며 영업장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이용해 232개의 영업장을 원마산․신마산․중앙마산으로 나누고 다시 각 동별로 나.. 2012. 9.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일제가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해 고시 제556호로 발포한 마산의 시가지 계획은 구역면적 43,287,000㎡, 계획인구 80,000명, 목표연도는 1961년까지, 내용은 가로개설 및 구획정리였습니다. 계획인구 8만명, 목표연도 1961년이라는 일제의 계획을 보니 어떻습니까? 이 고시가 발포된 시기는 1941년 4월 19일이었습니다. 발포시기와 달리 마산은 1936년과 1938년에 가로(街路)축조공사를 이미 시행하였는데 이 공사도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추정됩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사진)은 「조선시가지계획령」 분석을 통해 원마산 지역은 1920년대에 총독부의 재정 지원으로 실시한 시구개정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 반면, 신마산 지역은 시구개정을 하지 않았지만 개항장을 조성할 때 비교적 도.. 2012. 8. 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9) - 강점제2시기 85회부터 시작된 1920년대 마산도시변화에 대한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일제강점 제2시기인 1920년대는 한국이 일제의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 특히 식량공급지로 산업구조가 재편되었던 산업수탈기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기만적인 소위 문화정치가 표방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산미증식계획이 강행되었고 회사령이 철폐되었습니다. 1920년대의 마산인구는 1920년에 16,165명이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구성장의 폭이 조금씩 많아져 1930년에는 25,810명이 되었습니다. 일본인은 1920년 당시 4,172명이던 것이 1930년에는 5,559명이 되어 1920년에 비해 133.2%로 늘어났지만 한국인들은 같은 시기에 169.0%로서 일본인의 증가율에 비해 약간 높았습니다. 조선회사령 폐지로 마산의 민족자본가들도 .. 2012. 7.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2) - 강점제2시기 1920년에 비해 10년 후인 1930년에는 가용지가 186,119㎡에서 182,406㎡로 약 3,700㎡가 줄었습니다. 이 차이는 1920년대에 새로 개통된 다수의 도로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는 1920년 기준으로 필지수로는 274필지에 21.3%, 면적으로는 65,000.11㎡에 35.0%였으며 필지 당 평균면적은 237.23㎡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에는 필지수가 365필지에 26.5%, 면적은 70,812.08㎡에 38.8%이었고 필지 당 평균면적은 194.01㎡이었습니다. 필지수와 면적은 늘어난 반면 필지 당 평균면적은 오히려 줄어든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한국인들의 토지소유 상태는 1920년 981필지에 76.3%, 면적 116,320.88㎡에 62.5%, 필지 당 평균면적 118... 2012. 6.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2) - 강점제2시기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1921년부터 1930년까지 제작된 마산관련 지도를 해제하고 그 외 관련 자료를 토대로 마산 도시구조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지도는 이미 1916년에 측도 제작한 1:10,000지도와 1:50,000지도에 기초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10,000지도처럼 세밀한 지도는 이 시기에 다시 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1910년대만큼 지도를 통해 정밀하게 도시구조의 변화를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 馬山府略圖* 1923년 / 조선총독부 / 조선총독부 / / 조선철도여행편람 /.. 2012. 3.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3) - 강점제1시기 마산최초의 근대식 지도 1916년 / 육지측량부 / 조선총독부 / 1:10,000 / / 울산대 도서관 이 지도는 근대적 측량법에 의해서 제작된 최초의 마산 지도입니다. 1916년에 측도하여 1917년에 제판하였고 1917년 6월 25일 인쇄하여 6월 30일 발행하였습니다. 저작권소유자는 조선총독부이고 인쇄 겸 발행자는 육지측량부입니다. 정가(定價)가 십팔전(金拾八錢)이라고 기재된 것을 보아 판매도 했던 것 같습니다. 범례도 지금까지의 것과 달리 각종 시설물은 물론 토지의 상태와 도로의 종류 및 행정구역의 경계까지 세밀히 나누어 표기해 놓았습니다. 본 지도의 제작과정에 관해서 1986년 백서방(栢書房)에서 펴낸 淸水靖夫의 『日本統治機關作製にかかる朝鮮半島地形圖の槪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그 내용을 소.. 2011. 8.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지난 주 포스팅한 내용처럼 마산포 6개리의 명칭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 6개리의 경계가 새롭게 획정되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적한 결과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인들에 의해 변경되기 전 6개리의 경계를 복원해보겠습니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마산이라는 근대 도시를 탄생시킨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 추적」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쓰는 글입니다. 마산포라는 지명은 고려후기 혹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산포를 도시로 만든 맹아는 1760년 마산창 설치 후 발생한 6개리(里)였습니다. 동성리․서성리․중성리․성호리․오산리․성산리의 마산포 여섯 리(里)가 최초로 나타나는 지도는 마산포가 개항된 1899년에 간행된 창원읍지에 수록된 지도입니다. 관찬과 사찬을 통틀어 지금까지 행해진 마산연구.. 2011. 3.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일제는 그들의 편의에 따라 도시지역의 행정구역 최소단위를 ‘정(町, 마찌)’이라는 일본식 명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산창(馬山倉) 설치 후 생겼던 마산포의 6개리도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 글은 마산의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총독부를 개청한 1910년 10월 1일 하루 전날인 9월 30일,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과도기적 지방통치기구를 확립하였는데 거기에 동리명의 변경에 관한 지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변경방법은 그 때까지 사용되던 행정구역의 최소단위인 ‘동’과 ‘리’의 명칭을 일본식이나 한국식 중 어느 것이나 택하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본인이 행정책임자가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통 일본 세상이었던 때라 종래의 한식(韓式) 동리명이 채택되.. 2011. 2.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개항 당시 각국거류지에는 러·일 영사관 건물 외에 러시아와 일본 민간인의 건물 몇 채만 있었을 뿐, 일본인 대부분은 한인거주지인 마산포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9년에 건축한 러시아 영사관 건물입니다. 마산이사청과 함께 지은 마산 최초의 2층 건물로 조계지 언덕에 걸터 앉은 모습이 위용 당당합니다. 경남대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옆에 있었습니다. 조계지 내에서 경제활동을 했던 러시아인들은 조계지내의 대지주이면서 무역업과 러시아군함에 대한 잡화용달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석이나 기와로 된 주택을 직접 지어 살았습니다. 1900년 연말 현재 조계지 내 러시아인 건물은 모두 6동이었으며 그 중 한 채는 건평 80평으로 호텔업을 목적으로 건축 중이었는데 조계지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위치는 조계지.. 2010. 11. 15.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세 번째 참석 후의 글이다. 원마산(마산포)에 자연취락이 형성되면서 생긴 ‘길’에 대한 이야기다. 1760년, 마산창(馬山倉)이 설치된 후 마산이 도시 형태를 띠면서 도시공간의 성격도 형성되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마산창 주변은 공공업무지구로, 현재 황금당 옆 골목길 주변은 상업지역으로, 동성동과 오동동 즉 코아양과점 뒤편 일대는 배후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는 루쉰의 말처럼, 마산포에도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자연취락 특유의 좁고 꾸불꾸불한 ‘길’이었다.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원마산의 좁은 골목길들은 멀게는 250년 가깝게는 200년이 족히 된 마산사람들의 ‘길’이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곳 사람들이, 때.. 2009.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