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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화폐민주주의연대 뉴스레터 - 3 / 서익진의 Q&A, 용어해설

by 운무허정도 2022. 5. 9.

 

서익진의 화폐민주주의 Q&A - 3

은행은 없는 돈을 새로 만들어 대출한다구요?

 

지난 호에서 제시한 ‘은행은 누구의 돈을 대출할까요’라는 질문의 답을 찾으셨나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지는 않았나요? 정답을 말하기 전에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일상의 돈 거래(즉 대차거래)와 은행과의 돈 거래가 어떻게 다른 지 그리고 이 두 가지 거래가 거래자 각각에게 그리고 경제 전체(특히 통화량)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부터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정답은 저절로 드러날 겁니다.

 

비은행 주체들 간의 대차거래

예를 들어 개인이든 기업이든 ‘갑’과 ‘을’ 두 명의 비은행 민간주체가 있고, 갑이 을에게 100만 원을 빌리기로 합의했다고 합시다. 논의의 편의상 이자는 없다고 가정합니다(이자 문제는 추후 다룰 예정입니다). 을은 갑에게서 차용증서(법적 효력이 있는 상환 약속)를 받고 (이때 어음이나 주식 또는 부동산 등 담보를 설정할 수 있고 보증인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수중의 현금을 양도하거나 은행 계좌이체 서비스를 통해 예금통화를 송금하는 것으로 거래는 완결됩니다.

이 대차거래로 갑과 을 각각에게 어떤 경제적 변화가 일어날까요? 먼저, 돈을 빌려준 을은 가진 돈(즉 화폐자산으로서 현금 또는 예금)이 100만 원 감소하는 대신 다른 자산(차용증서 즉 받을채권)을 갖게 됩니다. 자산의 형태가 현금 또는 예금에서 (받을)채권으로 바뀐 거지요. 다음, 돈을 빌린 갑은 화폐자산(돈)이 100만 원 증가하는 대신 갚아야 할 채무가 생깁니다. 대차거래를 통해 갑은 채무자가 되고 을은 채권자로 변신합니다.

이제 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갑과 을의 경제적 변화를 합쳐보면, 현금(또는 예금)은 (+100)+(-100)=0이 되어 상쇄되고 채권(받을채권)과 채무(차입금)만 남지요. ‘을의 자산 감소와 갑의 자산 증가’가 동시에 일어나 100만 원이라는 돈의 소유자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결국 이 일반적인 대차거래를 통해서는 신규 통화가 창조되지 않으며, 시중 통화량도 증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만기가 되어 갑이 을에게 100만 원을 상환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상기와 반대 방향의 과정이 시행되겠죠. 결국 ‘을의 자산(현금 또는 예금) 증가와 갑의 자산 감소(현금 또는 예금)’가 동시에 일어나며, 을의 채권(받을채권)과 갑의 채무(차입금)도 소멸합니다. 그러나 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채무의 상환에도 불구하고 상환된 돈은 소멸하지 않으며, 당연히 시중 통화량도 감소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돈의 소유자만 바뀔 뿐이죠.

 

은행과 고객 간의 대차거래

이제 앞선 사례의 ‘갑’이 다른 비은행 주체인 ‘을’이 아니라 ‘은행’에서 100만 원을 대출받는다고 합시다. 여기서도 이자는 없다고 가정합니다. 과연 앞선 사례에서와 동일한 과정이 시행되고 또 그 결과도 동일할까요?

이 경우에도 갑은 은행에게 차용증서를 써주고 담보를 설정하거나 보증인을 세워야 할 겁니다. 이제 원래 우리의 질문이 나옵니다. 은행은 누구의 돈을 빌려줄까요? ‘을’처럼 자신이 소유한 돈을 빌려줄까요? ‘No!’ 대출로 인해 은행의 자본금(즉 자신의 돈)이 차감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 은행은 다른 고객들이 자신에게 예치한 예금을 빌려주는 걸까요? 그렇지. 이게 정답이야! 이건 일반상식이고 경제학 교과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잖아!

그런데 어쩝니까? 현실에서 은행은 대출을 하면서 수많은 예금자 중 어느 누구의 예금에서도 해당 금액을 차감하지 않습니다. 애석하게도 역시 ‘No!’ 아, 그렇다면 혹시 중앙은행에서 빌린 돈은 아닐까요? 이 답도 그럴듯해 보이지만 또 틀렸습니다. 은행은 대출을 한 후 사후적으로 중앙은행에서 돈을 빌려오는 경우는 있지만 특정한 대출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전에 중앙은행에서 돈을 빌려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 다 좋아요. 그럼 도대체 은행은 누구의 돈을 빌려주는 겁니까?

사진 출처 : 알라딘

자, 놀라지 마세요. 은행은 자신을 비롯한 그 어느 누군가의 소유로 되어 있는 돈, 즉 이미 존재하고 있는 돈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새 돈을 만들어 빌려줍니다.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은 대출 승인이 떨어지면 컴퓨터 속에 있는 갑의 계좌를 열고 100만 원이라는 수치를 치고 엔터키를 두드립니다. 그 순간 갑의 계좌에 100만 원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써 끝입니다. 은행직원은 뒤이어 어느 누구의 계좌에서도 100만 원을 차감하는 절차를 시행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돈은 엔터키를 치기 직전까지도 존재하지 않던 그야말로 빳빳한 새로 만든 돈입니다. 물론 디지털 통화죠.

비유하자면 은행직원은 엔터키를 치면서 마치 ‘천지창조’에서처럼 ‘허공’에 대고 “있어라, 돈이여!” 하고 말하자 바로 돈이 생겨난 거나 다를 바 없습니다. (참고로 이 장면은 볼크만 감독의 2019년 영화 <더 룸>에도 나옵니다. 영화에서 돈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말하는 대로 생겨나지만 그 집밖으로 나가는 순간 사라집니다). 말 그대로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누군가는 이를 ‘마법 또는 마술’이라며 비꼬았지만, 경제학은 고상하게 이런 은행의 행위를 ‘신용창조’라고 부릅니다. 차입자의 상환 약속과 이에 대한 믿음, 즉 신용을 바탕으로 새 돈을 만든다는 의미겠죠.

이렇게 새로 창조된 돈은 맨 먼저 갑의 은행계좌에 예금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경제학은 이를 ‘예금창조’라고도 부르는 거지요. 창조의 결과가 예금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제 ‘갑’은 대출받은 돈을 당장 또는 향후 언제든지 지출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습니다. 이 돈은 갑이 뭔가를 구입하기 위해 지출하는 순간 경제 속에서 유통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시중 통화량은 그만큼 늘어납니다. 이것이 앞선 사례와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요컨대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서 돈을 빌리면 통화량이 변하지 않지만, 은행에게서 빌리면 통화량이 늘어난다는 겁니다.

은행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무에서 돈을 창조하긴 했지만 자신의 계좌가 아니라 고객인 갑의 예금계좌에서 창조했기 때문에 이 새 돈은 은행의 부채가 됩니다. 이런! 그렇다면 은행은 바보든가 아니면 자선가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나요? 조금 더 보시죠. 은행은 당연히 그 반대급부를 가집니다. 허공에서 창조한 돈을 갑에게 대출하고 갑이 작성한 차용증(갚겠다는 약속)을 자산(받을채권)으로 확보하죠. 이를 장부에 대출자산으로 기입해 둡니다. 이 대출자산은 대출로 발생한 부채를 상쇄시킬 뿐만 아니라 은행에게 무엇보다 이자라는 이득을 가져다줍니다. 은행은 이를 담보로 다른 이득이 생기는 거래를 할 수도 있죠.

역시 돈의 창조주, 은행은 바보도 자선가도 아니었군요. 아니, 천재 중의 천재가 아닐까요? 이런 기막힌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다니... 그리고는 다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사업상의 기밀을 눈치 채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은행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직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2014년 영국의 중앙은행이 내부문건을 통해 이것이 사실임을 인정한 뒤에야 비로소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독자께서는 이제 이 은행의 영업기밀이란 게 “없는 돈을 만들어 대출해주고 이자를 챙긴다”는 사실임을 짐작하셨겠지요.

여기서 생각거리 하나. 은행은 이 대출자산을 획득하기 위해 어떤 노동을 했을까요? 비은행 경제주체인 여러분이 돈을 벌기 위해 해야만 하는 노동과 이에 동반되는 귀한 시간과 고통을 생각할 때, 은행은 과연 자신이 창조한 돈의 가치에 상응하는 노동과 시간을 투하했을까요? 만약 대출액이 여기서처럼 100만 원이 아니라 가령 10억 원이라고 해봅시다. 이 상황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인지 이해가 가시나요? 여기서 더 나아가 국내의 모든 은행이 이런 식으로 대출하고 연간 걷어 들이는 이자수입만 무려 60조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참, 이자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했다는 것을 깜빡했네요.

이제 이 대출계약의 상환 만기가 도래해 갑이 채무원금을 상환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대출이 이루어질 때와는 정반대의 과정이 시행됩니다. 은행직원은 갑의 계좌를 열고 해당 수치를 삭제하고 은행의 대출자산 항목의 수치도 삭제합니다. 이제 이 돈은 소멸하고, 즉 ‘허공’으로 사라지고, 을의 예금이 줄어든 만큼 시중 통화량도 줄어듭니다. 여기서 또 앞선 사례와 비교해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 나타납니다. 앞선 경우에는 갑이 빌린 돈을 상환해도 돈은 사라지지 않고 을의 소유로 넘어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행 대출금의 경우에는 상환과 더불어 돈 자체가 소멸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와 동시에 은행의 채권과 을의 채무도 사라지겠죠.

마치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출과 관련해 창조되었던 모든 항목의 수치가 모조리 사라지고 대출 발생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모든 게 원상복구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 허망한(?) 과정에서 은행도 갑도 각자 뭔가 좋은 일이 있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치 땅을 팠다가 그냥 다시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을 애써 해야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끝으로 앞선 일반적인 대차거래와 비교해 은행대출 거래가 갖는 특징을 요약해 봅시다.

은행대출이 시행될 때마다 그 액수만큼 새 돈이 창조되고 시중 통화량은 늘어난다.

은행대출이 상환될 때마다 그 액수만큼 기존 돈이 소멸하고 시중 통화량은 줄어든다.

은행대출 시스템은 바로 현행 통화 발행 및 배분 시스템의 핵심을 이룹니다. 그것이 갖는 핵심 특징이 여러분의 경제생활에 그리고 나아가 전체 경제의 작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앞으로 차차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대해주세요.

이 뉴스레터를 읽으시는 모든 분에게 ‘미스터리한 돈의 세상’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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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익진의 용어해설 - 3

기축통화란 무엇인가?

 

출처 : 한진수, "기축통화...돈에도 '대장'이 있다", 한겨레, 2022.03.14  

20대 대통령선거에서 대중의 주목을 받았던 화폐 용어로 ‘기축통화(key currency)’가 있음은 잘 알고 계시죠? 이재명 후보가 TV토론에서 원화의 기축통화 가능성을 언급하자 다른 후보들이 기축통화의 의미조차 모르는 무식한 소리라고 반박하는 일이 있었지요. 뒤이어 여당후보 측에서 그 근거로 원화의 IMF 특별인출권(SDR; Special Drowing Rights) 통화바스켓 편입통화(현재는 달러, 유로, 파운드, 엔, 위안) 가능성을 검토한 전국경제인연합회 보고서를 제시하자, 전경련은 해명기사를 내고 언론은 친절하게도 기축통화 관련 해설 기사를 내면서 이재명 후보의 오류 내지 실수를 까발리는 해프닝이 일어났었지요.

혹시 ‘트리핀 딜레마’라는 용어를 들어보셨나요? 세심한 언론이 이것까지 알려주고 있더군요. 1959년 당시 달러 위기 대응책에 고심하던 미국 의회가 예일대의 트리핀 교수를 불러다 청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트리핀 교수가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라고 처음으로 지칭하면서 미국이 기축통화의 지위 유지와 원활한 기능 수행을 원한다면 자국통화를 해외로 내보내 풍부한 국제 유동성을 공급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역적자 내지 경상적자를 볼 수밖에 없어 국내경제 불황이 조장된다는 식으로 설명했어요. 이러한 기축통화국의 딜레마를 후세 경제학자들이 ‘트리핀 딜레마’라고 불렀지요.

어쨌든 대선에서의 기축통화 에피소드는 지난 1987년 외환위기 때처럼 뜻하지 않게 국제통화 분야에 관한 유권자 대중의 지식을 넓히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기축통화에 관한 주요 사항이 모두 거론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나름의 의견을 보태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기축통화는 학계에서조차 합의된 정의나 선정기준이 없으며, 각자 자기 입맛대로 사용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누구는 1) ‘국제통화’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다른 누구는 2) 국제통화들 중 가장 대장 역할을 하는 통화를 지칭하며, 또 다른 누구는 3) IMF의 특별인출권 통화바스켓 편입통화를 지칭합니다. 이번 대선에서의 기축통화 해프닝은 SDR 편입통화를 기축통화라고 한 것은 틀렸다며 꾸짖은 것인데, 정답도 합의된 것도 없는데 틀렸다고 단정지우는 게 합당할까 하는 생각이 들고, 게다가 본래적 의미의 기축통화는 현재의 세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든요. 따라서 이번 해프닝은 ‘도긴개긴’이고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기’ 아닌가 합니다.

기축통화를 제대로 알려면 ‘트리핀 딜레마’의 이전과 이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특히 그 이전의 역사가 더 중요합니다. 대공황(1929년 시작) 이전까지 주요 선진국 화폐는 모두 금본위제 하의 태환화폐였습니다. 모두 금과의 태환이 보장되고 있기에 국제무역에서 어느 나라 통화를 사용하느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아니었어요. 물론 영국의 스털링 파운드 화가 가장 많이 사용되면서 일종의 기축통화처럼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대영제국의 경제력이 담보하는 통화 안전성과 런던시티가 제공하는 국제결제시스템의 편의성 덕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전비 마련과 대공황에 대응할 재정자금 조달 과정에서 결국 1930년대 초반에 선진국들은 하나둘 공식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금본위제를 폐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오늘날과 같은 무(無)본위 법정 신용통화 제도로 이행했고, 그 핵심에는 태환지폐의 불환지폐로의 전환이 있습니다. 이제 국가(중앙은행)가 발행하는 지폐는 더 이상 금과 무관한, 특수 인쇄된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게 된 거죠. 이러한 화폐제도 개혁은 국내 및 국제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어요. 돈도 명목금액에 해당하는 실물가치를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대변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상품화폐관이 무너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았을까요?

국내적으로는 불환지폐에 대한 불신이 다양한 지역화폐 도입 시도로 이어졌고, 이는 나름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죠. 캐나다의 LETS처럼 말이죠. 법정통화의 위기를 느낀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지역화폐의 발행을 금지하자 지역화폐들은 대부분 사라져버렸습니다. 문제는 국제무대에서도 불거졌어요. 각국의 금본위제가 무너지자 국제거래의 지불수단도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죠. 대공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식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국제무역의 붕괴는 각국이 자국 이익을 우선하는 보호주의 무역으로 되돌아간 탓도 있지만 국제통화의 부재도 한몫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으로 치닫던 1944년 겨울에 개최된 브레턴우즈 국제회의에서 전후의 새로운 국제경제질서가 합의되었습니다. 이른바 브레턴우즈 체제입니다. 그 두 개의 중심축 중 하나는 자유무역 질서를 관장하는 GATT(1995년에 WTO로 확대개편)이고, 다른 하나는 금환본위제와 이를 관장할 유명한 국제통화기금(IMF)이죠. 금환본위제의 핵심은 ‘금=미국 달러≅각국 통화’라는 통화 위계 내지 피라미드의 확립입니다. 미국 달러를 국제 결제수단이자 준비수단으로 사용하되 미국 정부가 35달러를 가져오면 금 1온스와 교환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대신 각국은 자국통화의 가치를 달러에 고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금과의 연계를 확보하는 방식이었죠. 이 통화 피라미드에서 달러가 금과 각국 통화를 연계하는 기축 역할을 한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나지요. 트리핀의 기축통화는 바로 이러한 금환본위제 하에서 미국 달러의 지위와 역할을 지칭한 것이었어요. 따라서 기축통화라는 용어는 금환본위제 시대의 산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처럼 본래적 금본위제와는 달리 브레턴우즈 체제의 금환본위제는 국가들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국제통화제도였어요. 각국의 금본위제는 이미 1930년대에 폐지된 후 복원된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1971년에 폐지된 국제적 금환본위제 역시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물론 화폐의 지위를 박탈당한 금과 같은 귀금속이 아마 이 지위를 다시 회복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으로 판단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귀금속 특히 금이야말로 진짜 돈이라는 사람들의 생각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트리핀 딜레마에 따른 부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미국은 1971년 닉슨독트린을 통해 달러의 금 태환 정지를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립니다. 이 조치는 기축통화의 소멸, 나아가 금환본위제, 즉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를 의미했어요.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세계는 즉각 혼돈에 빠졌습니다. 기축통화가 사라졌으니 이제 어떤 통화로 국제무역을 결제하고 대외 비상금을 준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세계가 갑자기 펼쳐졌기 때문이지요.

1930년대의 불환지폐 도입 못지않은 충격적인 조치였어요. 각국 대표들이 모여 고민했지만 특정국의 국민통화가 아닌 제3의 통화를 도입하는 이른바 브레턴우즈 회담에서 영국 대표 케인스가 제안했던 세계단일화폐 ‘방코르(Bancor)’의 도입과 ‘세계중앙은행’ 설립 안이 재론되었지만, 여전히 사실상의 기축통화가 주는 기득권을 포기할 이유가 없는 미국의 반대로 관철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결국 나머지 세계는 그때까지 사용해오던 미국 달러를 사실상의 기축통화처럼 계속 사용하는 방법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달러는 더 이상 태환통화도 기축통화도 아니었지만 이전처럼 계속 사용한다고 해서 큰 일이 나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 대신 유사시 달러를 대체할 것으로 기대한 특별인출권(SDR) 제도의 도입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인출권이란 단어로 짐작할 수 있듯이 바스켓 구성 통화로 교환할 수 있다는 하나의 청구권에 불과한데다가 IMF와 회원국 그리고 회원국 정부들 사이에서만 거래되는 지불 및 준비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국제통화 총량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죠.

미국은 아마 그러한 충격적인 조치가 어떤 결과로 귀착될 지를 사전에 충분히 검토했을 겁니다. 달러의 위력은 오히려 더 커지고 달러패권을 확립할 호기임을 알아챘을 것이 확실합니다. 미국은 달러를 금에 결박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금의 족쇄로부터 해방함으로써 더 큰 이득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달았을 겁니다. 미국은 달러를 원하는 만큼 발행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고, 나머지 세계는 불환통화인 달러를 계속해서 기축통화처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임을 말이죠.

그리고 실제 역사는 그대로 전개되었습니다. 미국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겁니다. 이후 미국은 국제적 시뇨리지(통화발행차익)를 마음대로 추구했고, 달러 리사이클링 메커니즘을 통해 무역(경상)수지 적자를 자본수지 흑자로 메워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솝 우화 ‘베짱이와 개미’의 현대적 실사판입니다. 한편으로, 미국은 베짱이처럼 노래 부르며 놀면서 자판을 두들겨 만든 달러를 건네주고는 개미처럼 일하는 아시아(일본, 한국, 대만, 중국) 나라들이 땀 흘려 만든 공산품을 사다 씁니다.

다른 한편으로, 아시아 나라들은 이렇게 땀 흘려 일해서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 국고채를 구매함으로써 달러가 미국으로 되돌아가 대외적자 보전 자금을 마련할 수 있게 해줍니다. 어찌 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1970년대 이후로 세계경제에 이토록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메커니즘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었을까요.

어쨌든 브레턴우즈의 고정환율제(환율수준의 국가 결정)가 폐지되고 변동환율제(환율수준의 시장 즉 수급에 의한 결정)로 이행하자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1971년 미국의 금 태환 정지 조치는 사실상 ‘주목받지 못한 혁명’이었던 겁니다. 지금 와서 보면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세상은 달라도 너무나 다른 세상입니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리는 포드주의 체제(국가독점자본주의, 복지국가, 생산성 연동 임금제 등)가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쉴 새 없이 재발하는 금융위기, 국경 없는 무차별 무한 경쟁, 불평등 심화, 고용 없는 성장 등)로 바뀐 것입니다.

미국 달러가 금환본위제 하에서의 기축통화 지위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라 부르거나 국제통화를 기축통화라 부르는 것도 그냥 잘못된 관행일 뿐입니다. 이러한 국제통화 역사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에도 굳이 기축통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현재의 국제통화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대장통화이자 중심통화, 즉 현재로서는 미국 달러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적절한 용어법이라 생각합니다.

더 이상 제도상의 기축통화가 아닌 미국 달러가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사실상의 기축통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는 또 많은 페이지를 필요로 합니다. 다른 기회를 기다리면서 참고로 ‘국제통화’의 기능에는 무역 및 채무 결제 수단, 외환 등 대외준비 수단, 상품 가치와 채무액 등의 표현단위 기능 등이 있음을 지적해 둡니다. 이렇게 보면 원화가 기축통화가 된다는 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국제화폐들 중의 하나가 되거나 SDR 통화바스켓 편입통화가 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서익진은 경남대 경제금융학과 교수였다. 프랑스 그르노블 사회과학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경제와 국제경제를 다룬 다수의 저서와 논문, 번역서를 출간하였다.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를 계기로 화폐금융의 문제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현재는 화폐의 본질과 현행 통화 공급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화폐민주주의연대’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 글은 그가 「화폐민주주의연대 뉴스테러」에 게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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