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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8.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6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9) "서민들 살기 좋은 동네" ------------------------- 심○○

1943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8-6

날짜 : 2015년 1월 10일

장소 : 자택

 

- 이 동네 사정을 제일 잘 아신다고 해서 찾아 왔습니다.

= 그런데 이 동네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내가 온 지 얼추 한 사십 년 되어 가는데, 뭐 유물이 있다든지 그런 게 하나도 없어요.

- 재개발을 하게 되면 동네가 다 헐리게 되고 그러면 동네 흔적이 다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동네 전경도 사진으로 남기고 또 여기 살았던 분들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동네 옛날 모습 그러니까 어디에 국화밭이 있었고 미나리꽝이 있었고 조그만 공장이 있었다고 하는 그런 옛날 이야기를 남기려고 하는 겁니다.

= 그런 걸 확실히 알려고 하면 토백이 한테 들어야 됩니다.

바로 위에 노씨라고 나이 많은 분이 있거든요. 그 분이 여기 본토백이인데 지금은 말을 잘 못합니다. 이 앞에 연탄집 옆에 이층 집 안있습디까? 그 사람도 고 사장이라고 제일 토백이입니다.

그리고 저 앞에 이층집 조사장도 좀 오래된 집입니다. 우리는 들어온 사람인데 한 삼십오륙 년 되는 것 같습니다. 연탄집은 박씨라고 우리하고 비슷한 때에 들어왔어요.

- 그때 이미 동네가 집들이 다 들어서 있었겠네요?

= 그렇지요. 우리 집 옥상에 올라가면 동네가 싹 다 보입니다. 우리 집이 제일 높으니까 거기서 보면 구동네하고 새동네가 딱 표가 납니다.

새동네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구동네는 옛날 집 그대입니다. 옛날 우리 살던 그대로 입니다. 이 소방도로 난 것 하고 가원빌라, 성심주택 들어선 것 말고는 다 그대로 입니다.

- 여기 오셨을 때 근처에 국화밭은 없었습니까?

= 성심주택에서 골목으로 쭉 나가면 저쪽으로 국화밭이 있었는데 그리 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도 국화밭인데 노씨가 했어요. 그 지하수를 내가 팠습니다. 성심주택도 지하수를 내가 팠고요. 이 위에는 또 미나리꽝이 있었습니다.

- 지하수를 파셨으면 이 동네 많이 다니셨겠네요?

= 그렇지요. 내가 지하수를 파니까 이 동네뿐 아이라, 창원 함안 마산시내 골목골목 다 댕깄습니다.

- 이 동네는 물이 잘 나왔습니까? 예전에 이 동네는 지하수 파면 어느 정도 깊이까지 파야 물이 나왔습니까?

= 예 잘 나왔지요. 물도 좋았어요. 지금 우리 집도 수도가 없고 전부 지하수를 씁니다.

이 동네는 깊이 안팝니다. 옛날에 돈도 없고 하니까 많이 파면 삼십이나 삼십오 미터, 사십 미터 정도밖에 안팠어요. 암석까지만 팝니다. 암석도 오륙 미터까지 밖에 안팝니다. 백 미터까지 내려가는 그런 깊은 데는 큰 기계로 파거든요. 이 위에 있는 태양탕이나 그런 목욕탕 같은 데는 좀 깊이 팠을까 다른 데는 깊이 파지 않습니다.

일반 가정집인데 뭐 몇백만 원 주고 팝니까? 그 당시는 오십만 원, 육십만 원 많이 주면 백만 원이고 그랬어요. 요새는 백만 원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큰 돈입니다.

이삼십 년 전에는 파는데 이십만 원, 삼십만 원 밖에 안했습니다. 그런데 땅을 하도 파니까 물이 말라버리는 겁니다. 그래 다시 팔 때는 백만 원, 백오십만 원도 받고 그랬어요.

여기 지하수는 풍부합니다. 아무 데나 파도 가정집 물은 충분합니다. 여기 땅이 마사 땅이거든요. 마사는 전체가 물을 딱 머금고 있어요. 그러니까 높은 고지대가 아니고서는 물이 짝 있기 때문에 파면 다 물이 나옵니다.

- 교원동 교방동 회원동 이 일대는 땅밑이 마사토란 말이지요?

= 그렇죠. 위쪽은 돌과 황토가 섞여 있지만 한 육칠 미터 밑에는대부분 마사토입니다. 위쪽은 돌이 많으니까 파기가 좀 힘들지만 조금 내려가면 마사토니까 잘 파집니다.

- 지하수 파는 기계를 뭐라고 부릅니까? 지하수 일은 얼마나 하셨습니까?

= 그냥 보링기라고 합니다. 내가 이 동네 사니까, 다는 아니겠지만 이 동네 지하수를 삼분지 일은 내가 판 거 같아요. 하하. 한 이십오 년 넘게 했습니다. 지하수 안한 지도 삼십 년 거의 돼 가요.

- 옛날에 지하수를 마음대로 팔 수 있었습니까?

= 좀 늦게 되어서야 지질조사니 수질검사니 했지만 그때는 수질검사고 뭐고 어딨습니까? 그때는 물만 나오면 됐어요. 요새는 환경영향평가도 해야 하고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때는 무조건 바로 파면 됐습니다.

그 당시는 수도가 제대로 없었거든요. 있어도 아무래도 물이 안좋고 부족하고 하니까 지하수를 파거나 그랬지요.

- 또 우물물 길러 먹고 그랬지요. 지금도 이 동네에 새미가 있지요?

= 그렇지요. 이 위에 올라가면 샘이 있었고 이 아래 내려가면 거기에도 우물이 하나 있었어요.

또 옛날에 우리 집 밑에도 공동샘이 하나 있었는데 이 집을 새로 지으면서 막혀버렸지요.

- 오셨을 때 공장 같은 거는 없었습니까?

= 이 밑에 가구 공장이 있었어요. 지금 고물상 자리가 가구 공장이었어요.

그리고 또 오래 된 게, 공장은 아니지만, 지금 어린이집 하는 거기가 남일목욕탕 자리인데 옛날에는 목욕탕이 거기밖에 없었지요. 남일목욕탕은 헐렸고 가구 공장도 없어진지는 오래 됐죠.

북마산 가구거리 생기던 즈음에 없어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가구 공장 옆에 우피 공장도 한 데 붙어 있었어요.

또 무학상가 자리에 요꼬공장이 있었는데 쓰레트로 허름하게 지어져 있다가 우리 오고 나서 그 자리에 무학상가 지었습니다. 이 위로는 다 주택이고 밭이고 아무 것도 없었어요.

저 회원파출소 위로는 옛날에 전부 국화밭이었어요. 그리고 저 건너 회원동 쪽에는 왜정시대에 말 키우던 데라고 하대요(아래 사진의 중앙 상부 음영 짙은 세 건물). 또 천막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 자리에 새한아파트 세 동이 들어서 있습니다.

 

 

- 비가 많이 와서 큰 수해를 입은 적은 없습니까?

= 그때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하천변에 큰 피해가 난 적 있습니다.

우리가 이 밑에 집에 세들어 살았거든요. 그때 집 안으로 막 물이 들어와서 피해를 많이 봤죠. 그때 도랑가 옆으로 전부 집을 새로 다 지었어요.

이 밑에 도랑가 이층집은 거의 그 이후에 새로 지은 거라 보면 됩니다. 저쪽 서원골 의신여중 밑으로는 완전히 쓸어버렸고 여기는 이 밑에 남일목욕탕 그 주위로 피해를 많이 봤지요.

이 앞에 이 골목이 지금은 복개 했지만 옛날 도랑입니다. 옛날에는 큰 비만 이 도랑이 넘쳐 흘러서 주변이 엉망이었어요. 저 큰도랑 있고 여기 작은 도랑밖에 없었거든요.

- 그럼 여기 작은 도랑은 복개한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 복개한 지가 이십년 넘게 됐을 겁니다. 지금은 비가 아무리 와도 큰 피해는 없지요.

- 조금 위에 수재민 주택이라기도 하고 공영주택이라고 하는 데 있잖아요?

= 수재민 주택은 저 위 앤지밭골에 있고 여기는 회원주택이라 하대요.

그리고 또 주공아파트 새로 지은 거기도 수재민 주택이 있었던 같습니다. 여기 무학자이 그 자리에도 수재민 주택이 있었어요. 쓰레트로 쫙 지어가지고...

- 그럼 여기 오시기 전에는 어디 사셨습니까?

= 봉덕에 살았지요. 원래 고향은 함안 여항입니다.

지금은 진전면이지만 옛날에는 함안군이었어요. 함안군 여항면인데 저쪽은 산동이고 이쪽은 산서인데 산서는 진전면으로 붙어버린 겁니다.

- 바로 이 밑에 길가에 보니까 점집이 하나 있는데 갓데미산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함안 분인가? 생각했습니다. 여항산을 갓데미산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 맞습니다. 둔덕 위에 그 산을 갓데미산이라하지요. 그걸 따다가 이름 붙였을 수도 있겠네요.

- 이 동네 오래 사셨는데 살기가 어땠습니까? 도 조금 있으면 재개발 될 거 아닙니까?

= 살기 좋습니다. 시장 가깝고 해서 없는 사람들 살기가 좋습니다. 또 이 집은 양지라서 볕이 들어서 따시고 사는데는 아무 불편이 없어요. 조금 있으면 우리 집에 볕이 여기까지 들어 옵니다. 볕이 잘 들어와요.

이 집 지은 지가 한 십칠팔 년 되겠네요. 우리가 살려고 지었거든요. 설계도 우리가 했고 공사를 떼내어 줬는데 그때 돈으로 평당에 이백이십 만원씩 주고 지었어요.

사실 우리는 재개발을 안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야 될 거고... 지금은 돈이 안드는데 관리비니 뭐시니 달달이 돈이 들 거고... 되도 그만 안되도 그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돈 싸게 주면 안 할끼고 비싸게 주면 할 거고요. 하하하.

- 어떤 사람들은 빨리 됐으면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반대하시고...

= 반대하는 사람 많이 있을 겁니다. 나도 여럿 사람이 같이 하니까 반대를 못하지 내 혼자만 반대한다고 되지도 안할 거고 또 괜히 시끄럽기만 하고...

- 바로 옆에 주차장은 만들어진지 오래 안된 모양입니다.

= 한 이삼년 밖에 안됐어요. 땅임자가 선창에 복다방 주인인데 처음에는 주차비를 얼마씩 받고 관리를 했어요. 그런데 주차비를 주고 주차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폐지를 했어요.

그러니까 쓰레기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 새로 싹 딲아서 무료 주차장을 만든 거지요. 동네 주민들을 위해서 땅임자가 서비스를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차 대기 좋고 동네 깨끗하고 해서 좋아요.

- 좋은 일이네요.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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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2. 1. 05:3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5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8) "여기가 제2의 고향이지요" ------------------------- 이○○

1937년생

마산회원구 회원동 670-3

날짜 : 2015년 1월 9일

장소 : 자택

 

- 반갑습니다. 옛날 동네 이야기를 들으러 왔습니다. 이 동네 사신 지도 오래되었지요?

= 나는 별 이야기거리가 없는데...

본 고향은 의령인데 거기서 면서기 하다가 막살하고 부산에 내려가 있다가 마산으로 왔어요. 내가 서른일곱 살 때 여기로 왔어요.

자유수출에 있는 일본 사람 회사인데 고모 아버지가 동업한다고 회사 차릴 때 왔거든요. 그러니까 사십년 전에 이리 왔지요.

- 예. 수출자유지역에 어느 회사였습니까?

= 마산강관이라고 파이프 만드는 회사였지요.

일본 회사인데 고모부가 사장을 잘 알아서 나를 넣어 줬어요. 거기서 근무하다가 거기서 정년퇴직 했어요. 육십두 살까지 있다가 퇴직했지요.

- 일본 회사에서 오래 근무하셨네요.

= 그런데 일본말 하는 거는 대강은 알아들어요. 하라고 하면 못해요. 왜 그렇노 하면 일학년 때 해방이 되어 나니까 일본말도 어중간코 조선말도 어중칸고 그렇구만요.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잠깐잠깐 이야기 하면 무슨 소린지 알아 듣지만도 쭉 말을 하라고 하면 못합니다. 아메가 후로 데스네... 하면 비가 온다는 말이고... 하하.

- 지금도 그 회사가 있습니까?

= 매미 태풍 때 회사에 물이 들어서 철수를 하고 지금은 없습니다.

그 삼만삼백 볼트 전기가 지나가는 공장에 기계가 여러 수십 대 있는 거기가 소금물에 팍 담겨버렸으니까 하나도 못쓰는 거죠. 피해를 많이 입었을 겁니다.

거기다가 그동안 돈도 많이 벌었을 거고 하니까 철수한 거겠죠. 나는 그 일년 전에에 정년퇴직을 했어요.

그 뒤에 얘기 들으니까 남아 있던 직원들은 퇴직금으로 보상을 많이 받았던 갑더라고요. 그래 퇴직금 가지고 화물차 사가지고 운전하는 애도 있고 그렇더라고요.

- 그 당시에 직원은 어느 정도 됐습니까?

= 한 오십 명 정도 됐습니다. 나는 거기서 천장 크레인 타고 댕기면서 크레인을 몰았거든요.

그 일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물건에 기름칠을 해 놓으니까 미끄럽고 떨어뜨리면 밑에 있는 사람은 바로 즉사하니까요.

그동안에 내가 여남번 떨어뜨렸는데 사람이 없는 데라서 다행이었습니다. 그 일을 하게 된 것이 처음에 사무실 보다 이게 낫겠다 싶었거든요.

그래 일주일을 밤에 남아서 배웠습니다. 파이프에 기름을 발라져 있으니까 크레인으로 이동시키다가 균형을 잘못 잡으면 눈깜짝할 사이에 밑으로 쏟아져 버립니다.

 

천장 크레인(참고자료)

 

- 주로 어디에 사용되는 파이프입니까?

= 여러 군데입니다. 주로 배관용 파이프인데 욘부, 인치, 2인치, 전부 다 만들었어요. 또 스텐레스 파이프도 만들었어요.

- 그 크레인 운전이 상당히 뛰어난 감각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까?

= 그렇죠. 한참에 세 가지 네 가지를 움직여야 되거든요. 기차나 전동차 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거는 가고 서고 이러지만, 이거는 서고 가고 올리고 옆으로 가고 옆으로 보내면서 올리고... 여러가지를 한참에 다 해야 돼요. 내가 한 이십오 년 동안 사고를 안냈거든요.

그러니까 회사에서 나를 더 필요로 해서 더 있었던 겁니다. 오십오세가 정년인데 나는 칠년이나 더 연장해서 근무를 했어요.

- 완전히 배테랑 기술자였네요.

= 그래 내가 나올 때는 애들한테 많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내한테 배워가지고 삼화나 이런 큰 공장에 취직해 갔어요.

- 제자들을 많이 길렀네요? 하하. 그러면 임금도 좀 괜찮았겠습니다.

= 그때 연말 되면 오백만 원씩 가져 왔거든요. 한 이십 년 전에 연말 되면 연차 월차 보나스 합해서 한 오백만 원 넘게 가져왔으니까 요새 돈으로 치면 상당할 겁니다.

연말 말고 평소에는 한 이백만 원씩 가져왔어요. 그때 돈으로 이백만 원씩 가져왔으면 많이 가져왔지요.

우리 집 사람도 우리 회사 식당에서 밥을 해주고 이래가지고 전세로 있다가 돈을 모아서 이 집을 샀지요. 그때가 서른일곱 살 땐가 마흔 살 땐가 확실히 모르겠어요. 서류를 봐야 알지요.

원래 전세 얻을 때 이 밑에 교원동에다가 얻었어요. 집안 사람들이 있고 해서 여기로 왔어요. 여기 의령댁이라는 사람들 많아요.

- 처음 이 동네 오셨을 때 동네 풍경이 어땠습니까 주변에 집들이 다 들어차 있었습니까?

= 그때도 동네가 다 형성이 돼 있었는데 전부 기와집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빈집이 많아요. 개발 된다니까 사서 비워놓은 집이 많습니다.

이 안에 들어가면 쓰러져가는 기와집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여기가 일차로 개발이 될 줄 알았는데 벌써 몇년인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 그때 여기 오셨을 때 이 동네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 여기는 그냥 회원2동 둥구나무 있는 데라 했지요. 둥구나무 동네라 그랬어요. 누가 물으면 둥구나무 있는 데 산다 하고 그랬지요.

저 둥구나무도 나무가 썩어가지고 가운데에 시멘트를 발라서 메워놓은 겁니다.

- 이 동네 이사 와서 지금까지 사시면서 동네에 큰일은 없었네요?

= 큰불도 안나고 별 그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여기가 밤으로 도둑놈이... 절도가 심했어요. 우리 농 하나 성한 게 없어요.

회사 나가고 사람 없으면 들어와서 저거 마음대로 뒤져가고... 텔레비는 안가져가도 사진기니 뭐 돈 될만한 거는 싹 다가져갔어요. 몇번이나 도둑들었어요. 도둑놈들이 우굴우굴하이 그랬어요.

- 그런데 이제는 근 사십 년을 사셨으니 제이의 고향 아닙니까?

= 이제는 여기가 제2의 고향이지요. 그때는 객지라서 정이 안들었어요.

매일 하는 게 밥 먹고 회사 가고... 육십두살까지 그 짓을 했으니 동네 사람들 하고도 안어울리고 이 동네 이야기도 못들어보고...

- 그럼 요즘은 어떻게 소일 하십니까?

= 저 앤지밭골 쪽에 경남대학 땅이 있거든요. 거기 한 천 평 되는 걸 개간 해가지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거기서 세월을 보내고 있지요.

겨울에만 여기 있지 아니면 계속 밭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가 산인데 그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있는 겁니다. 내놔라 하면 언제든지 내주겠다고 하는 서약서를 경남대학에 써넣고...

- 그럼 주로 뭐를 재배하십니까?

= 뭐 필요한 거는 다하지요. 콩, 배추, 깨, 고추, 무시... 뭐 여러가지 심어요.

며느리 하고 딸이 이웃에 살거든요. 그래 갈라먹고 그러지 뭐. 내 나이가 있으니까 농사 짓는게 이제는 힘들지요. 전에 한 칠십대까지는 펄펄 했는데... 지금도 내가 일은 잘해요.

- 연배에 비해서 아주 건강해 보이십니다.

= 목욕탕 가면 젊은 사람들이 내보고 놀래는데요?

팔도 만져 보고 다리도 만져 보고 놀래는구만요. 젊은 사람들 다리나 같아요. 쭈글쭈글 안하고... 밭에서 일을 하니까 그런가 봅니다.

- 지금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데 감회가 어떠십니까? 이 집이 다 헐릴 거 아닙니까?

= 내가 칠십아홉이거든요. 정축생이거든요. 이거 개발해도 내가 볼 때는 오년은 걸리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때 내가 팔십대엇살 되는데... 요새 백세라 하지만도 팔십댓 되면 맥 못춥니다.

나는 이것 해도 그렇고 안해도 그래요. 딴 사람이 하니까 할 수 없이 하는 거지요. 내 하고는 별 관계 없는 겁니다. 사람이 늙어면 죽는 거지 뭐 그걸 갖다가 애착을 가지면 안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도시 살면 오래 못살아요. 공기도 나쁘고 스트레스 받고 말이지요. 촌에서 짐승같이 사는 거 같으면 오래 살런가 모르지요.

나도 칠십아홉에 살만치 살았는데 뭐 애착을 가지겠나... 하면 하고 말면 말고 그렇지 뭐 이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 옛날에 이 집을 사실 때 얼마에 주고 사셨습니까? 집이 몇평입니까?

= 이게 사십 평인데 한 이천만 원 줬지요. 그런데 안집을 샀어요. 안집이 차도 못 대고 가치없는 집이라고 그래요.

이 안에 있는 집들은 다 등급이 낮아요. 낮아도 보통 낮은 게 아니죠. 바깥에 칠팔백 할 거 같으면 여기는 이백도 안해요. 여기는 그만치 낮아요.

그때는 그런 것도 모르고 헐타고 덤벙 산 거죠. 하하. 차가 갈 수 있는 큰길 가에 있는 걸 사야 값이 있는데... 차소리도 안들리고 조용해서 옛날에는 안에 이런 데가 좋다고 했거든요.

- 그때는 이사할 때도 리어카에 담아 싣고 옮기고 그랬으니까요.

= 그렇죠. 그러니까 골목에 살 수 있었지요.

- 예.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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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25.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4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7) "허허벌판에 이룬 삶의 터전" ------------------------- 박○○

1947년생

마산회원구 회원동 672-22

날짜 : 2015년 1월 8일

장소 : 관룡사

 

- 반갑습니다. 예전 이 동네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 옛날에는 이 일대가 거의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지금 현동에 가면 국화밭 있죠? 거기 비슷한 모습이었는데 여기는 특별한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무학상가 있는 그 근방에 옛날 주택 부서진 데 있죠? 여러 집 있습니다. 거기는 별로 변한 게 없습니다.

그쪽에 국화밭이 형성되어 있다가 저쪽 현동으로 가버렸거든요.

 

국화밭(참고자료)

 

- 지금 무학상가 위쪽에 국화밭이 있었다는 거지요?

= 그쪽으로 있었고 주택도 쭉 있었어요.

- 다른 분 얘기 들으니까 미나리꽝도 있었다고 하던데요?

= 그쪽에 좀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 이 일대에는요 보존할 게 하나도 없어요. 전설이라든지 그런 것도 없어요.

이 밑에는 예를 들어서 2지구 같으면 정자나무가 있는데 그 유래가 있어가지고 보존할만한 게 되지만 이쪽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여기는 우리 서민 생활 있죠? 그대로 입니다.

- 예. 이 동네는 서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지요.

= 서민들 동네이기 때문에 건물 자체가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변한 게 있어야지요.

예전에는 앞에 이 도로도 없었거든요. 큰 도로 여기도 골목이었거든요. 이 위에 우리 지구에는 안들어가는데 교방초등학교 못가서 오른쪽 편 거기도 집이 몇 채밖에 없었거든요.

육일약국 하고 교방초등학교 중간에 거기는 옛날에 아무 것도 없었고 허허벌판인데 집 몇 채만 지어져 있었거든요. 이쪽 밑으로는 국화밭이 있었고...

- 그러니까 국화밭이 있고 할 때에는 70년대 이후이겠네요?

= 그렇겠네요. 그래 내가 공직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아는데 그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예를 들어 저 밑에 같으면 오백번지는 난민촌이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허허. 여기 우리 아파트는 옛날에 야산에 돌밭이었습니다.

- 동네 옛날 이야기 들으러 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만 여쭤 보겠습니다. 이 위를 앵지밭골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동네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회원동 말고 옛날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이 있었습니까?

= 이 동네는 내가 알기로 특별히 부르는 이름이 없었어요.

예를 들어서 석전동은 옛날에 봉오재라 했고 회성동을 살구지이라 했거든요.

- 옛날 교원동사무소가 어디 있었습니까?

= 자이아파트 있지요? 그 바로 뒤편에 있었습니다. 거기가 전부 조그만 주거지였지요.

그 동네는 난민촌 비슷했어요. 그 다음에 도랑 있지요? 도랑 옆에 거기도 전부 교원동이었어요.

- 그리고 여기 못산이라고 있었다고 하던데요?

= 이 다리 밑에 조그만 못이 있었다고 합디다. 옛날에 이 도로 밑이 못이었어요. 하천 이쪽에 간판집 그 밑이 못이었어요.

그래 조합에 김상열 이사 있죠? 거기 가서 물어보면 됩니다.

내가 공직생활을 했는데 교방동 교원동 일대를 훤히 압니다. 그래 김상열 씨 자기 집이 못산쌀집을 했어요.

- 앤지밭골에도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습니까?

= 조그만한 목장이 있고 사람도 살았습니다. 지금도 목장 있어요.

우리 신도가 거기서도 오기 때문에 압니다. 그런데 회원2동은 재개발 하는데 그런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뭐 보존한다는데 할 게 있어야지 내놓고 할 게 없습니다.

- 예. 그럼 못산이란 여기는 사람들이 좀 모여 살았습니까?

= 나는 그때는 모르죠. 태어나기도 전인데 거기가 못이라는 것만 들었죠.

- 이 밑에 598번지 일대에 공영주택 있지 않습니까? 그 일대에 옛날에 미나리꽝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 여기가 못이기 때문에 거기에 미나리꽝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교방초등학교 뒤쪽 있죠? 그 오른쪽에는 옛날에 자갈밭이었어요. 집 다섯 채 있었는데 길이 포장도 안되고 질퍽질퍽 하이 그랬어요.

- 여기 회원동이 옛날에 국화재배로 유명했다고 하더라고요?

= 예. 그래요. 여기 옛날에 시의원 했던 염 의원 집 앞이 전부다 국화밭이었어요.

국화밭 앞에 우리 집이었거든요. 허허허.

- 그럼 절 여기 지었을 때는 주변에 집이 많이 없었겠네요?

= 많이 있었죠. 옛날 집은 밑에 그대로 있어요. 밑에 가보시면 천막 덮고 부서진 집이 여러 채 있어요.

거기는 옛날 그대로입니다. 그게 제일 오래된 집일 겁니다. 또 그 밑에 무학아파트 있죠? 거기도 제일 오래됐습니다.

- 예. 지나다보니까 물이 새고 그렇더라고요.

= 그것도 처음 짓고 나서는 잘 지었다고 막 그랬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다 주공아파트였거든요. 여기 주공아파트 선 자리 이 밑으로는 뭐 없었어요. 이름있는 그런 게 아무 것도 없어요.

2지구 같으면 오백번지 나래비집, 또 정자나무 그런 건 유명하지만 여긴 아무 것도 없는데요.

국화밭도 그전에는 미나리 하다가 국화 심은 겁니다. 미나리밭 하다가 국화 심고 그 다음에 집이 들어서고 그랬습니다.

- 여기 절은 원래부터 여기 있었습니까?

= 짓고는 바로 들어왔습니다. 여기 못이 있었다는 것도 우리 절에 나오던 나이 구십 넘은 사람들한테 들은 겁니다.

지금 여기 사람들은 모릅니다. 다 객지 사람들이거든요.

옛날에 내가 공직에 있을 때 이 동네 오면 신발 다 버리고 그랬어요.

왜 그런가 하면 비가 와서 땅이 질퍽질퍽 한데 신발에 흙이 붙어가지고 엉망이 되고 그랬거든요.

하하하. 여기가 그랬던 곳입니다. 그때 비하면 엄청나게 변했지요.

- 예.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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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18.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3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6) "사십 년을 살아온 제2의 고향" ------------------------- 조○○

1940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2-2

날짜 : 2015년 1월 7일

장소 : 자택

 

- 선생님께서도 우체국에 오래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나도 우체국에 근무했습니다. 한 삼십 년 됩니다.

예전에는 체신부에 근무한다고 체신인이라 했어요. 체신부가 건국 이후 부터 내려오다가 과학이 발달되고 정보통신 계통 업무가 늘어나다 보니까 정보통신부로 개명이 되었다가 다시 전파 업무를 관장하게 되다 보니까 모든 방송전파 업무를 관리를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전파관리국에서 전화국도 관리 했고 통신도 관리했지요.

처음에는 체신부에서 전화와 모로스 전신 업무를 담당했는데 업무가 점점 늘어나서 전화국에서 담당하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 산업이 발달하게 되면서 통신 업무가 제일 중요했는데 전화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전화 가설을 해줘야 되는데 그 수요를 못따라 가서 부작용이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전기통신연구소를 창설해서 거기서 자동교환기를 우리나라 자체적으로 개발한 겁니다. 그 기술을 금성사에다가 넘겨 가지고 기계를 만들어서 엄청 돈을 벌었다고 해요.

그 당시만 해도 전자교환기는 없었거든요.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서는 독일 정도가 했고 나머지 나라에서는 못만들었던 시절에 우리나라 전기통신연구소에서 개발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나라도 1만회선 정도 되면 그 당시에 전화국을 하나 지었어요. 그 당시 그러니까 75년도에 내가 마산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때 창원공단이 막 설립이 되었어요. 지금 창원우체국 전신인 창원기지우체국을 창설하는데 필요한 수요조사를 맡게 되었어요.

- 창원기계공단이 조성되던 초기이군요.

= 그렇죠. 그 당시에 공단 쪽에서 하는 얘기가 우체국을 꼭 세워줘야 한다고 하더만요. 그러면 자료를 달라고 했더니 앞으로 공장이 몇 개가 들어설 것이고 하는 내용인데... 그 당시만 해도 나도 그렇고 우리 우체국 안에서도 선반이 무엇인지 금형이 뭔지 몰랐어요.

그래 모든 걸 되는 쪽으로 출장보고서를 체신청에 올렸어요. 그걸 기준으로 해서 설립이 되었는데 그 우체국이 기지우체국에서 서기관 우체국으로까지 발전했어요.

- 처음 그 우체국이 들어선 자리는 어디입니까?

= 처음 들어선 데는 공단관리청(아래 사진) 안입니다.

몇 년 안가서 공장이 많이 들어서게 되니까 전화 업무도 폭발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까 거기 전화국도 하나 서게 됐습니다.

 

공단 관리청. 당시에는 저층부(2층)만 있었다.

 

- 그럼 마산에는 언제 오시게 되었습니까?

= 함안에서 살다가 75년도인가 집을 사고 이사 오기는 76년도에 이사를 왔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바로 이 자리입니다.

집은 기와집인데 아래채 두 채가 물치로 등기가 되어 있었어요. 물치가 뭔 말이냐 하면 헛간입니다. 그런데 농사를 안짓게 되니까 거기다가 방을 넣어서 방을 여덟 개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 그 방세 받아가지고 내 월급하고 해서 아들 공부시키고 그랬죠. 그 뒤에 정년퇴직 하면서 뜯고 집을 새로 지었어요.

- 그럼 언제 정년퇴직 하신 겁니까?

= 98년도 말에 이 집을 지었는데 정년퇴직 하면서 이사를 들어왔어요.

새 집을 지을려고 사택 있는 데로 부임해 갔다가 집을 짓고 퇴직 하면서 이리 들어 온 거죠. 76년도에 여기 왔으니까 내년이면 딱 사십 년이 되네요.

- 여기서도 오래 사셨군요. 그럼 원래 고향은 어디 입니까?

= 함안 산인입니다. 내가 커기는 산인에서 컸어요. 마산대학 있는 고개 하나 넘으면 우리 동네인데 문암마을이라 불렀어요.

산인 입곡못 들어가는 거기에 고속도로 있고 옛날 기차길도 있는 그 길가에 집채만한 바위가 네갠가 다섯갠가 있었어요. 문처럼 생겼다고 해서 문바구인데 그게 우리 동네 이름입니다.

그 동네가 분지처럼 되어 있거든요. 기차굴도 뚫혀 있고 그 가운데쯤 동네가 우리 동네입니다. 그리고 또 학교도 창신고등학교 나왔는데 59년도에 졸업했어요.

- 그럼 고등학교 다니실 때 산인에서는 어떻게?

= 기차로 통학을 했어요.

아침 통근차가 그 당시에 여기에 여덟시인가 도착하는 기차가 있었어요. 산인에서 타면 한 삼십 분 걸렸어요.

- 옛날 북마산역(아래 사진)에 내렸겠네요?

 

 

= 그렇죠. 그런데 걸어다니면 두세 시간 걸렸지요. 기차가 없을 때는 걸어다녔어요. 당시에 우리 마을에서 걸어다닌 학생이 있었어요. 나보다 두 살 더한 사람인데...

- 76년도에 이사왔을 때는 이 동네에 주택이 다 들어서 있었습니까?

= 여기에는 집이 얼쭉 다 있었어요. 저 다리걸 위로는 다 밭이고 꽃 키우고 그랬어요.

여기 조금 위에 예전에는 논으로 해서 물이 내려오던 도랑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도랑이 전부다 묻히고 물이 다른 쪽으로 흘러나갑니다. 미나리꽝은 앵지밭골 쪽에 있었고 이쪽에는 많이 없었어요.

- 그리고 또 공장은 없었습니까?

= 저 무학상가 쪽에서 어떤 사람이 공장을 하다가 망해서 팔고 거기에 무학상가를 지었어요. 그리고 저 건너 대림아파트 쪽에 공장이 있었는데 염색공장인지 그 염색한 물이... 회산다리 옆에 구거가 하나 있어요.

어북 높은 하수구가 있었는데 거기에 항상 시커먼 물이 흘러갔습니다. 지금도 그 하수구가 철길따라 쭉 있어요. 그때 우리가 그걸 보고는, 저것 때문에 우리 앞바다가 죽음의 바다가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이 밑에 소가죽 가공하는 우피공장이 있었는데 도둑놈들이 소 몰고 와서 잡아가지고 시장에 팔고 그랬다는 얘기도 있어요. 지금 자동차주차장 있죠?

그 옆에 큰 집이 그것 허물고 지은 집입니다. 거기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주차장 옆으로 들어 가는 그게 우피공장 터구만요. 또 회산다리 쪽에 정미소가 있었어요.

그 정미소 이름은 모르겠는데 산인에서도 구르마를 대가지고 나락을 싣고와서 찧어 가지고 마산에 팔고 그랬거든요. 산인에서도 여기 올 정도가 됐으니까 내서, 칠원 쪽에서 많이 왔죠.

그 아들이 김형일 씨라고 로타리 회장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시조회관하고 연결이 되고 있어요.

이 밑에 북마산중앙시장 주인이지 싶은데 박씨라고 그 분이 또 솥 공장을 했어요.

- 처음 이사 오셨을 때 여기 하천에는 물이 어땠습니까?

= 내 이사올 그때는 벌써 추접어졌어요. 비가 와서 한번 싹 쓸고 내려가면 만회할 정도였지요.

왜 그렇느냐 하면 건너 둥구나무 있는 데 사람들이 많이 살아가지고 하수가 많이 나왔거든요. 지금 마여중 있는 데까지 올라가야 빨래를 할 수 있었어요.

- 예전에 출퇴근은 주로 어떻게 했습니까?

= 나는 주로 걸어다녔거든요. 차를 안타고 마산우체국까지 지금 중부경찰서 앞에 합포우체국까지 걸어 다녔어요.

여름 한철 한 두어 달 정도는 못걸었고 그때 외에는 늘 걸어서 출근 했어요. 왜 그러냐 하니까 나는 버스를 타는 게 굉장히 싫더만요. 그 당시는 시내버스는 굉장히 비좁고 좀 뭐한 운전기사는 일부러 급브레이크를 밟아 사람들을 뒤로 밀어서 억지로 많이 태울려고 그런 짓을 많이 했거든요. 사람을 짐짝 취급하는 게 싫어서 걸어다니기로 하고 그때부터 계속 걸어 다녔어요. 걸어 다니니까 좋은 것이 지금 나타납니다.

그 걸어다닌 그 결과로 지금 무릎이 안아파요. 처음 사십대에는 무릎이 많이 아팠는데 계속 걸어다니니까 그 아픈 게 잦아들더만요. 그래 철길따라 쭉 가는 길로도 다니고 화장막으로 해서 자산동으로 걸어다녔어요.

그 당시에 우리 집 있는 도랑 이쪽은 여기까지만 길이고 그 위로는 없었고요. 지금 저 웃다리 앞에 다리는 오래된 다리이고 그 위 다리도 오래된 다리거든요.

거기서 버스 다니는 길과 연결되는 길이 있는데 그쪽만 연결되어 가지고 꼬불꼬불 하게 위로 올라갔지 지금처럼 안발랐어요. 그 공사하는 바람에 우리 집에도 물이 들어와 가지고 혼이 났지요.

- 이 하천 때문에 수해가 많았지 않습니까? 그 얘기 좀 해 주시지요.

= 80년도인가 79년도인가 그렇습니다. 앵지밭골에서 내려오는 냇가가 있는데 마여중 쪽에서 부터 하천 직강공사를 했거든요.

그 이전에는 꼬불꼬불 했어요. 그 공사를 빨리 했어야 되는데 흙을 그냥 방치해 둔 상태에서 엄청난 비가 오니까 그 흙이 다 쓸려 내려가 버렸어요.

개울에 흙이 어느 정도 쌓였냐 하면 저 , 절반쯤 쌓였어요. 그 흙이 다 쓸려내려와 오니까 우리 집에도 물이 들었고 지금 소담한의원 하던 자리도 싹 쓸어가지고 거기 살던 사람이 수해를 많이 입었죠.

그 당시 낮에 비가 크게 왔으니까 인명피해는 나지 않았어요. 밤에 비가 왔으면 집 쓸려 간 사람들은 욕을 봤을 겁니다. 저 밑에 빙 돌아가는 거기가 지대가 좀 낮아요.

낮부터 비가 많이 왔으니까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물 구경도 하고 그랬거든요. 나도 퇴근해가지고 애들을 친척집에다가 데려다 주고 이 집을 비웠어요. 연탄 때던 시절인데 집에 물이 들어차 가지고 연탄이 녹아서 가루가 되어 버리고... 그런 시절이었지요.

그게 아마 79년도일 겁니다. 내가 이사 온 몇 년 뒤니까요. 그때 교방동에도 수해가 났는데 그 위에 풀장에 물을 가두었다가 한참에 여는 바람에 피해가 많았다고 하더구만요.

- 그 당시에 이 앞에 다리도 떠내려가고 그랬다고 하던데요?

= 완전히 쓸려내려 간 것 아니고 반쯤 떠내려갔던 것 같네요. 일렁일렁 해가지고 난리가 났었지요.

그 당시에 우리 집에서 조금 내려가면 돌다리가 두 개 있었어요. 위에 다리는 허물고 새 다리를 지었고 밑에 거는 도시계획으로 동중학교로 연결되는 길이 뚫리면서 새 다리가 섰고 그 다리는 못 쓰는 다리가 됐지요. 옛날에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조금만 올라가면, 여기 다리 말고 웃다리에만 가도 이런 바위들 큰 돌멩이가 많았거든요.

바위가 아니고 둥글둥글 한 큰 돌멩이지요. 그걸 학생들이 주워다가 창신고등학교 울을 쌓았어요.

- 담장을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 그렇지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만들었어요. 그 전에는 학교 담이 없고 철조망이 쳐져 있었는데 새로 온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리니까 안되겠다며 담을 쌓았어요.

학생들을 모두 동원해서 이 회원천에서 돌멩이를 말큼 주워와서 쌓아가지고 돌담을 만든 겁니다. 전부 다 학생들이 운반했어요. 그 당시에 우리 고등학교가 세 학급으로 모두 아홉 학급이고, 중학교가 아홉 학급 되니까, 열여덟 학급이고 육십 명씩 하면 약 천 명이 됐거든요.

그러니까 학생 한 명이 한 개씩 운반해도 천 개니까 그게 어디요? 그렇게 쌓은 그 담이 최근까지 있다가 아파트 지으면서 그걸 싹 다 없애버렸더라고요.

-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그때가 언제입니까?

= 그 때가 58년도, 59년도지요.

그 당시만 해도 이 하천 바닥을 견치돌로 안해놨고 시멘트도 안해놨고 자연상태 그대로니까 그냥 일반 내와 같이 이런 돌멩이들이 많았어요.

그래 학교 졸업하고 십 몇 년 지나서 여기로 오니까 냇가 양쪽을 견치돌로 다 쌓았더라고요. 바닥도 견치돌로 전부 다 이렇게 해놓고 물이 그 위로 흐르도록 해놨더라고요.

- 예전에 이 하천 건너 정자나무 있는 데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 그냥 회원동 둥구나무라 했지요.

또 회원동 그쪽은 일제시대 일본군 말 키우는 마사가 있었다는데 일본군이 물러가고 나서 귀환동포가 거기 살았다고 합디다. 그걸 시에서 싹 뜯어버리고 아파트 지어 분양을 하고 그랬다하대요.

- 그리고 이 위로는 그 당시에 앤지밭골 하고 무학농장이 유명했다고 하던데요?

= 그렇지요. 무학농장은 주로 봄철에 사람들이 놀러 가던 장소로 유명했습니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다보니까 자주 못갔는데 우리 함안조씨 화수회를 거기서 한 적도 있어요.

한때 사람들이 많이 놀러 갔었는데 그 뒤에 무학농원이 없어지고 나서는 마재고개 두척 골짝에 도축장 밑에도 놀러 갔어요. 그것도 요 근래에는 없어졌는데 거기도 우리가 두어번 놀러갔어요.

우리 동네에서 친목계를 만들자 해서 모아가지고 장구도 사고 해서 그 장구 가지고 놀러가고 그랬습니다. 동네 계이니까 별 이름도 없이 그냥 묵자계인데 나는 그 뒤에 빠졌지만 지금도 그 계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놀러 다니는 편이 아이었던가 봐요. 일요일에도 집에 붙어 있고... 그 당시만 해도 경제사정이 어려워가지고 놀러 한번 가는 것 같으면 월급이 많이 손해가 나거든요.

그러니까 못갔어요. 요새처럼 돈이 넉넉했으면 놀러도 다녔을텐데... 항금에야 등산이나 하고... 허허허. 그리고 지금 생각나는 게 하나 있는데 저 위쪽 산에 수도사라고 절이 있어요. 그 자리가 원래 창신고등학교 선생님 한 분이 맨 처음... 참 그 어른도 굉장한 분이야.

그 당시에 순 바위만 있는 거기에다가, 어디 가서 바위 깨는 방법을 배워와가지고, 바위를 깨고 그걸 쌓아가지고 거기다 집을 조그맣게 하나 지었어요.

몇년 지나고 거기 가니까 절이 서 있더라고요. 왜 갔느냐 하면 그 선생님이 장미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서 자기 집 근처에 장미꽃을 많이 심었어요. 백장미도 있고 흑장미, 검붉은 장미도 있고... 장미를 아주 많이 심었는데 우리가 가면 그 선생님이 접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더만요.

눈만 딱 떼어가지고 접붙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데 나도 그 꽃이 너무 좋아서 그걸 하나 얻어와서 해보고 했는데 한번도 성공을 못했어요.

지금 거기 가면 주춧돌 바닥에서 돌멩이로 쌓은 언덕이 있는데 거의 반 정도는 그 선생님이 쌓았을 거구만요. 그래서 지금은 거기가 넓은 절터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수도사에서 등허리를 하나 넘으면 무학농원이거든요.

- 예전에 시장은 어디로 다녔습니까? 목욕탕은 어디가 먼저 생겼습니까?

= 남일탕이 먼저 생겼지요. 지금은 남일탕은 없어졌는데 거기에 어린이집이 들어섰습니다.

그 다음에 태양탕이 생기고 나서는 주로 태양탕에 갔어요. 남일탕이 좀 낡았다고 사람들이 잘 안가더만요. 태양탕은 그 주인이 그것 팔고 저 건너편에 현대탕을 했어요.

당시에 수출자유지역에 공장이 많이 있으니까 그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 우리 동네 와서 방 얻어가지고 그리 생활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집에 방이 그리 많았지요.

이 밑에 중앙시장도 전에는 없었어요. 북마산역 앞에 소전거리라고 제비산 밑에 우시장에 있었던 상점이 옮겨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 못쓰는 땅에다 건물을 지었는데 거기에 북마산시장이 생겼거든요. 시장 들어선 데가 원래 지대가 좀 낮은 곳이었요.

그래 내가 이 동네로 오니까 이미 거기에 상남동우체국이 있었어요. 시장이 이사 오고 사람들이 엄청 붐비니까 상남동우체국도 일이 많아진 거죠.

- 벌써 사십년 가까이 이 동네에서 사셨는데 감회가 어떠십니까?

= 뭐 특별한 감회 같은 그런 거는 없고요. 현대적인 집이 들어선다 하니까 좋지요.

- 예. 오늘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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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건축학도 2021.01.22 00:38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나가는 건축학도입니다. 이번 졸업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산항에 대해서 관심이 아주 많았는데 선생님의 좋은 글귀와 생생한 역사 텍스트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좋고 귀한 글을 볼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자주 들려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코로나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

  2. 허정도 2021.02.06 16:46 address edit & del reply

    방문 감사합니다~

  3. 한찬욱 2021.02.18 22:16 address edit & del reply

    아주 흥미롭고 깊은 내용이 많군요 도시에 관심이 많으신 데 혹시 이 책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도시의 정의 신전 기원 역할 경제성장 에너지 엔트로피 관점에서 고찰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0611153

2021. 1. 11.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2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5) "서민들 사는 보통 동네에서의 조용한 기쁨" ------------------------- 최○○

1936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1-5

날짜 : 2015년 1월 7일

장소 : 자택

 

- 반갑습니다. 저기 걸린 액자는 좀 특이하군요?

= 저건 내가 우체국장 하다가 정년퇴직 했더니 누가 기념으로 준 겁니다.

청춘은 결코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다 마음의 상태이다는, 이 말은 젊다고 청춘이 아니고 늙어도 마음만 먹고 있으면 청춘이다는 뜻입니다.

정년퇴직 하더라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라는 뜻에서 내한테 준 것입니다.

- 예. 보통 동양고전에서 좋은 말을 가져와서 액자를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서양 사람 이름이 적혀 있네요?

= 그렇지요. 사무엘 울만이 유명한 사람은 아닌데 저런 말을 한 모양입니다. 청춘이란 것은 젊다고 청춘이 아니고 마음이 젊으면 항상 청춘이다는 그런 말이죠.

- 그럼 선생님께서는 이 동네에는 언제쯤 오셨습니까?

= 내가 이 집에는 1997년 6월달에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여기 온 지도 만 18년이 됐네요.

- 거의 20년 가까이 되었네요. 그럼 퇴임하시고 나서 집을 사가지고 오신 거네요?

= 그렇지요.

- 이 동네가 처음 여기 오셨을 때와 지금하고 큰 변화가 있습니까?

= 똑 같습니다. 하나도 안변했어요. 이 근처는 딱 그대롭니다. 이 집도 옛날 그대로 입니다. 원래 집에다 샤슈만 새로 했는데 이것도 내가 한 게 아니고 전에 살던 사람이 이렇게 해 놓은 거예요. 샤슈를 달아놓으니까 난방도 되고 그래요. 안 그러면 추워서 안되지요.

저 마당에 있는 정원수도 내가 심은 게 아니고 다른 사람 것입니다. 이 앞에 솔나무까지만 내 거고 나머지는 원래 땅주인 겁니다. 나는 집만 샀어요. 그러니까 이쪽은 대지고 저쪽은 밭입니다. 등기상으로는 전으로 되어 있어요.

- 이 동네에서 이십여 년 가까이 사시면서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 아무런 특별한 일도 없었어요. 큰 사건도 없었고...

- 동네가 좀 조용한 편인 모양입니다.

= 아닙니다. 이 동네가 좀 시끄럽습니다.

하하. 뭐 그렇게 크게 시끄러운 일은 없었지요. 또 보면 전부 서민들이거든요. 집도 터가 몇평밖에 안되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살면 되는데 아파트 지어 놓으면 들어가 살려고 해도 돈이 없어요. 돈을 더 넣어야 하는데... 그런 상황입니다.

- 그러면 퇴임은 어디에서 하신 겁니까?

= 여기 상남동우체국(아래 사진)에서 국장 하다가 퇴임 했어요. 이 우체국으로 들어오면서 살 곳을 물색을 했지요.

상남동우체국도 역사가 오래된 우체국이고 또 큰 우체국이 석전동에 하나 있고 경찰서 앞에 또 하나 있지요. 거기는 서기관 우체국입니다. 또 남성동에도 우체국이 있는데 내가 거기 있다가 이리로 와서 여기서 정년퇴직 했어요.

 

 

우리는 한 사람을 한 군데 오래 안놓아 두거든요. 한 삼 년 주기로 로테이션 시킵니다. 왜그러냐 하면 한 군데 오래 놔두

면 아는 사람 많아지고 그러면 부정을 저지를 소지가 생기니까 그걸 아예 차단하려고 하는 겁니다.

우체국도 세월의 변화에 따라 엄청 변했습니다. 옛날에는 일이 많아서 상당히 바빴는데 요즘은 전에 맨치로 그렇게 안바쁘지요. 일반 국민들이 편지를 안써잖아요. 옛날에는 전부 편지 아닙니까? 요즘은 편지가 없어요. 뭐 통지서 보내는 것 말고는...

옛날처럼 안부 묻고 그런 거는 전화로 하지 누가 편지 보냅니까. 그래서 우편물량이 싹 줄어들었어요. 요즘에는 금융 편리함 때문에 우체국 왔다갔다 하는 거죠. 우체국이 제일 낫잖아요? 이자가 좋은 건 아니지만 국가에서 직접 하니까 신뢰성이 있지 않습니까?

일반 금융기관 말고 신협 같은 그런 데는 안그렇습니까? 만약 부실하게 되면 몇천만 원까지만 보장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 이상은 힘든 겁니다. 그런데 우체국은 국가에서 하니까, 우스개소리로 김정일이가 온다 해도 국가에서 보장하는 거니까요. 하하.

- 우체국에는 언제 처음 들어가셨습니까?

= 정확한 거는 내 수첩을 봅시다. 나는 이런 거 적어 다녀요. 혹시 어디 쓰고 할 일이 있을까봐.

1966년 1월달에 서울저금보험관리국에 국가공무원으로 그 당시에 5급 공무원으로 들어갔어요. 요즘으로 치면 9급택인데 그 당시는 5급이라 했어요.

- 그럼 처음에는 서울에서 근무하셨네요?

= 공무원 첫 출발은 서울에서 했죠. 실력이 좋으니까 서울에서 근무한 거죠.

하하. 그 당시에 5급 공무원 모집공고를 내면 시험을 치기는 도별로 모아서 쳤습니다. 전국에서 도별로 시험을 치고 나면 합격자들은 국가공무원이니까 총무처에서 총괄관리를 하거든요.

요즘은 총무처라 안하고 행정자치부라 하지만 옛날에는 총무처라 했어요. 그래 공무원이 되어 가지고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마산전화국으로 왔어요. 분수로타리 있던 데 거기 근무했어요.

그래 전화국에 칠팔 년 있다가 우체국으로 갔어요. 그 뒤로 기장우체국, 서생우체국, 칠원우체국, 진해우체국, 양덕우체국, 남성동우체국, 회성동우체국을 거쳐서 여기 상남동우체국에서 정년퇴직을 했지요. 그러니까 삼십 년 넘게 근무했네요.

- 그래 살아보시니까 이 동네 어떻습니까?

= 직장에만 왔다갔다 하니까 동네 사람들과 접촉할 일이 별로 없었어요.

또 나이가 많으니까 친구가 별로 없어요. 이 동네에 내 또래 친구도 없고 그러니까 맨날 혼자서 집에서 책 보고 신문 보고 시조창이나 하고... 하하. 그렇게 지냅니다.

- 여기 건너편에 보니까 시조 회관이라고 있던대요 ?

= 내가 거기 다닙니다. 시조 공부하러 다닙니다. 거기 이름이 한국전통예약총연합회 마산지부인데 시조창 하는 데입니다. 내가 국창까지 졸업 다 했어요. 요즘은 젊은 사람들 한테 가서 가르쳐요. 오늘도 내가 갔다 왔는데, 제일여고 앞에 보면 금강복지회관 있죠? 거기에서 하모니카를 배우고 있습니다. 또 명상도 하고 그러는데 뭐 소일거리죠.

- 그래도 악보를 읽을 줄 알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 알죠. 하모 이걸 모르면 되는가요?

하하. 이걸 하니까 재미있어요. 이거는 계음을 모르면 안되거든요. 하모니카 배운 지는 한 일년쯤 됐어요.

- 그럼 악보 없이도 여러 곡을 연주하시겠네요?

= 그런데 계음을 알아도 악보 없이는 안됩니다. 젊은 사람들 맨치로 악보를 못 외웁니다. 그러니까 악보를 보고 불어야지요. 하하.

- 좋은 취미생활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요산산악회라고 있는데 거기서 딱 금요일마다 산에 갑니다. 옛날에는 천 고지 이상 갔는데 요즘은 나이 많다고 조금 낮은 산에 다닌다고 오륙백 정도 되는 데 갑니다.

하하. 그래도 네 시간 이상 걸으니까 좋습니다. 나댕기니까 마음이 즐겁고 그래요.

- 이 동네에 이십여 년 사시면서 동네 옛날 이야기 이런 거 들으신 거는 없습니까? 옛날에 여기 미나리꽝이 있어서 얼음이 얼고 그랬다고 합니다.

= 미나리꽝이 어디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왔을 때는 무학상가가 지어져 있었고 주변에는 밭이고 그랬지요. 그런데 마을흔적 남기기, 한다는데 여기가 옛날에 무슨 훌륭한 역사의 유적 같으면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고 보통 동네인데 뭐 할 게 있나 싶습니다.

한다고 해도 여기는 옛날에 무슨 터라고 조그만 비석 하나만 세워놓고 말아도 돼요. 그래 간단히 하면 될 걸 거기다가 무슨 거창하게 넣을 게 있겠습니까?

- 예. 맞습니다. 하지만 이 동네가 사라지기 전에 동네의 사소한 이야기라도 모아서 남기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예정대로 절차가 진행되면 몇 년 안에 다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설 것 아닙니까?

= 확실히 어떻게 될지 그거는 잘 모르죠. 이게 뭐 되는 건지, 안되는 건지... 벌써 몇 년 째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뭐 그런갑다 하고 그냥 있는 거죠.

- 예정대로 재개발이 잘 진행되고 또 앞으로도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오늘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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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4.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1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4) "한 집에서 46년을 살아오면서" ------------------------- 김○○

1940년생

마산회원구 회원동 598-16

날짜 : 2015년 1월 6일

장소 : 조합사무실, 자택

 

- 반갑습니다. 이 동네에서 아주 오래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동네의 옛날 얘기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살고 계신 데는 언제부터 사셨습니까?

= 우리 동네 내력을 역사로 남겨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여기 69년도에 들어 왔습니다.

- 예. 정말 오래 되었네요.

= 68년도에 집이 완공 되고 69년도에 입주가 되었는데 우리도 69년도에 들어왔으니까 올해가 46년째인가 그럴 겁니다.

여기가 원래 나락 심고 하던 논이고 미나리꽝이고 그랬다고 합디다. 몇 사람 업자들이 모여 가지고 택지로 개발해서 집 서른두 동을 딱 한꺼번에 지어 가지고 개개인 한테 팔았어요. 매월 얼마씩 부금을 넣어야 하는데 14년 부금이었을 겁니다.

- 여기 주택들이 평수가 다 비슷해 보이던데요?

= 모서리에 있는 집 같은 경우는 조금 어중간 하니까 몇평 더 있어도 그외는 거의 다 비슷해요. 등기상으로는 서른다섯 평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서른여덟 평입니다. 분양할 때는 서른다섯 평인데 그 뒤에 재어 보니까 우리 게 평수가 더 있어요.

똑같이 짓는다고 했는데 우리 집은 세 평이 더 있어요. 그래 69년도에 입주를 했다가 그 뒤에 팔고 나가고 새로 들어오고... 우리는 한번도 옮긴 적이 없었고요.

- 당시에 여기 오셨을 때 이 동네를 뭐라고 불렀습니까?

= 공영주택입니다.

- 그러면 수재민 주택이라는 것은 잘못된 얘기군요? 여기를 수재민 주택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던데요?

= 예. 수재민 주택은 아닙니다. 우리가 집을 사서 들어왔는데 수재민 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이사 들어오고 나서 수재가 났습니다. 그때 도랑가 집들이 홀라당 떠내려가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여기 오고 얼마 안있어 가지고 사태가 났어요. 큰물이 졌거든요. 우리 동네도 얼쭉 담았어요. 우리 집은 조금 높다 보니깐 안그런데 낮은 집은 방에까지 물이 들어갈 정도였거든요.

그래 우리 여기는 조금 높고 도랑가는 조금 낮습니다. 그러니까 벽을 뚫어가지고 물 빠져나가게 하고 그랬거든요. 그때 수해가 나서 이 밑에는 쓸었어요.

그래 그 사람을 이동시키기 위해서 화란주택이 지어졌습니다.

그때는 내가 젊었을 때인데 천주교에서 화란주택이란 거를 지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어요.

- 화란 즉 네덜란드에서 원조를 하고 천주교에서 관여를 해서 주택을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 맞아요. 거기에 들어간 사람들이 수재민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처럼 주택 단지로 지어진 것은 여기가 처음이었거든요. 그 당시에 보로꾸로 지은 게 아니고 전부다 벽돌로 지은 겁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동네 집을 보고 우와~ 하고 그랬어요. 슬라브로 깨끗하게 지으놓으니까 전부 다 우와~ 하고 놀라고 그랬거든요.

여기 들어온 사람들도 교감 선생님, 공무원,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로는 고급주택이었어요. 처음 지을 때부터 단층 슬라브였는데 우리 집은 그때부터 하나도 안변했습니다.

지금 보면 이층 올린 데는 다 새로 지은 거고 우리는 단층 그대로입니다. 조금 달아냈을 따름이지 나머지는 거의 원형 그대로라고 봐도 됩니다.

그리고 난 뒤론 이 동네는 큰 변화가 없었어요. 집 다 들어서고 난 뒤로는 딱 그대로 입니다. 지금은 좋은 집들이 많으니까 이건 집도 아닙니다. 오두막이지. 하하. 사십 년 전에는 진짜로 좋았습니다.

- 그럼 69년도에 들어오셨을 때 이 밑에 무학상가도 없었겠네요?

= 그렇죠. 우리 오고 나서 그 뒤에 무학상가가 들어섰습니다.

이 주변에는 이 동네만 오물오물 있었고 위로는 전부 논이고 밭이었습니다. 이 위에 올라가면 태양탕 있지요? 거기는 솔밭 비슷하게 언덕받이가 되어 가지고 묘지도 있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태양탕이 들어오고 그 위에 또 황금탕이 지어지고 그랬어요. 지금은 남일탕이 없어졌습니다만 옛날에는 거기로도 목욕하러 다니고 했거든요.

주공아파트, 지금 블루밍 안있습니까? 거기도 다 언덕받이 비슷한 그런 상태였어요. 도랑 건너에 집이 조금조금 있고 회원국민학교가 있었고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조금 아래 미나리꽝 있는 그 언덕으로 집이 몇채씩 있었어요. 부분부분 조금 있고 또 논이 있고 그랬어요. 그때는 차가 없으니까 부림동으로 내려 가려면 마을 가운데 샛길을 지나서 모 심어놓은 논길을 지나서 걸어다녔거든요.

이 아래 북마산역에 가려고 하면 사선으로 질러가는 길로 다녔습니다. 구마산역 쪽으로 해서 공설운동장, 양덕 한일합섬으로 가려고 하면 문디고개라 하는 데가 있었는데 그 길로도 넘어 다니고 그랬어요.

거기도 약간 언덕받이처럼 그랬는데 온통 흙구덩이였어요. 산호동 학교 뒤로 그쪽으로는요.

- 여기 오셨을 때 주변에 작은 공장은 없었습니까?

= 엄청 못사는 동네였어요. 여기가 옛날에 산동네 아닙니까? 그러니까 큰 공장은 없었어요. 도랑 따라 내려가면 저쪽 건너편에 건빵 공장, 또 회원초등학교 쪽에는 장갑 짜는 공장 그런 잔잔한 공장들이 있었어요. 지금은 다양한 과자가 나오지만...

옛날에 뻥튀기 비슷한 과자 안있습니까? 그 만드는 공장이 언덕받이에 하나 있었습니다. 여기서 얼마 안올라갑니다. 무학농장 올라가는 길 쪽에 지금 형제상가 근처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에 과자 공장이 있었어요.

거기 가면 과자를 많이 줬어요. 모양을 만들어서 튀기는 과자인데 그런 걸 사러 간 적이 있어요. 애들이 어릴 때니까 한 70년대 중반쯤 되겠네요.

- 그 당시에 무학농장이 아주 유명했지요?

= 그렇죠. 무학농장은 처음에 누가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나중에는 한일합섬에서 인수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왔을 당시에는 무학농장 관리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당시는 참 좋았어요. 마산에서 유명한 유원지 아닙니까?

봄 되면 사람들이 여기 얼마나 많이 온지 모릅니다. 앵기밭골 하고 무학농장은 또 다릅니다. 위치가 약간 다르거든요. 무학농장은 성인들 술 먹고 노는 그런 위주고 앵지밭골은 초등학생 중학생 소풍 가는 장소로 많이 이용 됐어요.

그때 무학농장이 얼마나 많이 알아줬다고요. 마산시민이 진짜 다오다시피 했어요.

우리가 신마산에서 살았는데 걸어서라도 여기까지 왔어요. 봄 되면 꽃이 많이 피고... 봄 되면요. 여자 두어 명 모이면, 우리 무학농장에 치마 주워러 가자, 이럴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유명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자들이 술 먹고 놀다 보면 옷상태가 형편없이 되고 그렇거든요. 치마도 내팽겨치고 가버리고 하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겁니다. 그만큼 여기가 유명한 곳이었어요.

무학농장 옆으로 앵기밭골 쪽에는 젖소도 유명했어요.

- 옛날에는 이 앞 도랑에서 빨래도 하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하고요. 그 송사리 같은 고기도 잡고 그랬어요. 물이 얼마나 깨끗했다고요.

70년대에 태어난 애들은 여기서 목욕 했어요. 우리 애들도 데리고 나가 씻기도 그랬거든요. 다라이에 담요 같은 거 들고 가서 밟아서 행구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수도물이 제대로 안들어 왔거든요. 우물도 안파져 있었거든요. 집 지었을 때 수도는 넣었는데 수도물이 잘 안나왔습니다. 격일제로 나왔거든요. 열두 시에 나올 때도 있고, 잠시잠시 주고 그랬거든요. 물이 없어 가지고 물 이로도 많이 댕기고 그랬어요. 온 동네 댕기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주로 도랑가에서 빨래를 씻었지요.

- 여기 도랑에는 샘이 없었습니까?

= 지금 위에 다리 있지요? 이 앞에 다리 말고 위에 다리, 그 바로 밑에서 물이 나왔어요. 얼마나 물 좋았다고요.

겨울에도 얼지않고요. 여자들은 거기 가서 빨래 씻고... 밤되면 저녁 묵고 설걷이 다 해 놓고, 아이들 다 그거 해 놓고 거기 가서 빨래 씻고 목욕하고 오고 그랬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 그럼 그 샘을 뭐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까?

= 물이 솟으니까 물난데라 그랬지요.

여자들은 우리 저 위에 목욕하러 가자, 하면서 여자들 혼자는 안가고요. 너는 씻으로 안갈래? 그랬어요. 다리 밑에 물이 송송송 났거든요.

거기서 내려오면 공동샘이 또하나 있었거든요. 옛날에 설훈 집 옆에 깊지는 안해도 우물이 하나 있었어요. 그 물을 이고오고 그랬어요.

지금 도랑 건너 미장원이 하나 있는데 그 미장원 뒤에 조그만 기와집이 있었고 그 앞에 설훈 집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집이 남아있을 겁니다.

지금 민주당 국회의원하는 그 설훈입니다. 막내 동생 하고 마고 동기거든요. 이 집에도 놀러 오고 했어요.

또 이 밑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메워져 있어요. 그 우물은 얼마 안됐어요. 우리 집 굼티 있는 데로 나가면 대문에 키위나무 있는 집 그 안에 우물이 있었어요.

그 우물이 너무 좋았어요. 거기로 물 뜨러 가기도 하고 그랬죠. 옛날에는 조그만 터만 있으면 방을 지어서 남 세주고 그랬는데 그 구석에 샘이 있는데 참 물이 좋더라고요. 이 동네가 옛날에는 참 물 좋다 했는데 지금은 집들이 많이 들어서서... 그때만 해도 골짜기 아닙니까?

옛날에는 회원동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이고 지금도 회원동 그 골짜기 사나? 이런 말을 했어요. 실제로 참 못사는 동네였어요. 택시도 안올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제사 모실려고 제사장을 봐서 택시 불러서 회원동 정자나무로 가자고 하면 택시를 딱 대다가도 가버립니다. 세 대쯤 보내야 택시를 잡을 수 있었어요. 그랬는데 이제는 서로 올라 합니다.

하하. 회원동 정자나무(아래 사진), 그 나무가 육백 년 됐다고 그러는데 그게 많이 알아줬거든요. 무학농장 가는 길 정자나무라 하면 알아줬거든요.

 

 

- 하나 더 여쭤 보겠습니다. 예전에 마포중학교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마포중학교 알지요. 그 자리가 어디인가 하면 무학자이 있는 그 자리입니다. 마포중학교가 야간도 있었고 주간도 있었고 그랬는데... 그 주위에 있던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지요.

없어진지 오래됐는데 그래도 거기가 추억이 어린 곳이요. 우리 때는 마중이나 동중 이런 데는 시험을 치고 들어가야 하니까, 또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 배운다고 마포중학교에 많이 다녔어요.

그런 얘기하면 눈물 흘리는 사람 많을거요. 참 못살아서... 먹을 것도 없었거든요. 그래도 배우겠다고 밤에도 오고... 신마산에서도 여기 오고 그랬어요.

- 그리고 혹시 이 공영주택 입주 당시 사진이라든지 옛날 이 동네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는지요?

= 그때는 카메라도 귀했어요. 애들 운동회 한다고 카메라 하나 빌리려고 해도 사진관에서도 잘 대여 안해줬거든요. 그러니까 여기 사진 남기고 그런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사진 찾아봐 달라고 얘기하길래 지금 좀 찾아 보니까 옛날 사진이 몇장 있네요. 아이들 어릴 때 사진인데 한번 보십시오. 이 사진은 결혼 사진인데, 이 날이 1969년 12월 21일입니다. 성호초등학교 앞에 있던 청락예식장에서 식을 마치고 우리 집사람이 이 집으로 들어오는 사진입니다.

- 예. 사진 찍은 날짜가 분명하고 또 그 당시 주택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정말 귀중한 사진입니다. 앞으로 잘 활용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계획대로 잘 추진되면 몇년 안에 새로 아파트가 들어설 것 아닙니까? 이 동네서 오래 사셨는데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은데요?

= 이 동네 서른한 집 중에서 우리가 제일 오래됐어요. 이사도 안가고 지금까지 사는 집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내가 고향이 월영동 만날고개 올라가는 데 거깁니다. 큰 당산나무 밑 동네인데 거기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거기보다 여기서 더 오래 살았습니다. 이 동네서 늙어간다 아닙니까?

지금 이 사업이 빨리 되었으면 하는 게 시작한 지가 벌써 십 년이 넘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기록해 두는 것은 참 좋은 겁니다. 왜냐하면 이걸 안해 두면 이 역사가 땅에 묻혀버리고 모른다니까요.

그러니까 옛날에 이런이런 게 있었다는 이게 시의 역사거든요. 나도 마산시청에서 삼십몇 년 근무 했습니다. 청소과, 세무과, 공보실 안가본 데가 없습니다.

또 중앙동 동서기부터 시작해서 교방동, 회원2동, 월영1동, 서성동, 저 구산면 면서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역사를 밝혀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앞으로 재개발이 잘 진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 하천이 깨끗해져서 빨래까지는 아니더라도 송사리 노는 거는 한번 봐야 안되겠습니까?

= 그리 될 날이 오겠지요.

- 오늘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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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28.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0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3) "삼십 년 넘게 한 자리에서 콩나물을 길렀다" ------------------------- 권○○

1949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무학상가 지하 수정식품

날짜 : 2015년 1월 6일

장소 : 수정식품

 

- 이 콩나물 공장이 이 동네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공장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장님께서 이 콩나물 공장 하신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 그러니까 원래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서 하던 거를 내가 인수 받았어요. 그때가 80년도인가 81년도인가? 그러니까 벌써 삼십 년이 넘었어요.

그런데 삼십 년이 지나도 돈을 못벌었으니까 못나가고 이래 있는 거지요. 벌써 나가야 되는데... 허허. 내 앞에 하던 분도 벌써 돌아가셨고요.

- 예. 그럼 이 아파트 들어서고 난 뒤에 공장을 하셨네요?

= 그 이전에 여기가 어떤 자리였냐 하면, 논이었습니다. 이 아파트 짓기 전에는 논인데, 어떤 논이냐 하면, 농사도 지어 먹을 수 없는 구렁논, 구렁논 안있습니까? 구렁텅이, 그러니까 늪처럼 그랬어요. 그래 거기를 메워가지고 지었어요.

70년대 이전에는 이 뒤로는 전부 미나리꽝이었어요. 여기는 논이 워낙 물컹물컹 하고 해서 집을 지을 수 없으니까 유일하게 여기만 논이었습니다.

밖에 나가면 아파트 맨 저쪽으로 옹벽이 있을 겁니다. 거기가 논이 끝나는 데거든요. 그쪽에 보면 지금도 탱자나무가 있을 겁니다. 그쪽에 옛날에 기와집 몇집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쪽에 집이 하나 있는데 육십 년 됐나? 그 집에 가면 나보다 더 잘 압니다.

왜 잘 아느냐 하면 내가 여기 왔을 적에 그 분이 시집 와 가지고 시집살이를 하고 살고 있었어요. 그분이 여기 동네에 대해서는 더 잘 알겠네요. 다른 집들은 사는 사람이 전부 바뀌고 그랬는데 그 집은 사람이 안바뀌고 집만 새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앞에 다리가 옛날에는 돌다리였는데 팔십 몇년도고? 그때 홍수가 나서 돌다리가 싹 떠내려가고 나서 새로 다리 지었거든요.

 

미나리 꽝 / 참고자료

 

- 그 홍수 났을 때 피해가 많았습니까?

= 우리는 별 피해가 없었어요. 이 공장 옹벽까지 돌이 치고 들어와서 다 깍여 나갔지요. 이 옹벽이 워낙 두꺼워서 그걸 차고는 못들어왔지 안그랬으면 여기도 피해가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앞에 다리 있던 밑으로는 싹 쓸어버렸어요. 그때가 내가 여기 인수하고 난 뒤일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 아파트 짓고 난 뒤로 내가 공장에 들어왔는데 그때 인수받을 적에는 이 상가가 또 뭐였냐 하면 방공대피소였어요. 대피소...

- 민방위훈련?

= 그렇지요. 민방위 대피소로 지정이 된 겁니다. 지역주민을 위해서 쓴 거죠. 상가에 지하가 있으니까요.

- 그 당시에 여기 상가에는 어떤 가게가 들어왔습니까? 작은 공장은 주변에 없었습니까?

= 주로 잡화점이고 또 고무신, 어물전, 그런 게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상가가 형성이 잘 됐는데 나중에는 잘안된 것 같습니다. 거기 대해서는 이 위에 쌀집에서 잘 알 겁니다. 바로 이 밑에 고물상 앞에 보면 주차장이 있는데 그 일대가 옛날에는 돼지털 공장이었고 가발공장도 하고 그랬어요.

요꼬 공장도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요. 또 이 밑에 내려가다가 도랑 이쪽에 철공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 그럼 사장님은 원래 이 동네 출신이십니까?

= 내가 원래 이 동네 출신이 아니고, 고향이 진주 산청입니다. 산청 오부면인데 뭐 먹고 살 게 없으니까 부모 뿌리치고 친구 따라서 나온 거지요.

그때가 열여섯, 열일곱 살 때지요. 내가 육십여섯이니까 약 오십 년 됐네요. 대략 65년도쯤 되는 것 같습니다. 마산에 왔다가 부산에 갔다가 서울도 갔다가 그랬죠.

여기 뒤에 보면 월남집이라고 있었습니다. 왜 월남집이냐 하면 월남 갔다 온 사람이 집을 지어 가지고 살았다고 해서 월남집이라 했어요. 그때 당시 파병으로 많이 갔다 아닙니까? 그때 돈도 벌어 와가지고 그 집을 지어 살다가 우리 숙모 한테 팔았던 겁니다.

그래 나는 숙모님 집에 와서 덤으로 들락날락 하다가 나중에 여기에 눌러 앉았어요. 그 당시는 이 근처도 그렇고 저 위에 벽산아파트 쪽에도 다 밭이었어요.

그리고 이 뒤로는 미나리꽝인데 겨울 되면 다 얼었어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얼마나 추웠습니까? 그때 나도 어릴 때니까 동네 애들 하고 앉은뱅이 스케이트 만들어 놀았죠.

나무로 앉는 판을 만들고 그 밑에 철사 대고 이렇게 만들었는데, 내 사촌형이 있어서 그 사촌형하고 스케이트 타고 놀고 그랬어요.

그 당시만 해도 여기 석교가 지금처럼 만들어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앞에 이 도랑이 참 좁았어요. 여기 도랑이 다른 이름이 없고 그냥 회원천이라 했는데 물이 맑았죠.

옛날에는 정자나무 그 위쪽으로 가면 가재도 나왔습니다. 여기서 빨래도 할 정도로 억수로 맑았습니다.

- 콩나물 키우기는 여기가 조건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 그렇죠. 원래 여기가 구렁논이다 보니까 물은 억수로 많습니다. 그러니까 콩나물 기르는데는 큰 지장이 없지요. 지하수니까 아무래도 여름에는 물이 좀 찹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그래요.

- 요새는 하루에 콩나물을 몇통이나 생산하십니까? 많이 하실 때는 언제 많이 하셨습니까?

= 아주 영세하죠. 콩나물 많이 해 봐야 열댓 통 하니까 많이 하는 거 아니고 그냥 겨우 생계나 유지하는 정도입니다. 처음 인수 맡아 가지고 할 때는 주로 어시장에 배달을 많이 했어요.

그때는 여기서 어시장까지 뭘로 배달 했느냐 하면 자전차로 운반했어요. 이런 플라스틱 통이 아니고 나무통이었어요. 그때는 스물댓 통, 서른 통 정도 했어요.

큰 통으로... 그때는 큰 것 밖에 없었으니까요. 참 미련스러웠지요. 그 나무통만 해도 물 먹어서 무거운데 거기다가 콩나물까지 들어 있으니까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 무거운 걸 두 통 세 통이나 자전차에 싣고 선창에 갖다 주고...

- 고생 많이 하셨겠습니다.

= 그렇죠. 그때 볼 것 같으면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 뒤에 조금 있다가 오토바이가 나왔고 그리고 조금 있다가 차가 나와 차로 운반을 했지요. 그러니까 시기 따라 세상 따라서 그래 산 거죠.

내가 살아나온 거는... 아직까지 나는 회사 회 자도 모르고 남의 집 밥 얻어 먹고 그러지는 안했어요. 처음에 와가지고 몇 년은 점원 생활 했지만 그 뒤로는 내 스스로 살았으니까요.

이 동네 없어진다고 역사를 알아야 된다고 하는데 내 이런 것도 뭐 역사가 되겠습니까?

-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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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21.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9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2) "동네 지킴이칠원쌀상회" ------------------------- 이○○

1948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무학상가 1층

날짜 : 2015년 1월 6일

장소 : 자택

 

- 반갑습니다. 지금 조합원 중에서 이 동네에 아주 오래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 예. 이 자리에만 거의 40년을 살았네요. 하여튼 요 동네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처음 왔을 때는 이 아파트 들어서기 전인데 내나 같은 동네입니다. 여기가 3-5번지인데 거기가 교원동 3-6번지이네요.

내가 여기 이사올 때는 단층 슬라브집 지어놓은 데 바로 들어 왔거든요. 주인이 진해에 있었는데 우리가 먼저 들어 왔어요. 방 큰 거 한 칸에 부엌 있고 다락방 있고 조그만 했어요.

지금도 내나 그대로 있거든요.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은 병원에 가 계시고 안계실 겁니다.

그리고 이 무학상가 자리에는 옷짜는 요꼬공장이 있었거든요. 지금 앞에 주차해 놓은 데가 공중화장실 자리고요. 그리고 바로 앞에는 옛날에 영일공업사라고 쇠를 가지고 뭐 만들던 공장이었어요. 그런데 요꼬공장은 이름을 모르겠네요.

그때만 해도 밭은 별로 없었어요. 집이 많이 들어서 있었고요. 초가집은 없었고 전부다 쓰레트나 기와집이고 슬라브 집은 몇집 있었어요.

교방동 쪽에는 논이 많이 있었는데 여기는 전부 집이었어요. 지금도 그때하고 집은 변동이 별로 없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 당시에 동네 주변은 어땠습니까? 동네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요꼬공장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다른 공장은 없었습니까?

= 건너편 회원동 쪽에도 기와집도 있고 쓰레트집도 있고 공터도 있고 그랬는데 내가 오고나서 집을 새로 많이 지었어요.

그때 동네 이름 뚜렷하게 부르는 것은 없었어요. 사람들이 집 위치를 물으면 옛날 요꼬공장이라고 그랬거든요. 우리가 뭐 부탁할 거 있으면 옛날 요꼬공장 옆으로 오라 그랬거든요. 그때 요꼬공장이 컸습니다.

하여튼 여기서부터 저 끝까지 전체였거든요. 그 요꼬공장을 뜯고 짓고 하는데 한 일년반이나 이년 가까이 걸렸을 겁니다. 요꼬공장 했던 사람 성은 모르겠네요.

그리고 상가 지하에 콩나물 공장이 있는데 지금 현재도 하고 있습니다. 그 콩나물 공장이 81년인가 82년인가 모르겠는데 그때부터 계속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한 사람은... 하도 오래돼서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성은 정씨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사람은 권씨이고요. 여기 콩나물 공장 이름이 수정식품인데 여기 지하수가 참 좋아요. 지하가 다 콩나물 공장입니다. 이 가게 여덟 개 하고 반 정도로 큽니다.

콩나물 공장 말고는 지금 현재로 바로 밑에 고물상이 있습니다. 그 집이 고물상 한 지가 한 칠팔 년 됐나 그럴 겁니다.

- 이 무학상가가 오래된 상가라고 들었는데 그 얘기를 좀 해 주십시오. 상가를 불하 받으신 겁니까?

= 예. 이 상가를 먼저 짓고 그 다음에 아파트를 지었거든요. 상가를 다 짓고 불하를 했는데 그때 가게 하나에 여덟 평 몇 홉인가 그럴 깁니다.

그때 가게가 총 39개였어요. 불하받을 때 평당에 얼마나 주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가게 하나에 2백만 원인가 주고 샀어요. 그래가지고 쌀집을 낸 거지요.

여기에 처음 상가가 형성이 될 때에는 생선장사, 식육점, 참기름집도 있었고 철물점도 있었고 잡화가게도 있었고 연쇄점도 있었고요. 이 무학상가를 지어서 분양한 업체는 개인이 했는데 그 사람도 세상 버리고 없고... 오래되니까 이름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여기 상가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은 다 가버리고 지금은 내 혼자 뿐이라예. 연쇄점이 있었는데 그 뒤에 받아서 한 사람이 감천슈퍼라고 있었거든요. 앞에 한 사람은 모르겠고요.

상가는 형성이 됐는데 장사가 잘 안됐어예. 밑에 시장이 가깝고 하니까 상가가 잘 안됐어요. 하나씩 하나씩 문을 닫았는데 한 이삼년간에 다 없어졌어예. 지금은 다 빈 가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파트는 상가 들어서고 난 뒤에 같은 업자가 올린 건데 2층 3층을 증축을 했지예. 처음에 모두 16가구가 들어왔는데 지금은 15가구만 살고 있어요. 한 집만 비어 있고 주인은 다 있고예. 지금 건물이 그냥 낡은 정도가 아닙니다.

- 이쪽 교원동으로 이사 오시게 된 거는 직장 때문이었습니까? 또 쌀가게도 오래 하셨지 않습니까?

= 그때 여기로 온 것은 남의 집이라도 새 집에 살아보자 해서 이사 온 겁니다. 직장은 우리 아저씨가 자유수출에 다녔어요.

나는 고향이 의령인데 회사 다닌다고 대구에 가 있다가 결혼해서 마산으로 왔어요. 우리 아저씨는 총각 때부터 여기에 있었고요.

아저씨 하고는 같은 동네는 아니고 나는 이병철이 생가 있는 정곡면이고 거기는 지정면이고 그래요. 그래 여기로 이사와 가지고 수출에 다니다가 거기 경기가 좀 안좋아가지고 해서 그만두고 가게를 사서 장사를 시작했지요.

그때부터 여기서 쌀집을 했습니다. 이름이 칠원쌀상회인데 태풍에 간판이 날아가버리고 나서는 그냥 간판을 안달았어요. 칠원쌀상회라고 한 거는 다른 사람이 하던 가게 허가를 우리가 받았기 때문이지요. 칠원쌀상회는 원래 다른 데 있었어예. 거기도 교원동인데 옛날 북마산역 밑에 그 안골목에 있었어예. 하도 오래 되어서 그 사람 성도 모르겠어예.

그래도 쌀집 냈을 때는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개업한 날이 78년 4월 10일입니다.

그때 개업잔치도 하고 떡도 하고 그랬어요. 십몇년 지나고 우리 아저씨가 기술을 배워서 도배를 했거든요. 옆에 가게를 세 얻어서 도배도 하고 장판도 팔고 하는 가게를 했어예. 그 가게 이름이 무학장식인데 지금은 안합니다. 안한 지가 육 년 정도 됐나 그렇습니다.

쌀가게는 그대로 하고 그때 장사는 잘 됐어요. 그때 쌀은 주로 함안 대산장에서 사왔어요. 의령하고 경계선이고 고향이 가깝다보니까요.

또 촌에서 누가 방아 찧어놨다고 연락오면 거기 가서 사오고 그랬어요. 그때 장날 쌀을 사놓으면 쌀집마다 배달해 주는 트럭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장날마다 배달하는 장차가 있었거든요. 그때는 정부미 취급을 많이 했는데, 조합에 신청을 하고 한 이삼일 있으면 배달이 됩니다. 또 쌀집은 보통 소금을 다 취급하는데 우리도 소금도 하고 잡곡도 하고 그랬어요.

- 한때는 쌀가게를 크게 하셨네요? 요즘은 어떻습니까?

= 할 때는 많이 했어요. 그때는 일반 쌀은 그렇지만 떡집에 들어가는 정부미가 억수로 많았어요. 정부미 한 창고 들여 놓으면 일주일만에 다 나가고 그랬거든요.

이 칠원쌀상회가 제일 잘 될 때는 이십년 전쯤 되겠네요. 우리가 78년도에 했으니까 85년부터 95년 그 사이에 최고 잘 되었을 때라고 봐야 되겠네요.

쌀이 많이 나가는 데는 떡집인데 우리가 주로 거래한 데는 어시장 지금 농협 있는 맞은편 골목에 서울떡방앗간 부산떡방앗간 그런 데 였어요. 이 근처에는 삼양떡방앗간이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회원1동 파출소 있는 데로 이사를 갔어요.

우리가 취급한 쌀도 옛날에는 통일벼, 밀양3호... 또 정부미, 납딱보리쌀, 혼합미 그런 종류가 많았어요. 지금은 아예 정부미라고는 없습니다.

지금은 주로 함안 산인 정미소서 바로 찧어 오거든요. 지금은 납품은 없고 오는 사람 있으면 조금 팔고 그렇습니다.

지금은 옛날에 비하면 장사도 아닙니다. 옛날에는 되로 팔고 그랬는데 지금은 소포장이 많이 나오니까 사람들이 시장에 가서 달랑 사오고 그렇거든요. 지금은 내가 재개발이 아니면 진작 그만두었을 겁니다.

- 예전에 큰 홍수가 난 적이 있다면서요?

= 쌀집 하면서 홍수 난 것은 뚜렷하게 기억납니다. 쌀가게 차리고 나서 얼마 안됐을 때입니다. 비가 엄청나게 와가지고 이 상가 앞에 돌다리도 다 떠내려가고 그랬습니다.

옛날에는 기둥도 비석 만드는 돌이고 그랬는데 그때 떠내려가고 나서 일년 동안 외나무다리로 다녔어요. 그때 우리 집 앞에 땅이 일 미터 놔두고 다 파여 내려가 버렸습니다.

저 산 위에서 나무뿌리며 나뭇가지 같은 것이 떠내려 와서 다리발에 엉켜서 못내려가니까 물이 차올라서... 그때 여기 서서 땅이 막 파여 쓸려내려가는 것을 봤어요.

또 저 위 축사에서 돼지도 떠내려오고 냉장고도 떠내려가고... 큰 바윗돌도 떠내려가고... 사람들이 구경한다고 와글와글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혹시나 싶어서 쌀을 마루 위에다 재어 놔서 쌀 피해는 없었어요. 또 이 동네는 집이 떠내려간 거는 없었는데 이 밑에 전당포 있는 그 근처 집들이 다 떠내려갔습니다.

- 홍수로 큰 피해를 입힌 하천이지만 옛날에는 물이 맑았지요?

= 지금은 회원천이라 하지만 옛날에는 회원도랑이라 했거든요. 이사 오고 나서도 다리 밑에 내려가서 빨래 많이 했습니다. 물이 참 좋았어요. 위에 사람들이 많이 안사니까 깨끗한 물이 내려왔거든요. 꼬맹이들 목욕도 하고 그랬는데 어느 때부터 물리 더러워졌더라고예.

또 수도물이 하루 나오고 하루 안나오고 할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빨래를 주로 앵기밭골 위에 가서 하고 아니면 서원골 큰 은행나무 있는 그 옆에 가서 씻고 그랬어요.

목욕은 건너편 현대탕에도 가고 태양목욕탕에도 가고 또 옛날에는 지금 자이아파트 들어선 그 자리에 보성탕이라고 있었는데 거기도 가고 그랬지요.

- 이 동네 살아보니까 어떻습니까? 오래 사셨는데요.

= 다른 동네는 살려고 아예 생각도 안해 봤습니다. 그냥 이 동네에서만 쭉 살아왔으니까 쉽게 말하자면 찌끼미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상가를 내가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게가 서른아홉 개인 줄 퍼떡 알지요.

리고 내가 이 동네서 통장을 오래 했어요. 1통 통장을 12년 전에 8년을 했거든요. 이번 1월 1일부로 또 통장 임명을 받았습니다.

- 재개발이 잘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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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14.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8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일러두기>

1) 주민 면담은 2015년 1월 중에 이뤄졌습니다.

2) 인터뷰이(interviewee)는 가급적 오래 거주하신 분들을 모시고자 하였습니다.

3) 게재 순서는 편의상 인터뷰가 이뤄진 시간순으로 하였습니다.

4) 인터뷰어(interviewer) 및 인터뷰 내용의 정리, 편집은 박영주(경남대박물관 비상임연구원)가 맡았습니다.

5) 인터뷰 내용은 표준어, 보통 높임말 어투, 구어체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내용상의 수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6) 인터뷰 내용은 오래 전의 일들을 개인의 기억으로 되살렸기 때문에 일부 착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7) 소중한 말씀을 해 주신 인터뷰이 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1) "새로운 희망의 터전을 꿈꾸며" ------------------------- 유○○

1946년생

마산회원구 회원동 598-30

날짜 : 2015년 1월 5일

장소 : 조합사무실

- 선생님 반갑습니다. 이 동네에 사신 지도 오래 되었죠? 어떻게 오시게 되었습니까?

= 오래 됐죠. 내가 78년도에 공무원 시험을 쳤는데 운좋게 수석으로 합격을 했어요. 당시에는 수석을 하면 내가 근무를 원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갈 수가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마산이 창원보다 영 좋았거든요. 그래서 마산으로 지원을 해서 이리로 오게 됐지요. 그래 9급 말단으로 마산시청에 발령받아 와서 쭉 근무하다가 2003년도에 정년퇴직을 했어요.

그러니까 한 25년 근무한 셈인데 시청에 있을 때는 주로 세무 부서, 세무과 세무조사과 그런 데 많이 있었죠.

 

옛 마산시청

 

- 그럼 고향은 어디 입니까?

= 의령 화정면입니다. 지금도 거기 토지가 있어서 농사도 짓고 있어요. 그런데 옛날 맨치로 소로 농사 짓고 그렇게 안하거든요. 논 가는 것부터 모 심는 것까지 기계로 다 합니다.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 가지고 논 한 마지기에 얼마씩 주고 그럽니다. 또 매실농장도 있어서 매실도 따서 아는 사람한테 선물 하기도 하고 밤도 따서 먹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그럼 그해 발령받고 나서 바로 이 동네로 오신 겁니까? 집은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 처음에는 회원국민학교 뒤에 이층 독채로 왔다가 그 다음 해에 이 집을 사가지고 왔어요.

촌에 논 좀 팔고 해가지고 샀는데 여기서 한 십년 살았는가? 살다가 이층으로 증축을 했어요. 그 설계를 내가 해서 증축을 해가지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거죠.

처음에 이 집을 살 때는 단층 슬라브 새집인데 하여튼 그때 이천칠팔백 정도 주었을 겁니다. 그때 수재민 주택이라고 구획정리를 반닥반닥하게 해서 집을 지었는데 괜찮았어요.

우리 집이 마흔두 평인가 그런데 다른 집도 다 비슷비슷 합니다. 그때 우리 집 뒤로는 거의 기와집이고 허름한 스레트집이고 그랬는데 수재민 주택이 되나니까 큰크리트로 야물게 지은 집이었거든요.

지금도 일층 집이 더러 있는데 그 사람들은 그대로 살고 있고 또 형편되는 사람들은 이층으로 올려서 살고 있고 그렇습니다.

여기 598번지 일대가 지금은 15통인데 옛날에는 17통인가 그랬어요.

- 처음 오셨을 때 78년도인데 그때 여기 동네 풍경이 어땠습니까? 또 생활은 어땠습니까?

= 그때 주공아파트 있던 쪽으로는 전부 밭이었어요. 그때 나많은 할배가 우리 집 화장실을 쳐서 지고 가서 밭에다 뿌리고 그랬어요.

그 사람은 변소 쳐준다고 돈 받고 밭에 또 똥오줌 거름 준다고 돈 받고 그리 하대요.

그리고 그때 주공아파트 들어선다고 구획정리를 해 놓았는데 그 생땅에다가 콩도 심고 막 그러대요. 우리는 뭐 모르니까 또 할 여가도 없었어요. 그 사람들이 부지런 하니까 남의 땅인데도 막 갈아먹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그때는 이 앞에 회원천 도랑이 아주 좁았어요.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큰물이 져서 돌이 물따라 내려가면서 쿵쿵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그랬거든요. 그러면 상당히 불안하고 위험하고 그랬지요.

우리 사는 데는 처음부터 시수도가 들어왔는데 집에 물탱크를 만들어야 됩니다. 물 나오는 시간 지나면 물이 안나오거든요. 다른 데는 산수도였는데 앵지밭골 위에서 물을 끌어다가 집집마다 연결했지요.

그런데 여기는 지대가 낮아서 그런지 수압이 좋아요. 시장은 회산다리 북마산시장을 주로 보러 다녔지요. 그 뒤에 철길 있는 데 시장이 생겨서 거기도 가고 그랬어요.

처음 여기 와서는 우리도 그랬지마는 연탄 피웠는데 지금도 연탄 피우는 사람도 있어요. 도시가스가 큰 도로변에는 들어오는 것 같은데 이쪽으로는 안들어 오거든요.

그리고 예전에 여기서 통근할 때는 하천 따라 쭉 내려가서 버스 타고 다녔죠. 13번 버스 타고 3.15탑 있는 데로 일방통행 하던 거기로 다녔어요.

그러다가 아마 80년대 되어서 소위 마이카 시대로 접어들어 가지고 형편이 돼서 차 하나 타고 다녔죠. 엘란트라 타고 다니다가 또 크레도스 타고 다녔죠.

여기가 서민 주택 밀집지역입니다. 여기가 회원2동에 들어가는데, 옛날에 시청에서는 뭐라 했느냐 하면 시장한테 잘못 보이면 2동장으로 간다 하는 그런 말이 있었어요.

진정 많고 고발 많고 싸움 많고, 그런 골치 아픈 데 가서 욕 좀 봐라, 그런 얘기였어요. 허허허. 그래도 여기 우리 있는 데는 나아요. 저기 철둑 있는 데 가면 열 평 열한 평 이런 집이 얼마나 많은데요.

- 이 동네 집이나 논밭 주변에 옛날 오래된 비석이라든지 이런 거는 없었습니까? 또 오래된 공장 같은 거는 없었습니까?

= 다른 데는 잘 모르겠고 회원국민학교 근처에 노씨들이 많이 살았어요. 옛날에 노재현 국방부장관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 여기 장례행렬이 굉장 했거든요.

그런데 여기 도랑가로 올라가면 그때는 길이 굽어져 있었는데 그 정자나무와 비석이 있기 때문에 약간 튀어나와 있거든요. 거기 비석이 아마 노재현 웃대 어른들 것일 겁니다.

거기가 옛날 비석도 있고 정자나무도 있고 그런 거 보면 거기가 이 동네에서는 제일 오래된 것 같애요. 회원1구역 이 동네는 얼마나 오래된 동네인가 모르겠어요.

무학상가 지하에 조그마한 콩나물 공장이 있어요. 여기는 교회도 없고 절도 없고 그렇습니다. 이 동네는 논밭이다가 집이 다 들어서고 난 뒤에는 큰 변화가 없었어요. 다 옛날 그대로 입니다.

- 그동안 어쨌든 여기서 쭉 사셨는데 재개발 된다고 하니 감회가 어떠십니까?

= 속이 시원하지 뭐요. 허허허. 나도 그런 좋은 데 한번 살아볼런가 하는 그런 희망도 있고... 그런데 어려운 게 재개발 사업이더라고요. 여러 수백명의 의견을 맞춰야 되니까요. 지금 보면 2지구나 3지구 보면 어렵거든요.

나는 중리에 아파트 한 채가 있지만 거기 보다는 여기가 살기가 낫거든요. 조금만 내려가면 회산다리 시장이 있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여기 새로 들어서고 나면 여기 살려고 합니다. 여기가 살기가 괜찮거든요. 조금만 가면 서마산 아이씨니까 촌에 가기 가깝고 가까이 산이 있어서 산에 가기도 좋습니다. 오늘도 산에 갔다 왔는데 저 위에 회원동 만남의 광장까지 자주 갑니다.

고개 넘어가면 두척 아닙니까? 거기가 배넘이고개라고 하던데 거기 가면 옛날에 심었던 편백이 지금은 이렇게 커가지고 좋습니다.

좀 내려오면 회원동 앵기밭골 희망촌 교회 바로 앞에 텃밭이 하나 있어요. 거기에 상치고 무우 배추 이런 거 심어 키웁니다. 가깝고 하니 텃밭 농사 짓기 좋습니다. 하하.

- 예. 오늘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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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7.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7

2.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생활공간의 역사와 흔적

 

4) 인근 지역의 역사 유적 - 2

 

3) 봉화산봉수대(烽火山烽燧臺)

회원동 봉화산에 있는 고려 말~조선 시대의 봉수대(아래 사진)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화산 봉수대는 회원동과 석전동의 경계에 위치한 봉화산 성내에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 위급 상황을 수도에 알리는 통신 수단으로 쌓았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성황당봉수(城隍堂烽燧)’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창원지역의 서낭신을 모신 성황당이 봉화산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화산 봉수대는 부산 지역에서 출발하는 직봉(直烽) 2로의 간봉(間烽) 6로로서 동래의 다대포 봉수대에서 시작하여, 진해 고산 봉수대를 거쳐 이곳 봉화산 봉수대에서 함안 칠서 안곡산 봉수대를 지나 창녕 현풍 소산 봉수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서울 지역 목멱산 봉수대로 연결되는 노선이다.

봉수는 빠르면 2시간, 늦어도 12시간 안에 도착하게 되어 있어 당시로서는 위급 상황을 알리는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봉화산 봉수대는 높이 265m의 봉화산 정상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봉화산 봉수대의 위치를 “성황산 봉수는 부 서쪽 15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웅천현 고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칠원현 안곡산에 응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봉화산 봉수대에서는 마산만이 한눈에 들어오고 산 아래로 이산성지가 보이며, 서쪽 방향으로는 회원현성까지 눈에 들어온다.

또한 동북 방향으로는 조선시대의 경상우도 병영성이 보인다. 함안 진주 방면으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요새지로서 관방(關防) 시설이 갖추어야 되는 필수 요소였던 조망권이 탁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봉화산 봉수대는 창원지역의 관방 시설 중 하나인 봉수 유적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창원 지역은 일본과 가깝기 때문에 일찍부터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시설의 설치가 중요시되어 왔다. 창원은 마산만을 끼고 있기 때문에 예부터 항구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강조되어 왔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조창인 석두창(石頭倉)이 들어서 인근 지역의 조세를 싣고 운반하는 조운선이 항시 정박하였다. 따라서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창원을 방비하는 데 중점을 두고 관방시설이 정비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치소인 회원현성이 설치되었으며 1374년(공민왕 23) 왜구의 침입으로 회원현성이 함락되어 불타자 합성동에 합포성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켜 왜구에 대비하였다.

봉화산 봉수대는 왜구의 침입을 알리는 통신 수단으로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관방 유적지의 대한 복원사업과 병행하여 봉수대가 원형으로 복원된다면 지역사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방어 체계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닐 것으로 생각된다.

 

4) 이산미산 고분군(鯉山彌山古墳群)

회원동 산64번지에 있다. 이산미산(鯉山彌山)의 남쪽 언덕 일대가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추정되나 도시 확장으로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다.

현재 무학여고 뒤편에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산성지가 있고 그 아래 몇 기의 고분이 현존하고 있었다고 하나 확인이 어렵다고 한다.

1981년 이 학교 후원 공사 때 붉은채색간토기(아래 사진)가 출토되었다고 하므로 청동기시대의 유적도 같이 병존하고 있는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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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6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9) "서민들 살기 좋은 동네" ------------------------- 심○○ 1943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8-6 날짜 : 2015년 1월 10일 장소 : 자택 - 이 동네 사정을 제일 잘 ..

"창원 70년사 잘 담긴 연극 탄생 뿌듯"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 김민지 기자 (kmj@idomin.com) 2021년 02월 22일 (월) 기사입니다. 허정도 건축가 동명 도서 원작&hellip;관객, 연기&middot;무대&middot;의상 호평 일제강점기부터 부마항..

창작연극 <도시의 얼굴들> 2월 18일 개막

이 글은 위드인뉴스 김영식 기자의 2021년 2월 19일가 기사입니다. 창원시의 역사적 배경을 담은 창작연극 <도시의 얼굴들>이 지난 2월 18일 성산아트홀 소극장에서 드디어 첫 막을 올렸다. 2019 한국지역출판대상 천인독자..

박정철, 연극 ‘도시의 얼굴들’ 캐스팅 확정

배우 박정철이 연극 무대에 오른다. 이 글은 톱데일리(http://www.topdaily.kr) 최지은 기자의 2021년 2월 15일 기사입니다. 14일 토리엔터테인먼트 측은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ldquo;배우 박정철이 연..

마산 70년 담은 〈도시의 얼굴들〉 이달 무대에

<이 글의 원문은 경남도민일보 김민지 기자가 쓴 2021년 1월 27일 기사입니다.> 허정도 건축가 원작 동명 도서 옴니버스 형식으로 각색&middot;극화 이달 18&sim;28일 성산아트홀서 창원문화재단이 주최&middot..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5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8) "여기가 제2의 고향이지요" ------------------------- 이○○ 1937년생 마산회원구 회원동 670-3 날짜 : 2015년 1월 9일 장소 : 자택 - 반갑습니다. 옛날 동네..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4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7) "허허벌판에 이룬 삶의 터전" ------------------------- 박○○ 1947년생 마산회원구 회원동 672-22 날짜 : 2015년 1월 8일 장소 : 관룡사 - 반갑습니다. 예전..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3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6) "사십 년을 살아온 제2의 고향" ------------------------- 조○○ 1940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2-2 날짜 : 2015년 1월 7일 장소 : 자택 - 선생님께서도 우체국에..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2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5) "서민들 사는 보통 동네에서의 조용한 기쁨" ------------------------- 최○○ 1936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1-5 날짜 : 2015년 1월 7일 장소 : 자택 - 반갑습니다..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1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4) "한 집에서 46년을 살아오면서" ------------------------- 김○○ 1940년생 마산회원구 회원동 598-16 날짜 : 2015년 1월 6일 장소 : 조합사무실, 자택 - 반..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0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3) "삼십 년 넘게 한 자리에서 콩나물을 길렀다" ------------------------- 권○○ 1949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무학상가 지하 수정식품 날짜 : 2015년 1월 6일 장소 : ..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9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2) "동네 지킴이, 칠원쌀상회" ------------------------- 이○○ 1948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무학상가 1층 날짜 : 2015년 1월 6일 장소 : 자택 - 반갑습니다. 지금 ..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8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일러두기> 1) 주민 면담은 2015년 1월 중에 이뤄졌습니다. 2) 인터뷰이(interviewee)는 가급적 오래 거주하신 분들을 모시고자 하였습니다. 3) 게재 순서는 편의상 인터뷰가 이뤄진 시..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7

2.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생활공간의 역사와 흔적 4) 인근 지역의 역사 유적 - 2 3) 봉화산봉수대(烽火山烽燧臺) 회원동 봉화산에 있는 고려 말~조선 시대의 봉수대(아래 사진)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어 ..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6

2.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생활공간의 역사와 흔적 4) 인근 지역의 역사 유적 - 1 1) 교방동 관해정(校坊洞觀海亭)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였던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년~1620년)가 그의 제자들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