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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588

마산항지(1926년) - 61 - 곤권(坤卷) / 제1장 개황 일반 마산항지 곤권(坤卷) 제1장 개황 일반 마산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하다. 천지건곤의 영기가 응어리진 무학산을 북에 이고, 수려한 마산만을 남에 안고, 비옥한 지질과 풍부한 맑은 샘 그리고 온화한 날시는 조선 제일을 자랑한다. 신선한 어패류, 맛 나는 소채, 감미로운 창원 쌀, 어느 것이든 저절로 군침이 난다. 봄에는 나물 캐러 가고 벚꽃 밑에서 좋은 술에 취하며, 여름에는 해수욕이나 소풍으로 피서하며 사는 맛을 만끽하고, 가을에는 밝은 달밑에서 악기를 튕기며 노래도 읊고 멋지게 지낸다. 겨울에는 삼한사온이란 날씨 밑에 펼쳐지는 우리의 행복이 그 얼마나 많은가.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 보호기관이 있으므로 가능하다는 점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산항.. 2023. 8. 21.
마산항지(1926년) - 60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38. 생각나는 사람들 천지는 만물의 여인숙이며 시간은 영원한 손님이라 함은 결코 당나라 사람의 잠꼬대가 아니다. 소위 생리적인 과학, 자연의 추세는 인력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노릇, 수백억 년이란 셀 수 없는 천지에 태어나 백 세 내외의 생명을 사는 우리. 속세에서 여러 가지 제 욕심을 마구 채우려는 자, 우국지사를 자임해 청빈에 안주하는 자, 혹은 자본가로 돈을 출자하지 않고 노동자를 괴롭히는 자, 정의를 저버리고 인도(人道)를 가소로이 여기는 자, 관리(官吏)를 명예직으로 오해하는 자, 관공리에 머리 숙이는 것을 천분(天分)으로 잘못 아는 자 등의 세태는 온갖 모습으로 그 끝이 없으나 살아있는 시간이란 그 헤아릴 수 없는 여원에 비하면 한 거품도 되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이리라. 우리 동포가 개항.. 2023. 8. 14.
마산항지(1926년) - 59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36. 제4회 민회의원 선거 조선은 이미 우리 제국의 판도에 들어왔는데 거류민단제는 종래부터의 관계상 아직 철폐되지 않아 명치 45년(1912) 3월 2일 제4회 민회의원 선거회를 개최했다. 민단제의 철폐를 목전에 두고 있어서 입후보자의 열기는 별로 오르지 않았다. 특히 마산포야말로 별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신마산 방면은 날로 그 호수와 인구가 줄어들어 한적해졌으며 전년까지 16명이던 의원수도 전처럼 12명으로 감소되어 선거전은 심항 경쟁 없이 치러졌고 당선자는 다음과 같다. 신마산 방면 ;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오카 요이치(岡庸一), 오키타 토시타로(沖田敏太郞), 나카지마 오리조(中島織三), 마츠모토 다조(松本多藏), 사토 토요스케(佐藤豊介), 미야케 요시로(三宅吉郞) 마산포방면 ; 마츠바라 하야조.. 2023. 8. 7.
마산항지(1926년) - 58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34. 마산항의 폐쇄 전년부터 착수한 진해의 군항 건설은 거의 완성에 가까워지고 또한 중앙에서 방사선식으로 뻗을 8대 가로가 구획되어 진해 시가지도 그 토지의 대부도 거의 완료되었다. 동양에 자랑할 만한 시가지가 출현한 것은 명치 42년(1909) 여름 이후의 현상이다. 이 때문에 진해에서 살기를 원하여 내지에서 오는 이주자는 물론 조선 곳곳에서 오려는 자들은 진해의 건축이 완성될 것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마산에서 살게 된다. 명치 43년(1910) 말에 이르는 1년 반 정도의 기간은 마산개항 이래 전성기로서 한때 호수가 3천, 인구가 7천이라 전해졌다. 이들은 점차 진해로 이주해 갔을 뿐더러 자유항으로서의 마산은 명치 43년(1910) 12월 말로 폐쇄되어 외국선은 물론 우리 국적선이라도 세관의 허가 .. 2023. 7. 31.
마산항지(1926년) - 57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32. 구마산역 개업 축하연 마산선 구마산역의 개업 축하연이 열린 것은 명치 43년(1910)년 7월 1일이었다. 신마산 방면의 관민 저명인사 60여 명에 대해 마산역과 구마산역 사이의 무료승차권을 동봉한 초대장을 발송하고 마산포 방면의 일한 관민 300여 명을 초대했다. 원래 본 역이 낙성한 것은 6월 2일이며 당시에는 마산성지(城址) 유적이 남쪽에 있었기에 이 역을 성남역이라 했는데, 지방 민중들이 구마산을 몰각했다고 주장하여 청원운동을 한 결과 마침내 구마산역이란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구(舊) 자를 트집 잡아 스스로 동마산이라 속칭하는 이도 나왔다고 하니 생각이 진화한 증표가 아닌가 싶다. 축하연은 역사(驛舍)와 동성교(東城橋) 사이에서 열렸으며 일한(日韓) 예기들의 춤과 일본.. 2023. 7. 24.
마산항지(1926년) - 56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31. 마산포의 시구(市區) 개정 문제 전항에서 서술한 대로 백병전으로 치러진 선거전이라 그 당선의원으로 구성된 민회는 초장부터 평화적이지는 못했다.왜냐하면 마산포의 시구개정이란 중차대한 문제가 회의장의 쟁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마산포 의원과 그렇지 않은 의원 간에는 도저히 일치된 보조를 취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원래 마산포의 가로는 명치 40년(1907) 중 당시의 경찰서장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 경부가 그 간선도로라 해야 할 한 부분에 대해 창원부윤과 협상해 좁은 길을 조금만 확장해 그 구부러진 데가 심한 곳은 임의로 집을 헐고 기부케 하고 길가에 작은 도랑을 판 정도로 노폭은 2칸 내외 밖에 되지 않았다. 후임 서장인 미야가와 다케유키(宮川武行) 경시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 2023. 7. 17.
마산항지(1926년) - 55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30. 경쟁이 격심의 극에 달한 민회의원 선거 명치 43년(1910) 3월 1일, 민회의원 제3회 선거회는 민단사무소에서 열렸다. 그때의 마산의 동포 세대수와 인구는 진해(鎭海) 경영 진척에 따라 크게 증가하여 2,300호에 6,799명이었기 때문에 종래 12명 정원이던 의원 수는 16명으로 증원되어 신마산, 마산포 각 8명의 후보자를 공인하도록 타협이 성립되었는데 신마산에서는 중앙부와 합쳐서 입후보한 사람이 서로 양보를 하지 않아 그 결과,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메카다 헤이사부로(目加田平三郞), 오키타 토시타로(沖田敏太郞),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 미야케 요시로(三宅吉郞),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 사토 토요스케(佐藤豊介), 마츠모토 다조(松本多藏), 무라카이 다케지로(村上竹次郞), 하.. 2023. 7. 10.
마산항지(1926년) - 54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27. 진해만요새포병 마산 이전 명치 41년(1908) 봄 즈음부터 공사가 시작된 유현산(杻峴山) 아래 일본전관거류지 내의 일부에는 각종의 건축물이 차례차례 준공되고 광대한 연병장과 사격장도 완성되어 진해만요새포병대대는 사령부와 함께 가덕도에서 이전해 왔으며 그 전영식(轉營式)이 거행된 것은 명치 42년(1909) 9월 9일이었다. 이날 마산의 관민은 하사관 이하 병사들을 공원 사쿠라오카(櫻岡)에 초대해 환영회를 개최하였고 다음 날 10일에는 대대에서 마산의 저명인사 60여 명과 진해방비대 미야오카(宮岡) 사령관 이하 장교를 영내로 초대해 엄죽한 전영식을 거행하고 각종의 여흥 등이 있어서 성황을 이루었다. 28. 치바마을 어업감독 피살되다 율구미에 있는 치바마을(千葉村) 어업감독이며 치바 현 수산기사인 .. 2023. 7. 3.
마산항지(1926년) - 53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26. 마산신사의 창건 마산 전체 항구의 우부스나가미(産土神, 조상신)으로 한 신령한 사당을 건립하자는 이야기는 혼마치의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씨에 의해 자주 제창되었던 바이고 또한 무형단체이긴 하나 마산경제회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었는데, 솔선해서 그 임무를 맡아보려는 이가 없었다. 히로시 씨가 거류지 각 동네의 중심 되는 유지 27명을 요정 모치즈키(望月)에 모이도록 하여 신사 창건이 급선무하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해외거류민으로서 조묘(祖廟) 애호의 생각을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정신으로 함양하기 위해 우선 신조(神祖)의 영사(靈祠)를 숭배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모인 이들이 다 고대했던 일이라 마음속으로부터 찬의를 표방했다. 다음 날 두세 명이 이 문제를 두고 이사청을 방문하니 미마스 이사관도.. 2023. 6. 26.
마산항지(1926년) - 52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23. 마산병원의 이전 도쿠나가(德永) 의학사가 경영하는 사립 마산병원은 시세의 변화상 변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없게 되어 명치 41년(1908) 9월 현재의 미야코마치(都町)에 있는 철도용지 내의 빈 관사 4동을 빌려 이전하였다. 75평의 본원을 신축하고 빌린 3개 동 12실을 병실로 충당하고 한 동은 의원용 주거로 하였다. 마산부는 대정 11년(1922)도에 그 원형을 차권(借權)과 함께 3만 원에 매수하여 이것을 관립 마산자혜의원으로 하여 기부했다.(옮긴이 주 ; 이 자혜의원이 현재의 도립마산의료원 전신이다. 아래 사진은 1927년에 건축한 도립마산병원) 당시 입버릇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당국자와 공직자 등을 가리켜 토오리마치(通町)에 있는 한산하고 넓은 땅인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 공사의 사저.. 2023. 6. 19.
마산항지(1926년) - 51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21. 마산이사청의 신축 낙성 금년(1908년) 5월 이래 공사가 개시된 마산이사청 청사는 구청사 위의 언덕에 새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여 11월 3일 천장절(天長節)을 길일로 보고 진해만에 있는 해육군 장교 및 마산의 저명한 관민 백여 명을 새로 꾸민 청사에 초대하여 장엄한 낙성식을 거행하고 축하연을 열어 마산 각 요정 예기들의 춤과 접대로 아주 성황리에 끝났다. 당시 저자는 도쿄의 생가에 귀성 중이라 이 모임에 참가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구청사는 그다음 봄에 부산지방법원 마산지부 및 마산구재판소의 청사로 보관, 전환되었다. 상석판사인 이우라 요시히사(井浦義久), 검사 신도 간사부로(新藤寬三郞), 두 관리가 부임해 개청과 함께 사법권의 획득을 축하하기 위해 저명한 관민 70여 명을 초대해.. 2023. 6. 12.
마산항지(1926년) - 50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19. 마산신보(馬山新報)의 발행 마산의 관민유지는 마산의 기관신문을 발행코자 기획했다. 그 자금은 한 번에 걸어내는 계(契) 방식을 채용해 50원을 한 구좌로 하여 그 반과 4분의 1의 금액을 한도로 해 모집을 했더니 미마스 구메기치(三增久米吉),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메카다 헤이사부로(目加田平三郞), 니시카와 다로이치(西川太郞一) 다섯 사람이 각 4구좌 2백 원씩을 필두로 총 응모액이 3천 2백여 원이 되었다. 게다가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씨는 인쇄기 및 활자 기타 일체를 제공하였다. 도리코시 엔지로(鳥越圓次郞) 씨를 발행인 겸 편집주간으로 하고 저자를 사우(社友)로 하여 마산신보 제1호가 발행된 것이 실은 명치 41년(1908) 10월 1일이었다. 사옥은 현재.. 2023. 6. 5.
마산항지(1926년) - 49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17. 마산상업회의소의 성립 마산상업회의소는 마산실업계의 유지 다나카 손(田中遜, dkfo tkwls) 씨 외 29명의 발기로 명치41년(1908) 5월 29일 설립 인가를 얻어 5월 30일에 성립하게 되었다. 신마산과 마산포에서 각각 10명씩의 의원을 선거하고 서기장으로 다니가키 가이치(谷垣嘉市) 씨를 목포에서 영입해 왔다. 그 석차는 아래와 같으며 씨명 뒤의 괄호는 신마산과 마산포를 알기 쉽게 한 기호다. 1번 회계심사 다나카 손 (田中遜) 신 2번 히사에 간사쿠 (久重勘作) 포 3번 자격심사 히로시 세이조 (弘淸三) 신 4번 실업조사 메카다 헤이사부로 (目加田平三郞) 신 5번 야마모토 고조 (山本好藏) 포 6번 실업조사 다나하시 센노스케 (棚橋仙之助) 포 7번 부회두 마츠바라 하야조 (松原早藏) 포.. 2023. 5. 29.
마산항지(1926년) - 48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15. 군용지와 철도용지를 빌려 씀 거류민단은 예산의 태반을 차지하는 교육비의 재원에 관해 큰 관심을 가져왔는데 마산의 중간에 가로놓인 광대한 철도용지(아래 그림) 및 그 북쪽의 논밭 사이에 있는 군용지를 대부받아 이것을 희망자에게 전대(轉貸)하여 그 임대료와 대부비용의 차액으로 교육비 보총의 기초로 삼으며 아울러 호별(戶別) 부과금의 일부를 완화하려고 기획했다. 미마스 이사관의 원조 아래 당국에 운동하여 허가를 얻어 명치 41년(1908) 5월 13일 민회를 열어 전대지 협상위원의 선거를 실시해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시게무라 우이치(重村宇一), 모리야마 이치로(森山亥次郞), 다나카 츠루마츠(田中鶴松), 야마모토 고조(山本好藏)의 다섯 사람이 당선되었다. 다섯 위원은 곧 민단 직원을 참가시켜 도로에 .. 2023. 5. 22.
마산항지(1926년) - 47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14. 개항 10년 기념 축하회 마산 거류민단은 제도 실시 이래 겨우 일 년 반 정도가 지났을 뿐, 소햑교 신축 이외에는 별로 특기할 만한 사업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간 착실히 정비를 가다듬어 여유를 가지게 되어, 명치 41년(1908) 5월 1일에 성대한 개항 10주년 기념축하회를 개최하였다. 이보다 앞서 마에다 민장이 지명한 준비위원 10명은 전체 항구를 세 지역으로 나누었다. 오타니천(大谷川) 이남 치바마을까지는 남조(南組), 이동(以東) 지역 장군천까지를 중조(中組), 장군천 동쪽을 동조(東組)로 한 것이다. 각조에는 사무소를 마련하여 조마다 십수 명의 위원을 뽑아 기부, 장식, 취향이란 세 부문으로 나누고 서로 취향, 장식 등 기타에 빠짐이 없도록 노력하고 전심, 전념토록 하였다. 4월 27.. 2023. 5. 1.
마산항지(1926년) - 46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12. 신구(新舊) 마산의 공칭 명치 40년(1907) 말부터 거류지 사람 중에 마산포를 가리켜 구마산(舊馬山)이라고 부르는 이가 있었는데 거류지에 동네 이름을 붙이고 난 뒤에는 거류지인은 공공연히 스스로 거류지를 신마산(新馬山)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명칭은 한국의 전도(全道)에서 거의 반공칭(半公稱)으로 되어 버렸는데 최근에 와서 마산포 방면에 사는 사람은 ‘구(舊)’자를 갖다 붙이게 되니 참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흔히들 이곳을 마산포가 부르는 사람이 있으며 저자도 ‘구’자를 사용하기보다는 의연히 이곳을 마산포라 하는 것에 흥취를 느껴 이 책에서도 모두 마산포로 표기하기로 했다. 따라서 그 중간의 거류지 경계인 신월천 이동(以東)부터 장군천을 지나 마산포의 입구인 척산교(尺山橋)에 이르는 철도.. 2023. 4. 24.
마산항지(1926년) - 45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10. 요새포병(要塞砲兵)의 임시 위수(衛戍) 명치 40년(1907) 즉 광무 11년 7월 21일 이척(李拓) 왕(王) 군방(君邦, 순종 황제의 자(字))폐하는 전 이재황(李載晃) 왕(王) 광무황제의 선양(禪讓)을 받아 제위에 올라가고 8월 3일 융희(隆熙)라고 개원하여 윤 씨 비를 황후로 진봉하고 아우인 은(垠) 왕 영친왕을 활태자로 삼았다. 이와 동시에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이 이루어져 한국통감의 권한은 확장되고, 통감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부통감에 소네 아라스케(曾根荒助), 총무장관에 츠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 외 기타 참여관 2명 외에도 한국 내각 및 각 관아에 차관으로 모두 일본인을 추천하고 경무고문부 및 이사청 경무관 1천여 명을 한국의 관직에 옮기고 재류(在留) 일본인에 대한 경찰.. 2023. 4. 17.
마산항지(1926년) - 44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8. 소학교 낙성식 본교 위치는 현재의 위치 즉 민단구역의 중앙에 있는 철도용지의 일부, 면적 약 2천5백 평을 무산으로 대여 받아 건축기사 노지마 다네조(野島種造) 씨와 금 2만9천512원 49전으로 청부계약을 맺어 전년 6월 27일에 기공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6천여 원은 지방유지의 기부, 나머지 2만원은 민단이 빌린 것이다. 원래 본교는 취학아동 5백 명을 수용할 예정으로 건축시킨 것인데, 준공한 건물(아래 그림)은 교사 기타를 포함하여 384평 정도가 되지 않는데도, 당시 등교 아동은 남자 160명, 여자 186명 합계 346명에 불과하여 아주 여주가 있었던 것이다. 건물이 다 된 것은 1월 21일로, 노지마 씨는 이 공사로 7~8천 원의 손실을 보아 다시는 공사를 맡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 2023. 4. 10.
마산항지(1926년) - 43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5. 승마(乘馬) 합방호(合邦號)의 권위 번역관 겸 경시(警視)로서 한국의 내부(內部)로 발령 받은 사카이 마산경찰서장의 후임으로 명치 41년(1908) 1월 15일, 전남 광주에서 미야가와 다케유키(宮川武行) 경시가 왔다. 그가 타는 아라비아 종 애마 ‘합방호’는 아주 크게 생겼기 때문에 조랑말(果下馬)에 익숙한 한인들을 놀라게 했으며 그 말을 보고 귀마(鬼馬)라 하며, 일본 말이 이 정도로 큰다면 일본 소는 더 클 것이라고들 하였다. 씨는 도오야마 미츠루(頭山滿) 옹의 양자이며 현양사(玄洋社) 출신의 경부로 내무성 경관연습소에 들어가 졸업 후 경시가 되어 대만 가의현(嘉義縣) 서기관으로 부임했다가 그 직에서 풀려 한국통감부로 내임한 평민주의를 가진 독신자이다. 아주 많이 한국 사적 탐사에 취미를 가지.. 2023. 4. 3.
마산항지(1926년) - 42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3. 소학교의 이전 융희 원년 즉 명치 40년(1907) 1월 민회는 만장일치로 아동 5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소학교 교사와 그 부속건물의 신축을 의결했다. 바로 기부금 모집, 실행, 최계 담당 세 위원을 구성해 마산철도용지의 한 지역을 무상으로 빌려 일체의 설계를 통감부 철도관리국 마산임시건설부장으로 있던 오츠카 조사부로(大塚常三郞) 기사에게 맡겼다. 이해 10월 임시건설부가 철폐되어 약 60여 명의 직원들은 인천과 초량으로 이동했다. 마산소학교는 바로 그 터를 빌려 민단사무소와 함께 이전하게 되었다. 이 건물(위 사진)은 과거에 한국인을 놀라게 한 마산우편국 이상의 굉장하고 훌륭한 서양식 건물이라 마산건축계에서 그 위용과 풍채를 뽐냈다. 우편국 건물은 명치 41년 초여름에 해체되어 용산으로 이축되었.. 2023. 3. 27.
마산항지(1926년) - 41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1. 거류민단의 조직 우리 거류민회가 마산이사청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이사관을 감독관으로 거류민단제를 시행한 것은 광무 10년 즉 명치 39년(1906) 9월 1일이었다. 이보다 앞서 일본정부가 경성에 한국통감부를 두게 되자 각지에 있는 영사관을 폐지하여 이사청을 두고 재근 영사를 바로 이사관으로 임명했다. 이때 내외의 교섭에 기민하게 대처하고 평민주의의 원활함이 너무 좋다는 평을 들어온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 영사는 경성이사청 이사관으로 전보되어 이해 2월에 부임하러 떠났다. 경성 영사였던 미마스 구메키치 씨가 그 후임으로 마산 이사청 이사관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씨는 삿포로농대 출신의 농학사로 미국공사관 서기관부터 구미 각지의 영사를 역임한 관권 만능.. 2023. 3. 20.
마산항지(1926년) - 40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17. 마산포의 대화재 광무 9년 즉 명치 38년(1905) 1월 5일 새벽, 마산포의 한 한인 집에서 불이나 때마침 차고 거센 바람이 불어와 부근 40채의 일, 청, 한인 집들이 연소되었다. 소방기계가 하나도 구비되지 않은데다가 동지(冬至) 후인지라 물조차 적을 때라 한인들은 아이고 비명을 지르며 바가지에 물을 길러 붓는 등 불길을 막으려 대혼잡이 벌어졌다. 이것이 마산포 최초의 대화재로 불리며 불 난 곳은 현재의 모토마치(元町)이며 구마산금융조합 서쪽 이웃으로 생각되나 소실 구역은 거기보다 동쪽 현재의 고토부키마치(壽町) 까지 퍼졌던 것이다. 필자가 대정 11년(1922) 6월 22일 오후 2시 반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조선인 신용균(申容均)의 집 온돌에서 불이 나 우리 집에도 불이.. 2023. 3. 13.
마산항지(1926년) - 39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16. 군사철도의 개방 군사철도 마산선이 개통됐을 당시에는 마산, 삼랑진 간에는 오직 창원과 진영의 두 개 역밖에 없었는데 러일의 평화가 회복되고 군사전용이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이해 11월 1일부터 민간에 개방되어 일반 공중이 자유로이 탈 수 있게 되니 이주자는 확연히 격증하였고 다음 해 광무 10년 즉 명치 39년(1906) 봄부터 거류지, 마산포 및 그 중앙부 다 같이 건축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인의 여관은 빈방이 있는 데가 없고 한인의 여인숙에도 좁은 온돌방에 모국의 동포가 네댓 명이 합숙하는 등 정도의 서광을 엿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다음은 그해 6월 하순에 적어놓았던 필자(아래 사진)의 메모 몇 절을 발췌해서 수록하니 최고 자료로 삼았으면 한다. 나는 처가 있을.. 2023. 3. 6.
마산항지(1926년) - 38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15. 우쿠무라(奧村) 여사의 연설에 미우라(三浦) 영사가 화를 냄 철도감부 마산반은 이 당시 가청사를 마산역 구내에 신축하고 이사하여 본래 터에는 본파 본원사(本派本願寺) 포교장이 개설되었는데, 애국부인회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 아래 사진) 여사가 남만주에 출정한 황군을 위문한 후 한국에 들어 우리 마산에서 유세를 하고자 이 포교장에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그 연설의 한 마디에 우리 여순 공격군의 참상을 이야기하며 여러분들은 아들을 가졌어도 변사로 보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라 했다. 방청석에서 듣던 미우라 영사가 그 실언에 크게 냉소하는 것을 본 여사는 바로 화를 내며 무례한 짓을 꾸짖었다. 또 한 부인이 갓난애를 업고 방청석에 있었는데 그 애가 울기 시작하자 상식이 없다고.. 2023. 2. 27.
마산항지(1926년) - 37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13. 축첩회(祝捷會)와 철도개통식 해전 대첩 축하회는 6월 1일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마산 철도선의 공사가 거의 완료되어 6일에 거행할 개통식과 합동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어 미우라 영사는 이를 수락하고 회장을 현재의 교마치 3정목 네거리에 있는, 당시의 빈터 풀밭에서 하기로 하고 그 중앙에 좌석 배치를 겸한 여흥 무대로 만들었다. 혼마치에서 들어오는 정문에는 대국기를 교차시켜 게양하고, 거기서 혼마치로를 종관해서 매축 미완성지를 비스듬히 가서 오직 흙바닥 상태인 마산역에 이르는 도로변 양쪽에 등과 깃발을 같이 걸어 놓았다. 개회는 오후 2시로, 미우라 영사는 러일전쟁 개전의 경위를 간단히 얘기하는 식사를 마치고 양 폐하의 만세를 삼창하였고, 도키오 반장은 마산철도의 기공과 결.. 2023. 2. 20.
마산항지(1926년) - 36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12. 천동같이 진동한 쓰시마 앞바다 해전 개전 이래 이희일우(一喜一憂)하며 그 결과를 걱정했던 마산의 동포들은 당시 생활해갈 길이 막막해 떠나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철도공사 개시 후로 철도감부 마산반의 사무소는 마산우편국의 맞은편 해안으로 내려가는데 있는 러시아인 소유의 빈집에 설치되어 감부원 수십 명이 근무하게 되어 이에 수반하는 다수의 인부가 출입함으로써 시장 상황이 크게 회복되었다. 특히 요정, 음식점 등에는 짙게 화장한 매춘부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전황은 매번 우리 황군의 연승을 보도하였고, 러시아가 난공불락이라 자랑하던 여순 요새도 마침내 함락되었다 한다. 광무 9년 즉 명치 38년(1905) 1월 1일 수비대장 스텟셀(1848~1915, 러시아제국 육군 중장. 1904년.. 2023. 2. 13.
마산항지(1926년) - 35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10. 군용철도 마산선의 건설 명치 37년(1904) 8월 31일 우리 영사관에 갑자기 ‘철도대 내일 귀지에 간다’라는 내용의, 발신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전보가 배달되었다. 그때는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 씨가 사카타 영사 대신 마산 주재 영사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영사관에서는 이 전보가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르고 아주 의아해 했다. 과연 9월 1일 아침에 몇 척의 운송선이 인천 철도감부(鐵道監部)의 마산 반장인 도키오 젠사부로(時尾善三郞) 중좌, 지바(千葉) 대위 등을 태우고 철도재료, 측량기 등을 운반하며 많은 인부들과 함께 상륙했다. 이것은 8월 21일의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경부선 삼랑진에서 분기해 마산에 이르는 일본육군 군사전용철도 속성공사의 착수임이 처음으로.. 2023. 2. 6.
마산항지(1926년) - 34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8. 러일의 국교단절 러일간의 기압이 갑자기 내려가 국교가 단절된 것은 명치 37년(1904) 2월 10일, 청황의 선전포고 때부터다. 이에 앞서 오사카상선회사의 시라카와마루(白川丸)는 한국 동남연안의 정기선으로 어느 날 마산에 입항한 그 배에 한 외국인이 타고 있었는데, 중국 산동성 지부(芝罘)에 가서 일본함대의 주력이 마산포의 전면인 진해만을 점거하고 있음을 전보로 알렸고 이것이 외국 신문에 게재되어 우리 해군은 크게 놀랐다. 곧바로 각 선박의 진해만 출입을 금지하여 해상 경계는 아주 엄격해지고 실리도와 견내량에는 탐조대를 설치하고 우편기(郵便旗) 깃발을 달고 각 어장을 순항하는 순라선(巡邏船)을 빼고는 어선이라도 빠짐없이 검문토록 했다. 이 바람에 마산거류민은 일상생활품의 공급이 .. 2023. 1. 30.
마산항지(1926년) - 33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5. 일본인 거류민회의 성립 일본인회 이사인 센고쿠 간쿠로(仙石勘九郞) 씨가 고질인 결핵이 악화되어 이사직의 자퇴를 요구해오니 평의회는 이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고 후임 후보자로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 씨를 선태했다. 미야하라 씨가 수임 의사를 표명한 그 평의원회가 개최된 날은 명치 36년(1903) 1월 11일이었다. 그때 센고쿠 이사는 귀신의 호적부에 들어간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동포 입주자는 점점 늘어나 거류지, 중앙부, 마산포를 통털어 100호, 200여 명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의원회는 일본인회 회규가 협소하고 동포 통일의 불편을 느껴 이 조직을 일본인거류민회(日本人居留民會)로, 이사를 거류민회 민장(民長)으로 고치고 주민 호구장부의 조제 및 기타.. 2023. 1. 23.
마산항지(1926년) - 32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3. 각국거류지의 첫 장날(初市) 명치 35년(1902) 8월 3일은 음역 6월 30일에 해당되니 거류지의 첫 장날임을 각지에 선전하며 시장터를 마산영사관에서 아래로 내려온 현재의 혼마치 네거리 주변 일대로 정했다. 선전 노력의 효과가 났는지 지방시장 상인의 출점이 꽤 많았으며 사방 주위의 손님도 상당수가 모이고 동포들은 첫 시장을 경축하려 상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니 그들도 좋아하고 앞으로 더 성대해질 것 같았다. 한편으로 정기장을 잃게 된 구강(舊江) 민중들은 크게 분노하여 이전에 반대하고 그것의 회복에 분주하거나 혹은 감리서에 압박을 넣거나 경성 정부에까지 운동하기도 했다. 또한 시장의 이전으로 재산까지 없어진 자가 나오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새 시장을 연 지 20여 회 즉 .. 2023. 1. 16.