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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1 00:00

무등산 산행기-3

무등산 산행기-3

 

장불재를 내려다보며 하산하다.

장불재는 무학산 서마지기보다 훨씬 더 평평하고 너르다. 마산 같으면 만날재 같은 역할을 했다. 한쪽에는 방송중계탑들이 모여 있다.

 

하산길은 일방적인 내리막이 아니다. 중봉으로 가는 넓고 평평한 임도를 마다하고 북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내려간다.

광주천 발원지 표말이 나온다. 정말 소소한 웅덩이, 물은 있지만 마실 수는 없다.

좀 더 내려가니 갈림길이다. 등산객들 대다수는 바로 직진 하산길을 가는데 우리는 중봉 방향 쪽 오솔길로 들어선다.

 

 

능선들의 중간을 가로질러 가다보니 내리막과 오르막을 반복한다. 그러나 정말 이 코스로 잘 왔다. 무등산을 국립공원으로 만드는 데 산 위의 주상절리와 함께 중요한 요인이 된 엄청난 규모의 너덜을 두 개나 건넜다.

앞서 가는 일행들이 일렬로 너덜강(경상도식 이름)을 건너는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신과 함께라는 영화에서 본 저승의 어느 곳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무슨 고찰의 터를 지나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가다보니 작은 갈림길이 나온다. 먼저 도착한 허 원로, 한 등산객에게서 막걸리를 얻어 마시고 있다.

혼자 마시기 미안한지 권하는 잔을 모두들 마다하다. 산행 중에서는 술 안 마시는 게 좋다고 말한 게 당신인 것 같은데...

산악회 이름을 영자(영혼이 자유로운,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산악회로 바꾸자는 실없는 얘기도 하며, 무등산이 멋지다며 칭찬도 하며, 한참을 왔나보다 하는데 갑자기 넓은 임도가 나타난다.

씩씩하게 큰 길을 따라 얼마 안가서 좌측으로 상당히 가파르게 꺾이는 곳에 멀리 무등산 정상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사각정이 하나 있다.

잠깐 휴식을 취한 정자의 이름은 만치정(晩峙亭; 나뭇꾼들이 저녁 무렵 풀피리 불며 쉬어가는 언덕을 의미하며 늦재의 한자식 표현).

 

 

 

이제 다들 다리가 좀 아픈지 뒷걸음으로 내려온다. 희한하게도 뒷걸음질 치면 모인 다리가 좀 풀어지는 듯안 느낌이 든다. 나만 그런가? (그 며칠 후 신문에서 뒷걸음치면 치매 예방에 좋다는 기사를 봤다.)

원효사 뒷문 쪽에 도착하니 지도가 그려진 팻말이 하나 있다. 다들 어디쯤인지 궁금해 지도를 바라보는데 현재위치 표시가 없다. 역시 허 원로, 지나가던 국립공원 차량 탑승자에게 불평 섞인 민원을 제기한다.

원효사 일주문을 통과하니 바로 주차장이다. 오늘 산행길은 약 12km. 아~ 장단지가 모여온다.

점심 겸 저녁, 이 역시 허 원로가 순대가 유명하다며 추천한 창평전통시장의 창평장터국밥’.

식당으로 가기 위해 무등산을 조금 내려오니 어제는 보지 못했던 계곡 초입에 마을이 나타나고 어젯밤(?)을 보냈던 단풍산장’의 큰 간판이 보인다.

좀 더 내려오니 무등산 수박 단지라는 대형 입간판도 다가선다. 사실 이번 등산 전까지는 무등산 하면 수박밖에 몰랐다. 수박을 팔았더라면 반드시 샀을 것이다.

삼거리에서 우측에 있다는 소쇄원도 무시하고 좌측 광주호를 끼고 '창평장터국밥'으로 GoGo.!

목적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등산이 광주 동쪽 끝에 있고 담양군과 경계를 이룬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창평장터국밥'집 사장은 자신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자기 집 자랑을 한참 늘어놓고 우리가 앉은 방 벽에 그려진 풍악놀이 그림도 자랑한다. 하도 생동감이 있어 한 컷했다. 감상들 하시며 추억도 되새겨보시길 ...

이 글을 여기까지 써놓고 앞선 산행기를 고참원로 블로그에서 원로 시키는 대로 했더니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코치가 없었다면 아마 아직도 못 찾았을 것이다.

블로그의 마지막 산행기가 20161229일자 비슬산 산행기다. 100산을 근 2년이나 안 간 것인지 아니면 그 후로는 산행기를 안 쓴 것인지 헷갈린다.

몇 개 더 살펴보니 대개 사진 위주로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에이, 미리 보았더라면 이렇게 길게 쓸 필요가 있었냐?

 

다시 섬진강휴게소.

커피 한 잔씩 들며 쉬었다가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다들 좋았다는 감상 피력하며 다시 만날 기약을 하다. 고작 일주일 후 무학산 둘레길에서.

무등산(無等山), 내 맘대로 해석하길,

광주인들에겐 같은 등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산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등급 없이 모두에게 평등한 산이다. 나 같은 초보 등산객도 큰 무리 없이 오르내릴 수 있는 무등등한 산이기에.

꼭 한 번 와보고 싶었지만 올 기회가 없었던 산, 다시 올 기약을 하기도 어려운 산.

안녕!

 

[광주 무등산 산행 개요]

* 20181130~121: 12

* 참가자 : 허정도(원로, 해외원정대장), 서익진(가짜 원로, 백산 산행기 담당), 김재현(예비 회원), 정규식(전 회장), 신삼호(전 백산대장, 육대주추진단장), 손상락, 임학만(보급 및 백산대장), 신성기(신입회원)

* 불참자 : 김용운(회장), 김흥수

* 코스 : 창원마산 3.15아트센터 주차장 남해고속도로 섬진강 휴게소 광주서구 나주식육식당 단풍산장(일박) - 원효사 주차장 무등산 옛길 입구 중봉 위 능선 삼거리 서석대(정상) - 입석대 장불재 광주천 발원지 너덜강 만치정 원효사 주차장 장평장터국밥 섬진강휴게소 3.15아트센터 - 해산

 

 

, 사진 / 서익진 경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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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산행기-2

무등산 산행기 - 2

 

갑자기 울리는 알람 소리. 아침 6시다.

8시에 식당에서 바지락 죽 먹기로 되어 있는데 무슨 기상이 6시람. 7시 기상해도 충분한데... 다들 나이 값 하느라 그런지 별 불평도 없이 일어난다.

바지락 죽 일인당 1만원. 그러나 그 환상적인 맛 덕분에 100산대장 어젯밤 받았던 비난을 상당히 회복했다.

 

 

주인장이 포장해준 닭 조리탕 남은 것을 받아들고 전체 기념사진을 찍는데 차오차오 개가 우리 옆에 어슬링거린다. 이름이 문수란다. 좀 위에 있는 원효사에서 키우다 사정이 안 되어 자기에게 그냥 주었단다.

문수와 함께 사진 찍으려고 앞에 앉혔는데 셔터 누르는 찰나 도망가 버려 실패했다. 그래 환생하신 문수보살께서 어찌 중생들과 같이 사진 찍으려 했으랴.

830 숙소 출발.

 

금방 원효사 앞 사설주차장(3천원/하루)에 주차하고 즉시 산행을 시작했다.

무등산이 국립공원인 줄은 안내판 보고 이미 알았지만 산행로(팻말에는 옛길로 되어 있다) 입구에 수 명의 직원이 서서 감시하는 줄은 몰랐다.

입산자 자동 체크 장치도 있다. 어흐, 담배와 라이터 뺐길까봐 조바심이 들었는데, 조사는 하지 않는다.

막 오르막으로 들어서다가 물을 준비하지 않은 게 생각나 다시 내려와 가게에서 생수 작은 것 8개를 신삼호 대원이 구입해 나하고 4개씩 나누어 배낭에 넣었다. 다른 회원들 이미 올라가 버리고 보이지도 않는다.

얼마 안 올라가서 만난 제철유적지 푯말을 그냥 지나쳐 올라가니 김덕령 의병장 묘 푯말이 나온다. 이번에는 유심히 읽어본다. 그의 활약상과 무고로 인한 억울한 죽음에 관한 간단한 기록이다. 언제 어디서나 영웅을 시샘하는 자들은 있게 마련인가!

 

 

조금 더 올라가니 무등산 옛길 물통거리란 나무 팻말이 나온다. 나뭇꾼들의 땔감이나 숯 이동길이었다가 1960년대에 무등산 정상에 군부대가 들어선 후부터 보급품 나르던 길이었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그냥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중봉에서 오는 능선 길과 만나는 곳에 도착해보니 절반 이상은 올라온 것 같기도 하고, 화장실 겸 휴게소가 있어 보급대장이 나눠준 보급품을 먹으며 줄어든 에너지를 재충전하다. 보급대장의 은혜를 되새기는 시간이다.

다시 출발해 얼마 지나니 갑자기 주상절리 형태의 암벽이 턱 하니 나타난다.

사진들 찍으며 야단법석 하는데 지난 가는 등산객 진짜 서석대는 좀 더 위에 있단다. 약간 머쓱해진다.

서석대(瑞石臺) 장관을 바라보는 전망대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주상절리는 보통 해안가에 있는데 산봉우리 주상절리대라 처음 본다. 국내 유일한 것인지 궁금하다.

 

 

좌측으로 난 길을 돌아서 올라가니 서석대 위쪽 뒤편에 무학산 서마지기 같은 펑퍼짐한 곳이 나오고 무등산 정상이 정면으로 마주보인다.

등산객인 시민은 더 이상 접근금지다. 군부대가 무등산 정상의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을 점령한 것이다.

푯말에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정상의 원래 모습과 비교해 보니 암석봉우리들을 통째로 파괴해 버렸다. 이러한 만행을 과연 1960년대 야만의 시대, 군부독재정권이 아니고서야 어찌 감히 저지를 수 있었을까? 전두환의 광주시민 학살도 그 연장선임을 알겠다.

서석대(1100m)라고 새겨진 비석 앞에서 학봉산악회 현수막을 앞세우고 단체증명사진을 찍다.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현수막이 주인공이다. 이 사진을 위해 여기까지 발을 절뚝이며 올라온 것이다.

 

 

 

서석대는 한자로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해설판은 이 유식한 해석이 식자우환임을 금방 깨닫게 한다. 선돌의 한자식 표현(음 차용)으로 고대 선돌 숭배신앙의 중요한 표상이라는 거다. 반만 맞춘 것도 아니다. 전혀 맞추지 못했다.

! 상식(常識)의 허망함이여! 세인이여, 상식이 많다고 자랑하지 말지어다!

그렇다면 옆에 있는 입석대(立石臺)도 마찬가지로 선돌의 한자식 표현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고, 역시 그러함이 곧 확인되었다.

사방이 확 트인 곳이라서 그런지 올라올 때는 없던 세찬 찬바람이 횡행한다.

이제 보급품을 소진시키고 하산할 시간이다.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백산대장 멋진 곳을 찾았다. 돌병풍으로 둘러싸여 등산로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이다.

돌병풍을 우측으로 돌아가니 아늑한 서향받이 조그마한 분지가 나타나고 중심부에 파헤쳐진 무덤(?)이 있다. 문외한이 봐도 명당자리인데... 국립공원 내 무덤의 이전 공고를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짐승이 그랬는지 파헤쳐진 이유를 모르겠다.

드디어 100산대장이 자기도 모르게 숨겨두었던 반전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왔다. 남은 보급품을 끌러먹는데 여전히 온기를 간직한 닭도리탕이 남다른 맛을 준다.

 

 

산 정상에서 먹는 닭도리탕은 세상에서 역사상 우리가 처음일 것이고 향후 역사에서도 있을 법하지 않은 쾌거가 아닐까.

기대하지 못했던 커피까지 나눠주는 보급대장. 모두들 만족하며 선견력 있음을 맘속으로(?) 칭송하다. 언젠가 송덕비라도 세워줘야 하지 않을까.

배를 든든히 채우고 본격적으로 하산한다. 곧 입석대를 만났다. 단체도 찍고 개인별로도 찍고.

 

 

입석대에 관찰사 등의 이름이 큰 글자로 새겨져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실감난다.

전 세계 유명 관광지마다 한국인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곳이 없다하니, 낙서의 민족인지 기록의 민족인지 헷갈린다. 나도 어딘가 이름을 새겨 놓아야 할까봐? <<<

글, 사진 / 서익진 경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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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5 00:00

무등산 산행기-1

무등산 산행기 - 1

 

학봉산악회 전 100(산림청에서 선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 대장 신삼호 회원에게 몇 년 전부터 약속했던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오랜만에 가는 100산 등산이라 인자부터 산행기 꼭 쓰겠다고 덜컥 약속해삤다.

또 어기자니 면이 서지 않고... 잘 찍지도 않던 사진도 찍고 하니 허정도 고참원로 날리는 멘트, “우와 열심히 하네, 기대된다.”. 부담시럽게... 안 쓰모 안 될 이유가 또 생기뿌릿다.

 

20181130일 오후 2, 3.15아트센터 주차장에 8명의 선수 집결. 신삼호 회원과 임학만 회원의 승용차 2대에 내맘대로 정한 원로팀과 비원로팀으로 나눠 타고 출발.

원로팀 차 안의 화제는 단연 허정도 회원이 출발 전에 한 권씩 나눠준 따끈따끈한 최신작 도시의 얼굴들이다. 마침 경상대 출판부장 전화인지, 여러 곳에서 주문이 온다는 얘기를 훔쳐듣다.

대박 예감이 든 동승자들, “대박==이라며 벌써부터 한턱내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역시 반격의 대가, 이 위기 속에서도 받아친다. 한턱 약속 대신 서평을 써서 어디든지 올려라는 거다. 밥 한 그릇, 술 한 잔에 서평 하나, 어째 갑자기 엄청 밑지는 장사라는 느낌이 확 든다.

웃고 떠들다보니 벌써 휴식장소로 약속한 섬진강 휴게소. 커피 한 잔씩 들고 다시 출발.

서광주 인터체인지였던가를 돌아나오니 차창으로 흘러가는 나에겐 좀 생경한 빛고을 광주 거리다. 5.18의 비극을 잠깐 생각하게 하더니 곧 떠오른 추억의 얼굴 하나.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연천 신망리 6군단 직할 포병대대 알파소대에서 2년 정도 같이 군대생활을 했던 광주 출신의 한 친구다. 시도 쓰고 노래도 잘 하던 화가였다. 그는 사지반장, 나는 2.4종 창고지기. 둘이 죽이 맞아 야산 꼭대기 사지반 참호에서 시간을 죽이고 추운 겨울밤 페치카 불에다 라면을 반합에 끓여먹던 추억이 아스라하다.

제대 후 꼭 만나자고 했지만 40년이 다가도록 만나지 못했다. 그나 나나 생활에 쪼달렸던 것 같고, 그동안 마산과 광주는 얼마나 멀었던가? 남해고속도로가 뚫려 공간은 지척이 되었지만 심리적 거리는 그만큼 줄지는 않은 것 같다.

광주 서구 어느 이면도로의 나주식육식당.’ 허원로의 추천으로 100산대장이 일찌감치 5시에 예약을 했단다.

 

 

이 시간에도 손님이 있는 걸 보니 유명한 맛집인가?

소고기 생고기가 부위별로 두 접시. 꼭 육회 같다. 생고기와 육회의 차이를 두고 설왕설래하다가 여주인을 불러 물었다.

정답: 오늘 갓 도살한 고기는 그냥 먹는 생고기, 하루만 지나면 양념으로 버물러 먹는 육회.

 

여주인은 바깥주인이 직접 도살한 소만 사용하며 좆나게 맛있다는 걸쭉한 말발에 모두들 나자빠지다. 어원 놀이 끝에 경상도에서는 좆빠지게’->‘좆나, 전라도에서는 좆나게로 변했고, 최근 전국적으로 졸라로 전화되었다는 추정에 모두들 동의하다.

허 원로, ‘졸라의 어원이 숭하니 애들에게 알려줘 가급적 안 쓰게 해야 한다고, 원로다운 결론을 내렸다.

유사어로 허벌나게허벌은 뭘까? 아무도 몰라. 안주인 얘기로 근처에 옛날부터 도살장이 있었다 하던데, 나오면서 보니까 인접 거리에 식육식당 간판이 상당히 많고 용감하게도(?) ‘백정식육식당이라는 간판을 버젓이 내건 집도 있다.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내비아가씨 시키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서석동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김재현 교수 왈, ‘상스러운 돌이라고 해석하자 다들 군말 없다, ? 모르니까. 근처에 그런 방구가 있나보다 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진실이 드러날 것임을 그때는 어찌 짐작이나 했으리.

숙소가 무등산 어딘가 산장이라는데, 무등산은 보이지도 않고 산자락을 올라가다 고개 비슷한 것을 넘어서더니 다시 내려간다. 무등산이 무학산보다 200미터 이상 더 높다는데, 아이고 내려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곧 도착.

이름 하여 단풍산장’.

 

 

초겨울 단풍은 모두 지고 없는데 처음 보는 개 한 마리 반갑게 맞이한다.

차오차오 종으로 중국에서는 엄청나게 비싼 인기 만점 견공이라나. 그러자 개님이 더욱 멋있어 보였고, 쓰다듬어주며 같이 좀 놀아주었다.

 

 

그런데 식당 집합 신호가 떨어진다. 이른 석식을 먹고 바로 달려왔는데 산장 식당에 닭조리탕을 예약해놓았다고... 모두들 구시렁거리면서도 100산대장이 하신 일을 어쩌겠는가... 막걸리를 안주삼아 겨우 몇 점씩 먹고는 대부분을 남겼다.

주인장이 내일 아침에 다시 데워줄테니 산에 올라가서 먹으라 한다. 으잉, 그런 생각은 꿈에도... , 여기에도 100산대장이 숨겨놓은 또 하나의 반전의 복선이 숨어 있을 줄이야.

금방 방으로 돌아와 각자 주무실 준비하고 거실에 모였다.

100산대장이 영원한 보급대장의 진가를 다시 발휘하다. 수출용 진로소주 큰 병 하나와 중국산 술 큰 병 하나를 꺼내놓는다.

 

 

소주, 맥주, 막걸리에 이은 술 파티 겸 회의 아닌 회의. 무엇보다 신입 김재현과 신성기의 정식 가입 여부를 논의하는데, 허 원로, 오늘 하는 것 보고 결정한다는 엄포를 놓자 학봉산악회 회원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려는 듯 다른 기존 회원들도 맞장구치며 분위기를 잡는다.

신성기 예비회원 눈치 빠르게도 원로들 주무실 방에 잽싸게 침구를 깔아놓고 오자 허원로 당장 합격 판정을 내린다. 속이 훤히 내다보인다. 그럼 김재현 예비회원은?

철학과 교수답게 소신과 강단이 있다. 회장, 100산대장, 해외원정대장, 육대주추진단장, 보급대장, 무슨 소린지 출발 때부터 해온 정신없는산악회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내년 시산제에서 무릎 꿇는 것 보고 결정한다는 판결에 내가 왜 무릎을 꿇어라는 얼굴이다. 모두들 산신에게 무릎 꿇고 절한다는 의민데...

나도 후명년 시산제까지 1년간 의무 산행하는 것 본 후에 결정하자고 공갈을 친다. 사람 놀려먹고 놀림감인 줄 알면서도 박자 맞춰주는 재미로 화기애매한학봉산악회.

해외 원정 산행안이 나와 논란 끝에 425일에 34일 북해도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해외원정대장 허원로가 김재현 회원(?)에게 일정 짤 것을 지시하고 김 회원(?) 그렇게 하겠다 한다. 이거 도대체 앞뒤가 맞는 거여? 정신없는 산악회 맞는 거 아녀?

시간가는 줄도, 두 병의 독주가 비는 것도 몰랐다.

11시가 넘었나? 술이 떨어지자 회원인지 아닌지 애매한 김재현 예비회원, 술 더 없냐고 큰소리친다. 막 가자는 건가? 100산대장 잽싸게 식당에 가서 막걸리 3통을 더 가져온다.

이젠 김재현 썰 푸는 판이다. 허 원로는 습관대로 벌써 누워 가늘게 코를 골고 몇 사람도 자리에 누웠다.

내가 같은 직장 다녔다고 끝까지 김재현을 상대하고 다른 몇 사람도 같이 어울린다.

김재현 철학자 삼미(三味)’ 이론을 전개한다. 모임은 재미와 의미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묘미가 있어야 한단다. 정말 괜찮은 이론이다. 다른 데서 써먹을 만하다. 막걸리도 떨어지고 파장이다.

김 교수를 방으로 끌고 들어와 눕히고 나도 옆에 누워 잠을 청한다. 조금 있다 부시럭 소리가 나더니 김 교수 일어나 여기가 어디야? 나 집에 갈거야라며 고함친다.

내가 그의 손을 잡고는 여기 집이야, 누워 자면 돼해도 여러 번 같은 고함을 치더니 진짜로 일어서서 몇 발짝 옮겨 거실로 나가더니 폭 고꾸라져 잔다. , 고작 서너 걸음 가더니 집에 다 온 것으로 생각했나보다.

철학자의 술 쿠세(?)는 정말 점잖다. 고함 몇 마디로 끝이다. 아침 기상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화장실 찾는 사건 있었다는 후일담은 나는 자느라 알지 못했다.)<<<

글, 사진 / 서익진 경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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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8

. 맺음말

 

이 글에서 우리는 1960315일 마산에서 일어난 1차 시위에 참가한 하상칠이라는 특정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다음 두 가지 의문에 답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는 시위 참가 동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침묵의 이유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의문과 관련해 사회적 요인을 바탕으로 개인적 요인들에 천착함으로써 개인에게 체화된 사회적 정의감을 확인했다.

두 번째 의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서 국가가 개인에게 가한 보복 공포증과 빨갱이 트라우마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볼 수 있었다.

<1985년 회갑연 때 가족과 함께 / 맨 왼쪽이 글쓴 이>

 

하상칠의 증언은 315의거 당일 시청과 무학국교 앞에서 벌어졌던 야간시위의 전개과정을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향후 4월혁명 공로자 신청이 추가 시행된다면 하상칠과 같은 선의의 피해자가 구제되고, 나아가 2020315의거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예정된 315의거사개정판을 낼 때 그의 증언이 반영되어 좀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역사 서술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의 연구가 315의거의 다른 참여자들에 대한 미시사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기대감과는 반대로 이 글을 준비하는 내내 왜 당사자가 살아있던 동안에 이러한 논문을 쓸 생각을 하지 못 했던가라는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사망 후에야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증빙자료는 고사하고 85세의 노인이 50년 전 사건에 관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증언밖에 없는데다가 그를 아는 소수의 사람에게서 그것도 극히 한정되고 단편적인 정보밖에 얻을 수 없다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구술사 분야에 종사하거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너무 늦기 전에 가급적 많은 사람의 구술부터 받아두는 것 자체가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개별 연구자 차원에 맡겨두어서는 안 되며 공공의 관심과 지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방법론적으로 이 글은 여전히 한계를 드러낸다.

첫째, 미시사 방법론의 원용만으로는 증거의 단편성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아마 주관성과 객관성 간의 거리는 완전히 소멸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미시사 방법론이 가진 영원한 한계일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조사자나 연구자의 더 많은 노력에 의해서만 다소간에 해소될 수 있다.

둘째, 미시사 방법론을 원용해 하상칠이라는 개인의 삶과 활동을 천착했지만 관련 자료와 참조인의 부족으로 좀 더 생생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개인과 사회 간의 상호작용을 엄밀하고도 구체적으로 추적하기 어려웠고, 하상칠이라는 개인의 생애와 사회적 활동을 그가 참여한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창()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자신하기도 힘들다.

이는 315의거와 관련된 개인들에 대한 구술 자료가 늘어나고 개인별 사례 탐구가 누적되어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후속연구와 관련해 우리는 하상칠의 증언이 참임을 믿지만 국가보훈처에서는 객관적 증빙서류의 미비를 이유로 유공자 선정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상칠 같은 선의의 피해자를 구제하고 역사적 사건의 리얼리티를 더 잘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행의 객관적 증거주의가 가진 장단점을 명시하고 유공자 선정 방법의 개선책을 제시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끝)

서익진 /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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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2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7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증언록, 478)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자에게 들켜서 보복 당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패가망신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증언할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는 계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그가 구체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짐작해본다.

<젊은 시절의 하상칠 선생>

 

먼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 민주당 정권 시절과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초기 유화 국면이다.

그러나 의거가 발생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가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반공을 국시로 표방한 정권과 특히 경찰 조직의 속성이 바뀐 것은 아니어서 증언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하에서 315의거와 4월혁명은 사실상 잊혀진 사건이었다(남부희, 1995; 이은진, 2004; 남재우, 2005).

다음, 19876월항쟁으로 군부독재가 무너진 후 처음으로 노태우 민선정부가 들어서고 뒤이어 김영삼 민간정부가 들어섰지만 여당의 집권 연장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31019315의거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지만 유공자 발굴 사업은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고, 하상칠은 이러한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다.

2002년 이른바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국민의 정부 출범에도 불구하고 증언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데는 무엇보다 전라도 정권에 대한 불신이 한몫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같은 해 315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자 국립묘지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증언을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지만 이걸로는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다고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2010년에 “315의거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비로소 국가가 기념하는 사건의 관련자를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이 에피소드는 정치권력이 개인에게 가한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가 얼마나 장기 지속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말하기를 이제 그날 일어난 일을 제대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315의거가 우리나라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날로부터 5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그 정신이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늦게나마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민권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마산 시민과 학생들의 용맹성을 들려줌으로써 정의로운 나라 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증언록, 478).

이 진술은 그의 진심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녹취를 풀어낸 사람이 지어낸 미사려구일 것이다.

 

<회갑연 때 아내 신을순과 함께 / 1985년>

 

필자는 그가 말하지 않은 속내가 있을 것 같아 나중에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더니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염려되고 또 자신의 묘 자리에 관심이 커졌는데 유공자가 되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강렬한 욕망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부언하기를 자신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으면 자손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또 자손들에게 마지막 교훈도 남기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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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2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항적 행동으로 표출되도록 만든 사회적 요인이 무엇이었던가를 규명하는 데 치중해왔다. 따라서 315의거의 경우 왜 하필 마산인가라는 의문을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런데 특정 개인의 항쟁 참가, 예컨대 왜 하상칠인가라는 의문에 답하려면 이러한 사회적 요인보다 개인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

사회적 요인이 모든 참가자에게 해당되는 공통 요인이라면, 개인적 요인은 특정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개별적인 특수 요인이다. 양자를 동시에 살펴보는 것은 315의거를 좀 더 복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특정 사건에 대한 기존의 거시 사회사적 분석에 미시 문화사적 분석을 부가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하다.

 

<신을순과의 결혼식 사진 / 1953년 가을>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마산 315의거를 다룬 문헌들에서 왜 마산인가라는 질문은 가장 빈번히 제기되거나 다루어져왔다. 315의거 학술논문총서에 실린 많은 글들도 이 질문을 예외 없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당시 한국의 모든 도시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폭압, 원조경제의 위기에 따른 경제적 곤란, 자유당의 노골적인 부정선거 획책 등 대동소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표출 강도는 지역이나 도시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산 지역에서 이러한 객관적인 사회적 요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작용해 유혈시위가 발생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논자에 따라 구조적 요인과 상황적 요인으로 또는 지역적 요인과 역사적 요인으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정치, 경제, 사회 및 역사적 요인으로 나누어본다. 요컨대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요인은 이 모든 요인을 포괄하며 이 글의 목적상 사회사보다는 미시사에 관심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요 요인들을 간략하게 요약함으로써 뒤이은 개인적요인의 검토를 위한 배경으로 삼고자 한다.

 

첫째, 역사적으로 마산 지역은 조선 말기 개항장이자 구미 열강의 조차지로서 근대 문물에 상대적으로 일찍 눈을 떴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무정부운동 등 사회운동의 주요 중심지의 하나였다.

일본인들과 상권을 둘러싼 충돌도 첨예했기에 일반인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상당히 높았다. 강만길(1999)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마산인의 진취성과 저항성을 키워왔음을 강조한다.

둘째, 사회적 측면에서 해방 직후의 귀환동포와 6.25전쟁 기간의 피난민 중 상당수가 마산에 정착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난민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날품팔이, 고아, 부랑아 등 최하층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인구의 사회적 구성상의 특징에 주목한 이은진(1998)은 정치적 억압, 경제적 곤란, 새로운 사회공동체의 형성이 지역사회의 유동성과 급진성을 촉진한다고 분석했다.

셋째, 경제면에서 마산은 1950년대의 수입대체 기반 경공업화 과정에서 상공업도시로 빠르게 발전했던 만큼 동 연대 말 미국 원조의 감소에 따른 경제 불황(서익진, 2000)의 여파가 상대적으로 더 컸을 것이다.

높은 실업률 등 시민의 경제적 불만도 상대적으로 더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넷째, 정치적으로 민주당 허윤수 국회의원의 변절(자유당 입당)이 미친 다면적인 영향이다.

이 사건은 허윤수와 자유당에 대한 시민의 반감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자유당에게는 충성경쟁으로 부정선거 획책을 위해 공무원뿐만 아니라 경찰과 반공청년단까지 대거 동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민주당에게는 상대적으로 선명성이 강한 신파 세력이 선거운동을 주도하게 만들어 의거의 발단이 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선거포기 선언을 하고 가두시위를 조직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이은진, 1998).

 

이러한 요인들을 배경으로 315 선거일 직전 마산 시내 분위기는 가히 폭풍전야의 상태였다고 평가된다(홍중조, 1992: 108).

지역의 정보나 소문이 집결되는 도심(번화가이자 유흥가)에서 장사를 하던 중년의 하상칠은 이러한 시내 분위기나 민심 동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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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72114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발간한 『3 15의거 증언록』(474~478)에 실린 것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3 15의거 증언록』(474~478)에 실린 원본>

 

부정선거 개표를 막기 위해 시청 앞에서 싸워

하상칠(당시 35, 녹취/2010107)

 

나는 1960315일 자유당이 장기집권을 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자이에 항의하기 위해 오수 6시경 부정선거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마산시청으로 가는 중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오동동빠가 있었고, 조금 앞서 거기에서 당시 도의원이며 민주당 마산시당 위원장인 정남규 씨를 경찰이 체포해 가는 광경을 보았다.

상황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것을 본 후 이번 선거는 무효라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마산시청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35세로 얼음소매상을 하며 마산시 산호동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때 투표권이 있었으며, 내가 어느 당을 찍고 어느 입후보를 좋아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마산시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선거는 국민들이 원하는 사람을 찍는 것인데 왜 선거에 개입해서 이렇게 찍어라 저렇게 찍어라 관여를 하고 위협을 하느냐에 대한 불만이 컸고, 그래서 이 선거를 무효화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투표함이 집결되는 시청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와중에 경찰이 정남규를 잡아가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것을 본 후 내 머리에는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하고 이번 선거는 무효라고 선언한 민주당원들을 경찰이 잡아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이에 대한 분노가 더해 갔다.

나는 부림시장을 지나 시청을 향하여 빠른 걸음으로 큰길로 나섰다.

630분경 마산시청에 도착하니, 이미 경찰들은 완전무장을 한 채 지프와 소방차 등을 배치, 방어진을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사람들이 시청 쪽으로 몰려들었.

우리들은 함성을 지르며 부정선거 개표가 시작되고 있는 마산시청을 점령하기위해 수차례 전진 후퇴를 계속했다. 경찰은 우리를 막기 위해 공포탄을 쏘아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흩어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일단 그곳을 피했지만,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려고 근처 길가 무릎높이의 하수구에 숨었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경찰 쪽으로 계속 돌을 집어 던졌다. 그 시간은 해질녘이어서 멀리에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때였다.

사람들은 밝은 곳에서는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다. 당시 얼굴이 노출되어 데모주모자로 잡히면 곤욕을 치를 것이 분명했기에 소극적으로 행동하던 시민들은 이제 어둠이 짙어질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투석전으로 경찰과 대치했다.

나는 데모 군중들과 함께 시청 쪽으로 가서 투석을 하다가 경찰이 총격을 가해오면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총소리를 피해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 뒤 법원 골목 어딘가에 있을 때였는데 내가 있는 쪽으로 17세쯤 되어 보이는 학생 하나가 어깨를 한손으로 잡고 달려오면서 "저 총 맞았어요. 총알이 제 팔을 관통한 것 같아요" 했다.

살펴보니 다행히 생명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실제로 총을 맞은 학생을 보고는 갑자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 이제 정말 전쟁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산시청 앞에서 투석전과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그 총소리가 시민들을 물러나게 하는 공포사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우리들 심장을 겨누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또 사격을 가해오는 경찰들의 만행에 억누를 수 없는 적개심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총상을 당한 학생을 살펴본 후 치료를 권유하며 가까이에 도립마산병원이 있음을 알려주고, 나는 다시 골목을 빠져나와 투석전을 계속하며 자산동 쪽으로 이동해 나왔다.

이때 많은 시민들이 중과부족으로 점점 자산동 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는데, 그때 소방차 한 대가 데모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목적인지 마산시청에서 자산동 쪽으로 달려왔다.

자산동 무학국민학교를 조금 지나 지금 경남데파트가 있는 곳 쯤 도착했을 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것이 벼락 치는 소리나 대포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이제는 총이 아니라 아예 시민들을 향해 대포를 쏜 것일까 생각하니 전쟁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불빛이 확 하고 번지며 온 천지를 밝혔다. 공포와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곧이어 사람들이 설명하는 걸 들으니 북마산파출소에 불이 나 불 끄려고 가던 소방차가 데모대의 돌 세례를 맞아 그만 전봇대를 들이박아 버렸다는 것이다. 연이어 아름드리 전봇대가 넘어지면서 전선이 합선되어 불꽃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때 시간이 8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정말인가 확인하기 위해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달려가 그 현장을 보았다.

정말 세 동강이가 난 전봇대가 큰길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고 무학국민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돌을 치마에 담아 나르고 사람들은 투석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나는 주변의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넘어진 전봇대를 옮겨 일단 길을 막도록 했다. 우선 사람들은 다닐 수 있지만 차는 다닐 수 없도록 길을 가로지르는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하여 전봇대를 옮겼다.

당시 나는 크고 무거운 얼음 판매를 하고 있어 사람들로부터 힘이 장사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실제로 힘이 꽤 좋았다. 따라서 전봇대는 내가 안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끌고 당기며 옮길 수 있었다.

이제 동강난 전봇대를 무학초등학교 앞길에 가로놓게 함으로써 길을 차단해 경찰의 접근을 막고 또 데모대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구역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돌을 땅에서 줍지 말고 철길에 있는 자갈을 사용하자고 말하면서, 일부 학생들을 데리고 철길로 올라갔다. 학생들에게 돌은 함부로 쓰지 말고 일단 차들이 철길 밑을 지나갈 때 뒤를 보고 퍼붓자고 시켜놓았다.

당시 학생들은 자기들보다 나이가 많고 힘이 센 아저씨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예상한 것처럼 조금 있으니 선거함을 실은 차가 북마산 지역에서 성호초등학교 앞을 지나 시청 쪽으로 가기 위하여 우리 가까이 다가 왔다. 그 차 안에는 모자를 눌러 쓴 4~5명의 경찰이 타고 있었고, 선거함을 지키고 보호하는 듯 했다.

그 시간으로 봐서 아마 마산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서 개표를 위해 마산시청 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선거함을 실은 차는 시청으로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차가 철길 밑을 통과하자 철길 위에서 우리가 퍼붓는 돌 세례에 다급히 차를 되돌려 도망쳤다.

우리들이 던진 돌 세례를 피하기 위해 선거함 뒤로 숨거나 선거함을 뒤집어쓰고는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10여 분 후 9시경이 되었을까, 또 지프 한 대가 다가왔다. 형상으로 보아 좀 높은 사람들이 타고 또 선거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차를 향해서도 돌 세례를 퍼부었으나 덮개가 천으로 되어 있어 투석의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이내 바리케이드 앞에 다가와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곧 차를 돌려 도망쳤다.

다시 조금 지나서 차가 한 대 현장에 도착했다. 세히 보니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 같았다.

이 차도 바리케이드로 인해 더 이상 가지못하고 다른 차들과는 달리 그곳에서 머물러 있어 무슨 일인가 하고 철둑에서 내려와 보니 젊은이들이 달려들어서 벌써 총을 모두 뺏은 상태였다.

그때 나는 이 상황이 유혈 사태로 갈 우려가 있음을 직감하고, 지금 우리가 대치하는 원인과 목적을 상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어린 군인들이 무조건 명령에 움직였을 것이 분명한데도 적으로 간주하여 가해하는 것은 정의로운 시민정신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판단이 서자 먼저 총을 탈취한 학생들에게 "학생,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데모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방해하는 무리들의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이지, 군인들이나 경찰들을 없애거나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총을 서로 겨누고 또 쏜다면 이건 우리의 목적과는 다르. 여기 군인들은 옷이 다를 뿐 우리들의 형제이고 같은 심정일 수도 있다. 단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왔을 뿐이다. 따라서 총을 뺏어 서로 겨누는 짓은 하지 말아야한다." 고 말하며 총을 모두 회수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너희들이 보다시피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이렇게 항거하는 것은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인데, 너희들이 만약 총으로 우리를 위협하거나, 명령이라면서 총을 쏜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는 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유혈사태를 막아야 한다. 젊은 너희들은 오히려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도와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우리는 결코 너희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님으로 여기 있지 말고 돌아가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저렇게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경찰들을 도와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총을 잃고 가면 그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총은 돌려주겠다. 여기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의로운 너희 부모와 형제들이다. 록 군복을 입었어도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라." 며 빼앗았던 총을 돌려주었다.

군인들은 "고맙습니다" 며 여러 번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났다.

그렇게 군인들을 돌아가게 했을 때, 시청 쪽의 총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고, 드디어 우리 가까이서 총을 쏘아대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들 심장이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무학초등학교 담장에 숨어 대항해보려 했으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어쩔 수없이 어둠 속에서 무학초등학교 담을 넘어 철길을 따라 겨우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순간에도 경찰들은 데모대들을 향해 총을 쏘거나 체포하기 위해 날뛰고 있어, 그들의 눈을 피해 겨우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옷이 물에 빠진 듯 젖어 있고 온몸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누가 나를 기억할까 너무도 두려웠다.

식간에 발생한 일이고, 또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고 자라면서 배운 가장 정의로운 행동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제일 선두에 서서 사태를 주동한 것이 알려지면 그들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고 위해를 가해올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두려웠다.

나는 그때 셋째 딸을 갓 출산했었고, 그리고 아내와 어린 아이들이 계속 눈에 걸렸다.

그렇게 건장했던 몸이 사흘 동안 어깨와 팔 그리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그리고 잠을 자면 온 몸이 가위에 눌리었고, 정말 누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 경찰에 알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계속되었다.

당시 실제로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붙잡히면 혹독한 벌을 받았으며, 공산당으로 몰려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것이 연일 이어졌다.

나는 특히 공산당으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나는 6·25 때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포로였었기 때문에 공산당으로 간주하여 처벌받는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날 밤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에게도 가족들에게도 간혹 세상이 달라지는 듯해서 이야기를 하고는 싶었지만, 음속에 담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날 밤 나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 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날 일어난 일을 제대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3·15의거가 우리나라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발점이고 모태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날로부터 5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그 정신이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은!

그리고 늦게나마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민권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용맹성을 들려줌으로써 정의로운 나라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날 밤 조국을 위해 꽃다운 나이에 산화해 가신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3·15의거를 진압하기 위해 무장한 경찰들>

 

 

3. 증언 내용의 분석과 평가

하상칠이 참가했다고 증언한 3 15의거 당일 시청 앞 야간 시위는 3 15의거의 백미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여기서는 그의 증언 중 이미 확인된 사항들과 어긋나는 부분을 지적하고, 그의 증언으로 새로이 밝혀진 부분이 무엇인지를 명시해두고자 한다.

그는 오후 6시 경 집을 나와 시청으로 가던 중 오동동빠 근처에서 정남규가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것을 (증언록, 474) 보고 선거무효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시각에 정남규는 민주당원이 주도한 가두시위 중 오후 3시 반경에 경찰서로 연행된 후 계속 구금상태에 있었음은 명백히 밝혀진 사실이므로 다른 사람을 착각했음이 확실하다.

게다가 이 시각에 오동동빠 근처에서 누군가 연행되었다는 증언은 우리가 알기에 다른 어디에도 언급된 바 없기에 사실이라면 최초의 언급이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그의 증언 중 유일하게 사람이나 시간 또는 장소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사항인데 사건 후 50년이 지났고 85세 노인의 기억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오후 8시쯤 지나 소방차가 전봇대를 들이받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동강이 났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소방차가 북마산파출소 화재 진압 차 출동했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대다수 자료와 증언에 따르면 북마산파출소 화재는 930분경으로 알려져 있고, 시청 앞 도로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중 경찰 쪽에서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살수를 하던 여러 소방차 중 하나가 갑자기 데모군중 쪽으로 돌진해왔다는 것이고, 이 돌진의 이유가 운전수의 돌발 행동인지 지휘자의 지시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어쨌든 『3 15의거사』 300쪽에 살수를 하면서 돌진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어디로 이동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현장의 시위대를 해산시킬 목적으로 돌진했던 것으로 보는 게 사리에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증언 중 하이라이트는 첫째 동강난 전신주를 직접 옮겨 도로를 가로지르는 바리케이트를 친 것, 둘째 학생들을 데리고 철길 위로 올라가 이 길을 통과하려던 두 대의 차량에 투석해 되돌아가게 만든 것, 셋째 마지막으로 세 번째 차량을 타고 온 군인들에게서 시위대가 총을 빼앗은 것을 알고는 이들을 설득해 총을 되돌려주게 하고 군인들에게는 시위대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설득해 유혈사태 없이 사건을 마무리했다는 요지의 진술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은 거의 전모가 밝혀져 있지 않다. 소문만 무성했을 뿐 어느 누구도 이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자신이 직접 참가했거나 옆에서 보았다는 증언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 개의 사건 중 두 개가 국회조사단 앞에서 도경수사과장 김경술의 증언 속기록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권종림은 ... 9시 경 무학초등학교 앞 노상에 쓰러져 있는 전주로서 국도를 차단하고 동시에 박주복은 구한오를 지휘, 구마산 방면으로 통과하는 쓰리코타 운전수인 육군502 장거리 통신대 마산 파견대 소속 상사 이재중을 구타하여 동 인이 가지고 있던 칼빈 총 일정을 탈취하고 실탄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본인에게 반환하고..., 구한오는... 오후 9시경 무학초등학교 앞에서 군 쓰리코터에 대한 투석사건에 가담하였고 군인 이재중의 총기를 박주복, 정상숙과 같이 탈취했다가 반환한 제정수(시당 감찰위원)... (315의거 증언록, 676)'이라고 말했다.

김경술의 증언은 경찰의 수사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당시 경찰은 빨갱이의 소행이거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조작하기에 여념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여기서 지목된 각 사건의 행위자를 실제의 행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의 존재 자체를 지어내어야 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해당 사건들의 실재를 확인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하상칠의 증언은 이들 사건에 대해 시위 참가자 측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증언으로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

세한 전말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는 수사기록과 모든 증언을망라한 면밀한 조사연구를 통해 진실에 가까운 스토리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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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8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등에게서 탐문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쓰였음을 밝혀둔다. 정식으로 준비된 인터뷰가 아니어서 각 탐문이 있었던 시간과 장소를 적시하지 못한 것은 필자의 잘못이다.)

 

1) 성장 과정

하상칠은 192652일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산리(지리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서 부친 하원수와 모친 김령 김씨 사이에서 9남매(81) 7남으로 출생했다.

당시 조선의 대다수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극빈의 가정형편에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고, 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언제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어린 시절에 진양군(현 진주) 수곡면 대천리로 이사했고, 일가친척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인접 마을 사곡리에 자주 놀러 다녔다.

근처에 있는 낙수암(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542, 송정 하수일(1553~1612) 사적비, 유림의 강학소, 정사가 있다)과 대각서원(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344)에 자주 놀러 다녔다(이 과정에서 글도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안타깝게도 그의 청소년 시절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데다가 지금은 이에 대해 얘기해줄 사람이 한 명도 살아있지 않다).

1950(25) 여름 남원에 살던 양모(養母, 모친 친구라고 함)의 집안일을 도와주러 갔는데 인근 야산에서 나무하던 중 인민군에게 강제 징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포로로 잡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거의 3년을 보낸 후 19536월 중순 반공포로 석방 조치에 따라 수용소에서 풀려나왔고 고향에서 은신했다.

<하상칠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용자 기록>

* 필자 주: 주소에서 PYNYANG(핑양)DECHEL(데철)은 각각 JINYANG(진양)DECHEON(대천)의 오기로 판단된다.

 

2) 마산 이주

같은 해 몇 달 후 신을순과 결혼했고, 진해 소재 해병대 문관으로 취업되어 인접한 마산으로 이주했다. 마산에는 이미 몇 명의 일가가 살고 있었고, 진해로 통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해병대에 약 4년 간 근무한 후 자영업을 하기 위해 퇴직했다. 처음엔 이것저것 하다가 1957년부터 '대동얼음'이라는 상호로 얼음 소매업을 시작했고 운이 좋았는지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처 신을순의 증언).

35세의 중년 가장이었던 1960년 셋째 딸이 태어난 지 며칠 후에 3 15의거가 일어났다.

이날 그는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시위에 참가했지만 이 사실을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처 신을순도 산 지 며칠 되지 않은 빨간 구두가 다 헤진 것을 보고 시위하다 엄청 쫓겨다녔나보다 짐작만 했을 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한다.

 

3) 의거 참가 이후

3·15의거 참가 이후로도 얼음 판매업은 번창했고, 오동동의 한 요지(불종네거리 현 경남은행 지점 자리)에서 잡화점까지 운영해 상당한 돈을 모았고, 집도 더 좋은 곳으로 몇 차례 옮기는 등 부자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처 신을순은 우인의 채무 보증을 섰다가 당시 논 10마지기에 해당하는 막대한 빚을 대신 갚느라 상당한 재산을 날리기도하는 등 어려운 우인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받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 후로도 돈벌이는 잘 되었지만 주택이나 상가 등 부동산 투자는 하지 않았다.

1961년에 사단법인 경찰동우회(이하 경우회)에 자문위원으로 가입해 1981년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969년에 마산얼음상인조합 설립을 주도했고, 경남 인조빙 판매조합장을 맡아 1974년에 얼음 판매업을 완전히 그만둘 때까지 계속했다(참고로 이 무렵 냉장고와 제빙기의 보급으로 얼음 판매업은 사양산업이 되었다).

1972년부터는 마산 도심(구 한국은행 길 건너편)의 작은 땅을 임차해 제일주차장 을 운영했다.

1973~1975년 진양 하씨 종친회 마창지구 회장, 2006~2009년 양녕공 공신문화제 회장을 역임하는 등 가문을 유지하고 빛내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시골에 사는 수많은 조카들을 마산 도시로 불러들여 학교 다니게 했고, 남자 형제 중 일곱째이면서도 편모를 돌아가실 때까지 불평 하나 없이 모셨고, 명절이 아니더라도 집안은 친척들의 수시 방문으로 법석대었다.

80세가 되던 2004년에 오래 동안 생업이었던 주차장 영업이 힘에 부치자 생업을 중단했다.

그 후로는 주로 노인당에서 회장도 하면서 소일하거나 거의 매주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여생을 보냈다.

2010393·15의거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고민 끝에 증언을 결심하고 자식들에게 털어놓았다. 동년 7213·15의거기념사회 를 찾아가 증언을 녹취했다.

90세가 넘어서도 건강을 자랑하던 그는 어느 날 복통으로 병원에서 위암 4기 판정을 받았고 그 후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식사를 거부하는 등 스스로 생명 단축을 재촉해 2017726일 경남도립마산의료원에서 향년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별세 넉달 전인 2017년 3월 15일 제57회 3·15의거 기념식에 참석한 선생의 마지막 모습>

-마산3·15아트센터 대강당-

 

그는 슬하에 15녀를 두었다. 평소 그는 자식이든 조카든 후손 중 누구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임명직이나 선출직으로 관직에 진출하기를 바랐지만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해 항상 안타까워했음을 필자는 기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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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언 등 이른바 비 사료들을 활용해 가능성의 역사를 최대한 기술하고자 하는 미시사 방법론을 원용했다. 또한 연구 대상자의 프로필과 증언을 제시한 후 증언에 내포된 역사적 가치를 평가했다.

논문의 대상이 된 이(하상칠)의 증언은 당일 시청 앞 야간시위의 주요 사건들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고 결과적으로 도시사적 가치도 크다.

이 논문은 인문논총46(2018. 6)에 게재되었다.

 

<목 차>

. 머리말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2. 녹취와 증언록

    3. 증언 내용의 분석과 평가

.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가

. 맺음말

 

 

. 머리말

 

먼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매우 개인적인 것임을 밝혀두고 싶다. 2010년 초 어느날 85세의 어르신 한 분에게서 3 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는데 늦게나마 이 사실을 밝히고 3 15의거 유공자로 인정받고 싶다는 고백을 들었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다름 아닌 필자의 장인으로서 필자가 아는 한 그런 중대한 사회적 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당장 3 15의거기념사업회를 찾아가 공식적인 증언을 하도록 주선했고, 이 녹취록은 그 해 2010년 말에 발간될 예정이던 『3 15의거 증언록: 1960, 우리는 이렇게 싸웠다』(이하 『증언록』)에 수록되었다.

그의 증언 내용은 그동안 3 15의거 당일 밤에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 중에서도 누가 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던 소방차에 부딪쳐 세 동강난 전봇대를 옮겨 바리케이트를 친 일이나 경찰의 증언 속에만 나타난 총기 탈취 사건 등 중요한 사건과 관련된 것이어서 그의 증언이 갖는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큰 것으로 보였다.

녹취 때 증언을 직접 들었던 3 15의거기념사업회 백한기 당시 회장은 소문으로만 듣던 일의 장본인을 만났다 는 감회를 숨기지 않았고, 경찰과 시민이 총격전을 벌이는 내전 같은 상황을 사전에 방지했다 며 치하해마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역사적으로 중요한 증언이라도 객관성이나 진실성을 증명하기 어려운 특정 개인의 증언이 주장하는 활동이 논문의 소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방법을 모색하던 중 역사학에 개인의 생생한 삶의 탐구를 통해 역사적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미시사 방법론과 구술사 방법론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이 방법론을 다루는 데 있는 것은 아니기에 여기서는 이 방법론들의 특징을 간략하나마 언급함으로써 우리가 채택한 연구 방법론의 타당성을 확인해두고자 한다.

먼저, 역사학 분야의 미시사(micro-history). 곽차섭(2017a, 미시사 방법론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역량은 물론 본고의 범위를 넘어선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곽차섭(2017a)을 참조할 수 있다)이 편집한 책에 실린 여러 미시사 연구자들의 논의로부터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 특징을 추출할 수 있다.

첫째, 개인이나 소규모 공동체를 대상으로 특이한 행동을 촘촘히 기술함으로써 역사적 리얼리티를 추구함과 동시에 일반적 해석의 길로 나아간다.

둘째, 관찬자료만이 아니라 미약한 증거력 때문에 전통적으로 사료로 인정되지 않던 일기, 수기, 증언 등 사적인 자료도 사용하고, 계량적 방법보다는 질적 방법을 사용한다.

셋째, 구체적인 개인의 실명을 사용하며 실명들 간의 관계를 추적해 기존의 사회사가 포착하지 못한 틈새를 포착한다. 사회사가 역사를 주체 없는 과정으로 만든다면 미시사는 실명의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추적해 주체가 살아 있는 생생한 사건이나 역사를 기술한다.

넷째, 이러한 이유로 이야기체(story)로 가능성(possibility)의 역사를 서술한다(‘가능성의 역사’란 증거의 단편성이 문제될 때 증거와 증거를 잇는 최선의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긴즈부르그-2017a 2017b-의 추론적 패러다임 이나 실마리 찾기 방법이 대표적이다. 그랜디의 이례적 정상 이라는 개념도 같은 맥락으로서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비정상으로 보이고 사료의 양적 측면에서는 이례적으로 보이는 하층 종속 계급의 목소리가 행위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정상이라는 입장이다-곽차섭, 2017b, 31).

끝으로 다섯째, 단순한 작은 이야기라는 비판에 대해 미시사적 스토리를 거시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창(window)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미시사 방법론은 3 15의거와 같은 중대한 사회 현상을 다루는 사건사(생활사, 지역사 등과 함께 미시사가 적용되는 주요 분야 중 하나)에 더욱 잘 적용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나아가 우리의 연구는 특히 개인의 증언이라는 구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미시사의 일환을 이루는 구술사(oral history) 방법론에 대해서도 간략하나마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구술사 방법론은 양적이 아니라 질적 방법론으로서 문자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 유용한 접근방법론이지만 주민과 지역, 여성, 장애인, 노인, 빈민, 월남인 등의 연구에도 널리 쓰일 수 있고, 그 약점은 양적 분석이나 문헌 분석으로 보완될 수 있다(김귀옥, 2000; 윤택림 외, 2006). 그리고 문서가 아닌 증언 등을 바탕으로 한 구전사나 구술사가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일제의 위안부 사례에서 보듯이 그들의 증언 없이 생생한 역사를 복원할 길은 없다(곽차섭, 2017b: 35).

이 글은 이러한 미시사와 구술사의 방법론을 사용해 하상칠이라는 한 개인의 3 15의거 참가 증언과 그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3 15의거라는 거대한 사회적 사건을 특정 개인의 활동이라는 창(window)을 통해 재조명해봄과 동시에 역으로 사회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굴절시키고 왜곡시켰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장에서 연구 대상자의 프로필을 제시하고 그의 증언 녹취물을 『3 15의거증언록』에 수록된 그대로 전재한 후 증언의 내용에 대해 나름의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 장에서는 그의 증언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두 가지 의문을 다룬다.

첫 번째 의문은 그는 왜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적극 참가했던가 라는 것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사회적 요인뿐만 아니라 개인에 고유한 요인도 최대한 살펴본다.

이어서 그는 왜 무려 50여 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뒤늦게 증언을 하겠다고 나섰던 것일까라는 두 번째 의문을 다루는데 이를 통해 사회적 맥락이 개인의 삶과 생각에 미친 영향을 추적한다.

끝으로 장에서는 우리의 논지를 요약하고, 이 글의 한계를 지적한 후 향후 과제를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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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1 08:25

즐거웠던 밤 - 서익진 교수의 출판기념회


마산시의회가 마산을 창원 진해와 통합시키기로 결정한 3일 후인 어제,
12월 10일 목요일 밤.

‘마산을 살리자’는 책의 출판을 축하하기 위해 경남대 평생교육원에 사람들이 모였다.
서익진 교수의 신간 『마산, 길을 찾다』의 출판기념회 이야기이다.

이 책은 서 교수가 그 동안 마산도시재생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남겨 놓은 글들과 마산도시재생과 관련한 각종 토론회 등에서 주장한 내용들을 재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리아미디어'에서 기획한 '리아프리즘문고 제1호' 출판이었다.
리아프리즘문고는 지역 도시영역, 문화 예술영역, 인문 사회영역의 세 분야에 걸쳐 지속적인 출판을 구상하고 있다.
지역 연구자들을 발굴하고 지원하겠다는 포부도 보였다.
도서출판 불휘를 운영하는 우무석 김리아 부부의 아름답고 원대한 시작이었다.
경남대의 김남석(언론정보학), 김재현(철학), 배대화(문학), 서익진(경제학), 유장근(사학) 다섯 교수가 기획에 참여, 일을 진행시킨다.



사람들이 모이자 분위기를 이끄는 대화는 역시 ‘마창진통합’이었다.
“통합이 되면 마산은 어떻게 되는고?”
“통합이 어쩌고 저쩌고”
답은 없었다. 지나가는 말들만 있었다.

사회를 맡은 정규식 씨의 첫 인사에서도,
발간취지를 설명한 유장근 교수의 말에서도,
마산에 대한 진한 애정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흘러나왔다.

책을 펴낸 「리아미디어」김리아 대표의 발행인 인사는 특별했다.
수줍은듯하면서도 자신 만만,
낮고 고운 목소리로 지나온 일과 다가올 일들을 설명하는 중년 여인의 차분한 인사가 시선을 집중시켰다.

서 교수와 인연이 깊은 세 분이 차례로 나와 축사를 한 후,
마산MBC 사장을 지낸 박진해 경남람사르환경재단 대표가 저자를 소개했다.
학력 경력 저서 등 빤한 소개가 아니라,
소개하는 사람과 소개 받는 사람 사이에 있었던 사건과 사연을 이야기로 엮으면서 저자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특별하고 인상 깊었던 소개였다.
오래 전 작고하신 서 교수 아버님의 운명에 얽힌 이야기에서는 울컥거리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순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청중들은 숙연했고 즐거워야할 출판기념회가 순간 무거워졌다.

소개를 받은 서 교수가 친구로 부터 출판축하 선물로 받은 개량한복을 입고 나와 인사를 했다.
고마움에 대한 감사인사에 이어 책을 쓴 의도와 과정에 대한 감회를 피력했다.

부족하지만 내가 서평을 겸한 강연을 했고,
가수 하동임 씨(서 교수 처제)의 노래로 출판기념회는 끝났다.

뒷자리는 막걸리로 유명한 ‘심소정’에서 열렸다.
후배 정성기 교수는 감회를 밝혔고,
친구 최갑순은 서익진을 자랑했고,
아내 하효선은 남편 서익진이 고맙다고 했다.
후배 윤치원은 선배들이 자랑스럽다고, 서 교수의 얼굴이 자신의 아버지와 닮았다고도 했다.

막걸리에 술기가 약간 오른 서 교수는 마지막 인사에서 ‘세계와 국가와 지역의 연관성’에 대해 진지하게(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음) 이야기 한 후 오래된 노래 한상일의 '애모'를 불렀다.
남 앞에서
노래를 잘 부르지 않는 서 교수로서는 파격적인 감정표현이었다.

의미 있고 재미있었던 한 경제학자의 출판기념회는 여기까지다.
토론 없는 사회, 형식에 젖은 사회에서 오랜만에 즐긴 자유로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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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회원으로 활동한 YMCA의 연원을 찾아보았다. 얼마 전, 업무 차 런던에 하루 머물렀는데 마침 약속이 오후로 잡혀 오전 시간을 이용했다. 나를 안내해준 분은 런던YMCA의 캔 몽고메리(Ken Montgomery) 국제..

무등산 산행기-3

무등산 산행기-3 장불재를 내려다보며 하산하다. 장불재는 무학산 서마지기보다 훨씬 더 평평하고 너르다. 마산 같으면 만날재 같은 역할을 했다. 한쪽에는 방송중계탑들이 모여 있다. 하산길은 일방적인 내리막이 아니다. 중봉으로 ..

무등산 산행기-2

무등산 산행기 - 2 갑자기 울리는 알람 소리. 아침 6시다. 8시에 식당에서 바지락 죽 먹기로 되어 있는데 무슨 기상이 6시람. 7시 기상해도 충분한데... 다들 나이 값 하느라 그런지 별 불평도 없이 일어난다. 바지락 죽 ..

무등산 산행기-1

무등산 산행기 - 1 학봉산악회 전 100산(산림청에서 선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 대장 신삼호 회원에게 몇 년 전부터 약속했던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오랜만에 가는 100산 등산이라 인자부터 산행기 꼭 쓰겠다고 덜..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13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3. 공간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 5 4. 외관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 2 5. 마치는 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숙소로 시작되었지만 당시..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12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3. 공간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 5 4. 외관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 2 1) 단지계획 2) 주동계획 가. 동선유형 주동의 동선유형은 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