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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도시이야기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7

by 운무허정도 2020. 12. 7.

2.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생활공간의 역사와 흔적

 

4) 인근 지역의 역사 유적 - 2

 

3) 봉화산봉수대(烽火山烽燧臺)

회원동 봉화산에 있는 고려 말~조선 시대의 봉수대(아래 사진)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화산 봉수대는 회원동과 석전동의 경계에 위치한 봉화산 성내에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 위급 상황을 수도에 알리는 통신 수단으로 쌓았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성황당봉수(城隍堂烽燧)’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창원지역의 서낭신을 모신 성황당이 봉화산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화산 봉수대는 부산 지역에서 출발하는 직봉(直烽) 2로의 간봉(間烽) 6로로서 동래의 다대포 봉수대에서 시작하여, 진해 고산 봉수대를 거쳐 이곳 봉화산 봉수대에서 함안 칠서 안곡산 봉수대를 지나 창녕 현풍 소산 봉수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서울 지역 목멱산 봉수대로 연결되는 노선이다.

봉수는 빠르면 2시간, 늦어도 12시간 안에 도착하게 되어 있어 당시로서는 위급 상황을 알리는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봉화산 봉수대는 높이 265m의 봉화산 정상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봉화산 봉수대의 위치를 “성황산 봉수는 부 서쪽 15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웅천현 고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칠원현 안곡산에 응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봉화산 봉수대에서는 마산만이 한눈에 들어오고 산 아래로 이산성지가 보이며, 서쪽 방향으로는 회원현성까지 눈에 들어온다.

또한 동북 방향으로는 조선시대의 경상우도 병영성이 보인다. 함안 진주 방면으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요새지로서 관방(關防) 시설이 갖추어야 되는 필수 요소였던 조망권이 탁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봉화산 봉수대는 창원지역의 관방 시설 중 하나인 봉수 유적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창원 지역은 일본과 가깝기 때문에 일찍부터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시설의 설치가 중요시되어 왔다. 창원은 마산만을 끼고 있기 때문에 예부터 항구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강조되어 왔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조창인 석두창(石頭倉)이 들어서 인근 지역의 조세를 싣고 운반하는 조운선이 항시 정박하였다. 따라서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창원을 방비하는 데 중점을 두고 관방시설이 정비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치소인 회원현성이 설치되었으며 1374년(공민왕 23) 왜구의 침입으로 회원현성이 함락되어 불타자 합성동에 합포성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켜 왜구에 대비하였다.

봉화산 봉수대는 왜구의 침입을 알리는 통신 수단으로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관방 유적지의 대한 복원사업과 병행하여 봉수대가 원형으로 복원된다면 지역사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방어 체계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닐 것으로 생각된다.

 

4) 이산미산 고분군(鯉山彌山古墳群)

회원동 산64번지에 있다. 이산미산(鯉山彌山)의 남쪽 언덕 일대가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추정되나 도시 확장으로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다.

현재 무학여고 뒤편에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산성지가 있고 그 아래 몇 기의 고분이 현존하고 있었다고 하나 확인이 어렵다고 한다.

1981년 이 학교 후원 공사 때 붉은채색간토기(아래 사진)가 출토되었다고 하므로 청동기시대의 유적도 같이 병존하고 있는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