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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00:00

홋카이도(北海道) 여행기 1 – 아사히카와(旭川), 다이세쓰산(大雪山)

6월 1일로 10년을 맞은 학봉산악회의 회원들이 10년 된 기념으로 홋카이도를 여행했다. 열 명의 회원 중 아홉 명이 함께했다. 명칭은 거창하게 ‘산악회’라 붙였지만 매주 토요일 오전에 만나 무학산 둘레 길을 걷는 소박한 모임이다.

참가자 : 김용운, 김재현, 김흥수, 서익진(글쓴 이), 신삼호, 신성기, 임학만, 정규식, 허정도 9명

일시 : 2019. 4. 25(목) – 4. 28(일) / 3박 4일

 

2019. 4. 25 (목, 첫째 날) - 흐리다가 맑음

한 팀은 새벽 6시, 다른 팀은 새벽 6시 반부터 서둘렀다. 두 대의 승용차로 나누어 공항으로 간다.

우리 팀은 김재현 회원이 네 사람이나 픽업하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고맙기 짝이 없다.

차를 장기주차장과 민영주차장, 어디다 주차할 것이냐로 옥신각신 하다가 공항 앞 가장 가까운 민영 ‘현대주차장’에 주차한다.

주차장에서 제공한 셔틀 봉고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서 다른 팀을 만나 모두들 무사 도착을 확인하고, 자동 체크인 기기로 좌석을 배정받은 후 트렁크들을 화물로 부친다.

신삼호 총무가 일본과 한국에서 사용할 공동경비로 1인당 내기로 한 엔화 1만 엔(한화 10만 원으로 대신 납부 가능)과 한화 5만 원씩을 거둔다.

아침식사 할 짬들이 없었고, 저가항공사는 기내식 안 준다 하니 국제공항청사 1층에 있는 부산어묵집에서 어묵으로 때우다. 내가 추천했는데 다들 별로 음식에 감동하는 눈치가 아니다. 내가 원체 어묵을 좋아하다 보니... 허허.

9시 30분,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해 11시 30분경 삿포로의 신치토세(新千歲) 공항에 무사히 착륙한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비행기 탈 때마다 이착륙에 신경이 쓰이는 걸 보면 나도 나이 좀 먹었나보다.

짐 찾아 나와서 로비에서 좀 기다리니 우리의 명 가이드 정창훈 씨 등장. 몇 년 전 야쿠시마 단체산행 때도 우리 일행 가이드 했던 양반이다. 그때의 인연으로 이번에도 여행일정 전반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 사이에 이 양반, 여행사 직원에서 사장이 됐다나. 작은 일본 전문여행사를 차렸고, 중요 고객에겐 직접 가이드 역할도 한다고. 솔직히 회사를 혼자 하는지 다른 직원은 있는지 물어볼 엄두가 안 났다.

10인승인가? 자리가 꽉 찼으니 10인승으로 짐작한다. 초 미니버스를 타고 아사히카와(旭川) 시를 향해 출발한다.

가이드는 점심시간이니 근처에서 먼저 점심부터 먹자고 한다. 공항 구역을 벗어나 얼마 안 가서 대형마트 건물 안에 있는 회전스시 집에서 식사를 한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반주가 왜 여행만 오면 생각나는지 알 수 없다.

생맥주와 청주로 반주를 곁들이는데, 청주 이름이 국사무쌍(國士無雙). 이름에 반한 허정도 원로대원, 한 병 사가야겠다고 하더니 귀국할 때 공항에서 살짝 국사무쌍 1병을 보여준다. 도대체 언제 샀지?

가이드상, 점심 먹었으니 맛있는 커피 맛보게 해준다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으로 데리고 간다. 100엔짜리 자판기 커피인데 그런대로 괜찮다는 중평이다.

 

 

커피 마시며 세븐일레븐이라는 상호가 일본이 원산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만물박사 ‘네이버’씨에게 물어보니 1927년 미국에서 오전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문 여는 세계 최초의 편의점으로 출발했고, 나중에 일본에 진출해 미국보다 더 큰 대박을 터뜨려 2005년에 일본 자회사가 미국 본사를 합병했다는 역사를 알려준다.

롯데를 앞세워 한국 편의점 시장에도 진출했지만 일본에서만큼 쪽을 쓰지는 못한다고. 다른 나라들에서와는 달리 한국 시장에서 맥도날드가 롯데리아에 맥을 못 추는 꼴과 같은 것인가.

한국 소매 유통시장의 특수성은 프랑스계 까르푸와 미국계 월마트 등 외국계 대형유통업체들의 한국 진출 실패 사례도 머리에 떠오른다. 지금은 또 사정이 달라졌겠지만.

 

다시 아사히카와를 향해 출발한다.

삿포로 시 외곽을 어디론지 한참 가더니 드디어 고속도로로 진입. 좀 가다가 오른쪽 아사히카와 방향으로 진격한다. 북해도라 하면 눈덮힌 높은 산들로 즐비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여지없이 깨어진다. 도대체 산은 어디 있는 거야. 가이드 상, 좀 가면 나온다고. 하하.

목적지까지 2시간 넘게 달려야 하니 운전자 가이드 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일본의 지리와 문화는 물론 정치, 문학, 경제까지 박식하기 짝이 없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까지 얘기하길래 가이드의 대학 때 전공이 궁금해진다. 기회를 잡아 물어봤다. 짐작대로 국제경영학과 일본학을 했다고. 그리고 일본 여행업에 종사한 이후로 항상 일본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하니 직업에 대한 자세가 되었고, 명품 가이드를 아무나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스나카와(砂川) 휴게소에서 휴식한다. 화장실 들르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먹고 다시 출발. 차 속에서 허 원로, 기행문 누가 작성할 거냐고 추궁하듯 묻는다.

일본서 짧지만 방문교수도 했고 이번 여행일정 조율도 맡았던 김재현 대원이 적합하다는 중론인데, 이 양반 할 수 없이 쓰기는 하겠지만 자기는 뼈만 작성할 테니 나보고 살을 붙이라며 나를 물고 들어간다.

나는 백산 산행기 담당자이지 해외 산행기 담당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경주 남산 산행기도 아직 완성 못했는데... 아, 뼈를 발라 살을 만드는 밤을 두 번이나 더 새워야 한다니.

10명 회원을 가진 산악회 아닌 산악회에 이미 회장, 보급대장, 백산대장, 해외원정대장, 산행기 담당이 있는데, 이번 원정에서 총무, 부총무, 부총무보까지 생겼다. 전 대원의 간부화가 멀지 않았다.

 

후카가와(深川) JC에서 빠져나와 아사히카와의 외국 수종 시범림(소설 ‘빙점’의 무대) 안에 있는 미우라 아이코(三浦綾子, 1922-1999) 기념문학관에 4시 반 경에 도착한다.

 

 

가이드 왈, 시간도 좀 남고 문화적인 것 좋아들 하실 것 같아 이곳으로 모셨다고. 나야 당근 만족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만족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한 시골마을의 산책로 입구에 위치한 이 문학관은 작은 2층 건물과 더 작은 단층 별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문을 들어서자 벽에 “이 문학관은 작가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공익재단을 만들어 세웠다”고 적혀 있다.

1층 벽면에 장식된 작가 연보에는 주요 연도마다 그 해의 중요 사건을 병기해 놓았다. 그의 작품들이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한다.

나는 ‘빙점’이라는 소설을 알고는 있지만 읽었는지 여부는 기억이 안 난다.

나중에 가이드의 설명으로 스토리의 뼈다귀는 알게 되었다. 웬 남자 사진이 걸려 있어 누굴까 했는데, 2층에 마침 모범부부 기획전을 하고 있어 살펴보니 남편이다. 몸이 불편한 작가의 구술을 받아 적는 등 외조를 많이 했고 금슬이 좋았기 때문이란다.

2층 반대쪽에는 자유도서관이라 이름 붙은 문 없는 작은 공간이 있다. 작가의 모든 작품을 전시해놓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한국의 어느 문학관에서 이런 도서관을 본 적이 있나? 물론 1층 카운터에서는 작품은 물론 관련 소품들도 판매한다.

별관에는 작가의 생전 서재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표찰이 붙어 있어 작가의 앉은뱅이 탁자 앞에 앉아볼 수는 없고, 대신 마루에 걸터앉아 사진만 찍었다.

임 보급대장 건축전문가답게 별관 입구의 자동 닫힘 장치를 보고는 탄성을 발한다. 우리도 이런 거 도입하면 좋겠다면서.

 

5시 20분 경 다시 출발해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간다.

드디어 멀리 눈덮힌 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댐이 나타나고 저수지를 따라 서서히 올라간다. 어디서 사진 찍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자말자 가이드 기사 즉시 차를 되돌린다. 전망이 좋은 곳을 지나쳤다는 것이다. 사진들 찍고 경관을 감상한 후 호텔로 직행하다.

 

 

6시 20분 목적지 호텔에 도착한다. 다이세츠잔(大雪山)의 아사히다케(旭岳, 2291미터) 중턱 1,050미터 높이에 있는 아사히다케 온천호텔이다.

정문 상단에 ‘bearmonte’라는 호텔명이 붙어 있다. 곰의 산이란 뜻인데 이 산에 곰이 많나? 주차장에 차들도 없고 로비도 한적해 영업 중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카운터 옆 좌측 공간에 페치카가 있고 주위에 소파들이 놓여 있다. 로비를 둘러보다 반가운 글귀가 눈에 확 들어온다. 이름 하여 ‘喫煙室’. 국립공원 내 호텔이어서인지 건물 내부에 ‘흡연실’을 만들어둔 것일까.

왜 일본은 끽연실이라 하고 우리는 흡연실일까. 끽연실이 더 정확한 것 같은데, 일본 따라 하기 싫어서... 그러고 보니 중국에서도 ‘흡연실’이라 부른다.

점심 먹을 때 허 원로, 맨날 원로들끼리만 합방하기 싫다며 회장에게 방 배정 방식을 고민해 보라고 지시(?)했었다.

충직한 김 회장 작은 종이조각들에 숫자를 적어 접은 후 탁자 위에 놓고 선택들 하라 한다. 강제 조정권을 가진 조커까지 넣어서 재미를 한층 돋우었지만, 조커의 권한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실제로 행사 가능한지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한다.

어쨌든 허 원로와 내가 같은 1번을 뽑았다... 허 원로 왈, 나 하고 같이 안 자려고 꾀를 냈는데... 내가 대꾸하길, 날 버리고 가는 사람 안 잡어... 다들 웃음보를 터뜨리고, 누군가 이를 두고 천생연분이라 한다.

어쨌든 사흘 밤을 같이 지냈다. 제비뽑아 갈라져도 조커들이 합쳐놓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그게 원로들 대접한다는 핑계로 사실은 원로원 왕따 시킨 것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렇게 방을 배정한 후 짐들을 넣어놓고 호텔 부설 온천사우나를 한다.

노천탕이 있다고 가이드가 자랑해서 노천탕에 갔더니 바깥쪽 벽 위로 하늘이 길게 보일 뿐이다. 내가 들어가니 신씨 성을 가진 두 명의 회원이 뭔가 얘기하던 끝에 건물 층수 매기는 문제가 나오자 내가 개입한다.

건축에 문외한으로 도대체 경사지에 지은 건물의 층수 매기는 게 잘 이해되지 않는다 했더니 일제 때부터 내려오는 건축법에 관련 규정이 있다고. 내가 그게 일반인으로서는 불편하고 이해가 잘 가지 않으니 상식에 맞추어 법을 개정하는 게 맞지 않나 하고 쎄우니, 건축 전문가들 왈 규정은 나름의 근거가 있다며 일축한다.

설명은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결국 건축주 이익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겠다. 다른 분야들도 아직 그렇지만 건축 분야에는 일본식 용어가 유독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법률마저 그렇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것도 행정 및 관행 편의주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건축가 양반들은 벨시리 문제되는 건 아니라는 식이다.

사우나를 마치고 식당 앞 휴게실에 앉아 있는데 정규식 전 회장대원이 게르마늄 목걸이 하나를 목욕탕 바닥에서 주웠는데 아무래도 내 것 같다고 묻는다. 나는 잃어버린 줄도 모른다. 목욕탕 옷 바구니에 넣어두고 옷 입을 때 바닥에 떨어뜨린 것 같다.

몇 년 전 대마도에 교수연수회 갔다가 마눌님에게 아부하느라 비싼 값 주고 샀는데, 몇 번 착용해보더니 무겁고 불편하다며 사용을 안 한다. 차라리 팔찌가 나았나 싶었다. 값도 헐 쌌는데. 그냥 집안에 돌아다니는 게 아까워서 내가 착용하고 다닌 지가 근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렇게 무감각하다니...

다음날 아침에 보니 우리 김 회장도 나하고 같은 걸 하고 있네... 가이드 왈 정작 한국 관광객들에게 팔았던 일본 사람들은 잘 사지도 착용하지도 않는다고 하니 ‘호구 잡힌’ 기분이다.

호젓한 분위기 있는 호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다. 손님이 우리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두 서너 팀이 더 있다.

 

 

드디어 삿포로 맥주를 마신다. 바깥은 어둠 짙은 산속이고 주위에는 이 호텔만 덜렁 있어 올 데도 갈 데도 없다. 술 마시며 얘기꽃들 피우는데 식당에는 우리만 남아 있다. 내가 보니 종업원들 눈치가 빨리 안마치고 뭐 하냐는 것 같아 대충 마무리하고 방에 모여 한잔들 더 하기로 한다.

원수 같은 원로 두 사람이 자는 방에 다들 모여 술추렴을 더 한 후 일찍들(?) 자러갔다. 이렇게 일본 홋카이도에서의 첫날밤을 맞았다. 뒤편 창문 밖으로 들어오는 눈빛을 느끼며...

이 대목에 뼈다귀를 추렸던 김 교수 원고에 대설(大雪)の 장(藏)이라 적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지 몰라 본인에게 물었더니 자기도 잘 모른다나? 어허 이럴 수가. 자기가 써놓고도 모른다니... 호텔 건물 어딘가에 적혀 있던 글은 아닐까? 아무도 모른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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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0 00:00

경주 남산 산행기

2019년 2월 23일(토) 산행 친구(서익진, 김재현, 신삼호, 김용운, 임학만, 손상락, 신성기)들과 경주 남산에 올랐던 기록이다. 서익진(경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의 글이다.

 

오전 7시 30분, 3.15아트센터 주차장에서 차량 2대에 분승하여 경주를 향해 출발했다.

신삼호 대장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다. 허 원로 요즘 ‘스도쿠게임’을 즐긴다며 휴대폰으로 하는 숫자 맞추기 퍼즐게임을 소개하자 퇴직 후 시간이 남아돌 것으로 남들이 착각하는 김재현 회원이 덥석 관심을 보였다.

결국 허 원로의 노회한 술수에 걸려 10분 내 퍼즐을 풀면 커피 사주긴가 뭔가를 걸고 내기가 붙었다. 그런데 김 회원이 이에 성공하자 김이 빠졌다. 허허, 철학박사를 돈 주고 딴 게 아니라 바둑 같은 게임하면서 땄음이 증명되었다. 사실 김 회원은 한 때 프로기사 지망생이었고 경남대 최고 고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겠지만 깜빡 하시지 않았나 싶다.

진영에서 새로 난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나는 처음 가보는 길이다. 터널들을 지나고 계곡들이 이어진다. 좁은 계곡들에 공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차량 속에서도 역한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공기가 탁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곳에 공장들이? 우리나라에서 공장은 입지선정에 사실상 아무 제약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들판 한 가운데, 산 중턱에, 계곡 속에 어디든지 어떻게든 허가가 난다. 공장과 자본의 유치는 정부의 과업이자 지자체의 살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이지만 경제가 사회와 정치는 물론 문화예술까지 지배하는 세상이니 가히 ‘경제의 시대’에 걸맞는 나라꼴이 아닐까. 그런데 왜 ‘경제학’은 인기가 없을까? 정말 궁금하기 짝이 없다.

언양휴게소에서 쉬면서 우동으로 못 먹은 조식을 때웠다. 어묵우동과 해물라면 두 가지만 시켜 놓고 하나를 골라 먹으라 한다. 나야 당근 어묵우동이지. 그러나 항상 선택하지 못한 게 더 좋아 보이는 건 인지상정. 해물라면이 갑자기 맛있어 보였다.

언양 휴게소 건물은 최근에 전면 신축한 것이다. 수도권 휴게소들에서 신축 건물들을 이미 상당수 본 적은 있지만 영남 일대에서는 처음 보았다.

다시 출발한 차 안에서 나는 김 회원이 가져온 경주 남산 소개 책을 살펴봤다. 동승자들을 위해 중요한 것은 소리 내어 읽었다.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남산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재확인했다.

남산이나 앞산 같은 산 이름은 전국에 산재한다. 대도시라면 거의 다 있다. 그만큼 산이 많고 거주지들과 함께 있다. 우도나 저도가 전국 바다에 산재해 있듯이. 그만큼 섬도 많은 나라다.

하지만 도시 근처에 있는 작은 산이라 해서 얕보다간 큰 코 다친다.

 

삼릉 앞 국도변에 조성된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준비물을 갖춘 후 도로 건너 등산로 입구로 갔다.

남산은 국립공원이다. 산 자체보다는 이 산이 가진 보물 덕분이리라. 공원 관리원들이 입구에서 주의사항도 주고 안내도 하고 사진도 찍어준다. 모두 여자들이다. 무등산 국립공원에서는 관리인들이 모두 남자였던 게 문득 떠올랐다. 우리도 관리인한테 단체사진을 찍었다.

 

 

등산로로 들어서자말자 바로 울창한 송림이다. 그 속에 삼릉이 있다.

삼릉 앞에 30명은 족히 될 만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다. 뭐 하나 보니 시산제를 지낸다. 아직 2월이니 그럴 만하다. 엄청난 자태를 자랑하는 금강송들을 감상하면서 계곡을 향해 올라갔다.

삼릉곡 초입에서 ‘석조여래좌상’을 알현했다. 그런데 머리가 없다.

사실 머리 잘린 부처님이나 보살상이 남산에는 수없이 많다. 그 이유를 놓고 설왕설래했다. 일본인들이 그랬을 것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짓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에도 상당히들 공감한다.

‘선각육존불’,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터’를 연이어 감상하고 올라가는데 갑골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바위가 길 가에 나타났다. 거북등이다 자라등이다 논란이 분분하다. 몸체 전부를 보더라도 분간하기 어려울텐데 등만 보고 자란지 거북인지 우예 알겄노. 그것도 흐릿한 문양 밖에 없는데, 다 사람들이 이름 붙이기 나름이지.

‘선각보살상’을 거쳐 올라가니 ‘바둑암’이다. 남산 전체의 북쪽 끝에 해당한다. 북쪽으로 경주 시내가 보이고 서쪽으로 경부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단체사진을 찍고 다들 가는데 엽서가 비치된 우체통이 있다. 남산 관련 사진이 새겨진 엽서다. 주소와 사연을 적어 널어놓으면 1년 후에 배달해준단다. 가장 젊은 신성기 회원이 한 장 써 넣길래 나도 따라 한 장 써 넣었다. 마눌님 귀중! 아까운 주말 자기와 함께 안 보내고 나간다고 불평하시는 마눌님 달래는 돈 안 드는 방법으루다가. 사실은 무릎이 안 좋아 같이 등산 다니는 건 포기한지 오래다.

남쪽을 향해 능선을 탔다.

얼마 안 가서 남산의 주봉 금오봉이었다. 학봉산악회 플랭카드를 앞에 펼치고 단체증명사진을 찍었다. 이건 반드시 필요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그리고 단체는 사진을 남긴다. 명언이 아닌가. 아니라꼬?

 

 

‘마애석가여래좌상’을 지나 ‘상사바위’와 ‘석조여래입상’이 있는 곳에 왔다.

표지판에 남근석이 있다는데 모두들 어느 것인지 열심히 찾았지만 결국 못 찾았다. 누군가 상상력을 너무 발휘한 것은 아닐까? 우측 멀리 산중턱 암벽에 현신한 ‘마애석가여래좌상’ 한 분이 삼릉계곡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육안으로 잘 안보이시길래 줌을 당겨 사진을 찍어보니 그런대로 잘 나왔다.

조금 후 펑퍼짐한 바위가 나왔다. 논란 끝에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사실 잘 한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여기부터 줄곧 내리막이었으니 말이다.

함포고복(含哺鼓腹)이라 했던가. 배부르고 노곤하니 노래 생각이 났던가. 벌써 오래 전부터 학봉 가수로 추대되신(?) 김용운 회장에게 모두들 노래를 주문한다. 좀 빼던 김 회장, 갓바위 노래를 열창한다. 가사도 안 보고 하는 것 보니 가수가 맞기는 한데, ‘신라의 달밤’은 엇다 두고 웬 팔공산 갓바위인가.

이어 메들리를 구성지게 부르는 가수는 임학만 대장이 가져온 이동식 스피커로 증폭된 사이버 가수 ‘레몬’이다. 바위에 기대어 남산의 계곡과 봉우리들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듣고 있으니 따스한 햇살이 잠결로 이끌어 간다.

여기서 하산해 목욕탕으로 직행할 것이냐 애초의 계획대로 맞은 편 ‘고위봉’을 공격할 것이냐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사실 지도상으로는 능선으로 이어진 길인 줄 알았다. 와 보니 계곡을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한다. 전체가 남산이지만 고위봉은 전혀 다른 산이나 다름 없다.

상대적으로 젊은 회원들은 공격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너무 험해 보이고 멀어 보인다, 이미 많이 걸었고 돌아가는 길도 상당하다며 안 가려고 하는 원로들을 이길 방법은 없다. 언제는 안 그랬나? 속으로 투덜대며 내려들 간다.

내려와서 보니 다들 잘 내려왔다며 다시 공격했더라면 고생 좀 했을 것 같다는 데 모두들 동의한다. 거 봐, 원로들의 천리안과 선견지명을 실감했으렸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역방향으로 오는 등산객도 많다. 정오 무렵이니 등산객이 가장 많을 시점이긴 하다.

웅장한 자태의 ‘용장사 삼층석탑’이 계곡을 내려다보는 지점에 절묘하게 서 있다. 탑의 층수를 셀 때는 좌대가 몇 층이든 아무리 높든 지붕 개수로 따진다는 원칙을 되새겼다.

 

 

단체사진을 찍어준 웬 중년 여인의 애교에 모두들 반한 것 같았다. 애교가 아예 없거나 부족하거나 이젠 더는 없다고 생각하는 마눌님들을 모시고 사는 사내들의 본능이다.

탑 아래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에게 예배를 올리고 내려가니 바로 ‘용장사지’다.

절 구경할 생각을 했었는데 웬 걸 절터만 있다. 터의 생김새로 보아 규모는 작았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삼층석탑과 마애여래좌상을 가진 명찰이었을 것이다. 제법 내려 왔나? 작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설잠교’를 건너니 삼거리다. 왼쪽 오르막길이 ‘고위봉’으로 간다고 팻말이 가르쳐 준다. “으잉, 여기서부터 고위봉으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고, 우와 포기하길 잘 했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제부터는 거의 평평한 계곡길이다. 이름하여 ‘용장계’다. 계곡 입구 거진 다 온 곳에 매월당 김시습과 금오신화에 관한 소개 패널이 길가에 늘어서 있다. 올 때 차 안에서 읽었던 내용을 복습하는 시간이다.

이어 다리를 건너니 동네가 시작되고 아줌마들이 토마토 등을 팔고 있다. 먹음직해 보였고 값도 싸 보였지만 그냥 지나쳐왔다.

동네를 따라 내려오니 국도다. 작지만 주차장이 있고 화장실도 있다. 여기서 문제의 사진사 여인을 다시 만났다. 이 여인이 친구 한 명과 함께 토마타를 먹으면 맛있다 한다. 아까 아줌마들한테서 산 것이다. 우리도 아는 체 하면서 한 개씩 얻어먹었다. 기꺼이 준다. 얼굴이 예쁘장하니 마음도 고우스레한 걸까! 이건 법칙일까 착각일까!

이제 국도변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같은 거리를 걸어도 산길보다 포장도로가 훨씬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체험으로 안다. 뜨뜻한 목욕탕을 에 노곤한 육신을 담굴 것을 생각하며 다리 아픈 걸 참고 간다. 기사 회원 두 분은 계속 걸어가서 차를 가지고 오기로 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단체가 돌아가고 사회도 돌아가는 법이지. 그런 사람이 제대로 대접 받는 세상이 되기를!

갈 때는 통도사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마산에 도착해 파도횟집에서 도다리 회를 실컷 먹었다. 4월 일본 북해도 대설산행을 기대하면서 헤어졌다.

이렇게 천년의 왕국, 황금의 유토피아, 불국토의 한 자락을 건성으로 다녀왔다. 백산(百山) 리스트 꽉 채우기를 갈망해 마지않는 신 대장에게 경주 남산은 25번째 백산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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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1 00:00

무등산 산행기-3

무등산 산행기-3

 

장불재를 내려다보며 하산하다.

장불재는 무학산 서마지기보다 훨씬 더 평평하고 너르다. 마산 같으면 만날재 같은 역할을 했다. 한쪽에는 방송중계탑들이 모여 있다.

 

하산길은 일방적인 내리막이 아니다. 중봉으로 가는 넓고 평평한 임도를 마다하고 북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내려간다.

광주천 발원지 표말이 나온다. 정말 소소한 웅덩이, 물은 있지만 마실 수는 없다.

좀 더 내려가니 갈림길이다. 등산객들 대다수는 바로 직진 하산길을 가는데 우리는 중봉 방향 쪽 오솔길로 들어선다.

 

 

능선들의 중간을 가로질러 가다보니 내리막과 오르막을 반복한다. 그러나 정말 이 코스로 잘 왔다. 무등산을 국립공원으로 만드는 데 산 위의 주상절리와 함께 중요한 요인이 된 엄청난 규모의 너덜을 두 개나 건넜다.

앞서 가는 일행들이 일렬로 너덜강(경상도식 이름)을 건너는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신과 함께라는 영화에서 본 저승의 어느 곳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무슨 고찰의 터를 지나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가다보니 작은 갈림길이 나온다. 먼저 도착한 허 원로, 한 등산객에게서 막걸리를 얻어 마시고 있다.

혼자 마시기 미안한지 권하는 잔을 모두들 마다하다. 산행 중에서는 술 안 마시는 게 좋다고 말한 게 당신인 것 같은데...

산악회 이름을 영자(영혼이 자유로운,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산악회로 바꾸자는 실없는 얘기도 하며, 무등산이 멋지다며 칭찬도 하며, 한참을 왔나보다 하는데 갑자기 넓은 임도가 나타난다.

씩씩하게 큰 길을 따라 얼마 안가서 좌측으로 상당히 가파르게 꺾이는 곳에 멀리 무등산 정상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사각정이 하나 있다.

잠깐 휴식을 취한 정자의 이름은 만치정(晩峙亭; 나뭇꾼들이 저녁 무렵 풀피리 불며 쉬어가는 언덕을 의미하며 늦재의 한자식 표현).

 

 

 

이제 다들 다리가 좀 아픈지 뒷걸음으로 내려온다. 희한하게도 뒷걸음질 치면 모인 다리가 좀 풀어지는 듯안 느낌이 든다. 나만 그런가? (그 며칠 후 신문에서 뒷걸음치면 치매 예방에 좋다는 기사를 봤다.)

원효사 뒷문 쪽에 도착하니 지도가 그려진 팻말이 하나 있다. 다들 어디쯤인지 궁금해 지도를 바라보는데 현재위치 표시가 없다. 역시 허 원로, 지나가던 국립공원 차량 탑승자에게 불평 섞인 민원을 제기한다.

원효사 일주문을 통과하니 바로 주차장이다. 오늘 산행길은 약 12km. 아~ 장단지가 모여온다.

점심 겸 저녁, 이 역시 허 원로가 순대가 유명하다며 추천한 창평전통시장의 창평장터국밥’.

식당으로 가기 위해 무등산을 조금 내려오니 어제는 보지 못했던 계곡 초입에 마을이 나타나고 어젯밤(?)을 보냈던 단풍산장’의 큰 간판이 보인다.

좀 더 내려오니 무등산 수박 단지라는 대형 입간판도 다가선다. 사실 이번 등산 전까지는 무등산 하면 수박밖에 몰랐다. 수박을 팔았더라면 반드시 샀을 것이다.

삼거리에서 우측에 있다는 소쇄원도 무시하고 좌측 광주호를 끼고 '창평장터국밥'으로 GoGo.!

목적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등산이 광주 동쪽 끝에 있고 담양군과 경계를 이룬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창평장터국밥'집 사장은 자신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자기 집 자랑을 한참 늘어놓고 우리가 앉은 방 벽에 그려진 풍악놀이 그림도 자랑한다. 하도 생동감이 있어 한 컷했다. 감상들 하시며 추억도 되새겨보시길 ...

이 글을 여기까지 써놓고 앞선 산행기를 고참원로 블로그에서 원로 시키는 대로 했더니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코치가 없었다면 아마 아직도 못 찾았을 것이다.

블로그의 마지막 산행기가 20161229일자 비슬산 산행기다. 100산을 근 2년이나 안 간 것인지 아니면 그 후로는 산행기를 안 쓴 것인지 헷갈린다.

몇 개 더 살펴보니 대개 사진 위주로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에이, 미리 보았더라면 이렇게 길게 쓸 필요가 있었냐?

 

다시 섬진강휴게소.

커피 한 잔씩 들며 쉬었다가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다들 좋았다는 감상 피력하며 다시 만날 기약을 하다. 고작 일주일 후 무학산 둘레길에서.

무등산(無等山), 내 맘대로 해석하길,

광주인들에겐 같은 등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산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등급 없이 모두에게 평등한 산이다. 나 같은 초보 등산객도 큰 무리 없이 오르내릴 수 있는 무등등한 산이기에.

꼭 한 번 와보고 싶었지만 올 기회가 없었던 산, 다시 올 기약을 하기도 어려운 산.

안녕!

 

[광주 무등산 산행 개요]

* 20181130~121: 12

* 참가자 : 허정도(원로, 해외원정대장), 서익진(가짜 원로, 백산 산행기 담당), 김재현(예비 회원), 정규식(전 회장), 신삼호(전 백산대장, 육대주추진단장), 손상락, 임학만(보급 및 백산대장), 신성기(신입회원)

* 불참자 : 김용운(회장), 김흥수

* 코스 : 창원마산 3.15아트센터 주차장 남해고속도로 섬진강 휴게소 광주서구 나주식육식당 단풍산장(일박) - 원효사 주차장 무등산 옛길 입구 중봉 위 능선 삼거리 서석대(정상) - 입석대 장불재 광주천 발원지 너덜강 만치정 원효사 주차장 장평장터국밥 섬진강휴게소 3.15아트센터 - 해산

 

 

, 사진 / 서익진 경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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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00:00

무등산 산행기-2

무등산 산행기 - 2

 

갑자기 울리는 알람 소리. 아침 6시다.

8시에 식당에서 바지락 죽 먹기로 되어 있는데 무슨 기상이 6시람. 7시 기상해도 충분한데... 다들 나이 값 하느라 그런지 별 불평도 없이 일어난다.

바지락 죽 일인당 1만원. 그러나 그 환상적인 맛 덕분에 100산대장 어젯밤 받았던 비난을 상당히 회복했다.

 

 

주인장이 포장해준 닭 조리탕 남은 것을 받아들고 전체 기념사진을 찍는데 차오차오 개가 우리 옆에 어슬링거린다. 이름이 문수란다. 좀 위에 있는 원효사에서 키우다 사정이 안 되어 자기에게 그냥 주었단다.

문수와 함께 사진 찍으려고 앞에 앉혔는데 셔터 누르는 찰나 도망가 버려 실패했다. 그래 환생하신 문수보살께서 어찌 중생들과 같이 사진 찍으려 했으랴.

830 숙소 출발.

 

금방 원효사 앞 사설주차장(3천원/하루)에 주차하고 즉시 산행을 시작했다.

무등산이 국립공원인 줄은 안내판 보고 이미 알았지만 산행로(팻말에는 옛길로 되어 있다) 입구에 수 명의 직원이 서서 감시하는 줄은 몰랐다.

입산자 자동 체크 장치도 있다. 어흐, 담배와 라이터 뺐길까봐 조바심이 들었는데, 조사는 하지 않는다.

막 오르막으로 들어서다가 물을 준비하지 않은 게 생각나 다시 내려와 가게에서 생수 작은 것 8개를 신삼호 대원이 구입해 나하고 4개씩 나누어 배낭에 넣었다. 다른 회원들 이미 올라가 버리고 보이지도 않는다.

얼마 안 올라가서 만난 제철유적지 푯말을 그냥 지나쳐 올라가니 김덕령 의병장 묘 푯말이 나온다. 이번에는 유심히 읽어본다. 그의 활약상과 무고로 인한 억울한 죽음에 관한 간단한 기록이다. 언제 어디서나 영웅을 시샘하는 자들은 있게 마련인가!

 

 

조금 더 올라가니 무등산 옛길 물통거리란 나무 팻말이 나온다. 나뭇꾼들의 땔감이나 숯 이동길이었다가 1960년대에 무등산 정상에 군부대가 들어선 후부터 보급품 나르던 길이었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그냥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중봉에서 오는 능선 길과 만나는 곳에 도착해보니 절반 이상은 올라온 것 같기도 하고, 화장실 겸 휴게소가 있어 보급대장이 나눠준 보급품을 먹으며 줄어든 에너지를 재충전하다. 보급대장의 은혜를 되새기는 시간이다.

다시 출발해 얼마 지나니 갑자기 주상절리 형태의 암벽이 턱 하니 나타난다.

사진들 찍으며 야단법석 하는데 지난 가는 등산객 진짜 서석대는 좀 더 위에 있단다. 약간 머쓱해진다.

서석대(瑞石臺) 장관을 바라보는 전망대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주상절리는 보통 해안가에 있는데 산봉우리 주상절리대라 처음 본다. 국내 유일한 것인지 궁금하다.

 

 

좌측으로 난 길을 돌아서 올라가니 서석대 위쪽 뒤편에 무학산 서마지기 같은 펑퍼짐한 곳이 나오고 무등산 정상이 정면으로 마주보인다.

등산객인 시민은 더 이상 접근금지다. 군부대가 무등산 정상의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을 점령한 것이다.

푯말에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정상의 원래 모습과 비교해 보니 암석봉우리들을 통째로 파괴해 버렸다. 이러한 만행을 과연 1960년대 야만의 시대, 군부독재정권이 아니고서야 어찌 감히 저지를 수 있었을까? 전두환의 광주시민 학살도 그 연장선임을 알겠다.

서석대(1100m)라고 새겨진 비석 앞에서 학봉산악회 현수막을 앞세우고 단체증명사진을 찍다.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현수막이 주인공이다. 이 사진을 위해 여기까지 발을 절뚝이며 올라온 것이다.

 

 

 

서석대는 한자로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해설판은 이 유식한 해석이 식자우환임을 금방 깨닫게 한다. 선돌의 한자식 표현(음 차용)으로 고대 선돌 숭배신앙의 중요한 표상이라는 거다. 반만 맞춘 것도 아니다. 전혀 맞추지 못했다.

! 상식(常識)의 허망함이여! 세인이여, 상식이 많다고 자랑하지 말지어다!

그렇다면 옆에 있는 입석대(立石臺)도 마찬가지로 선돌의 한자식 표현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고, 역시 그러함이 곧 확인되었다.

사방이 확 트인 곳이라서 그런지 올라올 때는 없던 세찬 찬바람이 횡행한다.

이제 보급품을 소진시키고 하산할 시간이다.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백산대장 멋진 곳을 찾았다. 돌병풍으로 둘러싸여 등산로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이다.

돌병풍을 우측으로 돌아가니 아늑한 서향받이 조그마한 분지가 나타나고 중심부에 파헤쳐진 무덤(?)이 있다. 문외한이 봐도 명당자리인데... 국립공원 내 무덤의 이전 공고를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짐승이 그랬는지 파헤쳐진 이유를 모르겠다.

드디어 100산대장이 자기도 모르게 숨겨두었던 반전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왔다. 남은 보급품을 끌러먹는데 여전히 온기를 간직한 닭도리탕이 남다른 맛을 준다.

 

 

산 정상에서 먹는 닭도리탕은 세상에서 역사상 우리가 처음일 것이고 향후 역사에서도 있을 법하지 않은 쾌거가 아닐까.

기대하지 못했던 커피까지 나눠주는 보급대장. 모두들 만족하며 선견력 있음을 맘속으로(?) 칭송하다. 언젠가 송덕비라도 세워줘야 하지 않을까.

배를 든든히 채우고 본격적으로 하산한다. 곧 입석대를 만났다. 단체도 찍고 개인별로도 찍고.

 

 

입석대에 관찰사 등의 이름이 큰 글자로 새겨져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실감난다.

전 세계 유명 관광지마다 한국인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곳이 없다하니, 낙서의 민족인지 기록의 민족인지 헷갈린다. 나도 어딘가 이름을 새겨 놓아야 할까봐? <<<

글, 사진 / 서익진 경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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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5 00:00

무등산 산행기-1

무등산 산행기 - 1

 

학봉산악회 전 100(산림청에서 선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 대장 신삼호 회원에게 몇 년 전부터 약속했던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오랜만에 가는 100산 등산이라 인자부터 산행기 꼭 쓰겠다고 덜컥 약속해삤다.

또 어기자니 면이 서지 않고... 잘 찍지도 않던 사진도 찍고 하니 허정도 고참원로 날리는 멘트, “우와 열심히 하네, 기대된다.”. 부담시럽게... 안 쓰모 안 될 이유가 또 생기뿌릿다.

 

20181130일 오후 2, 3.15아트센터 주차장에 8명의 선수 집결. 신삼호 회원과 임학만 회원의 승용차 2대에 내맘대로 정한 원로팀과 비원로팀으로 나눠 타고 출발.

원로팀 차 안의 화제는 단연 허정도 회원이 출발 전에 한 권씩 나눠준 따끈따끈한 최신작 도시의 얼굴들이다. 마침 경상대 출판부장 전화인지, 여러 곳에서 주문이 온다는 얘기를 훔쳐듣다.

대박 예감이 든 동승자들, “대박==이라며 벌써부터 한턱내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역시 반격의 대가, 이 위기 속에서도 받아친다. 한턱 약속 대신 서평을 써서 어디든지 올려라는 거다. 밥 한 그릇, 술 한 잔에 서평 하나, 어째 갑자기 엄청 밑지는 장사라는 느낌이 확 든다.

웃고 떠들다보니 벌써 휴식장소로 약속한 섬진강 휴게소. 커피 한 잔씩 들고 다시 출발.

서광주 인터체인지였던가를 돌아나오니 차창으로 흘러가는 나에겐 좀 생경한 빛고을 광주 거리다. 5.18의 비극을 잠깐 생각하게 하더니 곧 떠오른 추억의 얼굴 하나.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연천 신망리 6군단 직할 포병대대 알파소대에서 2년 정도 같이 군대생활을 했던 광주 출신의 한 친구다. 시도 쓰고 노래도 잘 하던 화가였다. 그는 사지반장, 나는 2.4종 창고지기. 둘이 죽이 맞아 야산 꼭대기 사지반 참호에서 시간을 죽이고 추운 겨울밤 페치카 불에다 라면을 반합에 끓여먹던 추억이 아스라하다.

제대 후 꼭 만나자고 했지만 40년이 다가도록 만나지 못했다. 그나 나나 생활에 쪼달렸던 것 같고, 그동안 마산과 광주는 얼마나 멀었던가? 남해고속도로가 뚫려 공간은 지척이 되었지만 심리적 거리는 그만큼 줄지는 않은 것 같다.

광주 서구 어느 이면도로의 나주식육식당.’ 허원로의 추천으로 100산대장이 일찌감치 5시에 예약을 했단다.

 

 

이 시간에도 손님이 있는 걸 보니 유명한 맛집인가?

소고기 생고기가 부위별로 두 접시. 꼭 육회 같다. 생고기와 육회의 차이를 두고 설왕설래하다가 여주인을 불러 물었다.

정답: 오늘 갓 도살한 고기는 그냥 먹는 생고기, 하루만 지나면 양념으로 버물러 먹는 육회.

 

여주인은 바깥주인이 직접 도살한 소만 사용하며 좆나게 맛있다는 걸쭉한 말발에 모두들 나자빠지다. 어원 놀이 끝에 경상도에서는 좆빠지게’->‘좆나, 전라도에서는 좆나게로 변했고, 최근 전국적으로 졸라로 전화되었다는 추정에 모두들 동의하다.

허 원로, ‘졸라의 어원이 숭하니 애들에게 알려줘 가급적 안 쓰게 해야 한다고, 원로다운 결론을 내렸다.

유사어로 허벌나게허벌은 뭘까? 아무도 몰라. 안주인 얘기로 근처에 옛날부터 도살장이 있었다 하던데, 나오면서 보니까 인접 거리에 식육식당 간판이 상당히 많고 용감하게도(?) ‘백정식육식당이라는 간판을 버젓이 내건 집도 있다.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내비아가씨 시키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서석동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김재현 교수 왈, ‘상스러운 돌이라고 해석하자 다들 군말 없다, ? 모르니까. 근처에 그런 방구가 있나보다 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진실이 드러날 것임을 그때는 어찌 짐작이나 했으리.

숙소가 무등산 어딘가 산장이라는데, 무등산은 보이지도 않고 산자락을 올라가다 고개 비슷한 것을 넘어서더니 다시 내려간다. 무등산이 무학산보다 200미터 이상 더 높다는데, 아이고 내려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곧 도착.

이름 하여 단풍산장’.

 

 

초겨울 단풍은 모두 지고 없는데 처음 보는 개 한 마리 반갑게 맞이한다.

차오차오 종으로 중국에서는 엄청나게 비싼 인기 만점 견공이라나. 그러자 개님이 더욱 멋있어 보였고, 쓰다듬어주며 같이 좀 놀아주었다.

 

 

그런데 식당 집합 신호가 떨어진다. 이른 석식을 먹고 바로 달려왔는데 산장 식당에 닭조리탕을 예약해놓았다고... 모두들 구시렁거리면서도 100산대장이 하신 일을 어쩌겠는가... 막걸리를 안주삼아 겨우 몇 점씩 먹고는 대부분을 남겼다.

주인장이 내일 아침에 다시 데워줄테니 산에 올라가서 먹으라 한다. 으잉, 그런 생각은 꿈에도... , 여기에도 100산대장이 숨겨놓은 또 하나의 반전의 복선이 숨어 있을 줄이야.

금방 방으로 돌아와 각자 주무실 준비하고 거실에 모였다.

100산대장이 영원한 보급대장의 진가를 다시 발휘하다. 수출용 진로소주 큰 병 하나와 중국산 술 큰 병 하나를 꺼내놓는다.

 

 

소주, 맥주, 막걸리에 이은 술 파티 겸 회의 아닌 회의. 무엇보다 신입 김재현과 신성기의 정식 가입 여부를 논의하는데, 허 원로, 오늘 하는 것 보고 결정한다는 엄포를 놓자 학봉산악회 회원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려는 듯 다른 기존 회원들도 맞장구치며 분위기를 잡는다.

신성기 예비회원 눈치 빠르게도 원로들 주무실 방에 잽싸게 침구를 깔아놓고 오자 허원로 당장 합격 판정을 내린다. 속이 훤히 내다보인다. 그럼 김재현 예비회원은?

철학과 교수답게 소신과 강단이 있다. 회장, 100산대장, 해외원정대장, 육대주추진단장, 보급대장, 무슨 소린지 출발 때부터 해온 정신없는산악회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내년 시산제에서 무릎 꿇는 것 보고 결정한다는 판결에 내가 왜 무릎을 꿇어라는 얼굴이다. 모두들 산신에게 무릎 꿇고 절한다는 의민데...

나도 후명년 시산제까지 1년간 의무 산행하는 것 본 후에 결정하자고 공갈을 친다. 사람 놀려먹고 놀림감인 줄 알면서도 박자 맞춰주는 재미로 화기애매한학봉산악회.

해외 원정 산행안이 나와 논란 끝에 425일에 34일 북해도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해외원정대장 허원로가 김재현 회원(?)에게 일정 짤 것을 지시하고 김 회원(?) 그렇게 하겠다 한다. 이거 도대체 앞뒤가 맞는 거여? 정신없는 산악회 맞는 거 아녀?

시간가는 줄도, 두 병의 독주가 비는 것도 몰랐다.

11시가 넘었나? 술이 떨어지자 회원인지 아닌지 애매한 김재현 예비회원, 술 더 없냐고 큰소리친다. 막 가자는 건가? 100산대장 잽싸게 식당에 가서 막걸리 3통을 더 가져온다.

이젠 김재현 썰 푸는 판이다. 허 원로는 습관대로 벌써 누워 가늘게 코를 골고 몇 사람도 자리에 누웠다.

내가 같은 직장 다녔다고 끝까지 김재현을 상대하고 다른 몇 사람도 같이 어울린다.

김재현 철학자 삼미(三味)’ 이론을 전개한다. 모임은 재미와 의미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묘미가 있어야 한단다. 정말 괜찮은 이론이다. 다른 데서 써먹을 만하다. 막걸리도 떨어지고 파장이다.

김 교수를 방으로 끌고 들어와 눕히고 나도 옆에 누워 잠을 청한다. 조금 있다 부시럭 소리가 나더니 김 교수 일어나 여기가 어디야? 나 집에 갈거야라며 고함친다.

내가 그의 손을 잡고는 여기 집이야, 누워 자면 돼해도 여러 번 같은 고함을 치더니 진짜로 일어서서 몇 발짝 옮겨 거실로 나가더니 폭 고꾸라져 잔다. , 고작 서너 걸음 가더니 집에 다 온 것으로 생각했나보다.

철학자의 술 쿠세(?)는 정말 점잖다. 고함 몇 마디로 끝이다. 아침 기상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화장실 찾는 사건 있었다는 후일담은 나는 자느라 알지 못했다.)<<<

글, 사진 / 서익진 경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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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9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8

. 맺음말

 

이 글에서 우리는 1960315일 마산에서 일어난 1차 시위에 참가한 하상칠이라는 특정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다음 두 가지 의문에 답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는 시위 참가 동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침묵의 이유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의문과 관련해 사회적 요인을 바탕으로 개인적 요인들에 천착함으로써 개인에게 체화된 사회적 정의감을 확인했다.

두 번째 의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서 국가가 개인에게 가한 보복 공포증과 빨갱이 트라우마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볼 수 있었다.

<1985년 회갑연 때 가족과 함께 / 맨 왼쪽이 글쓴 이>

 

하상칠의 증언은 315의거 당일 시청과 무학국교 앞에서 벌어졌던 야간시위의 전개과정을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향후 4월혁명 공로자 신청이 추가 시행된다면 하상칠과 같은 선의의 피해자가 구제되고, 나아가 2020315의거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예정된 315의거사개정판을 낼 때 그의 증언이 반영되어 좀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역사 서술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의 연구가 315의거의 다른 참여자들에 대한 미시사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기대감과는 반대로 이 글을 준비하는 내내 왜 당사자가 살아있던 동안에 이러한 논문을 쓸 생각을 하지 못 했던가라는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사망 후에야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증빙자료는 고사하고 85세의 노인이 50년 전 사건에 관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증언밖에 없는데다가 그를 아는 소수의 사람에게서 그것도 극히 한정되고 단편적인 정보밖에 얻을 수 없다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구술사 분야에 종사하거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너무 늦기 전에 가급적 많은 사람의 구술부터 받아두는 것 자체가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개별 연구자 차원에 맡겨두어서는 안 되며 공공의 관심과 지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방법론적으로 이 글은 여전히 한계를 드러낸다.

첫째, 미시사 방법론의 원용만으로는 증거의 단편성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아마 주관성과 객관성 간의 거리는 완전히 소멸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미시사 방법론이 가진 영원한 한계일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조사자나 연구자의 더 많은 노력에 의해서만 다소간에 해소될 수 있다.

둘째, 미시사 방법론을 원용해 하상칠이라는 개인의 삶과 활동을 천착했지만 관련 자료와 참조인의 부족으로 좀 더 생생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개인과 사회 간의 상호작용을 엄밀하고도 구체적으로 추적하기 어려웠고, 하상칠이라는 개인의 생애와 사회적 활동을 그가 참여한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창()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자신하기도 힘들다.

이는 315의거와 관련된 개인들에 대한 구술 자료가 늘어나고 개인별 사례 탐구가 누적되어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후속연구와 관련해 우리는 하상칠의 증언이 참임을 믿지만 국가보훈처에서는 객관적 증빙서류의 미비를 이유로 유공자 선정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상칠 같은 선의의 피해자를 구제하고 역사적 사건의 리얼리티를 더 잘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행의 객관적 증거주의가 가진 장단점을 명시하고 유공자 선정 방법의 개선책을 제시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끝)

서익진 /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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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2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7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증언록, 478)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자에게 들켜서 보복 당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패가망신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증언할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는 계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그가 구체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짐작해본다.

<젊은 시절의 하상칠 선생>

 

먼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 민주당 정권 시절과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초기 유화 국면이다.

그러나 의거가 발생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가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반공을 국시로 표방한 정권과 특히 경찰 조직의 속성이 바뀐 것은 아니어서 증언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하에서 315의거와 4월혁명은 사실상 잊혀진 사건이었다(남부희, 1995; 이은진, 2004; 남재우, 2005).

다음, 19876월항쟁으로 군부독재가 무너진 후 처음으로 노태우 민선정부가 들어서고 뒤이어 김영삼 민간정부가 들어섰지만 여당의 집권 연장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31019315의거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지만 유공자 발굴 사업은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고, 하상칠은 이러한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다.

2002년 이른바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국민의 정부 출범에도 불구하고 증언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데는 무엇보다 전라도 정권에 대한 불신이 한몫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같은 해 315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자 국립묘지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증언을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지만 이걸로는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다고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2010년에 “315의거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비로소 국가가 기념하는 사건의 관련자를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이 에피소드는 정치권력이 개인에게 가한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가 얼마나 장기 지속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말하기를 이제 그날 일어난 일을 제대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315의거가 우리나라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날로부터 5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그 정신이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늦게나마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민권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마산 시민과 학생들의 용맹성을 들려줌으로써 정의로운 나라 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증언록, 478).

이 진술은 그의 진심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녹취를 풀어낸 사람이 지어낸 미사려구일 것이다.

 

<회갑연 때 아내 신을순과 함께 / 1985년>

 

필자는 그가 말하지 않은 속내가 있을 것 같아 나중에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더니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염려되고 또 자신의 묘 자리에 관심이 커졌는데 유공자가 되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강렬한 욕망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부언하기를 자신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으면 자손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또 자손들에게 마지막 교훈도 남기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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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2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항적 행동으로 표출되도록 만든 사회적 요인이 무엇이었던가를 규명하는 데 치중해왔다. 따라서 315의거의 경우 왜 하필 마산인가라는 의문을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런데 특정 개인의 항쟁 참가, 예컨대 왜 하상칠인가라는 의문에 답하려면 이러한 사회적 요인보다 개인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

사회적 요인이 모든 참가자에게 해당되는 공통 요인이라면, 개인적 요인은 특정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개별적인 특수 요인이다. 양자를 동시에 살펴보는 것은 315의거를 좀 더 복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특정 사건에 대한 기존의 거시 사회사적 분석에 미시 문화사적 분석을 부가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하다.

 

<신을순과의 결혼식 사진 / 1953년 가을>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마산 315의거를 다룬 문헌들에서 왜 마산인가라는 질문은 가장 빈번히 제기되거나 다루어져왔다. 315의거 학술논문총서에 실린 많은 글들도 이 질문을 예외 없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당시 한국의 모든 도시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폭압, 원조경제의 위기에 따른 경제적 곤란, 자유당의 노골적인 부정선거 획책 등 대동소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표출 강도는 지역이나 도시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산 지역에서 이러한 객관적인 사회적 요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작용해 유혈시위가 발생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논자에 따라 구조적 요인과 상황적 요인으로 또는 지역적 요인과 역사적 요인으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정치, 경제, 사회 및 역사적 요인으로 나누어본다. 요컨대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요인은 이 모든 요인을 포괄하며 이 글의 목적상 사회사보다는 미시사에 관심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요 요인들을 간략하게 요약함으로써 뒤이은 개인적요인의 검토를 위한 배경으로 삼고자 한다.

 

첫째, 역사적으로 마산 지역은 조선 말기 개항장이자 구미 열강의 조차지로서 근대 문물에 상대적으로 일찍 눈을 떴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무정부운동 등 사회운동의 주요 중심지의 하나였다.

일본인들과 상권을 둘러싼 충돌도 첨예했기에 일반인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상당히 높았다. 강만길(1999)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마산인의 진취성과 저항성을 키워왔음을 강조한다.

둘째, 사회적 측면에서 해방 직후의 귀환동포와 6.25전쟁 기간의 피난민 중 상당수가 마산에 정착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난민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날품팔이, 고아, 부랑아 등 최하층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인구의 사회적 구성상의 특징에 주목한 이은진(1998)은 정치적 억압, 경제적 곤란, 새로운 사회공동체의 형성이 지역사회의 유동성과 급진성을 촉진한다고 분석했다.

셋째, 경제면에서 마산은 1950년대의 수입대체 기반 경공업화 과정에서 상공업도시로 빠르게 발전했던 만큼 동 연대 말 미국 원조의 감소에 따른 경제 불황(서익진, 2000)의 여파가 상대적으로 더 컸을 것이다.

높은 실업률 등 시민의 경제적 불만도 상대적으로 더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넷째, 정치적으로 민주당 허윤수 국회의원의 변절(자유당 입당)이 미친 다면적인 영향이다.

이 사건은 허윤수와 자유당에 대한 시민의 반감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자유당에게는 충성경쟁으로 부정선거 획책을 위해 공무원뿐만 아니라 경찰과 반공청년단까지 대거 동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민주당에게는 상대적으로 선명성이 강한 신파 세력이 선거운동을 주도하게 만들어 의거의 발단이 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선거포기 선언을 하고 가두시위를 조직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이은진, 1998).

 

이러한 요인들을 배경으로 315 선거일 직전 마산 시내 분위기는 가히 폭풍전야의 상태였다고 평가된다(홍중조, 1992: 108).

지역의 정보나 소문이 집결되는 도심(번화가이자 유흥가)에서 장사를 하던 중년의 하상칠은 이러한 시내 분위기나 민심 동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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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72114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발간한 『3 15의거 증언록』(474~478)에 실린 것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3 15의거 증언록』(474~478)에 실린 원본>

 

부정선거 개표를 막기 위해 시청 앞에서 싸워

하상칠(당시 35, 녹취/2010107)

 

나는 1960315일 자유당이 장기집권을 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자이에 항의하기 위해 오수 6시경 부정선거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마산시청으로 가는 중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오동동빠가 있었고, 조금 앞서 거기에서 당시 도의원이며 민주당 마산시당 위원장인 정남규 씨를 경찰이 체포해 가는 광경을 보았다.

상황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것을 본 후 이번 선거는 무효라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마산시청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35세로 얼음소매상을 하며 마산시 산호동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때 투표권이 있었으며, 내가 어느 당을 찍고 어느 입후보를 좋아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마산시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선거는 국민들이 원하는 사람을 찍는 것인데 왜 선거에 개입해서 이렇게 찍어라 저렇게 찍어라 관여를 하고 위협을 하느냐에 대한 불만이 컸고, 그래서 이 선거를 무효화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투표함이 집결되는 시청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와중에 경찰이 정남규를 잡아가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것을 본 후 내 머리에는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하고 이번 선거는 무효라고 선언한 민주당원들을 경찰이 잡아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이에 대한 분노가 더해 갔다.

나는 부림시장을 지나 시청을 향하여 빠른 걸음으로 큰길로 나섰다.

630분경 마산시청에 도착하니, 이미 경찰들은 완전무장을 한 채 지프와 소방차 등을 배치, 방어진을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사람들이 시청 쪽으로 몰려들었.

우리들은 함성을 지르며 부정선거 개표가 시작되고 있는 마산시청을 점령하기위해 수차례 전진 후퇴를 계속했다. 경찰은 우리를 막기 위해 공포탄을 쏘아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흩어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일단 그곳을 피했지만,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려고 근처 길가 무릎높이의 하수구에 숨었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경찰 쪽으로 계속 돌을 집어 던졌다. 그 시간은 해질녘이어서 멀리에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때였다.

사람들은 밝은 곳에서는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다. 당시 얼굴이 노출되어 데모주모자로 잡히면 곤욕을 치를 것이 분명했기에 소극적으로 행동하던 시민들은 이제 어둠이 짙어질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투석전으로 경찰과 대치했다.

나는 데모 군중들과 함께 시청 쪽으로 가서 투석을 하다가 경찰이 총격을 가해오면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총소리를 피해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 뒤 법원 골목 어딘가에 있을 때였는데 내가 있는 쪽으로 17세쯤 되어 보이는 학생 하나가 어깨를 한손으로 잡고 달려오면서 "저 총 맞았어요. 총알이 제 팔을 관통한 것 같아요" 했다.

살펴보니 다행히 생명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실제로 총을 맞은 학생을 보고는 갑자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 이제 정말 전쟁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산시청 앞에서 투석전과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그 총소리가 시민들을 물러나게 하는 공포사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우리들 심장을 겨누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또 사격을 가해오는 경찰들의 만행에 억누를 수 없는 적개심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총상을 당한 학생을 살펴본 후 치료를 권유하며 가까이에 도립마산병원이 있음을 알려주고, 나는 다시 골목을 빠져나와 투석전을 계속하며 자산동 쪽으로 이동해 나왔다.

이때 많은 시민들이 중과부족으로 점점 자산동 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는데, 그때 소방차 한 대가 데모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목적인지 마산시청에서 자산동 쪽으로 달려왔다.

자산동 무학국민학교를 조금 지나 지금 경남데파트가 있는 곳 쯤 도착했을 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것이 벼락 치는 소리나 대포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이제는 총이 아니라 아예 시민들을 향해 대포를 쏜 것일까 생각하니 전쟁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불빛이 확 하고 번지며 온 천지를 밝혔다. 공포와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곧이어 사람들이 설명하는 걸 들으니 북마산파출소에 불이 나 불 끄려고 가던 소방차가 데모대의 돌 세례를 맞아 그만 전봇대를 들이박아 버렸다는 것이다. 연이어 아름드리 전봇대가 넘어지면서 전선이 합선되어 불꽃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때 시간이 8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정말인가 확인하기 위해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달려가 그 현장을 보았다.

정말 세 동강이가 난 전봇대가 큰길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고 무학국민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돌을 치마에 담아 나르고 사람들은 투석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나는 주변의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넘어진 전봇대를 옮겨 일단 길을 막도록 했다. 우선 사람들은 다닐 수 있지만 차는 다닐 수 없도록 길을 가로지르는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하여 전봇대를 옮겼다.

당시 나는 크고 무거운 얼음 판매를 하고 있어 사람들로부터 힘이 장사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실제로 힘이 꽤 좋았다. 따라서 전봇대는 내가 안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끌고 당기며 옮길 수 있었다.

이제 동강난 전봇대를 무학초등학교 앞길에 가로놓게 함으로써 길을 차단해 경찰의 접근을 막고 또 데모대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구역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돌을 땅에서 줍지 말고 철길에 있는 자갈을 사용하자고 말하면서, 일부 학생들을 데리고 철길로 올라갔다. 학생들에게 돌은 함부로 쓰지 말고 일단 차들이 철길 밑을 지나갈 때 뒤를 보고 퍼붓자고 시켜놓았다.

당시 학생들은 자기들보다 나이가 많고 힘이 센 아저씨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예상한 것처럼 조금 있으니 선거함을 실은 차가 북마산 지역에서 성호초등학교 앞을 지나 시청 쪽으로 가기 위하여 우리 가까이 다가 왔다. 그 차 안에는 모자를 눌러 쓴 4~5명의 경찰이 타고 있었고, 선거함을 지키고 보호하는 듯 했다.

그 시간으로 봐서 아마 마산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서 개표를 위해 마산시청 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선거함을 실은 차는 시청으로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차가 철길 밑을 통과하자 철길 위에서 우리가 퍼붓는 돌 세례에 다급히 차를 되돌려 도망쳤다.

우리들이 던진 돌 세례를 피하기 위해 선거함 뒤로 숨거나 선거함을 뒤집어쓰고는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10여 분 후 9시경이 되었을까, 또 지프 한 대가 다가왔다. 형상으로 보아 좀 높은 사람들이 타고 또 선거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차를 향해서도 돌 세례를 퍼부었으나 덮개가 천으로 되어 있어 투석의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이내 바리케이드 앞에 다가와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곧 차를 돌려 도망쳤다.

다시 조금 지나서 차가 한 대 현장에 도착했다. 세히 보니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 같았다.

이 차도 바리케이드로 인해 더 이상 가지못하고 다른 차들과는 달리 그곳에서 머물러 있어 무슨 일인가 하고 철둑에서 내려와 보니 젊은이들이 달려들어서 벌써 총을 모두 뺏은 상태였다.

그때 나는 이 상황이 유혈 사태로 갈 우려가 있음을 직감하고, 지금 우리가 대치하는 원인과 목적을 상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어린 군인들이 무조건 명령에 움직였을 것이 분명한데도 적으로 간주하여 가해하는 것은 정의로운 시민정신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판단이 서자 먼저 총을 탈취한 학생들에게 "학생,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데모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방해하는 무리들의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이지, 군인들이나 경찰들을 없애거나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총을 서로 겨누고 또 쏜다면 이건 우리의 목적과는 다르. 여기 군인들은 옷이 다를 뿐 우리들의 형제이고 같은 심정일 수도 있다. 단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왔을 뿐이다. 따라서 총을 뺏어 서로 겨누는 짓은 하지 말아야한다." 고 말하며 총을 모두 회수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너희들이 보다시피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이렇게 항거하는 것은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인데, 너희들이 만약 총으로 우리를 위협하거나, 명령이라면서 총을 쏜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는 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유혈사태를 막아야 한다. 젊은 너희들은 오히려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도와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우리는 결코 너희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님으로 여기 있지 말고 돌아가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저렇게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경찰들을 도와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총을 잃고 가면 그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총은 돌려주겠다. 여기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의로운 너희 부모와 형제들이다. 록 군복을 입었어도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라." 며 빼앗았던 총을 돌려주었다.

군인들은 "고맙습니다" 며 여러 번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났다.

그렇게 군인들을 돌아가게 했을 때, 시청 쪽의 총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고, 드디어 우리 가까이서 총을 쏘아대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들 심장이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무학초등학교 담장에 숨어 대항해보려 했으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어쩔 수없이 어둠 속에서 무학초등학교 담을 넘어 철길을 따라 겨우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순간에도 경찰들은 데모대들을 향해 총을 쏘거나 체포하기 위해 날뛰고 있어, 그들의 눈을 피해 겨우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옷이 물에 빠진 듯 젖어 있고 온몸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누가 나를 기억할까 너무도 두려웠다.

식간에 발생한 일이고, 또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고 자라면서 배운 가장 정의로운 행동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제일 선두에 서서 사태를 주동한 것이 알려지면 그들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고 위해를 가해올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두려웠다.

나는 그때 셋째 딸을 갓 출산했었고, 그리고 아내와 어린 아이들이 계속 눈에 걸렸다.

그렇게 건장했던 몸이 사흘 동안 어깨와 팔 그리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그리고 잠을 자면 온 몸이 가위에 눌리었고, 정말 누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 경찰에 알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계속되었다.

당시 실제로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붙잡히면 혹독한 벌을 받았으며, 공산당으로 몰려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것이 연일 이어졌다.

나는 특히 공산당으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나는 6·25 때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포로였었기 때문에 공산당으로 간주하여 처벌받는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날 밤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에게도 가족들에게도 간혹 세상이 달라지는 듯해서 이야기를 하고는 싶었지만, 음속에 담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날 밤 나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 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날 일어난 일을 제대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3·15의거가 우리나라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발점이고 모태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날로부터 5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그 정신이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은!

그리고 늦게나마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민권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용맹성을 들려줌으로써 정의로운 나라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날 밤 조국을 위해 꽃다운 나이에 산화해 가신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3·15의거를 진압하기 위해 무장한 경찰들>

 

 

3. 증언 내용의 분석과 평가

하상칠이 참가했다고 증언한 3 15의거 당일 시청 앞 야간 시위는 3 15의거의 백미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여기서는 그의 증언 중 이미 확인된 사항들과 어긋나는 부분을 지적하고, 그의 증언으로 새로이 밝혀진 부분이 무엇인지를 명시해두고자 한다.

그는 오후 6시 경 집을 나와 시청으로 가던 중 오동동빠 근처에서 정남규가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것을 (증언록, 474) 보고 선거무효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시각에 정남규는 민주당원이 주도한 가두시위 중 오후 3시 반경에 경찰서로 연행된 후 계속 구금상태에 있었음은 명백히 밝혀진 사실이므로 다른 사람을 착각했음이 확실하다.

게다가 이 시각에 오동동빠 근처에서 누군가 연행되었다는 증언은 우리가 알기에 다른 어디에도 언급된 바 없기에 사실이라면 최초의 언급이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그의 증언 중 유일하게 사람이나 시간 또는 장소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사항인데 사건 후 50년이 지났고 85세 노인의 기억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오후 8시쯤 지나 소방차가 전봇대를 들이받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동강이 났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소방차가 북마산파출소 화재 진압 차 출동했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대다수 자료와 증언에 따르면 북마산파출소 화재는 930분경으로 알려져 있고, 시청 앞 도로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중 경찰 쪽에서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살수를 하던 여러 소방차 중 하나가 갑자기 데모군중 쪽으로 돌진해왔다는 것이고, 이 돌진의 이유가 운전수의 돌발 행동인지 지휘자의 지시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어쨌든 『3 15의거사』 300쪽에 살수를 하면서 돌진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어디로 이동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현장의 시위대를 해산시킬 목적으로 돌진했던 것으로 보는 게 사리에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증언 중 하이라이트는 첫째 동강난 전신주를 직접 옮겨 도로를 가로지르는 바리케이트를 친 것, 둘째 학생들을 데리고 철길 위로 올라가 이 길을 통과하려던 두 대의 차량에 투석해 되돌아가게 만든 것, 셋째 마지막으로 세 번째 차량을 타고 온 군인들에게서 시위대가 총을 빼앗은 것을 알고는 이들을 설득해 총을 되돌려주게 하고 군인들에게는 시위대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설득해 유혈사태 없이 사건을 마무리했다는 요지의 진술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은 거의 전모가 밝혀져 있지 않다. 소문만 무성했을 뿐 어느 누구도 이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자신이 직접 참가했거나 옆에서 보았다는 증언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 개의 사건 중 두 개가 국회조사단 앞에서 도경수사과장 김경술의 증언 속기록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권종림은 ... 9시 경 무학초등학교 앞 노상에 쓰러져 있는 전주로서 국도를 차단하고 동시에 박주복은 구한오를 지휘, 구마산 방면으로 통과하는 쓰리코타 운전수인 육군502 장거리 통신대 마산 파견대 소속 상사 이재중을 구타하여 동 인이 가지고 있던 칼빈 총 일정을 탈취하고 실탄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본인에게 반환하고..., 구한오는... 오후 9시경 무학초등학교 앞에서 군 쓰리코터에 대한 투석사건에 가담하였고 군인 이재중의 총기를 박주복, 정상숙과 같이 탈취했다가 반환한 제정수(시당 감찰위원)... (315의거 증언록, 676)'이라고 말했다.

김경술의 증언은 경찰의 수사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당시 경찰은 빨갱이의 소행이거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조작하기에 여념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여기서 지목된 각 사건의 행위자를 실제의 행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의 존재 자체를 지어내어야 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해당 사건들의 실재를 확인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하상칠의 증언은 이들 사건에 대해 시위 참가자 측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증언으로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

세한 전말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는 수사기록과 모든 증언을망라한 면밀한 조사연구를 통해 진실에 가까운 스토리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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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8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등에게서 탐문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쓰였음을 밝혀둔다. 정식으로 준비된 인터뷰가 아니어서 각 탐문이 있었던 시간과 장소를 적시하지 못한 것은 필자의 잘못이다.)

 

1) 성장 과정

하상칠은 192652일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산리(지리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서 부친 하원수와 모친 김령 김씨 사이에서 9남매(81) 7남으로 출생했다.

당시 조선의 대다수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극빈의 가정형편에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고, 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언제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어린 시절에 진양군(현 진주) 수곡면 대천리로 이사했고, 일가친척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인접 마을 사곡리에 자주 놀러 다녔다.

근처에 있는 낙수암(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542, 송정 하수일(1553~1612) 사적비, 유림의 강학소, 정사가 있다)과 대각서원(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344)에 자주 놀러 다녔다(이 과정에서 글도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안타깝게도 그의 청소년 시절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데다가 지금은 이에 대해 얘기해줄 사람이 한 명도 살아있지 않다).

1950(25) 여름 남원에 살던 양모(養母, 모친 친구라고 함)의 집안일을 도와주러 갔는데 인근 야산에서 나무하던 중 인민군에게 강제 징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포로로 잡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거의 3년을 보낸 후 19536월 중순 반공포로 석방 조치에 따라 수용소에서 풀려나왔고 고향에서 은신했다.

<하상칠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용자 기록>

* 필자 주: 주소에서 PYNYANG(핑양)DECHEL(데철)은 각각 JINYANG(진양)DECHEON(대천)의 오기로 판단된다.

 

2) 마산 이주

같은 해 몇 달 후 신을순과 결혼했고, 진해 소재 해병대 문관으로 취업되어 인접한 마산으로 이주했다. 마산에는 이미 몇 명의 일가가 살고 있었고, 진해로 통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해병대에 약 4년 간 근무한 후 자영업을 하기 위해 퇴직했다. 처음엔 이것저것 하다가 1957년부터 '대동얼음'이라는 상호로 얼음 소매업을 시작했고 운이 좋았는지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처 신을순의 증언).

35세의 중년 가장이었던 1960년 셋째 딸이 태어난 지 며칠 후에 3 15의거가 일어났다.

이날 그는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시위에 참가했지만 이 사실을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처 신을순도 산 지 며칠 되지 않은 빨간 구두가 다 헤진 것을 보고 시위하다 엄청 쫓겨다녔나보다 짐작만 했을 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한다.

 

3) 의거 참가 이후

3·15의거 참가 이후로도 얼음 판매업은 번창했고, 오동동의 한 요지(불종네거리 현 경남은행 지점 자리)에서 잡화점까지 운영해 상당한 돈을 모았고, 집도 더 좋은 곳으로 몇 차례 옮기는 등 부자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처 신을순은 우인의 채무 보증을 섰다가 당시 논 10마지기에 해당하는 막대한 빚을 대신 갚느라 상당한 재산을 날리기도하는 등 어려운 우인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받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 후로도 돈벌이는 잘 되었지만 주택이나 상가 등 부동산 투자는 하지 않았다.

1961년에 사단법인 경찰동우회(이하 경우회)에 자문위원으로 가입해 1981년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969년에 마산얼음상인조합 설립을 주도했고, 경남 인조빙 판매조합장을 맡아 1974년에 얼음 판매업을 완전히 그만둘 때까지 계속했다(참고로 이 무렵 냉장고와 제빙기의 보급으로 얼음 판매업은 사양산업이 되었다).

1972년부터는 마산 도심(구 한국은행 길 건너편)의 작은 땅을 임차해 제일주차장 을 운영했다.

1973~1975년 진양 하씨 종친회 마창지구 회장, 2006~2009년 양녕공 공신문화제 회장을 역임하는 등 가문을 유지하고 빛내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시골에 사는 수많은 조카들을 마산 도시로 불러들여 학교 다니게 했고, 남자 형제 중 일곱째이면서도 편모를 돌아가실 때까지 불평 하나 없이 모셨고, 명절이 아니더라도 집안은 친척들의 수시 방문으로 법석대었다.

80세가 되던 2004년에 오래 동안 생업이었던 주차장 영업이 힘에 부치자 생업을 중단했다.

그 후로는 주로 노인당에서 회장도 하면서 소일하거나 거의 매주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여생을 보냈다.

2010393·15의거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고민 끝에 증언을 결심하고 자식들에게 털어놓았다. 동년 7213·15의거기념사회 를 찾아가 증언을 녹취했다.

90세가 넘어서도 건강을 자랑하던 그는 어느 날 복통으로 병원에서 위암 4기 판정을 받았고 그 후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식사를 거부하는 등 스스로 생명 단축을 재촉해 2017726일 경남도립마산의료원에서 향년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별세 넉달 전인 2017년 3월 15일 제57회 3·15의거 기념식에 참석한 선생의 마지막 모습>

-마산3·15아트센터 대강당-

 

그는 슬하에 15녀를 두었다. 평소 그는 자식이든 조카든 후손 중 누구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임명직이나 선출직으로 관직에 진출하기를 바랐지만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해 항상 안타까워했음을 필자는 기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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