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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18. 00:00

마산번창기(1908) - 9

마산의 관공서-3

 

□ 마산경찰서-신시 토모에마치(巴町, 대외동) 소재

각국 거류지회 조직과 더불어 각국 경찰 사무를 보기 위해 설치된 것이며 새로 신축할 곳은 마산정차장 앞 철도관리국 소관지를 예정하고 있다. 아마 1909년(명치 42년)에 기공할 것으로 보인다.

영사관 소속의 경찰관은 애초부터 그 사무를 겸무하고 있었고 경부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 생몰년미상, 개명 전 이름은 사카이 에키타로 境益太郞. 1899년 4월부터 일본영사관 마산분관 주석경부로 1900년 9월까지 근무 후 같은 해 11월부터 1906년 1월 마산영사관이 폐지될 때까지 영사관 주석경부로 근무했다)가 서장이었다.

그 후 서장은 엔도 다다오키(遠藤忠興), 사카이 요시아키(재임), 경시(輕視) 미야가와 다케유키(宮川武行)로 교대했다. 1908년(명치 41년) 6월 미야가와 경시는 전라남도 경찰부장 겸 전주경찰서장으로 전임하고 목포 결창서장이었던 미치노 요시키치(道野能通) 경시가 후임자로 들어왔다.

착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시정(施政) 방침은 잘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관권평민(官權平民) 절충주의(折衷主義)를 중시하는 모양새이다. 나가사키(長琦) 현 쓰시마(對馬) 출신인데 오랫동안 후쿠시마(福島) 현, 아오모리(靑森) 현에서 경찰관 생활을 해서 그런지 동북지방의 기풍에 물들여져 단호하고 늠름한 기상을 지녔다.

차석 경부는 후쿠야마 쵸베에(福山長兵衛)로 가고시마 현 출신이며 민완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 경찰서의 부속기관인 마산포 경찰관 주재소에는 한인인 경부 전태홍을 비롯하여 일인 순사부장 이하가 주재하고 있다.

주재소에 경부와 순사부장이 동시에 주재하고 있는 데는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점이 바로 마산포의 인구가 많으면서 융성하고 있는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마산경찰서. 1909년 초 순종의 마산순행 때 촬영한 사진>

 

□ 마산우편국-신시 혼마치(本町 4정목, 월남동 4가) 소재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부터 마산포에 설치되어 1900년 4월에 신시의 민간 가옥을 임차하여 사용하다가 같은 해에 현재의 위치에 신축하여 입주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국장은 도조 겐타로(東條源太郞) 씨로 적은 도쿄에 두고 있지만 원래는 후쿠시마현(福島縣) 출신이라 활발하고 민첩하다는 소문이 있다. 따라서 직원들도 평민주의를 취하고 만사가 잘 흘러간다고 한다.

당국도 신축 이전지를 마산정차장 앞 바로 마산경찰서 신축지의 북쪽에 예정하고 있어서 예산이 성립되는 대로 기공될 것으로 보인다.

 

<마산 우체국>

 

□ 각국거류지회-신시 아케보노마치(曙町, 청계동) 소재

마산경찰서의 동쪽에 인접해 있고 각국 거류지 및 거류민의 이해득실을 연구 심리하는 곳이다.

회장은 이사관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씨이며 현재 회원은 러시아 영사 바실리예프(러일전쟁 이후인 1907년 새로 부임해 온 마산 주재 러시아영사관 영사), 창원부윤 신석린 및 지주의원(地主議員)으로서 제일은행 대표자인 니시카와 다로 이치(西川太郞一) 씨 등이다.

 

□ 마산해관(馬山海關)-신시 혼마치(本町, 월남동) 소재

부산세관의 지서이며 지서장 이하 집무자는 거의 일본인이지만 한국 정부에 고용된 관리자 중에는 외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이나 외국에 나갈 수출품을 검사하며 정규 과세를 수행하려는 한국 정부에 충실히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자신의 사복(私服)을 채우는 자들이 있어 거류민의 동정을 얻기 힘든 경우도 있다.

현재 지서장은 아시이 히코조(石井彦三)란 사람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아홉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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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8

제2장 마산의 관공서 - 2

 

□ 러시아 영사관(露國領事館)-신시 다이마치(臺町) 소재

마산이사청의 구청사를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붉은 벽돌 벽에 유리창이 있는 건물이 나온다. 이것이 러시아 영사관이고 지금은 영사 대리인 한 명과 한인 주방장이 있을 뿐이다.

1901년에 지어졌는데 당시는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했으나 지금은 찾아올 사람도 별로 없고 사무도 뜸하여 찬적하기가 이를 데 없다. 경내에는 소나무가 우거지고 초록이 깊어서인지 냉랭한 분위기조차 감돌고 있다.

 

<러시아 영사관>

 

□ 창원부청(昌原府廳)-마산포 소재

왕년에 조창 건물로 사용하던 것을 수리해서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가 쓰고 있던 곳이다.

 

<창원부청으로 사용된 조창 건물의 유정당>

 

감리서는 광무 2년 즉 1898년(명치 32년) 2월 마산개항 칙재(勅裁)에 의해 설치되어 주로 개항 준비를 위한 사무를 보던 곳이며 그 우두머리를 서리(署理)라고 불렀다. 감리서의 서리는 창원군수를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군내의 사법, 행정 사무가 같이 처리되었다.

그러다가 광무 10년 즉 1906년(명치 39년) 말에 폐지되었다. 동시에 창원군은 창원부(府)로 승격하여 부윤(府尹)을 두게 되었고 마산이사청을 상대로 한인(韓人) 및 한일인(韓日人) 관계의 행정사무를 보게 했다.

또한 창원항재판소를 두고 법무보좌관보로서 이토(伊藤)한 사람이 그 임무를 맡게 되고 주로 한인의 민형사 사무를 종사케 했다.

당시의 부윤은 이기(李琦, 1855~?.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친일관료. 1906년에 창원부 감리 겸 창원항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이어 경주군 군수가 되었고 1908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체제에서 충청남도 평택군 군수와 은진군 군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씨인데 1908년(명치 41년) 이 부윤은 경주군수로 전근하고 웅천군수 신석린(申錫麟, 1865~1948. 일제강점기 경남 참여관, 충남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친일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1906년 경상남도 진해만 군항지 조사위원을 시작으로 1906년 웅천군수에 임명되었으며 1908년 창원부윤을 지내다가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 10월 경상남도 참여관이 되었다.) 씨가 후임으로 승진해 왔다.

같은 해 7월까지 재판권은 모두 진주구재판소(晉州區裁判所)로 이관되어 지금은 행정사무만을 본다. 웅천, 진해(구 진해현 지역)의 양 군수도 겸하고 있어서 신 부윤은 다망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다.

신 부윤은 경기도의 인간 개진주의(改進主義)의 인맥으로 친일파에 가까워 일본인들의 평도 좋다. 일본 말도 다소 아는가 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여덟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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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7

제2장 마산의 관공서 - 1

 

□ 마산이사청(馬山理事廳)-신시(新市) 다이마치(臺町) 소재

언덕 위의 조망이 좋은 데에 있으며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 부산 영사관의 분관으로서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로 하여금 건축하게 했던 것을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규모가 작고 그 위치가 놓은 데 있어서 사람들이 불편해 하니 이사관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1861~?. 1901년부터 서울 일본영사관 영사로 근무하다가 1906년 마산이사청 이사관으로 발령받았다. 이후 계속 이사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초대 마산부윤으로 임명받은 뒤 1919년 11월까지 부윤으로 있었다) 씨가 1908년(명치 41년) 5월 그 북쪽 위치에 새 건물을 짓기로 했다.

공사는 아직 낙성을 못 보았지만 그 건축물의 수려함은 마산에서 으뜸이라 한다. 아마 11월 3일 천장절(天長節, 1896년에 제정된 메이지 일왕의 탄생 축일로 날짜는 11월 3일이었다. 1927년부터 1947년까지는 명치절로 불렸다)이란 좋은 날을 잡아 낙성식을 거행할 예정이라 생각한다.

이사관 관저는 이사청 뒤의 언덕에 있으며 1907년(명치 40년) 9월 중에 신축이 시작되고 미마스 이사관이 스스로 위치를 정하고 설계한 것인데 조망 좋은 터에 수려하게 세워져 있다.

 

<1908년 말 준공한 마산이사청(현 경남대 평생학습원). 뒤쪽 건물은 미마스 이사관이 살았던 관저(현 마산종합사회복지관)>

 

미마스 이사관은 야마구치(山口) 현(縣) 옛날 하기번(萩藩) 출신이며 1860년(명치 17년) 생이다. 삿포로 농학교를 졸업한 농학사이며 열정적이며 호걸 같은 사람이다. 거기에다 성결이 강직하고 쉽사리 자기 소실을 꺾지 않는 점은 무사의 기질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겠다.

미마스 씨는 1887년 외무성에 들어가 1888년 7월에 독일 브레멘 영사관에 부임하고 그 후 함부르크와 베를린 영사관에 근무하며 후쿠시마(福島, 후쿠시마 야스마사 1852~1919. 일본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육군대장) 장군이 필마단기도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했을 때에 성심껏 도움을 드리기도 했다.

1895년 9월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바로 하와이 제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전임되었고 1898년 귀국하여 5월에 마닐라 영사도 전임되었다. 당시는 때마침 미국-스페인 전쟁(米西戰爭) 중이었다. 1900년 4월까지 거기서 근무하였다.

같은 해 7월에 한국 경성 주재 영사가 되어 러일전쟁의 비상한 시기에 공로를 아끼지 않았다.

1906년 7월에 한국통감부제의 실시로 마산주재 영사였던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 1872~1941, 1902년부터 1906년 1월 31일 마산영사관이 폐지될 때까지 영사로 근무하였다. 영사관이 페지되고 이사청이 설치되자 마산이사청 이사관으로 잠시 근무 후 경성이사청 이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통감부 서기관을 겸임하면서 1910년까지 경성 이사청 이사관으로 근무했다.) 씨가 경성이사청 이사관으로 전직하게 되자 미마스 씨가 그 후임으로 경성 영사에서 마산이사청 이사관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미마스 씨는 이렇듯 외교관의 경력만을 가진 사람이라 교제가로서는 평민적인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 세상 사람들의 동정은 얻지 못하는 편이다.

문필을 업으로 하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아주 개방적이며 위세를 부리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소박하고 솔직한 점으로 관리에 딱 맞는 사람이라 하겠다. 단도직입적인 면도 있으나 세평에서 말하는 관권(官權) 만능주의자라는 지적은 맞는지 모르겠다.

부이사관인 와다 시로(和田四郞)도 역시 야마구치 출신이며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여 일본에서 지방재판소 판사를 지낸 사람이다.

온건한 성격으로 자만심을 드러내 놓지 않는 사람으로 현재는 민형사(民刑事) 사무를 담당하고 있다. 공명정대한 수완을 발휘하여 교제 석상에서도 원활한 자세로 칭찬받는 진지한 서생(書生)과 같은 사람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일곱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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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6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 4

 

■ 마산포 - 2

□ 월영동(月影洞)

신시의 서쪽부터 남쪽 일대를 포함하는 큰 마을이다. 그 일부는 일본의 전관지(專管地)이기 때문에 1908년(명치 41년) 7월 퇴거령으로 인해 서쪽의 산 위로 이전하게 되고 까치나루 고개(鵲峴)의 근위(近衛, 메이지 시대의 화족이자 정치인이었던 고노에 아쓰마로-近衛篤麿, 근위독마 1863~1904. 월영동과 자복포 사이의 언덕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언덕 아래에는 웅장한 중포병 영소(營所)가 건축될 것인지라 원래 일본인의 모습이 없었던 이 마을에 점점 일본 가옥이 건축 중에 있고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곳이다.

□ 자복포(滋福浦)

깊은 산과 청송이 우거진 이곳은 물아일체의 경지를 자아내는 곳으로 월영동의 일부와 같이 일본 전관지였기에 퇴거령이 내려져 이미 가옥을 뜯어내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그 폐가에 일본인이 임시 거주하기도 한다. 이 마을은 연병장에 붙은 사격장으로 사용될 것이니 1년도 못가서 그 모습을 달리할 것으로 보인다.

□ 율구미포(栗仇味浦)

원래 러시아의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로 면적은 삼십만여 평에 이른다. 러일전쟁 개시 전에 러시아의 동양함대가 여기에 임시사령부와 병사(兵舍)를 건축했다. 신시에는 여관이나 잡화점을 경영하고 전축자재인 벽동 제조 가마를 만드는 등 위세가 왕성했으나 개전(開戰)이 되자마자 그 사령부는 일본 해군에 점령되어 진해 방비대(防備隊)의 사령관실로 되었고 지금은 거제 송진만(松眞灣)의 들머리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1900년 신마산 일대. 오른쪽에 길게 나온 곶이 이심이산(以深山)이다>

 

이상의 각 마을은 현재 일본 민단(民團) 행정이 미치는 곳인데 이밖에 일본전관거류지라고 하는 곳이 있다. 이는 전기한 월영동 일부와 자복포 전부를 가리키는바 북으로는 마산만 해안 근위(近衛) 언덕 꼭대기부터 남으로는 구산산맥의 중복까지 이른다.

동쪽으로는 이심이산(以深山)의 정상을 구획하니 전에 러시아 전관거류지였던 땅과 경계로 한 그곳의 면적은 십만 평에 불과하다.

그러나 앞면이 해상을 엄호하는 보루로서 마산만 중앙에 월영도(月影島, 돝섬)가 가로 누웠고 이와 마주한 칠원반도(漆原半島) 사이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곳으로 요새지라 불리기에 족하다. 이곳은 개항 당시 일본 상인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박간방태란, 1860~1943, 일제강점기 부산과 마산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일본 경제인이자 정치인)의 명의로 이미 매수된 것이었다.

1900년(명치 33년) 5월, 주한 러시아공사 파블로프(1860~1923, 러시아 외교관으로 1899년~1904년 주한 러시아 공사를 역임하였다)가 자국의 동양함대사령관과 마산에서 만나 마산주재 러시아 영사 소코프(생몰미상, 마산포 개항 이후 마산포에 설치된 러시아 영사관 부영사. 1900년 6월 대한제국 외부外部 통상국장 정대유와 율구미호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율구미 일대 30여만 평의 부지가 러시아 단독 조계로 설정되었다)와 함께 제멋대로 답사, 측량하고 6만여 평의 주위에 표지를 세워 이 땅을 점거하려 했다. 사카다(坂田重次郞, 판전중차랑, 사카타 주지로,, 1869~?, 일본의 외교관. 부산 일본영사관 마산분관이 마산영사관으로 승격된 이후에 초대 마산영사로 발령받아 1902년 11월 후임 미우라 미고로-三浦彌五郞 가 부임할 때까지 근무했다) 영사는 그 불법행위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분쟁이 생기게 된 것이다.

소코프는 공사 파블로프가 경성 정부와 미리 선정하여 매수에 관해 조회 중이라 주장하며 이 땅을 완강하게 점거하려 들었다. 사카타 영사는 끝까지 납득할 수가 없었고 이 분쟁은 다음 해인 1901년까지 이어져 기어코 소코프를 굴복시켜서 포기하게 하고 러시아로 하여금 새 터를 율구미포 일대로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하였으니 참으로 통쾌한 일이다.

이 분쟁은 세상에서 마산포사건으로 불리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분쟁의 진상을 캐보면 양측이 조선해협에서 제해권을 얻고 그 근거지를 만들어 보자는 의도와 다름 아니다. 당시 일본인 사이에서 유행했던 노래가 있다.

비분강개하며 내려다보는 러시아의 배

마산포사건에 분개하여 사카타 영사는 결심했네

그래서 소코프가 울고 간다

흐린 날의 구름이 가고 햇빛이 찬란하네

이슬이 마르기 전 늦은 아침에 애석하게 떠난다니

소코프 눈물 흘리네

이때부터 이 지역에는 대일본전광거류지란 간판이 세워졌으나 지상권 매매가 없어서 일본인 거류지는 한 명도 거류를 허가받지 못하는 군사 전용지였다.

다만 한인 마을인 월영동과 자복동의 인민들이 세상 물정을 모르고 거주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중포병영과 요새포병영 건설 때문에 한인 마을은 퇴거 명령을 받게 되었다. 월영동 마을은 이미 서쪽의 산에 이전하게 되고 자복동도 그와 같이 현재 이전 준비 중이다.

그 구역 안의 근위 언덕 동쪽 끝머리에는 까치마루곶(鵲峴末) 일명 근위곶(近衛岬)이 있다. 바다 멀리 등대가 해상에 솟아나 있는데 그 주변은 편탄한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때 진해만을 근거지로 삼은 도고(東鄕) 사령관이 이끄는 주력 함대가 사용한 저수조(貯水槽)와 저탄고가 있었다.

그 후 이 시설들은 제거되었고 등대도 파도에 파손되어 이 부근은 볼품없이 되었다가 병영 공사가 시작되면서 등대는 복원되고 해안가에 뻗어지는 평탄한 도로가 등대 쪽으로 개통되니 그 면목을 일신한 셈이다.

마산항이란 민단제도(民團制度)로 된 구역은 전기한 바와 같으나 마산만의 월영도는 어떤 내용일까?

월영도는 의친왕의 영지(월영도가 의친왕가의 영지였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1906년을 전후한 이 시기 의친왕가는 가덕도에서 통영에 이르는 방대한 연안어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일본인 어업자 카시이 겐타로-香推源太郞에게 임대한 상태였다.

이 해역은 대구 청어 멸치 등이 풍어를 이루는 황금어장이었다)로 알려졌는데 개방 혹은 대여가 되고 일본인 거주지가 있으면 민단구역이 되겠지만, 전항민(全港民)의 여망은 대여가 이루어져 전체 섬에 벚꽃을 심은 공원을 만들어 마산만 내의 경치를 돋보이게 하자는 데에 있으니 아마도 앞으로 실행에 옮겨지지 않을까 한다.

월영도 주위는 1km도 되지 않으며 제일 높은 곳이 50m 정도로 그 산을 돼지산(猪山)이라 부른다. 고려조 때에 이 섬에 돼지가 있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여러 가지 요괴를 저지르곤 했으나 마침내 당시 합포와 문창 두 군의 군수인 대유학자 최덕린(최치원)의 파마궁(破魔弓, 일본 풍속으로 잡신을 쫓기 위하여 설에 사내아이가 쏘며 놀던 활)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활을 쏜 그 자리에 혼을 모신 사당을 짓고 그곳을 월영대(月影臺)라 불렀다.

월영도는 그 괴담으로도 유명한 섬이다. 이 섬 기슭에는 한인 가옥이 일곱 채가 있으며 어업과 농업을 겸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면서 월영동장의 지배를 받는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여섯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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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20. 00:00

마산번창기(1908) - 5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 3

 

■ 마산포 - 1

신시(新市)의 북쪽 약 2km 거리에 있는 본래의 마산이다.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일본 해군성 수로부가 간행한 조선의 해안, 항로, 도서 등의 지리정보를 망라한 수로지로 동일 명칭으로 1894년, 1899년, 1907년 세 차례 발행되었다)에는 마산포읍이라 적었지만 한인(韓人)들은 모두 다 마포(馬浦) 혹은 신마포(新馬浦)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인은 구마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왜 구마산이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날마다 번성해가는 본래 마산에 낡은 구(舊) 자를 붙이는 이유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각국 거류지를 신시라고 칭하는 것에 대하여 붙인 구 자일테지만.

각국거류지를 신시라고 부르는 것은 과거에 새 시장을 연 데에서 기인한 이름이며 결코 본래의 마산에 구 자를 붙여 신구(新舊)로 구별함은 그 뜻이 틀린 것이다. 마산의 옛터는 산호동이며 한인들은 현재 이곳을 구마산, 구마포(舊馬浦), 구강(舊江) 혹은 고관(古館)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본 마산포는 본마산(本馬山)이라 함이 지당하리라 생각한다. 사물의 본말시종(本末始終)을 잃지 않도록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원칙에 기초하여 보통 불려지고 있는 마산포라고 적기로 했다. 이는 곧 한국 정부가 일컫는 창원항(昌原港)이고 항내(港內)는 6개 동으로 나눈다.

성산(城山), 성호(城湖), 오산(午山), 중성(中城), 동성(東城), 서성(西城)

위의 6개 동을 합쳐서 한인의 호수가 약 천호, 인구는 사천구백 명이며 영남 굴지의 대도회이다. 이곳은 옛날 합포군(合浦郡)의 항구였으며 몽고가 일본을 침략할 때 정동행영(征東行營)을 설치하고 일본 정복을 위한 몽고 대군이 출범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두 전쟁에서 패배로 끝나서 합포란 이름이 좋지 않다 해서 새로 이름을 고안하더니 누워 있는 작은 산의 모습이 누운 말과 같다고 오산(午山)이라고 개창하게 된 것이다.

이 산의 동남 아랫목에 바다에 면한 작은 마을은 오산포(午山浦)라 불리었다. 그곳이 바로 오늘의 산호동인데 조선 왕조 초기, 지방에서의 세공미 집적지로 삼아 창고들을 만드니 관민이 점점 모여들게 되어 대도회를 이루게 된다. 그 후 역병(疫病)이 유행하여 날마다 많은 사람이 죽게 되어 무당을 불러 점을 치니 오산의 오자가 흉하다고 했다.

미신에 빠지기 쉬운 한인들은 이름을 마산으로 고쳤다고 전해 온다. 몇 차례에 걸친 지방제도 개정의 결과 산호동과 마산포는 그 지역을 달리하게 되었지만 옛적에는 산호동은 마산포 안에 있었으며 잡초가 무성한 큰 모래벌판이었다.

지금은 지구(地區)를 달리하고 있지만 시장이 열리는 날은 서로 연관되어 산호동은 5일이, 마산포에서는 10일로 교대로 열린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마산포 5, 10일 장이라 부르고 손님은 4, 5리 사방에서 모여 들어 경남에서는 진주에 다음 가며 통영과 백중세를 이루는 장인 셈이다. 거류 일본인 상인이며 청나라 상인도 온다. 이 시장에 의존하여 편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1901년 산호동. 삼각형으로 틔어나온 부분이 오동교 아래쯤이다. 오른쪽이 돝섬>

 

□ 산호동(山湖洞)

옛날의 오산진(午山津)이며 이곳을 구마산, 구마포, 구강, 혹은 고관이라 부른다. 뒤로는 마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바다에 면한, 마산의 이름이 기인한 곳이다. 일본인 거류자는 아무도 없다.

□ 상남동(上南洞)

마산포의 북쪽 수백 미터 거리에 있으며 일본인은 한 사람도 거류하지 않는다.

□ 교방동(校坊洞)

마산포의 서쪽 산과 경계에 있고 여기에도 일본인은 한 사람도 거류하지 않는다.

□ 척산동(尺山洞, 현 자산동)

마산포의 서남쪽 수 킬로의 거리에 있으며 길에서 서쪽으로 백 미터 가량 들어간 곳에 일본인 호구가 몇 개 있고 그 동네 안의 길을 일본인들은 척산가(尺山街)라고 부른다.

□ 신월동(新月洞)

신월계곡을 사이 두고 신시 북쪽에 인접하여 길에서 산기슭 쪽으로 뻗어 있다. 길가에는 한일인(韓日人)이 뒤섞여 살고 있으나 앞으로는 일본 사람들이 매수하여 한인의 모습은 점점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 동네는 원래 한국 우체사(郵遞司)가 있던 곳으로 그 토지와 가옥은 우편 사무가 일본 정부에 위탁함에 따라 마산우편국이 보관하게 되었고 현재는 우편국 직원들의 숙소로 충당하고 있다.

뒤쪽에 보이는 높은 양식건물은 마산포의 전 해관장인 모 독일인(개항기 우리나라 해관에서 활동한 독일인 아르노스-H.G. Arnous. 그는 1889년경부터 부산해관에서 근무하다가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마산해관의 책임자로 있었다)의 소유였다가 그 후 오랫동안 일본인 마산해관지서장의 숙소로 빌려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다섯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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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13. 00:00

마산번창기(1908) - 4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2

 

■ 각국 거류지(各國 居留地)

월영동의 일부와 신월동 일부를 쪼개서 이루어진 해변의 신시가(新市街)이며 마산이사청 관내의 중심인 곳이다.

1898년(명치 31년) 2월 21일부 칙재(勅裁)로 개항되고 다음 해 1899년(명치 32년) 5월 1일에 거류지 구획이 정해졌다. 그 면적은 138,888평 남짓이며 이것을 A, B로 나누어 A는 일등지를 뜻하며 그것을 1호부터 47호까지 세분했다.

B호는 이등지이며 1호부터 47호까지 세분되어 있다. 그 일등지 전부는 이미지상권 경매가 종료되고 현재로서는 러시아인 소유자 중 몇 개 구획이 빈터로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식 기와집이 즐비해 있다. 이등지는 17호 및 39호부터 45호까지 여덟 구획을 제외하고는 경매가 끝나고 길도 가로 세로 개통되어 집도 띄엄띄엄 지어지고 있지만, 산기슭에 가까운 데까지 집이 들어서려면 아직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이 거류지에다 1902년(명치 35년) 즉 광무 6년에 당시의 영사(領事)인 사카타 주지로(坂田重次郞), 거류민회 이사인 센고쿠 간쿠로(仙石勘九郞), 박간지점 지배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 씨 등의 알선으로 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그 시장은 마산포와 같이 매월 3번, 10일 20일 30일에 열리는 산호동 즉 고관(古館)의 그것을 옮긴 것인데 8월 3일이 음력으로 6월 30일이라 즉 10일이 붙는 날이라서 그날을 시장 첫날로 잡은 것이며 장소는 혼마치(本町)부터 사카에마치(榮町, 홍문동)에 이르는 데서 장이 열렸다.

이때부터 거류지는 신시(新市)라 불리게 되었으나 한국인 중에는 시장 복구 운동을 위해 상경하는 사람도 나와 그 시장은 불과 5~6번 열린 후 고관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월동에 새 시장을 개시하여 매월 16일에 열게 했으나 손님들과 출품이 적어서 이 또한 실패했다. 그래도 거류지에 대한 신시란 명칭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신시가 지역 명명에 관해서 당국자들이 자주 모임을 가졌으나 좋은 구획 안이 나오지 않아 시간만 흘러가고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 작은 한 구획에도 십여 채의 전셋집들이 들어오게 되어 우편물의 배달이나 결창의 호구조사에도 A 몇 호인지, B 몇 호인지 조잡한 이름으로서 불편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1908년(명치 41년) 4월, 각국거류지회 회장인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거류민단 단장 마에다 에이치(前田榮一), 경찰서장 경시 미야가와 다케유키(宮川武行), 우체국장 도조 겐타로(東條源太郞), 기타 민단 의원, 유지자(有志者)들이 모여서 한 글자로 된 좋은 이름을 골라서 쓰기로 했다.

남북으로 11개 구획에 동 이름을 붙이고 동서로 11개 구획은 중앙으로부터 분할해서 동명(町名)을 붙이고 동(町)은 반드시 마치라고 읽도록 하고 죠메(丁目)를 나눈 곳에는 죠메(정목)마다 호번(戶番)을 따로 하고 각국거류지회는 이와 함께 동마다 몇 간(間) 간격을 기준으로 벚꽃을 심기로 했다.

그 11개 동의 내역은 아래와 같다.

 

 

□ 혼마치(本町, 1정목에서 5정목까지) - 현 월남동

북쪽의 창원교(昌原橋)로부터 중부의 마산교를 지나서 진해교에 이르는 지역이며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에 열렸으며 상가는 다음 해 연말부터 들어오게 된 가장 오래된 곳인 동시에 1906년(명치 39년) 말까지는 가장 번화한 곳이기도 했다.

그 북쪽 끝은 당시의 마산 정거장에 바로 통하고, 남쪽으로는 진해군(현재의 마산합포구 삼진지역의 옛 행정구역) 읍내를 거쳐 하나는 고성과 통영으로 하나는 진주를 거쳐 전라도를 가는 노선이었다.

교마치로(京町通)의 북쪽 끝이 정류장 사이의 왕복노선으로 개통되고 나서 그 번성이 모두 교마치 쪽으로 쏠리고 이제는 조금 기울어진 감이 있다. 그래도 앞의 바다와 관련된 시설이 있고 남쪽 끝의 일본전관지에 중포병영이 세위지게 되므로 그 경향이 만회된 셈이다.

혼마치 1정목은 동쪽이 바로 바다이기 때문에 건물이 적어서 한산한 감이 있으나 그 앞바다를 매립하려는 공사가 시작되리라는 소식이 있어 그때는 교마치로와 별 차이 없는 번화가로 둔갑할 것이다.

이 동네에 사는 고참인 시게무라 우리치(中村宇一), 다나카 츠루마츠(田中鶴松)씨에 의하면 자신들이 이주했던 1900년(명치 33년) 말까지 혼마치는 동네 양끝이 아직 개통되지 않았던 상태였다고 한다.

혼마치 2정목은 해안가 일대를 가리키며, 해관지(海關地)에 이르는 사이에 무학교(舞鶴橋)가 걸려 있다.

□ 교마치(京町, 1정목에서 3정목까지) - 현 두월동

북쪽의 완월교(玩月橋)에서 중부의 반룡교(盤龍橋)를 넘어 남쪽의 혼마치 모퉁이까지의 지역으로 1905년(명치 38년) 말부터 개통한 시가지이다.

1906년 초봄에 완월교 주변에 나가야(長屋)가 한두 채 세워진 후 초여름 때부터 건축공사를 보게 되었다. 그해 6월 20일 본 책 저자가 마산에 왔을 때는 동네 전체로 16~17채 밖에 되지 않았으며 특히 동쪽 일대에는 건물이 없어서 해면을 지나온 남풍이 바로 가게에 불어와 시원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북쪽 끝은 한 길이 있을 뿐 가게의 번창이란 엄두도 못 내던 터였는데 같은 해 가을에는 혼마치로의 남쪽 끝 길이 닫히게 되고 그와 동시에 동네 북쪽 끝머리에서 마산포에 통하는 길이 열려 정거장 길은 이때부터 동쪽으로 꺾이게 되었다.

그 이래 혼마치의 건축공사는 아주 바쁘게 돌아가게 되고 그 공가 소리는 밤에도 들릴 정도였다. 같은 해 연말에는 동네 동쪽에도 기와집 건설이 시작되어 마침내 혼마치의 번영을 능가하고 마산 제일의 장소가 된 것은 1907년 초봄부터이다. 혼마치 2정목 위에 있는 야나기마치(柳町, 신창동)에 이르는 모퉁이는 하나미사카(花見坂)라고 불리기도 했다.

□ 사카에마치(榮町) - 현 홍문동

사카에마치는 대사교(大使橋) 이남에 있으며 혼마치와 동시에 개통된 시가지이며 경찰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교차점 사방은 양측에 요리점이 생겨서 마치 마산의 유흥가처럼 되어 버렸다.

□ 하마마치(濱町) - 현 창포동

혼마치와의 경계를 이루는 신월교 이남에 있으며 혼마치 5정목으로 나올 때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가지는 해안 매립과 동시에 개통된 곳이라 바다와 면하여 있어 길 한 쪽에 집이 있을 뿐이다.

그 1정목에서 2정목까지는 모두 해관 소유지이지만 1정목에는 해운업, 위탁판매업, 기타 해관에 연고가 있는 자가 땅을 빌리는 허가를 받고 거주하거나 창고를 지어서 해안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기도 했다.

1907년(명치 40년) 7월에 해관이 창고를 건축할 예정이 있어서 그 터에 집과 창고를 없애도록 하여 그 꼭이 참으로 못 보게 되었다. 2정목은 애초부터 차지(借地) 허가를 내지 않아서 오늘날의 1정목보다는 아주 살풍경으로 자랑거리는 전혀 못된다.

3정목와 2정목이 이어지는 지역은 러시아인의 소유라 건축물이란 아예 없다. 다만 모퉁이 한 구획을 사이에 둔 구역에는 마산수산회사 및 부속어시장이 있기 때문에 상점들이 많이 덜어서고 있다. 가게 뒷 터에는 어부의 집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빼곡히 줄지어 있다.

출선(出船) 후의 어부 집들은 다른 데와 변함없으나 배가 들어온 후에는 먹고 마시며 소란을 피우고 시끄럽기만 하여 여기저기서 노래 소리, 싸움소리가 이어진다. 근처의 상점들도 이때가 장사가 잘 되는 법이다. 출선과 입선은 매일 다소나마 있지만 출어기는 길게는 일주일, 짧게는 사흘 정도 걸린다.

이 뒷골목은 일본에서 말하는 빈민굴보다 더 열악하여 다타미 서너 장 넓이의 집에 부부로 세 가족이 살면서 줄판이 벌어질 때에는 아침 낮 밤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번갈아 들락거리기도 한다. 세상에 불경기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양상이니 참 기운도 좋은 사람들이라 하겠다.

이 악의 없는 어부들이 수산회사 소속의 에비스신사(惠美壽神社)를 중심으로 해업을 독점하고 그 기세가 높은 것도 마산의 꽃이라고도 하겠다.

□ 다이마치(臺町) - 현 대내동

다이마치는 이사청이 마산포에서 이사해 왔을 때 개척된 곳이라 이사청, 러시아영사관 소유지와 영국계약의 지계(地界) 일대의 총칭이다.

이사청, 이사청 관저, 이사청 직원 숙소 및 러시아 영사관이 있을 뿐 상가는 한 채도 없다. 다만 조망이 좋아 소나무가 울창한 일화산록(日和山麓)에 자리 잡고 있다.

□ 야나기마치(柳町) - 현 신창동

야나기마치는 북쪽의 웅천교를 꺾어 올라 교마치의 서쪽 위에 나란히 가면서 대사교(大使橋)에 이르는 사이의 지역이며 교마치와 같은 시기에 개통한 시가지이다.

평탄하지 않은 비탈이 많은 동네라서 아직은 번화롭지는 못하다. 이름에는 버들 유(柳)자가 들어갔지만 버드나무는 없다. 집들이 이제야 들어서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2, 3년 내에는 변화가가 될 것이다.

□ 아사히마치(旭町) - 현 평화동

아나기마치와 나란히 월견교까지 이르는 지역

□ 사쿠라마치(櫻町) - 현 문화동

아사히마치의 서쪽 조금 높은 데로 아사히마치와 병행하는 지역으로 시중(市中)에서 가장 높은 시가지이다.

□ 토모에마치(巴町) - 현 대외동

마산경찰서가 있는 곳이며 그 서쪽 옆구리 지역 일대를 총칭한다.

□ 미도리마치(綠町) - 현 유록동

토모에마치의 서쪽에 위치하며 그와 병행하는 지역이다.

□ 아케보노마치(曙町) - 현 청계동

월견교(月見橋) 이남의 사카에마치와 토모에마치 사이에 있는 구역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네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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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6. 00:00

마산번창기(1908) - 3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1

 

한국에서 마산같이 산이 좋고 물이 밝은 데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음양의 영혼인 대기(大氣)가 응어리져서 마산만의 물이 되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빛이 나는 아지랑이 속에 마산항의 땅이 굳어진 것이다.

구라파의 어떤 이는 이 항만을 가리켜 태평양 해안으로서는 호주의 시드니 항, 북 아메리카의 샌프란시스코 항에 다음가는 세계 세 번째 최우량의 산수(山水)라 하여 그 얼마나 군침을 흘렸는지 모른다.

러시아가 동양에서 얼어붙지 않는 항구로서 마산을 얻으려고 마산사건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짐작이 가듯이 얼마나 마산이 그 형세가 좋고 그 풍경 역시 보기 좋기는 누구나가 아는 바이다.

마산만은 부도수도(釜島水道)라 부르는 입구에서 9해리 거리를 두고 진해만에 붙어 있다. 진해만에는 가도(가덕도), 칠천도란 두 섬이 있으며, 거기에다 거제도를 으뜸으로 한산, 가덕, 미륵, 욕지, 장사 등 기타 수십 개의 작은 섬들이 외양(外洋)에 대해 보루를 서고 있다.

통로는 거제도를 중앙으로 해서 남쪽은 통영, 북측은 가덕이란 두 개의 좁은 물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게다가 통영수도에는 항만 입구의 수심이 얕아서 300톤 이상의 선박이 취항하기가 어려워서 큰 배는 반드시 가덕수도 쪽으로 가야만 한다.

마치 크나큰 호수를 이루고 있고 산과 물이 명승 같은 마산항만을 가지고 있음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하다. 1906년(명치39년) 한국 정부는 그 부근 일대를 구획하여 해군 군항 예정지로 지정하고 관보에 공표한 것도 그 때문이다.

러일전쟁 때 연합함대 사령관인 도고 대장이 이 지역을 공방의 중요 거점으로 삼으며, 발틱 원정함대가 조선해(海)에 그 모습을 보이자 “국가 존망은 이 싸움에 달렸다. 제군 노력하시오”라고 무전을 보낸 곳이 현재의 군항, 현동의 앞바다였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 해군이 진해만방비대를 창설하고 그 사령부를 거제도 송진에 두고 육군도 역시 가덕도 기타에 요새를 배치하고 근해 경비에 전념하고 있다.

그 때문에 진해만에 여러 규모의 선박, 함대가 때때로 입항하여 대표 시험 발사나 사격 연습을 할 때, 마산에는 청천벽력 같은 굉음이 울리곤 한다. 이 소리가 울릴 때 마산 상인들은 많이 기뻐하기도 한다.

마산만은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진해만과 한 줄기 수로로 붙어 있는 아름다운 항구여서 외해가 아무리 사나운 파도에 휩싸여도 만내의 파도는 아주 잔잔하고 사방 경치도 거울에 비친 듯하다.

또한 수심이 깊어 수십만 톤의 함선을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가 있다. 바다, 육지의 생산물은 기차든 선편이든 자유로이 수출이 가능할 것이다.

실업의 실정으로 봐서는 개항 후 겨우 10년이므로 수백 년 전부터 개항된 부산에는 미치지 못하겠으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곳이 아니어서 부산에서 험한 날씨는 볼 적에도 마산은 마치 평상시처럼 고요하고 안전하다.

언젠가 세상과 민심이 안정되었을 때 천황이 순행을 바라는 곳은 한국 13도를 통틀어 오직 이곳, 마산뿐일 것이다.

마산의 위치는 경상남도 중부의 남쪽으로 북위 35도 10분 45초 동경 128도 34분 15초의 교차점을 중심으로 10한리(韓里), 즉 일본의 1리 이내 권내를 총칭한다.

앞에는 얼마 안 떨어진 곳에 한국 황실 의친왕이 관리하는 월영도가 있으며, 뒤에는 무학, 일화(日和, 각국거류지의 러시아 영사관과 일본영사관 뒤편의 높은 언덕의 이름으로 개항 이후 일인들이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운대 등의 봉우리와 가토커상관(加藤鬼上官-가토 기요사마 加藤淸正, 1562~1611-임진왜란 때 제2군 사령관으로 조선을 침략한 장군으로 ‘귀-幽靈-上官’으로 불리기도 했다)과 인연이 있는 장군산맥(將軍山脈)을 지고 좌측에 마을을 안고 있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세 번째 것이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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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30. 00:00

마산번창기(1908) - 2

 

서언

마산의 진상(眞相)을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으로 세상에 알리는 일은 오직 스와교도(諏方去洞) 씨가 편찬한 『마산번창기』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시찰이나 관광 명목으로 수많이 관민에 의한 수기가 잡지, 신문 등에 기술되었건만 여태껏 정곡을 찌른 것이 없었음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비평과 판단이 적절하고 저자의 평소의 언론관으로 과감하게 써 내려간 점은 그 강직하고 영리한 저자의 성격 덕분이라 감동하는 바이다.

저자가 마산을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사람 모두가 잘 알고 있고 저자의 강직한 언동 역시 주지된 바이거니와, 잘 웃고 잘 나무라고 술잔을 기우리면서 얘기를 나누는 속에서 이 글들이 써진 것이라 하겠다. 저자의 준명함 없이 이 일을 어찌 완성할 수 있단 말인가.

넘쳐흐르는 큰 재간은 없다 해도 두뇌가 명석하고 성격이 소탈하면서도 치밀한 사상을 지녔다는 점은 마산의 많은 지사(志士)들이 미치지 못할 터이다. 그리하여 한 편의 글로써 제 마음을 담아 그 강직한 저자에게 바치는 바이다.

자쿠오(鵲翁) 하마다 시치주로(濱田七十郞)

 

저자에게 보잘 것 없는 평을 보내다

화낼 때는 참으로 무서우면서도 심기가 바뀌면 웃고 지내는 저자의 모습에 많은 이가 추앙을 한다.

숨김없고 계산 없이 솔직하고 청빈한 생활에 자족하면서 약자를 돕고 강자를 꺾는 저자의 의협심은 고향인 일본의 동북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져 왔던 바, 저자 스와교도(諏方去洞)는 그런 사람이다.

저자가 한때 대만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생활상 도움을 얻기 위해서겠지 추측을 했으나 실제는 아니었구나, 저자가 명성과 영달을 버리고 한적하고 맑은 마산의 산과 물을 글로 옮기게 됨을 보니 내 생각이 짧았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가 활약하고 있다 함은 바로 언론계의 빛이 아직 살아 있음을 뜻한다. 저자는 지금도 세상의 평범한 공인, 상인들과 세상 속사를 얘기하는 것을 잊지 않고 관리, 농민을 벗으로 삼아 백성을 지키려고 정치에 분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름을 날리기 보다는 입으로 붓으로 따지고 나무랄 때의 그 기개가 아주 사나웠으면서도 심성은 유유했으며 그것은 마치 마산만에 수십만 톤급의 군함이 떠 있는 모습과 유사했다.

오래오래 그 필봉이 더욱더 용맹하기를 기원하며 하루 속히 일을 마치고 고향 산천에서 그 아름다운 필치를 다시 펼쳐 주시길 기원하는 바이다.

도쿄(東京) 아카마츠 겐콧세이( 赤埴玄骨生)

 

지역사 발굴연구 교양총서 01

마산번창기

발간사

서언

제1장     마산의 대관

제2장     마산의 관공서

제3장     지질 및 기후

제4장     위생 및 의사

제5장     교육기관

제6장     신도 및 종교

제7장     교통

제8장     호구

제9장     경제사정

제10장     마산의 잡록, 여러 근황   

             마산의 노래             

해제     마산번창기

부록     원문수록

 

경남지고(慶南志稿) 제1편 마산번창기

서언(緖言)

본기(本記)는 1906년(명치 39년) 6월 하순에 시작하여 1908년(명치 41년) 9월에 끝을 내었다.

그 기간 불과 2년 4개월, 마산의 형상은 날마다 변화하고 시시각각 발전해 가는 모양이어서 쉽게 원고의 끝을 못 맺는 이유는 그 최근의 호황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친절한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일본전관지(日本專管地)에 중포병영(重砲兵營)이 아직 공사 중인 점, 마산 진주 간의 도로가 아직 개통이 안 된 점 등이 있으나 현 상황상 기타의 것들은 거의 일단락 지어진 상황으로 사료되어 부랴부랴 인쇄하기에 이른 것이다.

저자는 현재 형편이 아주 안 좋고 원래 몰락한 아이즈번(會津藩) 무사 출신이라 가난한 처지도 이만저만 아니어서 쉽사리 인쇄비를 지출할 수도 없었다. 여러 물건을 팔며 돈을 빌려도 인쇄비용에 못 미친 터였다.

본 저작이 진정으로 마산을 사랑하고 마산의 발전을 유도하려는 소개서임을 알게 된 의리 두터운 분들이 깊이 동정을 해 인쇄 발행에 큰 도움을 주셔서 드디어 여기에 그 출판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아래에 그 성함을 기록하고자 한다.

거동노부(去洞老夫) 스와쇼오센(諏方松仙) 경백(敬白)

 

찬조 제씨 성함

마산포 유지자     가키모토 히로시(柿本鴻)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맥주 도매상)     하마다 시치주로(濱田十七郞)

한해수산조합 마산지부장(순라선 우편소장)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

본파본원사 개교사(군대포교사)     히다카 다츠게이(日高達契)

마산상업회의소 회장(제일은행 마산지배인)     니시카와 타로이치(西川太郞一)

마산상업회의소 의원     에다 구니미츠(江田國光)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미두도매 겸 도매상)     나스메 테츠조(夏目哲三)

마산포 유지자(전당포)     모모키 게이이치(百木惠一)

일한산홍법사(진언종 포교사)     산노미야 다이코(三宮隊晃)

마산상업회의소 부회장(미곡무역상)     미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신탁사장(토지가옥매매 주선 및 대리업)     고쿠후 야스케이(國府保敬)

통영 유지자(일어교수양성학교 주임)     와타나베 쵸쿠(渡邊直躬)

마산상업회의소 의원(잡곡 및 사금상)     야마모토 고조(山本好藏)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농사경영)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

육군군의(마산포병원분원 주임)     히라다 히코지로(原田彦次郞)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미두무역상)     히사시게 간사쿠(久重勘作)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미두무역 우피수출)     다나하시 센노스케(棚橋仙之助)

마산포 유지자     야마모토 구니츠구(山本國次)

마산상업회의소 의원(한인상대 잡화상)     요시다 마스터로(吉田益太郞)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미두 무역상)     야마노 겐지로(山野原次郞)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미곡상)     히로시케 세츠노스케(弘重節之助)

마산포 유지자     나카가와 후사키치(中川房吉)

미산이사청 이사관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마산거류민단민회 의장(무역상)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마산상업회의소 의원(잡화 및 주조업)     아카마츠 기이치로(赤松龜一郞)

마산 기모노점(우에니시상점)     우에니시 겐지로(植西原次郞)

부산항     오이케 츠우스케(大池忠助) <<<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두 번째 것이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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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23. 00:00

마산번창기(1908) - 1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를 포스팅한다. 기록전문가 박영주 선생이 일본의 한 대학도서관에 참자고 있던 이 책을 찾아냈고, 이를 창원시정연구원이 번역 출판하였다.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마산이 언급된 책은 『韓国出張復命書』(1901), 『韓国案内』(1902), 『韓国水産誌』(1908) 등이 있지만 단행본으로는 이 책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는 『馬山と鎮海湾』(1911)으로 알려졌었다.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 통감부 설치와 통감 정치, 고종의 강제퇴위와 순종 즉위 등으로 이어지는, 사실상 반(半)식민지 상태였던 당시의 시대상황은 마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창원군청이 아니라 통감부의 마산이사청이 실질적인 통치기관이었다.

더구나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일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항기와 식민지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마산이라는 지역 사회를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자료가 추가된 셈이다. 번역서에 실린 ‘발간사’와 ‘마산번창기 해제’를 우선 소개한다.

 

 

발간사

지역의 역사와 문화전반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지역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웃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데 필수적인 기초가 될 것입니다. 또한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자긍심을 확립하려는 노력은 도시성장을 위한 지방자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지난 2020년 12월, 지방자치법 정부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창원시는 마침내 인구 100만 대도시에 걸맞은 ‘특례시’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창원, 마산, 진해의 3개 시가 통합한 지 10년 만에 얻게 된 소중한 결실로, 통합창원시를 감싸왔던 3분 4열의 원심력이 ‘셋(3)이 하나(1) 됨으로써 다섯의 총합으로 나타난다’는 3·15의 구심력 원리가 발현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 창원시는 2022년 ‘창원특례시로서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됩니다. 따라서 ‘창원의 번창’을 위해 한 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 행진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여러 시민의 발걸음과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해 봄, 창원시정연구원은 창원이 가진 고유성과 차별성을 찾고 현재를 기록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필요한 역사·문헌자료의 발굴 및 번역, 시민·전문가 연구 공모사업 등의 다양한 연구 활동을 맡을 창원학연구센터를 출범시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2021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그 첫 번째 결과물로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마산번창기(馬山繁昌記)』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마산을 다룬 문헌 중 가장 유명한 『마산항지(馬山港誌)』의 저자인 스와 부고츠(諏方武骨)가 1908년에 발행한 책으로, 전통적인 농어촌이었던 마산지역이 근대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최초의 조사연구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하에서 한국의 근대식민도시가 어떻게 형성되고 건설되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엿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일본인의 시각에서 근대 창원지역, 그 가운데 근대 마산사회를 대상으로 자신들의 번창을 구가한 점은 뼈아프지만, 한국의 근대사가 안았던 숙명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하며, 역사의 교훈을 절실하게 새기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마산번창기』가 출간되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습니다.

오랫동안 제목 정도만 알 뿐 구할 수 없었던 귀한 자료를 찾아 내어주신 박영주 선생님, 자료가 지닌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알아보시고 창원학연구센터의 첫 과제로 제안하고 발간에 필요한 모든 작업을 도맡아 주신 한석태 초빙연구원과 송효진 센터장, 그리고 일본어와 우리말의 간격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매끄럽게 번역해주신 재일동포 하동길 선생님, 어떤 요청에도 흔쾌히 도와주신 문창문화연구원의 안용준 연구위원 및 한 면 한 면 정성으로 디자인과 편집을 맡아주신 불휘미디어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창원시정연구원과 창원학연구센터는 창원인에 의한 『창원번창기』가 나오길 기대하고, 창원의 언어, 역사, 지리, 풍속, 예술, 문화, 인물 등의 인문학 분야를 중심으로 사회, 정치, 경제, 행정 등 사회과학 분야와 도시, 조경, 건축, 교통, 물류 등의 지역 도시학 분야 등과 연계할 수 있는 체계적인 연구기반을 다져 나가며 창원인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2월

창원시정연구원장 전수식

 

마산번창기 해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탈과 경영은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창원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일본 문헌자료를 번역하는 작업은 이 지역의 식민지화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데 필수적 과제이다. 창원의 근대사 연구에 선결해야 할 작업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산과 진해지역은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을 이른 시기에, 가장 직접적이고도 강력하게 받은, 일본제국의 식민도시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식민도시 건설 당시 일본인의 시작에 의해 기록된 문헌자료의 검색과 정리는 지역의 근대사 연구에 있어 더 이상 미루어 둘 수 없는 일임은 자명하다.

『마산번창기』는 1908년(명치 41년)에 발간된 저작으로, 1902년(명치 35년) 『한국안내(韓國案內)』 속의 마산편에서 소개된 소략한 기사와는 달리 한 개인 기록자이자 연구가인 단행본 체재의 형식과 내용을 갖춘, 창원지역 중의 마산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지리지이다. 동일 저자에 의해 보강된 1926년(대정 15년) 『마산항지(馬山港誌)』와 함께 근대 식민도시 마산을 조명하는 데 가장 비중이 크고 내용이 충실한 것으로 평가된다.

저자 스와 부고츠(諏方武骨)는 부친 고슈(翁洲)의 차남으로 태어나 부친의 영향으로 시문에 일찍이 눈을 떴다 한다.

부친은 아이즈와카마츠(會津若松)란 대번의 무가 출신으로 소년 시기 선발되어 에도에 가서 쇼헤고(昌平黌)에서 10년간 수학하고, 귀향한 후 일신관(日新館)의 교수가 되었다. 보신전쟁(戊辰戰爭)에 연루되어 참전했다가 지금의 후쿠시마 현인 아이즈번의 몰락을 보게 된다. 유폐의 고초를 겪은 후 와카마츠 현 양성학교장 겸 예과학과장, 후쿠시마 현 제3사범학교 학감을 역임하고 1888년(명치 21년) 미야기(宮城) 현 센다이(仙台) 시에서 세이신기쥬쿠(聲振義塾) 관사숙을 열고 한문을 교수했다. 동북의 두 석학 중 일인으로 칭해졌다.

저자는 어릴 적부터 부친의 훈도에 따라 영문, 한문, 일문을 배우고 일찍이 지리 역사에 취미를 가졌다 한다. 몰락한 무산 계급이 대만과 조선으로 진출한 사례의 한 전형으로 저자의 이동 경로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저자는 도한하기 전 먼저 대만에서 일정 시간 주유한 뒤 모친을 히로시마(廣島)의 집에서 장사 치루었다. 오카야마(岡山) 출신의 보육원 교사이자 산파 자격증을 가진 부인과 혼인한 것도 이 시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인천에 도착한 다음, 마산에 온 것은 1906년(명치 39년) 3월이었다. 이 해 6월 하순부터 기록을 개시하여 1908년(명치 41년) 9월에 완성한 것이 바로 『마산번창기』이다.

명치 41년 12월 1일 발행일자의 저자 겸 발행자는 스와 부고츠(諏方武骨)란 본명을 밝히고 책의 서언에서는 거동노부(去洞老夫) 스와 쇼오센(諏方松仙)이란 아호와 필명을 사용한다. 별천지(洞天)를 찾는(去) 소나무 아래 신선(松仙) 이름과 사무라이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무골(武骨)이란 이름이 퍽 대조적이다.

후일 『마산항지』에서는 스와 시로(諏方史郞)란 이름을 사용하고 자신을 겸칭할 때는 국사(局史 ; 시로의 눈)라 하기도 하여 역사기록자임을 자임한다. 자신의 집필 공간을 하쿠엔보(白猿坊)라 하여 백수(白首)임을 은연중 드러내는 문사적 기질을 드러내기도 한다.

17년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마산항지』와 『경남사적명승담총(慶南史蹟名勝談叢)』이란 책을 상재하고 그 후 건강이 악화되어 병상에서 「경남사적보유」를 쓰다가 1927년(소화 2년) 2월 8일 타계하였다.

본 『번창기』는 연구자에게 실물을 제공하기 위해 원본을 그대로 후철하고 번역본을 전철하기로 한다. 원본에는 25쪽에 걸친 광고가 게재되어 있어 당시 마산의 사회경제상 일면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광고 연구자들에게 희소식일 것이다.

목차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언

제1장 마산의 대관

제2장 마산의 관공서

제3장 지질 및 기후

제4장 위생 및 의사

제5장 교육기관

제6장 신도 및 종교

제7장 교통

제8장 호구

제9장 경제사정

제10장 마산의 잡록, 여러 근황

마산의 노래

본문 109쪽, 전부(前付) 14쪽, 후부 14쪽으로 전체가 구성되어 있다.

2020년 여름, 창원시정연구원 창원학연구센터 자문위원인 박영주(朴永周) 선생이 일본 내 대학도서관 수장고에서 잠자고 있던 원본을, 출간한지 110여 년 만에 발굴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명치시대의 어문으로 난독의 저술인지라 재일동포 재야사학자이자 교토 소재 국제중고등학교 전 교장 하동길(河東吉) 선생께 번역을 의뢰하였고 쾌히 수락한 번역 작업에 박영주 선생이 각주를 달고 본인이 윤문과 해제를 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창원학연구센터가 기획하고 있는 창원지역 근대문헌자료 번역 작업의 첫 결과물로서 발간함을 밝혀두고자 한다.

2021년 2월 18일

창원시정연구원 창원학연구센터 초빙연구원 한석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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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16. 00:00

창원시 근대건조물 10호, 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 - 4

지난 3월 21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1가 4-17번지의 옛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을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로 결정하였다.

앞선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의 보존책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있다. 그중 근대기 유산은 도시의 형성기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크다. 이 땅을 강점한 일제가 남긴 건물이라도 마찬가지다.

근대건조물로 결정된 뒤 이 건물에 대한 명칭과 건축연도의 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에 산호동 지하련 주택 보전문제에도 관심을 깊이 가졌던 마산YMCA 시민사업위원회는 7월 14일 제22회 시민논단의 주제로 이 문제를 올렸다.

시민논단에서 발제한 내용을 4회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이 글이 마지막이다.

 

<글 순서>

1. 마산의 전기회사 궤적

2. 건축 연도 추정 

3. 건축적 가치

4. 제안 - (이번 글)

 

 

4. 제안

 

3회에 걸쳐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에 대한 글을 포스팅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한다.

 

○ 기왕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로 결정된 만큼 시민의 공유자산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물소유주도 이미 “창원시가 원한다면 시에 매각하겠다는 뜻을 이미 창원시에 통보하였다.”고 한다.

○ 하지만 부지 255평, 건물 1동 43평의 현 규모로는 시민 공유공간으로 많이 부족하다.

○ 이 건물과 동시에 건축된 인접 2동 포함하면 부지 478평, 건물 3동 106평이 되어 여러 가지 폭넓은 가능성이 열린다. ‘마산 근대사 전시관’ 등으로 사용하기에도 매우 적절한 규모가 된다.

○ 하지만 이럴 경우 현재 추진 중인 재개발 사업에 피해가 적지 않다.(아래 그림 중 붉은 색이 재개발구역, 노란색이 본 부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창원시가 재개발 사업승인 과정에서 창의적 인센티브를 제안한다면 방법은 있다.

 

 

재개발조합, 시민, 창원시 3자 모두 Win-Win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해 근대기 마산 흔적의 마지막 유산을 꼭 남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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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9

마산의 관공서-3 □ 마산경찰서-신시 토모에마치(巴町, 대외동) 소재 각국 거류지회 조직과 더불어 각국 경찰 사무를 보기 위해 설치된 것이며 새로 신축할 곳은 마산정차장 앞 철도관리국 소관지를 예정하고 있다. 아마 1909년(..

마산번창기(1908) - 8

제2장 마산의 관공서 - 2 □ 러시아 영사관(露國領事館)-신시 다이마치(臺町) 소재 마산이사청의 구청사를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붉은 벽돌 벽에 유리창이 있는 건물이 나온다. 이것이 러시아 영사관이고 지금은 영사 대리인 한 ..

마산번창기(1908) - 7

제2장 마산의 관공서 - 1 □ 마산이사청(馬山理事廳)-신시(新市) 다이마치(臺町) 소재 언덕 위의 조망이 좋은 데에 있으며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 부산 영사관의 분관으로서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로 하여금 건..

마산번창기(1908) - 6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 4 ■ 마산포 - 2 □ 월영동(月影洞) 신시의 서쪽부터 남쪽 일대를 포함하는 큰 마을이다. 그 일부는 일본의 전관지(專管地)이기 때문에 1908년(명치 41년) 7월 퇴거령으로 인해 서쪽의 산 ..

마산번창기(1908) - 5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 3 ■ 마산포 - 1 신시(新市)의 북쪽 약 2km 거리에 있는 본래의 마산이다.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일본 해군성 수로부가 간행한 조선의 해안, 항로, 도서 등의 지리정보를 망라한 수로지로 동..

마산번창기(1908) - 4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2 ■ 각국 거류지(各國 居留地) 월영동의 일부와 신월동 일부를 쪼개서 이루어진 해변의 신시가(新市街)이며 마산이사청 관내의 중심인 곳이다. 1898년(명치 31년) 2월 21일부 칙재(勅裁)로 개..

마산번창기(1908) - 3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1 한국에서 마산같이 산이 좋고 물이 밝은 데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음양의 영혼인 대기(大氣)가 응어리져서 마산만의 물이 되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빛이 나는 아지랑이 속에 마산항의 ..

마산번창기(1908) - 2

서언 마산의 진상(眞相)을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으로 세상에 알리는 일은 오직 스와교도(諏方去洞) 씨가 편찬한 『마산번창기』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시찰이나 관광 명목으로 수많이 관민에 의한 수기가 잡지, 신문 등에 기술되었건..

마산번창기(1908) - 1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를 포스팅한다. 기록전문가 박영주 선생이 일본의 한 대학도서관에 참자고 있던 이 책을 찾아냈고, 이를 창원시정연구원이 번역 출판하였다.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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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근대건조물 10호, 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 - 3

지난 3월 21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1가 4-17번지의 옛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을 &lsquo;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rsquo;로 결정하였다. 앞선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의 보존책무..

창원시 근대건조물 10호, 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 - 2

지난 3월 21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1가 4-17번지의 옛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을 &lsquo;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rsquo;로 결정하였다. 앞선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의 보존책무..

창원시 근대건조물 10호, 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 - 1

지난 3월 21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1가 4-17번지의 옛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을 &lsquo;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rsquo;로 결정하였다. 앞선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의 보존책무..

우리도 선진국이 되었다는데,,,

&lsquo;선진국에서는...&rsquo; &lsquo;우리도 선진국이 되어야...&rsquo; 등 등 , 오랜 세월 얼마나 들먹이며 얼마나 부러워 했던가, 선&middot;진&middot;국 7월 2일 UNCTAD(유엔무역개..

마산 인공섬(해양신도시)을 에너지자립섬으로

이 글은 최근 경남지역의 세 NGO에서 창원시에 공개적으로 제출한 요청서입니다. 창원시가 개발업체를 공모 중인 마산 앞바다의 인공섬(해양신도시)을 에너지 자립섬으로 만들자는 내용입니다. 마산 인공섬을 에너지자립섬으로 개발 요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