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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1. 00:00

馬山繁昌記(마산번창기) / 1908년 발간

지난 3월 31일 페이스북에 흥미로운 글이 하나 떴다. 창원지역에서 기록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박영주 선생의 글이었다. 112년 전인 1908년에 발간된 『馬山繁昌記(마산번창기)』라는 고서를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반가운 일이라 포스팅한다.

 

<마산번창기 표지>

 

먼저 페이스북에 올린 박영주 선생의 글 전문을 소개한다.

 

개항기 마산 문헌 하나 찾았다

 

오래 전부터 이름 정도만 알고 못 찾았던 자료인데 이번에 드디어 찾았다.

『慶南志稿第一編 馬山繁昌記』. 明治41年, 1908년 마산의 耕浦堂에서 발행한 책으로 저자는 諏方武骨. 일제강점기 마산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문헌인 馬山港誌(1926)의 저자이기도 하다.

책은 광고면 등을 포함해 148면 분량으로 서언, 마산의 대관, 관공서, 지질및기후, 위생및의사, 교육기관, 신도및종교, 교통, 호구, 경제사정, 마산잡록잡황, 마산의 노래 등으로 구성된 종합적인 안내서 성격이다.

1900년대의 마산에 대한 일본 문헌으로 韓国出張復命書(1901), 韓国案内(1902), 韓国水産誌(1908) 등 여러 문헌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것이 있지만 단행본으로는 이 자료가 처음으로 보인다. 지금까지는 馬山と鎮海湾(1911)으로 알려졌었다.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 통감부 설치와 통감 정치, 고종의 강제퇴위와 순종 즉위 등으로 이어지는, 사실상 반(半)식민지 상태였던 당시의 시대상황은 마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한제국의 창원군청이 아니라 통감부의 마산이사청이 실질적인 통치기관이었다.

더구나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번창해 가는 新市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일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또 近刊 書目으로 馬山開港十年史, 馬山名所舊跡誌, 馬山裏面 세 권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계획을 주도한 것으로 보여지는 諏方武骨은 1906년경부터 마산에 정착한 이후 1915년에 朝鮮史談会란 단체를 만들고 朝鮮史談이란 잡지도 내며 활동하다가 1926년에 馬山港誌를 출판했다.

근간할 예정이었던 책들은 아마도 출판되지 못했고 아마도 馬山港誌에 수렴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다음 해에 慶南史蹟名勝談叢이 그의 유고집으로 나왔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항기와 식민지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마산이라는 지역 사회를 좀더 깊이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자료가 추가된 셈이다. 

 

<마산번창기 광고면에 실린 현 월남동 3가에 자리한 인풍당약국과 자산동의 한국요리점 융월. 융월의 광고에는 두 기생의 사진과 함께 하단에 명월, 월선 등 기생 이름을 공개해 놓았다>

 

위의 글을 4월 6일 경남도민일보 최석환 기자가 기사화 했다. 기사 제목은 「개항기 풍경 담은 〈마산번창기〉 발견」.

이 책의 광고 면에는 당시 마산의 약식 지도 외에 약, 요리, 잡화, 여관, 은행, 병원, 신문, 주조, 정미소, 인쇄, 수산회사, 법률사무소, 목재상, 사진관, 산파, 미곡, 담배 등의 업체를 소개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통영의 산업에 대한 광고이다. 통영의 어시장, 여관, 잡화점, 선박회사, 요리점, 약국 등도 이 책 광고 면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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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하는데 이번이 여섯번 째 마지막이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제8편에 수록되어있다. 1900년경 마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실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著,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發行)

제8편 馬山浦 案內

 

<舊 馬山浦>

각국 거류지를 지나 약 10리 거리의 昌原街道에 있고 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한 곳이다.

戶數는 2,000여戶이며 監理署(감리는 창원군수가 겸임), 경찰서 등이 있고 시가는 해변에 면하여 선박화물의 폭주가 매우 빈번하다. 産物은 미곡, 牛皮, 소금, 魚類, 무명(木綿), 솜(綿) 등이다.

옛날에는 이곳이 일본상인(행상)의 근거지였지만 마산개항에 즈음하여 신마산으로 이전하였다. 지금도 20여 호가 있고 대부분 조선가옥에 기거하고 있다.

상업은 모든 잡화류를 판매하고 중매상인도 아직 거주하는 자가 있다. 유명한 博友商會도 이곳에 있어서 전적으로 군함에 식품을 납품하고 있다.

 

<당시 마산 지도>

 

名所古跡

<馬山城址>

마산항에서 10여 리 북방, 다시 말해 구마산포에 가까운 천주산맥의 언덕에 있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창원부성을 쌓았던 것이다. 지금도 外廓돌담이 남아 있고 정문의 형태도 뚜렷이 남아있다.

<鎭海灣>

마산에서 육로로 30리, 해로로 20리 되는 거리의 남쪽에 있다. 진해만은 천연의 良港으로서 일본의 前松島와 비슷하다. 일찌기 해군의 군항으로 사용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며 러시아 역시 그렇게 바라고 있다.

일본과 러시아가 경쟁하는 곳으로서 일 만 톤 이상의 군함이 자유롭게 정박할 수가 있다.

진해항은 인가 200여 호의 어촌으로서 콩, 쌀 등을 産出하고 거제도에 이르는 船便이 있다. 한국을 찾은 여행객들이 灣內의 기묘한 경치를 탐낼 정도다.

<호텔>

각국거류지 남단에 마산포에서 유일한 러시아 호텔이 있다. 해변에 면하여 조망이 좋은 위치에 있다.

<掘江旅館>

思君亭으로도 불리는 마산의 유일한 여관으로 요리점도 겸하고 있다. 객실은 많지 않으나 깨끗하고 調理나 손님접대를 잘하여 호평을 받고 있다.

<유렵지>

마산부근 일대는 鳥類가 많아 겨울에 총을 지니고 해안을 따라서 돌아다니면 총 한발에 새 열 마리 이상 잡는 일이 많다고들 한다(따라서 한국에서 날짐승 고기가 가장 싼 곳이 마산으로 오리 한 마리에 12전이라고 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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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5

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하는데 이번이 다섯번 째이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제8편에 수록되어있다. 1900년경 마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실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著,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發行)

제8편 馬山浦 案內

 

居留地 雜組

<官衙>

일본영사관이 있어 통상 및 彼我의 교섭사무외 경범죄 이하의 재판사무를 취급하고 있으며 현재의 領事는 阪田重次郞이다. 그는 처음에 부산영사관 마산분관이 마산영사관으로 개칭될 때 부임하였다. 부속 경찰서는 마산영사관內에 있으며 사법행정의 경찰업무를 취급하며 서장은 警部 境益太郞이다.

<郵便局>

영사관의 아래 큰길에 있으며 현재 공사 중인데 늦어도 올해 8-9월경까지 완공될 예정이라 한다. 현재는 셋집에서 업무를 보고있다. 보통우편외 환어음, 소포, 저금 등의 사무를 취급하고 국장은 阪田領事가 겸직한다.

 

<참고자료 ; 준공 이후의 우편국 전경>

 

<各國居留地會>

모든 행정을 관장하는 곳으로서 각국영사, 한국지방관, 즉 감리 및 地主대표자에 의하여 의원이 조직되고 현재 7명의 의원이 있으며 의장은 일본영사가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그 사무는 경찰, 토목, 위생, 도로, 하수, 소방 등을 주로 하고 경찰사무는 편의상 일본경찰에 위임되었다.

<敎育, 宗敎>

일본인 학교는 없고 한국인을 교육시키는 일본학교가 구마산포에 있다. 재학생 66명.

淨土宗 本山에서는 이번에 포교장을 개시하는 한편, 정식 소학교도 개설하고 在 釜山別院 三隅田持門師로 하여금 그 책임을 맡긴다고 준비중이다.

<居留民會>

일본인의 공공기관으로서 거류민회가 있으며 理事는 仙石勘九郞이다.

<渡航者注意事項>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은 상륙 3일 이내에 書面으로 居留地 民會를 경유하여 영사관에 신고하고 거류지를 떠나는 자도 이와 같다. 단 滯留者(3일 이상 滯在하는 자)는 1 개월 분 頭課金으로 10전을 납부할 것.

<海關>

한국정부의 세관서는 각국거류지 중앙 해안에 있다.

<漁業組合>

朝鮮海通漁組合聯合會 馬山支部가 있다.

<銀行>

지금까지 금융기관이 없었으므로 상업발달상 유일한 결점으로 지적된다. 실제로 이처럼 금융시설이 없는 것이 마산항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마산의 일반 상인들까지 말하고 있다.

<農業>

경작지에 자갈 등은 적고 그 지질이 비옥해서 아주 쌀 농사에 적합하다. 종자는 주로 일본 벼 씨를 사용한다.

<韓國 郵電>

거류지 조계로부터 구마산포에 이르는 도로상에 한국 우체사, 電報司가 있어 일본인의 전보는 이 電報司에 의뢰한다. 한국 내의 각지는 물론 일본과의 통신도 취급하고 있다.

<海運>

해운권의 성장과 무역의 성쇠와는 가장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일로서 해운이 발달한 곳에서는 무역도 발달하고 해운이 부진한 곳에서는 무역도 부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운을 외국무역의 가장 큰 요소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마산과 각 항 간 또한 일본과의 해운을 볼 때 대판상선회사, 대한협동郵船회사, 부산八頭司組의 정기항해가 있으며 그 외 帆船의 왕복이 빈번하다.

대판상선이 당 항에 寄港하게 된 것은 1901년 4월로서 그 航回數 및 船名, 톤數는 다음과 같다.

*대판상선회사

白川丸(대판-인천); 566톤(매16일에 1회 兩地를 출발함)

寄港地; 神戶, 下關, 釜山, 馬山, 木浦, 群山, 仁川

*大韓協同郵船會社(韓國汽船)의 仁川․鏡城線

顯益號; 444톤(매월 각1회 程度)

蒼龍號; 403톤(매월 각1회 程度)

寄港地; 군산, 목포, 제주, 마산, 부산, 포항, 원산, 西湖, 前津, 新浦, 新昌, 遮湖, 성 진, 明川, 鏡城

*釜山八頭司 回漕部취급 汽船

第2玉吉丸(和歌浦丸이라고도 부른다. 부산-마산포); 매월 10회(항해시간은 5-6시간)

운임; 1등-2圓50錢. 2등-1圓50錢. 3등-1圓(한국인은 3등에 한해 500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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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마산은? - 4

120년 전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하는데 이번이 네번 째이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제8편에 수록되어있다. 1900년경 마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실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韓國案內』겉표지와 속표지>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著,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發行)

제8편 馬山浦 案內

 

<諸 物價>

일본인의 諸 물가와 노동임금은 다음과 같다

이발료 - 20錢

여자 미용료 - 10錢

숙박료(1박2식) - 80전

점심식사 - 40전

선원 임금(1인) - 10전

手荷物 - 3전

藝妓線香(1시간) - 45전

고용인 (仕切) - 2圓

목수, 석공, 미장(日給) - 1원 20전

일본인 중개사(一日) - 80전 가량

한국인 일급 - 200文이내

운반비; 마산에서 부산까지 쌀, 콩 운반비(1石 당) - 24전(상륙까지)

 

<營業種類>

일본인 영업구분은 다음과 같다(1902년1월말 조사)

 

무역상 1

仲買商 6, 겸직4

藥種商 5

잡화 27, 겸직 6

술 소매 2, 겸직 1

陶器 겸직5

일상잡화 겸직 1

주물상 겸직 1

옷가게 3, 겸직 2

부엌잡화(荒物) 겸직1

洋酒 겸직 2

담배 겸직4

과자商 3, 겸직2

설탕商 겸직 2

석유상 겸직1

醬油商 겸직 2

의사 2

問屋 1, 겸직1

회사 2

여인숙 겸직 1

야채상 겸직 1

두부 1

요리점 1

떡집 2

푸줏간 1

세탁업 1

일고(日雇) 5

藝妓 1

선원 겸직 1

목수 15

석공 6

미장 2, 겸직 1

鐵力細工 1

대장간 2

이발관 1

미용실 1

된장 겸직 2

일용노동자 22

土木請負 1

精米商 겸 1

식빵 1

大弓 겸직 1

페인트칠 1

酌婦 3

船頭 3

鑛業 2

러시아인은 호텔업 1, 잡화상 1

중국인은 잡화상 7, 雜貨行商 3

독일인은 선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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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3

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하는데 이번이 세번 째이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제8편에 수록되어있다. 1900년경 마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실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著,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發行)

제8편 馬山浦 案內

<商業>

마산浦의 수출입 무역은 1900년에 총액 241,789圓이며, 그 중 수출액이 87,024圓, 수입액 154,765원이다. 이 가운데 외국무역에 관한 수출 6,203원, 수입 13,185원, 합계19,388원이며 연안 무역액이 222,401원인데 그 중 수출액 89,821원, 수입액 132,580원이다.

이 밖에 한국선박에 의하여 마산 부산간 운반되는 화물 량도 적다고 할 수 없다. 그 금액을 개략 산정하면 13-14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것을 월별로 정리하여 무역의 전망을 예측하려 한다.

 

월 별

수 출 액

수 입 액

1900년 1월

16,037円

15,464円

2월

1,677

8,344

3월

862

5,284

4월

724

7,905

5월

746

5,575

6월

700

5,910

7월

3,594

8,035

8월

2,612

7,521

9월

1,048

20,562

10월

8,389

15,516

11월

16,849

27,760

12월

33,785

26,899

합계

87,024

154,765

 

1901년 상반기(1월부터 6월까지) 무역 총액 141,675원 중 수출 54,771원, 수입 86,904원인데 그 중에서 외국무역 수출입합계는 18,226圓, 연안무역합계 123,449원이다.

이것은 전년 상반기와 비교하면 두 배 이상의 증가를 보이는 것이다.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월별

1901년도 상반기 수출액

1900년도 상반기 수출액

증가

1월

35,863円

31,501円

4,632円

2월

25,206

10,020

15,186

3월

37,185

6,147

31,038

4월

17,648

8,642

9,024

5월

12,830

6,321

6,509

6월

12,943

6,601

6,342

합계

141,675

69,214

72,461

 

수출품; 쌀, 콩, 동광(銅鑛), 사금(砂金), 소가죽, 솜, 등을 주로 하고 종이, 보리, 해삼, 말린정 어리, 吳倍子(藥材)등이 그 다음이다.

 

월별

1901년도 상반기 수출액

1900년도 상반기 수출액

증가

1월

35,863円

31,501円

4,632円

2월

25,206

10,020

15,186

3월

37,185

6,147

31,038

4월

17,648

8,642

9,024

5월

12,830

6,321

6,509

6월

12,943

6,601

6,342

합계

141,675

69,214

72,461

 

수입품 ; 방적사(紡績絲), 옥양목, 석유, 整製한 솜, 솜, 명태, 누룩, 성냥, 철제품 등이다.

수입중요품 ; * 紡績糸는 鐘淵방적회사의 제품이 많고 鐘표 및 平野방적회사의 제사(製糸) 가 인기가 있다. 전자는 한인사이에 호평을 받아 판로가 좋은 편이다.

 

鐘淵방적회사 효고(兵庫) 공장 

 

* 옥양목은 매표, 토끼표, 군인표 등을 일본에서 온 부유한 농민들이 아주 좋아 한다. 칠원, 진주이북 지방뿐만 아니라 전라도 부근의 먼 곳에서까지 이것을 사기 위해 오는 사람이 있다.

* 석유는 미국산 上松표가 마산포에서 독점販賣하려 한다. 종래부터 阪庫회사 가 판매하는 越后油(참고; 越後는 일본의 지방명)의 수입을 안한 것은 아니 지만 품질이 떨어져 평판이 좋지 않다.

* 성냥은 硫黃성냥과 안전성냥의 두 종류가 있다. 유황성냥은 기린표 및 히로시마에서 생산하는 삼각표가 있다. 삼각표는 품질은 좋으나 값이 비싸서 기린표의 값도 싸고 비교적 품질도 좋은 점에 눌리고 있다. 안전성냥은 사슴표, 코끼리표, 원숭이표가 있다. 종래에는 각종 모두 당 항 시장에서 잘 팔렸으나 근래 그 품질이 조악하여지는 기미가 있는 데다 기린표가 불이 잘 일고 내용 이 풍부하여 좋은 상품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

* 술은 일본 酒를 수입하는 사람이 여러 명 있으며 반 년 간의 수입액 평균 은 4,400여 円에 달한다. 재빠른 부산상인은 일단 마산으로 수입하여 일반세 관 수속을 거친 다음 연안漕輸品으로서 이것을 다시 부산에 재수출하여 동 거류지에서 요구되는 수수료를 면제받는 계책으로 마산포 부근 및 진해만, 거제도 방면에 出漁하는 일본어부의 飮料酒가 당 항의 술상인 손을 거쳐서 공급되는 일이 적지 않다.

* 러시아, 중국 상인의 상업에 있어서는 아직 특기할 사항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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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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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하는데 이번이 두번 째이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제8편에 수록되어있다. 1900년경 마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실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당시(1900~1901) 신마산 전경 / 이 사진은 1905년 뉴욕(and런던)에서 출판된 <The Re-Shaping of the Far East, Vol. 2, by B. L. Putnam Weale>에 수록된 것으로 이 책은 forgottenbooks.com에서 무료 열람할 수 있다. Wiki에서 검색해 보면 이 책을 쓴 사람은 영국인으로 20세기 초 중국 해관청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5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그의 책 중에선 The Fight for the Republic in China 라는 책이 유명하다고 한다.(사진 및 설명은 기록전문가 박영주 선생 제공)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著,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發行)

제8편 馬山浦 案內

 

<總論>

마산포는 경상남도의 남쪽에 위치하고 창원군 관할에 속하며 부산이 140여 리, 海路로는 40마일 거리로 마산포 남안(南岸)에 있고 동경 128‘ 50“ 북위 35’ 13” 66에 위치하고 있다.

<港灣>

마산만은 남쪽으로부터 진입하며 남북이 길고 동서가 좁으며 灣의 입구로부터 약 30리이고 거류지부근 일대는 수심이 얕아서 평균 5尋(발)으로서 겨우 천 톤 이내의 배가 정박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약 10리쯤 앞으로 나가면 군함 같은 큰 배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가 있고 일본 함대를 비롯한 러시아 전함이 흔히 닻을 내린다. 유명한 진해만은 마산만의 外灣이다.

<居留地>

烽禹(火)山 동쪽 기슭과 마산만에 면한 良港, 즉 마산거류지는 1899년 5월1일에 군산, 성진과 함께 개항하여 각국거류지. 日本專管居留地. 露國專管居留地로 나누어져 있는데 현재 각국거류지를 제외한 조계는 토지의 구획을 하지 않고 있다.

각국거류지는 옛날 월영읍(里)으로서 서쪽에 높은 산봉우리를 등지고 동쪽은 마산만에 접하며 북쪽으로 구마산을 지나 창원으로 가는 도로와 남쪽으로 진주(경상남도 관찰부 소재지이며 마산에서 약110리 거리다)로 가는 도로가 있다.

면적 15만평으로 처음 개항되었을 때 부산영사관 마산분관을 두었다가 1900년 4월1일 본관(마산영사관)으로 개칭되었다. 현재의 영사관은 그 후 신축하여 시내 거리가 한눈에 드는 절경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러시아 영사관 또한 그 왼쪽의 한 단 낮은 곳에 있는데 모두 건축물로서 볼만한 가치가 있으며 영국영사관도 개설할 것이라고 한다. 영국영사관의 부지는 일본영사관 뒷면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전관거류지는 각국거류지의 남쪽 자복포에 있는데 잔솔밭 언덕에 둘러 쌓인 해안에 접한 30여 만평으로 아직 건물 등의 시설은 하지 않는다. 러시아 전관거류지도 역시 해안에 접하여 있으며 한 쪽 면이 波狀地이고 온통 구릉지로서 솔밭이 많으며 일본거류지에 접하여 남쪽에 이르는 이곳을 율구미라고 부른다. 면적 30만평이며 가옥은 거의 없다.

<市街>

각국거류지에 거주하는 사람은 거의가 일본인이고 가끔 중국인, 러시아인, 독일인 등이 체류하고 있으며 이들은 거류지 남쪽 모퉁이 쪽의 러시아 영사관 부근에 살고 있다. 거류지의 총 호수는 50호에 불과하고 가옥도 조밀하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로서 간신히 처마를 이어서 시가의 모양을 갖춘 것이 10여 호 뿐이다. 참으로 느리긴 하지만 발전하는 모습은 보인다.

도로는 근래 새롭게 개설하기 시작했다. 도로의 폭은 3間(1間은 1.8m)에서 8間이고 남북이 길어 거의 20여丁(町, 109.1m)에 이르고 동서는 좁아 7-8丁에 불과하며 舊 馬山浦와의 교통이 빈번하여 상거래가 점점 발달할 기미를 보인다.

<戶口>

일본인 거류민 중에는 山口縣에서 온 사람이 가장 많고 長崎縣과 大分縣이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 1899년 말, 즉 개항한 해는 戶數 35호에 인구103명이었는데 올해(1902년) 1월은 戶數 80호에 인구 259명으로서 그 중 남자가 160명, 여자 99명이다. 단 이 중에는 구마산에 점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100여명이고 戶數는 20여戶이다.

중국인은 28명, 러시아인 12명, 독일인은 3인이다.

<氣候>

기온은 부산에 비해서 큰 차이가 없다고 하나 극한기에는 그 度가 약간 다르다. 바람이 적고 강설량도 적다. 灣內는 북풍을 제외하고는 波浪이 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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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30. 00:00

120년 전 마산은? - 1

120년 전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1

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제8편에 수록되어있다. 1900년경 마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실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韓國案內』겉표지와 속표지

 

다음은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정리해 놓은 『한국안내』에 대한 설명이다. 약간의 첨삭이 있었다.

[정의]    개항기 조선을 소개할 목적으로 도쿄[東京]에서 간행한 책.

[편찬/간행 경위]   1876년 조일 수호 조규의 체결 이후 조선으로 여행하거나 이주하는 일본인이 급증하였는데, 이들 본토의 일본인들에게 조선에 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해 줌으로써 일본인들의 조선 방문을 유도하는 한편 조선에서의 정착과 경제 활동에 도움을 주고자 『한국 안내(韓國案內)』를 간행한 책이다. 저자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는 『관문시보(關門時報)』의 통신원으로 당시 부산에 주재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일본어로 기록되어 일본 도쿄의 청목숭산당(靑木嵩山堂)에서 1902년 9월 간행하였다.

[형태]   4·6판 총 476쪽의 책자로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한국 안내』는 총론과 9개의 장,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론에서는 지세와 행정, 지방제(地方制), 호구, 농업 등 조선의 전반적인 실정이 소개되어 있다. 경성, 평양, 부산 등 조선 내 개항장과 개시장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와 당시의 사회·경제적 실상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진출하여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이들 지역에 대한 실측도가 첨부되어 있어 당시의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부록에서는 철도와 기선에 관한 정보를 비롯하여 한일 조약(韓日條約)과 해관 세목(海關稅目), 조선 약어(朝鮮略語) 등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진출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조선에서 영업하고 있는 일본인 회사와 은행, 상점 등에 대한 안내도 제공되고 있어 당시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인의 실상을 살펴보는 데에도 유용하다.

[의의와 평가]   개항기 조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안내서 성격의 자료는 많으나 『한국 안내』는 특정 지역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다음은 이 책의 목차이다.

総論

第一編 京城案内

第二編 仁川案内

第三編 鎮南浦案内

第四編 平壌案内

第五編 元山案内

第六編 群山案内

第七編 木浦案内

第八編 馬山浦案内

第九編 釜山案内

附録

 

제8편 ‘마산포 안내’의 시작은 ‘馬山浦附近地圖(마산포부근지도)’로부터 전개된다. 다음 지도이다.

 

 

상세한 도면은 아니지만 개항 초기 마산과 주변의 상황을 알 수 있다.

마산포 사건으로 유명한 율구미(栗九味)의 노국전관거류지(露國專管居留地)와 자복포의 일본전관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가 점선으로 표기되어 당시의 정황을 짐작케 해준다.

각국거류지․마산포․구(舊) 성적(城跡, 현 용마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것임)이 표기되어 있다.

마산포에서 부산으로 가는 도로는 팔용산 아래 봉암동을 거쳐 현재의 봉암교(당시는 다리가 없었음) 부근을 통과하여 진해 쪽으로 이어 지고 있다. 이 도로는 양덕동 부근에서 창원으로 가는 도로와 나누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창원공업단지가 있는 곳까지 바다였다는 것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지도 상부에 별도로「馬山浦各國居留地市街圖」란 제목의 조계지 확대도면이 있다. 여기에는 조계지 내에서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조성된 도로가 표기되어 있으며 북쪽 일부 도로, 즉 예전의 마산극장 부근에 있는 도로는 매립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관장관택(海關長官宅)과 우편국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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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6. 3. 00:00

등록문화재 제198호 '옛 마산헌병분견대'의 건립연대 오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52 (월남동3가 11)에 소재한 등록문화재 제198호 '옛 마산헌병분견대' 건물에 대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의]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남동에 있는 옛 일본군 헌병 분견대 건물.

[개설] 구 마산 헌병 분견대는 옛 일본군 헌병 분견대 건물로, 일제 강점기 중반인 1926년에 붉은 벽돌로 지었다. 일본 군대의 마산 진출은 1905년 5월 마산선(馬山線) 철도가 건설될 때 시작되었다. 1909년 12월에 대구 주둔 일본군 헌병 분견소가 신마산에 설립되었고, 3·1 운동 후인 1920년에 이르러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어 경찰이 치안을 맡도록 했다.

1921년에 지금의 마산 중부 경찰서 자리에 있던 헌병 분견대 건물을 증축해 마산 경찰서로 사용하게 되면서 이 건물을 경찰에게 내어 주고 1926년에 지금 자리에 헌병 분견대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했다. 신축 시 대지가 넓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폭 축소되어 건물 주위로 한정되어 있다. 건물 인근에는 분견소장 관사(官舍)가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위치] 구 마산 헌병 분견대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52[월남동 3가 11]에 있다. 남해 고속 도로 서마산 나들목으로 진입하여 마산회원구를 거쳐 국립 3·15 민주 묘지 방면으로 3·15대로[국도 2호선]를 따라 내려가다 3·15 의거 탑과 마산합포구청을 지나 경남 대학교 방면으로 약 13㎞ 정도 이동하면 도착한다.

[변천] 구 마산 헌병 분견대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마산 지역 독립 운동가들이 잡혀와 고초를 겪었던 근대사의 질곡을 보여 주는 역사의 현장으로 일제의 탄압과 무단 통치를 상징한다. 1945년 광복 후 군 정보기관인 옛 보안 사령부[현 국군 기무 사령부]의 마산 파견대가 ‘해양 공사’라는 간판을 달고 이 건물을 사용하면서 민주화를 주장하는 인사들을 사찰했던 곳이기도 했다. 1990년에 보안 사령부가 폐지되고 군 정보 요원들이 철수하면서 건물만 남게 되었으며, 그 후 기무사 출신 퇴역 군인들의 친목 단체인 ‘충호회 경남 지부’와 보훈 자녀 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주변에는 상가가 밀집해 있고, 한 블록 뒤에는 저층 주택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택지 외곽에는 중고층 높이의 공동주택 단지가 위치하고 있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마산항 및 지금은 폐지된 된 마산항역이 자리 잡고 있다. 2005년 9월 14일 등록 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구 마산 헌병 분견대는 벽돌 조적조 건물로 지상 1층, 지하 1층의 규모이고, 연면적은 175.21㎡이다. 건물의 정면 중앙에 놓인 현관 출입 부를 중심으로 양측에 3개씩의 세로 창을 대칭으로 배치했다. 외벽에는 회흑색 벽돌을 사용하여 다섯 줄의 수평 띠를 둘렀는데, 이는 단조로운 벽면을 분할하여 수평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붉은 벽돌의 물성과 세로로 긴 창은 일제의 통치 보조 기관이었던 헌병대의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는 요소이나 벽면에 넣은 여러 줄의 수평 띠는 이를 다소 완화하는 어휘로 사용되었다. 건물 내부는 가운데 복도를 둔 중복도 형식으로 되어 있었으며, 현재의 출입부 우측편의 사무장실 끝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관 출입부와 창의 위쪽의 인방은 평아치에 가까운 약한 곡률의 아치 형태로 만들었으며, 창 하부의 흰색의 창대는 외벽 밖으로 약간 돌출되어 있다. 아치형 창 상인방의 중앙에는 사다리 모양의 흰색 석재를 끼워 넣어 창의 형태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벽돌로 이루어진 외벽은 길이쌓기와 마구리쌓기를 번갈아 가며 쌓는 영식 쌓기 방식으로 시공한 것이다.

지붕은 단정한 형태의 우진각 지붕으로, 목조 트러스 위에 일식 기와를 덮었다. 정면 현관 출입 부 상부에는 본래 작은 삼각형의 박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철거되었다. 지면에서 4단의 계단을 올라온 지점에 1층 바닥이 있으며, 그 하부는 지하층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건물 우측면의 대지가 좌측보다 낮아 지하층의 우측면은 외부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현황] 2008년에 지붕을 해체하여 수리한 후 최근 건물의 원형 복원을 위한 수리를 했다. 보수 전 건물의 창은 본래 목제 오르내리창이었으나 미서기창으로 바뀌었다. 고증과 외벽에 남아 있는 흔적을 고려할 때 건물의 우측면에는 지하층으로 통하는 복도각과 원형창이 시설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일제가 마산에 헌병을 파견하여 치안을 확보함과 동시에 독립 운동가를 탄압했던 역사적인 건물이다. 일제의 강권 무력 통치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당시 외래 건축의 영향을 받아건축된 서양식 건축이라는데 역사적·건축사적 가치가 있다.

 

다음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등록문화재 제198호 구 마산헌병분견대'에 대한 설명 중 일부다.

1926년 건립된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당시 잔악한 일본의 대명사였던 헌병대가 민중을 억압하고 독립투사들에게 가혹 행위를 자행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벽면 전체에 돌림띠를 둘러 장식하고 수직의 긴 창을 반복적으로 배치하는 등 관공서 건축물로서의 권위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마산헌병 분견대는 1905년 일식의원 건물을 빌어 사용하다가 1909년 12월 2일, 관할이 대구로 옮겨지면서 현 소재지로 이관하여 사무를 개시하였다. 현재의 벽돌조 건물은 1926년에 신축되었으며, 당시 근무인원은 8명이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두 공식 기록에서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1926년으로 확정하고 있다.

이 포스팅은 그에 대한 글이다.

 

필자가 아는 한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가장 먼저 추정한 이는 한상술 씨다.

한상술 씨는 2000년 「마산의 근대건축에 관한 연구」라는 경남대학교 석사논문 54쪽에서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1926년이라고 밝혔다. 

한 씨가 이 논문에서 각주를 달아 근거로 제시한 문헌은 일본인 스와 시로우(諏方史郞, 추방사랑)가 쓴 『마산항지』(1926년) 155쪽이었다.

한 씨가 인용한 『마산항지』 155쪽 '마산헌병분견소' 항목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간략한 번역문도 함께 올린다.

 

馬山憲兵分遣所

本町四丁目に在り、明治三十八年中晉州より派遣せられ、現都橋畔にて水上医院なる建物を借充し、其その後管轄は大邱に移り遂ついに馬山憲兵分隊となり現建物は此この時、建築せられしものにて分遣所の建物として比較的広大なるは夫それ之こか為ためなり、幾干もなくして分隊は鎭海に移り建物は分遣所に於て其の儘そのまま之これを使用し別室に郷軍馬山分会事務所を借設せり、本町五丁目角に分遣所長官舎の新築あり、現時の所長は曺長片桐文三氏なり。

마산헌병분견소

본정 4정목(현 월남동 3가)에 있다. 1905년 진주에서 파견되어, 현 중앙동 다리 근처 수상의원 건물을 임대해서 사용하였다. 그 후 관할이 대구로 이관되어 마산헌병분대가 된 현 건물은 그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분견소 건물로서는 비교적 광대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얼마 후 분대는 진해로 옮겨가고 건물은 분견소에서 그대로 사용하였다. 별실에 향군마산분회사무소가 임대 사용하고, 본정 5정목 모퉁이에 분견소장 관사를 신축하였다. 현재 소장은 상사(曺長) 가다키리 분조(片桐文三. 편동문삼) 씨다.

 

그런데 내용을 아무리 봐도 이 글에서는 건물의 건립연도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무슨 연유인지 한 씨는 이 부분을 인용하며 1926년으로 확정하였다.

한상술 씨가 논문에서 밝힌 건립연도 1926년은 이후 여러 후속연구에서 인용되었다.

필자의 글에서도 별다른 확인 없이 그대로 인용하였다. 필자 뿐 아니라 이런 저런 문헌 여러 곳에서 인용되었고, 강의 자료로도 활용되었다.

이 글 첫머리에서 소개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과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등록문화재 제198호 구 마산헌병분견대'에 대한 설명문에서도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1926년으로 소개하고 있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두 공식기록의 건립연도 역시 한상술 씨의 논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최근 이 건물의 건립연도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나왔다.

도시 건축의 역사를 탐구하고 있는 신삼호 건축사가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1912년이라고 했다.

 

신삼호 건축사가 제시한 자료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지도를 소개하며 이 건물의 건립연도에 대한 의견을 밝힌다.

 

1) ‘조선주차군경리부’에서 1914년 발간한 『조선주차군 영구병영, 관아 및 숙사건축 경과개요』에 의하면 마산헌병분견대 건물은 명치45년 즉 1912년 건립되었다.

이 문건의 ‘마산헌병분대청사 및 부속건물’ 항목을 보면 마산헌병분견대 건물은 ‘1912년 2월에 기공하여 같은 해 7월에 준공하였다'고 적혀 있다.

축척 1/300 ‘마산헌병분대배치도’까지 첨부(아래 그림)되어 있고, 아래에서 보듯이 도면 내용도 실재하는 건물과 동일하고 정확하다.

 

<배치도>
<평면도>
<정면도>

 

2) 1913년 마산부가 발간한 『마산부세일람』의 '마산헌병분대' 편에도 이와 관련한 기록이 있다.

'1909년(명치42년) 12월 2일 마산 본정 3정목(현 월남동 3가)에 대구헌병분대분견소로서 설치되어 1910년 7월에 편재개정의 결과 마산분대로 개칭되어 김해, 웅천, 진해, 진동, 배둔역, 고성, 장목포의 7분견소를 관할하고 있으며 지금의 청사는 1912년(명치45년) 7월에 낙성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발행한 1/10,000 지도 「마산」 에서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 지도를 확대(아래 그림)해 보면 '헌병분견소'라고 표기된 건물이 정확히 그려져 있다. 위치도 정확하고 건물의 배치형태도  『조선주차군 영구병영, 관아 및 숙사건축 경과개요』의 ‘마산헌병분대청사및부속건물’에 첨부된 축척 1/300 ‘마산헌병분대배치도’의 도면과 동일하다.

 

 

이 세 자료, 즉 1914년 조선주차군경리부에서 발간한 『조선주차군 영구병영, 관아 및 숙사건축 경과개요』 기록과 1913년 마산부가 발간한 『마산부세일람』의 내용, 그리고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발행한 지도 「마산」 등이 이 건물 건립연도가 1912년임을 말하고 있다.

도 「마산」은 1912년이라고 확정 짓기보다는 1916년 이전에 지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적어도 건립연도가 1926년은 아님은 확실히 보여준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등록문화제 제198호 구 마산헌병분견대의 건립연도는 1926년이 아니라 1912년로 추정된다.

다른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 자료만으로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건립연도는 재고되어야 하고 이에 대해 다시 정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법적으로 지위를 보장 받는 '등록문화재 제198호'의 건립연도에 대한 문제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사과드린다.

논문에 있는 내용이라고 해서 사실관계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것은 온전히 제 잘못이다. 잘못된 글을 읽은 모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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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 18. 00:00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13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3. 공간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 5

4. 외관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 2

5. 마치는 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숙소로 시작되었지만 당시의 아파트는 19세기 서구사회가 꿈꾸었던 유토피아적 공동체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심리적 일체감과 만족감을 줄 것으로 기대했던 바람과 달리 지금 우리의 아파트는 계층 간 분리라는 새로운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달리 취급되고 여가와 취미 등 삶의 질을 결정하는 생활방식도 달라졌다.

아파트의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쾌적한 환경까지 제공되는 주방으로 변했다.

주부의 의지에 아파트 분양의 성패가 달렸다는 사실을 간파한 건설업자의 전략 때문이었다.

자동으로 작동되는 각종 기기들은 이와 조화를 맞춘 가구와 더불어 빌트인(builtin)시스템 방식을 탄생시켰다.

미디어·방재·교류 등 생활시설들도 획기적으로 변하였으며 모든 시설들이 자동 혹은 원격 조정이 가능하도록 변하고 있다.

아파트는 오직 현관문 하나만으로 기밀성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단순하고 짧은 동선이 주는 편리함과 단열 및 보온이 주는 냉난방시설의 효율성 때문에 도시주거형식으로 일반화된 지 오래다.

대량공급이 가능해 부족한 주택 량을 신속하게 공급할 수 있는가 하면 매매가 용이해 교환가치도 높다.

이런 점들 때문에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는 범 계층적 주거형식으로 정착된 것이다.

경남은 2010년 기준으로 단독주택이 40.1%인데 비해 아파트가 54.1%를 차지하고 있다.

도시지역의 아파트 건설은 경관·교통 등 도시 관리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라는 주거형식은 택지가 좁고 인구가 많은 우리나라의 조건에서 쉽게 포기될 수 없는 대안이다.

향후 새로운 대안이 창출되지 않는 한 아파트는 가장 보편적인 주거형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원2구역의 아파트들은 70년대 공단건설이 시작되고 80년대 독립 시()로서 신도시건설이 본격화되었던 시기에 지어졌다.

주거시설로서는 계획도시 창원의 증언자이자 기원이기도하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버텨온 이 나이든 집들이 사라지고 나면, 같은 자리에 키 크고 반듯하고 훨씬 진보된 새 아파트가 탄생할 것이다.

갯가가 멀지 않았던 한가로운 농촌이 돌과 흙으로 덮여 사라지고 그 위에 집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그 땅의 과거를 알지 못한다. 새 아파트 사람들도 수십 년간 서있었던 지금의 아파트와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땅의 역사를 기억시키지 못하는 도시에서 토막 삶을 사는 탓이다. 이 글은 단절된 삶에 대한 아쉬움에서 비롯되었다.<<<

 

<동양상가아파트>

<세플러코리아사원아파트>

<세플러코리아사원아파트 입구에 설치된 게시판>

<세플러코리아사원아파트 어린이 놀이터>

<경남아파트>

 

<참고자료>

창원기계공업공단, 창원기지5년사, 1979

강영환, 집의 사회사, 1992

창원시사편찬위원회, 창원시사, 1997

손수일, 아파트 외관의 시대별 형태변화특성에 관한 연구, 1999

강영환, 한국주거문화의 역사, 2002

마산·창원지역사연구회, 마산·창원역사읽기, 2003

강석재, 아파트 외관의 변천에 따른 분석적 연구, 2004

전남일·양세화·홍형욱, 한국주거의 미시사, 2009

창원문화원, 창원600년사, 2009

이창윤, 근대 한국아파트의 평면변화에 관한 연구, 2009

박노학, 국민주택규모 아파트의 단위주거 평면계획 변화특성에 관한 연구, 2012

박배균·장세훈·김동완, 산업경관의 탄생, 2014<<<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 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는 이번 13회 포스팅을 마지막으로 모두 마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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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 11. 00:00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12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3. 공간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 5

4. 외관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 2

1) 단지계획

2) 주동계획

 

. 동선유형

주동의 동선유형은 주동의 배치와 건물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주동의 동선유형은 통로형식에 의해 좌우된다.

대원2지역의 경우 분절된 소규모 단지의 집합이므로 2-3주동의 진입이 각각 구분되어 있다.

동선의 구분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도 않지만 사실상 소규모 단지 하나에서 발생하는 동선체계와 다를 바 없이 분절적이며 직렬적이다.

 

. 평면유형

주동의 수평 수직적인 형태구성은 단위세대의 조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한 주동 내의 평면유형이 동일할 경우 주동의 형태는 동일한 형태의 반복적 조합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대원2지역 역시 이러한 제한에서 벗어 날 수 없었고 결국 가장 단순한 외관으로 귀결되었다.

대원2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에 지어진 우리나라의 아파트 전부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특히 규격화된 부지에 규격화된 규정을 적용받은 대원2지역의 경우 그 정도가 심했다.

 

. 층 변화 및 지붕형상

앞서 말한 대로 대원2지역의 5층 아파트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규정에 의해 지어진 것일 뿐이다.

하지만 지붕의 형상은 각 사업자의 선택에 의한 결과다. 주동 최상부의 디자인을 결정하는 지붕 형식은 건물외관에 결정적 영향을 주며 경사지붕일 경우 경사도에 따라 건물의 형태가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대원2지역의 경우 모두 평스라브 비중을 가진 아파트라 크게 보면 모두 같은 지붕을 가졌다. 하지만 한걸음 들어가 세분해보면 각 단지마다 지붕의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지붕의 형태가 다르다기 보다 평스라브의 형태를 마무리하는 파라펫의 형태가 다르다는 말이다.

파라펫의 형태만 다른 것을 두고 지붕의 형태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어렵지만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지붕의 모양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 때문에 파라펫 모양을 경사지붕화 시킨 사례는 전국 곳곳에 크고 작은 건물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 경사진 파라펫, 특히 경사면 위에 기와 등 지붕재료를 얹어 놓은 양식에 대해 호불호의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그 뿌리는 장구한 세월동안 형성된 기와집에 대한 그리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원2지역 7군의 아파트 중 평스라브 형태를 가감 없이 노출시킨 단지는 현대사원아파트, 대원아파트, 동양상가아파트, 세플러코리아사원아파트, 경남아파트이다.

이 중 현대사원아파트, 세플러코리아사원아파트, 경남아파트는 경사진 콘크리트 파라펫이었지만 이는 인동간격을 유리하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지 아파트의 형태를 고려한 결과가 아니었다. 동양상가아파트의 옥상 파라펫은 큰크리트 대신 철재난간으로 되어 있다.

경사 파라펫 위에 기와를 얹은 형식은 새경남아파트, 쌍용아파트이다. 이 두 아파트는 파라펫을 경사지게 하여 외관을 다듬었다.

기와는 전면에만 있었고 후면은 직선의 콘크리트 파라펫이었다.

이러한 두 유형의 지붕 형태는 대원2지역에만 시도된 특수한 형태가 아니라 당시 한국 5층 아파트의 일반적인 형태였다.

 

. 옥탑형상

단조로울 수밖에 없는 5층 아파트에서 옥탑은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다.

옥탑에는 옥상으로 연결되는 계단실과 물탱크가 주어졌고 5층이라 엘리베이터 기계실은 없다.

간혹 옥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건물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옥탑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원2지역에서는 모든 주동이 옥탑을 가지고 있다.

옥탑의 형상은 앞의 지붕형식에서 파라펫과 마찬가지 성격을 가지며 파라펫의 형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파라펫의 형태와 옥탑의 형태 간의 조화가 단순해지는 5층 평스라브 아파트의 외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대원2지역 7개 군의 아파트 모두 평스라브 형태의 옥탑이라 단조로운 모습이다.

 

. 입면분절 양상

각 주동의 형태구성은 단위세대의 조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평면유형이 동일한 주동의 경우 각 단위세대의 반복적 조합으로 외형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단조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수직 수평 혹은 계단실 등에서 입면을 분절하여 변화의 효과를 취하기도 하지만 저층 아파트에서는 그 효과가 크지 않아 자주 시도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직분절은 비록 일자형의 평범한 아파트이지만 계단실이나 슈트 등 수직적으로 분절시킬 수 있는 요소들이 존재하므로 이를 이용해 입면의 변화를 추구하기도 한다.

대원2지역의 경우도 이런 경우에 속한다. 다섯 개 층이 창과 벽으로 교환변화되는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계단실과 슈트 등을 이용하여 수직분절을 꾀하고 있다.

각 단지 주동의 분절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 작은 변화가 각 주동외관의 단조로움을 탈피시켜준다.

 

  3) 외장 계획

외장은 건물의 외부 장식을 위해 사용된 건축 재료와 기법을 말한다.

다른 건물과 달리 아파트의 외장 재료는 극히 단순한 편이다. 실내공간 확장으로 발코니가 없어진 자리에는 수평으로 길게 찢어진 창과 위 창과 아래 창 사이를 채우고 있는 벽으로 중요 형태가 결정되었다.

그 사이사이 수직분절 요소와 계단실과 옥탑, 지붕의 형태 등의 볼거리들이 상호작용을 하지만 아파트 외관의 결정적인 요인은 면적에서 압도하는 창과 창 사이의 벽이다.

주택난이라고 하는 공급적 요인에 의해 단기간에 보급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아파트는 태생적으로 외관계획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외관은 질적인 문제였고 건설은 양을 채우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양이 부족한 시기에 질을 따지기는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아파트에 색채 개념이 도입된 것도 80년대 후반 혹은 90년대 초반이라는 주장까지 있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대원2구역 아파트들이 지어질 때만해도 색채는 언감생심 아파트의 외장은 베이지 아니면 회백색의 도장 외는 생각지도 않았다.

이미 건축된 지 30년이 더된 아파트의 현재 외부 색상을 지금 시점에서 논하는 것을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

이미 여러 차례 덧칠된 결과이다. 드러나지도 튀어나지도 않고 안정적이며 무난한 색상, 즉 주조색은 회백색에서 시작해 베이지와 옅은 주황색으로 이어지고 강조색으로 짙은 밤색과 붉은색 계열이 일부 사용되고 있다.

특이한 점은 동양상가아파트의 붉은 벽돌 외장이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법이지만 당시에는 간혹 나타났던 외장재료이다.

추정해볼 때 형식과 내용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었던 시절, 분양 경쟁력을 가지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붉은 벽돌 위에 페인트로 덧칠되어 재료가 가지는 중후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렸다.<<<

 

<대원아파트>

<대원아파트 입구 표지판>

<쌍용아파트>

<쌍용아파트>

<쌍용아파트 어린이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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