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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3. 00:00

<조선토목사업지>의 마산 상수도

이 글은 1928년에 펴낸 <조선토목사업지>에 기록된 마산의 '상수도' 편이다. 초벌 번역이라 글이 거칠다.

 

마산은 경상남도의 제일 중요한 항구로서 내지 및 연안 항해선박의 중요 기항지이다.

또한 (항구의) 뒷편으로는 마산선과 함게 경남선의 철도가 있어서 해륙의 교통을 대략적으로 갖추고 있어 百貨가 집산되고 상업이 함께 번창하는 지역으로 성장해 나갔으며, 향후 더욱 발전의 기운으로 향해가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이 지역은 예부터 식수가 부족하고, 그 중 특히 마산은 부민(府民)의 태반이 살고 있는 지구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우물이 2~3개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매년 하절기에 이르게 되면 우물물이 모두 고갈되어 주민의 고통은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은 보건상 하루도 등한시 할 수 없는 사태임과 동시에 토지(주로 농토)의 번영을 저애하는 바가 심히 크기 때문에, (마산)府에서는 소화 2년부터 소화 4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사업으로서 국고 및 지방비로부터 보조를 받아 工費 예산 45만圓으로 상수도 부설의 계획을 수립하여 소화 2년 5월 5일 기공하여 동 5년 3월 31일 준공하게 되었다.

다음은 이 책에 실린 마산상수도 관련 그림들이다.

 

 

급수계획

一. 급수예정구역 : 마산부 일원

二. 급수예정인구 : 최대 1일 1인당 0.17입방미터로 하여 총 1만 6천명

三. 급수량 : 최대 1일 2,720 입방미터

 

수도설비

一. 수도양식 : 자연유하식

二. 수원지 : 창원군 차원면 반룡산의 계곡에서 암석을 깨어 만든 석재와 흙을 혼합하여 조성하였고, 제언의 정상부분은 전체길이 73미터, 폭 2.5미터, 敷幅 17.8미터, 제언높이 20.2미터이며 유효수심 13미터의 제언을 축조하였다. 이 곳의 저수량은 38만 3천 입방미터, 또 제언의 중앙부에 내면에는 반경 1.5의 반원형의 취수탑을 설치하였다.

三. 송수관 : 내경(안지름) 3백 밀리미터 관을 사용하였고 전체길이 6천 1백 1미터 남짓

四. 정수장 : 수원지 제언으로부터 거리 6천 52미터의 지점인 마산부 자산동 의 산허리에 설치하고, 양수정․여과지 및 배수지를 설비하였다.

. 양수정 : 鐵筋混凝土造內法(*철근콘크리트공법)으로 폭 1.21미터, 길이 2.71미터, 깊이 2.12미터로 설치하였다.

ロ. 여과지 : 양수정에 인접한 보통혼응토조내법(普通混凝土造內法)으로 길이 21미터, 폭 13미터, 깊이 2.1미터로 하여 4개를 설치하고 유효 여과면적 1천 9십 2 평방미터로 하고, 그에 인접한 여과조정실 2개소를 설치하였다.

ハ. 배수지 : 여과지의 바로 아래에 인접하여 鐵筋混凝土造內法으로 길이 16미터, 폭 12.1미터, 유효수심 3.95미터의 것으로 2개를 연속하여 건축하였다. 여기의 저수량은 1천 4백 53입방미터이다.

五. 배수관 : 내경(안지름) 75밀리미터 내지 300밀리미터관을 사용하여 총 전체길이 1만 1천 7백 74미터 남짓

六. 공비 : 금 45만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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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27. 00:00

<조선토목사업지>의 마산항만

이 글은 1928년에 펴낸 <조선토목사업지>에 기록된 마산의 '항만' 편 번역문이다. 초벌 번역이라 글이 거칠다. 그림은 책의 표지와 목차이다.

 

 

마산항은 경상남도의 중앙 진해만의 가장 안쪽에 있다.

동경 28도 33분, 북위 35도 11분에 위치하며, 동․북․서 세 방향으로는 육지로 둘러 싸여 있어 남쪽으로 항구를 열고 있다. 게다가 항외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섬들이 잔재하여 외해로부터의 파도를 막아 주며, 항내의 수면 면적은 752여 헥타르(2,276,010평)는 항상 잔잔하다.

간만의 차이는 2.22미터(7.33척)으로 수심이 깊어 진정한 천혜의 양항(良港)이다.

본항은 예부터 조선의 남쪽지역에 있는 유수한 항만으로 이용되어 왔고, 고려시대 원종 15년 갑술년 곧 일본의 문영(文永)11년, 충렬왕 7년 신사년 곧 홍안(弘安) 4년의 2역(二役)에서는 정동행영(征東行營)을 합포(현재의 구 마산)에 두었고,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의 근거지로 여기서부터 일본으로 향하여 출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이조시대에 이르러 현종 4년(일본의 靈元 천황의 寬文 3년 德川家綱時代) 이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여 每田 1결에 대하여 가을에는 7말, 봄에는 6말을 상납하도록 하였고, 마산포 지역 내의 일각에 조창을 설치하여 창원군수를 전운사(轉運使)로 겸임하게 하였다.

그로 인해 창원․함안․칠원․창녕․영산․의령․진동․고성․사천․진주․밀양․김해․거제 등 13개 군의 공미(貢米)를 이 지역으로 집적하여 수시로 공매(公賣)하고 경창(京倉)에 금수(金輸?)하는 것으로 되어 감으로써 급격하게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되며, 이에 따라 동성․서성․중성․성산․성호․오산의 6개소를 포섭하는 신마산포를 조성하고 이를 창원항과 공칭하며, 본래의 마산포는 구강이라고 불렀다. 현재의 구마산이 곧 이것이다.

그 후 광무 3년(明治 32년) 5월 1일 군산․성진과 함께 통상항(通商港)으로서 개항하고, 동년 6월 2일 거류지 규칙(제7절 군산항부에 기재된 부분을 참조)이 협정되었고, 다시 광무 6년(明治 35년) 5월 17일 다음과 같이 일본 전용관리 거류지에 관한 계약을 하게 되었다.

 

마산-일본 전용관리 거류지 약정서

제1조 각국의 조계지 외 10리 이내에 있어서 永租, 暫租의 章程에 준하여, 일본 정부가 매수한 지구 및 그 부근을 일본 거류지로 하고 해당 거류지의 위치 및 구역을 별지 도면에 따라 정함.

제2조 거류지내에 있는 도로, 구거는 본래 관청소유에 속한 것으로 이 조약 시행 후에는 제반 시설 유지의 권한은 일본 영사에게 일임함.

제3조 거류지내에 있는, 본 약정서의 조인 당시에, 이미 외국인(일본인 포함)이 소유한 지역이나, 매수하였으나 아직 결제하지 아니한 한국인 소유의 지역은 매수 전에는 종래의 소정 지세를 납부토록 함.

단, 한국인 소유지역은 본 약정서 조인 후 1개년 이내에 일본정부가 그것을 매수할 것이므로 이 매수 전에는 해당 지역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매도나 임대할 수 있음.

제4조 거류지에 있는 한국정부 관유지의 매수 가격은 매 1백제곱미터당 日貨 3元으로 정함. 한국인의 소유지역과 가옥의 매수에 관해서는, 만일 소유자의 신청가격을 일본 영사가 인정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을 경우에는, 한국 감리는 일본 영사와 회동하여 평가인으로서 공평하게 평가해야 함.

제5조 거류지의 지세는 본 약정서 조인일로부터 기산하여 1개년 1백제곱미터당 日貨 20錢으로 정하고 매년 1월 10일 이내에 그 해의 年稅를 지불함.

제6조 거류지내의 미매수지 내에 있는 일반 백성의 무덤을 이장해야할 때는 매 무덤마다 日貨 5元의 이장비를 일본 영사로부터 지급받음.

제7조 거류지에 필요가 있어 그 곳의 해수면을 매립하는 경우에는 미리 한국 監理와 협의를 거침을 요함.

본 약정서는 日韓文으로 각 2통을 작성하여 상호 기명하여 조인하고, 이에 그 확실함을 증빙함.

대일본 명치 35년 5월 17일 특명전권 공사 임권조(林權助)

대한 광무 6년 5월 17일 외부대신 서리 최영하(崔榮夏)

 

신마산포가 개항장으로 되어서 및 본항으로 눈을 모으고 있는 러시아는 빈번히 자국민들을 이주시키고, 그들의 건축물은 점차 즐비해져 성황함을 드러내고 있지만, 일러 전쟁이 일어나 공히 모두 퇴거하였으며, 광무 9년(명치 38년) 10월에는 마산․삼랑진 간의 군용철도가 개통되고, 동년 11월 11일로부터 일반 여객화물의 유임편승(有賃便乘)이 개시되기에 이르렀으며, 내왕하는 일본인이 점점 많아짐에 더해 수출입 화물도 나날이 증진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본항의 항만설비는 구마산에서 옛날 축조와 관련한 조석(粗石)으로 둘러 싸인 소선류(小船溜)가 존재하고 있을 뿐이고, 신마산은 개항 후 간신히 해수면의 일부를 매립하여 그 땅에 우선 부두를 건축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한국재정고문시대에 이른 융희 2년(명치 41년) 사업으로서 공비 예산 1만 1천원(圓)을 계상하고, 다시 융희 4년도(명치 43년)에 1개년도에 한하여 예산 4천 4백 21圓을 추가하지만, 후에 790여圓의 감액을 하여 결국 예산 1만4천 6백 26圓 89錢으로서 예정된 계획을 수행하였다.

곧 예전부터 있던 부두에 대해 전체 길이 46間 5分 이내, 돌단(突端)의 전체길이 5間 5分을 보완수선하여 교대(橋臺)를 설치하고, 거기에 전체길이 72尺 2寸, 폭 5間 및 그 終端 길이 11尺 2寸, 폭 5間의 계단이 있는 목조 잔교(棧橋)를 가설하고, 해안 세관 구내지(構內地)를 간조면(干潮面) 위로 12척 5촌 및 19척의 높이로 땅을 고루었고, 그 지상에 목조 굴건평가아연인파철판즙(掘建平家亞鉛引波鐵板葺, 아연 골함석 박공지붕 건물) 50평의 창고 1동을 건설한 것이외 세관 주위에 철조책을 둘렀으며, 또 세관지서장 관사로 목조 2階 건잔와즙(建棧瓦葺, 박공기와지붕건물) 총 건평 23평 2홉 5작의 1동을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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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1. 00:00

馬山繁昌記(마산번창기) / 1908년 발간

지난 3월 31일 페이스북에 흥미로운 글이 하나 떴다. 창원지역에서 기록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박영주 선생의 글이었다. 112년 전인 1908년에 발간된 『馬山繁昌記(마산번창기)』라는 고서를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반가운 일이라 포스팅한다.

 

<마산번창기 표지>

 

먼저 페이스북에 올린 박영주 선생의 글 전문을 소개한다.

 

개항기 마산 문헌 하나 찾았다

 

오래 전부터 이름 정도만 알고 못 찾았던 자료인데 이번에 드디어 찾았다.

『慶南志稿第一編 馬山繁昌記』. 明治41年, 1908년 마산의 耕浦堂에서 발행한 책으로 저자는 諏方武骨. 일제강점기 마산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문헌인 馬山港誌(1926)의 저자이기도 하다.

책은 광고면 등을 포함해 148면 분량으로 서언, 마산의 대관, 관공서, 지질및기후, 위생및의사, 교육기관, 신도및종교, 교통, 호구, 경제사정, 마산잡록잡황, 마산의 노래 등으로 구성된 종합적인 안내서 성격이다.

1900년대의 마산에 대한 일본 문헌으로 韓国出張復命書(1901), 韓国案内(1902), 韓国水産誌(1908) 등 여러 문헌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것이 있지만 단행본으로는 이 자료가 처음으로 보인다. 지금까지는 馬山と鎮海湾(1911)으로 알려졌었다.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 통감부 설치와 통감 정치, 고종의 강제퇴위와 순종 즉위 등으로 이어지는, 사실상 반(半)식민지 상태였던 당시의 시대상황은 마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한제국의 창원군청이 아니라 통감부의 마산이사청이 실질적인 통치기관이었다.

더구나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번창해 가는 新市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일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또 近刊 書目으로 馬山開港十年史, 馬山名所舊跡誌, 馬山裏面 세 권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계획을 주도한 것으로 보여지는 諏方武骨은 1906년경부터 마산에 정착한 이후 1915년에 朝鮮史談会란 단체를 만들고 朝鮮史談이란 잡지도 내며 활동하다가 1926년에 馬山港誌를 출판했다.

근간할 예정이었던 책들은 아마도 출판되지 못했고 아마도 馬山港誌에 수렴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다음 해에 慶南史蹟名勝談叢이 그의 유고집으로 나왔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항기와 식민지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마산이라는 지역 사회를 좀더 깊이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자료가 추가된 셈이다. 

 

<마산번창기 광고면에 실린 현 월남동 3가에 자리한 인풍당약국과 자산동의 한국요리점 융월. 융월의 광고에는 두 기생의 사진과 함께 하단에 명월, 월선 등 기생 이름을 공개해 놓았다>

 

위의 글을 4월 6일 경남도민일보 최석환 기자가 기사화 했다. 기사 제목은 「개항기 풍경 담은 〈마산번창기〉 발견」.

이 책의 광고 면에는 당시 마산의 약식 지도 외에 약, 요리, 잡화, 여관, 은행, 병원, 신문, 주조, 정미소, 인쇄, 수산회사, 법률사무소, 목재상, 사진관, 산파, 미곡, 담배 등의 업체를 소개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통영의 산업에 대한 광고이다. 통영의 어시장, 여관, 잡화점, 선박회사, 요리점, 약국 등도 이 책 광고 면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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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4. 00:00

120년 전 마산은? - 6

120년 전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6

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하는데 이번이 여섯번 째 마지막이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제8편에 수록되어있다. 1900년경 마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실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著,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發行)

제8편 馬山浦 案內

 

<舊 馬山浦>

각국 거류지를 지나 약 10리 거리의 昌原街道에 있고 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한 곳이다.

戶數는 2,000여戶이며 監理署(감리는 창원군수가 겸임), 경찰서 등이 있고 시가는 해변에 면하여 선박화물의 폭주가 매우 빈번하다. 産物은 미곡, 牛皮, 소금, 魚類, 무명(木綿), 솜(綿) 등이다.

옛날에는 이곳이 일본상인(행상)의 근거지였지만 마산개항에 즈음하여 신마산으로 이전하였다. 지금도 20여 호가 있고 대부분 조선가옥에 기거하고 있다.

상업은 모든 잡화류를 판매하고 중매상인도 아직 거주하는 자가 있다. 유명한 博友商會도 이곳에 있어서 전적으로 군함에 식품을 납품하고 있다.

 

<당시 마산 지도>

 

名所古跡

<馬山城址>

마산항에서 10여 리 북방, 다시 말해 구마산포에 가까운 천주산맥의 언덕에 있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창원부성을 쌓았던 것이다. 지금도 外廓돌담이 남아 있고 정문의 형태도 뚜렷이 남아있다.

<鎭海灣>

마산에서 육로로 30리, 해로로 20리 되는 거리의 남쪽에 있다. 진해만은 천연의 良港으로서 일본의 前松島와 비슷하다. 일찌기 해군의 군항으로 사용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며 러시아 역시 그렇게 바라고 있다.

일본과 러시아가 경쟁하는 곳으로서 일 만 톤 이상의 군함이 자유롭게 정박할 수가 있다.

진해항은 인가 200여 호의 어촌으로서 콩, 쌀 등을 産出하고 거제도에 이르는 船便이 있다. 한국을 찾은 여행객들이 灣內의 기묘한 경치를 탐낼 정도다.

<호텔>

각국거류지 남단에 마산포에서 유일한 러시아 호텔이 있다. 해변에 면하여 조망이 좋은 위치에 있다.

<掘江旅館>

思君亭으로도 불리는 마산의 유일한 여관으로 요리점도 겸하고 있다. 객실은 많지 않으나 깨끗하고 調理나 손님접대를 잘하여 호평을 받고 있다.

<유렵지>

마산부근 일대는 鳥類가 많아 겨울에 총을 지니고 해안을 따라서 돌아다니면 총 한발에 새 열 마리 이상 잡는 일이 많다고들 한다(따라서 한국에서 날짐승 고기가 가장 싼 곳이 마산으로 오리 한 마리에 12전이라고 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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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7. 00:00

120년 전 마산은? - 5

120년 전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5

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하는데 이번이 다섯번 째이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제8편에 수록되어있다. 1900년경 마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실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著,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發行)

제8편 馬山浦 案內

 

居留地 雜組

<官衙>

일본영사관이 있어 통상 및 彼我의 교섭사무외 경범죄 이하의 재판사무를 취급하고 있으며 현재의 領事는 阪田重次郞이다. 그는 처음에 부산영사관 마산분관이 마산영사관으로 개칭될 때 부임하였다. 부속 경찰서는 마산영사관內에 있으며 사법행정의 경찰업무를 취급하며 서장은 警部 境益太郞이다.

<郵便局>

영사관의 아래 큰길에 있으며 현재 공사 중인데 늦어도 올해 8-9월경까지 완공될 예정이라 한다. 현재는 셋집에서 업무를 보고있다. 보통우편외 환어음, 소포, 저금 등의 사무를 취급하고 국장은 阪田領事가 겸직한다.

 

<참고자료 ; 준공 이후의 우편국 전경>

 

<各國居留地會>

모든 행정을 관장하는 곳으로서 각국영사, 한국지방관, 즉 감리 및 地主대표자에 의하여 의원이 조직되고 현재 7명의 의원이 있으며 의장은 일본영사가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그 사무는 경찰, 토목, 위생, 도로, 하수, 소방 등을 주로 하고 경찰사무는 편의상 일본경찰에 위임되었다.

<敎育, 宗敎>

일본인 학교는 없고 한국인을 교육시키는 일본학교가 구마산포에 있다. 재학생 66명.

淨土宗 本山에서는 이번에 포교장을 개시하는 한편, 정식 소학교도 개설하고 在 釜山別院 三隅田持門師로 하여금 그 책임을 맡긴다고 준비중이다.

<居留民會>

일본인의 공공기관으로서 거류민회가 있으며 理事는 仙石勘九郞이다.

<渡航者注意事項>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은 상륙 3일 이내에 書面으로 居留地 民會를 경유하여 영사관에 신고하고 거류지를 떠나는 자도 이와 같다. 단 滯留者(3일 이상 滯在하는 자)는 1 개월 분 頭課金으로 10전을 납부할 것.

<海關>

한국정부의 세관서는 각국거류지 중앙 해안에 있다.

<漁業組合>

朝鮮海通漁組合聯合會 馬山支部가 있다.

<銀行>

지금까지 금융기관이 없었으므로 상업발달상 유일한 결점으로 지적된다. 실제로 이처럼 금융시설이 없는 것이 마산항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마산의 일반 상인들까지 말하고 있다.

<農業>

경작지에 자갈 등은 적고 그 지질이 비옥해서 아주 쌀 농사에 적합하다. 종자는 주로 일본 벼 씨를 사용한다.

<韓國 郵電>

거류지 조계로부터 구마산포에 이르는 도로상에 한국 우체사, 電報司가 있어 일본인의 전보는 이 電報司에 의뢰한다. 한국 내의 각지는 물론 일본과의 통신도 취급하고 있다.

<海運>

해운권의 성장과 무역의 성쇠와는 가장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일로서 해운이 발달한 곳에서는 무역도 발달하고 해운이 부진한 곳에서는 무역도 부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운을 외국무역의 가장 큰 요소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마산과 각 항 간 또한 일본과의 해운을 볼 때 대판상선회사, 대한협동郵船회사, 부산八頭司組의 정기항해가 있으며 그 외 帆船의 왕복이 빈번하다.

대판상선이 당 항에 寄港하게 된 것은 1901년 4월로서 그 航回數 및 船名, 톤數는 다음과 같다.

*대판상선회사

白川丸(대판-인천); 566톤(매16일에 1회 兩地를 출발함)

寄港地; 神戶, 下關, 釜山, 馬山, 木浦, 群山, 仁川

*大韓協同郵船會社(韓國汽船)의 仁川․鏡城線

顯益號; 444톤(매월 각1회 程度)

蒼龍號; 403톤(매월 각1회 程度)

寄港地; 군산, 목포, 제주, 마산, 부산, 포항, 원산, 西湖, 前津, 新浦, 新昌, 遮湖, 성 진, 明川, 鏡城

*釜山八頭司 回漕部취급 汽船

第2玉吉丸(和歌浦丸이라고도 부른다. 부산-마산포); 매월 10회(항해시간은 5-6시간)

운임; 1등-2圓50錢. 2등-1圓50錢. 3등-1圓(한국인은 3등에 한해 500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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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0. 00:00

120년 전 마산은? - 4

120년 전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하는데 이번이 네번 째이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제8편에 수록되어있다. 1900년경 마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실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韓國案內』겉표지와 속표지>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著,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發行)

제8편 馬山浦 案內

 

<諸 物價>

일본인의 諸 물가와 노동임금은 다음과 같다

이발료 - 20錢

여자 미용료 - 10錢

숙박료(1박2식) - 80전

점심식사 - 40전

선원 임금(1인) - 10전

手荷物 - 3전

藝妓線香(1시간) - 45전

고용인 (仕切) - 2圓

목수, 석공, 미장(日給) - 1원 20전

일본인 중개사(一日) - 80전 가량

한국인 일급 - 200文이내

운반비; 마산에서 부산까지 쌀, 콩 운반비(1石 당) - 24전(상륙까지)

 

<營業種類>

일본인 영업구분은 다음과 같다(1902년1월말 조사)

 

무역상 1

仲買商 6, 겸직4

藥種商 5

잡화 27, 겸직 6

술 소매 2, 겸직 1

陶器 겸직5

일상잡화 겸직 1

주물상 겸직 1

옷가게 3, 겸직 2

부엌잡화(荒物) 겸직1

洋酒 겸직 2

담배 겸직4

과자商 3, 겸직2

설탕商 겸직 2

석유상 겸직1

醬油商 겸직 2

의사 2

問屋 1, 겸직1

회사 2

여인숙 겸직 1

야채상 겸직 1

두부 1

요리점 1

떡집 2

푸줏간 1

세탁업 1

일고(日雇) 5

藝妓 1

선원 겸직 1

목수 15

석공 6

미장 2, 겸직 1

鐵力細工 1

대장간 2

이발관 1

미용실 1

된장 겸직 2

일용노동자 22

土木請負 1

精米商 겸 1

식빵 1

大弓 겸직 1

페인트칠 1

酌婦 3

船頭 3

鑛業 2

러시아인은 호텔업 1, 잡화상 1

중국인은 잡화상 7, 雜貨行商 3

독일인은 선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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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13. 00:00

120년 전 마산은? - 3

120년 전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3

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하는데 이번이 세번 째이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제8편에 수록되어있다. 1900년경 마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실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著,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發行)

제8편 馬山浦 案內

<商業>

마산浦의 수출입 무역은 1900년에 총액 241,789圓이며, 그 중 수출액이 87,024圓, 수입액 154,765원이다. 이 가운데 외국무역에 관한 수출 6,203원, 수입 13,185원, 합계19,388원이며 연안 무역액이 222,401원인데 그 중 수출액 89,821원, 수입액 132,580원이다.

이 밖에 한국선박에 의하여 마산 부산간 운반되는 화물 량도 적다고 할 수 없다. 그 금액을 개략 산정하면 13-14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것을 월별로 정리하여 무역의 전망을 예측하려 한다.

 

월 별

수 출 액

수 입 액

1900년 1월

16,037円

15,464円

2월

1,677

8,344

3월

862

5,284

4월

724

7,905

5월

746

5,575

6월

700

5,910

7월

3,594

8,035

8월

2,612

7,521

9월

1,048

20,562

10월

8,389

15,516

11월

16,849

27,760

12월

33,785

26,899

합계

87,024

154,765

 

1901년 상반기(1월부터 6월까지) 무역 총액 141,675원 중 수출 54,771원, 수입 86,904원인데 그 중에서 외국무역 수출입합계는 18,226圓, 연안무역합계 123,449원이다.

이것은 전년 상반기와 비교하면 두 배 이상의 증가를 보이는 것이다.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월별

1901년도 상반기 수출액

1900년도 상반기 수출액

증가

1월

35,863円

31,501円

4,632円

2월

25,206

10,020

15,186

3월

37,185

6,147

31,038

4월

17,648

8,642

9,024

5월

12,830

6,321

6,509

6월

12,943

6,601

6,342

합계

141,675

69,214

72,461

 

수출품; 쌀, 콩, 동광(銅鑛), 사금(砂金), 소가죽, 솜, 등을 주로 하고 종이, 보리, 해삼, 말린정 어리, 吳倍子(藥材)등이 그 다음이다.

 

월별

1901년도 상반기 수출액

1900년도 상반기 수출액

증가

1월

35,863円

31,501円

4,632円

2월

25,206

10,020

15,186

3월

37,185

6,147

31,038

4월

17,648

8,642

9,024

5월

12,830

6,321

6,509

6월

12,943

6,601

6,342

합계

141,675

69,214

72,461

 

수입품 ; 방적사(紡績絲), 옥양목, 석유, 整製한 솜, 솜, 명태, 누룩, 성냥, 철제품 등이다.

수입중요품 ; * 紡績糸는 鐘淵방적회사의 제품이 많고 鐘표 및 平野방적회사의 제사(製糸) 가 인기가 있다. 전자는 한인사이에 호평을 받아 판로가 좋은 편이다.

 

鐘淵방적회사 효고(兵庫) 공장 

 

* 옥양목은 매표, 토끼표, 군인표 등을 일본에서 온 부유한 농민들이 아주 좋아 한다. 칠원, 진주이북 지방뿐만 아니라 전라도 부근의 먼 곳에서까지 이것을 사기 위해 오는 사람이 있다.

* 석유는 미국산 上松표가 마산포에서 독점販賣하려 한다. 종래부터 阪庫회사 가 판매하는 越后油(참고; 越後는 일본의 지방명)의 수입을 안한 것은 아니 지만 품질이 떨어져 평판이 좋지 않다.

* 성냥은 硫黃성냥과 안전성냥의 두 종류가 있다. 유황성냥은 기린표 및 히로시마에서 생산하는 삼각표가 있다. 삼각표는 품질은 좋으나 값이 비싸서 기린표의 값도 싸고 비교적 품질도 좋은 점에 눌리고 있다. 안전성냥은 사슴표, 코끼리표, 원숭이표가 있다. 종래에는 각종 모두 당 항 시장에서 잘 팔렸으나 근래 그 품질이 조악하여지는 기미가 있는 데다 기린표가 불이 잘 일고 내용 이 풍부하여 좋은 상품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

* 술은 일본 酒를 수입하는 사람이 여러 명 있으며 반 년 간의 수입액 평균 은 4,400여 円에 달한다. 재빠른 부산상인은 일단 마산으로 수입하여 일반세 관 수속을 거친 다음 연안漕輸品으로서 이것을 다시 부산에 재수출하여 동 거류지에서 요구되는 수수료를 면제받는 계책으로 마산포 부근 및 진해만, 거제도 방면에 出漁하는 일본어부의 飮料酒가 당 항의 술상인 손을 거쳐서 공급되는 일이 적지 않다.

* 러시아, 중국 상인의 상업에 있어서는 아직 특기할 사항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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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6. 00:00

120년 전 마산은? - 2

120년 전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2

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하는데 이번이 두번 째이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제8편에 수록되어있다. 1900년경 마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실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당시(1900~1901) 신마산 전경 / 이 사진은 1905년 뉴욕(and런던)에서 출판된 <The Re-Shaping of the Far East, Vol. 2, by B. L. Putnam Weale>에 수록된 것으로 이 책은 forgottenbooks.com에서 무료 열람할 수 있다. Wiki에서 검색해 보면 이 책을 쓴 사람은 영국인으로 20세기 초 중국 해관청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5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그의 책 중에선 The Fight for the Republic in China 라는 책이 유명하다고 한다.(사진 및 설명은 기록전문가 박영주 선생 제공)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著,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發行)

제8편 馬山浦 案內

 

<總論>

마산포는 경상남도의 남쪽에 위치하고 창원군 관할에 속하며 부산이 140여 리, 海路로는 40마일 거리로 마산포 남안(南岸)에 있고 동경 128‘ 50“ 북위 35’ 13” 66에 위치하고 있다.

<港灣>

마산만은 남쪽으로부터 진입하며 남북이 길고 동서가 좁으며 灣의 입구로부터 약 30리이고 거류지부근 일대는 수심이 얕아서 평균 5尋(발)으로서 겨우 천 톤 이내의 배가 정박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약 10리쯤 앞으로 나가면 군함 같은 큰 배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가 있고 일본 함대를 비롯한 러시아 전함이 흔히 닻을 내린다. 유명한 진해만은 마산만의 外灣이다.

<居留地>

烽禹(火)山 동쪽 기슭과 마산만에 면한 良港, 즉 마산거류지는 1899년 5월1일에 군산, 성진과 함께 개항하여 각국거류지. 日本專管居留地. 露國專管居留地로 나누어져 있는데 현재 각국거류지를 제외한 조계는 토지의 구획을 하지 않고 있다.

각국거류지는 옛날 월영읍(里)으로서 서쪽에 높은 산봉우리를 등지고 동쪽은 마산만에 접하며 북쪽으로 구마산을 지나 창원으로 가는 도로와 남쪽으로 진주(경상남도 관찰부 소재지이며 마산에서 약110리 거리다)로 가는 도로가 있다.

면적 15만평으로 처음 개항되었을 때 부산영사관 마산분관을 두었다가 1900년 4월1일 본관(마산영사관)으로 개칭되었다. 현재의 영사관은 그 후 신축하여 시내 거리가 한눈에 드는 절경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러시아 영사관 또한 그 왼쪽의 한 단 낮은 곳에 있는데 모두 건축물로서 볼만한 가치가 있으며 영국영사관도 개설할 것이라고 한다. 영국영사관의 부지는 일본영사관 뒷면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전관거류지는 각국거류지의 남쪽 자복포에 있는데 잔솔밭 언덕에 둘러 쌓인 해안에 접한 30여 만평으로 아직 건물 등의 시설은 하지 않는다. 러시아 전관거류지도 역시 해안에 접하여 있으며 한 쪽 면이 波狀地이고 온통 구릉지로서 솔밭이 많으며 일본거류지에 접하여 남쪽에 이르는 이곳을 율구미라고 부른다. 면적 30만평이며 가옥은 거의 없다.

<市街>

각국거류지에 거주하는 사람은 거의가 일본인이고 가끔 중국인, 러시아인, 독일인 등이 체류하고 있으며 이들은 거류지 남쪽 모퉁이 쪽의 러시아 영사관 부근에 살고 있다. 거류지의 총 호수는 50호에 불과하고 가옥도 조밀하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로서 간신히 처마를 이어서 시가의 모양을 갖춘 것이 10여 호 뿐이다. 참으로 느리긴 하지만 발전하는 모습은 보인다.

도로는 근래 새롭게 개설하기 시작했다. 도로의 폭은 3間(1間은 1.8m)에서 8間이고 남북이 길어 거의 20여丁(町, 109.1m)에 이르고 동서는 좁아 7-8丁에 불과하며 舊 馬山浦와의 교통이 빈번하여 상거래가 점점 발달할 기미를 보인다.

<戶口>

일본인 거류민 중에는 山口縣에서 온 사람이 가장 많고 長崎縣과 大分縣이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 1899년 말, 즉 개항한 해는 戶數 35호에 인구103명이었는데 올해(1902년) 1월은 戶數 80호에 인구 259명으로서 그 중 남자가 160명, 여자 99명이다. 단 이 중에는 구마산에 점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100여명이고 戶數는 20여戶이다.

중국인은 28명, 러시아인 12명, 독일인은 3인이다.

<氣候>

기온은 부산에 비해서 큰 차이가 없다고 하나 극한기에는 그 度가 약간 다르다. 바람이 적고 강설량도 적다. 灣內는 북풍을 제외하고는 波浪이 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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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30. 00:00

120년 전 마산은? - 1

120년 전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1

당시 마산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의 『韓國案內(한국안내)』를 여섯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이 책에서 마산은 「마산포 안내」라는 제목으로 제8편에 수록되어있다. 1900년경 마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실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韓國案內』겉표지와 속표지

 

다음은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정리해 놓은 『한국안내』에 대한 설명이다. 약간의 첨삭이 있었다.

[정의]    개항기 조선을 소개할 목적으로 도쿄[東京]에서 간행한 책.

[편찬/간행 경위]   1876년 조일 수호 조규의 체결 이후 조선으로 여행하거나 이주하는 일본인이 급증하였는데, 이들 본토의 일본인들에게 조선에 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해 줌으로써 일본인들의 조선 방문을 유도하는 한편 조선에서의 정착과 경제 활동에 도움을 주고자 『한국 안내(韓國案內)』를 간행한 책이다. 저자인 가쓰기 겐타로(香月源太郞, 향월원태랑)는 『관문시보(關門時報)』의 통신원으로 당시 부산에 주재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일본어로 기록되어 일본 도쿄의 청목숭산당(靑木嵩山堂)에서 1902년 9월 간행하였다.

[형태]   4·6판 총 476쪽의 책자로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한국 안내』는 총론과 9개의 장,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론에서는 지세와 행정, 지방제(地方制), 호구, 농업 등 조선의 전반적인 실정이 소개되어 있다. 경성, 평양, 부산 등 조선 내 개항장과 개시장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와 당시의 사회·경제적 실상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진출하여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이들 지역에 대한 실측도가 첨부되어 있어 당시의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부록에서는 철도와 기선에 관한 정보를 비롯하여 한일 조약(韓日條約)과 해관 세목(海關稅目), 조선 약어(朝鮮略語) 등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진출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조선에서 영업하고 있는 일본인 회사와 은행, 상점 등에 대한 안내도 제공되고 있어 당시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인의 실상을 살펴보는 데에도 유용하다.

[의의와 평가]   개항기 조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안내서 성격의 자료는 많으나 『한국 안내』는 특정 지역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다음은 이 책의 목차이다.

総論

第一編 京城案内

第二編 仁川案内

第三編 鎮南浦案内

第四編 平壌案内

第五編 元山案内

第六編 群山案内

第七編 木浦案内

第八編 馬山浦案内

第九編 釜山案内

附録

 

제8편 ‘마산포 안내’의 시작은 ‘馬山浦附近地圖(마산포부근지도)’로부터 전개된다. 다음 지도이다.

 

 

상세한 도면은 아니지만 개항 초기 마산과 주변의 상황을 알 수 있다.

마산포 사건으로 유명한 율구미(栗九味)의 노국전관거류지(露國專管居留地)와 자복포의 일본전관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가 점선으로 표기되어 당시의 정황을 짐작케 해준다.

각국거류지․마산포․구(舊) 성적(城跡, 현 용마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것임)이 표기되어 있다.

마산포에서 부산으로 가는 도로는 팔용산 아래 봉암동을 거쳐 현재의 봉암교(당시는 다리가 없었음) 부근을 통과하여 진해 쪽으로 이어 지고 있다. 이 도로는 양덕동 부근에서 창원으로 가는 도로와 나누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창원공업단지가 있는 곳까지 바다였다는 것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지도 상부에 별도로「馬山浦各國居留地市街圖」란 제목의 조계지 확대도면이 있다. 여기에는 조계지 내에서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조성된 도로가 표기되어 있으며 북쪽 일부 도로, 즉 예전의 마산극장 부근에 있는 도로는 매립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관장관택(海關長官宅)과 우편국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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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6. 3. 00:00

등록문화재 제198호 '옛 마산헌병분견대'의 건립연대 오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52 (월남동3가 11)에 소재한 등록문화재 제198호 '옛 마산헌병분견대' 건물에 대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의]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남동에 있는 옛 일본군 헌병 분견대 건물.

[개설] 구 마산 헌병 분견대는 옛 일본군 헌병 분견대 건물로, 일제 강점기 중반인 1926년에 붉은 벽돌로 지었다. 일본 군대의 마산 진출은 1905년 5월 마산선(馬山線) 철도가 건설될 때 시작되었다. 1909년 12월에 대구 주둔 일본군 헌병 분견소가 신마산에 설립되었고, 3·1 운동 후인 1920년에 이르러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어 경찰이 치안을 맡도록 했다.

1921년에 지금의 마산 중부 경찰서 자리에 있던 헌병 분견대 건물을 증축해 마산 경찰서로 사용하게 되면서 이 건물을 경찰에게 내어 주고 1926년에 지금 자리에 헌병 분견대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했다. 신축 시 대지가 넓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폭 축소되어 건물 주위로 한정되어 있다. 건물 인근에는 분견소장 관사(官舍)가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위치] 구 마산 헌병 분견대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52[월남동 3가 11]에 있다. 남해 고속 도로 서마산 나들목으로 진입하여 마산회원구를 거쳐 국립 3·15 민주 묘지 방면으로 3·15대로[국도 2호선]를 따라 내려가다 3·15 의거 탑과 마산합포구청을 지나 경남 대학교 방면으로 약 13㎞ 정도 이동하면 도착한다.

[변천] 구 마산 헌병 분견대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마산 지역 독립 운동가들이 잡혀와 고초를 겪었던 근대사의 질곡을 보여 주는 역사의 현장으로 일제의 탄압과 무단 통치를 상징한다. 1945년 광복 후 군 정보기관인 옛 보안 사령부[현 국군 기무 사령부]의 마산 파견대가 ‘해양 공사’라는 간판을 달고 이 건물을 사용하면서 민주화를 주장하는 인사들을 사찰했던 곳이기도 했다. 1990년에 보안 사령부가 폐지되고 군 정보 요원들이 철수하면서 건물만 남게 되었으며, 그 후 기무사 출신 퇴역 군인들의 친목 단체인 ‘충호회 경남 지부’와 보훈 자녀 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주변에는 상가가 밀집해 있고, 한 블록 뒤에는 저층 주택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택지 외곽에는 중고층 높이의 공동주택 단지가 위치하고 있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마산항 및 지금은 폐지된 된 마산항역이 자리 잡고 있다. 2005년 9월 14일 등록 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구 마산 헌병 분견대는 벽돌 조적조 건물로 지상 1층, 지하 1층의 규모이고, 연면적은 175.21㎡이다. 건물의 정면 중앙에 놓인 현관 출입 부를 중심으로 양측에 3개씩의 세로 창을 대칭으로 배치했다. 외벽에는 회흑색 벽돌을 사용하여 다섯 줄의 수평 띠를 둘렀는데, 이는 단조로운 벽면을 분할하여 수평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붉은 벽돌의 물성과 세로로 긴 창은 일제의 통치 보조 기관이었던 헌병대의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는 요소이나 벽면에 넣은 여러 줄의 수평 띠는 이를 다소 완화하는 어휘로 사용되었다. 건물 내부는 가운데 복도를 둔 중복도 형식으로 되어 있었으며, 현재의 출입부 우측편의 사무장실 끝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관 출입부와 창의 위쪽의 인방은 평아치에 가까운 약한 곡률의 아치 형태로 만들었으며, 창 하부의 흰색의 창대는 외벽 밖으로 약간 돌출되어 있다. 아치형 창 상인방의 중앙에는 사다리 모양의 흰색 석재를 끼워 넣어 창의 형태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벽돌로 이루어진 외벽은 길이쌓기와 마구리쌓기를 번갈아 가며 쌓는 영식 쌓기 방식으로 시공한 것이다.

지붕은 단정한 형태의 우진각 지붕으로, 목조 트러스 위에 일식 기와를 덮었다. 정면 현관 출입 부 상부에는 본래 작은 삼각형의 박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철거되었다. 지면에서 4단의 계단을 올라온 지점에 1층 바닥이 있으며, 그 하부는 지하층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건물 우측면의 대지가 좌측보다 낮아 지하층의 우측면은 외부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현황] 2008년에 지붕을 해체하여 수리한 후 최근 건물의 원형 복원을 위한 수리를 했다. 보수 전 건물의 창은 본래 목제 오르내리창이었으나 미서기창으로 바뀌었다. 고증과 외벽에 남아 있는 흔적을 고려할 때 건물의 우측면에는 지하층으로 통하는 복도각과 원형창이 시설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일제가 마산에 헌병을 파견하여 치안을 확보함과 동시에 독립 운동가를 탄압했던 역사적인 건물이다. 일제의 강권 무력 통치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당시 외래 건축의 영향을 받아건축된 서양식 건축이라는데 역사적·건축사적 가치가 있다.

 

다음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등록문화재 제198호 구 마산헌병분견대'에 대한 설명 중 일부다.

1926년 건립된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당시 잔악한 일본의 대명사였던 헌병대가 민중을 억압하고 독립투사들에게 가혹 행위를 자행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벽면 전체에 돌림띠를 둘러 장식하고 수직의 긴 창을 반복적으로 배치하는 등 관공서 건축물로서의 권위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마산헌병 분견대는 1905년 일식의원 건물을 빌어 사용하다가 1909년 12월 2일, 관할이 대구로 옮겨지면서 현 소재지로 이관하여 사무를 개시하였다. 현재의 벽돌조 건물은 1926년에 신축되었으며, 당시 근무인원은 8명이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두 공식 기록에서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1926년으로 확정하고 있다.

이 포스팅은 그에 대한 글이다.

 

필자가 아는 한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가장 먼저 추정한 이는 한상술 씨다.

한상술 씨는 2000년 「마산의 근대건축에 관한 연구」라는 경남대학교 석사논문 54쪽에서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1926년이라고 밝혔다. 

한 씨가 이 논문에서 각주를 달아 근거로 제시한 문헌은 일본인 스와 시로우(諏方史郞, 추방사랑)가 쓴 『마산항지』(1926년) 155쪽이었다.

한 씨가 인용한 『마산항지』 155쪽 '마산헌병분견소' 항목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간략한 번역문도 함께 올린다.

 

馬山憲兵分遣所

本町四丁目に在り、明治三十八年中晉州より派遣せられ、現都橋畔にて水上医院なる建物を借充し、其その後管轄は大邱に移り遂ついに馬山憲兵分隊となり現建物は此この時、建築せられしものにて分遣所の建物として比較的広大なるは夫それ之こか為ためなり、幾干もなくして分隊は鎭海に移り建物は分遣所に於て其の儘そのまま之これを使用し別室に郷軍馬山分会事務所を借設せり、本町五丁目角に分遣所長官舎の新築あり、現時の所長は曺長片桐文三氏なり。

마산헌병분견소

본정 4정목(현 월남동 3가)에 있다. 1905년 진주에서 파견되어, 현 중앙동 다리 근처 수상의원 건물을 임대해서 사용하였다. 그 후 관할이 대구로 이관되어 마산헌병분대가 된 현 건물은 그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분견소 건물로서는 비교적 광대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얼마 후 분대는 진해로 옮겨가고 건물은 분견소에서 그대로 사용하였다. 별실에 향군마산분회사무소가 임대 사용하고, 본정 5정목 모퉁이에 분견소장 관사를 신축하였다. 현재 소장은 상사(曺長) 가다키리 분조(片桐文三. 편동문삼) 씨다.

 

그런데 내용을 아무리 봐도 이 글에서는 건물의 건립연도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무슨 연유인지 한 씨는 이 부분을 인용하며 1926년으로 확정하였다.

한상술 씨가 논문에서 밝힌 건립연도 1926년은 이후 여러 후속연구에서 인용되었다.

필자의 글에서도 별다른 확인 없이 그대로 인용하였다. 필자 뿐 아니라 이런 저런 문헌 여러 곳에서 인용되었고, 강의 자료로도 활용되었다.

이 글 첫머리에서 소개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과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등록문화재 제198호 구 마산헌병분견대'에 대한 설명문에서도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1926년으로 소개하고 있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두 공식기록의 건립연도 역시 한상술 씨의 논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최근 이 건물의 건립연도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나왔다.

도시 건축의 역사를 탐구하고 있는 신삼호 건축사가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1912년이라고 했다.

 

신삼호 건축사가 제시한 자료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지도를 소개하며 이 건물의 건립연도에 대한 의견을 밝힌다.

 

1) ‘조선주차군경리부’에서 1914년 발간한 『조선주차군 영구병영, 관아 및 숙사건축 경과개요』에 의하면 마산헌병분견대 건물은 명치45년 즉 1912년 건립되었다.

이 문건의 ‘마산헌병분대청사 및 부속건물’ 항목을 보면 마산헌병분견대 건물은 ‘1912년 2월에 기공하여 같은 해 7월에 준공하였다'고 적혀 있다.

축척 1/300 ‘마산헌병분대배치도’까지 첨부(아래 그림)되어 있고, 아래에서 보듯이 도면 내용도 실재하는 건물과 동일하고 정확하다.

 

<배치도>
<평면도>
<정면도>

 

2) 1913년 마산부가 발간한 『마산부세일람』의 '마산헌병분대' 편에도 이와 관련한 기록이 있다.

'1909년(명치42년) 12월 2일 마산 본정 3정목(현 월남동 3가)에 대구헌병분대분견소로서 설치되어 1910년 7월에 편재개정의 결과 마산분대로 개칭되어 김해, 웅천, 진해, 진동, 배둔역, 고성, 장목포의 7분견소를 관할하고 있으며 지금의 청사는 1912년(명치45년) 7월에 낙성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발행한 1/10,000 지도 「마산」 에서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 지도를 확대(아래 그림)해 보면 '헌병분견소'라고 표기된 건물이 정확히 그려져 있다. 위치도 정확하고 건물의 배치형태도  『조선주차군 영구병영, 관아 및 숙사건축 경과개요』의 ‘마산헌병분대청사및부속건물’에 첨부된 축척 1/300 ‘마산헌병분대배치도’의 도면과 동일하다.

 

 

이 세 자료, 즉 1914년 조선주차군경리부에서 발간한 『조선주차군 영구병영, 관아 및 숙사건축 경과개요』 기록과 1913년 마산부가 발간한 『마산부세일람』의 내용, 그리고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발행한 지도 「마산」 등이 이 건물 건립연도가 1912년임을 말하고 있다.

도 「마산」은 1912년이라고 확정 짓기보다는 1916년 이전에 지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적어도 건립연도가 1926년은 아님은 확실히 보여준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등록문화제 제198호 구 마산헌병분견대의 건립연도는 1926년이 아니라 1912년로 추정된다.

다른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 자료만으로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건립연도는 재고되어야 하고 이에 대해 다시 정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법적으로 지위를 보장 받는 '등록문화재 제198호'의 건립연도에 대한 문제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사과드린다.

논문에 있는 내용이라고 해서 사실관계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것은 온전히 제 잘못이다. 잘못된 글을 읽은 모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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